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광주전남지부


사회운동

사회진보연대 계간지


2007.4.73호

『時經(시경)』을 보는 관점

문태길 | 회원


1.
나에게 영향을 미치거나 감동을 주었던 책들은 무수히 많다. 하지만 그 책들 중 시경은 포함되지 않았다. 시인이 되고 싶었던 고등학교 때 한글로 번역된 것을 읽은 이후 다시 시경을 읽은 적이 없었다. 현실에 눈을 뜨기 시작하면서 四書五經(사서오경)과는 문을 닫아 버렸기 때문이다. 물론 학문적으로 완전히 닫은 것은 아니지만 유교의 도덕적 이론으로는 현실 민중의 삶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생각했고, 그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아니 유교적 도덕은 철저히 파괴되어야 하고, 유교의 기초를 이루고 있는 비인간적인 가족이념은 붕괴되어야 한다. 이러한 생각이 깊어질수록 가끔씩 고등학교 때 읽은 시경이 생각났다. 나에게 시경은 하나의 수수께끼였다.
최근 시경을 다시 읽어보고 그 수수께끼가 풀렸다. 공자는 당시 중국에서 떠도는 시들을 엮어 시경을 냈는데 이는 가족이념을 전파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공자가 주창한 三綱五倫(삼강오륜)이 가지는 의미를 이야기하기 전에 우리는 가족이 가지는 본질을 이해해야 한다. 가족을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로 치부하는 것은 지배계급의 고도로 계산된 논리다. 우리가 문제 삼는 것은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가 아니라 결혼이라는 제도와 가족의 가내 노예적 성격이다. 동물마다 차이는 있지만 대체적으로 여성(암놈)이 남성(수놈)을 선택한다. 종족 번식의 책임을 지닌 여성(암놈)이 남성(수놈)을 선택하는 것은 자연적 본성에 속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인간의 결혼제도는 여성의 자연적 본성을 박탈하는 행위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시경의 시들은 중국 周(주:기원전1120~403)나라 때 쓰였다. 이 시기에 單婚(단혼)제라는 결혼제도가 사회 전반에 뿌리 내리기 시작했다. 단혼제는 일부일처제를 의미하지 않는다. 남성은 처첩을 둘 수 있으며 다만 여성만이 한 남편만 섬겨야 한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이러한 결혼제도는 여성의 자연적 본능과 충돌할 수밖에 없다. 시경의 많은 시들이 여성의 입장에서 남성을 생각하는 내용이다. 시경을 연구하는 많은 학자들은 주자의 해석을 정통으로 여기고, 이런 시들을 대부분 음란한 시로 분류한다. 결혼제도를 확립하기 위한 목적으로 공자가 엮었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주자의 해석이 맞을 수도 있다. 공자는 여성이 다른 남성을 생각하는 것은 도덕적으로 불결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에 반해 남성이 여성을 생각한 것은 연민이나 사랑 행위로 보았을 것이다. 공자와 유생들이 무엇이라 생각했든 시경은 여성이 자신의 본능을 억제해야하는 상황을 예술로 승화시키고 있다.
이러한 여성의 자연적 본능에 대한 억제는 여성을 남성의 소유물로서, 즉 여성을 남성의 노예로 위치지우는 사적 소유의 최초 형태다.1) 엥겔스의 말대로 여성은 사적 영역에 갇혀 가내노동을 담당함으로써 남성의 사적 노예로 전락했다. 과거 가내노동 담당했던 여성을 지금의 󰡐전업주부󰡑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옛날의 가내노동이란 布(포)를 짜고 옷과 신발을 만들고 들에 나가 나물을 채집하고 틈틈이 농사일도 해야 하는 상상할 수없는 중노동이었다. 이렇게 모은 재산은 여성의 것이 아닌 남성, 즉 남편의 소유가 된다. 바로 이러한 점 때문에 가족은 가내노예적 성격을 지닌다고 볼 수 있다.
시경은 이런 여성의 처지를 노래하는 시들이 많다. 여성이 열심히 노동하여 집안을 부유하게 만들었더니 남편이 그 부를 통해서 다른 여자를 취하는 장면은 결혼과 가족제도가 여성에게 얼마나 가혹한 지를 보여준다. 공자나 주자의 입장에서는 남편이 아무리 부도덕한 행위를 해도 여성은 정절을 지키는 것이 도리라고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일은 정도차가 있지만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2.

시경에서 보여주고 있는 여성의 애환은 지금과 비교해볼 때 달라진 것이 없다. 남성의 전유물이었던 공적 영역에 여성이 참가한다고 여성의 지위가 높아지거나 여성이 해방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모 재벌이 자신의 딸에게 기업을 상속하였고, 다시 그 기업을 딸의 자식에게 상속했다고 하면, 그리고 그 자식이 남편의 성을 따른다면 이것은 결국 남편의 재산을 증식시키는 것에 불과하다. 여성이 대통령이 되고 여성 판검사의 수가 늘어난다고 해서 여성이 해방되는 것은 아니다. 여성이 가족과 결혼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상여성은 해방되지 않는다. 여성이 해방되는 것은 자연적 본성에 기초하여 자신을 독립된 자아로서, 즉 남자의 속박에서 벗어나 자유를 확보할 때 이루어진다.
자유를 확보하기 위해 여성이 사적 영역에서 공적 영역으로 진출하는 것이 아니라, 여성의 종족번식이라는 자연적 기능, 즉 자식 생산과 양육이 사적 영역에서 공적 영역으로 전환되야 한다. 이것은 남녀 간의 평등한 고용, 보육과 학교 시설의 강화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여기에는 노동시간 단축과 노동력을 재생산하는 여성들에 대한 정당한 몫이 주어지는 것이 포함된다. 여성이 혼자서 아이들을 키울 수 있을 만큼의 임금이 보장되어야 한다. 이혼이나 별거의 상태에서 자식에 대한 일차적 양육권을 여성에게 주는 것이 바람직하다.
또한 궁극적으로 결혼제도를 폐지해야 한다. 그러나 수 천 년간의 관습이 하루아침에 바뀔 수 없다. 따라서 최소한 방안으로, 법률혼을 사실혼으로 바꾸어야 한다. 사실혼과 이혼의 자유는 여성이 여성으로서 자연적 본성에 합당한 지위를 보장받을 수 있을 때까지는 존속해야 한다.

3.

시경의 많은 시들은 여성들이 쓴 것이다. 시란 감정을 節制(절제)하고 조절하여 독자들을 애초의 감정에 몰입하도록 하는 문학이다. 감정을 절제하고 조절한다는 것은 理性的(이성적)이라는 말이다. 이성적 호소가 바로 가장 감정적이라는 것은 시가 가지는 매력이다. 이렇게 시를 여성이 썼다는 것은 여성이 감정적이라는 일반 통념을 반박한다. 주자는 특히 문학적 성취가 높은 작품을 여성이 썼다는 것을 부정하기 위해 여성의 행위를 본 또 다른 시인이 쓴 것으로 해석하지만 이런 해석은 여성을 비하하는 풍조를 말하고 있는 것일 뿐이다.
여성이 이성적인 것 역시 자연적 본성에 기인한다. 대체로 동물들은 암놈이 새끼를 낳으면 새끼가 독립할 수 있을 때까지 성적 행위를 하지 않는다. 이는 암놈이 성적 행위에 대한 조절기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성적 행위가 감정적 행위의 최정점에 있다고 한다면, 그 행위에 대한 조절기능이 탁월하다는 것은 여성이 남성보다 보다 더 이성적이라는 것을 말한다.
여성이 자연적 본성을 회복한다는 것이 출산을 많이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여성에게 (대량)출산을 강요하는 것은 자연적 본성에 반하는 행위이다. 이는 독립된 주체로서 여성을 인정하지 않고 모자관계를 활용하여 가족관계를 강화하려는 시도일 뿐이다. 더군다나 자본은 여성을 값싼 노동력을 공급하는 공급처로 활용한다.
자본주의는 여성을 생산의 주체로 바라볼 때 가족이라는 보수적 이데올로기를 강화한다. 그러나 여성을 소비의 주체로 바라볼 때는 여성이 감정적인 본능을 지녔다고 떠들어 댄다. 여성이 감정을 절제하지 않을 때 여성의 소비는 극대화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물질적․육체적 소비는 소비한 만큼 생산과 재생산의 기능을 마비시킨다. 남성을 선택하는 여성의 이성적 행위는 자본주의 이전에는 남성의 신분이 기준이 되고 현대 자본주의 하에서는 경제력이 그 기준이 된다. 여성들의 이러한 기준은 시경에서 귀족과 왕족에 대한 찬양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과정에서 여성들은 자신이 가진 이성적이고 창조적 기능을 잃게 되고 남성들의 감정적 기능은 폭력적 양상으로 변해간다. 남성의 폭력을 규제하기 위해 여성에 대한 도덕적․이념적 통제는 다시 강화된다. 때문에 여성은 공적 영역에서 점점 소외된다. 그리고 결국 여성 자신이 자발적으로 공적 영역에서 물러난다.2)
시경은 바로 이것을 보여주고 있고,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이 과정이 끊임없이 반복되고 있다. 시경에서 보여주는 다양한 시구들은 어떻게 여성들이 남성에게 종속되어 가는지를 보여준다. 가족의 울타리-시경에서는 결코 가족을 부모와 자식 관계로 보지 않고 있다 -속에서 여성은 한편으로는 생산하는 노예로, 다른 한편으로는 남편의 성적 노리개로서 감정을 소비하는 소비자로서 전락한다. 이리하여 여자와 남자는 다르다는 夫婦有別(부부유별)이라는 통념이 자리 잡는다. 게다가 아버지와 자식은 친해야 한다는 父子有親(부자유친)으로 어머니는 자식으로부터도 소외된다. 어머니와 자식 간의 자연적 관계는 아버지와 자식이라는 인위적 관계로 대체된다. 이제 가족이라는 인위적 규범은 이성적이고, 감정의 절제와 균형, 그리고 상호 간의 양보라는 자연적 규범을 도용하여 감정적인 관계로 구성된다. 따라서 인위적 규범의 수혜자인 남성은 이성적이 되고 여성은 감정적인 동물이 된다. 이성은 감정을 통제하고 억제해야만 한다.
이러한 가족관계가 남성의 자유를 어떻게 박탈하는 지는 언급하지 않겠다. 이는 시경의 범위를 넘어서는 것이기 때문이다.3) 다만 여성이든 남성이든 공자나 주자의 시각을 배제하고 앞에서 언급한 관점으로 시경을 읽어보길 권한다. 그러면 여성에 대한 시각이 변할 것이다.4) 그러나 여성의 자연적 본성을 󰡐남성을 찾는 것󰡑으로 한정지어 읽는다면 문제가 될 것이다. 남성이든 여성이든 이성(異性)에 대한 생각이나 자식의 양육은 인간이 살아가는 데 일부를 차지할 뿐이다. 지금도 문학이나 음악은 남녀 간의 애정이나 자식 양육을 인간의 삶의 전부인 양 떠들어 대고 있지만 이는 가족이데올로기를 강화하는 것일 뿐이다. 또 한편으로 여성의 자연적 본성을 회복한다는 것의 의미를 자유연애로 해석해서는 곤란하다. 이는 여성해방이 아니다. 여성해방은 인위적 이념에 의해 억제되어 있는 감정을 분출하는 것이 아니다. 여성이 독립된 주체로서 자신의 노동의 대가를 스스로 획득하고 결혼과 자식의 양육은 삶의 일부로만 위치지울 때 진정 여성은 해방될 수 있을 것이다.



1) 가족이 계급사회의 기초라는 것은 서양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흔히 (정치)경제학으로 알려진 'political economy'에서 economy는 고대 그리스에서는 󰡐집의 관리󰡑라는 뜻이 있고, political은 정치인데, 고대 그리스에서는 정치와 사회는 같은 말로서 political economy는 󰡐가계(家計)를 사회로 확장하다.󰡑라는 뜻을 가진다. 이는 가족을 사회의 기초단위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본문으로
2) 秦(진)나라의 노래는 이 과도적 상황을 보여준다.본문으로
3)몇 몇 시들 중 신분이 낮고 재산이 없어 결혼하지 못한 남성의 애환을 그린 시도 있다.본문으로
4) 시경에서는 여자 자신은 子(자)로, 남자 자신은 予(여), 남편은 之子(지자) 혹은 君子(군자), 여자 일반은 女(여), 남자 일반은 士(사)로 표현하고 있다. 이를 이해하면 당시 남성들과 여성들이 가족제도와 사회제도를 어떻게 보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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