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광주전남지부


사회운동

사회진보연대 계간지


2007.3.7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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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호_여성운동_정지영.hwp

[기획연재② 한국여성운동사] 한국여성단체연합과 성주류화 전략 평가

정지영 | 정책편집부장
최근 한국여성단체연합(이하 여연)을 중심으로 한 주류 여성운동의 현주소를 분명하게 보여주는 두 가지 사건이 있었다. 하나는 2006년 3월 한명숙 총리가 임명되는 과정에서 드러난 여성단체들의 놀라운 지지였다. 여연을 비롯한 여성단체들은 한명숙 총리가 후보로 거론되면서부터 임명을 희망한다는 성명서를 냈고, 대통령이 총리로 지명했을 때와 국회에서 비준되었을 때 각각 환영 논평을 내어 여성 총리의 탄생을 한국 여성운동의 커다란 과제이자 성과로 부각시켰다. 이와 더불어 전효숙 헌법재판소 소장 후보자의 내정, 임명에 대해 각각 환영 성명과 국회의 임명 동의안을 촉구하는 성명을 내기도 했다. 다른 하나는 여연이 <저출산․고령화대책 연석회의>에 참가하여 ‘저출산․고령화문제 해결을 위한 사회협약’ 체결에서 적극적 주체를 자임하면서 정부의 ‘직장과 가사의 양립’이라는 여성정책을 압박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나아가 여연은 2006년부터 ‘빈곤의 여성화 해소’를 운동의 주요 과제로 제시하고 있는데, 이는 빈곤 여성의 탈빈곤 지원을 주내용으로 하고 한부모 빈곤 여성에게 육아, 가사, 간병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는 쿠폰 지원 사업을 구체적인 계획으로 추진하고 있다.
이 두 가지 사건에서 심각하게 고려해야 하는 점은, 과연 이런 대응이 현실의 대다수 여성이 처한 위기를 해결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오히려 이를 적절히 관리하는 효과를 내는 것은 아닌가? 자본의 위기를 노동자민중에게 전가하는 신자유주의 정책 하에서 여성의 위기는 심화되고 있다. 외환위기 이후 본격적으로 추진된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은 이런 여성의 위기를 더욱 가중시켰다. ‘남성 가장’이라는 가정에 근거하여 여성 1순위 해고가 자행되었고, 정리해고와 대량실업의 양산 및 실질임금의 하락으로 불안정해진 가계소득은 여성의 저임금 노동과 무임 가사노동을 더욱 가중시켰다. 여성들의 ‘출혈판매’가 점차 심각해지면서 가족의 위기도 수면 위로 부상했다. 이런 여성의 위기는 최근 ‘저출산’이라는 현상으로 드러나고 있으나, 이마저도 여성의 출산의 의무를 강요하고 사회적 일자리를 통한 여성 노동력에 대한 착취를 심화하는 대응이 추진되면서 여성의 부담은 더욱 커지고 있는 상황이다.
이런 상황은 분명 여성운동과 노동운동 양자에 새로운 과제를 제시한다. 하지만 외환위기 당시 노동자 운동이 여성들을 희생하여 자신들 앞에 닥친 위기를 극복하려는 불가능한 시도를 통해 자본의 전략과 공명했으나 현재 전반적인 노동의 유연화 속에서 그 후과를 여실히 경험하고 있다면, 여성운동은 이 위기를 여성 의제를 전면화하고 요구할 수 있는 기회로 인식함으로써 자본의 전략과 공명했다. 2001년 모성보호법 개정을 통한 산전산후 휴가 90일 확보, 2002년 정당법 개정을 통한 할당제 시행, 2005년 호주제 폐지, 2005년 성매매 방지법 제정, 김대중 정부부터 추진된 ‘직장과 가사의 양립’을 기조로 하는 여성정책에 대한 정책개입, 여성부 장관 ‘배출’ 등 여연을 위시로 한 여성운동은 외환위기 이후 그 어느 때보다 활발하게 국가 정책에 개입하고, 여성 관련 의제들을 법제화해왔다. 하지만 이런 활동이 대다수 여성들의 현실을 개선하지는 못했고 오히려 여성의 위기는 심화되었지만, 여성운동이 그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이 되기는커녕 신자유주의 하에서 저임금의 유연한 노동으로서 여성을 활용하려는 정부의 정책을 뒷받침하고 있는 형국에 처해있다.
이 글은 남한 여성운동의 대표성을 획득하고 있는 여연의 운동과 역사를 중심으로 현재 여성의 위기에 대한 여성운동의 대응을 평가해보고자 한다. 현재의 위기는 여성의 자기조직화에 기반하여 여성의 권리를 보편화하고 여성을 억압하는 사회구조를 바꿔내기 위한 운동을 통해 극복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여연을 위시한 주류 여성운동은 여성운동의 독자성과 대중성 확보라는 이름으로 분리주의를 강화하고, 여성들의 요구를 법을 통해 제도화하는 방식을 택했다. 여성운동의 이런 과정을 살펴봄으로써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반대하는 새로운 여성운동의 출발점을 확인해보고자 한다.

한국여성단체연합의 전사(前史)와 결성

여연을 중심으로 한국 여성운동의 역사를 구성하는 주류적인 인식은 1980년대 여성운동을 크게 세 시기로 구분한다. 첫째는 1980년대 출현한 ‘진보적’ 여성운동이 발전하면서 그 수렴으로 여연이 결성되고, 여연이 ‘민족민주운동의 부문운동’이라는 위상으로 활동하는 시기다. 두 번째 시기는 여연이 1987년 6월 항쟁 이후의 국면을 민주화의 확대로 규정하면서 여성운동의 대중화, 독자성 구축을 기치로 노선변화를 모색하던 때다. 1991년, 92년의 여연 정책수련회가 그 계기로 인식된다. 셋째는 1995년 즈음 영페미니스트의 등장으로 인한 주체의 확대와 영역의 다양화 시기다. 여연 자체적으로 본다면 이 시기는 성주류화 전략을 채택하면서 여연이 주류화되는 시기라 볼 수 있다.

1) 진보적 여성운동의 출현과 ‘성/계급 논쟁’
여성억압의 원인과 구조, 그리로 이를 지양하는 방향을 수립하는 것에서 역사적 가족형태를 인식․분석하는 것이 중요하다면, 남한 여성운동의 역사 속에서 이런 인식은 어떠했는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남한에서 ‘여성해방’ 이념을 내건 단체들은 1980년대부터 생겨나기 시작했다. 이들은 그 이전의 여성단체들을 ‘보수적’인 관변단체라 규정하면서 분리정립을 시도했고 스스로를 ‘진보적’ 여성운동으로 명명했고, 대표적인 단체로 <여성평우회>(1983. 6), <여성의 전화>(1983. 6), <또 하나의 문화>(1984. 12), <민주화운동청년연합 여성부>(1984. 4)를 들 수 있다.
‘진보적’ 여성단체들이 생겨나고 그 활동이 활발해짐에 따라 여성억압의 기원 및 본질, 자본주의 하에서 여성억압의 문제, 여성억압의 극복론(주체와 방향)을 둘러싼 논쟁이 벌어졌다. 남한에 여성해방 이론이 도입된 것은 1970년대 자유주의 페미니즘과 급진주의 페미니즘의 저작들이 번역되면서부터였다. 1970년대 중반 이후 소개된 사회주의 페미니즘 이론은 자유주의 페미니즘과 급진주의 페미니즘을 비판하면서 자본주의와 가부장제를 여성억압의 본질로 파악하는 입장을 내세웠다..1) <여성평우회>는 1985년부터 심각한 내부논쟁을 벌이다가 1986년 결국 해소에 이르게 되는데, 이 논쟁은 여성운동과 사회운동의 관계, 여성운동의 과제, 여성운동의 위상을 둘러싼 대대적인 논쟁이었다. 이를 계기로 운동진영 내에서 한국여성운동의 주체와 대상, 과제 등의 규명을 위한 여성억압의 구조, 여성문제의 기원과 본질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가 시작되었다. 이때의 논쟁은 이른바 ‘성/계급 논쟁’이라 지칭되는데, ‘사회주의 페미니즘(이중체계론)’과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즘(단일체계론)’ 사이의 논쟁이었다. 이 논쟁에서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즘의 입장을 가진 이들은 1970년대 후반부터 남한 여성학계를 풍미한 사회주의 페미니즘을 비판하면서 여성문제가 사회전반에 걸친 구조에서 파생되는 문제이며 따라서 그 해결방식도 전체 사회운동과 동시적이고 통일적으로 이루어져야한다는 기본입장.2) 을 전제로 논의를 전개했고, 현재 여연을 구성하고 있는 여성운동 진영에서 대체로 이 입장을 수용하면서 논쟁은 일단락되었다.
이 논쟁은 남한에서 여성운동의 전망을 밝히기 위해 여성억압의 원인을 분석하려는 시도로서 의미를 가진다. 이 논쟁을 통해서 당시 여성운동 진영은 여성억압의 원인과 구조가 자본주의 체제와 별개가 아니라는 점을 인식하고, 여성운동이 사회변혁적인 지향과 과제를 가져야 한다는 점을 제기했다. 그리고 기층여성, 특히 자본주의 하에서 여성이자 노동자로 이중의 착취를 당하는 여성노동자들이 운동의 주체로 인식되었고, 기혼여성(주부)도 여성노동자의 동일성으로 위치 지웠다. 하지만 이 논쟁은 왜 여성이 그러한 이중의 착취를 당하는지에 대한 질문을 제기하지 못했고, 따라서 성차별로 인한 착취와 자본주의 계급착취는 단지 기능적인 결합을 넘어서지 못했다. 왜 여성이 가족 내에서 가사노동의 일차적인 담당자가 되는지, 지배적인 여성성과 남성성은 어떻게 형성되고 재생산되는지, 가족 내에서 여성의 섹슈얼리티는 어떻게 통제되고 억압되는지 등의 문제가 공백으로 남았던 것이다.
더불어 남한 자본주의와 남한 가족의 구체적인 형태에 대한 분석 또한 필요한 문제다. 남한에서는 1961년부터 시행된 가족계획 사업으로 소가족화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으며, 경공업 중심의 수출지향적 발전 전략은 노동력 확보를 위해 농촌의 인구를 도시로 집중시키는 과정과 동시에 이루어졌다. 특히 많은 미혼 여성들이 마산 등의 수출자유지대와 경공업 지대에 유입되었는데, 이 때 여성은 자본이 보기에 값싸고 유순한 최상의 노동력이자 가족에게는 생계를 위한 일차적인 희생양이었다. 이들은 대부분 저임금 장시간 노동, 성적인 폭력과 희롱, 열악한 노동조건을 감내하면서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다. 이들에게 결혼은 고된 공장생활에서 벗어날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방안이었는데, 실제로 당시 한 조사에 따르면 여성노동자의 58~68%가 결혼 후 직장을 그만둘 생각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들이 결혼 후에 노동을 그만둘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이 여성들은 결혼으로 공장노동자, 빈농, 도시빈민의 아내가 되었고, 양육과 가사노동을 병행할 수 있는 비공식 부문에서 계속 일해야 했다. 실제 1970년대 여성노동자들의 투쟁이 촉발되고 이들이 노동운동의 주요한 세력이 되었지만, 대다수의 여성노동자들은 노동운동에 참여한 경험이 있음에도 결혼과 더불어 노동현장을 떠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이런 상황은 남한의 가족 단위가 소가족화, 핵가족화되는 과정과 맞물려있었고, 1980년대에도 지속되고 확대되었다. 이런 상황은 여성이 왜 결혼을 자신의 생존전략으로 택하게 되는지, 가족 내에서 여성이 이중의 착취를 감내하게 되는 원인은 무엇인지에 대한 객관적인 분석의 필요성을 제기한다.
하지만 여성억압의 원인과 구조를 인식하기 위한 논쟁은 이런 분석들을 공백으로 남긴 채, 이후 남한 여성운동 내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이런 공백은 남한 여성운동이 아메리카적 핵가족 쟁취를 자신의 목표로 가지게 되는 역설적인 상황을 낳았고, 더불어 1990년대 중반 영페미니스트들이 섹슈얼리티에 대한 권리를 전면화하며 등장하게 되는 여지를 남기게 되었다.

2) 여연의 결성
‘성/계급 논쟁’을 통해 당시 여성운동 진영은 ‘기층여성 중심성’과 ‘사회변혁운동으로서 여성운동’이라는 규정을 수용했다. 이 때 ‘기층여성’이란 생산직 여성노동자, 여성농민, 빈민 여성을 말하며, ‘사회변혁운동으로서 여성운동’이란 민족민주운동의 부문운동으로서 민주화 투쟁에 복무하는 여성운동을 말한다. 이런 논쟁과 그 이전부터 활성화되어온 여성들의 생존권 투쟁과 여성단체 운동을 수렴하면서 1987년 21개 여성단체들은 여연을 결성하였다. 여연 결성 이후, ‘기층여성 중심성’은 주로 여성노동자들을 지원하는 단체들이나 분과를 구성.3) 하여, 이들의 투쟁을 지지․지원하는 활동이나 노조건설을 위한 교육 활동, 모성보호, 고용안정, 평등권 등의 문제를 사회 여론화하는 활동으로 드러났다. <한국여성노동자회>가 결성되고 지역별 여성노동단체들이 생겨났고, 여연 소속 단체들도 기층 여성지원분과를 구성했다. ‘민주화운동에 복무하는 부문운동으로서 여성운동’의 실천은 주로 상층을 중심으로 전체 민족민주운동과의 연대 속에서 이루어졌다. 박종철 열사 추모 시위 참가, 호헌철폐를 위한 철야농성 참가, 1987년 대선에서 비판적 지지 입장 표명, <조국의 평화통일을 위한 민주단체협의회> 가입,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 가입 등이 여성운동이 벌였던 민주화 투쟁으로 거론된다. 하지만 이런 활동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기층여성 중심성과 민주화 투쟁이 어떤 식으로 결합되는지 모호하다는 점이다. 국가기구에 의해 자행된 성폭력 문제가 민주화 투쟁과 여성 문제를 직접적으로 매개하는 유일한 사안으로 인식되었다..4)
1987년 6월 항쟁 이후 여연에게 ‘민주화 투쟁에 복무하는 여성운동’이라는 지향은 즉시 모호한 것이 되었다. 여연은 6월 항쟁 이후를 “불완전하고 왜곡된 상태이긴 하나 자율적인 시민사회 영역이 구축된” 상황으로 인식했다. 이런 인식 하에서 여성노동자들에 대한 지원은 여성노동자들의 요구를 수렴하여 법을 제․개정하는 것에 치중하는 것으로 드러나고, 민주화 투쟁은 상층 중심의 가두시위 결합을 중심으로 드러났다.
하지만 이런 활동을 통해서 오히려 알 수 있는 것은 기층여성 중심성과 사회변혁운동으로서 여성운동이라는 지향이 분리되고, 기능적으로 결합하고 있다는 점이다. 여성운동의 주체와 전망이 분리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여연이 민주화 이후 여성운동의 독자성을 강조하며 사회변혁성을 탈각하고 제도화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여연 결성 이전, 그 기반이 되었던 여성운동과 ‘성/계급 논쟁’은 비록 한계가 있긴 했어도 자본주의 하에서 여성억압의 문제를 분석하려는 시도를 보였지만, 결국 그 시도는 좌초되고 ‘기층여성 중심성’과 ‘민주화 투쟁의 부문운동으로서 여성운동’이라는 규정만이 남았다. 여연의 결성은 이런 시도의 좌초와 동시적인 과정이었고, 이런 좌초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파악하기 어려웠다. 결국 여연은 결성과 거의 동시에 6월 항쟁을 겪으면서 급격히 제도화, 대중화를 지향하게 된다.

여성운동의 대중화, 독자화

1987년 이후 여연의 실제 중심 활동은 제도 개혁 차원의 법제화 운동으로 옮아간다. 1988년 여연의 부회장이었던 박영숙 씨가 국회의원으로 당선되는데, 이를 계기로 여연은 가족법 개정, 남녀고용평등법 개정, 영육아보육법 제정 등 법제화 운동을 진행하게 되고, 투쟁의 성격은 약화되면서 압력단체의 성격이 강화되었다. 1987년 6월 항쟁과 노태우 정부의 등장 이후 운동 진영 내에서는 이런 상황을 어떻게 인식할 것인지에 대한 논쟁이 벌어졌지만, 여연은 민주화 이후 ‘신속하고 유연한’ 대응을 통해 국가와의 관계를 재정립한다. 이 시기 여성정책과 관련한 여성운동의 태도 변화가 나타났는데, 여성적 이해를 민주화 문제와 분리시켜 정책화하기 시작한 것이다. 여성운동 진영이 1980년대 말 법제화 운동에서 일정한 성과를 거둘 수 있었던 것은 노태우 정부의 여성정책에 대한 태도 변화와도 관련이 있다. 이런 상황은 1980년대 성장한 여성운동의 영향력과 이에 대한 국가의 대응, 남한 자본주의 발전 전략의 변화가 맞물려 이루어진 것이다.
1980년대 기층 여성들의 생존권 투쟁과 기층여성의 투쟁을 지지․지원하는 여성운동 단체들의 성장이 지속되었는데, 1985년 구로동맹파업에 여성노동자와 여성운동 단체들의 적극적인 결합은 이를 더욱 가속화했다. 특히 1987년 7․8․9월 노동자 대투쟁에는 여성노동자들이 여성으로서의 요구를 제기하면서 결합했는데, 임금, 휴식시간, 장기근속수당, 상여금, 가족수당 등에서의 차별철폐 요구와 모성보호 등의 요구가 제기되었다. 뿐만 아니라 빈민, 농촌 등의 지역별 운동에도 여성이 활발하게 참가했다. 이런 여성운동의 성장은 국가의 여성정책이 변화하게 된 주요한 동인 중 하나로 꼽을 수 있다.
더불어 국제적인 차원에서 여성을 발전과정에 통합시키려는 흐름이 등장했다. 1975년 멕시코시티에서 열린 제1차 유엔여성대회는 발전 과정에서 여성의 역할에 초점을 맞추면서 ‘발전에서의 여성’(WID, Women in Development) 접근을 채택하고 ‘세계 여성의 해’(1975~1985)를 선포했다. 이에 따라 여성이 발전에 기여하고 그로부터 이익을 공유할 수 있도록 여성의 훈련, 고용에 대한 접근 기회를 강조했다. 이러한 국제적 흐름 속에서 전두환 정부는 <한국여성개발원>과 <여성정책심의위원회>를 설립하고(1983), 『여성발전기본계획』.5) (1985)을 수립한다. 이 기본계획의 여러 프로그램이 현실화하기 시작한 것은 노태우 정부 이후의 일이고, 노태우 정부는 여성관련 행정기구인 <정무장관(제2실)>을 발족(1988)하면서.6) 본격적인 여성정책을 입안․실행한다.
정부의 이런 여성 정책은 전두환 정부 이후 본격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한 중화학공업 중심의 수출산업 육성 과정에서 나타난 변화에 대한 대응이기도 했다. 우선 경공업 중심에서 중화학공업 중심으로 산업구조가 재편되면서 노동시장 전반의 구조가 변화했다. 미혼 여성노동자들의 사무직, 서비스직 고용이 증가하고 더불어 기혼 여성노동자들의 비율도 1980년대에 크게 늘었다..7) 이는 1970년대 저임금 미숙련 노동력으로 경공업 수출산업에 고용되던 미혼 여성노동력이 기혼 여성노동력으로 대체되는 경향을 반영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런 상황은 국가가 여성인력활용이나 모성보호에 관심을 가지게 된 배경 중 하나다. 더불어 가족 구조의 변화에 따른 국가의 정책변화도 여성정책의 도입과 실행의 조건 중 하나였다. 1987년 7․8․9월 노동자 대투쟁에서 한 가지 특기할 만한 것은 ‘가족투쟁’이 처음으로 출현했고, 노동자 가족이 매우 활발한 투쟁을 벌였다는 점이다.8) 이는 1960년대 가족계획 이후 나타난 핵가족화가 노동자 계급의 일부로 확산되어 정착되고 있음을 보여준다.9)
이렇듯 1980년대 말 남녀고용평등법의 제․개정, 가족법 개정, 모자복지법 제정 등의 법제화 운동이 가능했던 배경에는 여성운동의 성장뿐만 아니라 국제적인 흐름과 남한의 사회, 경제적인 변화가 있었다. 하지만 여연은 이런 상황을 국가를 통해 여성의 이해와 요구를 실현할 수 있는 기회로 인식했다. 특히 여연은 남녀고용평등법의 재정과 개정 운동을 주도했고, 1989년 3월 차별정의 규정, 동일노동 동일임금 규정 신설, 육아휴직기간의 근속기간 포함, 위법 시 처벌 강화를 골자로 하는 개정안이 국회에서 통과되었다. 개정안 통과는 “새로운 차원의 ‘차별의 정의’를 도입함으로써 여성에 대한 잠정적 우대조치와 모성보호가 차별로 간주되지 않게” 된 계기로 평가되며, 이를 계기로 “여성운동은 정부의 여성정책에 개입하기 시작하여 여성주의 관점으로 정책 틀을 변화시켜가기 시작했다.”10)
이런 상황에서 여연은 1990년 이후 여연 운동의 방향, 방식, 주체 설정의 문제를 재구성하기 위한 본격적인 논의를 시작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이 논의는 “사회주의권의 붕괴로 인한 운동지형의 변화, 3당 합당으로 인한 군부정권으로서 지배정권의 성격 약화, 시민사회 영역의 확장”이라는 인식 하에 제기되었다. 사실 3당 합당으로부터 문민 정권 등장에 이르는 과정은 민중의 민주주의를 확대하는 것과는 무관하고 오히려 남한 사회의 신자유주의 통치성을 확립하기 위한 ‘협상된 이행’의 과정이었다. 하지만 남한 여성운동이 마르크스주의와 결합하기 위한 시도가 좌초된 이후 지속적으로 강화된 분리주의적인 경향은 이를 ‘민주화의 확대’와 여성의 이해를 국가에 요구할 수 있는 기회의 확대로 해석하고 이러한 통치성에 적극적으로 편입하는 방식을 채택한다. 여연은 1990년부터 1992년까지 여성운동의 방향 전환을 모색하는 정책수련회를 개최했는데, 논의는 ‘기층여성 중심성’에 대한 비판으로부터 출발했다. 1991년 정책수련회에 「90년대 진보적 여성운동의 진로」라는 글이 제출되었다. 이 글에는 1980년대 후반에 이르러 제 계급․계층 여성대중들의 조직화가 중요한 과제로 부상했고, 여성노동력계급 구성상의 변화(고졸 단순사무직 여성노동자의 급증, 기혼 여성노동자의 증가), 미조직 여성대중들(사무직 여성노동자, 생산직 기혼여성노동자, 중간층 전업주부)의 부상이 진보적 여성운동의 주체 확대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 상황임에도 여연과 여연 소속 단체들의 사업 방향과 방식에서 여전히 생산직 여성노동자에 대한 편중이 나타나고 있다는 입장이 담겨있었다. 여연은 이 글로 시작된 논의를 통해서 여성운동의 변혁적․총체적 전망을 견지하되 독자성을 강화하여 운동의 영역을 확대하고 다변화 할 것, 기층여성 중심주의가 갖는 국지성을 극복하고 여성운동의 주체를 사무직, 주부 등 제 계층으로 확산할 것, 생산현장에서 가족으로 운동의 중심을 옮겨 재생산 역할 담당자인 여성과 직결된 환경, 교육, 성, 문화, 이데올로기 차원으로 운동의 영역을 확대할 것, 직접적인 정치투쟁보다는 지방자치시대에 맞는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하고 정책대안을 모색할 것을 여성운동의 방향으로 합의한다.
1980년대 말, 1990년대 초 3저 호황을 계기로 재벌 중심의 수출지향적 산업화는 남한 경제에 엄청난 성장을 가져왔다. 이런 성장은 중산층과 수출을 주도하는 부문의 대공장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가족임금을 실현할 수 있는 토대가 되었다. 하지만 대다수 노동자 계급의 가족은 가족 구성원 다수의 노동을 통해 생존하는 전략을 유지해야만 했다. 이런 상황에서 많은 여성노동자들은 결혼 후에도 공식, 비공식 부문에서 노동하며 가계의 소득을 벌충했지만, 가사노동의 일차적 책임자라는 여성에게 할당된 지위는 이들의 노동을 비가시적인 것으로 만들었고, 저임금을 정당화했다. 노동자 운동이 대공장 정규직 남성 노동자 중심으로 재편되는 과정에서 노동자 운동 내에서 이들의 존재는 사라졌고, ‘주부’라는 이름으로 동일화11) 되면서 여성운동에서도 사라졌다.12) 「90년대 진보적 여성운동의 진로」에서 주체 확대 문제를 제기한 것에서 볼 수 있듯이, 여연은 이 당시 여성노동자들의 상태와 가족의 변화를 인식했으나 새로운 여성대중운동을 모색하기보다는 오히려 여연 운동의 제도화, 대중화, 독자화를 전면화하는 이유가 되었다. 이러한 노선 변화에 따라 여연은 여성 의제의 제도화를 위해 여성의 정치세력화 시도를 본격화하고13) 운동의 전문성을 갖추기 위한 노력을 배가14) 한다. 더불어 대중적인 신뢰확보와 정부와의 관계 정립을 새로이 하기 위해 사단법인화를 추진15) 한다.
이는 여연이 이 시기를 거치며 이후 ‘성공적으로’ 주류화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는 의미다. 국가와 파트너쉽을 형성하면서 정책을 통해 여성의 의제를 실현한다는 것은 여성 억압의 구조 자체를 철폐하기 위한 사회변혁적 지향을 포기한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자본주의 구조와 무관한 ‘여성의 이해’가 존재한다는 관념이 일반화되고, ‘가족법 개정’, ‘성폭력 특별법 제정’ 운동에서처럼, 결코 계급적으로 이해가 같지 않은 여성들이 ‘사안’에 따라 ‘여성’의 이름으로 연대하는 방식이 여성운동의 일반적인 방식으로 자리 잡고 여성운동의 대표성을 획득하게 되는 것이다. 문제는 이에 포괄되지 않는 노동자, 농민, 빈민 여성의 현실은 은폐되거나 필요에 따라 여성운동에 동원된다는 점이다.

1995년 베이징여성대회 참석과 이후 성주류화 전략

1) 성주류화 전략의 채택 배경
성주류화 전략(Gender Mainstreaming Strategy)16) 은 1995년 베이징에서 열린 제4차 유엔여성대회에서 채택된 전략이다. 이는 1985년 나이로비에서 채택된 ‘전향적 전략’에 대한 평가를 토대로 여성발전 전략 목표로 채택된 전략이다. 성주류화 전략은 기존의 WID 접근이 여성을 기존의 재생산자의 역할을 그대로 인정한 채 생산자로서의 역할을 부가하여 기존의 틀 속에서 자원의 재분배를 추구하는 한계를 지녔다는 평가로부터 출발한 ‘젠더와 발전’(GAD, Gender and Development) 전략에 기반을 두고 있다. GAD 접근은 남녀 관계 자체에 초점을 두고 기존의 틀을 바꾸는 것을 요구하며, 이를 위해 정책결정과정에 성인지적 관점이 통합되어야 함을 주장했다. 하지만 GAD 접근은 자원과 제도 등의 부족으로 실제 실행 상에서 어려움을 겪었고, 이에 주류의 모든 영역에서 GAD접근을 가능하게 하는 제도적 장치와 전략에 초점을 둔 성주류화 전략이 채택되었다.
여성과 발전 사이의 관계에 초점을 맞춘 연구와 페미니스트들의 노력이 1975년 1차 유엔여성대회를 기점으로 가시화되고, 이후 꾸준히 변화의 과정을 거치게 된 배경은 무엇일까? 물론 이는 발전 과정에서의 여성의 역할과 발전이 여성에게 미치는 영향을 연구한 페미니스트 경제학자들의 기여와 이를 세계적인 차원에서 여성을 위한 전략으로 만들려는 여성운동의 영향력에 기인한 바가 크다. 하지만 자본이 처한 구조적인 위기를 적절한 방식으로 여성에게 전가하려는 자본의 시도 또한 큰 배경일 것이다. 1970년대 이래로 세계적 규모에서 자본축적의 과정이 물질적 확장국면에서 금융적 확장국면으로 변화하면서, 신자유주의 정책이 세계화된다. 이윤율을 회복하기 위한 자본의 시도 중 하나는 여성의 저임금, 불안정 노동을 활용하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여성들은 저임금, 장시간 노동력으로 활용됨과 동시에 전반적인 노동 유연화의 바탕이 되었다. 더불어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은 특히 제3세계에서 파괴적인 효과들을 낳았는데, 이 때 그 충격은 재생산 부문에서 완전히 흡수할 것으로 가정되며 이에 따라 여성에 대한 무제한적인 착취가 심화된다. 이는 여성의 부담을 가중시킬 뿐만 아니라 장기적인 관점에서 볼 때 사회적인 비효율성을 증가시키며(다양한 형태의 인적자원 파괴), 재생산의 위기를 낳는다. 몇몇 국제기구들은 이런 비효율성을 감축시키고자 ‘인간의 얼굴을 한 신자유주의’를 주창했고, 이에 따라서 여성의 재생산 영역에서의 역할이 발전과정에서 가지는 중요성에 대한 주의가 환기된다.
이런 맥락에서 세계적으로 채택되고 있는 성주류화 전략은 WID 전략과 병행되며, 세계적으로 신자유주의 통치성을 유지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성주류화 전략은 소수의 여성들에게는 사회적 참여 기회의 확대, 자원 배분의 형평성 제고와 같은 혜택을 의미했지만, 이는 다수 여성들의 현실의 위기를 바탕으로 한 것이다. 실제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심화되면서 여성들의 이중부담은 더욱 강화되었지만, 성주류화 전략이 추진되는 과정에서 여성의 인권과 지위가 향상되었다는 관념이 확고해지면서 현실 여성들의 상황은 은폐되었다. 더불어 신자유주의 세계화로 인한 여성의 피해가 극명하고 심각한 제3세계 국가에서는 여전히 직접적인 지원과 개입을 위주로 하는 WID 전략이 진행되면서 여성에 대한 교육과 참여를 확대하고 있는데, 이는 여성들의 불만과 위기를 관리, 안정화하는 효과를 낳으면서 여성들 스스로의 조직화와 운동을 가로막고 있다.

2) 남한에서 성주류화 전략과 여성정책
여연은 1995년 베이징여성대회를 계기로 성주류화 전략을 여성운동의 전략으로 채택한다. 1995년 베이징여성대회는 세계적인 여성운동의 두 가지 흐름을 내포하고 있었다. 하나는 성주류화 전략이고, 다른 하나는 빈곤과 여성에 대한 폭력에 저항하는 여성운동의 조직화(이 대회에서 ‘빵과 장미를 위한 행진’을 세계화하겠다는 결의를 만드는 모임이 있었다.) 흐름이다. 성주류화 전략은 그 성공 여부가 각국 정부와 국제기구들의 헌신과 자원의 적절한 동원에 달려있다고 보았다. 따라서 전략의 주요 방향은 정부와 국제기구들에 여성적 의제와 절차를 어떻게 강제할 것인가에 맞춰졌고, 이에 따라 주요관심분야로 선정된 의제에 대한 토론은 대회 이후 사실상 봉쇄되고 그에 대한 권한과 책임은 각 국 정부로 ‘이관’된다. 그리고 참여하는 NGO와 여성운동은 정부의 정책실행에 대한 감시자, 또는 동반자로서의 역할을 부여받는다. 반면 ‘빵과 장미를 위한 행진’은 빈곤과 폭력이라는 보편적인 의제를 중심으로 세계 여성들의 요구와 행동을 조직하고 이를 기반으로 인류의 보편적인 권리를 위한 대안세계화 운동과 연대하는 것을 방향으로 삼고 있다. 여연은 베이징여성대회에서 이 두 가지 흐름을 모두 접했지만, 성주류화 전략의 12개 의제가 이미 여연이 다뤄 온 것들이었다는 점에서 남한 여성운동의 보편성과 대중성이 입증되었다는 평가 하에 성주류화 전략을 기본 전망으로 채택한다.
한국 정부는 성주류화 전략에 따라 1995년 여성발전기본법 제정을 시작으로 1998년 대통령 직속 여성특별위원회 설립, 1999년 남녀차별금지 및 구제에 관한 법 제정, 2001년 여성부 신설 등 적극적으로 베이징행동강령을 이행하는 데 나서왔다. 한국정부는 2005년 2월 뉴욕에서 베이징행동강령 10년의 평가를 목적으로 하는 유엔 여성지위위원회 총회에 참석하여 여성발전기본법 제정, 여성부 신설 등 여성의 공적 참여를 확대하기 위한 제도, 성폭력특별법(1994), 가정폭력특별법(1997), 성매매방지법(2004)등 여성에 대한 폭력 및 성적 착취를 근절하기 위한 제도 등 여성의 권리를 확대하기 위한 법·제도적 장치를 꾸준히 마련해 왔다고 소개했다. 여연을 위시로 한 여성단체들은 이런 정부의 정책과 활동에 적극적으로 개입해왔다. 여연은 베이징행동강령 10년을 평가하면서 정부가 추진한 여성정책의 방향과 큰 틀의 평가에 동의하면서 법과 제도상의 평등에서는 성과를 거두었으나 이런 성과가 여성의 현실에서 평등을 보장하는 수준으로 나아가지 못했다는 점을 지적한다. 그 예로서 빈곤의 여성화, 여성 비정규직 확산과 이들에 대한 제도적 장치 미비 등을 들고 있다. 이런 문제는 신자유주의 정책에 이미 내재했지만, 여연은 이를 성주류화 전략 하에서 실행력 있는 여성정책,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예산, 정책 대상의 확대 등을 통해 보완할 수 있는 문제로 사고한다. 여기에 빈곤 여성을 위한 사회적 일자리 확대와 개선, 직장과 가사의 양립을 위한 보육정책 강화와 같은 직접적인 지원책이 덧붙여진다.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여성의 위기를 심화시키고 있는 현재의 상황에서 대두되고 있는 쟁점들에 대한 여연의 대응 방식을 살펴본다면, 성주류화 전략을 기본으로 한 여연 활동의 방향이 어떤 한계를 가지고 있는지 좀 더 명확해질 것이다.

현재적 쟁점: 빈곤의 여성화 해소와 정치세력화

1) 저출산․고령화 대책과 빈곤의 여성화 해소
여연은 성주류화 전략으로 수립된 여성부(현재 여성가족부)와 협조적인 관계를 유지하며, 각종 법, 제도 개혁에 있어서 공동의 활동을 펼쳐왔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직장과 가정의 양립’으로 대표되는 여성정책일 것이다. 하지만 직장과 가정의 양립 정책은 현재 여성의 이중부담의 구조를 건드리지 않은 채 여성의 노동력을 활용하기 위한 방안이다. 성주류화를 통해 양성 평등을 추구하는 전략 하에서 여성의 공적 영역 진출은 계속 장려되고 있지만, 공사 분할 이데올로기와 성별분업 구조는 개인적인 차원의 의식개혁의 문제(양성평등한 가족 만들기의 핵심은 남성의 평등 의식 고취다.)로 한정되거나 아예 고려되지 않는다. 섹슈얼리티 문제도 직장 내 성희롱, 성폭력 문제를 중심으로, 또는 가족의 유지를 지탱하는 방식(극단적인 가정폭력, 성폭력의 규제와 성매매 방지법)으로 드러난다. 이런 방식이 나오는 것은 당연한 일인데, 왜냐하면 정부의 여성 정책이 성별분업을 무너뜨리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기보다는, '재생산의 일차적 책임자이자 신자유주의가 요구하는 유연한 노동력'으로서 ‘여성인력을 효율적으로 활용'하는 것에 초점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저출산, 고령화 위기 담론 하에서 여성의 출산에 대한 의무와 노인부양, 출산과 같은 새로운 쟁점이 추가되었다. 정부의 기존 여성정책과 기조를 같이하면서 새로운 쟁점을 추가한 ‘저출산․고령화 대책’은 가족 내에서 일차적인 가사 담당자라는 여성의 지위를 전혀 건드리지 않은 채, 보육이나 노인 부양의 부담을 정부의 지원을 통해 시장화하는 방식으로 사회화하고, 이런 보육, 간병, 가사 등을 다시 여성들이 취업할 수 있는 저임금의 유연한 일자리로 둔갑시키면서 악순환을 지속시킨다. 이는 여성노동자들이 자신의 출혈판매를 지속하기 위해 다른 여성노동자들의 저임금 노동을 활용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하지만 여연은 정부가 ‘범국민적’ 합의를 강조한 <국민대통합연석회의>에 참여하며 적극적 주체로 나서서 국공립 보육시설 확충을 위한 구체적인 계획을 제시했고, 결국 사회협약에서 국공립 보육시설 아동대비 30% 확충이라는 합의를 만들어냈다. 하지만 사회협약을 채우고 있는 ‘보육의 공공성, 여성고용 확대와 적극적 고용개선 조치, 일ㆍ가정 양립 지원’과 같은 번지르르한 말들은 여성에게 적합한 탄력근로제 도입, 파트타임 일자리 확산 등 ‘다양한 근로시간제’를 빙자한 비정규직의 전면화 계획으로 이어진다.17) 이 사회협약은 신자유주의가 지속될 수 있도록 성장잠재력을 지탱하는 값싸고 대체가능한 여성노동인력, 고령인력을 더욱 자유롭게 활용할 수 있는 기반이 될 것이다.
지금까지 여연이 연석회의나 정부의 저출산․고령화 대책에 대응하는 태도를 보면, 저출산․고령화 담론이 여성의 출산과 가족에 대한 의무를 강화하는 것을 경계하는 한편, 연석회의 참여 등을 통해 정부의 대책이 기존의 여성정책의 일관성을 유지하도록 정부를 압박하는 것에 중점을 두고 있다. 최근에는 빈곤의 여성화 해소라는 의제가 이런 흐름에 덧붙여졌다. 앞서 언급했듯이, 여연은 빈곤의 여성화 해소를 가장 주요한 과제로 선정하고 2006년부터 <빈곤의 여성화 해소 운동본부>를 구성하여 활동하고 있다. 이는 정치적인 민주화는 달성되었지만 경제적인 민주화는 달성되지 않고 오히려 양극화가 심화되어 민주화의 성과를 위협하고 있다는 인식 하에 여연이 주력하고 있는 사업 과제다. 지난 해 활동 평가 중에는 사회서비스 일자리나 사회적 기업이 확장되고 있는 상황에서 이런 것들이 빈곤 여성 당사자와의 소통과 연대, 조직화․세력화를 위한 중요한 매개체가 될 수 있다는 점과 돌봄이 필요한 여성 및 가족에게 그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다는 점에서 적극적인 토론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있다.
게다가 빈곤의 여성화 해소 운동의 2007년 사업내용은 빈곤 여성 당사자의 욕구 조사와 이에 기반을 둔 캠페인, 지역별․부문별․계층별 의제 취합, 정책 제안과 ‘한부모 빈곤 여성 지원 및 연대 활동’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한부모 빈곤 여성 지원 사업은 사회서비스 여성 노동자들의 권리와 지위를 더욱 위협하고 사회서비스의 시장화를 부추기는 정부 정책과 너무나 닮아있다는 점에서 심각한 문제다. 이 사업의 구체적인 내용은 기업의 지원을 받아 수도권 거주, 직업훈련 중이거나 취업 중인 여성 한부모 약 200여 명에게 서비스 이용 쿠폰(바우처)을 지원하여 육아, 가사, 간병 서비스를 제공하는 여성과 연결해주는 것이다. 바우처 제도는 서비스 수요자의 선택권 확대라는 미명 하에 추진되고 있지만, 수요자 개개인(대다수가 여성임은 분명하다.)의 책임을 전제로 한 정부나 기업의 보조로서 재생산 노동에 대한 사회의 집단적 책임이라는 방향과는 정반대로 나아가는 길이다. 더욱이 사회서비스 노동자의 지위를 심각하게 위협하는데, 예를 들어보자면 하루에 3시간만 보육교사가 필요하면 3시간어치의 쿠폰을 정부에서 발급받아 돌보미 사업을 하는 업체에 3시간짜리 보육노동자 파견을 요청하는 방식인 것이다.18)
이렇듯 여연의 입장이나 내용에서 정부의 여성인력활용방안에 대한 근본적인 비판은 찾아보기 힘들다. 다만 여성들에게 ’괜찮은 일자리‘가 보장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이것이야 말로 정부 정책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제기 없이는 가능하지 않은 요구다. 정부의 여성인력활용방안은 사회서비스 일자리 창출 정책과 떼어놓고 사고할 수 없다. 최근 발표된 <서비스산업 경쟁력 강화 종합대책>에서 보듯이, 정부는 서비스산업을 새로운 성장 동력으로 명명하면서 실제 공공서비스 분야의 개방과 시장화의 속도를 높이고 있다. 사회서비스 일자리 창출 정책은 이런 정부의 방향 하에서 제출된 것으로, 사회서비스 분야(보육, 간병, 가사, 방과 후 학교, 중증장애인활동 도우미)의 시장화를 추진하면서 이곳에서 활용할 수 있는 저임금의 유연한 노동력을 확보하는 과정일 뿐이다. 지금까지도 신자유주의 하에서 경제의 금융화, 서비스화가 심화됨에 따라 여성들을 노동시장으로 흡수하는 일자리는 고소득-전문직 종사자들의 활동을 보조하거나 금융귀족들의 레저, 유흥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한 이른바 하인 노동이 대다수였다. 사회서비스 일자리 창출 정책은 이런 현실을 더욱 적극적으로 활용하기 위한 방안일 따름이다.

2) 여성의 정치세력화
한국에서 성주류화 전략에 대한 대체적인 평가는 여성의 주류화 분야를 제외하고는 커다란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음을 지적한다.19) 여성의 주류화는 정부기구나 기관, 국회 등에 여성의 진출 비율로 가시화된다. 이는 여연이 추진해 온 여성 정치세력화 운동과 긴밀한 연관이 있다. 여연을 중심으로 한 주류 여성운동은 성주류화 전략 채택 이후 ‘여성의 정치적, 경제적 주류화를 위한 도약의 해’(1997~1999)를 지정하여 주요한 활동을 펼쳐왔다. <할당제여성연대>20) 를 중심으로 제도개선을 요구하고, 국가의 여성관련 부처와 협력관계 강화해왔으며, 2004년 총선을 앞두고는 여성을 국회에 진출시키기 위한 적극적인 운동(공천, 당선운동)을 펼쳤다. 그 결과 정부 관련 자문위원회에 여성의 비율이 32%에 이르렀고(2003년 현재), 2004년 총선에서 여성 국회의원 비율이 최초로 두 자리 수를 넘겨 13%를 차지했고, 여성총리가 탄생했다. 더불어 많은 NGO 여성 활동가나 여성운동과 연계된 여성학자가 정부위원회나 부처 사업에 참여하여 성인지적 정책실현을 위한 조언과 압력을 행사해왔다.
하지만 이런 여성의 주류화, 정치세력화가 여성의 위기를 해결하고 있는가? 신자유주의 하에서 정당, 정부, 의회의 기능과 역할은 변모하는데, 정부의 기술관료적인 성격이 강화되고 신자유주의 정책이 낳은 광범위한 대중의 불만을 관리해야 하는 역할이 정부와 정당에 주어진다. 해결되지 않는 위기는 기존 정당과 정부에 대한 대중의 불신을 증폭시키는데, 여기에서 여성의 깨끗하고 참신하며 포용적인 이미지가 정치개혁의 담론 속에서 활용된다. 주류 여성운동은 이런 상황을 비판적으로 인식하기보다는 기회로 생각한다. 기존 정치의 낡고 부패함을 여성의 깨끗함과 도덕성으로 바꿀 수 있다는 주장이 정치세력화 운동의 근거가 되고 있는 것이 단적인 예다.
하지만 이는 실제 대다수의 여성에게는 기회라기보다는 위기다. 대다수의 여성들은 최소한의 권리도 보장받지 못한 채, 비정규직, 비공식 부문에 종사하면서 동시에 가족 내의 보살핌 노동과 재생산 노동도 책임지는 현실을 살지만, 여성들의 공적 진출은 이런 현실을 은폐한다. 의회를 비롯한 공적영역에 진출한 여성들이 실제는 현실의 여성들과 전혀 무관함에도 여성의 지위와 현실을 대변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실제 이들이 여성의 문제를 발언하는가는 전혀 고려대상이 아니다. 생물학적인 여성이라는 사실만으로 이미 여성을 대변하는 것으로 간주된다. 이러한 상황은 여성들이 자신의 권리를 적극적으로 제기하고, 스스로 조직하는 것을 어렵게 만든다. 게다가 여성의 문제를 의회 안에서 형성되는 쟁점으로 가두면서, 진정한 쟁점을 은폐한다. 여성이 의회에 진출하는 것이 여성의 이해와 요구를 대변하는 길이라고 하지만, 사실은 오히려 여성들의 대중운동을 왜곡하고 여성의 권리를 협소한 틀로 축소시킨다. 신자유주의가 여성의 불만과 분노를 관리하는 방식이 의회와 같이 공적 영역에 진출하는 여성들을 자신이 가진 여성의 얼굴로 부각시키는데 활용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더 심각한 문제는 이렇게 진출하는 여성들이 이를 통해 추진하고자 하는 여성정책의 문제다. 여연을 중심으로 한 주류 여성운동은 여성의 사회적 참여 확대를 주장하며 ‘직장과 가사의 양립’이라는 방향을 지속적으로 제기해왔는데, 이는 이미 정부의 여성정책의 기본방향이 되었다. 문제는 이 정책이 신자유주의 하에서 여성인력을 활용하기 위한 것이지, 여성의 경제적인 독립이나 노동권을 확보하는 것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는 것이다. 단적인 예로 최근 제출되고 있는 ‘저출산․고령화 대책’은 이미 이중부담 하에서 출혈적인 노동을 감내하고 있는 여성들에게 출산의 의무도 충실히 이행할 것을 강요하고 있다. 이 대책이 오롯이 여성 정책이라고 볼 수는 없지만, 정부가 일관되게 추진해 온 ‘직장과 가사의 양립’이라는 여성 정책의 기본 방향이 반영되어 있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그럼에도 계속해서 여성친화적인 정책 수립, 그 과정에서 여성의 영향력 강화라는 명분이 정치세력화 운동에서 제기되고 있다. 이것은 여성의 정치세력화가 어떤 여성들에게는 실질적인 이해가 걸린 문제라는 점을 반증한다. 여성의 주류화가 기본적으로 여성 개개인의 주류화를 의미한다고 했을 때, 분명 이를 통해 공적영역에 진출하는 여성들이 존재한다. 여성의 정치세력화 운동의 목표와 신념이 애초에 아무리 여성의 이해(이미 지적했듯이, 여연이 주체의 확대와 다변화를 제기하면서 노선의 변화를 추구하면서부터 이 또한 매우 모호한 것이 되었다.)를 확장하는 것이었다 해도, 현재 여성의 정치세력화 운동이 소수의 엘리트 여성들을 위한 진출 경로가 되었음은 분명한 현실이다. 이는 애초의 (선한) 의도를 의심하는 것과는 전혀 상관없고, 여성운동이 신자유주의가 여성에게 전가하는 위기에 대한 근본적인 비판 없이 정부의 여성 정책을 (선택적으로) 활용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 동반될 수밖에 없는 필연적인 결과다.

새로운 여성운동을 만들어야 한다

여연 자체도 인정하듯이, 그동안 여연이 주되게 추진해 온 법, 제도 개선의 효과가 실제 여성들의 삶에 미치는 영향이 미미한 상황이다. 신자유주의가 전가한 위기를 감내하고 있는 여성들의 열악한 삶은 역설적으로 신자유주의 하에서 자본의 이윤 창출을 위해 적극적으로 활용되고 관리되는 형국이다. 이에 편승하는 법, 제도 개선이 여성의 위기를 해결할 리 만무하다. 신자유주의에 대한 근본적인 비판 없이 국가의 여성 정책을 통해 (모호한) 여성의 이해를 실현하겠다는 여연 운동은 결국 국가의 신자유주의 정책에 여성운동이 활용되는 결과를 낳았으며, 여성들을 자신의 삶과 운동의 주체로 조직하기는커녕 여성이 처한 현실을 개선시키지도 못했다. 게다가 사회운동 전반이 위기에 처해있기는 하지만, 여성운동은 특히나 취약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중, 삼중의 부담으로 고통 받고 있는 대다수 여성들이 그 고통을 극복하고 새로운 미래를 개척하기 위한 전망으로 여성운동을 사고하지 않는다. 게다가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 속에서 노동자 민중 전체의 빈곤이 심화됨에 따라 여성운동은 종종 대중의 반격 대상이 되기도 한다. 성주류화 전략을 위시한 주류 여성운동의 운동을 통해 여성들의 지위와 삶이 나아졌다는 인식이 확산되었고 대다수 여성들의 삶은 은폐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여연은 점차 그 대표성을 위협받고 있다. <전국여성연대(준)>21) 을 비롯하여 <여성노동네트워크>, <여성노동모임> 등 여성노동자 조직화나 민중운동과의 강한 결합력을 기본으로 하는 새로운 시도들이 등장했다. 하지만 <전국여성연대(준)>은 ‘어떤 여성운동을 형성할 것이냐’보다는 <한국진보연대(준)>에 대한 입장과 판단을 연대체 건설의 기준으로 세움으로써 신자유주의에 저항하는 여성운동을 형성하기 위한 여성운동 내의 연대와 자율성을 훼손하고 있다. <여성노동네트워크>의 경우 KTX 여승무원 투쟁에 대한 해결 방식을 정규직 성과급 반납 및 임금 동결을 전제로 청소나 매표 업무를 제외한 승무업무의 정규직화로 제시하고 있다는 점을 사고한다면 그 한계가 분명하다. 우리은행의 직군분리제처럼 업무의 지속성이 유지되어야 하고 정규직과 업무를 명확히 구분하기 어려운 경우 기업 입장에서도 선택적인 정규직화를 받아들이거나 활용할 수 있다. 그러나 이렇게 분리된 직군이 창구담당, 콜센터 등 거의 여성노동자들로 이루어진 업무라는 점에서 여성에 대한 차별을 반영구적으로 고착화시킬 우려가 있다는 점과 정규직 임금 동결을 전제로 한 하향평준화가 이루어지면서 기업의 책임이나 비용은 전혀 고려되지 않았다는 점, 그리고 이것이 이후 직군 간 임금 격차를 줄이기 위한 임금의 하향평준화를 예고하면서 비정규직 차별 해소의 전형으로 활용될 수 있다는 점 등에서 문제가 심각하다.
결국 중요한 것은 신자유주의에 저항하는 여성운동을 형성하는 것이다. 여성들이 직면한 위기를 해결하는 길은 여성들 스스로 조직화하고 여성해방을 향한 운동에 나서는 것이고, 여성들이 스스로 이런 길을 자신의 미래로 삼을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은 조삼모사 식의 여성 정책이나 서비스 제공을 통해서 가능하지 않다. 여성 정책이 자신의 어려움을 해결해 줄 수 없다는 점은 누구보다 여성들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다. 따라서 신자유주의가 여성에게 강요하는 저임금, 불안정 노동에 맞서, 재생산 노동의 시장화에 맞서 투쟁을 조직해야 한다. 현재 여성이 처한 위기의 원인을 제대로 분석하는 것은 그 출발점일 것이다. 여성의 자기조직화를 기초로, 일부 여성의 요구가 아닌 보편적인 여성권을 확산시키며, 신자유주의에 맞서는 사회운동, 노동운동과 연대를 강화하는 새로운 여성운동을 형성하는 것, 이것이 가장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대안이다.


1) <여성평우회>는 이런 논쟁의 결과로 사회주의 페미니즘이 수용되면서 이를 자신의 이념으로 삼고 창립된 단체였다. “여성운동은 가부장제를 포함하여 여성을 억압하는 사회구조를 변혁함으로써 남녀 모두가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사회를 건설할 것을 목표로 한다. … 가부장제 사회구조란 성별 노동분업을 토대로 형성된 여성에 대한 남성의 지배를 허용하는 성적 위계구조이다.” 『여성평우』, 2호. 본문으로
2)이승희, 「여성문제의 본질과 형태」, 『사회과학개론』, 1987. 이 글에서 이승희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여성은 가사노동 전담자로서, 저임금 노동력으로서 존재한다. 이것은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본주의 체제의 유지 자체가 여성의 가사노동 전담(노동력 재생산 담당)과 저임금 노동(생산노동에서의 이윤 창출)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 가사노동의 문제는 노동력 재생산이 각 개별가족을 단위로 사적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다. … 생산노동의 문제는, 여성은 누구보다도 낮은 임금으로 누구보다도 장시간 노동한다는 문제로서, 남성과는 애초에 직종이나 직무가 분리되어 있거나 같은 일을 해도 남성보다 낮은 저임금을 받고 있는 등 여성의 차별임금이 구조화되어 있다. 그러나 가사노동과 생산노동의 문제는 각각 별개로 분리되어 있지 않다. … 따라서 여성문제가 해결되기 위해서는 … 가사노동이 사회화되어야 한다. … 생산노동에서의 문제는, 여성도 사회적 노동에 전면적으로 참여할 수 있어야 하고, 여성에 대한 모든 종류의 차별이 사라져야 한다.”고 결론을 내리고 있다.본문으로
3) 여연 자체적으로는 여연 노동위원회를 두었고, <여성의 전화>, <여성민우회> 등도 생산직 여성노동 분과를 설립하거나 이들을 지원하는 프로그램을 두었다.본문으로
4) 부천서 성고문 사건에 대응하기 위해 꾸려진 <부천서성고문대책위원회>는 여연이 결성되는 주요한 계기 중 하나였다. 이 때 여성운동가들은 이를 여성에 대한 폭력의 문제로 바라보기보다는 ‘군사독재정권의 폭력성으로 인한 사건’으로 규정하였고, 따라서 이러한 고문과 성폭력의 종식을 위해서라도 민주화가 실현되어야 하며, 여성운동 또한 민주화를 이루기 위한 실천에 더욱 나서야 함을 강조하였다.본문으로
5) 이 계획은 여성발전의 기본목표를 ‘모든 분야, 모든 수준에의 여성참여 촉진을 위한 여성인력활용의 극대화’ 등 다섯 가지로 설정하고 이에 따라 ‘여성이 경제사회발전에 공동참여 공동기여할 수 있는 바탕을 구체화시킴으로써 여성발전이 균형 있는 국가발전에 통합되도록’ 하는 것을 궁극적인 목표로 여성고용촉진, 노동조건개선, 사회적 지원체제 확립을 경제활동부문의 중점추진과제로 제시한다.본문으로
6) 1985년 나이로비에서 개최된 제3차 유엔여성대회에서는 기존의 WID 접근의 한계를 비판하면서 ‘젠더와 발전’(GAD, Gender and Development) 접근에 기초한 ‘전향적 전략’(Nairobi Forward-Looking Strategies for the Advancement of Women)을 제출한다. 그리고 유엔은 각 국에서 여성정책기관을 수립하는 것을 이 전략을 실행하는 핵심적인 기제로 제시한다. 국제기구의 감시와 국내적인 여성운동의 압력으로 많은 나라의 정치 지도자들은 여성 문제를 다룰 기관을 설립하게 되었다.본문으로
7) 총 취업자 중 여성의 비율은 1975년 이래 계속 늘어나는 추세에 있으며, 1987년에는 이 비율이 40%에 달한다. 직종별로 보면 서비스직의 60.7%, 판매직의 47.2%, 사무직의 36.9%가 여성노동자다. 특히 사무직 여성노동자의 비율은 1963년에 비해 3배 이상 늘어났는데, 사무노동의 수요증가와 사무내용의 단순화 및 가치저하에 따라 지금까지 남성이 맡아왔던 하급사무직 노동이 여성으로 대체되어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또한 여성노동자 중에서 기혼여성노동자가 차지하는 비율은 1977년의 경우 9.7%에 불과했으나 1985년에는 20.7%로 크게 늘어났으며, 1987년에는 25.5%에 이르게 되었다. 본문으로
8) 노동자 가족들이 현장노동자들의 파업투쟁에 노동자가족실천위원회 형식으로 동참하여 밥을 지어 나르는 것에서부터 서울역에서 가두시위를 벌이기까지 치열하게 투쟁한 인천 경원세기기계를 비롯하여 울산 현대그룹 연합농성시위, 장선광업소 투쟁, 옥포 대우조선 투쟁 등에서 가족들은 광범위하게 노동자들과 한덩어리를 이루어 싸웠다. 김지수, 「한국 여성노동운동의 현황과 과제」, 『여성2』, 1988.본문으로
9) 이 때 여연을 포함한 ‘진보적’ 여성단체는 1950년대 이래로 보수적인 여성단체들을 중심으로 진행되어 온 가족법 개정 투쟁에 결합했고, 1989년 가족법은 개정된다. 여성계의 요구는 호주제 폐지, 동성동본불혼 폐지, 친권행사에서 부모의 동등한 권리, 남녀 평등한 친족범위, 재산상속에서 남녀차별철폐 등이었는데, 이 중 호주제 폐지와 동성동본불혼 폐지는 개정안에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사실 여성계의 요구는 노동자계급 여성들의 현실적인 요구와 이해와는 거리가 있고, 오히려 핵가족에 미달하는 법률 내용을 수정하려는 요구였다. 따라서 가족법 개정 운동은 1970년대 이래로 노동자, 농민 여성들의 운동과는 결합하지 못한 채, <한국여성단체협의회>(여협)와 <가족법률상담소> 등을 중심으로 진행되었다. 그러나 1980년대 말 ‘진보적’ 여성운동을 표방하는 여연이 이 투쟁에 결합했다는 사실은 여연 운동이 실질적으로 핵가족 모델을 수용했다는 것과 여연의 운동이 기층여성의 생존권 투쟁과 분리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후 여성운동은 호주제 폐지를 중심으로 가족법 개정 운동을 지속한다.본문으로
10) 강남식, 「한국여성운동의 쟁점과 방향」, 2004.본문으로
11) “생산직 여성노동자운동은 생산 현장뿐만 아니라 지역에서 함께 이루어져야 하며, 여성노동자는 결혼 후 전업주부 또는 기혼여성노동자가 되므로 여성의 생애주기를 모두 포괄하는 여성노동자운동이 되어야 한다는 전제 하에 지역 주부를 대상으로 하는 사업에 의미를 부여하였다.”한국여성노동자협의회, 「생산직 여성노동자운동」, 『열린희망』, 1998.본문으로
12) “여성노동자회는 미조직 영세사업장에 취업하게 되는 기혼 여성노동자들 문제에 주의를 기울이면서 탁아소 운영, 직업훈련, 취업알선, 상담 등으로 사업방향을 바꾸게 되었다. 노동조합 운동이 활성화되면서 대중적 여성노동자 조직화는 노동조합의 과제로 이전되어 가고, 여성노동자회는 대중조직을 지향했던 초기의 방향에서 지금은 여성노동문제에 대한 외곽 지원단체의 성격으로 변화되고 있다.”이미경, 「여연10년사」, 『열린희망』, 1998. 하지만 노동자 운동에서 여성노동자들은 배제되었다. 여성노동자들(특히 저임금 영세사업장의 여성노동자들과 비공식 부문의 여성노동자들)의 은폐에 있어서 여성운동과 노동자운동은 서로를 알리바이 삼았던 것이다.본문으로

13) 여연은 1994~95년 중점사업을 ‘지방자치와 여성의 정치참여 확대’로 설정한다. 더불어 지방자치 선거를 앞두고 여협과 함께 ‘할당제를 위한 여성연대’를 결성한다.본문으로
14) 전문적 과제를 특화한 운동의 필요성에 따라 지방별로 <여성의 전화> 조직이 확대되었다. 이런 사안에 따른 전문성 강화는 성폭력, 호주제 등 단일이슈를 중심으로 한 법제정 운동의 필요조건이자 충분조건이다.본문으로
15)이에 따라 <여성노동자회>, <여성민우회>, <여성의 전화> 등 여연의 중요한 회원단체들도 사단법인으로 등록하였다.본문으로
16) “법, 정책, 또는 프로그램을 포함하여 모든 부분과 모든 차원에서 계획된 조치가 여성 및 남성에 미치는 영향을 분석하는 절차이다. 성 주류화란 정치, 경제, 사회 전 부분 정책 및 프로그램의 설계, 시행, 감시에 있어서 여성 및 남성의 관심 및 우려사항과 경험이 필수적으로 반영될 수 있도록 함으로써 여성과 남성이 평등하게 혜택을 누리고 남녀 불평등이 영속되지 않도록 하기 위한 전략이다. 성 주류화의 궁극적 목표는 성 평등에 있다.”본문으로
17) 지난 해 11월 국회에서 비정규직법안이 통과된 이후 이런 상황은 더욱 구체적인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 비정규직법안이 통과되자 기업들은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한 측에서 대체가 용이한 단순 업무의 경우 조기 계약해지와 재계약 불가 통보가 진행되고 있다. 다른 한 측에서는 우리은행이나 이마트의 직군분리제처럼 비정규직 업무를 별도 직군으로 분리하여 임금과 인사관리에서의 변화를 꾀하고 있다. 이런 움직임들은 이후 진행될 노동유연화의 다음 단계를 예고하는데, 그중 한 가지가 여성들의 출산, 육아 등을 고려하여 근로시간을 신축화한다는 것이고, 그것은 곧 다양한 형태의 비정규직 확산을 의미한다.본문으로
18)사회서비스 일자리 창출 정책이라는 것이 애초에 정부가 예산을 지원하고, 민간이나 단체에 위탁하여 사회서비스를 제공하는 파견업체를 만든다는 구상에 불과하고, 실제로는 많은 NGO들이 복지서비스 제공자로서 이런 역할을 하고 있다.본문으로
19) 성주류화 전략은 구체적으로 1> 사회의 모든 분야에 여성의 양적, 질적 참여의 확대를 의미하는 여성의 주류화, 2> 모든 정책분야 및 이를 다루는 기관에 성 관점이 통합되어야 함을 의미하는 성 관점의 주류화, 3> 기존의 남성 중심적으로 조직되어 있는 정부 및 주류영역이 성인지적으로 재편되어야 함을 의미하는 주류의 전환을 포함한다. 이를 위한 구체적인 전략은 정책기구와 법, 제도의 정비, 기금과 인적자원의 확충, 성별통계의 구축, 정책담당자의 성인지력의 향상, 정책의 성 분석, 의사결정과정에 여성참여 확대, 정책의 모니터링 등이다. 본문으로
20)남한에서 여성의 정치세력화 운동은 1994년 결성된 <할당제 도입을 위한 여성연대>의 활동으로 본격화했다. 활동 결과 2000년 16대 총선 직전 정당법 개정으로 국회의원 비례대표 후보의 30% 여성할당 조항과 2002년 정당법 개정을 통한 광역비례대표 후보의 50% 여성할당 조항이 신설되었다. 이후 2003년 <총선여성연대>가 결성되어 정치개혁 전반의 의제를 제기했고, 2004년 총선에서는 <맑은정치여성네트워크>가 구성되어, 여성 후보 공천 운동과 당선운동을 펼쳤다.본문으로
21) 작년 12월 4일 발족한 <전국여성연대(준)>은 여연의 대표성이 취약해졌음을 보여주는 가장 커다란 사례라 할 수 있다. 형식상으로는 여성 부문의 상설연대체 출범을 <한국진보연대(준)> 구성 과정 일환으로 사고하면서 통일연대 여성위원회가 확대 재편한 것이다. 하지만 여성운동 부문에서 가장 조직력이 탄탄하고 대중적 기반이 확고한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이 여연 탈퇴를 고려하면서 <전국여성연대(준)>에 전력을 쏟고 있는 점, 신자유주의 세계화 반대 투쟁, 반전 투쟁 등에서 민중운동과의 결합력이 훨씬 높다는 점 등에서 이후 영향력은 매우 클 것으로 예상된다.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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