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광주전남지부


사회운동

사회진보연대 계간지


2000.8-9.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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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사를 테러하자!

고지훈 | 서울대국사학과 박사과정
언론자유, 새로운 상황?

고엽제 문제를 최초로 제기하면서 월남참전 군인들을 흡족하게 했던 한겨레 신문사가, 이 참전용사들에 의해 점거되어 난장판이 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또 PD수첩에 흥분한 한 교회 신도들에 의해 MBC가 점거되어 방송이 중단되는 초유의 사태가 일어나기도 하고. 우리 사회의 언론자유 정도를 되돌아보게 한다는 이 부끄러운 사실들은 그러나 그렇게 비관적인 징후만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우리 역사상 가장 폭넓은 언론의 자유가 허용되었던 해방 직후의 상황이 지금과 꼭 같았으니까 말이다.


새로이 되돌아 보는 언론의 자유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신문은 한성순보라고 알려져 있다. 그게 1883년이니까 우리의 신문역사는 길어야 120년 정도 된다고 하겠다. 하지만 그나마 일제의 한국병합으로 언론자유란 말이 그 싹을 피우기도 전에 시들고 말았다. 포악한 식민치하와 다를 바 없었던 이승만, 박정희, 그리고 전두환의 시대에서도 언론자유는 내놓고 말하기 민망한 말일 수밖에 없었다. 1987년 민주화투쟁으로 시작된 자유주의적 개혁은 약간의 언론자유를 맛보게 해주었는데, 어떤 이들은 이를 너무 과도하게 해석하기도 한다.

"우리 역사상 이처럼 많은 언론자유를 만끽해 본적은 없는 거 아이가?"(김 모 전대통령)

역시 무식하면 용감해지나 보다. 인간은 간사해서 항상 현재가 과거보다 낫다고 생각하는 경향도 있지만, 또 과거는 언제나 현재보다 나았다고 생각하는 퇴행적 인간들도 없지 않다. 하긴 조선일보에 대해 노골적으로 불만을 털어놓는 정부당국자나, 정부에 대해 과감히 개겼던 중앙일보, 족벌언론들과 힘겹게 맞짱을 뜨고 있는 한겨레를 보거나, 또 종류를 알 수 없을만치 늘어나버린 타블로이드판 신문들의 출현을 본다면 확실히 언론자유는 유사이래 가장 확대되어 있는 것 같기도 하다. 그리고 이 언론자유의 추이는 4.19라는 역사적 해프닝(?)을 제외한다면 지속적으로 신장되어 오고 있다는 것이 또 정설인 것 같고.

하지만 필자 같은 일반인들은 언론자유란 단어가 주는 절박성에 대해서 그다지 절감하지 못한다. 좀 과격하게 말하자면 오랜 기간동안 단일한 여론, 국론의 통일이 국가경쟁력의 절대적인 전제라고 믿었던 기성세대들에게, 정부시책과 일치하지 않는 언론의 존재나 언론기관 사이의 쟁투는 오히려 혼란스럽기까지 할 것이다. 어떤 신문의 광고카피는 '다른 신문과 같은 내용이라면 과감하게 하루 쉬겠습니다'라면서 우리의 혼란(!)을 부추기고 있지 않은가? 정부와 언론의 마찰, 언론사의 내부 분열, 시민사회와 언론의 마찰이라는 새로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광복 후의 언론천국-미 군정기

미래는 예측할 수도 또 계획할 수도 없다는 확신은 더 광활하고 생명력이 있는 미래로 나아가기 위해서 '개인의 자유'를 불가침의 진리로 만들어 놓는 논리적인 토대이자 정당성의 근거가 된다. 어떤 것이 가장 최선인지를 판단하기 위해서, 그리고 그것을 선택할 수 있기 위해서는 최악의 것조차 허용되어야 한다는 것은 자유주의자들의 오랜 주장이었다. 이러한 주장의 이면에는 물론 좋은 것이 나쁜 것을 물리칠 것이라는 확신과(슘페터의 말에는 잠시 귀를 막아두자), 최선의 것과 최악의 것을 판별해 낼 수 있는 인간 이성에 대한 믿음이 놓여있다. 무엇이든 선택할 수 있는 것은 까놓고 말하자면 아이큐에 달려 있다고 바꾸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종종, 돌연변이 혹은 영양불균형으로 인해 이러한 정상적인 이성을 갖지 못한 인간들이 존재할 수 있고, 그들의 수가 많아지면 그 사회도 평균적인 집단 이성을 갖지 못한다고 판단할지 모른다.

그래서 우리의 위대한 위정자들은 평균적인 이성이 아직 미약하단 이유로 오랫동안 표현의 자유를 억압해 왔다. 누구나 다 짐작하는 스토리이다. 박정희, 전두환 대표적인 軍政의 우두머리들로 인해 우리는 민간정부(한때는 문민정부라고 불리우기도 했음)와 대립되는 개념으로서 군정을 자유주의적 개혁의 적으로 이해했었다. 그래서 군정의 종식은 곧 자유주의적 개혁의 시발이라고 믿었고, 그래서 1987년의 유력한 구호 가운데 하나가 바로 '군정의 종식'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아이러니컬하게도 남한의 언론 백년사에서 언론(표현)의 자유를 가장 먼저 들고 나왔던 것은, 바로 최초의 군사정부였던 해방 이후의 주한미군정청이었다. 사전검열을 거치지 않는 진정한 언론의 자유가 개시되었던 것이다. 아직 사회체제의 이데올로기적 지향이 결정되지 않았던 시점이기 때문에 '반체제 언론'이란 존재론적으로 증명불가능한 시대였다. 공산당의 기관지가 최초로 허용되었던 시기였던 것이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항복으로 인해 38선 이하의 한국을 통치하게 된 미국은 군사점령의 주요한 목표 가운데 하나로 '4대 자유의 보장'을 포함시켰다. 4대 자유란 언론, 출판, 집회, 사상의 자유를 말한다. 물론 결사의 권리와 정치활동의 자유도 보장되었다. 미국인들에게 표현의 자유란 거의 절대적인 가치로 받아들여진다. 권리장전(Bill of Rights)에 포함된 수정헌법 제1조가 바로 이 절대적인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 표현의 자유가 언제나 역사의 수레바퀴를 앞으로만 돌리는 것은 아니었다. 독립된 임시정부를 구성할 수 있었던 가장 유력한 기회였던 미소공동위원회는 '신탁통치 결사반대'를 주장하던 우익을 협상 대상에 포함시켜야 한다는 미국의 고집으로 결렬되었고, 이때 미국이 들고 나온 핑계도 바로 '의사표현의 자유'였다.


해방이후 언론의 중심: 사회주의, 사회주의 언론

어쨌건 국가권력이 이처럼 자유주의적 기본권을 언급, 보장했던 것은 그때까지는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군사정부=억압적 국가권력'이란 등식에 익숙해 있는 지금 현재의 우리들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것이지만, 당시의 남한 주민들에게는 그리 충격적이지는 않았으며 오히려 당연한 조치였다. 해방은 그런 것이니까. 해방이란 박탈당했던 것을 되돌려 주는 것이고, 박탈당한 것은 아니지만 당연히 누려야 할 제반 권리들을 새롭게 창출하는 것이어야 했으니까.

그래서 역사상 단 한번도 제대로 누려보지(혹은 알지조차!) 못했던 자유주의적 기본권들을 보유하게 되었다는 것은 엄연한 역사적 진보였다. 지금도 미국인들은 스스로를 진보적인 국민이라고 믿고 있겠지만, 1945년 당시 미국은 '자타가 인정'하는 진보적 국가로 이해되었다. 이는 재건된 조선공산당의 당면 지침에서도 확인되는 점이었다. 역사상 가장 치졸한 동맹이었던 추축국(독, 일, 이)에 대항해서 연합국 일원이 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진보적인 국가임을 충분히 자임할 수 있던 때였으니까. 어쨌건 이 진보의 전도사 역할을 자임한 미국은 남한에 진주하면서부터 용감하게도 정치활동의 자유와 사상-언론의 자유와 같은 '평균 이상의 집합적 이성'의 존재를 필요로 하는 자유주의적 개혁을 감행하였다.

그리고는 지금 현재와 비교하더라도 상대가 되지 못할 '과분할' 정도로 광활한 자유의 공간을 창출하였다. 이 자유로운 공간을 메운 것은 바로 식민통치 기간동안 억제되었던 좌익과 노동자, 농민이라는 이름표를 달고 나온 거침없는 민중들이었다. 그들이 이 자유로운 공간 속에서 표출했던 것은 미국으로서는 '최악의 것'이라고 부를만한 사회주의적 사회개혁의 요구였다. 일제시대 동안 억압되었던 좌익의 정치활동이 재개되어 조선공산당이 재건되고, 무수한 해외 독립운동세력이 귀국하였다. 이들은 제각기 정당을 조직하였고, 자신들의 주장을 합법화시킬 신문과 잡지를 발행하였다. 소위 '시민사회의 폭발'이라고 할만한 것이었다.

획일적인, 균질적인 사회의 대명사였던 파시즘체제를 대체할 대안으로서의 신사회는 다층적이고, 비균질적인 다원적 사회임이 분명해 보였다. 그리고 그러한 사회의 경쟁력은 이미 미국 자신의 역사적 경험으로 보아 분명한 것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주저없이 그러한 원칙을 신생 독립국을 지향하던 남한에도 적용시키고자 했음이 틀림없다. 그러나 그들이 간과한 것이 있었으니 바로 뉴튼 역학의 제2법칙이었다. 움츠려진 스프링은 움츠려진 힘만큼 반작용을 하기 마련. 억눌린 만큼 튀어나오려는 힘은 예상외로 강하였고, 시민사회의 자유는 남한을 급속하게 좌경화시키게 되었던 것이다.

당시 발행되던 대표적인 좌익신문이었던 해방일보(조공의 기관지, 1946년 5월 발행정지), 조선인민보(인공의 기관지, 1946년 9월 정간)는 사회주의의 전도사 역할을 하였다. 언론자유의 기준을 좌익언론의 허용정도로만 판단할 수 있는 것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이 기준으로 본다면 남한에서 언론자유의 지수는 상한가를 칠 수 있었다. 그리고 당시의 최고가는 지금까지도 그 기록이 깨지지 않고 있는데, 여기까지가 1차 미소공위가 결렬되는 시점인 1946년 6월경의 이야기이다.

당시 누군가가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라는 제목의 책을 썼다면 십중팔구 그것은 우익인사일 것이다. 극동에서 공산주의의 확장을 저지할 반공보루를 확보해야만 했던 미국에게 남한 사회의 급격한 좌경화는 2차대전 이후의 극동전략이 실패했음을 의미한다. 구체적으로는 점령 초기 미국이 시험했던 남한에서의 자유주의적 개혁의 실패를 뜻하는 것이고.


1946년 이후 축소되는 언론자유-사회주의 언론 죽이기

1차 미소공위가 결렬된 이후, 즉 미국의 자유주의적 점령정책이 실패로 돌아간 후 주한미군정은 파시즘에 필적할 만한 사회통제정책으로 방향을 전환하였고, 이에 따라 언론사에 대한 탄압사례도 급격히 증가한다. 1946년 5월 29일에 공포된 미군정 법령 88호 "신문 및 기타 정기간행물 허가(新聞及其他定期刊行物許可)에 관한 건(件)"은 그러한 언론을 탄압하기 위한 법률로서 이후 좌익 언론에 대한 탄압 도구로 활용되었다. 그러나 미군정이 종료될 때까지도 언론사에 대한 정-폐간의 명목은 점령군의 안정에 위협이 된다는 명분이었으며 좌익언론이라는 명분으로 탄압받는 사례는 없었다. 여전히 이데올로기적으로는 언론자유는 분명 보장되고 있었다. 비록 명분에 그쳤다고는 하지만 단독정부가 수립되고 좌익이 불법화된 이후의 상황과 비교해본다면, 좌익들에게 군정기만큼 표현의 자유가 보장되었던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물론 아까 말했던 것처럼 4.19 시기의 해프닝을 제외한다면.


언론, 성역이 아닌 투쟁의 무기

군정기 언론자유와 관련하여 한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당시의 언론은 '성역화'되어 있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오늘날 언론은 사회정의를 실현하는 유력한 도구로서 그 누구도 침범하지 못하도록 '성역화'되어 있다. 아무리 족벌경영이 이루어진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누가 간섭할 바 아니다. 최근의 말지와 한겨레가 지겹도록 물고늘어지면서 약간의 파열음을 내고 있기는 하지만, 언론에 대한 불간섭의 원칙은 그럭저럭 잘 지켜져 왔다. 언제나 올바른 이야기만 할 것이라는 믿음은 언론에 대한 어떠한 간섭이나 권리의 침해도 허용하지 않도록 하는 사회적 공감대를 형성시켰는데, '양비론' 혹은 '양시론'은 이익집단 사이의 알력을 다루면서 특정 집단을 적으로 돌리지 않는 유일한, 그리고 불가피한 언론사의 생존방식이다.

하지만 해방 직후의 남한 언론계는 그렇지 않았다. 당시는 국가체제를 둘러싼 좌우의 분명한 대립이 존재하였고, 이에 따라 언론들도 뚜렷하게 좌익과 우익으로 구분될 수 있었다. 군정기만큼 언론사에 대한 테러가 횡행했던 시기가 없었다. 좌익청년은 우익신문사를, 우익청년들은 좌익신문사를 하루가 멀다 하고 테러했다. 군정에 의한 언론탄압에 대해서는 격렬하게 항의했지만, 상대 정파에 의한 테러는 '언론자유'라는 말보다는 '테러를 배격한다'라는 일반적인 성명으로 대체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의 언론은 계몽의 도구라기보다는 투쟁의 무기였기 때문이었다.

좌익지는 친일파와 지주-자본가를 타도해야 할 대상으로 몰아세웠고, 우익지는 공산당과 폭력분자를 소련의 꼭두각시로 그리고 있었다. 빨강과 파랑처럼 당시의 신문은 누구나 구분할 수 있게 적대적이었고, 동시에 독자들과의 친연성과 적대성을 분명히 드러내고 있었다. 이 살벌한 좌우대립의 전투에서 '성역으로서의 언론자유의 가치'는 그다지 빛나지 않았다. 국가에 대해서는 절대불가침의 성역을 주장하면서도 시민사회에 대해서는 서로의 적대성과 침해가능성을 인정하는 점은, 헌법의 제1수정조항으로 절대적인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면서도 언론에 의한 권리의 침해에 대해서는 민사상 철저하게 보호하고 있는 미국식과 닮았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여하튼 분명한 점은, 지금처럼 언론이나 신문사가 철저한 공익기관으로 이해되어 사회구성원 모두의 이해와 권리를 보장하며 또 누구나 인정할 수 있는 진리만을 이야기해야 한다는 등식이, 해방 직후의 남한 사회에서는 적용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언론에 대한 공격을 시작하자

언론자유의 정도를 수치로 측정할 수도 또 좌익언론의 존재만을 기준으로 삼을 수는 없겠지만, 여전히 1945년 당시보다 뒤떨어지는 점은 인정할 수 있겠다. 표현의 자유란 나와 다른 견해가 존재할 때에만 의미를 가지는 자유이다. 이런 점에서 좌익의 목소리가 전혀 존재하지 않는 지금은 여전히 역사의 진보를 의심케 하는 사례라 할 것이다. 또한 언론사에 대한 공격이 무슨 하늘이 무너져내린 일처럼 과장되이 반응하는 모습도 자신은 언제나 진리만을 말하고 있다고 자만하는 것 같아서 왠지 씁쓸할 따름이다. 조선일보가 동아일보를 쳐죽일 늠들이라고 욕하는 것을 보고싶고, MBC가 KBS를 망쪼가 든 회사라고 공격하는 것을 보고 싶다.

그럴때만 저들의 언론 자유에 기대어서 내 의사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내 의지의 표현수단을 찾으려고 할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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