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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진보연대 계간지


2007.5.7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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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외로서의 신자유주의, 신자유주의의 예외

아이와 옹 | UC 버클리 인류학과
이번 호 <책속의 책>에서는 아이와 옹(Aihwa Ong)의 『예외로서의 신자유주의: 시민권과 주권의 변이들』(Aihwa Ong, Neoliberalism as Exception: mutations in citizenship and sovereignty, Duke University Press, 2006)의 서문인 「예외로서의 신자유주의, 신자유주의에 대한 예외」(Neoliberalism as Exception, Exception to Neoliberalism)를 싣는다.
신자유주의는 대개 국가 권력의 통치 범위를 제한하는 경제 학설, 시장 이데올로기로 간주된다. 하지만 신자유주의에 대한 이런 한정된 이해에는 한계가 많다. 이런 식으로 따지자면 예컨대 최근 제시되고 있는 사회적 투자, 사회 자본에 대한 강조나 인간의 얼굴을 한 세계화, 포스트 워싱턴 컨센서스 등은 신자유주의가 아니라는 식으로 생각할 수 있는데, 왜냐하면 이들은 어쨌든 ‘시장지상주의’를 나름대로 비판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위와 같은 사례를 들어 자본가 계급이 신자유주의를 버렸고 따라서 반신자유주의가 아닌 다른 전선을 고민해야 한다고까지 말한다.
그러나 신자유주의는 애초부터 (이른바 ‘시카고 학파’로 대표되는) 신보수주의에 대한 비판에서 출발했으며, 양자의 핵심 쟁점은 처음부터 ‘통치성’이었다. 즉 신자유주의는 ‘정책 무용론’이 아니라 ‘정책 개혁론’이며, 위기와 인민의 관리라는 화두로 국가를 개조함으로써 오늘날 세계를 지배하게 된 것이다. 그런 점에서 최근의 다양한 사회투자, 사회 자본의 흐름들은 신자유주의의 논리를 벗어나는 것이기는커녕, 신자유주의의 본래 정신을 가장 충실하게 계승해 자신의 통치성을 강화하려는 기도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 글에서 옹은 신자유주의는 단순한 경제 학설에 그치는 것이 아니며, ‘최적화’를 위해 통치와 자기 통치를 합리화하는 능동적 방식이라고 주장한다. 이에 따라 통치와 피통치, 권력과 지식, 주권과 영토성 사이의 관계가 재형성된다. 즉 각각 다른 체제를 가진 공간들에 적용되면서 신자유주의는 상이한 노동․생활의 환경을 구성한다. 이 과정에서 신자유주의의 통치성을 유지하는 포섭과 배제의 메커니즘이 작동한다. 기존의 시민권, 주권의 개념들은 이 속에서 시장 가치라는 기준에 의해 변화한다. 예를 들어 중국에서는 사회주의 경제 내부에 경제특구가 창설되며, 곳곳에서 NGO, 기업들의 간접적 영향력이 기존에 국가가 행했던 권리의 보호를 담당한다. 시민들에게는 자기 관리, 자기 경영, 자기 통치에 이르는 일련의 경제적 효율성과 더불어 자기 책임이라는 윤리적 주장이 제기되면서 기존의 시민권의 틀이 변화한다. 시장에 대한 계속된 강조 속에서 정부와 제도들은 신자유주의의 통치성 유지의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그리고 신자유주의적 가치의 내면화를 강조하는 이런 주체화 기술의 변화는 신자유주의에 맞서는 주체의 형성이라는 문제에 있어서도 중요한 쟁점을 형성한다. 또 푸코(주의)에 고유한 ‘실증주의’는 신자유주의를 둘러싼 문제에 관해 많은 생각꺼리를 제공할 것이다.
하지만 물론 옹의 주장이나 논증에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녀가 인도주의적 개입이나 NGO식 사회 정책을 비판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때때로 이를 옹호하는 듯한 느낌의 논리를 전개한다. 이는 궁극적으로 그가 보편주의적 정치 이념, 그리고 이를 매개로 한 집단적인 정치적 주체화의 가능성에 다소 회의적인 시선을 보내기 때문일 것이다. 이론적으로 보자면 이는 그녀가 중요한 이론적 준거로 삼는 푸코를 다소 우경적으로 해석하기 때문일 것이다(물론 이는 단순한 ‘편향’이 아니고 푸코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순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푸코의 작업에 관한 최근의 비판적 소개로는 『문학과 사회 75호』(2006. 가을)에 실린 ‘생명정치’ 특집을 보라.).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하고 아마도 더 뼈아픈 문제는, 과거 사회주의 운동에 비할 정도의 보편주의적 정치 이념과 집단적 주체화가 재개되지 못하고 있다는 정세와 관련될 것이다. 그렇다면 그녀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무기의 비판’을 진전시키려는 우리의 노력이 아닐 수 없다.

* 지면 관계상 서문에서 책의 각 장에 대한 설명 부분은 생략했으며, 내용 주가 많지 않아 지면에는 싣지 않고 『사회운동』 홈페이지, www.movements.or.kr에 올리는 것으로 한다.


서문

예외로서 신자유주의, 신자유주의의 예외

신자유주의는 관점에 따라 다른 의미를 가지는 것처럼 보인다. 세계 대부분 지역에서 신자유주의는 미국의 도가 지나친 권력의 약호가 되었다. 아시아의 정치인들과 전문가들은 “미국의 신자유주의”를 국제통화기금(IMF)과 같은 매개를 이용하여 소규모 경제를 억지로 열어젖히고 이 국가들의 현재와 미래의 경제 복지를 파괴하는 무역정책에 노출시키는 시장 지배 전략으로 본다. 예를 들어 아시아 경제가 부상한 10년 간 (1980년대~1990년대), 아시아의 지도자들은 미국의 신자유주의에 대해 “아시아는 노(No)라고 말할 수 있다.”고 공언했다. 이런 수사들은 1997~98년의 “아시아 금융위기” 이후에 더 요란스러워졌다. 또한 대중적 담론에서 신자유주의는 국가 통화와 생활 조건을 위협하는 탈규제된 금융 흐름을 의미했다. 강요된 경제 구조조정 때문에 일자리를 잃은 한국의 반신자유주의 시위대는 “IMF는 나는 해고됐다는 뜻이다!”(IMF means I'M Fired!)고 쓰인 티셔츠를 입었다. 라틴 아메리카에서 미국의 시장개방과 사유화 압력은 “야만적 신자유주의”라고 불렸다. 이라크 침략 이후, 미국은 대기업들이 석유자원을 확보하도록 정복전쟁을 할 만큼 비열하다는 인식이 신자유주의 비판에 포함되었다. 이와 같이 전 세계 대중들의 상상 속에서 미국식 신자유주의는 점차 무법성과 군사행동에 의존하는 발본화된 자본주의적 제국주의로 여겨진다. 아래에서 볼 것처럼, 이런 광범위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아시아 정부들은 경제 구역을 창설하고 시민권에 시장 기준을 강요하는 신자유주의적 형태들을 선별적으로 채택해 왔다.

넓은 의미의 신자유주의

이와는 대조적으로, 미국에서 신자유주의가 학계 밖 대중적 담론의 일부가 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오히려 시장 중심 정책들과 신보수주의가 사회복지 폐지와 대자본의 이익 증진을 추구하는 사고와 전략 전체를 약호화하는 토착적 범주다. 자유는 정치적 자유주의보다는 “자유로운 경제 활동”을 가리키는 더러운 단어가 되었다. 다소 넓게 말하자면, 민주당이 족쇄가 풀린 시장 주도 정신의 과잉에 반대하는 개인의 권리와 시민적 자유의 옹호자라고 스스로를 공언하는 반면, 공화당은 무수한 사회적 문제에 대한 개인적 해법이라는 신자유주의(신보수주의로 읽히는) 담론에 의존한다 할 수 있다. 두 종류의 자유주의 모두 정부의 기본 원리와 목표로 자유로운 주체에 초점을 맞추지만, 민주당원이 개인과 시민의 자유를 강조한다면, 공화당원은 자립과 자기관리라는 개인적 의무를 강조한다. 예를 들어, 보수적 칼럼니스트 윌리엄 새파이어(William Safire)는 “공화당원의 두뇌는 공동체 의존보다는 자립을, 고립보다는 개입을, 사회 규제보다는 자기 규율을, 즐거움을 찾기 위해 일하는 것보다는 일에서 즐거움을 찾는 것을 포함하는” 가치들을 선택한다고 쓴다. 정치 생활에서 두 종류의 자유주의의 합리성들은 자주 겹쳐지고 융합되지만, 공화당은 (정치적) “자유주의”를 “비(非)미국적인” 것으로 만듦으로써 미국에서 신자유주의의 지속을 강화했다. 사실 이런 당파적 논쟁들은 민주주의라는 정치적 자유주의의 이상과 개인의 책임과 운명이라는 신자유주의의 원리 사이에서 벌어지고 있는 균열을 강조했다.
재선에 성공하면서 조지 부시(George W. Bush) 대통령은 미국에서의 삶을 변화시킬 수 있는 정치적 “지침”을 주장했다. 다수의 새롭게 제안된 “시장 중심 정책들”에서 그는 뉴딜 이래로 제도화된 미국 자유민주주의의 근본적 측면들을 해체할 것을 제안했는데, 이는 사회보장과 보건의료의 사유화에서 진보적 세법 폐지에 이른다. 부시는 자신의 새로운 전망을 “소유권 사회”라고 불렀는데, 이는 자신의 감시 하에 미국의 시민권이 자산의 소유자만을 포함하는 시민권에 대한 초기의, 좁은 전망으로 바뀔 것임을 명시적으로 주장하는 것으로, 여기서 특권화되는 것은 경제적 자기 이익을 고립적으로 추구하는 “독립적이고 이기적인 개인”이다. 두 번째 취임연설에서 부시 대통령은 “모든 시민들을 그 혹은 그녀의 운명의 행위자로 만듦으로써… 국민들이 자유 사회에서 삶의 도전을 준비할 것”이라고 명백하게 말했다. 또한 시민권에 대한 이런 신자유주의적 관점은 기독교 복음주의 집단의 도덕적 지지를 받았다.
그러나 정치를 시장화하고 시민권을 재설계하려는 대통령의 시도들이 반대 없이 진행되지는 않았다. 절반에 가까운 시민들이 이런 사유화 정책들에 반대했다. 십여 년간 수없는 저항운동들이, 몇 개만 언급하자면 죄수, 노동자, 여성, 동성애자, 소수자, 외국인의 시민적 권리에 대한 끊임없는 침식을 방어해 왔다. 그들은 개인의 자유와 민족의 유산을 보호하기 위해 계속 싸울 것이라고 약속한다. 그러나 부시 정부는 신자유주의적 이성을 내세우지는 않더라도 그 정신에 따라 다른 정책들 중에서도 빈곤퇴치 계획, 의료보험 혜택, 환경 보호, 식품 안전을 계속해서 역전시키려 한다. 이 같은 신자유주의적 논리, 종교, 권리, 윤리 다발은 미국 시민권의 문제 공간이 되었는데, 그 결과가 무엇인지는 아직 알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서 언급한 것처럼 1970년대 이래로 “미국식 신자유주의”는 해외에서 다양하게 수용되고 비판받은 세계적 현상이 되었다.

신자유주의와 예외들

이 책의 주장은 정치적 최적화의 새로운 양식인 신자유주의가 통치와 피통치, 권력과 지식, 그리고 주권과 영토권 사이의 관계를 재형성하고 있다는 것이다. 신자유주의는 종종 국가 권력과 부정적 관계에 있는 경제 학설로, 통치의 범위와 활동을 제한하려고 하는 시장 이데올로기로 논의된다. 그러나 신자유주의는 그것을 통해 통치 활동들이 기술적 해법이 필요한 비정치적․비이데올로기적 문제로 개작되는 통치와 지식 사이의 새로운 관계로 개념화될 수도 있다. 실제로 통치 기술로 간주되는 신자유주의는 “최적화”를 위해 통치와 자기 통치를 합리화하는 매우 능동적인 방식이다. 따라서 통치 기술로서 신자유주의 계산의 확산은 상황적인 정치적 구도를 불균등하게 절합하는 역사적 과정이다. 민족지적 관점은 막 출현하려고 하는 노동과 삶의 구별되는 환경을 상호적으로 구성하는 시장 합리성, 주권, 그리고 시민권의 특정한 정렬을 드러낸다.
나는 예외로서의 신자유주의가 주권적 지배와 시민권 체제를 절합하는 비서구의 맥락에서 신자유주의의 능동적이고, 개입주의적인 측면에 초점을 맞춘다. 물론 예외로서의 신자유주의신자유주의에 대한 예외들 사이의 차이는 특정한 조사 환경에서 “규범적 질서”가 무엇인가에 따라 정해진다. 이 책은 신흥 국가들에서 예외들의 상호작용에 초점을 맞추는데, 이곳에서 신자유주의 자체는 통치 기술의 일반적 특징이 아니다. 우리는 동아시아와 동남아시아의 자유민주주의에서뿐만 아니라, 탈식민주의, 권위주의, 탈사회주의적 상황에서도 신자유주의 개입을 볼 수 있다. 따라서 예외로서의 신자유주의는 시장 주도 계산이 특정 공간의 주민들과 행정의 관리에 도입되는 변화의 장소에 도입된다. 신자유주의적 예외, 시민권, 그리고 주권의 절합은 일련의 가능한 인류학적 문제들과 결과들을 낳는다.
동시에 신자유주의에 대한 예외들이 정치적 결정들 속에서 발동되어 신자유주의적 계산과 선택에서 주민들과 장소들을 배제한다. 신자유주의에 대한 예외들은 사회안전망을 보호하는 양식일 수도 있고 모든 형태의 정치적 보호들을 없애는 양식일 수도 있다. 예를 들어 러시아에서 도시예산 집행에 신자유주의적 기술들이 도입될 때에도 주택보조금과 사회적 권리들은 보존되었다. 동시에 동남아시아에서는 신자유주의에 대한 예외들이 이주노동자들을 시장주도 정책들이 창출한 생활기준에서 배제했다. 다시 말해서, 신자유주의에 대한 예외들은 시민들을 위한 복지 혜택을 보존하는 동시에 자본주의 발전의 혜택에서 비시민들을 배제할 수 있다.
그러나 신자유주의적 예외들과 시장 계산에 대한 예외들의 작동에는 중복되는 것이 있다. 신자유주의적 기술들의 통치를 받는 주민들은 신자유주의적 고려에서 배제된 다른 사람들에게 의존한다. 신자유주의적 규범에 종속된 주민과 공간을 이런 규범의 시연(試演) 외부의 것들과 절합하게 되면 윤리적 딜레마가 구체화되고, 사회적 평등과 공동의 운명이라는 기본적 가치들이 뒤바뀔 것이라는 위협이 생겨난다. 이어지는 장들은 예외들, 정치들, 윤리들의 상호작용이 진동하는 관계의 장을 구성하는 다양한 민족지적 환경들을 제시할 것이다. 통치와 피통치의 새로운 형태들, 그리고 인간이 된다는 것의 의미에 관한 새로운 관념들이 곧 출현하게 된다.
이런 접근법에서 나는 다른 사람들이 따로따로 다룬 ― 신자유주의와 예외라는 ― 두 개념을 합할 것이다. 통치기술로서의 신자유주의는 시민권과 통치 영역에서의 계산적 선택과 기술들에 의지한다. 푸코(Michel Foucault)에 따르면 “통치성”은 일상적 행실의 체계적․실용적 지도와 규제에 관한 지식 및 기술의 배열을 가리킨다. 푸코가 말하듯, 통치성은 “개인들이 서로를 상대할 때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전략들을 구성하고, 정의하고, 조직하고, 도구화하는” 일련의 실천을 포함한다. 신자유주의적 통치성은 시장 주도의 진리들과 계산들이 정치의 영역으로 침투하는 데서 비롯한다. 오늘날 신자유주의적 합리성은 많은 체제의 행동을 고취하고, 규율, 효율성, 그리고 경쟁력이라는 시장 원리에 따라 자기 관리를 유도당한 자유로운 개인들의 통치를 고취하는 개념을 제공한다.
정치적 예외란 칼 슈미트(Carl Schmitt)의 정식화에서 사법 질서와 일반적 규칙 외부에서 내려진 정치적 결정이다. 슈미트는 “주권자가 총체적인 상황을 만들고 보증한다. 그는 이 최종 결정에 대한 독점권을 갖는다. 여기에 국가 주권의 본질이 있고, 이는 강제나 지배의 독점권이 아니라 결정의 독점권으로 사법적으로 정확히 정의되어야만 한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예외의 조건은 정치적 경계성, 일반화된 정치적 규범성에서 벗어나는, 지배와 피지배의 논리에 개입하는 비상(非常)한 결정이다. 슈미트적인 예외는 전쟁 상황에서 적과 친구를 그리기 위해 발동된다. 지오르지오 아감벤(Giorgio Agamben)은 예외를 사법 질서 내의 시민과 사법적-정치적 보호를 박탈당한 외부자 사이의 분할에 입각한 주권적 지배의 근본 원리로 사용한다.
대조적으로 나는 예외를 더 폭넓게, 즉 배제로도 포함으로도 전개될 수 있는 정책의 비상한 출발로 개념화한다. 통상적 이해에 따르면 주권의 예외는 보호를 거부당한 배제할 수 있는 주체들을 구획한다. 그러나 예외는 신자유주의 개혁과 관련된 “계산적 선택과 가치 지향”의 대상으로 선택된 주민들과 공간들을 포함하는 실정적 결정일 수도 있다. 나의 정식화에서는, 예외로서의 신자유주의와 신자유주의에 대한 예외들 사이의 이음매를, 통치와 규율, 포함과 배제, 인간 행실에 가치를 부여하거나 부인하는 기술들 사이의 상호작용을 탐색할 필요가 있다. 세계화 시대 예외의 정치는 통치와 경계설정의 변화된 기술에서 포함된 자들과 배제된 자들 모두에게 우려스러운 윤리정치적 함의가 있다. 이 책은 어떻게 예외의 시장 주도적 논리가 다양한 민족지적 맥락과 윤리적 위험, 가동된 질문들 속에서 전개되면서 시민권과 주권의 확립된 실천들을 뒤흔드는지를 탐구할 것이다.
예외들, 정치들, 그리고 시민권 사이의 상호관계는 현대 생활의 문제를 결정하며, 이들은 또한 오늘날 인간이 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에 대한 윤리적 논쟁들을 틀짓는다. 예를 들어, 신자유주의적 예외들은 아시아적 배경에서 다양하게 발동되어, 시장 주도 선택과의 관계에서 공간들을 재정의하고, 경제 활동을 다시 도덕적으로 설명하며, 시민권의 사회적 기준을 다시 계산했다. 이런 절합들은 사전에 예측할 수 없는 우연적이고 모호한 일련의 결과들을 낳았다. 신자유주의적 결정들은 새로운 형태의 포함을 창출하여, 몇몇 시민 주체들을 떼어 놓고 비상한 정치적 혜택과 경제적 이득을 향유할 수 있는 새로운 공간들을 창출했다. 슈미트적 예외는 특정한 주민들을 버리고 그들을 정치적 규범성의 외부에 둔다. 그러나 신자유주의적 예외들과 신자유주의에 대한 예외들 사이의 절합은 다양한 인간 범주에 배정된 도덕적 요구들과 가치들의 가능성을 증가시킴으로써 정치적으로 배제된 자들을 위해 다양한 정도의 보호가 협상될 수 있게 한다.
내 생각에 신자유주의와 예외의 결합은, 신자유주의적 이성과 메커니즘의 절합 및 탈구 속에서 시민권과 주권이 어떻게 변이되는지를 이해하는 데 다음과 같은 함의를 갖는다. 먼저, 신자유주의에 초점을 맞추는 것은 통치와 시민권 사이의 연관에 대한 우리의 사고를 엄격한 사법적․법률적 관계로 바꿔 놓을 것이다. 신자유주의적 기술에서 생명정치적 통치 양식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 중요한데, 이는 개인과 주민―통치 체제가 이용하거나 관리할 수 있는 살아 있는 자원으로서―의 역량과 잠재력에 중심을 둔다. 여기서 사용된 신자유주의는 두 종류의 최적화 기술에 적용된다. 주체성(subjectivity)의 기술들은 혼란스러운 시장 조건에서 시민들이 선택들, 효율성, 경쟁력을 최적화할 수 있도록 자기 고취와 자기 통치를 유도하는 전문가 체계와 지식의 배열에 의지한다. 이런 최적화 기술들에는 보건 체제 엄수, 기술 습득, 기업가 정신의 개발, 그리고 다른 자기 공학과 자본 축적 기술들이 포함된다. 종속(subjection)의 기술들은 점차 시장의 힘에 관여하는 공간적 실천들을 통해 최적의 생산성을 위해 주민들을 다르게 규제하려는 정치 전략들을 지시한다. 이런 규제들은 도시 공간의 요새화, 여행 통제, 그리고 성장의 중추(hub)에 특정 종류의 행위자들을 채용하는 것을 포함한다.
최적화의 개입으로서 신자유주의는 행정 전략들과 시민권의 실천을 바꾸는 조건들을 만들기 위해 지배 체제와 시민권의 체제에 상호작용한다. 이는 시장 논리가 정치에 침투하면서 민족 국가에 뿌리내린 법적 지위이자 무국적의 조건에 대한 뚜렷한 반대로서의 시민권의 관념을 개념적으로 뒤흔들린 결과다. 게다가 신자유주의적 예외는 경우에 따라 민족 영토 이하의 또는 반대로 민족 경계를 넘어서는 정치적 공간들에서 시민권의 요소들을 절합한다.
시민권을 창출하는 데 동반된다고 우리가 생각하는 요소들―권리들, 자격들, 영토권, 민족―은 시장의 힘들이 가동시키는 힘들에서 탈구되고 재절합된다. 한편으로 자격, 혜택과 같은 시민권의 요소들이 점차 신자유주의적 기준들에 연관됨으로써 인적 자본이나 전문 지식을 소유하고 있는 기동적 개인들의 가치가 더 높이 평가되고, 다양한 장소에서 유사시민적(citizen-like) 요구를 할 수 있다. 동시에 이처럼 매매할 수 있는 능력이나 잠재력을 갖고 있지 않다고 판단된 시민들은 평가 절하되고 따라서 배제의 실행에 공격받기 쉬워진다. 다른 한편, 시민권의 영토권, 즉 모국의 민족적 공간은 부분적으로 세계 자본주의의 영토권에 그리고 비정부기구(NGO)의 개입으로 지도에 나타나는 공간들에 배태된다. 이런 예외의 중복된 공간들은 시민권의, 혹은 인권의 보편적 체제의 관습적 통념에 깔끔하게 들어맞지 않는 인간 가치의 다양한 요구를 위한 조건들을 창출한다. 요컨대 시민권의 구성요소들은 새로운 공간과 개별적 연계들을 발전시켰고, 이로써 다양한 장소 및 윤리적 상황과의 연관 속에서 재절합되고, 재정의되고, 재상상되었다. 시민권의 구성요소들, 행위자들, 그리고 공간들의 이 같은 탈궤(脫軌)와 재접궤(再接軌)는 시장 전략들, 자원들, 행위자들의 분산과 재편성 때문이었다.
둘째로, 예외로서의 신자유주의는 정치적 개별성으로 오랜 기간 개념화되었던 국가 주권에 대한 연구를 세련되게 한다. 하나의 관점은 국가를 민족의 지형 전체를 평평하게 만들거나, 결국 하나의 단일한 국가 관료제를 강요하려 드는 기계로 본다. 실제에 있어서 주권은 다양한 요구들 및 논쟁과 마주치고, 다양하고 우발적인 결과들을 낳는 다중적이고 때로 모순적인 전략들로 나타난다. 나의 주장은 세계 시장과 규제 제도들의 상호작용 과정에서 주권적 지배가 새로운 경제적 가능성들, 공간들, 그리고 인민을 통치하는 기술들을 창출하는 예외들을 야기한다는 것이다. 신자유주의적 예외는 민족 국가의 공간을 쪼개고 확장하는 방식으로 일정한 주권의 유연성을 가능케 한다. 예를 들어, 동남아시아와 동아시아에서, 구역화(區域化, zoning) 기술들은 시장의 힘과 연관된 집단들을 규제하는 전략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특별한 공간들을 만들었다. 전략적인 정치․경제․사회 조건의 공간적 집중은 해외 투자, 기술 이전, 그리고 국제적 전문 지식을 특정한 고성장 구역에 끌어들인다. 시장 주도적인 공간 분단 전략은 다양한 범주의 인적자본에 대한 세계 자본의 수요에 대응함으로써, 이에 따라 인접하지 않은, 별도로 관리되는 “단계적” 혹은 “다채로운 주권”의 공간 유형을 낳는다. 게다가 기업들과 NGO들이 서로 다른 정치적 규모의 다양한 주민들에게 간접적 영향력을 행사함에 따라, 우리는 중복된 주권들이 출현하는 상황에 처해 있다.
예를 들어, 최적화 기술들은 대도시들을 자원과 행위자 네트워크를 등록하는 중추에 재입지(立地)시켜, 대도시들을 별도의 생태계의 중추로 만든다. 사스키아 사센(Saskia Sassen)은 세계적 순회(巡廻)를 떠받치는 핵심 기능과 서비스를 통제하는 몇몇 “세계 도시들”―뉴욕, 런던 그리고 도쿄―라는 영향력 있는 모형을 제안한다. 이 초민족적 도시 체계는 “세계적 위계에서 주로 중간 범위에 속하는 남반구의 도시들”을 지배한다. 상하이, 홍콩, 그리고 싱가포르의 폭발적 성장은 신자유주의적 예외가 유발하는 다른 종류의 시공간적 상승 작용이 높아짐을 시사한다. 시장 주도 계산은 내외적 요소를 결합․재결합하는 새로운 가능성을 창출하여 이 도시들을 출현과 새로운 순환의 장소로서 재입지시킨다.
전략적 지식, 자원, 그리고 행위자의 상황적 동원은 진동하는 상호작용의 망을, 즉 초고속성장 지역의 범위를 확대하는 시공간적 “생태계”를 형성한다. 이 생태학으로서의 통치성(govermentality-as-ecology) 전략은 신흥 아시아 중심들을 기존 초민족적 도시 체계에 맞추려고 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논리는 집(hometown, oikos)을 특정한 물질과 사회적 가치의 전략적 생산을 위해 다양한 요소들 사이에서 자체적으로 자아낸 공생관계 망에 재입지하는 것이다. 이 마이크로소프트 식 접근은 생태계의 다른 성원들이 각자의 성과를 높이기 위해 사용할 수 있는 “플랫폼”―“서비스들, 도구들, 혹은 기술들”―을 창출한다. 이것은 관습적인 도시 기능을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장소의 미래와 얽히게 되는 국제 기업, 연구 기관들과의 혁신적 협력을 위해 관계를 강화하기 위해 자본을 사용하는 중추 전략이다.
셋째로, 개방된 시장의 계산된 메커니즘은 민족적 경계를 가로지르는 자본, 지식, 그리고 노동의 새로운 배열과 영토화를 절합한다. 마이클 하트(Michael Hardt)와 안토니오 네그리(Antonio Negri)의 영향력 있는 저서인 『제국』은 경제적 세계화가 단일한 세계 노동 체제를 만들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다양한 구역들과 특정한 네트워크들 사이의 복잡한 상호작용은 노동 규제의 통일된 전망에 대한 강력한 주장에 도전한다. 오히려 나는 자본의 다른 방향들이 노동 규제와 노동 규율이라는 서로 다른 축들을 조정하는 예외의 공간들―“씨줄”―을 만든다고 주장한다. 횡방향 생산 체계는 통치성의 늘임뿐만 아니라 다수의 장소를 가로지르는 강제적 노동 체제를 가능케 한다. 따라서 위도의 공간들은 광범위한 지역들에 걸쳐 노동권을 거의 고려하지 않고 작용할 수 있는 규제적․감금적 노동 체제의 혼성 혼합물에 의해 형성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씨줄적 통제는 다양한 장소들 사이로 노동이 이동하는 것에서 간헐적으로 생기는 뜻밖의, 자발적인 도전의 영향을 받는다.
넷째로, 자기 통치의 정신으로서 신자유주의는 특정한 맥락에서 다른 윤리 체제와 마주치고 절합한다. 개인주의와 기업가주의를 장려하는 시장 합리성은 시민권의 규범과 인간 삶의 가치에 대한 논쟁을 낳는다. 예를 들어, 동남아시아의 이슬람 공적 영역에서 신자유주의적 예외는 여성적 미덕에 대한 논쟁을 촉진한다. 울라마들(Ulamas)은 일하는 여성들의 새로운 자율성을 반대하는 반면 페미니스트들은 이슬람의 한계 내에서 일종의 성 평등을 요구한다. 초민족적 인도주의가 상황적 윤리들을 대체했다는 견해와 달리, 신분과 도덕의 문제들은 경제적 합리성, 종교적 규범, 그리고 시민권의 가치에 의해 형성된 특정한 환경에서 문제화되고, 해결되었다.
실제로, 정치적으로 주변화된 사람들의 서로 다른 정도의 정치적․도덕적 요구들은 논리와 힘이 변화하는 연결점에서 협상될 수 있다. 정상화된 시민권과 헐벗은 삶을 단순히 대립시키는 모형들에는 개념적 한계가 있다. 지오르지오 아감벤은 사법법률적 권리를 향유하는 시민들과 “구별불가능성의 지역”에 거주하는 배제된 집단들 사이의 현저한 대조를 묘사한다. 그러나 특정 상황들에 대한 민족지적 연구는 정치적으로 배제된 자들을 위한 협상들이 불명확하거나 모호한 결과를 낳을 수 있다는 것을 드러낸다. 실제로 이것이 특정 환경의 도덕적 문제들과 요구들을 확인하고 절합하기 위해 모든 곳에서 NGO들이 하고 있는 복잡한 작업이다. 때때로 시민권 혹은 유사시민권적 보호를 빼앗긴 사람들의 단순한 생존을 추구하면서 심지어 기업 합리성이 발동될지도 모른다. 인도주의적 개입들은 일률적 방식으로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종횡하는 관계의 변하는 장을 협상해야만 한다.
예외로서의 신자유주의는 서로 환원되지 않는 구성적 관계의 배열을 절합한다. 오히려 민족지적 탐구는 이를 통해 문제들이 해결되는 시공간적 상호관계의 상황적 실천들과 시장 주도 메커니즘 사이의 새로운 상호작용을 드러내 준다. 자기 통치의 기술들은 시민권의 요소들을 절합하고, 자기 경영적 가치들은 이동가능한 사회적 자격으로 번역되고, 기동적인 기업가 주체들은 다양한 장소들에서 유사시민권적 혜택들을 요구할 수 있다. 동시에 통치의 신자유주의적 예외는 다르게 규제되고 세계적 순회에 연계되는 정치적 공간들을 구성한다. 이런 사회 공학(engineering)과 자기 쇄신(reengineering) 같은 반영적 기술들은 다양한 윤리 체제와 상호작용하면서, 시민권과 윤리적 생활에 대한 현대의 문제들을 결정한다.
이 서문의 나머지 부분은 다음과 같은 절로 나뉜다. 첫째로 나는 신자유주의의 이론들을 개관하고 왜 통치 기술로서의 신자유주의가 시민권과 주권의 현대적 변이에 대한 민족지적 연구에 유용한 개념인지를 논의할 것이다. 둘째로, 나는 시장 중심 합리성과 탈궤 및 재접궤할 수 있는 요소들의 집합이라는 시민권 개념을 제안한다. 셋째로, 신자유주의적 예외는 규범성과 예외의 단순한 대립이나 개별성이 아니라 안전, 삶, 그리고 윤리를 구성하는 이질적인 계산들, 선택들, 예외들의 변하기 쉽고 유연한 집합으로서 주권을 다시 생각하는 데 결정적 분석이다, 마지막 절은 어떻게 신자유주의 기획들과 도덕 경제들의 절합이 인간에게서 시민권을 빼앗을 뿐만 아니라 헐벗은 삶을 보호한다는 이익을 위해 재편성되는지를 논의할 것이다.

신자유주의의 양상들

개념으로서 신자유주의의 계보를 짧게 개관해 보자. 신자유주의에 대한 분석적 논의는 20세기 초 자유 시장 메커니즘이 인간과 지구의 운명의 유일한 지도자가 되도록 내버려 두는 것에 대한 칼 폴라니(Karl Polanyi)의 경고로 시작해야 한다. 폴라니의 유명한 주장은 근대사회의 특징이 “이중 운동”이라는 것인데, 여기서 자본의 자유로운 순환은 대항력을 만난다. 현대의 삶에 자유 시장이 미친 파괴적이고 분열적인 효과에 맞서는 자기 보호의 정치적 요구가 그것이다. 폴라니는 국가의 입법이 시장을 규제하고 이로써 사회를 보호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폴라니의 적수들은 법과 사회적 규범들이 사회에서 자원이 최선으로 사용되도록 보장한다는 것에 회의적이었다. 오스트리아 철학자인 프리드리히 폰 하이에크(Friedrich von Hayek)는 대안적 경제 이론을 주관적 수준에서 제안했는데, 이 이론은 자기 이익의 극대화를 목적으로 하는 개인적 행동들을 공적 자원들이 효율적으로 배분될 수 있게 보장하는 핵심 메커니즘으로 간주한다. 하이에크의 자유주의의 핵심은 경제적 인간(Homo economicus)으로, 이는 시장 경쟁의 활기찬 조건에서 만들어진 도구주의적 형상이다. 하이에크의 관념은 1960년대 신자유주의 시카고 학파의 선도적 제안자였던 밀턴 프리드먼(Milton Friedman)과 게리 베커(Gary Becker)에게 영향을 끼쳤다. 이 학설은 1980년대 신자유주의의 첫 번째 물결인 대처리즘과 레이거노믹스와 연관되게 된다. 국내에서 신자유주의 학설은 “큰 정부”와 관료적 복지 국가를 공격하는 데 이용되었다. 기업화와 사유화를 늘리고 “효율성”을 도입하기 위해 국가의 공적 부문을 개혁하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졌다. 해외에서는 해외 시장 접근을 개방하기 위해 경제 자유화가 증진되었다. 이런 정책들은 동구권에 수출되었을 때 “워싱턴 컨센서스”라고 불리었는데, 이는 사회주의 경제들을 경제 경쟁으로 끌어들이도록 개혁하는 일련의 “조정” 전략이었다. 해외에서 이런 사유화와 개방경제 정책들은 “미국식 신자유주의”, 혹은 경제적 세계화라 불리었는데, 즉 무역 블록의 형성을 통해 민족에서 지역 수준으로 경제 계획의 국제적 변화를 지지하는 정책이다.
1990년대에 신자유주의는 프란시스 후쿠야마(Francis Fukuyama)와 제프리 삭스(Jeffey Sachs)와 같은 새로운 세대의 경제학자들에 의해 시장 경제의 진화에서 불가피한 종점으로서 이해되었다. 조지프 스티글리츠(Joseph Stiglitz)와 위르겐 하버마스(Jürgen Habermas) 같은 유명 인사들은 경제 세계화의 사회적 결과들을 비탄했고 자유롭게 배회하는 시장의 파괴에 반대하는 정치적 방어를 역설했다. 그러나 논쟁들이 신자유주의에 대한 찬반을 심사숙고하는 동안, 대부분이 신자유주의가 “특정한 종류의 진보적 근대화의 표현”이라는 데 동의했다. 이 신자유주의의 두 번째 물결에서는 신자유주의적 특성들의 개인적 내면화가 강조되었는데, 이는 새로운 방식의 주체화 기술에 기반을 둔 것이었다. 클린턴 정부 하에서 “개인에게 책임지우기”는 보건과 교육처럼 이전에 보조금이 지급되던 영역의 새로운 규범이 되었으며, “근로연계복지” 사업의 원리로서 이용되었다. 요컨대 정치철학으로서 신자유주의의 주요 요소들은 (1) 공적 자원의 분배에 있어서 국가보다는 시장이 낫다는 주장과 (2) “‘경쟁적’․‘소유적’인, 그리고 종종 ‘소비자 주권’의 학설에 의해 해석되는 개인주의의 초기적 형태”로의 회귀다. 신자유주의의 추론이 경제적(효율성)이고 윤리적(자기 책임)인 주장 양자에 기반을 둔다는 것이 중요하다.
인문과학에서는 신자유주의가 현대 생활의 다른 측면들을 평가하는 최고의 힘이 되었다는 것에 대한 광범위한 동의가 있다. 그러나 여전히 시장 합리성의 범위, 조직 그리고 지식-권력의 차원에 대한 불일치가 있다. 사회 현상으로서 신자유주의는 민족적․세계적 수준에서의 구조 변화와 계급 이데올로기라는 마르크스주의적 개념들의 재구성을 통해 주로 연구되었다. 신좌파의 비판은 신자유주의를 영국과 같은 선진 자유주의 국가에서 복지 국가를 공격하는 계급에 기반을 둔 이데올로기로 본다. 더 넓은 수준에서 신자유주의는 자본주의의 구조적․헤게모니적 세계 지배의 최종 단계로 개념화된다. 예를 들어 스티븐 길(Stephen Gill)은 신자유주의가 민족 국가와 초민족적 기관들 사이의 관계에 대한 준법률적 재구조화에 의지하는 획기적인 질서라고 주장한다. 그는 이 국제 규율 체제가 “시장 문명”과 관련된 사회적 위계와 불가피한 진보라는 헤게모니적 개념을 동반한다고 주장한다.
이런 양상들은 신자유주의적인 북반구 대 포위당한 남반구라는 구조를 만드는 인류학의 두 학파를 낳은 것으로 보인다. 첫 번째는 북반구의 “신자유주의 문화”가 초자연적 경제, 메시아주의 운동, 그리고 다른 사회적 격변을 포함하는 남반구의 대응을 낳았다고 본다. 두 번째 관점은 “신자유주의 국가들”이 “세계적 수준에서” 자본을 집중하고 권력을 독점한다고 본다. 데이비드 하비(David Harvey)는 “신자유주의 국가”를 이상적 유형으로 내세우고 이에 따라 의식하지 못한 채 국가를 개별적인 실체로 제시한다. 이런 접근은 세계에서 경제적으로 가장 역동적인 지역인 동아시아와 대면할 때 개념적 문제에 마주친다. 하비는 “중국의 이상한 경우”를 언급하는데, 이는 명백히 중국의 사회주의적 구성체와 열광적인 자본주의 활동의 공존을 조정하는 분석적 어려움 때문이다. 앞으로 볼 것처럼 신자유주의적 개입들과 아시아 정치 문화의 역동적이고 새로운 결합은 단순한 지정학적 남-북 축, 혹은 민족 국가의 유형학에 기반을 둔 유형학적 접근에 도전한다. 우리는 지배적 국가들에서 시작해 소규모 국가들에 이르는 맹렬한 시장 주도 현상의 조류로 신자유주의를 다루는 것보다는, 다양한 기술들로 쪼개 보는 것이 더 유익할 수 있다. 주권적 실천을 허용하는 정치적 예외나 기존의 규범에서 벗어난 주체화 기술 같은 종류로 말이다. 동아시아 환경을 절합하는 신자유주의적 형태들은 대개 지방 문화적 감수성 및 민족적 동일성과 긴장 관계에 있다. 기술관료들이 기업 의제들을 채택하고 인간 재능과 자기 경영의 이상을 정당화하는 동안, 많은 일반인들은 시장 기준 및 그것이 집단적 가치와 공동체의 이익에 가하는 공격에 대해 계속 양면적․회의적이다. 민족지적 연구가 마주한 도전은 “적절한” 행동 규모―민족이나 세계 또는 지방―를 찾는 것이 아니라 신자유주의적 예외가 낳는 변이의 변동선을 조사할 수 있게 해 주는 분석적 각도를 식별해 내는 것이다.

통치기술로서 신자유주의

인류학자로서, 우리들은 거대 이론에 회의적이다. 우리는 현대 생활의 이질적 상황들에 대한 상황적 민족지 연구의 프리즘을 통해 커다란 문제들을 제기한다. 몇 년 전, 클리포드 기어츠(Clifford Geertz)는 해석적 접근에는 “지반에 좀 더 가까이 머무르는 이론이 필요하다. … 오직 짧게 번뜩이는 추론만이 인류학에서는 효과적인 경향이 있다. 더 긴 것은 형식적 대칭 속에서 학술적 멍함과 논리적 꿈에 빠져드는 경향이 있다.”고 썼다. 오늘날 우리의 질문은 “우리의 주제들이 살고 있는 개념적 세계”를 넘어서지만, 우리 접근은 여전히 저공비행이라는 특징, 담론적․비담론적 실천들에 가까이 머무르는 분석적 관점이라는 특징을 갖는다. 우리의 목표는 다양한 인간 상황의 변이에서 관찰할 수 있는 현대 인간 현상을 중간범위에서 이론화하는 것이다. 우리는 조사의 장소나 대상을 구성하는 구도들 안에서, 요소들을 탈구하고 재절합하는 변동선을 포착하려고 한다. 따라서 신자유주의를 “문화”나 “구조”가 아니라 원래의 자원에서 탈맥락화할 수 있고, 상호 구성적이며 우연적인 관계들의 구도들 안에서 재맥락화할 수 있는 기동적인 계산적 통치 기술로 연구하는 것이 적절할 것 같다. 이 환경은 문제와 그 해결의 장소인 중간적 공간이다.
신자유주의적 통치성은 “생명권력”이라는 푸코의 개념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데, 이는 근대적 통치 양식으로 “생명과 생명의 메커니즘을 정확한 계산의 영역으로 만들고 지식/권력을 인간 생활을 변형하는 행위자로 만든다.” 생명의 관리에 집중하는 이 정치적 기술은 발전의 양 극 사이에서 동요한다. 한 극이 집중하는 것은 “기계로서의 신체다. 곧 신체의 규율, 신체 능력의 최적화, 그리고 그 힘의 강탈”이다. 다른 극이 초점을 맞추는 것은, 생물학적 기계장치이자 집단적 복리와 재생산의 기초인 종(種)으로서의 신체다. 따라서 생명정치는 생명력을 이용하고 추출하기 위해 주민들과 개인들에게 행해지는 일련의 규제적 통제들을 가리킨다. 신자유주의는 인간의 삶을 통치하는 이런 기술들의 가장 최근의 발전에 지나지 않는다, 즉 근대 인간의 정치적 실존을 끊임없이 문제삼는 종속과 주체 형성의 정치를 위해 시장 지식과 계획에 의지하는 통치성일 따름이다.
영국의 통치성 학파는 신자유주의를 개인의 능동적 자유의 조건을 논리로 갖는 통치 기예로 보는 이론을 제안한다. 이들의 관점에서 볼 때 신자유주의는 일반 경제 학설이 아니라 “자유로운 인간, 시민, 주체의 자활적인 능력을” 근대 통치의 정언명령의 근거로 삼는 기술이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경험적 기획에서 어떻게 신자유주의―자유로운 정치 질서의 기초로서 경제적 인간이라는 하이에크의 처방―가 다양한, 현대적 상황들에서 번역되고, 기술혁신되고, 작동되는지에 대해 조사하려고 한다.
니콜라스 로즈(Nikolas Rose)는 “자유를 통한 통치” 양식으로서 신자유주의가 영국과 다른 선진 자유민주주의에서 지배적 통치 양식이 되었다고 주장한다. 국가를 “축소시키는” 신자유주의 정책들은 사회적인 것과 시민 주체들을 개조하는 기술의 확산을 동반한다. 따라서 신자유주의적 논리는 주민들이 일상생활의 서로 다른 영역에서 ― 보건, 교육, 관료제, 직업 등 ― 자유롭고, 자기 관리적이며, 자기 경영적인 개인들이 될 것을 요구한다. 따라서 신자유주의적 주체들은 국가에게 요구하는 시민이 아니라 “그/녀 자신의 기업가”가 되도록 강요받는 자기 경영적인 시민 주체다. 예를 들어, “제 3의 길”이라는 깃발 아래에는 공동체 수준의 책임, 그리고 개인적 주체들이 스스로를 책임져야 한다는 새로운 요구들에 대한 새로운 강조가 있다. 신자유주의적 기술은 통치, 자기 통치, 그리고 정치적 공간들 사이의 연관을 재조직하여, 세계화된 불확실성과 위협에 기술적․윤리적으로 응답하는 조건을 최적화한다.
정치적 합리성으로서의 신자유주의가 선진 자유민주주의의 환경에 국한되지 않는 것이 분명하지만, 북대서양의 상황 외부에서는 거의 조사되지 않았다. 실제로 “경제적 세계화”는 복수의 세계적 장소들을 가로지르는 신자유주의의 합리성이 이렇게 탈배태되고 재배태되는 것을 가리킨다.
예외로서의 신자유주의는 탈식민주의, 권위주의, 그리고 탈사회주의처럼 다양한 정치적 환경에서 전개된다. 신자유주의적 계산과 선택의 확산을 부추긴 것은 신흥 국가들에게 “정치적 기업가주의” 따위를 처방한 세계은행 같은 국제 기관들이었는데, 이 나라들에서는 평생 학습과 전문지식 담론들이 시민들이 국제지식시장에서 자기 관리하고 경쟁할 것을 권장했다. 삶을 최적화하는 데 집중하는 기술들의 배열로서의 신자유주의는 곳곳으로 이동하며, 이 과정에서 대대적인 “신자유주의”의 단일한 국제적 조건들의 사례로 분석적으로 환원할 수 없는 다양한 배치들과 상호작용한다. 그렇다면 시민권의 윤리와 변화하는 형태를 우리가 사고하는 데 ― 예외로서의, 그리고 이에 대한 예외인 ― 신자유주의 통치 양식들의 개념적 함의는 무엇인가?

시민권의 절합과 탈구((Dis)Articulation of Citizenship)

일상 생활 위를 맴도는 분석의 관점은 계속되는 사회적 힘들과의 관계에서 윤리의 끊임없는 조정․재조정을 찾아낸다. 특히 시장 주도의 강요는 서로 다른 방식들로 시민권의 요소들을 재편성하면서, 한편으로 시민권의 통일된 모형을, 다른 한편으로 시민권 요구의 민족적 틀에 도전한다. 시민권의 시간적 차원이 우리가 이전에 생각했던 것보다 덜 고정적이라는 것이 점차 명확해지고 있으며, 관념들과 사람들의 흐름이 시민권 보호를 감소시키며, 요구들의 새로운 절합이 새로운 정치 공간들에서 출현한다.
지금까지 시민권의 유력한 개념들은 민족 영토에 뿌리내린 시민권의 권리들과 민족 국가 외부의 무국적 조건 사이의 이항대립에 근거하고 있었다. 이 정치적-사법적 개념은 오직 민족 국가만이 인정된 정치적 소속을 통해 요구된 보호와 시민권의 자격을 부여할 수 있다는 실제 현실에 근거하는 것이다. 실제로 정치적 지위로서의 시민권은 망명자와 난민들에게 계속해서 대단히 중요한 것이 되었는데, 이들에게 망명하는 국가에서 시민권을 얻는 것은 근대적 인간으로 인정받는 가장 기본적인 조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본과 이주자의 현대적 흐름은 한때 단일한, 영토화된 전체 속에서 얽혀 있던 시민권 요구를 풀기 위해 복잡한 방식으로 주권과 권리 담론에 상호작용해 왔다.
많은 사람들이 썼던 것처럼 형식적 시민권만으로는, 투표를 하고 정치 생활에 참여할 수 있다거나(정치적 권리들), 혹은 법 아래서 평등한 대우를 받을 수 있다는(시민적 권리들) 것이 좀처럼 보장되지 않는다. 따라서 마샬(T. H. Marshall)은 평등한 시민들로서의 지위를 하락시키는 여성, 빈민, 소수자, 그리고 성적․계급적․인종적 차별 때문에 공격받기 쉬운 여타 사람들에 대한 사회적 보장의 필요성을 묘사하기 위해 사회적 권리라는 단어를 새로 만들어냈다. 이 20세기 초의 시민권 개념은 ― 상상된 정치적 동일성으로서, 평등한 권리에 대한 권리로서 ― 민족 국가가 상대적으로 안정적이고, 민족 영토에 고정된 일반시민을 통제한다는 가정에 근거하고 있다.
최근 권리 담론은 세계화의 흐름과 분란을 통합함으로써, 민족 국가의 범위를 넘어 시민권이 공유되는 공간을 개방하는 전략을 도입했다. 이 개방은 유럽연합(EU) 내의 지방적․지역적 수준에서 다양한 시민권 요구에 대한 논쟁을 가능케 했다. 권리옹호 운동들은 권리들과 혜택들의 다른 묶음으로 시민권이 “해체”되고, 이에 따라 유럽 국가들이 다양한 비(非)유럽 이주자들과 비(非)시민들을 다르게 통합할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혹자는 제한된 혜택들과 시민의 권리들이 부분적 시민권의 형태, 혹은 이주 노동자들을 위한 “탈민족적” 정치 소속을 구성한다고 주장해 왔다. 이런 탈민족적 시민권 주장들은 형식적 시민권 없이 이주자들이 얻은 이득들을 과장했을 수 있다. 또한 지배적 권리 담론에도 불구하고, 부정적인 해체 과정 역시 진행 중이라고 덧붙일 수도 있을 것이다. 세계 시장에 대응하면서 (특히 독일에서) 복지 국가가 축소된 것처럼 마샬적인 사회적 권리는 파괴되었다. 유럽에서는 이주자에게 유리한, 또 노동자들의 이익에는 반하는 권리와 혜택의 해체 과정이 진행 중이다.
나는 시민권의 탈구와 재절합을 다르게 생각한다. 시민권 요소들의 새로운 정렬이 근본적으로 기동적인 신자유주의적 통치와 자기 통치의 기술들이 낳은 역동적이고 다양한 조건들에 연계되어 있다는 것이 나의 주장이다. 족쇄가 풀린 자본주의의 기술들과 시민권의 요소들 사이의 분리와 재연결에는 시․공간적 차원이 있다. 첫째로, 이전에 시민권에 묶여 있던 구성요소들―권리들이나 자격들, 또 민족과 영토―은 서로 탈구되고 있으며, 타자들이 아니라 주체들의 특정 범주를 정의․평가․보호함에 있어 경제적 논리를 조장하는 통치 전략에 재절합되고 있다. 일부 환경에서, 신자유주의적 예외가 가치를 부여하는 것은, 계산적 실천들 그리고 우선적 시민으로서 자기 통치적 주체들이다. 동시에 주민의 다른 부분들은 신자유주의적 기준에서 제외되고 이에 따라 시민과 주체에서 배제할 수 있게 된다. 개인적 능력 혹은 시장 기술 수행의 차이는 기존의 사회적․도덕적 불평등을 강화하는 한편 민족과 외국 주민들 사이의 정치적 차별을 흐리게 한다.
세계적 순회에서, 교육받고 자기 추진적인 개인들은, 심지어 영토화된 시민들을 희생하면서까지, 유사시민권적 자격과 혜택들을 요구한다. 국외로 이주한 인재들은 형식적 시민권 없이 움직일 수 있는 자격의 형태를 구성한다. 심하게 자기만족적이거나 혹은 신자유주의적 잠재력이 부족한 것으로 간주되는 시민들은 가치가 떨어지는 주체들로 다루어질 수도 있다. 저숙련 시민들과 이주자들은 신자유주의 메커니즘에 대한 예외가 되고, 수송 중인 배제가능한 인민들로 구성되어, 성장 지역의 내외를 왕복한다. 우리는 특정한 권리들과 혜택들이 시장성이 높은 재능 보유자들에게 분배되고, 이런 능력이나 잠재력이 부족한 것으로 판단되는 사람들에게는 부인되면서, 정치적 소속과 민족 영토에서 자격들이 분리되는 것을 볼 것이다. 신자유주의적 예외는 법률적 시민 신분에서 분리할 수 있는 분배적 정의의 도덕화된 체계와 동맹을 맺고 있다. 시민권의 요소들, 기업가적 특성, 그리고 세계적 순환 사이의 절합은 우리가 오랫동안 시민권의 통일된 공간들과 동질적 집단성이라고 생각했던 것을 쪼갠다. 신자유주의와 신자유주의에 대한 예외의 기술들, 그리고 시민권 요소들의 탈구와 재절합에 개념적 초점을 맞추면 시민권과 가치부여적인 기준에서의 변이들을 조사하는 문제 공간을 식별할 수 있게 된다.
둘째로, 절합들은 담론적 실천들을 전위의 조건 안에서 계속되는 시민권의 협상으로서 지시하기도 한다. 개념적 시간성으로서의 절합은 시장 합리성, 정치, 그리고 윤리의 특수한 배치 안에서의 우연적인 출현으로서 요구들을 탐구할 수 있게 해 준다. 정세적 공간 내의 모순적 요소들의 번역이나 담론적 협상에 대한 강조는 요소들 사이의 예정된 반대나 적대적 입장을 슬쩍 비껴나지만, 예상치 못한 가능성들과 해법들에 대한 개념적 개방성을 유지한다. 호미 바바(Homi Bhabha) 역시 권력의 역류에서 새롭게 전유되고 재해석되면서 문화적 의미의 불안정성을 유지하는 “언표행위의 모순적이고 모호한 공간”에 대해 언급한다. 맥락 특수적인 질문들은 어떻게 대립하는 해석들과 요구들이 신자유주의적 논리들과 주도권들을 방해하고, 늦추며, 빗나가게 하고, 협상할 수 있게 하는지를 포착하게 해 준다. 이 변동하는 공간의 전달, 번역, 그리고 협상의 시간성은 정치적 정교화, 우연성, 모호성으로 가득 차 있다.
이질적 사건들과 힘들의 교차지점에서 있는 언표행위의 시간성은 세계시민적 시민권의 전면적인 요구들에 신중해야 하는 이유가 된다. 예를 들어, 위르겐 하버마스는 탈규제된 시장의 맹공격과 그것이 공적 생활에서 “민주주의의 결핍”을 만드는 것을 탄식했다. 그는 사회 보장, 공적 사회 서비스, 성적․계급적 규범, 사형제도 폐지 등과 같은 소중한 이상들을 방어할 수 있는 유럽 전체 수준의 공적 영역과 헌법의 창설을 요청했다. 유럽 문명과 공유된 정치적 민주주의 문화에 대한 이런 요구들은 증가하는 세계시민주의 사고와 감정들, 세계시민주의 시민권 담론의 출현을 반영한다. 유럽의 논평자들은 국제연합(UN)과 인권기구들과 같은 다자적 기관들의 활동에서 새로운 세계적 공적 영역을 지목해 왔다. 그러나 더 큰 포괄성과 연대의 감정은 세계시민주의 제도들의 실질적 창설과 융합할 수 없다. 실제로 일부 관찰자들은 칸트의 세계시민주의에서 영감을 얻은 다원화된 세계 공동체들은 여전히 현실보다 훨씬 이상적이라고 주장한다. UN은 자신의 많은 인권적 수단들을 집행할 힘이 부족하며, 인도주의적 개입들을 주창하는 ― 혹은 군사적 침략을 개시하는 ― 선도국들의 영향력에 매우 크게 좌우된다. 실제로 미국의 이라크 선제공격은 세계시민적 권리라는 이상에 심각한 타격을 입혔으며, 어떻게 UN이 모든 인류를 위해 이야기한다는 잃어버린 권한을 회복할 것인지는 불투명하다. 게다가 세계시민주의의 가치들―개인주의, 보편성, 그리고 일반성―은 역사적으로 비-유럽 사회들의 정복과 변형에 연관되기도 했다. 세계시민주의의 담론들은 제국주의의 문명화 사명의 결정적 일부였고, 따라서 이전에 식민지 경험을 겪은 나라의 인민들은 이를 회의적으로 대했다. 따라서 우리의 시민권 분석에서 중요한 것은, 예정된 불가피성의 목적인에 의지하지 않고 시․공간적 상호관계의 장 안에 있는 언표행위의 상황적 본성을 특정하는 것이다. 지정학, 시장 논리, 예외들, 그리고 윤리 담론의 상황적 얽힘은 우연성, 양가성, 불확실한 결과들에 대해 개념적으로 열려 있을 필요가 있다.

주권과 예외

최근 몇 년 동안 주권의 공간성은 근대 권력의 본질에 대한 질문에서 핵심 쟁점이 되었다. 한 입장은 “신 국제 관계” 학파다. 존 러기(John Ruggie)는 세계화가 국가 권력을 약화시킨다는 주장에도 불구하고, 주권이 “영토적으로 정의되고, 고정되며, 적법한 지배의 상호 배제적 비지(飛地)”의 속성이라고 단언한다. 이 단일한 공간성과 대조적으로, 포스트식민주의적 관점은 도시-농촌 분할에 기반을 둔 “이원적 국가”의 식민지 유산이 아프리카의 주권 지배를 계속 구조화한다고 주장한다. 아프리카의 주권에 대해 더 미묘한 관점은 수도에 고립된 국가 장치들, 요새-창고, 법인 비지, NGO가 관리하는 공간들에 대한 묘사를 포함시킨다. 나의 관심은 이것들과 중복되지만, 나의 개념화는 이전의 식민지 분할 통치, 군국주의적 축적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약탈자들, 혹은 “세계 자본”과 NGO들의 침략 안에서 공간적 동역학을 찾지 않는다는 점에서 다르다.
그보다 내가 초점을 맞추는 것은 한편으로 신자유주의적 예외의 선택적 배치이며, 다른 한편으로 주권의 공간화하는 실천에서 도구화되는 신자유주의에 대한 예외다. 신자유주의와 그 예외들에 의해 절합되는 이 공간화의 동역학은 동아시아의 환경에서는 다른데, 여기서는 아프리카의 약하고 분산된 정치 구성체와 비교할 때, 국가가 더 강건하고 집중화하는 경향이 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국가 주권에 대한 슈미트의 관점은 정치적 규범성에 대한 예외에서 야기되는 위기 및 도전에 대응하는 전략적․상황적 권력 행사에 기반을 둔다. 그는 “모든 법은 ‘상황의 법’”이라고 주장한다. 예외의 우발적인 이용―신자유주의적 기술이나 신자유주의의 배제처럼―은 몇몇 아시아적 맥락에서 능숙하게 적용된다.
예를 들어 중국이 세계 무대에 재등장할 때의 특징은 “경제특별구역”(SEZS, 경제특구)과 “행정특별구역”(SARS, 행정특구)의 창설이었다. 이 새로운 공간들은 노동시장의 특별한 공간들, 투자 기회, 그리고 상대적인 행정적 자유를 구획하는 메커니즘과 절차에서 제도화된 계산적 선택의 기술에 의해 출현했다. 이 공간들을 구역으로 약호화하는 계산적 메커니즘은 특별과세와 투자 계획, 도시 예산, 기간산업 개발, 그리고 어느 정도의 자율적 통치를 포함한다. 이 경우 예외의 논리는 집중화된 사회주의 생산의 위기에 대응하고, 국가의 나머지 지역들과 근본적으로 맞지 않는 공간과 조건들을 만들어 낸 시장 개혁을 시작하기 위한 것이다.(4장)
아시아의 환경에서 예외의 선택지는 국가가 그들의 영토를 분할해서 세계 시장에서 더 잘 종사하고 경쟁할 수 있도록 한다. 신자유주의적 계산들은 인간 영토권의 실천, 혹은 지정학 공간의 재기입을 통한 주민의 통제에 적용된다. 중국의 사례가 예증하는 것처럼, 구역화 기술은 경제적 자유와 기업가 활동의 실험을 위한 대안적 영토성을 부호화한다. 예외의 논리는 세계적 순회의 특정하고 다양하며 우연적인 관계의 형성을 위해 인간 영토권을 분할한다. 이에 따른 단계적 혹은 다채로운 주권의 유형은 국가가 세계적 도전에 맞서는 동시에 질서와 성장을 확보하는 양자를 할 수 있도록 보장한다. 예외의 논리를 통해 산출된 이런 전략들이 자유 시장 이데올로기, 근대 정치적 자유주의, 그리고 참여적 시민 주체들의 “계몽”에서 일괄적으로 벗어나 있다는 것에 주목하는 점 역시 중요하다. 국가가 형식적 주권을 계속 유지하는 동안, 기업들과 다자적 기관들은 특별 구역에서 주민들의 생활․노동․이주 조건에 대해 사실상의 통제를 빈번하게 행사한다. 주권 국가에서 융합되었던 행정적 통제, 시민권, 영토성이 따로 떨어져 작동하는 것에서 우리는 사실상 중복하는 주권들을 보게 될 것이다. 따라서 신자유주의적 예외는 주권과 시민권 사이의 솔기를 억지로 열고, 이 과정에서 자신들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 국가 너머를 보아야만 하는 저숙련 시민들과 이주자들의 연속적 수준의 불안전을 낳는다.
따라서 예외는, 서로 구별되는 경제 활동이 복수의 단계를 지닌 구성체 안에서 뒤섞인다는 정도의 관점에서 제시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서는 혁신적 공간 행정을 제도화할 수 있게 해 준다. 어떤 사람들은 경제적 세계화의 공간을 조사하는 적절한 규모가 지방, 도시, 주, 국가, “지역 경제”와 같은 기존의 행정 단위라고 본다. 다른 관점은 국제적 힘들의 효과가 개인, 도시, 민족, 그리고 지역적 규모에 따라 동요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규모의 언어는, 그 자신을 너무 곧이곧대로 믿을 위험이 있는 개념적 구조물을 투영한다. 이 규모의 이미지는 우리가 공간을 “끊임없이 변하는 것으로” 보고, “물질성을 끊임없이 출현하는 과정으로 재묘사”해야 할 때, 시장적 계산은 정치적 전망의 경제학적 구조화에 관심을 갖는다는 점을 시사한다. 예외 공간의 논리는 공간들이 항상 이전의 정치적 경계들에 의해 정의되는 것이 아니라 자원과 흐름의 신중한 동원이 제공하는 기회들과 관련지어 인간 영토권을 분리하는 신자유주의 계획들에 의해 출현한다.
예를 들어, 주권의 예외는 “외부” 공간들과 주민들 모두에 대해서 더욱 유연해졌다. 아시아의 어떤 맥락에서는 유동적 “생태계”라는 용어로 외부 환경의 탄력적 가능성을 기술정치적으로 재개념화한다. 민족 국가는 고정된 영토권이라는 식의 개념에서 벗어나서, 기업가적 통치성은 광범위한 자원들에서 전문가, 지식, 그리고 기술들을 입수해 온다. 최적화의 논리와 상호작용의 밀도에서 오는 공생적 상호의존 및 상승작용이라는 생태적 원리 사이에는 흥미로운 수렴점이 있다. 기술관료들이 아시아의 도시들과 도시의 외부 환경을 재설계함에 따라, 민족적 영역은 특화된 마디들로 분할되고, 세계 자본주의의 “활발한 생태계”에 배태된 집(oikos)으로 확장된다. 예를 들어, 싱가포르의 기술관료들은 생명기술 연구의 미개척분야를 활기 있게 개발하기 위해 지식 자본, 연구 기관, 그리고 과학자들을 모으고 있다. 생명 형태의 임계질량 사이에서 벌어지는 상승 작용, 공생, 적소 형태, 양성 등 생태적 원리는 생명정치적 상호관계로 탈구, 재절합되는 초민족적 공간에 모국을 재입지하려는 정치적 전략을 고취시킨다.
우연적 공간화는 예외의 논리가 초민족적 생산 네트워크의 규율적․규제적 체제를 혁신적으로 결합할 수 있게 해 준다는 것을 드러낸다. 한편으로 경제적 세계화의 지도제작법은 국제적․민족적․거대도시적․지방적 수준의 위계적 도식이라거나, 규제적 서구 사회 대 규율적 아시아 사회로 분할되지 않는다. 다른 한편, 하트와 네그리는 질 들뢰즈(Gille Deleuze)를 통해서 우리가 규율 사회에서 통제 사회로 이행하고 있다는 획기적인 주장을 했는데, 후자에서 통제의 “메커니즘”은 특정한 규율 기술의 작동을 통하기보다는, 더 “민주적”이 되고 “시민들의 두뇌와 신체를 통해 분배된다.” 통제 체계는 “부유적”(浮游的)이고 본성상 조절적이며, “탈약호화되고 탈영토화된 흐름들의 고른 공간”을 산출한다. 노동 체제가 세계적으로 단일하다는 가정에 힘입어 하트와 네그리는, 생산력의 “탈지역화”가 노동 착취를 탈맥락화하고 “비배치가능하게”(non-placeable) 만든다고 주장한다. 설사 이 정식화를 성급하게 받아들인다 해도, 유연한 초민족적 네트워크를 비규율적 노동과 연관시키는 것은 잘못인데, 왜냐하면 민족지적 연구가 보여 주듯 초민족적 생산체계는 노동 통제의 감금적 양식을 계속해서 활용하기 때문이다.
세계 자본주의의 예외의 논리는, 통치성의 체계와 노동 감금 체제의 조정에 의해 형성되는 홈이 파인 공간들―혹은 “씨줄들”―을 새겨 넣는 초민족적 네트워크 안에서 노동과 관리 체제가 결합할 수 있게 해 준다. 게다가 연구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노동 전술과 반란들은 몹시 맥락 특정적인 경향이 있으며, 이들은 세계적 시민권이라는 약속을 가지고는, 세계적 대중운동 혹은 다중들과 쉽게 합체되지 않는다. 요컨대 기업 경영의 실행이 매우 기동적일지라도, 다양한 구역들에서 이를 전달․번역․실행하는 것은 항상 상황적이며, 정치적 가능성 면에서 다양하고 우연적인 제도화된 노동 실천들의 배열에 의존한다.(5장)
예외로서의 신자유주의와 신자유주의에 대한 예외 사이의 동요는 또한 윤리적 지리학과 자칭 NGO가 행정을 담당하는 공간을 출현시킨다. 예를 들어, 포함과 배제의 정치가 교차하면서 국외로 이주한 인재들이 전형적인 이상적 시민으로 통합되는 반면, 노동력 착출을 위해 들여온 저숙련 이주자들은 정치적으로 배제되는 상황들이 창출된다. 이런 비시민들이 이주 노동자나 외부인자로서의 자신들의 권리를 보호해 달라고 흔히 호소하는 대상은 국가가 아니라, 비정부 기관들이다. 여기서 이주 노동자, 밀입국한 개인들, 그리고 망명자들을 위한 요구를 NGO가 절합하는 것은, 신자유주의에 대한 예외의 공간들을 그려낼 수 있는 규범적 메커니즘에 점점 더 많이 의존하게 된다. 이 공간들은 이주 노동의 순환과 이들의 착취의 분배에 의해 암시된다. 정치적으로 배제된 자들의 생명지도학을 그려냄으로써 NGO들은 이주 노동자와 밀입국한 개인들에 대한 도덕적 책임이라는 초민족적 의미를 놓고 다양한 정부들 및 문화적 권위와 협상한다. 요컨대 출현하는 요구들의 지리학은 시장도 국가도 아닌, 이 양자와 절합하는 새로운 정치 체계들에 의해 그려진다.(9장) 따라서 시민권과 윤리의 문제는 공간들, 노동, 그리고 삶을 관리하는 다양한 제도의 교차 속에서 뒤얽힌다.

헐벗은 삶: 윤리의 예외들?

경제적 세계화의 기술들은 다소간 가치 있는 주체들, 실천들, 생활양식, 그리고 좋은 것의 시각에 대한 도덕적 계산을 지니게 된다. 여기서 사용되는 윤리는 특정한 존재 양식을 얻기 위한 자기 돌봄의 규범적 기술, 혹은 자기의 실천이라는 고대 그리스-로마의 의미다. 따라서 윤리 체제는 특정한 윤리적 목표에 일치하는 자신을 구성하기 위해 주어진 가치들을 따르는 생활양식으로 해석할 수 있다. 종교들은 ― 내 생각에 페미니즘, 인도주의 혹은 다른 덕의 체계들도 마찬가지다. ― 특정한 형태의 자기 행실과 좋은 생활의 전망을 촉진하는 윤리적 체제들이다. 시민권의 윤리적 개념들은 특정한 민족의 핵심 가치들을 표현하는 주체들의 존재 양식, 민족 정신의 표현을 포함한다. 민족 국가의 형성에서, 민족 문화, 인문학, 그리고 종교들은 “상상의 공동체”, 곧 공공선의 공유된 전망을 형성하는 데 상호작용해왔다.
시민권에 관한 더 넓은 개념들은 공유된 인간성이라는 계몽주의의 이상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는 난민과 무국적의 사람들로 가득 찬 유럽의 한 가운데서 우리의 “인간의 조건”이라는 질문을 제기했다. 우리의 인간의 조건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은, 우리가 종사하는 세 종류의 근본적 인간 활동을 통해서라고 그녀는 주장했다. 생물학적 생명 형태, 노동하는 존재, 정치적 행위자가 바로 그것이다. 이 통일된 인간의 조건 개념은 무국적자들이 시민권에 대한 권리를 국제적으로 요구하는 근거가 되었다. 다시 한 번 이주자들이 넘쳐나는 유럽에서 아감벤은 아렌트의 인간의 조건이라는 관념을 개작한다. 민족적 시민권으로부터 배제되었기 때문에, 미등록 노동자, 망명자, 그리고 전쟁 피난민들은 “헐벗은 삶”이라는 비인간적 조건으로 떨어진다고 그는 주장한다. 따라서 주권 국가는 시민들에게 보호를 제공함으로써 근대적 인간성을 생산함과 동시에, 비시민들에게 이를 부인함으로써 헐벗은 삶을 생산한다. 오직 (정치체로서) 인민/국민(People)과 (배제된 신체들로서) 인민/민중(people) 사이의 분할을 삭제하는 것만이 시민권을 거부당해 온 세계적으로 배제된 이들에게 인간성을 회복시켜 줄 수 있다고 그는 단언한다. 따라서 민족 국가가 부여하는 단순한 권리로서 시민권을 논의하는 것으로부터, 비시민들과의 보다 넓은 연대로 전환하게 되는데, 자신들이 인류에 포함되어야 한다고 그들의 요구는 세계화된 세계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우리 자신의 윤리적 질문의 일부분이다.
따라서 아감벤은 인간성의 보편적 규범을 생활 조건에 관한 유일한 분석적이고 윤리적인 척도로서 제시한다. 또한 예외의 논리는 정치적으로 배제된 사람들에 맞서서만 발동된다는 지각도 있다. 주민들이 법적이고 단순하게 둘로 나뉜다는 것에만 배타적으로 초점을 맞추게 되면 두 가지 개념적 문제가 발생한다. 먼저 이 축은 대안적인 인간성의 윤리 규범을 제기하는 다른 보편화적 도덕 담론―특히 위대한 종교들―의 유효성을 평가절하한다. 예를 들어 이슬람교에는 초민족적 덕목에 대한 고유한 시각이 있으며, 여기에는 인권의 견지에서만 배타적으로 표현되지 않는 윤리들에 관한 고유한 내적 투쟁들이 동반된다. 1장에서 나는 이슬람 공동체―움마(umma)―가 어떻게 윤리적 주체 형성과 영적 소속의 절합을 보편화하는 도식인지를 논의할 것이다. 세계화된 초고속 성장의 장소들 역시 인권 담론과 상호작용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 상황적인 윤리 체제들을 절합한다. 권리가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으로 인류를 보편적으로 분할하는 아감벤식 도식을 엄격히 고집하게 되면, 작용하고 있는 다수의 윤리 체계의 풍부한 가능성들과 복잡함을 놓칠 수 있다.
인권 이외에도, 좋은 삶에 대한 다른 비전들 역시 주어진 생활 영역 내에서 덕의 수행에 대한 윤리적 요구와 규범적 지침을 제공한다. 생명정치와 기술적 이성의 상호작용은 현대 생활의 윤리적 문제들에 형태를 부여하며, 인간의 삶이라는 문제에 대한 다양한 해법들이 이 변화하는 모체 내부에 제기된다. 스티븐 콜리어(Stephen Collier)와 앤드류 레이코프(Andrew Lakoff)는 “생활 체제”라는 용어를 만들어냈고, 이를 “문제적 상황에서 가능한 행동 지침을 제공하기 위해 발동되고 재작동되는 도덕적 이성의 상황적 형태”라고 정의한다. 만약 현대 생활 체제들이 신자유주의적 논리와 점점 더 많이 상호작용하게 된다면, 윤리적 주체 형성은 보편화된 인간 관념에 연동되기보다는, 요소들의 특정한 구도에서 만들어질 것이다.
따라서 영속적인 예외 상태의 헐벗은 삶이라는 아감벤의 근본적 준거점은 영토화된 시민권이 없는 사람들을 위한 요구의 복잡한 협상 가능성을 무시한다. 시민권 외부에 있는, 모든 비시민들은 “내부와 외부, 예외와 지배, 합법과 불법이 구별되지 않는 구역으로 떨어지는데, 여기서 주관적 권리와 사법적 보호의 개념들 자체는 더 이상 아무런 의미도 없으며 … 권력은 아무런 매개도 없이 순수한 삶에 지나지 않는 것을 대면하게 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그러나 이 엄격한 이항대립에서 아감벤은 도덕적 보호와 적법성의 요구를 지지할 수 있는 복합적 구별이나 비-권리적 매개의 가능성을 제외해 버리는 것 같다. 포로수용소를 근대 주권의 규범으로 표현하는 것은 정치적으로나 민족지적으로 부정확할 뿐더러 위험하기까지 하다. 변화하는 인간성의 법률적․도덕적 영역은 무한히 더 복잡해진 것이다.
경제적 세계화는 어마어마한 숫자의 세계적으로 배제된 이들과 연관되어 있다. 일부 국가의 법률적 시민권에도 불구하고, 최소한의 생존의 끈만을 붙잡고 있는 수백 만 명의 이주 노동자, 난민, 밀입국자들은 훨씬 더 위태롭고 포착하기 어렵다. 법률적 시민권이 인간 보호의 다만 한 가지 형태일 뿐이라는 점은 명확하다. 주변화된 사람들이 권리의 환경에서 배제되는 이유는 그들이 자주 숨겨져 있거나 “실패한 국가들”에 살거나, 실향유민인 까닭에 일단 이동하면 사실상 권리들을 빼앗기기 때문이다. 이런 인도주의적 위기 상황에서, 법률적 시민권은 단지 인간성을 (재)정리하고 (재)평가하는 다수의 도식들 중 하나에 불과하다.
점차 다양한 다자적 체계들 ― 다국적 기업들, 종교 조직들, UN 기관들, 그리고 다른 NGO들 ― 이 학대받고, 헐벗으며, 그리고 금이 간 신체들의 특정하고 상황적이며 실천적인 문제들을 다루기 위해 개입한다. 배제된 인간성의 비국가적 행정은, 불연속적이고, 어긋나 있으며, 우연적인 특성을 띠기는 하지만, 새로운 초민족적 현상이다. 콜리어와 레이코프는 이런 상황들을 “헐벗은 삶의 대항 정치”로 묘사한다. ― “살아 있는 존재로서의 요구라는 견지에서” 주장할 수 있도록 헐벗은 삶을 다양한 방식으로 모으는 상황적인 도덕적 추론의 형태로서 말이다. 실제로 헐벗은 삶은 자체로 고유한 도덕적 정당성이 있으며, 윤리와 노동에 대한 헐벗은 삶의 관계는 항상 예외로서의 신자유주의에 열려 있다. 인간의 비참에 대한 해법은 항상 까다롭고, 불만족스러우며, 힘겹지만, 정치적으로 배제된 사람들의 문제는 우리의 세계적 양심을 짓누르며, 현실적으로 국가와 도덕 경제, 시장 제도들의 논리와 결합되어 왔다.
예를 들어, 아프리카 지역에서 가난한 시민들은 질병과 기아, 전쟁 때문에 더욱 정치적으로 배제되었다. 그러나 건강은 국가가 아니라, 제약 회사들에게 대해 요구를 제기하는 “치료받을 수 있는 시민권” 담론과 절합되면서, 인간 지위의 필요조건이 되었다. 생물학적 생존에 기초를 둔 집단적 요구의 또 다른 사례가 동남아시아에서 나타나고 있는데, 여기서 노동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수많은 여성 이주자 주민들은 해외에서 심한 학대에 노출되어 있다. 이런 경우 외부자의 지위와 인종에 기초를 둔 생물학적 타자성은 국가가 아니라 인력을 도입한 사회의 도덕 경제를 대상으로 하는 생물학적 복지의 요구들에 의해 역전될 수도 있다.(9장)
요컨대 헐벗은 삶은 구별불가능한 구역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지방 공동체, NGO들, 그리고 심지어 기업들의 개입을 통해, 도덕적으로 바람직한 인간성이라는 다양한 범주들로 전환되고 재조직된다. 이런 기술윤리적 상황들은 힘을 가진 자들과의 잠재적 제휴, 우선적인 이익, 특수한 요구 등과의 연관 속에서 인간성의 등급을 매기는 인도주의-기업 복합체의 권력이 증가했음을 가리키는 지표다. (치료받을 수 있는 시민권, 생물학적 복지, 그리고 도덕 경제 등) 도덕적 요구의 절합은, 아마 인권에 호소하는 것보다 더 빈번하게, 위압당한 인간적 문제에 대한 임시변통적이거나 일시적인 해결책을 틀지울 것이다. 상황적인 NGO의 개입들은 그들이 현장에서 마주치는 정치적․윤리적 힘들의 연결망에 의해 자주 결정된다. 요컨대 생존의 대항정치들은 생명정치, 노동시장, 그리고 덕의 체계의 상호작용을 통해 현실화된다. 이런 윤리적 문제화는 인권이나 시민권을 우회하여, 우연적이고 모호한 인간의 윤리적 지평을 반영하는 해법들에 의지하게 될는지도 모른다.

이 책이 예외로서의 신자유주의 및 신자유주의에 대한 예외들과의 관련 속에서 변모하는 시민권의 모든 측면들을 다룰 수는 없다. 아시아 태평양은 극적인 변화를 겪고 있으며, 빠르게 변화하는 환경들은 서로 융합되었던 것들 ― 동일성, 자격, 영토권, 그리고 민족성 ― 이 어떻게 신자유주의적 기술들과 주권의 예외들에 의해 혁신적인 관계와 공간들로 갈라지고 재편성되는지를 탐색할 수 있는 장소들을 제공한다. 신자유주의 형태들, 주권의 실험, 그리고 시민권 체제들의 새로운 절합은 현실화되는 것들과 인간이 되는 것의 정치적․공간적 가능성들을 발본적으로 변화시켰다. 특정한 통치와 자기 통치 기술들은 책략, 협상, 그리고 윤리적 의심의 다양한 의미와 공간들을 산출한다. 명확해 보이는 것은 예외로서의 신자유주의가, 신흥 경제에 대한 특공대식 습격이건, 통치 이성에 대한 비밀스러운 잠식이건, 자기 혁신과 자기 경영의 기술이건 간에, 통치와 시민권에 대한 전통적 사고에 도전하고 있다는 점이다. 권리들, 자격들, 그리고 요구들은 이제 NGO의 개입과 지식 흐름, 통치의 시장 주도적 양식에 의해 배열되는 역류와 힘의 장에 쉽게 순응하고 종속된다. 예외의 논리에 의해 생겨나는 무수한 탈구와 재절합은 우리가 통일된 시민권 개념과 연관시키곤 했던 요소들을, 점차 다양해지고, 파편적이며, 우연적이고, 모호하지만, 그러나 윤리정치적 비판에 영속적으로 종속된 인간성에 놓인 가치들로 변형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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