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광주전남지부


사회운동

사회진보연대 계간지


2007.5.7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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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문제? 구조적 인종주의와 버지니아 공대 총격 사건

임월산 | 전쟁과 신자유주의 반대 재미 협의회
전쟁과 신자유주의 반대 재미 협의회(Korean Americans against War and Neoliberalism, KAWAN)는 군사적이고 신자유주의적인 세계에 맞선 세계적 투쟁의 일부로서 평택 미군기지 확장과 한미 FTA 체결 저지 투쟁을 위해 결성된 재미 한국 동포 조직들의 전국적 연대체다.


33명의 학생과 교수의 목숨을 앗아간 버지니아 공대 총격 사건을 보고 태평양 양 편의 한국인들은 크게 경악하였다. 미국에서는 재미교포 사회 지도자들이 희생자와 그 가족에게 애도와 사죄를 표명하고, 심지어 기금모금에까지 나서고 있다. 이태식 주미대사는 국익의 대변자인 자신의 역할을 이상하게 혼동하면서, 재미동포들이 대량학살을 참회하면서 32일간 금식할 것을 제안했다.

한국에서는 대통령과 외교통상부 장관을 비롯한 고위 공직자들이 사과성의 애도 메시지를 쏟아내고 있다. 이런 행동은, 이 사건에 대한 언론의 엄청난 주목과 맞물리면서, 이 사건이 “한국인 문제”라는 것, 즉 미국 대학에 다니는 한 학생이 동료들에게 저지른 살인에 대해 한국 사회가 특히 더 걱정하고 뉘우쳐야 한다―왜냐하면 살인자인 조승희의 국적이 한국이기 때문에―는 것을 의심할 수 없게 만들었다.

미국 언론의 보도도 다르지 않았다. 이들은 조승희를 “한국 학생”, “한국인 국적” 그리고 “거주 외국인”으로 부르면서 대개 그를 외국인으로 표현했다. 이런 딱지 위에 “외톨이”, “물음표 아이”, “무분별하게 폭력적인” 따위의 묘사와, 분노한 채 무기를 휘두르는 아시아인의 모습을 가진 젊은이의 이미지가 덧붙여졌다. 이런 다양한 기표들이 반복되고 서로를 강화하면서, ‘미국에 대한 외국인’ 조승희의 이미지와 ‘인류 전체에 대한 외부자’ 조승희의 이미지가 뒤섞여, 미국 사회에 대해 편안하게 낯설고 설명불가능한 존재로 만들어 버린다. 편안한 이유는, 만일 그가 친숙한 존재라면 그가 미국이라는 사회에 속해 있다는 의미이고, 만일 그가 이 사회에 속한다면 미국인들이 책임을 져야만 할 것이기 때문이다.

정말 외국인인가?

그러나 조승희가 정말로 미국에 대해 외국인일까? 어쨌든 그는 삶의 대부분을 미국에서 보냈다. 그는 미국 언론과 문화에 둘러 싸여 있었고, 미국 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다. NBC에 보낸 소포에서 그가 표현한 분노는, 그의 억양과 불완전한 영어를 이유로 그를 괴롭혔고, 그보다 더 잘 살며, 그의 슬픔과 고립에 책임이 있다고 그가 분명하게 비난한 그의 가까운 학생들을 향했다. 더욱이 조승희의 행동은, 한국이 아니라 미국 사회에 만연한 대규모 학교 살인의 유형을 따르고 있다. 심지어 조승희는 8년 전 콜롬바인 고등학교에서 총으로 12명의 학생과 교사를 살해한 두 명의 10대에게 경의를 표하기도 했다. 조승희가 항상 이상하게 수줍고 내성적이었다고들 말하기 때문에, 그의 행동을 단순히 정신질환 탓으로 돌리기 쉽다. 그러나 정신질환과 범죄 성향은 환경과 분리된 개인들의 특성이 아니다. 오히려 조승희와 같은 태도와 행위는 내적 불균형과 불평등한 사회 관계가 초래한 주위 세계의 불균형사이의 복합적 상호작용의 결과로 보지 않으면 안 된다. 따라서 사회적 맥락을 살피는 것은, 버지니아 총격 사건과 같은 비극을 이해하려는 노력에 필수적이다. 비록 그렇게 하는 것만으로는 완전하고 최종적인 해답을 제시할 수 없을 것이지만. 조승희의 사회적 맥락은 다름 아닌 그가 자라온 계급차별적이고 인종주의적인 미국 사회다. 따라서 버지니아 참사가 조승희의 성격뿐만 아니라 그의 사회적 맥락과 관련되는 만큼, 이 비극적 사건을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한국이 아니라, 미국 사회와 문화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한국 정치인들의 행동은 부분적으로 방어적이었겠지만 ― 한미 관계에 대한 부정적 영향과 재미 교포에 대한 보복을 모면하겠다는 생각에서 ― 그들이 만들어 놓은 국가적 책임이라는 이미지는 조승희가 외국인이라는 믿음을 확증하는 작용을 할 뿐이다. 이런 의미에서 이는 하나의 집단으로서 한국인들(과 아시아인들과 모든 이민자들)이 잘못했다는 관념을 강화시키고, 이로써 미국 주류 사회가 이 비극이 사실 그들과 얼마나 밀접하게 연관되는지에 관해 생각하는 것을 회피하는 데 도움을 줌으로써 본래 의도와 반대로 작용했다.

버지니아 공대 살인 사건은 “미국의 문제”이다. 왜냐하면 이 사건은 소외되고, 폭력적이며 인종적·경제적으로 계층화된 미국 사회라는 맥락에서 발생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버지니아 공대 사건이 어떤 점에서든 “한국의 문제”인가 하는 질문은 남는다. 나는 지난 며칠간 이 질문에 관해 곰곰이 생각했다. 그 결과 내가 얻은 대답은 ‘그렇다’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 정치인들이나 교포 지도자들이 생각하는 이유에서는 아니다. 즉 조승희의 ‘한국 혈통’이나 한국 시민권 때문에 한국인들이 어떻든 그의 행동에 대해 부끄러워하거나 죄책감을 느껴야 한다는 이유에서 한국의 문제는 아니다.

그렇다면 왜인가? 내 생각에 그 대답은, 조승희의 고립과 불행이 폭력적 분노로까지 이르게 된 사회적 배경을 살펴본 다음에야 얻을 수 있다.

미국 인종주의와 재미동포들

조승희의 배경에 관한 이야기는, 젊은 재미동포들 사이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는 것이다. 어떤 선천적인 한국 문화나 성품 때문이 아니라, 역사 때문에 그렇다. 조승희의 가족이 밟아 온 이민의 경로를 가능케 만든 것은, 2차 세계대전 이후 한미 간의 불평등한 군사적·정치적·경제적·문화적 관계, 그리고 가족재결합을 유리하게 만드는 1965년 미국 이민법 개혁이다. 다른 많은 한국계 이민자들처럼, 조승희의 부모는 미국에서 경제적 성공을 바랐지만, 그들이 맞닥뜨린 사회는 돈이 없고, 시민권이 없으며, 영어를 못하고, 백인이 아닌 이들에 대한 장벽이 드리워진 곳이었다. 모든 한국계 이민자들에 비해서는 아니더라도, 어떤 이들보다는 적은 자본으로 시작한 그들은 세탁소에서 일자리를 찾았다. 이곳은 언어나 다른 구조적 한계 때문에 전문직을 구할 수 없는 한국 및 다른 아시아계 이민자들이 자리잡을 수 있는 틈새 서비스 부문 중 하나다. 조승희의 부모는 조승희와 그의 누나가 좋은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고생을 마다하지 않았다. 마치 그들의 희생을 보상받기라도 하려는 듯. 이런 과정을 통해서 조승희의 가족은 미국의 구조적 인종주의 체계의 일부가 되었다. 이는 미국 내 착취와 불평등의 기초가 되고 일상 생활을 구조화하는 지각된 생물학적 차이에 기반을 두는 개인적 편견과 표상, 제도적이고 사회적인 장벽들, 경제적 처지가 복잡하게 뒤섞인 것이다.

인종과 계급적 위계는 미국에서 공부하는 한국 유학생과 재미동포의 경험을 틀지운다. 많은 한국인 부모들은 아이들을 사립학교나 최고의 공립학교에 보내기 위해 애쓴다. 그러나 한국계 (그리고 다른 이민자) 아이들은 제한된 영어 능력과 익숙치 못한 환경 때문에 놀림당하기 일쑤다. 게다가 아시아계 미국인 학생들이 마주해야 하는 사회는, 아시아인이 부지런할지는 모르지만 항상 외국인으로 머물 것(반면 흑인들은 유전적으로 열등하지만 그들은 아직 미국인이 될 수 있다.)이라는 가정을 신봉하며, 아시아 여성들을 성적 환상의 대상으로 사용하고 아시아 남성들을 나약하고 사내답지 못하다고 묘사한다. 이런 오명에다 또래 학생들보다 가난하다는 점이 덧붙여질 경우 일부 이민자 학생들은, 심지어 정신적으로 안정된 경우라 할지라도 깊은 열등감, 고립감 그리고 분노를 경험하게 된다.

미국의 사회적 맥락에서 나타나는 두 번째 중요한 측면은, 오늘날 널리 퍼져 있는 사나운 반(反)이민자 정서와 이주민에 대한 범죄화다. 이런 분위기는 일터에서 벌어지는 이민자들에 대한 착취, 사회 서비스에서의 배제, 그리고 자의적인 단속과 추방을 용인한다. 재미동포 사회 안에서 버지니아 학살의 보복에 대한 공포를 양산하는 것은 바로 이 같은 맥락이다. 살인이 일어난 후 한국계나 다른 아시아계 미국인들에 대한 언어적 학대나 다른 형태의 괴롭힘은 몇 차례 밖에 없었지만, 9·11 이후 남아시아, 중동 그리고 다른 이민자들에게 만연했던 국가주도적·개인적인 폭력에 대한 기억이 생생하기 때문에 이 같은 불안이 생겨나는 것은 너무 당연하다. 반이민자 정서는, 조승희의 한국 국적을 이유로 한국 정치인들이 사죄한 것이 역효과를 낳는 이유이기도 하다.

소외당하고 때로 분노하는 젊은이들과 반이민자 폭력은 구조적 인종주의의 두 가지 표현이며, 이는 버지니아 살인과 이후 여파에서 잘 나타난다. 내가 이 사건을 “한국의 문제”라고 말하는 것은, 애도를 표하는 정치인들이 언급하지 않고 지나치는 이 구조적 인종주의를 한국인들이 알아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우리/그들이 구조적 인종주의를 알아야만 하는 이유는 국내의 한국인들이, 보통 자신들이 합류하려는 사회의 현실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 자신의 아이들을 미국으로 보내거나 이민을 하겠다는 선택을 하는 당사자들이기 때문이다. 이 같은 사실을 알게 된 다음, 어떤 부모들은 이 도전을 극복하라고 아이들을 한층 심하게 떠밀지도 모르지만, 다른 부모들은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종류의 지원을 좀 더 생각하거나, 심지어 자신들의 결정 전부를 재고할 수도 있다. 그러나 미국에서 한국인들이 직면하고 있는 인종주의는 미국 경제 및 미국 사회의 구조 안에 깊숙이 엮여 있다. 이는 아이들을 미국에 보내거나 이민을 숙고하는 한국인들의 개별적 행동으로는 극복할 수 없다. 그보다 재미동포 사회는, 다른 유색인 공동체들의 민중들과 함께, 구조적 수준에서 인종주의에 맞서는 장기적 투쟁을 위한 집단적 전략이 필요하다.

한국이 직면하는 인종주의

버지니아 살인은 한국인들이 구조적 인종주의에 관해 생각하는 데 있어 좋은 출발점을 제공하는데, 왜냐하면 살인자의 경험―그의 행동이 아니라―은 한국인들의 자녀가 쉽게 경험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구조적 인종주의는 미국 사회만의 특이한 현상이 아니다. 그것은 세계 전역의 국가들에 존재한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인종주의가 보편적이라거나 초역사적이라는 것이 결코 아니다. 오히려 정반대로, 인종주의의 구축은 역사적으로 특수하며, 따라서 시공간에 따라 다양한 형태를 취한다. 하지만 만약 한국인들이 재미동포들의 경험들을 반추해 본다면, 바로 자신들의 사회에서 현재 만들어지고 있는 구조적 인종주의에 시사점을 줄 수도 있다고 나는 믿는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주어진 사회에서 구조적 인종주의가 체계화되는 과정은 인간 집단들에 대한 제도적 차별(예컨대 ‘이교도들’, ‘노예들’, 그 다음에는 ‘흑인들’이 재산을 소유하거나 기독교인/백인과 결혼하는 것을 가로막는 법), 개인적 편견(유색 피부는 더럽다는 믿음), 경제적 착취(아프리카의 남성과 여성을 노예로 이용하는 것), 사이비 과학적 표상들(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은 선천적으로 게으르다.)이 서로 강화하는 것을 포함한다. 이 체계의 요소들은 지배 계급의 특권과 경제 권력을 강화하는 데 함께 작용하는 동시에, 생물학적으로 타고난 것으로 간주되는 차이에 기반을 둔 우월과 열등의 이데올로기를 낳고, 이것에 의해 강화된다.

한국 사회도 인종주의의 예외가 아니다. 일본 식 인종주의가 식민지 기간 동안 한반도에 도입되었고, 후에는 미국의 점령과 함께 미국적 변종이 도입된다. 한국 전쟁 당시 미군들이 ‘친구’와 ‘적’을 무차별적으로 살해한 것은, 모든 황인들에게 ‘타자’라는 딱지를 붙이는 미국인종주의의 경향을 인식할 때에만 비로소 이해할 수 있다. 한국인들도 미군 기지에서 백인들이 흑인에게 가하는 적나라한 차별을 목격하면서 미국의 인종주의를 배우게 되었다.

그러나 인종주의는 단순히 한국에 수입된 것만은 아니다. 최근 이주노동자의 상당한 출현을 직면하면서 토착적인 인종주의가 형성되고 있다. 이주노동자들이 한국에 대규모로 들어오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 후반인데, 이 때는 1988년 올림픽을 주최하면서 한국이 국제 무대에 첫 발을 내딛은 직후였다. 이주노동자들이 한국에서 겪는 경험은 사회적·제도적 불평등으로 심하게 규정되어 있고, 이들은 전형적으로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불균등한 효과로 심각하게 경제적 불이익을 받은 국가 출신이었다. 이주노동자들은 산업연수제나 고용허가제 아래서 노동력 부족을 채우기 위해서 한국에 불려 왔는데, 양 제도 모두 한국에서 그들이 노동하고 살 아 가는 권리를 심각하게 제한한다. 이주자들은 법적으로 사업장에 묶여 있어, 심지어 고용주들이 그들을 학대하거나 임금을 체불하는 경우―이는 종종 있는 일이다―에도 자유롭게 이동할 수 없다. 이주자들은 가족과 함께 살기 위해 그들을 초청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으며, 단지 3년 동안의 체류만이 허용될 뿐이다. 만약 더 나은 노동조건이나 좀 더 높은 임금을 찾아 사업장을 떠나거나 허가 기간보다 장기 체류하게 되면, 이주노동자들은 한국법 아래서 ‘불법체류자’로 지목되어 추방당하게 된다.

본국의 경제적 제한과 한국 정부가 집행하는 부당한 제도와 함께, 이주자들이 상대해야 하는 사회는, 대체로 종족적 동질성을 자랑으로 여기고, 문화적 차이를 오늘날의 사회적 현실의 일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경제적 착취, 개인적 차별, 법적 불의는 서로를 강화하면서 이주자들을 체계적으로 억압받는 집단으로 만드는데, 이는 언론이나 사람들의 눈에 대부분 보이지 않는다. 이런 사실에도 불구하고 100여 개의 다른 국가들에서 온 이주노동자들은 한국 경제에 필수적이며, 한국을 아주 다양하고 세계적인 사회로 만들고 있다.

미국 내 이민자들과 마찬가지로 한국의 이주노동자들은 지난 3년간 수십 명의 목숨을 앗아간 대규모 단속의 표적이다. 이주노동자들은 외국인 보호소에서 심각한 인권 침해에 직면하지만, 그들의 상황은 대개 주목받지 못하거나, ‘외국인’이자 ‘불법’이라는 점에서 사회 전반이 책임질 일이 아니라는 이유로 묵인되기까지 한다. 미국의 이민자들과 여타 유색인들처럼, 이들은 범죄화로 인해 쉽게 법 체계와 국가 폭력의 만만한 표적이 된다. 지난 1월 살인 사건의 중국인 용의자를 찾는다는 명목의 수색이 안산역 주변의 대규모 무차별 단속에 활용되었다(사실 용의자가 잡히거나 심문당하기 전에 이미 유죄인 것으로 간주되었는데도 말이다.). 마찬가지로 경찰과 정부는 지난 2월 11일 여수 외국인 보호소에서 발생한 대규모 화재의 책임을, 스스로를 변호할 수 없는 사망자 중 한 명이 저지른 방화로 돌리는 것이 편리하다는 점을 알았다. 국가가 범죄자적 ‘타자’라는 가정을 행위적으로 표출하는 이 같은 개별 사례들은 이중적 특징을 갖는다. 한 편으로 이는 기존의 편파적이고 부당한 법적·사회적 제도에서 발생한다. 다른 한 편으로, 도전받지 않을 경우, 이주노동자들을 열등하고, 외래적이며, 범죄적이라고 묘사함으로써 한국 사회 이주노동자들의 불평등한 사회경제적 지위를 합리화·자연화하는 공적 진술로 기능한다. 게다가, 버지니아 총격 사건과 같은 선정적인 사례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미국에서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보다 미묘한 인종주의의 폭력(과 여타의 불평등한 권력 구조들)을 흐리는 데 기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화재의 원인을 한 이주자 개인의 탓으로 돌리는 것은 한국의 모든 이주노동자들의 경험을 틀지우는 구조적 억압을 흐린다. 가까이 있는 구조적 불의로 초점을 되돌리기 시작하는 것이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이주노동자들의 끈질긴 투쟁과 일부 사회정의 운동의 지원―한국의 주류 운동 전체가 다 그랬던 것은 전혀 아니다―을 통해서였다.

나가며

결론을 내기 위해, 간략히 버지니아 공대 사건으로 되돌아가 보자.

얼마 전 한국 동지 한 명이 매우 날카롭게 느껴지는 의견을 말한 적이 있다. 그는 버지니아 사건에 접근함에 있어, 누군가에게 잘못을 돌리는 태도를 취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즉, 우리는 너무 빨리 어느 한 가지에 잘못을 돌리려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조승희 개인이건 대중문화의 폭력이건, “미국” 사회에서의 소외이건 간에 말이다. 그 대신 우리(한국인들, 재미동포들, 학자들, 활동가들)는 이 문제를 복잡하고 다면적인 ― ‘무의미’하거나 설명할 수 없는 것은 아니지만 ― 것으로 바라보고 접근할 필요가 있으며, 이를 완전히 이해하기 위해 시간을 들여야 한다. 이것이 “책임을 지는” 방식일 것이라고 그는 말했다.
나는 그가 맞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선정적인 뉴스 보도를 읽는 데 계속 시간을 낭비해야 한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버지니아 살인과 같은 끔찍한 사건을 가능하게 만든 사회적이고 역사적인 조건들에 계속 질문을 던져야 한다는 의미에서 말이다. 나는 또한 이 질문이 한국적 맥락으로 확장되어야만 한다고 믿는다. 한국인들은 이 비극적 사건을 자기네들 사회의 유사한 조건들을 반성하는 기회로 활용할 수 있다. 한국과 미국의 이주자 상황이나 인종·인종주의의 조건은 매우 다르지만, 유사점이 없지 않다. 우리가 1.5세대 재미동포 청년의 행동에 충격과 혼란을 겪더라도, 개별적 사례를 넘어 조승희와 다른 재미동포와 한국 학생들이 미국에서 마주치게 되는 사회적 문제들을 살펴볼 수 있었으면 하는 것이 나의 바람이다. 또한 이 계기가 한국적 맥락과 한국 자신의 “외부자”들을 극단적으로 주변화시키는 현실로 우리의 관심을 이끌기를 바란다. 한국이 반드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은, 한국이 단일한 민족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차라리 인종, 국적, 언어(종교, 성별, 성욕 등) 면에서 다양한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내 생각에 이 “받아들이는 것”에는 관용을 배우는 것뿐만 아니라, 차이를 이해하기 위한 능동적 노력이 포함된다. 특히 서로 다른 사람들을 경제적이고 사회적인 지위 면에서 근본적으로 불평등하게 만드는 사회적 구조들과, 이 불평등이 개인적 경험에 대해 갖는 의미를 말이다. 내가 버지니아 사건이 “한국 문제”로 간주되어야 한다고 결정한 것은 이 같은 이유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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