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광주전남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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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들레를 무쳐 먹으며 사회진보연대를 생각하다

한지원 | 회원
1.
‘쓰다’라는 말은 달지 않고 먹기 힘든 맛을 표현할 때 쓰지만 간혹 입맛을 돋아 주는 맛을 표현할 때도 쓰인다. 씀바귀, 도라지 등의 나물과 요즘 유행인 카카오 초콜릿 등이 대표적인 음식들이다. 이렇게 맛있게 쓴 음식들 중에 잘 알려지지 않은 것이 있는데 바로 민들레 무침이다. 우리 주변에 흔하게 널려 있고, 쑥처럼 잘 캐가지도 않는 민들레가 의외로 좋은 요리 재료가 된다.
내가 민들레도 먹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길가에서 민들레를 팔고 있는 할머니를 통해서였다. 등산 후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잡초를 팔고 있는 할머니가 신기하여 왜 잡초를 팔고 있냐고 물어 보자, 할머니는 이 민들레가 매우 맛있는 나물이라며 말이 끝나기도 전에 한 봉지 담아 나에게 건넸다. 이미 사고 말고는 물 건너간 상황이다. 그리고 할머니는 한 마디 더 건넸다. “생각보다 써!”
다음 날 저녁 냉장고 한편을 가득 채운 민들레를 요리해봤다. 세상에 먹지 못할 식물은 없는 법이다. 나물의 기본 요리법으로 무쳐놓은 민들레는 기대했던 것 이상으로 맛있었다. 향은 그다지 없었지만, 쓴 맛과 나물의 생기가 묘하게 조화를 이루는 거친 야생의 맛, 민들레꽃처럼 살라 했던 노래 한 구절이 생각나게 하는 맛이었다.
민들레를 요리하기 위해서는 우선 민들레를 다듬어야 한다. 꽃과 시들거나 색이 바랜 부분을 떼어내고 찬 물로 깨끗이 씻어 흙도 닦아 낸다. 그리고 끓는 물에 1분 정도 데친다. 너무 오래 데치지 않도록 주의하자. 무청이나 배추와 같이 삶아서 보관한 후 국에 넣어 먹는 야채들은 조금 푹 삶아도 괜찮지만 쑥, 시금치, 고사리 등과 같이 나물 자체의 향과 맛을 즐기는 나물을 푹 삶아 버리면 향과 생기가 다 날아가 버린다.
다음으로는 양념을 만들 차례다. 개인적으로 나물 양념에는 세 가지 계열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된장․들기름 계열, 고추장․참기름 계열, 간장․마늘 계열이다. 된장․들기름은 나물 자체의 맛을 살리는 양념이고, 고추장․참기름은 양념과 나물의 조화를 중시하는 양념이다. 간장․ 마늘 계열 역시 나물 자체의 맛을 살리는 양념이다. 된장․들기름의 경우 나물 자체의 향과 맛이 좀 거칠 때 쓴다면, 간장․마늘은 나물의 향에 된장조차도 방해가 될 때 쓰인다. 그렇다면 왜 된장․참기름 계열은 없을까? 물론 된장에 참기름도 조화가 안 되는 것은 아니나, 참기름의 강한 향이 된장의 구수한 맛을 압도하는 것이 문제일 것이다. 고추장의 경우 고추장 자체가 워낙 강한 맛이라 참기름과 어울려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민들레 무침은 된장․들기름이 제격이다. 쓴맛을 즐기되, 그 거친 맛을 약간 다듬어 주는 것이 필요하다. 시금치, 고사리 등은 다들 알다시피 간장․마늘을 가지고 양념한다. 워낙 나물 자체가 맛이 좋다보니 굳이 된장이나 고추장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간장 정도로 살짝 짠 맛을 주고 마늘로 향을 주는 정도가 좋다. 물론 이 경우도 약간의 참기름이나 들기름을 쓰기는 하지만 아주 소량으로 그쳐야 한다.
된장에 들기름을 적당량 넣고, 마늘과 파를 잘게 썰어(혹은 으깨어) 넣어준 후 잘 섞는다. 데친 민들레에 양념을 넣고 추가로 들깨 가루를 넣는다. 들깨 가루는 민들레의 거친 질감을 완화시킨다. 완성!
참고로 나는 민들레 무침과 함께 쑥 무침을 해먹었는데, 이 때 쑥을 고추장․참기름으로 양념을 하였다. 앞에서 쑥과 같이 향이 좋은 나물은 된장이나 간장이 좋다고 하였는데, 이 경우 이미 민들레를 된장 양념으로 하기도 하였거니와 민들레와 같이 거칠게 쓴 맛의 나물을 먹을 때 쑥과 같이 섬세한 향의 나물을 그대로 취하는 것이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해서다. 쑥 향을 즐기다 바로 쓴 나물을 먹으면, 쓴 맛은 더욱 고약하게 느껴질 수 있다. 강한 쓴 맛과 고추장․참기름 맛 속에 스며든 쑥 향이 더욱 조화롭다.
민들레는 튀김으로 해먹어도 좋다. 다듬은 민들레를 조금씩 묶은 다음 튀김가루를 무쳐 튀기면 된다. 막걸리 안주에 매우 좋을 듯하다.

2.
민들레를 먹고 나니 갑작스레 사회진보연대가 떠오른다. 누군가가 나에게 사회진보연대의 맛이 무어냐고 묻는다면 ‘쓰다’라고 답하고 싶다. 변혁 이론을 완고하게 고민해나가고, 원칙을 저버리지 않는 운동을 지향하며, 현실의 운동들에 대해 비판하기를 주저하지 않는 사회진보연대는 달지 않으며 쓰다.
하지만 민들레의 쓴 맛이 된장과 들기름을 통해 승화되듯이 사회진보연대의 문화, 투쟁의 기획들 역시 과학적 엄격함을 대중과 함께 할 수 있는 것으로 승화시켜야 제대로 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사회진보연대에게 민들레 무침의 된장․들기름에 해당하는 것은 무엇일까? 월간 사회운동에 한해서 몇 가지 고민을 해본다.
첫째, 금융세계화 설명하기.
사회진보연대의 많은 글들은 사회 이슈들의 원인을 금융세계화에서 찾고 있다. 하지만 금융세계화를 이해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미국 자본주의 역사에 대해 이해해야하고, 금융의 정의에 대해서도 이해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불안정 노동의 원인이 금융세계화라는 주장을 납득하기 힘들다. 기껏해야 몇몇 대형 ‘투기’ 사건들에 대한 도덕적 비판 정도로 이해될 수도 있다. 금융세계화라는 대전제 위에서 연역적으로 이슈들이 비판되기 때문에 그 논리성을 논외로 하더라도 전제가 이해가 되지 않아 글을 읽기가 매우 곤란해지는 것이다.
따라서 금융세계화를 전제하는 것이 아니라 설명해야 한다. 하지만 문제는 이윤율의 경향적 저하라는 법칙을 전제해야 금융세계화가 일시적 ‘현상’ 혹은 개선 가능한 자본주의의 필요악 정도가 아니라 자본주의의 구조적 문제로 인식된다는 점이다. 중력 법칙과 운동 법칙을 이해해야 지구가 태양을 중심으로 타원 궤도를 따라 움직이는 것이 신의 실수가 아니라 필연으로 인식되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금융세계화를 설명하기 위해 이윤율의 경향적 저하 법칙을 이야기하고 또 이의 전제로 이윤의 원천은 지불되지 않은 노동에 있다는 마르크스 경제학을 A에서 Z까지 설명해야 할까? 이는 월간 사회운동의 잡지 성격상 어려워 보인다.
얼마 전에 무심코 읽어 본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1)이라는 책에서 어렴풋이 해결의 단초를 보았는데, 「상대성 이론」은 아인슈타인 스스로가 대중들에게 자신의 이론을 설명하기 위해 쓴 책이다. 저자는 특수 상대성 이론을 설명하기 위해 유클리드 명제에서부터 시작하여 갈릴레오 좌표계 그리고 나아가 뉴턴의 법칙에 대해 설명한다. 저자에게 문제는 뉴턴의 운동법칙들을 지켜내는 것인데, 뉴턴이 설정한 고전역학의 시간과 공간 개념으로는 그 법칙들이 스스로 모순에 처한다. 그 모순을 해결하는 것이 시간과 공간의 상대성을 이론화하는 특수 상대성 이론이다. 그런데 여기서 아인슈타인이 한 것은 ‘시간과 공간’ 이라는 고전역학의 모순을 기획한 것뿐이다. 이론의 수학적 증명은 이미 로렌츠가 밝혀낸 것에 기대고 있다.
이처럼 우리에게도 중요한 것은 지배적인 이론, 자본가들의 선전을 모순적인 것으로 ‘만들어’ 내는 기획이다. 월간 사회운동은 신자유주의적이라 할 만한 많은 이슈들에 대해 비판한다. 하지만 그 비판들이란 다소 전제(혹은 공리)가 달라 생기는 것처럼 보인다. 지구의 운동이 신의 의지인가 중력인가라는 문제처럼 말이다. 따라서 판단은 가끔 도덕적으로 호소함으로서 얻어지는 같기도 하고, 독자가 이미 반자본주의를 신념으로 하고 있느냐 여부에 따라 갈라지는 것 같기도 하다. 로이 바스카는 쿤의 패러다임론을 비판하며 “이론들 사이에서의 합리적 기초가 있을 수 없다는 이야기가 되는가? …… 두 이론이 갈등한다거나 충돌한다거나 경쟁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그것들이 어떤 것―그 이론들의 서술과 무관하게 존재하고 움직이는 실재적인 객체나 관계의 영역―을 두고 충돌하고 있다는 것을 전제하기 때문이다”2)라고 이야기하는데, 이는 역설적으로 충돌하지 않는 것들끼리 경쟁할 수는 없다는 말이기도 하며, 독자에게 대안 세계화와 신자유주의 세계화 사이에 판단을 요구하기 위해서는 ‘충돌’하는 이론 혹은 비판이 필요하다는 말이기도 하다.
이러한 점에서 ‘충돌’을 위해서 월간 사회운동의 비판들은 좀 더 집요할 필요가 있으며, 가능한 한 정부와 자본가의 논리들, 공리들에 대해서 충분히 이해하고 설명할 필요가 있다. 또한 금융세계화, 노동의 불안정화 같은 개념들을 전제하고 비판하기보다는 지배적 과학과 개념들에서부터 논의를 전진시켜나갈 필요가 있는 듯 보인다.

둘째, 수량화화 시각화3)
자본과 정부는 자신들의 논리를 펼 때 언제나 각종 수치와 이를 기초로 한 도표와 그래프를 이용한다. 수치는 객관성을 보여주는 근거로 이용되고, 도표와 그래프는 데이터가 의미하는 바를 직관적으로 전달한다. 이에 반해 월간 사회운동에는 간혹 수치들이 등장하기는 하지만 이는 대부분 서술적 맥락 하에서 사태의 심각성을 강조하는 수사로 이용된다. 도표와 그래프는 당연히 거의 보이지 않는다.
통계 수치들이 가지는 함정4)은 많다. 하지만 그래도 원인과 결과를 서술함에 있어 수치화된 논거들이 가지는 설득력5)은 꽤 크다. 인과 관계를 연역적으로만 기술하면 먼저 그 논리적 과정이 매우 정교해야만 하고 또한 전제들(혹은 공리들)에 대해 충분히 합의가 있어야만 설득력이 있다. 이에 반해, 통계적 수치들(혹은 더 넓게 본다면 각종 수량화된 지표들)은 논리적 과정과 전제들을 설득하는데 수월함을 더해준다. 특히 전제들이 시대의 상식이 아닌 상황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한 예로 브레너의 「붐 앤 버블」이 노동자들의 실질임금은 고정되어 있다는 전제 하에 과잉축적으로 인해 경쟁이 가격하락으로 이어져 이윤율의 경향적 하락이 관철된다6)는 좀 당혹스러운 이론을 전제함에도 많은 이들에게 설득력을 가지는 이유도 통계적 수치의 동원에 있다. 물론 통계적 수치를 가지고 사건들 사이의 일정한 결합을 추정하고 이것을 법칙화하는 경험주의적 편향은 경계해야 하는 바이다.
또한 이 수치들을 그래프로 만들어 보여주고, 원인과 결과들을 도식화하여 보여주는 것 역시 필요하다. 많은 원인들과 그것들의 복잡한 관계를 도식화하여 보여주는 것은 오히려 여러 중요 지점들을 간과하게 만든다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월간 사회운동은 얇은 반(半)대중적 잡지다. 십 수 페이지의 글을 모두 꼼꼼히 읽는 것도 어려운 일이거니와 글의 논리들이나 전제들이 매우 어렵다. 비판의 질은 충분히 살리되 대중성을 고려해 많은 시각 자료들을 활용해야 한다. 의미 없는 이미지 사진들 대신 도식화된 결과와 핵심 논거들을 도표와 그래프 등을 통해 보여주는 것이 나을 듯하다.

3.
이렇게 글을 쓰고 보니, 민들레를 무쳐 먹다 참으로 괴기한 생각을 한 것 같아 머쓱하다. 특히 이렇게 괴기한 생각을 글로 적어놓고 보니 더욱 쑥스럽다. 허나 민들레 무침 법만 적어 갈월동 기행에 싣는다면 그 또한 기행(奇行)이 분명할 바, 사회진보연대에 대한 충정을 담아 글을 마친다.

1)A. 아인슈타인, 「상대성 이론」, 미래사, 1992본문으로

2) 로이 바스카, 「비판적 실재론과 해방의 사회과학」, 후마니타스, p70 본문으로

3) 크로스비라는 과학사가는 유럽 패권의 기원을 수량화 시각화 혁명이라고도 한다(앨프리드 W 크로스비, 「수량화 혁명」, 심산, 2005). 물론 그는 과학혁명이 유럽에서만 일어난 이유를 수량화 정신(망딸리떼)이라는 유럽인만의 특성에서 찾는다는 점에서 매우 편협한 분석을 보여주고 있으며, 종종 인종주의적 논의도 보여준다. 하지만 그러함에도 그가 보여주는 수량화 시각화의 사례들은 매우 흥미롭다. 12․13세기의 측량 인쇄 미술 음악 우주관 시간 공간 등등에 걸쳐 수량화 시각화 사례를 보여주는데 재미삼아 볼만하다. 본문으로

4) 단적으로 실업자가 되려면 항상 일할 수 있고, 구직 활동 하고 있어야 하고, 1주일간 일을 ‘전혀’ 하지 못해야 한다. 통계상의 실업자가 되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닌 셈이다. 본문으로

5) 통계학사가 스티븐 스티글러는 통계학을 ‘불확정성의 측정’이라고도 한다(스티븐 스티글러, 「통계학의 역사」, 한길사,2005). 법칙과 관찰이 확정적이지 않을 때, 사건들의 관계를 어떻게 ‘측정’(확정이 아니라) 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그것이다. 바스카의 말처럼 관찰, 인지 여부와 상관없이 실재는 ‘자동적 차원’에서 존재한다. 이런 맥락으로 자동적 차원을 부정하지 않는 전제 하에 타동적 차원에서 통계를 심층적 실재로 나아가는 보조 방법으로도 생각해 볼 수 있겠다. 본문으로

6) 브레너, 혼돈의 기원, 이후, 2001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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