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광주전남지부


사회운동

사회진보연대 계간지


2007.3.7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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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_책속의책_휜스테런.hwp

미지의 사회에서 다원성

헤르만 판 휜스테런 |
미지의 사회에서 다원성
(Plurality in The Unknown Society)



역주

[역주: 이번 호 <책 속의 책>은 시민권, 그리고 특히 다원성(plurality) 문제를 논한 글을 번역 수록한다. 일반적으로 마르크스주의 전통에서 다원성은 부르주아적인 것으로 간주되어 왔고, 실제로 권력분립이나 다당제, 다원주의 등 다원성과 갈등 문제를 다루기 위해 자유주의자들이 만든 제도들은 많은 한계를 가지고 있는 게 사실이다. 그렇긴 하지만 예컨대 '민주집중제'가 대안이 될 수 있을까? 다원성과 갈등이 (그 형태는 변화할지 몰라도)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정치적 현실이라면, 그러나 그에 대한 부르주아적 해법으로서 행정적/사회학적 다원주의 역시 답이 될 수 없다면, 우리는 이 문제를 다루기 위한 새로운 원리와 해법을 고민해 가야 할 것이다.
이에 관해 시사점을 줄 만한 네덜란드의 정치학자 헤르만 판 휜스테런(Herman R. van Gunsteren)의 책 A Theory of Citizenship: Organizing Plurality in Contemporary Democracies, Westview Press, 1998 중에서 3장 Plurality In The Unknown Society를 발췌해 번역했다. 물론 그가 사용하는 개념이나 다소 도식적인 이분법, 자유 민주주의에 대한 평가 등에 관해서는 이견이 제기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그의 글을 싣는 것은, 그에게서 기존의 행정적/사회학적 다원주의와는 다른 방식의 다원주의의 실마리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그는 몇 가지 독창적인 개념을 제시하는데, 이 번역본이 그의 책 중 일부를 발췌한 것이기 때문에 그런 맥락이 다소 잘 안 잡힐 염려가 있다. 아래는 같은 책 다른 곳에서 다원성에 관한 자신의 문제의식을 제시하는 대목인데, 그의 논점을 아주 명쾌하게 보여주기 때문에 이를 옮기는 것으로 소개를 짧게 마치려고 한다.
"다원성을 조직하는 것은 신공화주의 시민들의 제일 과제이다. 이를 유능하게 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는 것은 그들의 제일 미덕이다. 여기서 다원성이란 운명 공동체를 공유하는 인민들 사이의 차이들을 가리킨다. 이 차이들은 여러 가지 종류가 있을 수 있다 유쾌하게 놀랍거나 자극적일 수도 있고, 성가시거나 노골적으로 위협적일 수도 있으며, 교란적이고 이해불가능할 수도 있다. 또 개인적일 수도, 문화적일 수도, 또는 육체적일 수도 있다. 여기서 요점은 사람들이 서로의 차이들을 상대하지 않을 수 없도록 서로서로 연관되어 있다는 점이다.(그랬을 때 차이를 무시하거나 회피하는 것은 차이를 상대하는 하나의 특정한 방식을 선택한 것이다. 그리고 이는 [그 선택에 대해] 시민이 해명을 요구받을 수 있는 선택으로 해석된다.) 개인들이 그들의 일과 삶의 방식을 포기하지 않는 한 서로서로 부딪치는 것을 피할 수 없는 처지에 놓일 때, 그들이 어떻든지 간에 서로의 차이를 상대하지 않을 수 없을 때, 우리는 이를 "운명 공동체"라고 말할 수 있다. 운명 공동체는 주어진 것인데, 이는 사람들이 충분한 사전 계획이나 선택 없이 그 공동체 안에 관여하게 되었다는 의미이면서, 그들이 매우 무거운 대가를 치르지 않고서는 그곳에서 자신들을 빼낼 수 없다는 의미를 갖는다. 그러나 개인들이 이 주어진 공동체에 관해 무엇을 할지, 그것을 어떤 식으로 해석하고 변혁할지는 그들의 선택과 책임에 달려 있다. 그들은 교란을 일으키는 다른 사람을 죽이거나 강제수용소에 처넣을 수도 있다. 그들은 착취나 모욕을 가할 수도 있고, 숨거나 도망갈 수도 있다. 그들은 종교적 황홀경이나 자선 활동, 사랑이나 동정에 참여할 수도 있다. 시민들이 처해 있는 운명 공동체를 다루기 위해 시민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매우 특별하다. 그들은 사람들 사이의 주어진 관계를 해석하고 변혁함으로써, 우선 이 같은 관계들이 관련된 모든 사람들에 의해 선택(되고 의지)될 만한 가치가 있게 만들고, 다음으로는 각각의 개인들이 자신의 실질적 목소리가 제기되고 자신의 선택이 드러날 수 있는 정치적 평등의 위치를 획득할 수 있게 만들어야 한다. 시민의 의무는 운명 공동체를 시민으로 관여하는 모든 이들이 의지할 수 있는 공화국으로 변혁하는 것이다."(Gunsteren, 앞의 책, pp. 26~27)]


시민들이 실제로 하는 것은 무엇인가? 다른 사람들처럼 그들은 먹고 자며 사적 업무를 추구한다. 그러나 그들이 스스로를 시민으로 드러내는 것은 어디이며, 또 어떤 행동에 의해서인가? 형식적으로는, 시민 행동을 요청하는 따라서 정의하는 세 종류의 상황이 있었다. 첫째, 기성 민주주의의 정상 정치로, 여기에는 선거 투표, 정당 활동 참여, 매개적인 사회 조직에서의 봉사, 군 복무, 그리고 세금 납부 따위의 활동들이 포함된다. 둘째, 독재 치하에서는 공개 또는 비공개의 저항과 거부 활동들이 있었다. 그리고 셋째, 입헌적 안정성과 정상 정치의 새 질서로의 이행을 만들어 내는 혁명적 정치의 일화들이 있었다. 짧은 기간 동안, 평범한 시민들은 비교적 체계가 잡히지 않은 의사결정과정에 적극적으로 관여하곤 했다. 그러나 정상 정치가 다시 확립된 후 대부분의 사람들은 정치 무대를 전문적 정치가들에게 다시 넘겨주곤 했다.
오늘날 우리가 목격하는 것은 다른 세 요소들을 결합하는 한층 분산된 네 번째 시민 행동 무대를 목격한다. "정치의 분산"이나 "정치의 전위(轉位, displacement)," "민족 국가의 종말"이나 "중심의 상실" 등의 문구들이 이를 지시한다. 정치 지도자들은 정상적 선거를 통해 권력을 획득한다. 그러나 유럽연합에서 그들은 사실 공적 민주적 통제를 벗어난 준(準)혁명적이고 제헌적인 활동들에 참여한다. 시민들은 스스로 이런 호의적(benevolent) 반(半)독재에 맞서 투쟁할 수도 있고, 유럽 의회 및 이른바 유럽적 정당들을 지지하겠다는 생각을 별로 품지 않으면서 유럽적인 공적 영역을 수립하려는 시도를 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시민들은 그린피스 같은 환경 운동으로 스스로를 조직해 핵 물질의 국제 운반을 막으려 할 수도 있고, 국경을 초월하는 목표들을 획득하려는 다른 운동들에 가담할 수도 있다. 온갖 종류의 지역적 정치활동들이 증가하고 있다. 연구조사는 시민들의 활동 범위를 넓게 정의한다면 그들이 능동적이라는 점을 보여 준다. 그러나 민족국가에서의 정치라는 보다 전통적 통념을 고수하거나 당 가입, 투표율 따위의 지표들만을 본다면, 시민권은 활력이 없어 보인다.
사람들이 명확히 시민으로 행동하는 시기와 그렇지 않은 시기를 규정하기 쉽지 않은 요즈음이다. 정치의 탈중심화와 함께 경계가 희미해졌다. 신공화주의(Neorepublicanism)에서는 어느 정도 선명해지는데, 주장인즉슨 시민들이 운명 공동체(community of fate)에서 다원성을 조직할 때면 언제나 시민들의 행위 그 자체를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시민들이 하는 일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을 어떻게 하는가? 또 다원성이란 무엇인가?
현대 사회가 다원적이라는 점을 우리 모두 알고 있다. 그러나 어떤 식으로 그런지가 즉각 분명하지는 않다. 현대 사회가 완고한 차이들, 그리고 파국적이거나 유쾌한 놀라움을 많이 드러내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사회 질서와 해석이라는 기성 도식 안에 이것들의 자리를 지정하려고 할 때 우리는 자주 곤경에 빠지게 된다. 그렇게 하는 데 성공할 때조차, 그것들을 통합하면서 뭔가 중요한 것을 잃어버린 게 아닐까, 우리의 부주의가 조만간 우리에게 되돌아오지 않을까 등의 의혹이 남는다. 이것들이야말로 미지의 사회(The Unknown Society)에 사는 사람들의 느낌, 또는 스페인 의회에서 연설할 때 하버마스(J rgen Habermas)(1985)가 쓴 표현을 빌자면 새로운 불가사의(Die neue Un bersichtlichkeit)다. 정말로 우리가 그런 사회에 사는 것이라면, 사회 집단과 범주들만을 가지고 다원성을 정의하는 것은 우리가 아직까지 개념적 범주를 확립하지 못한 엄청나게 많은 현상들을 빠뜨리는 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이 책은 집단의 수준에서 시작하는 다른 많은 연구들과 반대로 서로 다른 두 개인이라는 미시적 수준에 초점을 맞춘다. 그리고 그들의 차이가 바로 우리가 다원성이라 정의하고자 하는 것이다. 바로 이 수준에서 우리는 시민들이 어떻게 다원성을 조직하는지를 개념화할 것이다.

다원성의 가치

다원성 서로 상대하는 사람들 간의 차이들 은 정치와 관련되는 것이다. 정치가 있는 곳에, 다원성이 있다.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1959:60)의 말을 빌자면, 다원성은 "모든 정치적 삶의 … 조건"이고 자유는 그것의 "존재이유"(raison d` tre)다.(Arendt 1968:146) 이런 관점에 따르면, 정치를 실천하는 것은 다원성을 자유로 가공하는 것, 주어진 "맹목적" 차이들을 의지에 의해 결정되고 의식적으로 수용된 차이들로 번역하는 것이다. 다원성이 정치 담론에서 주기적으로 되풀이되는 주제인 까닭은 그것이 바로 정치적 삶에 본래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자유 민주주의 체제에서 이 주제가 항상 두드러지는 것은, 개인적 자유의 행사가 그것의 핵심 가치 다원성을 발생시키는 경향이 있다는 간단한 이유 때문이다. 이 다원성은 명백하게(prima facie) 적법하고 오직 예외적 상황에서 특별한 이유로만 박탈될 수 있다. 입증 책임은 박탈하는 측에 있다. 만일 자유를 원한다면, 다원성을 받아들여야만 한다. 그러므로 자유 민주주의에서 다원성은, 우리의 개인적 찬성 여부에 관계없이 원리상 적법하다. 이런 자세는 종교와 정치, 도덕과 법, 선 개념과 정의의 분리라는 원칙(doctrines)으로 표현된다.
다원성은 적법한 것으로 간주될 수도 있지만, 그러나 동시에 혐오스럽거나 바람직하지 않은 것으로 여겨질 수도 있다 자유를 위해 치러야 하는 대가로. 그러나 자유 민주주의에서는 일반적으로 다원성을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첫째, 다양성과 독창성은 창조성의 흥미롭고 훌륭한 표현으로 높이 평가받는다. 둘째, 다원성이 환영받는 것은, 자신들이 뒤얽혀 있는 생활양식에서 벗어나거나, 사회에서의 위치를 바꾸고 싶어 하는 개인들에게 풍성한 선택 메뉴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만일 이용가능한 요소들의 메뉴에서 선택할 수 없고 원점에서 시작해야만 한다면, 스스로의 통찰에 따라 삶을 영위하고 조직할 수 있는 권리의 실행은 견딜 수 없는 부담이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다원성이 중요시되는 이유는 그것이 활력과 탄력을 북돋기 때문이다. 다원성은 유연성을 제공하고, 적응을 촉진하며, 변화된 환경 아래서 필수불가결한 것으로 입증될 수 있는 대안들을 발생시키는 가능성을 주기 때문이다. 생태 및 조직 이론들은 우리에게 다양성 심지어 무질서(chaos)가 진화와 개선의 본질적 조건이 된다는 생각을 친숙하게 만들었다. 굴드(Stephen Jay Gould)(1993:120)는 다음과 같이 쓴다.

만일 동물들이 이상적으로 연마되어 각각의 부분이 한 가지 일을 완벽하게 수행했다면 진화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인데, 왜냐하면 (전이 중에 생활 기능을 상실하지 않아) 아무 것도 바뀌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며. 따라서 환경이 바뀌고 유기체가 반응하지 않으면서 생명은 곧 종말을 맞을 것이다. 그러나 자연선택 자체보다 심층적인 구조의 규칙은 복합적 특징들이 반드시 다중적 가능성들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보장한다 그리고 필요한 유연성을 진화가 획득하는 것은 번잡함, 잉여, 그리고 완벽한 적합의 결여 덕분이다. 인간의 창조성도 다르지 않은데, 왜냐하면 내 생각에 우리는 조직의 본성 자체에 대한 진술을 상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무언가 아주 일반적이어서 어떤 특수한 경우에도 틀림없이 적용되는 것 말이다. 그러니 모호성의 여유와 잉여의 창조적 기쁨을 근절하는 데 전념하는 문화 안에 우리가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슬픈 일인가… 잉여, 그리고 그 맞짝으로서 다중적 의미의 모호성이야말로 우리의 방식, 곧 우리의 가장 귀중하고 가장 인간적인 방식인 것이다.

그러나 자유 민주주의에서도 모든 다원성이 긍정적으로 평가받는 것은 아니다. 불온하거나 용납될 수 없는 다원성의 발현을 상대하는 특별한 장치들이 있다 예컨대 타인의 자유를 침해할 경우에는 개인적 자유의 실행을 박탈하거나 차별을 금지하는 규칙들. 다른 사례는 법과 정치의 대심(對審, adversarial) 절차로서 경쟁, 비교, 비판, 협상, 타협의 기간을 허용하고 그 후에는 폭력의 국가 독점을 뒷받침삼아 이행되는 결정이 이어진다. 자유 민주주의가 최근 들어 곤경을 겪는 것은 바로 이 지점, 곧 불온한 다원성을 상대하는 방법에서다. 시민들은 규칙에 대항하거나 아예 무시하고, 또 이를 교묘히 회피하는 영리한 길을 찾는다. 대표(representation)의 위기는 정치와 법에서의 대심 절차에 영향을 미쳤고, 공적 결정의 이행은 점점 난공불락의 장벽에 부딪친다 공적 권위가 폭력 독점을 행사해야만 하는 지역이지만 실은 영향을 받지 않은 채 머무는 곳들이 그것이다. 예컨대 대도시의 "출입 금지" 지역, 마피아 활동, 그리고 새로운 교통 네트워크 등이다. 자유주의적 원칙은 여전히 동일하지만, 사회적 현실과 그것이 발생시키는 다원성의 종류는 변화하고 있다.

미지의 사회

그러므로 우리의 논의에서 다원성이 나타나고 가공되는 사회적 맥락의 변화를 무시할 수 없다. 오늘날의 사회는, 우리가 그것을 탈근대(postmodern)라고 부르든 후(後)근대라고 부르든 아니면 미지의 사회라 부르든 간에 호칭은 별로 중요치 않다 다원성의 위치와 형태는 1950년대의 근대 산업 사회 당시와 다르다. 다음의 도식은 차이들을 불러내면서 그것을 도표로 나타낸다.

근대 사회 | 미지의 사회
민족적 단일 문화 | 세계 문화 내 혼성화
해방의 정치 | "생활양식"(lifestyle) 정치
평등 | 차별화, 차이
조직, 위계 | 재조직, 네트워크
[단수의] 합리성 | [다수의] 합리성들, "우리는 이제 모두 현지인(native)이다"
고정된 동일성 | 덧없고 다중적인 동일성들
보증된 대표 | 문제적이고 임기응변적인 대표
이데올로기의 종언 | 다양한 생활양식들과 신념들
정치의 실용주의 | 정치의 근본주의

근대사회에서는, 사람들과 그 차이점들의 위치를 가정, 직업, 교육, 종교 등의 좌표를 지닌 지도 위에 상당히 쉽게 지정할 수 있었다. 그들의 차이들은 대부분 알려져 있었고, 유권자나 소비자로서의 행태도 일단 지도에서의 위치를 파악하면 사뭇 분명하게 예견할 수 있었다. 그들은 대체로 비슷한 위치에 있는 다른 사람들처럼 행동했다. 차이들은 민족 문화와 국가 정책이라는 모든 것에 우선하는 통일성의 일부였다. 이 통일성이 세분되는 방식은 네덜란드 협의(consociational) 민주주의의 지주화(pillarization)에서부터 프랑스의 계급적 노선 사이의 분할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 그러나 우선적인 통일성, "사회"의 범위와 일치하는 범위를 제공한 것은 민족 국가였다.
오늘날 민족 국가는 이 같은 중심적이고 규정적인(defining) 역할을 상실했고, 지역주의와 국제화 사이에서 불편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많은 갈등들은 더 이상 노동 분할, 종교적 소속, 교육 수준 같은 용어에 따라 적합하게 배치할 수 없다. 이런 용어에 따라 사람들의 사회적 위치를 파악한다손 치더라도, 그들의 행동은 사뭇 예견불가능한 상태로 남아 있다. 사람들은 그럴 법해 보이는 무언가나 누군가(what or who)가 아닌 경우가 많다. 그들은 다중적이거나 복합적인 동일성들을 지닐 수가 있으며, 동일성들을 전략적으로 사용하고, 예기치 않은 순간에 동일성들이나 역할들을 바꿀 수도 있다. 선거나 경험적 사회 조사를 통해 이 사회적 현실을 대표/표상하려는 기성의 방식은 사태의 추이를 파악하는 데 자주 실패한다. 이 같은 표상적 도식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통치자들의 개입은 빗나가기 일쑤다. 지금까지 그들의 지식에 양적·질적으로 도움을 주었던 제도들이 이제는 그들에게 제도적 무지라는 부담을 지운다. 그들은 다른 많은 이들이 직접적 관찰과 경험을 통해 아는 것들을 모르고 또 알 수 없다. 1989년 동독의 슈타지[옛 동독의 비밀경찰]는 아는 게 많았다 너무 아는 게 많은 나머지 사태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파악하지 못했다. 선거 설문조사는 더 나은 자료와 방법들을 습득해 왔지만 투표 행태(behavior)를 예견하는 것은 30년 전이 지금보다 낫다.
통치자들은 이 같은 결함들에 다양한 방식으로 반응한다. 우선 결함들을 무시할 수도 있다. 훈련을 통해 공공관리자들의 질을 향상하고, 기업 부문에서 관리자들을 고용해 관리 경험과 지식의 기초를 확장할 수도 있다. 또 자신들에게 사회 현실을 대표/표상해 주는 제도들을 개혁하려는 시도를 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다른 조언자들을 얻어서) 지식 생산의 다른 경로들을 추구해 본다든가, (국민투표, 대중매체조작, 정당개혁 등) 정치적 대표/표상의 대안들에 좀 더 무게를 싣는다든가, 다른 통치 기법을 채택한다든가 하는 것 등을 들 수 있다. 또는 사회 세계를 규율하는 데 노력을 기울여 그것이 기성의 대표/표상 도식에 보다 부합하게 움직이고 지배자들로 하여금 그들이 하기로 되어 있는 것 곧 통치를 다시 할 수 있게끔 만들 수도 있다. 이 모든 반응의 공통점은 미지의 사회가 갖고 있는 문제를 진정으로 극복할 수는 없다는 점이다. 모든 것을 고려할 때, 그것들은 대의(representative) 정부의 패러다임을 임시변통 격으로 수선하는 것 같고, 전체적으로 이 통치 방식을 사뭇 복잡하고 불안정하게 만들 뿐이다. 이는 분석과 명령의 패러다임, 더 많은 지식을 축적하고 이 우월한 지식에 근거해서 영리한 개입을 고안하는 패러다임이다. 내 생각에 이 패러다임은 더 이상 유지하기 어렵다. 오늘날의 통치자들은 피통치자들 중에 그들보다 한수 위인 누군가가 항상 있다는 사실을 예상해야만 한다. 이것 자체는 새로운 일이 아니다. 정말 새롭고 또 구래의 통치 방식에 치명적인 것은, 이 다스리기 힘든 행동들이 엄청난 속도로 동료시민들에 의해 모방되고 일반화될 것 같다는 점이다. 통치자들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기도 전에 그것은 사회 전체로 퍼져 나간다.
내 생각에 미지의 사회에서 지배자들에게 실행가능한 유일한 선택지는, 증식적이고 예견불가능한 다원성들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자기 편으로 삼는 것이다. 이제 통치에서 분석과 명령의 역할은 줄어들고, 다양성과 선택의 그러니까 다양성을 수용하고 선택적 가치에 바탕을 두고 그것을 모방하는 문제가 중요해진다. 그런 가치 중 하나가 시민권이다. 이 가치를 스스로의 지침으로 삼는 지배자들은 다원성의 조직자들로서의 시민들에게 의존할 것이고, 시민권을 북돋는 특질을 정책과 법을 평가하는 기준으로 삼을 것이다.
오늘날의 사회와 정치에서 다원성은 다른 위치를 점하고 있다 더 중심적이고 더 문제적인 위치. 다원성을 상대하고 그것을 조직하는 방식 역시 검토가 필요하다. 만일 다원성이 정량(定量)으로, 사회 분류의 표준적 도식이 제공하는 이름표에 따라 깔끔하게 정돈된 채 나타난다면, 우리는 다원성을 상대하는 기성의 방식, 그 분류적 도식에 부합하고 풍부한 경험과 분석의 토대 위에서 향상되어 온 방식에 안전하게 의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회 분류의 도식들 자체가 실제적 다원성을 심각하게 잘못 전하거나(misrepresent) 이것을 포착하는 데 전반적으로 실패한다면, 차이를 상대하는 기성의 방식 역시 자신의 목표에 이르지 못할 것이다. 이런 도식들에 근거한 개입은 예기치 않게 빗나갈 것이다. 그것들이 제공하는 목록은 갑자기, 실재하는 당대의 다원성을 상대하기에는 너무 제한적이거나 부적당한 것으로 드러난다. 그렇다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다원성 조직에 관한 현존하는 공식적 목록을 좀 더 분석·조정한 다음 나는 우리의 도식들에 정확하게 부합하지 않는 이 같은 교란적이지만 현실적인 다원성을 이해하고 그것에 대해(그리고 그것으로부터) 배우는 것이 필수적이라는 점을 제안하고 싶다. 우리는 사람들이, 일상 생활의 미시적 수준에서, 잠재적으로 교란적인 차이들을 그럭저럭 평화롭게 상대하는 방식을 연구할 수 있다. 사실 현대 사회에서 우리는 많은 교란과 폭력, 불의를 발견하지만, 그러나 그것들이 만연해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들이 TV에 방영되고 보고되는 까닭은, 대부분의 장소에서 (아주 다행스럽게도) 예외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폭력이 폭발할 수도 있었으나 그렇지 않았던 많은 경우들은 어떤가? 어떻게 보통 사람들은 그렇게나 자주 평화와 비교적 시민적인 관계를 그럭저럭 유지하는가? 만일 그들이 어떻게 하는지를 어떤 기량, 책략, 태도, 그리고 통찰이 사용되는지를 살필 수 있다면 이로써 우리는 실천적이지만 비공식적인 이 목록의 어떤 부분이 다원성을 조직하는 너무나 제한된 현재의 공식적 목록으로 통합되는 데 적합한지를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또한, 일단 이 비공식적 목록의 본질에 대한 관념을 얻으면, 왜 한 번의 폭력적 행위가 때로 이 목록을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만들 수 있는지 그리고 평화로운 공존을 내전과 혼란으로 바꿔 놓는지를 질문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를 이해한다면, 우리는 많은 시민인륜의 행위들이 그 같은 개입에 대해 보다 강건하고 면역력을 가질 수 있게 만들려는 시도를 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부분적으로 이 같은 목적은 법적 절차, 표현의 자유, 가두운동 등을 보호하는 수많은 공적 제도의 확립으로 귀결된다. 미지의 사회의 새로운 다원성 안에서, 시민들은 공적 제도의 건설과 개정을 통해 차이들을 상대하는 평화로운 방식들을 보호하는 이 같은 작업을 계속해야 한다.

다원성을 개념화하기

다원성을 지각할 때 표준화에 의존하는 경우가 왕왕 있는데, 이에 따를 경우 사람들은 그들이 누구이고 그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이해하는 개인 대신에 주로 범주의 사례로 묘사된다. 시민권의 관점에서 볼 때 이는 치명적 실수다. 시민권은 다름 아닌 개인들에게 범주화 그들이 스스로를 소개하고 타인들의 위치를 정하기 위해 사용하는 에 대한 책임을 지우는 것에 관한 것이다. 그리고 시민 정치는 다름 아닌 만인이 시민권에 접근하는 것을 가로막는 사회적으로 확립된 범주화의 규칙을 바꾸는 것에 관한 것이다. 만일 우리가 다원성을 개념화할 때 그것이 "자연적"으로 주어진 것으로서 집단 범주화의 지배를 받도록 용납한다면, 이는 이미 시민권으로부터 한발 비껴나는 것이다. 따라서 사회적 다원성을 분류하는 많은 표준적 방식들은 시민권의 관점에서 보자면 매우 바람직하지 않다. 만일 그것들을 따른다면, 시민권은 이미 훼손된 것이다.
시민권의 목적이라는 면에서 볼 때, 다원성에 대한 많은 개념화들은 너무 높은 수준에서 시작한다 즉 개인의 수준이 아니라 집단의 수준에서 [시작한다]. 이들은 사회 안에 서로 다른 집단과 범주의 사람들이 있음을 관찰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인종, 계급, 성별, 민족, 종교, 직업, 정당이 그것이다. 그러므로 다원성은 주로 사람들의 집합들 사이의, 집단들 사이의 관계의 문제가 된다. 따라서 개인들 사이의 상호작용에서 다원성을 상대하는 것은 사실상 이 관계들로부터 파생된 것으로 간주된다.
내 생각에는 훨씬 더 기초적인 수준에서 시작해야 할 것 같다 인생 역정이 교차하는 최소 두 명의 개인이 경험하는 다원성에서 말이다. 이 다원성은 서로를 상대하면서 개인들이 경험하고 구성하며 가공하는 것이다.
개인들은 타인들이 다르다는 사실을 충돌이나, 기회로, 또는 단순한 차이로 경험한다. 이 차이는 구성이나 해석, 또는 "~로 봄"(seeing as)(Wittgenstein 1958:193-208)으로 가득 차 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중국인, 노동자, 장군, 예술가 등으로 본다. 보통 이것은 직접적 지각이다: 우리는 먼저 사실을 보고 그 다음에 사실을 이해하는 데 적합한 해석을 찾지 않는다. 반대로 의미는 경험과 지각 안에 주어져 있다. 우리는 빨간 신호등 앞에서 정지한다. 여기에 추리가 개입하진 않는다. 빨간 불은 "정지"란 뜻이다. 우리의 지각과 경험에는 자명한 (부여된) 의미가 스며들어 있다. 괄호는 비록 우리가 분명히 의미를 부여하긴 하지만, 그 과정은 보통 의식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지시한다. 따라서 이 출발점은 현상(학)적이라고 불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현실의 사회적 구성, 의미의 부여를 우리가 그에 대해 책임을 갖는 활동이나 우리가 하는 무언가로 간주할 수도 있다. 이것은 경험의 자명한 특성과 어떻게 관련될까?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다. 우리는 우리의 경험과 지각의 자명성을 돌파할 수 있다. 우리는 다른 범주와 분류를 활용함으로써 사물들을 다른 견지에서 볼 수 있다. 이런 새로운 구성물들을 창출해 냄으로써, 우리는 최초 경험이 어디에 해석과 구성, 분류와 모형제작을 담고 있는지 인지하는 법을 학습할 수 있다. 표준적 분류와 해석이 우리의 일상적 경험의 일부라 하더라도, 이는 필수적이라거나 불가피하지 않다. 우리는 어떤 다른 사람을 흑인이나 장군으로 경험할 수 있지만, 이 경험의 자연스러움과 강제성은 현실의 사회적 구성으로 폭로될 수 있다. 이 가정으로부터, 사회적 상호작용의 자명한 의미가 재생산되는 것에 대해 우리가 공동책임을 갖는다는 결론이 따라 나온다.
"자연적" 분류와 해석은 유용한 기능들에 도움이 된다. "정상(성)"은 민첩한 상황판단을 제공하고, 풍부한 질문들과 전략들을 공급하며, 사람들이 그것 주위에서 자신들의 상호작용을 배열하는 초점이 된다. 정상(성)은 다원성을 조직한다. 시민권은 특정한 표준적 해석과 분류가 유용한지의 여부, [유용하다면] 어느 정도까지 유용한지 따위의 질문에 답하지 않지만, 그러나 분명히 그 사용에 제한을 둔다. 시민권은 자명한 사회적 분류가 정치적 평등의 지위에 대한 합리적 접근을 사실상 방해할 경우에는 이 분류의 강제와 양립할 수 없다.
또한 경험되고 구성된 다원성은 서로 마주치는 개인들에 의해 능동적으로 가공된다. 놀랍거나 교란적인 차이는 담론, 운동, 그리고 절차를 통해 변형된다. 예를 들어, "미안합니다"라고 말하거나, 법정에 출두하거나, 함께 춤추고 입맞추거나 배심원의 일부가 되거나, 남이 하고 싶은 대로 내버려둠으로써. 이 가공이 한 명 이상을 포함한다는 사실에 유의하자. 다른 사람이 지혜롭고 친근한 단어들을 사용할 수도 있지만, 만일 내가 그 언어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우리의 게임은, 우리의 춤은 실패한다. 사실 두 명이 있어야 탱고를 추는 것이다.
여기서 제안된 개념화는 다원성이 쟁점이 되는 상황을 이해하는 데 활용될 수 있다. 이런 시각에 따르자면, 다원성은 단지 거기에 있는 무언가가 아니라, 개인들이 사회적 상호작용 속에서 구성하는 것이다. 이 같은 구성은 참가들의 배후에서 전개되는 "숨겨진" 과정일 필요는 없다. 그것을 처음부터 끝까지 완전하게 통제할 능력은 없음에도 불구하고 개인들은 자신들이 참여하는 다원성의 사회적 구성의 방향과 결과에 영향을 미친다. 시민으로서 그들은 다원성이 구성되는 방향을 잡아, 시민들 사이의 실재적 차이들을 단순히 무시하거나 억압하는 대신 평등한 시민들로서 모든 참가자들의 동일성을 확립하고 거듭 단언하는 결과에 이르는 데 책임이 있다.
다원성을 구성하고 조직하려면 보통 희귀하고 모든 사람들이 동등하게 이용가능한 것은 아닌 능력과 기량이 필요하다. 사람들이 시민권을 향한 다원성의 구성을 이끄는 데 어느 정도나 성공적인가 하는 것은 이를 뒷받침하는 제도들에도 달려 있을 뿐더러, 쟁점이 되는 동일성들의 본성과 감정들의 강렬함에도 달려 있다 이 모든 요소들은 심지어 가장 숙련되고 가장 합리적인 개인들의 능력조차 일정하게 초과한다. 만일 다원성의 구성이 능력, 제도들, 감정들, 그리고 동일성들을 필수적으로 포함한다면, 이는 단순한 문제가 될 수 없다. 이 네 가지 항목들이 다원성 조직의 대상이자 또한 도구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이 항목들과 그것들 사이의 복합적 관계를 좀 더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자.

개인적 동일성들
동일성들은 교란적이고 놀라운 차이들을 정리하는 데 활용된다. 미지의 인물이 "알려지게" 되는 것은 동일성, 곧 기존 사회의 도식 안에 장소를 획득함으로써다. 동일성들이 서로에게 관련되는 방식은 종종 동일성들 자체가 구성되는 방식 안에 포함된다. 예컨대 "노동자"의 동일성은 "자본가"의 동일성과 대조적으로 관련된다. 대조적이거나 관련되는 동일성들의 지정을 통해 다원성을 정리할 때, 개인들과 집단들을 정렬, 배제, 주변화하는 등의 다양한 메커니즘이 작동한다. 예를 들어 "유대인"이라는 동일성과 그것이 서로 다른 체계들 안에서 획득해 온 다양한 위치들을 보자: 이슬람이나 기독교와 대비되는 종교적 범주로서; "아리안" 종에 대비되는(그러니까 열등한) 인종 범주로서; 그리고 모계적인(부계적인 것과 대립되는) 가계의 민족을 가리키는 문화적 범주로서. 이 모든 이름표들은 다원성의 "불공평한" 환원을 은폐한다.
비록 동일성들이 사회적으로 부여된다 하더라도, 이것들은 우리 자아의 내적 경험의 일부이기도 하다. 우리의 가장 깊은 감정들은 우리가 우리 자신이라고 믿는 것과 관련된다. 이 같은 자각(awareness)은 우리가 다른 이들과 우리를 바라보면서 학습한 사회적 범주들을 활용한다. 따라서 우리는 사회적 차원에서, 다른 사람들과 상호작용할 때의 호칭과 속성에서 우리를 완전히 자유롭게 할 수 없다. 우리의 동일성들은 본질적이고 원형적으로 벌거벗은 "내적 자아"(inner self) 주위를 감싸고 있는, 그리고 우리가 원하면 언제든지 제거할 수 있는 외피가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개인들이 그들의 자기 규정에 관해서 아무런 자유도 없다는 결론이 필연적으로 따라나오진 않는다. 특정한 환경에서는, 동일성을 사회적으로 부여하는 것에 저항하고 제 갈 길(one's own way)을 가는 것이 가능하다. 그러나 "제 갈 길"은 순전히 개인적인 발명이 결코 아니다. 그것은 차라리 각자의 문화에서 개인들이 마주치는 특정한 양식을 소재로 구성된다고 해야 할 것이다.
한 흥미로운 예가 몇 년 전 네덜란드 동성애자 조직인 문화 휴식 센터(Center for Culture and Relaxation, Culture en Ontspannings Centrum, COC) 내부에서 분출했던 토론이다. 한때 동성애자 해방 운동의 전위였던 이 조직은 1990년대 들어 동성애자들 자신으로부터 공격받았다. 사람들은 COC가 "동성애자들"을 대표하는 척 했다고들 했다. 사람들은 이 조직이 학교에서의 정보제공 활동을 통해 청년들에게 동성애란 "무엇"인가를 말하고 그들에게 스스로의 동성애적 동일성을 공개적으로 인정할 것을 고무함으로써, 청년들을 혼란시켰다고들 했다. 따라서 아이들은 스스로가 완전히 다른 인간(person)이 되어야만 한다는 인상을 받곤 했는데, 반면 그들은 이 같은 변성(metamorphosis)에 찬성하는 결정을 내렸을 때 그들이 뒤에 남겨 두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 상태였다. 비판자들은 또한 COC가 사람들이 자신들의 동성애를 가지고 빚어낼 수 있는 서로 다른 생활 방식의 다양성을 무시했다고 비난했다. 사람들은 COC가 동성애를 동일성의 규정된 선택으로 제시했고 이로써 동성애 활동이 이행적인 실험일 수 있으며 이성애를 동반할 수도 있다는 점을 무시함으로써, 동성애를 경직화하려는 시도를 했다고 말했다. 간단히 말해 COC는 모호성을 허락하지 않고 완전한 동성애 동일성을 고수했는데, 이런 동일성은 동성애를 선호하는 다른 이들이 더 이상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었다. 이 사람들은 특정한 동성애 동일성에 갇히기를 거부하고, 그 대신 그들이 누구이고 무엇인가를 보다 자율적으로 정의하는 쪽을 택했던 것이다.
시민권은 이 거부, "아니"라고 말할 수 있고, 동일성들에 갇히지 않으면서 이것들에 드나들 수 있는 권리와 관련된다. 이런 의미에서 시민권은 메타-위치(meta-position)를 차지하는 것이며, 여러 가지 사이에 있는 그저 하나의 동일성이 아니다. 시민권은 동일성들 간의 상호작용 안에서 매개적 기능을 수행한다. 시민권의 문제는 주로 농노제 및 다른 법적 지배 형태로부터의 해방과 관련되곤 했는데, 이제는 경직된 동일성들로부터의 해방과도 관련된다. 해방의 정치 여기서 주변화된 집단들은 기성 구조들에서 스스로를 해방시키는 지렛대로 자신들의 동일성들을 활용했다(여성, 동성애자, 카톨릭 신자) 에서 생활양식 정치로 강조점이 이동해 왔다. 개인들은 하나의 동일성 또는 동일성들의 단일하고 고착된 결합에 말려드는 것을 거부한다.
비록 시민권이 자유를 목표로 하고 모든 형태의 노예제를 거부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덧없는 동일성들의 무제한적 다양성을 조장하는 건 아니다. 각자의 생활양식을 발전시키면서 시민들이 항상 염두에 둬야 하는 것은, 시민권의 행사와 관련하여 동료시민들로부터 책임을 요구받을 수도 있다는 점이다. 시민권은 각자의 자유를 되는 대로 향유하여 제 멋대로 사는 것을 넘어선다. 시민권은 또한 동료시민들도 그들이 누구인가를 동등하게 드러내는 것을 허용하는 제한에 대한 존중을 요구한다. 이 제한들은 사회적 죽음(Patterson 1982)과 모욕, 인간을 마치 비(非)인간인 것처럼(Margalit 1996) 또는 동료시민들을 바(非)시민인 것처럼 취급하는 모든 형태를 금지한다.

감정들(Emotions)
다들 알고 있듯 다원성 타인들이 가지고 있는 놀랍거나 교란적인 차이들과 대면하는 것 은 감정들을 일으킨다. 다원성의 경험은 열광, 사랑에 빠짐, 공포, 외부자에 맞선 집단적 연대감, 적의, 마비, 항복 또는 비굴함 따위의 감정을 포함할 수 있다. 이 같은 감정들은 인지 능력과 다원성의 가공에 영향을 미친다. 특히 우리의 동일성이 문제가 된다는 것을 깨달을 때, 우리는 수수방관하고 있을 수 없다. 공포와 분노의 감정은 표현되지 않을 수 없다. 외향적으로 대상이나 타인들을 향하든, 내향적으로 스스로를 향하든 말이다. 공포 및 관련된 감정들은 종종 행동의 목록을 마비 아니면 적의로 한정시킨다. 토론보다는 위협으로 [한정시키기도 한다]; 타인들의 평판을 헐뜯는 식이 될 수도 있다; 그리고 그들이 지닌 차이 때문에 "위험"이 되는 타인들에게 공포를 투영시킬 수도 있다. 예컨대 음주운전자들처럼 사람들은 때때로 실제로 위험이 될 수 있다. 그러나 투영은 이 위험을 부풀리고 과장할 수 있다. 더욱이 이 위험은 비슷한 특성을 가지고 있지만 실제로는 전혀 위험하지 않은 타인들에게 귀속되는 경향이 있다. 열광과 사랑에 빠지는 것은, 보통 긍정적 감정으로 보이지만, 마찬가지로 협착증(狹窄症)이나 맹목을 초래해, 다원성을 섬세하게 상대하는 기회를 감소시킨다. 그러나 또한 감정들은 숙고된 행동들의 범위를 넓힐 수도 있다. 압력과 위험 속에서 사람들은 종종 창발적이 되고 비상한 형태의 협력과 유연성에 민감해진다. 2차 세계 전쟁 중의 저항(레지스탕스) 운동이나 때때로 승객들과 납치범들 사이에서 발생하는 감정적 연대감을 생각해 보라.
민주주의는 다원성의 인내(tolerance)를 요구하거니와, 그 시작에서부터 그늘진 이면을 갖고 있었다.(Sagan 1991) 한 편으로 민주주의는 동료시민들의 다를 수 있는 권리에 대한 존중을 이해했다; 민주주의는 충실한 반대파(loyal opposition), 적대적 협력 같은 놀라운 관념을 발전시켰으며, 교육과 법률적 과정을 통해 이를 고취시키고 확고히 했다. 다른 한 편으로 민주주의는 외부자를 향하여 적의를 실천하고 경멸을 보여 주었다 노예제, 제국주의, 전쟁, 그리고 빈곤 등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말이다. 민주주의자들이 느끼기에 사태가 특히 위험해지는 것은, 이 외부자들이 민주정으로 진입하거나 "내부"와 "외부" 간의 경계가 더 이상 분명하지도 통제되지도 않을 때였다. 정착적 민주주의들이 집시들을 다룬 방식은 고전적 예다. 우리 시대, 즉 과대망상증이 시민권의 허용, 이주, 그리고 사회 정책에 대한 논쟁을 관통하고 있는 이 때, 민주주의는 다시금 스스로에 대해 불분명해지고 있다. 이는 정체의 내부에 있는 것도 외부에 있는 것도 아닌 사람들을 대우할 때 이랬다저랬다하는 데서 나타난다. (분리된 채로 유지되어야만 하는 범주들 사이에 걸쳐 있기 때문에) "괴물들"로 경험되는 이런 사람들을 상대할 때, 감정들과 과대망상증들이 곤란한 순간에 수면 위로 떠오르곤 한다. 오늘날 사람들이 빈번하게 경계/국경들을 가로지르는 이 때, 민족 국가 안에서만 다원성을 수용하고 인정하는 것으로는 더 이상 충분치 않다. 시민들은 공화국의 경계들 주위에 존재하는 다원성들을 상대하는 법 역시 배워야 한다. 이는 이런 류의 다원성에 대한 경험 및 가공에 동반되는 감정들과 감정의 인도를 받는 실천들을 상대하는 법에 대한 학습을 필요로 한다.
2차 세계 대전 이후 시기의 실용주의적 민주주의 이론가들은 감정을 정치에 위험한 것으로 간주했다. 그들이 볼 때, 감정들은 공적 영역 외부로 격리되어야 하며, 그것들의 기능은 오직 예술적이고 사적인 영역에 국한해서만 허용되어야 했다. 그것들은 정치에서 아무런 역할도 수행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또는 기껏 해 봤자, 검열되거나 통제된 역할만을 수행해야 했다. 그러나 이런 실용적 통제 전략에는 결점이 있었다. 이 같은 전략은 건전한 정책들과 실행가능한 타협들을 발전시키는 데 요청되는 감정의 추동을 받는(emotion-driven) 상상력을 질식시켰다. 더욱이 감정들은 종종 은밀한 통로, 거기에 연루된 사람들이 의식하지 못하는 곳을 따라 스스로를 느껴지게 만들었다 그리고 비참한 결과들을 초래했다. 돌이켜 보건대, 더 지혜로운 방법은 감정들을 인정하고 시민들이 그것들을 분별있게 상대할 수 있게 하는 능력들과 제도들을 발전 육성하는 것이다.
좋든 싫든 간에, 다원성은 분명히 감정들을 포함한다. 감정들을 묵살하거나 무시한다면, 그것들은 예기치 않은 순간에 정치적 상호작용을 교란하는 난폭하고 변환할 수 없는 요소로 머물게 될 것이다. 감정들을 인정한다면, 우리는 그것들을 다원성의 경험과 구성, 그리고 가공의 연쇄 안에 위치시킬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감정을 길들이고 시민들의 다원성 사이의 상호작용 안의 의미있는 장소를 감정에게 부여하는 희망을 품을 수 있는 것이다.

능력(competence)과 제도들
동일성과 감정 다원성 조직화의 보다 주체적 측면 을 살펴보았으므로, 보다 객관적 측면 곧 능력과 제도 쪽으로 가 보자. 좋은 의도나 동일성·감정에 대한 관심만으로는 통상 시민들이 수용할 수 있는 다원성 조직화를 보장하는 데 충분치 않다. 자기표현만으로는 시민인륜(civility)을 보장할 수 없다. 표현은 상황에 적합해야 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어야 하고, 게다가 타인들이 사용하는 표현에 부합함으로써 시민으로서 함께 살아가는 실행가능한 방법에 기여해야 한다. 능력과 제도가 중요해지는 곳은 바로 여기다. 능력은 훌륭한 판단과 실천적인 사회적 기량(skill)을 가리키는데, 여기에 해당하는 것은 각자의 입장과 관념, 감정을 명확하게 표현하고 듣는 능력, 자제와 자각을 발휘하는 능력, 상황을 평가하는 능력, 불확실함과 놀라움에 대처하는 능력,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의도와 움직임을 좇는 능력 등이다. 그리고 자기 자신의 한계를 나타내는 능력("만일 내가 이것을 용인한다면, 나는 스스로 버텨내지 못할 것이다."), 신뢰와 이해가 가능한 맥락을 창출하는 능력, 그리고 자기 자신의 자유와 타인의 자유를 신중하게 상대하는 능력 등을 가리키기도 한다.
실천의 측면에서 볼 때 다원성을 상대하는 능력은 대단히 중요하다. 그러나 이론이나 실천의 준비 면에서 이 같은 능력은 상대적으로 거의 주목받지 못했다. 사람들은 이 주제를 기피하곤 했는데, 그 까닭은 "능력"이라는 용어가 엘리트주의와 능력주의(meritocracy)를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능력에 대한 관심은 시민들 간의 평등 및 그들의 자율성과 양립할 수 없지 않은가? 그들이 무엇을 할 것인지, 그것을 얼마나 잘하고 못하는지를 결정하는 것에 관해 책임을 갖는 것은 시민들 자신이 아닌가?
그러나 숙고해 보면 시민권을 행사함에 있어 능력이 차지하는 결정적 중요성을 인정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예를 들어 민주화는 참여자들이 회합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기량을 충분히 갖추지 못하거나, 도사리고 있는 위험에 대한 통찰이 부족할 경우 뒤틀리게 된다. 그리고 공직에 필요한 능력을 결여한 시민들은 형편없거나 심지어 파멸적인 지도자가 될 것이다. 시민권을 실천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최소치의 능력이다. 최대치가 아니라 최소치 말이다. 시민들은 실수를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능력의 결여가 실질적으로 파괴적인 지경에 이를 때, 최저선이 돌파되고 개입(intervention)이 발생한다. 필수적 능력을 결여한 시민들은 시민권의 독립적 행사를 일시적 또는 장기적으로 제한당하는 처지에 놓이게 된다.(예를 들어, 정신병원에 감금되는 경우)
심지어는 공화국조차도, 마지못해서이긴 하나, 결국에는 그런 식으로 시민들의 자유에 간섭하겠지만, 사태가 그런 지경에까지 이르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많은 일들을 한다. 예를 들어 학교 교육이나 정보, 보조금이나 권고가, 특정한 기량을 결여한 시민들에게 제공될 수 있다.
시민들의 능력에 훈련의 차원으로 접근하는 경우,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 두 가지 방식으로 진행되곤 한다. 너무 주관적이거나 예를 들어 훈련이 심리치료 형태를 취할 때 아니면 규범과 가치에 대한 합의를 주입하려 들 때처럼 너무 규범적이 되는 것이다. 전자 식 접근과 반대로, 필요한 것은 정신적 균형이 아니라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기량이라고 주장할 수 있다. (스스로를 표현할 수 없거나 심각한 정신질환을 앓는 사람들이 시민으로서 유능하게(competently) 행동할 수 없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 같은 정신적 "장애들"이 없다는 것이 유능하게 행동하는 데 충분조건이 되는 것은 물론 아니다.) 후자 식 접근과 반대로, 4장에서 주장한 것처럼, 규범과 가치에 대한 합의는 시민들 사이의 다원성을 효과적으로 조직하는 데 필수적이지도 충분하지도 않다고 주장할 수 있다. 그렇다면 시민들에게 필요한 것은 어떤 종류의 능력과 훈련인가?
일반적 규칙과 이론적 통찰은 중요한 역할을 하지만, 그 자체만으로는 유능하게 행동하는 데 충분하지 않다. 어떤 규칙이 언제 적용되는가를 알아야만 한다. 그리고 불확실성, 갈등하는 가치들과 소망들, 그리고 특유한 상황을 다룰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만 한다. 이런 류의 상황에서 유능하게 행동할 수 있으려면 실천적 판단력이 필요한데, 이 때 다양성과 특수성들에 대한 주의가 중심적 위치를 차지한다. 시민의 능력은 유연성(flexibility) 안에 존재하는데, 이로써 시민은 공화국의 역동적이고 다원적인 본성을 존중하는 방식으로 일반적 규칙·통찰과 특수한 상황들 사이를 매개할 수 있다.
이런 종류의 시민 능력은 어떻게 획득할 수 있을까? 요컨대 학습할 수 있는 것일까? 대다수 공민적(civic) 기량의 경우 답은 이렇다. 물론이다, 그러나 규칙과 사실들을 암기하는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획득된다. 능력의 요소들 규칙의 적용에 관한 실천적 판단, 결함 및 자신의 실패를 상대하는 능력, 그리고 상황에 대한 통찰력을 획득하여 적시에 정확한 방식으로 행동할 수 있는 능력 따위 뿐만 아니라, 회합을 유능하게 이끄는 등의 기량들은 많은 실천을 필요로 한다. 시민들이 이 같은 기량을 주로 배우는 것은 시민권에 관한 학문적 과정에서보다는 공민적 실천이나 제도들에 관여할 때다. 다른 시민들의 행동을 관찰하고 다양한 실천들에서 경험을 얻으면서 시민들은 사례들, 통찰들, 행동들의 목록을 쌓아 올린다.
목록은 시민 개개인의 실제 경험뿐만 아니라 타인들이 행동하는 것을 보거나 이야기를 듣는 것을 재료로 삼는다. 책임 포럼(responsibility forum)은 항상 구연(口演, storytelling)을 포함하거니와, 시민 능력에 관한 가장 중요한 학습 장소를 이룬다. 여기에서 이야기와 경험, 반성은 서로 얽혀 있다. 예를 들어 시민들이 판사 앞에서 해명/책임을 요구받을 때, 그에 대한 심문이나 재판이 실행되는 방식은 유능하고 책임 있는 행동에 대한 무언가를 가르쳐 줄 수가 있다. 행동, 그 행동에 대한 평가, 그리고 행동하는 방식에 대한 학습은 "거울들의 회랑"(hall of mirrors) 안에서 결합되는데, 여기서는 서로 다른 부분들이 각자 안에 반영된다.(Sch n 1987:220)
그러나 시민권의 행사 면에서 완벽에 도달하는 것이 능력의 요점이 아니라는 점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능력이 의미하는 것은 학습을 가로막는 장벽을 돌파하는 역량뿐만 아니라 환경 및 스스로의 한계가 부과하는 제한을 상대하는 역량이기도 하다. 불완전한 인간 세계에서, 스스로의 가냘픔을 인정하면서 그것과 함께 살아가는 것을 배우는 것, 또는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도움을 청할 수 있는 용기를 갖추는 것은, 아마도 지속적이고 완고하게 완벽을 추구하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능력을 이룰 것이다. 이 점에서 일정한 인내(tolerance)는 다른 사람들과의 상호작용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을 상대하는 데 있어서도 중요하다.
곤란한 상황에서 시민답게(civilly) 행동하는 것은 결정적인 시민 기량이다. 시민인륜, 예의(manners), 그리고 좋은 취향은 단순한 외양 이상의 것이다. 이들은 정치적 과정의 실질적 질과 성과를 공동결정한다. 나제쥬다 만델스땀(Nadezhda Mandelstam)(1974), 에드워즈 쉴즈(Edward Shils), 바츨라프 하벨(V clav Havel), 그리고 여타 많은 사상가들처럼 실체에 주로 관심을 가졌던 이들은 시민인륜 형태의 중요성을 강조해 왔다. 예의와 정중함이 허울에 불과한 외양에 머무는 또는 더 나쁘게는, 그것들이 사람들 사이의 상호작용에서 비열함과 불의를 강화시키는 상황들이 존재한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해서 예의가 없는 편이 나을 것이라는 결론이 나오는 것은 아니다. 예의와 시민인륜을 제쳐놓는 공동체에서는 사람들이 비열함과 불의에 훨씬 더 무방비상태가 된다. 일단 직접민주주의와 꾸밈없는 인간적 접촉에 동반되는 초기의 도취감과 선의가 닳아 없어지고 나면 말이다.
불행히도 시민인륜은 필수불가결할 뿐만 아니라 불충분하다. 이는 현실 정치 생활을 그렇게나 빈번히 특징짓는 폭력, 거짓말, 그리고 꼴사납고 이기적인 행태 앞에서는 무력할 수 있다. 따라서 시민 능력은 이것들을 다룰 수 있는 능력, 반대 당파와 어디서 선을 긋고 어디서 무기를 들고 싸워야 할지를 아는 능력 역시 필요로 한다. 쉽지 않은 일이다. 민주주의에서, 민주주의를 침식하는 정당들을 금지해야만 하는 것은 어느 지점인가? 기차역의 질서를 회복시킨다면서 당국의 명시적 명령도 없이 자신들이 마약중독자나 마약상이라고 의심하는 사람들을 뒤쫓는 해병대들에게는 언제 어떤 식으로 대응해야 하는가?
악은 분명한데도 싸우기 어려운 경우가 있다. 악을 정의하고 지각하는 데 모호함이 있어 문제가 되는 경우도 있다. 선물, 호의, 뇌물, 부패, 그리고 봉사의 대가에 대한 보상은 일상의 정치적 상호작용에 필수적인 "윤활유"(greasing)의 일부일 수도 있다. 이를 그저 무시하는 것이 시민들의 옳은 전략인 경우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 이때에도 마찬가지로 시민들은 언제 어떤 식으로 규칙을 구부릴지, 또 어디서 어떻게 규칙을 따를지를 알아야만 한다.
다원성의 조직을 지속시키는 결정적 측면은, 관련자들(parties)이 준거 틀이나 상호작용의 한 쪽 영역에 꼼짝 못하고 있을 때 목록 이내에서 전환할 수 있는 역량이다. 예를 들어 공식적인 회의가 진전을 보지 못할 때, 비공식적이고 은밀한 모임을 마련하는 것이 도움이 될 수 있다. 한 준거 틀에서 관련자들의 동일성과 위치를 움직이거나 인정하면 다른 영역에서 사태가 풀리고 다시 움직이는 데 도움을 줄 수도 있다. 이중적 틀은 관련자들에게 자신들 및 자신들의 관계를 고찰할 수 있게 해 주는 이심적(離心的, eccentric) 위치를 제공한다. 마찬가지로 유머(humor)는 해방적 결과를 낳는 좌표계의 재빠른 변화를 야기할 수도 있다. 우리가 웃거나 농담을 알아볼 때, 우리는 무언가 공통적인 것을 갖고 있는 것이다.(우리가 다들 웃긴 했지만 모두 같은 것에 대해서 그런 것은 아니었음을 발견하는 경우에조차, 이 사실 때문에 우리가 함께 웃을 수도 있는 노릇이다.)
이 모든 경우에서 시민 능력의 가장 중요한 측면은 상호 행동의 맥락을 창출할 수 있는 역량이다. 맥락이 없으면 의미도 없다. 그리고 의미가 없다면 인간 행동도 없다. 맥락과 의미의 관계는 산소와 인간 삶의 관계와 같다. 우리는 이용가능한 모든 공기를 들이마신다. 맥락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이용가능한 모든 것을 맥락으로 취급한다. 다른 맥락을 선택하고 바꿈으로써 다른 의미가 가능하도록 하는 것은 시민의 주요 기량이다. 차이 역시 차이로 지각되고 이해되려면 맥락이 필요하다. 어떤 종류의 맥락은 인간의 지향성이 작동할 때면 항상 현존한다. 차이들은 결코 맥락이 없지 않다. 맥락을 바꾸거나 풍부히 하는 것은 시민에게 어울리는 방식으로 차이들을 조직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일보다.
기량의 목록에서 혁신은 어떻게 일어나는 것일까? 잘못됐다고 느끼지만 기존의 목록을 통해서는 제대로 처리할 수 없는 상황들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임으로써다. 불의나 결함 있는 시민권의 상황에 관해 실질적이고 끈질기게 주의를 기울이면 차이들을 상대하는 방식 면에서 혁신으로 이어질 수가 있다. 이는 통상 고통스럽고 지루한 탐색 과정으로, 한 편으로 대담함과 공민적 용기를 다른 한 편으로 끈기와 인내를 시민들에게 요구한다. 이 속성들은 쉽사리 결합되지 않는다.
시민들의 능력은 다른 사람들뿐만 아니라 시민들이 행동하는 제도적 배경이나 기성의 방식에 의존한다. 부패한 정체(政體)나 외세의 점령은,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입헌 국가에서와는 다른 행동을 시민들에게 요구한다. 어떤 형태의 능력은 특수한 제도적 배경 안에서만 성공을 거둘 수 있다. 역으로 특정한 제도 안에서 작동하면 업무의 무력화나 맹목, 그리고 훈련된 무능으로 이어질 수 있다. 독자들은 각자 선호하는 사례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일차원적인 관리자, 정직하지만 우둔한 공무원, 또는 "준법적인" 강제수용소 지휘관 따위. 또 제도들은 유능한 활용에 달려 있다. 각료회의나 의회 같은 유용하고 시민권을 증진시키는 제도들이 제대로 기능하는 것은, 오직 사람들이 그것들을 유능하게 활용할 때다. 우둔한 각료는 자기 자신과 부서뿐만 아니라 각료회의와 의회까지 망칠 것이다.
제도들은 상호작용의 유형 및 상호작용을 위한 유형을 제공한다.(March and Olsen 1989; Douglas 1987) 다원적 사회들에는 다원성을 가공[process]하기 위해 고안된 많은 제도들이 있다: 대중매체, 법원, (문제를 마음껏 이야기하는) 대화, 치료법, 관리, 지방 의회, 공개토론, 조정(arbitration), 중재(mediation), 자유 언론, 의회, 당 대회 등. 이 중 어떤 것들은 오로지 갈등을 조정하는 데 맞춰져 있고, 다른 것들은 다원성을 조직하는 보다 일반적인 방향에 맞춰져 있다. 어떤 제도들은 엄격하게 정돈된 의식(儀式)을 제공하는가 하면, 다른 것들은 좀 더 비공식적으로 기능한다. 그러나 다원성의 가공 결과는 원칙적으로 결코 예정되어 있지 않으며, 이는 심지어 의식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이는 무엇보다 서로 다른 삶의 방식 사이의 "충돌"에 연루되어 있는 서로 다른 사람들의 유능한 기여에 달려 있다. 다원성의 조직은 그 참여자들의 유능한 임기응변과 번역을 필요로 한다 이는 단순한 복종이나 맹목적인 공식 적용을 훨씬 뛰어넘는 것이다.
시민들 사이의 다원성을 조직하는 과정은 보통 일정한 지점에서 엄숙한 행사나 정리되지 않은[of sorts] 의식을 포함하는데, 이는 관여된 당파들의 통일성을 재확립·재확인한다. 이 같은 정화와 재통합의 의식은 오염이나 시민인륜의 유대를 교란하는 위험에 대한 반작용이다. 자유민주주의에서 책임 포럼은 이 같은 의식의 유력한 형태다. 이런 포럼이 활성화되는 것은 사람들에게 가치 없는 고통을 주고 나쁜 것으로 경험되는 상황들이 발생할 때다. 포럼에서는, 이 상황을 낳은 사건들의 연쇄가 포럼에서 해명/책임을 요구받을 수 있는 사람들의 행위로 재해석되고 연결된다. 맹목적 역사와 사건들의 연쇄는 인간 행동의 이야기로 되풀이된다. 세상의 사건들(happenings)은 자신들이 한 일에 대해, 시민으로서, 해명/책임을 요구받을 수 있는 사람들이 결정한 결과로 파악된다. 포럼에서 그들은 이야기에 대한 나름의 판본을 제시하거나 또는 의무적으로 제시해야 할 수 있다. 이를 듣고 난 다음 포럼은 판정을 내리고 책임을 배정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포럼은 달갑지 않은 사건에 대한 보다 솔직한 인간적 책임이 미래에 가능하도록 과거를 재해석한다. 충격적인 결과들이 포럼의 소재가 되는데, 이곳에서 이야기들이 되풀이되고 시민들은 책임있는 행위자로 변환되며 규범들이 조정된다. 이 규범적인 조정에서 기소당한 시민의 목소리가, 결정적까지는 아니더라도, 중심적 위치를 차지한다는 점에 유의하는 것이 중요하다. 시민들은 다원성의 실질적 조직뿐만 아니라, 그것이 따라야 하는 규범들을 성찰하는 데도 참여한다.
공화국은 반드시 다양한 제도들을 갖추고 있어야 하는데, 이는 다원성을 상대하는 방식의 목록을 제공하거나 때로 강제함으로써 구성원들이 자신들의 다원성을 조직하는 데 도움을 준다. 다원적 사회는 이 같은 제도들 없이는 생각할 수도 없다. 그러나 이처럼 고급하고 분화된 제도 발전 역시 문제를 일으킨다.
첫째, 요청되는 지식과 기예들이 워낙 고도의 것이어서 법률가나 판사들 같은 전문가들의 도움이 필수불가결하다. 이 때문에 비전문가들이 전문가들을 상대하고 그들이 기여한 가치를 올바르게 평가하는 능력이 필요하다. 이는 전혀 간단치 않은 문제다.
둘째, 다원성을 가공하는 제도들에 접근하는 것이 문제가 될 수 있다 예컨대 전문지식의 비용이나 권력의 차이로 인해서. 어떤 사람은 접근이 용이할지 모르지만, 다른 사람은 거의 또는 전혀 접근하지 못할 수도 있다. 이런 경우, 시민권이 단순한 형식적 절차 이상의 것이라면, 국가(또는 다른 심급)는 시민들을 도와야만 한다. 그러나 이런 목적으로 만들어진 제도들은 국가 재정 문제나, 일부 시민들이 이 같은 제도를 필요 이상으로 이용하는 결과를 낳는다.
셋째, 제도들은 그것들이 더 이상 다원성을 적합하게 대표/표상할 수 없다는 의미에서 쓸모없게 될 수 있다. 결과적으로 제도들의 다원성 가공에 관해 아쉬운 점이 많을 것이다. 오늘날 사회에서 대표/표상은 점점 더 문제다. 대표/표상의 도식은 더 이상 맹목적으로 신뢰할 수 없다. 그 적용가능성 면에서 이를 점검·판단할 필요가 있다. 어떤 특별(ad hoc) 조정이 필요한 경우가 빈번하다. 이 특수한 다원성의 상황에서 분별 있게 활동될 수 있는 대표/표상의 도식이 무엇인가에 관한 판단은 점점 그 중요성을 더해가고 있다. 이 점에서 도움이 되는 전문가가 있는가, 아니면 시민들은 이 결정적 질문에서 스스로의 판단에 의지해야만 하는가?

다원성을 수용하기, 그러나 맹목적이지는 않게

다원성을 조직하는 데 무엇이 필요한지 이해하기 위해서 미시적 수준으로 내려가는 것이 필수적이었다 하더라도, 거기서만 머무를 순 없다. 미시적 교류는 거시적 결과로 응결된다. 더욱이, 거시적 세력들은 너무 강력한 나머지 미시적 수준, 개인적 선택과 동일성의 수준에 관해 얘기할 수 있는 자유를 전혀 남겨두지 않을 수도 있다.
다원성의 긍정적 수용과 결합된 미시적 시각은 이 같은 미시적 접근에서 비롯되는, 또는 이 때문에 강화되는 차별적 권력 효과와 불평등을 은폐할 수도 있다. 이는 거시적 수준으로 되돌아가야 할 또 다른 이유가 된다. 기존의 다원성에 대한 일반적인 긍정적 태도는 제한될 필요가 있다. 만일 그것이 제 3자, 보다 장기적인 결과, 그리고 누적되는 충격의 견지에서 볼 때 바람직하지 않은 결과를 초래한다면 말이다. 시민권은 단순히 두 사람 사이의 차이를 조직하는 것으로 국한되지 않는 무언가를 포함한다.
현대 사회에서 다원성의 중심적 장소는 권력 효과를 대면하면서 쉽사리 맹목으로 이끌릴 수 있다. 다원성은 분할 지배와 서열화·범주화를 통해 권력을 강화하는 데 활용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정치 투쟁과 철저한 연구의 삶 끝자락에서 벤야민 시예스(Benjamin Sijes)가 이끌어낸 결론에 귀기울여 보자. 그는 2차 세계 전쟁 중 네덜란드 유대인의 추방에 대한 저항의 가능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질문했다.

설사 유대인 시민들이 다른 [유대인] 평의회를 선출할 수 있었더라도, 사태와 관련해서는 어떤 선택권도 행사하지 못했을 것인데, 왜냐하면 독일인들은 오직 독일의 명령을 집행하는 평의회만을 받아들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 때문에 그(the) 유대공동체, 또는 이런저런(a) 유대공동체의 지도부에 누가 있었는지는 전혀 중요치 않았던 것이다. 유대 시민들이 존재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유대 평의회, 다시 말해 적절한 시기에 추방되기 위해 목록에 기재된 행정 단위를 통해서였다. "비개인화"(Depersonalization) 비록 사회적 의미지만 는 그들이 고립되었다는 사실로부터 초래됐다. 그들은 더 이상 "완전한" 사람이 아니었는데, 왜냐하면 비(非)유대인들에 의해 배척받고 또 이런저런 방법으로, 또 공포 때문에, 배제되었기 때문이다. 이 유대인들은 더 이상 과거 현실의 일부가 아니었으며, 무엇을 해야 할지 알지 못했다. 그 이전의 어느 때보다, 그들은 무자비한 권력, 그들이 전혀 이해할 수 없었던 권력의 노리개에 불과했다. 이는 그들을 무력하게 그리고 행동할 능력이 없게 만들었다. 그들은 비합법적인 조력자들에게 손을 내밀 수 없었고, 이들은 이들대로 현실적 난점들은 차치하더라도 유대인들에게 손을 내밀 수 없었다. 그리하여, 유대인의 80% 가량이 죽음을 맞이했던 것이다. (Sijes 1974:149)

이는 서로 다른 부류의 시민들 사이의 구별이 도입될 때가 저항에 가장 좋은 순간이었다는 것을 함의하는 것 같다. 이 때는 공통적인 시민권에 기초한 시민들의 공동 행동이 아직 가능했다. [그러나] 그 후, 불의가 훨씬 공공연해졌을 때는, 공동 행동의 토대와 계기가 사라져 버렸던 것이다.
다원성의 권력 효과가 시민의 관점에서 수용불가능한지 여부에 관한 질문에 답할 때, 영역들을 구분해 볼 수 있다. 공적-정치적, 공적-사회적, 그리고 사적 영역. 첫 번째 영역은 사회 조직(의 조정)에 관한 정치적이고 정부적인 결정이 만들어지는 곳이다. 이 과정의 참여자로서 그리고 영향력의 원천으로서 시민들의 평등은 핵심 가치다. 다원성은 개별 시민들의 자유 선택에 의해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구성되고 확립되어야만 한다. 바로 이 때문에 선거가 주기적으로 치러지는 것이고, 인민들의 대표자들이, 일단 선출된 다음에는, 자신의 지지자들과 반드시 의논하지 않고서도 투표할 수 있는 것이다. 다원성이 이 자유를 위협하는 권력 효과를 가질 때(예를 들어 히틀러에 대한 민주적 권력부여), 개입이 요청된다.
공적-사회적 영역은 거리와 같은 (준)공적 지역에서 사람들의 상호작용을 가리킨다. 여기서는 개인적 자유가 중심이다. 원하는 대로 오갈 수 있는 자유, 그리고 자신의 고유한 생활양식을 가질 수 있는 자유. 품위의 규칙과 시민법이 이 상호작용을 규제한다. 이는 상당한 다원성과 권력 차이를 허용한다. 시민권의 관점에서 볼 때, 선을 긋는 것은 오직 이 차이들이 공적-정치적 영역에서 시민권의 허용 및 행사를 실질적으로 불가능하게 만들 때에 국한된다. 예를 들어 거리에서의 테러나 작업장에서 협박을 생각해 보라. 가정과 교우, 그리고 사교 클럽 등의 사적 영역에 대한 공적 개입은 더 엄격하게 제한되어야 한다. 그렇지만 거기에서조차, 다원성의 권력 효과는 시민권에의 접근이 실질적으로 환상에 머물도록 만들 수 있을 정도다.
이 같은 구별은 문화적 소수자들의 경우를 들어 예증할 수 있다. 준법의 책임을 제외하고는, 소수자들(의 구성원들)은 공동체들을 형성하고 유지할 자유를 가지며, 자신들의 고유한 문화를 선전할 자유 역시 마찬가지다. 다원성을 허용하는 공화국은 이 자유를 증진시키며 심지어 이런 목적을 위한 수단을 제공하기까지 할 것이다. 소수자들은 "유일한"("the") 민족 문화를 반드시 따를 필요가 없다. 유일한 요구 사항은 법을 준수하고 공적-정치적 영역에서 충분히 유능하게 행동하는 것이다. 정치적 통합은 의무적이지만 사회문화적 통합은 그렇지 않다. 소수자들에게는 "정상적인" 민족문화 및 생활방식의 권력으로부터 보호받을 권리가 있다.
공화국의 간섭이 이런 한계들을 넘어 확장되는 두 가지 상황이 있다. 첫 번째는 노예적 관계가 시민의 평등한 지위에 대한 접근을 실질적으로 방해하는 경우다. 다른 상황은 소수자 공동체들이 강압적 성격을 과시하면서 구성원들이 공동체를 떠날 수 있는 공민적 자유를 좌절시키는 경우다. 다원성을 공표할 때 생길 수 있는 이 같은 효과들은 반드시 공화국에 의해 엄격히 제한되어야 하는데, 이 때 아무리 어렵더라도 필요 이상으로 다원성을 파괴하지 않아야 한다.
다원성은 시민적 작업의 일차적 초점이다. 시민들은 적대적 협력을 통해 이 기본 소재를 살아갈 만한 정치 문화로 전환한다. 다원성은 시민들에게 교란적(이거나 공공연하게 위협적)이지만, 또한 시민들이 행동할 수 있는 토대다. 연료와 마찬가지로 그것은 우리를 움직일 수 있게 해 주지만, 또한 화재를 일으킬 수도 있다. 민주 공화국에서 다원성은 환영할 것도 배척할 것도 아니다. 그것은 운명 공동체 안의 모든 참여자들의 시민권이 보장되는 방식으로 연관된 이들에 의해 변혁되어야 할 현실로 받아들여야만 한다.
이 장에서, 우리는 현대 사회의 다원성, "우리가 지금 존재하는 방식"을 그려 보았다. 이 그림은 세 가지 인정 지점으로 특징지어진다.

1. 미지의 사회
2. "우리는 이제 모두 현지인이다" (Geertz 1983: 151)
3. "만약 사자가 말할 수 있더라도, 우리는 그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Wittgenstein 1958:223).

첫 번째 표현이 우리에게 상기시켜 주는 것은, 다원성과 차이가 중심적 위치를 차지한다는 점, 다원성은 주어진 것이 아니라 발견되어야 할 것이라는 점, 그리고 미지의 사회의 사람들이 다원성과 함께 살아가기 위해 학습한 방식에서 우리가 배울 수 있다는 점이다. 두 번째 진술이 지적하는 것은, 다원성이 권위적인 방식으로 조직될 수 있게 해 주는 특권적이고 일반적인 언어 및 합리성이 준비되어 있지 않다는 것, 그리고 우리는 하나의 합리성을 다른 합리성으로 번역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세 번째 진술이 지시하는 것은 공통의 언어만 가지고는 상호 이해를 보장하기에 충분치 않다는 것, 그것은 또한 생활 방식과 자명한 행동 방식의 문제이기도 하다는 점이다. 사자는 양이 아니며, 사람도 아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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