사회진보연대 광주전남지부


사회운동

사회진보연대 계간지


2000.6.6호
첨부파일
06weiv.hwp

Afro-beat Never Stands Still-나이지리아의 대중음악(2)

신현준 | 웹진WEIV편집장
Highlife

서아프리카에서 영국의 식민통치를 받았던 지역의 주도적인 음악장르는 하이라이프(highlife)다. 하이라이프의 원산지는 가나(Ghana)지만 나이지리아를 비롯한 나라들에서도 인기가 높다. 하이라이프의 음악스타일은 20세기 초에 형성되었다는 것이 통설이지만, 음악스타일에 대한 정의는 문헌마다 조금씩 다르다.

한 문헌에는 '서아프리카의 전통댄스리듬과 멜로디에 유럽의 군악, 폴카, 발라드 등이 혼합된 스타일'([Music At The Margin])이라고 표현되어 있고, 다른 문헌에는 '유럽의 폭스트로트(foxtrot)와 카리브해의 카이소(kaiso)가 토착리듬들과 융합된 것'(http://www.africaonline.com/)이라고 표현되어 있다. 또 다른 문헌에는 '아프리칸, 캐러비언, 하와이언 음악의 잡종'(http://www.allmusic.com/)이라고 되어 있다. 다소 차이는 있지만 하이라이프가 서아프리카를 거쳐간 다양한 사람들의 음악문화가 뒤섞인 잡종이라는 사실은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즉, 서아프리카 '원주민' 뿐만 아니라 식민주의자, 항해사, 선교사 등 유럽의 백인, 그리고 아프리카로 돌아온 흑인노예들 모두가 하이라이프의 형성에 기여했다.

하이라이프는 음악스타일을 지칭했을 뿐만 아니라 '좋은 드레스를 입고 모자를 쓰고 클럽의 비싼 입장료를 내는 계층의 생활'을 지칭했다. 또한 1920년경에는 '댄스 밴드 하이라이프(dance band highlife)'와 '기타 밴드 하이라이프(guitar band highlife)'라는 두 개의 잡종을 탄생시켰다. 식민지 시기 '고급생활자'를 위한 음악은 댄스 밴드 하이라이프였다.
ET 멘사(Emmanuel Tettey Mensah)와 그의 밴드 템포스(The Tempos)는 1940년대 후반 댄스 밴드 하이라이프의 전성기를 만든 인물이었다. 댄스 밴드 하이라이프는 색소폰과 브래스기가 지배적인 스타일로, 음악스타일 면에서나 문화적 기능 면에서나 빅 밴드(및 콤보 밴드) 시기의 미국 재즈와 비견될 수 있다. ET 멘사는 하이라이프를 여타의 서아프리카 제국에 전파했을 뿐만 아니라, 1956년 루이 암스트롱과 협연하면서 다른 지역에도 하이라이프를 알렸다.

또한 가나가 사하라사막 이남에서는 처음으로 독립을 쟁취했을 때,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범아프리카주의의 창시자' 엔크루마(Kwame Nkrumah)는 하이라이프를 가나의 문화적 정체성의 상징으로 간주하였고 멘사는 '가나의 음악적 대사'라는 비공식적 칭호를 얻었다. 댄스 밴드 하이라이프는 ET 멘사 외에도 램블러스 인터내셔널(Rambler's International)과 우후루 댄스 밴드(Uhuru Dance Band) 등에 의해 가나의 대도시에서 큰 인기를 누렸다.


Obo Addy & Kukrudu, "Odze"

한편 농촌 지역에서 성장한 기타 밴드 하이라이프는 업비트에 관악기가 들어가는 점은 댄스 밴드 하이라이프와 유사했지만 팜 와인 기타(Palm Wine Guitar)라고 불리는 독특한 기타주법과 사운드를 발전시켰다. 술 이름을 본떠 만든 팜 와인 기타의 독특한 기타 피킹은 서아프리카 지역전체로 파급되었다. 1950년대 EK 니아메(EK Nyame)와 그의 밴드 아칸 트리오(Akan Trio)(참고: 아칸이란 가나의 주요민족 중의 하나다)가 음악과 희극을 결합시킨 '콘서트 파티(concert party)'라는 장르를 발전시키면서 전기를 맞았다. 또 1960년대 후반에는 테디 오세이(Teddy Osei)와 그의 밴드 오시비사(Osibisa)가 '아프로 록'이라고 불릴 만한 스타일을 창조하여 런던 등에서 국제적 히트를 기록하기도 했다(참고: 오시비사라는 이름은 오시비사바라는 가나의 전통 리듬 가운데 하나에서 따온 것이다).

오보 아디(Obo Addy)처럼 가나에서의 경력을 기초로 미국으로 건너가(1977년 시애틀로 이주) 아프리카 음악과 아메리카 음악, 전통적 음악과 현대적 음악을 퓨전하는 뮤지션도 하이라이프를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다. 마지막으로 독일에는 부르거-하이라이프(Burger-highlife)라는 이름으로 독일과 가나 음악이 혼성된 음악 씬도 존재한다.
가나는 그렇다치고 나이지리아에서는? 나이지리아에서 하이라이프가 붐을 일으킨 것은 1951년 ET 멘사가 라이브 공연을 다녀가면서부터라는 게 또하나의 통설이다. ET 멘사와 비슷한 시기에 나이지리아의 하이라이프 스타가 된 바비 벤슨(Bobby Benson)은 나이지리아 음악인 연맹의 초대 회장을 지내기도 했다. 이후에도 하이라이프의 인기는 유지되었지만 1970년대에 접어들면서는 주주(juju)의 위세에 밀리게 된다. 그 이유는 1960년대후반 나이지리아를 휩쓴 내전과 무관치 않다.

도식적으로 말하면 하이라이프는 주로 이보(Ibo)족이 즐기는 음악이었고, 주주는 요루바족이 즐기는 음악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내전은 북부의 하우사-풀라니와 이보 사이에서 발생했지만 '반란군'인 이보족이 패퇴하면서 생긴 하이라이프의 공백을 주주가 메웠던 것이다.


Juju & more...

다른 아프리카의 민속음악과 마찬가지로 요루바족의 음악전통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리듬이다. 각종 북이 만들어내는 요루바족의 댄스리듬은 복잡한 폴리리듬으로 정평이 나 있다. 물론 요루바의 전통 음악스타일이 하나였던 것은 아니다. 주주는 아기그디보(agigdibo), 웨레(were), 아팔라(apala), 사카라(sakara), 와카(waka) 등의 리듬을 통합한 것이다. 지역의 음악이 전국의 음악으로 통합되는 '근대화'과정을 밟았던 것이다.
주주 역시 하이라이프와 비슷한 시기인 19세기말 - 20세기초 무렵 형성되었다는 것이 통설이다. 전통 댄스 리듬에 기타, 밴조, 아코디언, 우쿨렐레 등과 결합된 스타일을 1920년대 바바툰데 킹(Babatunde King)이 주주라는 용어로 불렀다는 기록도 있다. 1930년대 팜 와인 기타가 도입되고 1940년대 토킹 드럼이 추가되면서 주주의 고유한 사운드를 확립했다. 적어도 이 시기에는 주주가 하이라이프보다 상대적으로 토착적이고 따라서 '언더그라운드적'인 음악이었다.

즉, 주주는 '가난한 요루바족(이전에는 주로 농민, 이후에는 주로 노동계급)'의 정서를 반영한 음악이라는 인식이 형성되었다.
주주는 1950년대 이후 현대화되는 단계를 맞이하여, 1970년 내전이 끝날 무렵에는 농촌주민 뿐만 아니라 도시의 노동계급과 빈민을 주요청중으로 확보하면서 나이지리아를 대표하는 장르로 떠올랐다. 그 주역은 '모던 주주의 아버지' I. K. 다이로(Isaiah Kehinde Dairo: 1930년 생)였다. 젊은 시절 도시의 노동자로 전전하던 다이로는 1957년 모닝 스타 오케스트라(The Morning Star Orchestra)를 결성하였고, 뒤에는 블루 스파츠(Blue Spots)로 개칭했다. 블루 스파츠는 1960년 이바단(Ibadan)에서 나이지리아 독립을 기념하는 한 행사에서 연주하여 센세이션을 일으켰고, 1961년에는 이바단의 TV방송국에서 개최한 주주컨테스트에서 다른 밴드를 압도하면서 나이지리아의 주주를 대표하는 밴드로 부상했다.

대표곡 "Omo Lanke"에서 들을 수 있듯 기타와 아코디언으로 시작하여 한 두 절을 노래부른 다음, 퍼커션과 주고받기식의 보컬이 이어지는 형식은 이후 '모던 주주의 원형'이 되었다. 또한 요루바족의 속어와 속담을 사용하고 다양한 방언으로 구술하는 다이로의 보컬은, 주주가 도시와 농촌지역 모두에서 대중화되는 주요한 요소였다.
말하자면 다이로는 주주의 '토착화(indigenization)와 현대화(modernization)를 동시에 이룬 인물'(Christopher Waterman(1990), [Juju, A Social History And Ethnography of an African Popular Music], University Of Chicago Press)이었다. 주주가 국제적으로 전파되면서 다이로는 1963년 영국 정부에 의해 '영국 왕실 멤버(Members of British Empire)'가 되었다.


I.K.Dairo, "Omo Lanke"

1970년 내전이 끝나면서 주주는 킹 서니 아데(King Sunny Ade), 에벤에제르 오베이(Ebenezer Obey), 애드미럴 델레 아비오둔(Admiral Dele Abiodun), 세군 아데왈레(Segun Adewale) 등에 의해 계승되었다. 토킹 드럼, 기타 라인, 주고받기식의 보컬은 여전히 주주의 기본요소였지만 기타는 전기기타로 바뀌었고 페달 스틸 기타와 퍼커션도 도입되었다. 특히 킹 서니 아데와 에벤에제르 오베이는 숙명의 라이벌 관계를 형성하면서 주주의 발전에 기여했다. 가수이자 기타리스트이자 밴드리더인 두 주주 음악인은 더많은 기타, 더많은 페달 스틸 기타, 더많은 보컬코러스, 더많은 연주시간을 도입하면서 경쟁을 벌였다.
킹 서니 아데의 음악은 '록 스타일의 주주'라는 평을 받는다. 이는 1차적으로 보통 6개를 사용하는 기타라인 때문이고, 비교적 복잡하지 않은 드럼패턴 때문이다. 물론 밴드멤버가 보통 10명을 넘어서는 일은 록 스타일과는 거리가 있었지만.

나아가 그는 다이로의 아코디언을 신시사이저로 '업데이트'하고 첨단전자음향도 도입하여 세련된 음색을 만들어 냈다. 킹 서니 아데는 1977년 나이지리아 정부가 유치한 제2회 아프리카 예술축제(FESTAC)를 통해 범(凡)아프리카적 스타가 되었고, 여세를 몰아 1982년에는 아일랜드 레이블과 계약을 맺어 국제적 스타로 발돋움하였다. 아일랜드 레이블은 킹 서니 아데를 '나이지리아의 밥 말리'라고 홍보하면서 영미권의 시장을 노렸다. 그러나 불행히도 아데는 말리만큼은 되지 못했다. 오베이도 '버진(Virgin)' 레이블과 계약을 맺고 몇 장의 앨범을 발표했지만, 성과는 서니 아데보다 조금 못 미쳤다. 1984년 스위스에서 개최된 몽트로 재즈 페스티벌(Montreaux Jazz Festival)에서 수상을 했고 1985년 음반 [Juju Jubilee](1985)가 평단의 호평을 받기도 했지만.


King Sunny Ade, "Synchro System" 그리고 Ebenezer Obey, "Gbebe Mi"

서니 아데는 1995년 [E-Dide-Get Up]을 통해 영미의 음반시장에서 재기를 시도했고, 오베이도 1998년 편집음반 [Juju Jubilation]으로 시장의 관심을 지속시키고 있다. '나이지리언 인베이전'은 열성적인 일군의 음반감상자들을 만들기는 했지만 '자메이칸 인베이전'만큼 성공적이지는 못했다.
1970년대 이후 나이지리아의 국민들에게 사랑받은 장르가 주주만 있는 것은 아니다. 주주만큼 국제화되지는 못했지만 후지(fuji)와 아팔라(apala)라는 장르도 광범한 인기를 누렸다. 푸지나 아팔라는 기타의 역할이 약하고 퍼커션의 역할이 보다 강한데, 이를 위해 아팔라(apala: 아팔라는 본래 리듬을 지칭하는 이름이었다), 사카라(sakara), 와카(waka) 등의 전통리듬을 융합시켰다. 푸지 역시 요루바족의 음악인데 주주와는 달리, 기독교가 아니라 모슬렘 문화에 뿌리를 두고 있다. 닥터 알하지 시키루 아인데 배리스터(Dr. Alhadji Sikiru Ayinde Barrister)는 1970년대 이래 푸지의 수퍼스타로 군림하고 있는데 '푸지(Fuji)'라는 일본식이름을 떠올린 것도 배리스터다. 이런 작명은 엉뚱하게도 저팬(Japan)의 "Mountain Of Love"를 들은 직후였다고 한다. 그곳은 자국의 음악을 '국악', '가요'같은 보편적 이름으로 부르는 문화는 없는 모양이다.

하이라이프든, 주주든, 푸지든 여기서 나이지리아의 음악인들이 활동하는 환경을 고려하면서 개괄을 마쳐보자. 나이지리아의 음반시장 규모는 아프리카에서 남아프리카 공화국 다음으로 크다. 개발도상국답게, 공식통계는 없지만 한 해 약 2-3천여 종의 음반이 발매되고 있다는 추정통계가 있다. 또한 유럽에 지배받았던 역사로 인해 음반산업 역시 유럽에 본사를 둔 폴리그램과 EMI 두 메이저 음반사가 시장을 양분해 왔고, 매출액의 60%는 '외국'에서 제작된 레코드이다. 음악취향의 '국제화' 혹은 '대외의존'도 일정한 수준에 올라있다는 뜻이다. 자연스럽게 미국의 흑인대중음악이 가장 인기가 높다.

크고 다양한 음반 시장을 가진 반면, 음악인의 환경은 거의 최악의 수준이다. 이유는 다름 아니라 혼미하기 그지없는 정치상황 때문이다. 어떤 음악인이 한 정권의 사랑을 받다가 불시에 정권이 바뀌면 '부역'에 대한 대가로, 음악인으로서의 운명이 끝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독재정권답게 국제적으로 이름을 알린 음악인에 대해 상이나 훈장을 수여하는 일도 많았는데, 음악인들은 여기에 협력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눈치를 보아야만 했다.
역으로 말하면, 이는 독재정권조차도 중요성을 인정할 정도로 나이지리아 국민에게 대중음악이 중요하다는 말이 된다. 한편으로는 종교적 색채가 강한 전통적 공동체가 많이 남아있다는 점도 중요한 작용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영국의 '간접지배' 동안 정당, 언론, 노동조합, 각종 협회 등 근대적 제도가 발달했다는 점도 크게 작용했다. 전통적 공동체와 근대적 제도들 모두에서 대중음악은 중요한 요소였고 군사정부의 살벌한 탄압에도 불구하고 이들을 말살할 수는 없었다.

여기서 전통적 공동체와 근대적 제도의 외양을 갖춘 '칼라쿠타 공화국(Kalakuta Republic)'이라는 이상한 곳을 찾아가 보자. 이곳은 레코딩스튜디오와 리허설공간을 겸한 곳이고 슈라인(Shrine)이라는 라이브클럽도 있다. 이곳의 주인은 대마초를 공공연히 물고 다니고, 팬츠 차림으로 거리를 활보하고, 27명의 여인과 합동결혼식을 올린 장본인이다. 그리고 그는 어떠한 군사정부와도 타협하지 않으면서 자신의 왕국을 가꿔 왔다. 그가 바로 펠라다(다음 호에 이어집니다. 시리즈 중 (1)나이지리아의 대중음악 끝)
주제어
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