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광주전남지부


사회운동

사회진보연대 계간지


2007.6.7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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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을 사유하는 시 최종천 「투명」을 읽고

강영규 | 편집위원
이제 우리에게 익숙한 언어예술의 형태에서 ‘노동’은 거의 자취를 감춘 듯하다. 물론 예의 민중문학의 정서적 잔영은 존재하며, 생계노동을 겸해 창작활동을 꾸리는 노동-창작자도 분명 적지 않다. 하지만 해방의 기획 속에서 당파적 투쟁의 도구라는 소임을 견디며 때때로 그 한계를 넘어서던 노동문학은 어디로 갔는가. 90년대 초반부터 시작된 ‘변화’에 내용-형식 양면에서 무력하게 십여년을 경과한 지금, 남은 것은 외롭고 아프고 가난한 것을 감싸는 연민의 감성구조뿐이 아닐까. 우리는 많은 노동시인들이 자연으로, 어머니로, 신화적 기원으로 돌아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리듬과 어법이 조금씩 다를지라도 그 회귀지점들이 그리 멀지 않는다는 것도 더불어 눈치챌 수 있었다.
당연히도 회귀의 선택 자체가 부정될 수는 없다. 게다가 그동안 숨 가쁜 당면과제에 밀린 자기성찰의 기회를 찾는다면 그 회귀는 더 넓고 깊은 곳으로의 새로운 하방(下放)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게 넉넉히 긍정할 수만은 없는 것이, 많은 경우 자신의 현실을 이끌고 미지의 과거를 찾아가는 시간의 이주(移住)가 아니라, 과거를 가두고 길들여 익숙한 현실로 만든 뒤 그 안에 안존하는 공간의 정주(定住)를 목격하기 때문이다. 이는 비단 문학에 국한된 것은 아니며, 장르를 불문하고 사회적 실천으로서의 예술을 도모하려 했던 모든 실험들에 해당되는 이야기다.
여기서 우리는 ‘노동’ 자체로 회귀하는 시 한편을 만난다. 이를 ‘노동시’로 부를 수 있다면, 그 이유는 오늘날 노동자를 시적 화자로 삼거나 노동의 주객관적 상황을 해명해서도, 창작자의 알려진 이력이 용접공이어서도 아니다. 이 시는 노동을 통해 노동의 본질로 육박한다.

혀로 빛나게 핥아놓은 밥그릇에는
허기가 가득 차 있다
허기는 투명하지만 잘 보인다
뼈가 앙상한 것을 보면
이빨은 이제
밥그릇도 씹어먹을 수 있으리라
나는 개들이
씹던 목줄을 뱉어내는 것을 보았다
하지만 내 손가락을 철망 안으로 넣어주었을 때
녀석은 절대로 물지 않았다
내가 밥을 준다는 투명한 의식이
녀석을 밥그릇 안에 가두어놓고 있는 것이다
-최종천 「투명」 중에서

의례적인 분석적 독해를 거부한다는 듯이 이 시의 구조와 표현은 단순하고 선명하며, 화자의 어조 또한 어떤 장치나 배경 없이 담담하다. 여기서 반생명적 계급적대와 지배-피지배의 연쇄관계를 읽어내는 것은 쉽고 자연스럽다. 시인은 오직 그러한 시적 전언을 위해 이 시를 쓴 것처럼도 보인다. 하지만 투박한 진술 이면에 관습적으로 배어 있을 일말의 분노나 적대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그렇다고 대상을 자기 세계로 무리하게 인입하는 잠언투의 환언어법에 기대는 것도 아니다. 그러할 때 우리는 이 판명함의 정체를 되묻지 않을 수 없다. 시인은 허기가 그런 것이라 한다. 투명하지만 잘 보이는 것. 묶인 개가 감지하는 지배-피지배의 모순은 그에게 동물적인 허기로 감각될 뿐이지만, 다음 순간 그 허기의 원인과 메커니즘이 생생하게 현상한다. 어떤 지적 필터나 감정적 매개 없이도, 아니 바로 그 덕분에 직관적인 명석함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개는 주인-노예의 관계를 인식하고 먹이를 주는 시인의 손을 물지 않는다.

하루에 두 끼나 세 끼를 주고 싶지만
나는 사장의 명령에 따라 한 끼만 주고 있다
나는 회사의 수위
개는 밤에 내가 할 일을 대신한다
사원들이 퇴근할 때, 개집 문을 열어놓아
불투명한 밤을 투명하게 밝혀놓아야
안심하고 잠잘 수가 있다
간밤에 없어진 것은 아무것도 없고
일감들 사이에서 녀석이 잡아놓고
다 먹지 않은 의문 하나가 피를 흘리고 있다
-최종천 「투명」 중에서

개의 허기는 시인의 지배전략에 의해, 그리고 그것은 더 큰 지배자의 명령에 따라 조종되는 것이다. 허기는 보상심리와 목적의식성을 불러일으키고 야성적 공격본능을 이끌어낸다. 생존하기 위해 스스로 순치된 개가 더 많은 순종을 위해 본능을 가동하는 이 장면은 기실 어떤 복잡한 장치와 제도도 뛰어넘는 창조적 주체화/신민화(臣民化)의 양면을 보여준다. 그것은 곧장 의문을 던진다. 개는 과연 누구의 어떤 지배를 받고 있는가. 중간자로서 시인은 사장의 명령을 초과달성하는 개의 행위에서 신민을 넘어서는 주체의 숨겨진 영역을 발견한다. 그것은 규정될 수 없기에 잠재적이고 두려운 것이다. 허기가 투명하고 가시적이라면 이 의문은 불투명하고 비가시적이다. 허기는 결국 의문으로 이어진다.

내가 받는 임금은 아주 적다
게을러지는 것을 방지하고 굶어죽지 않을 정도
그러니까, 개밥 정도인 것이다
개의 그 깊은 낮잠 속에 고여 비치는
나의 밥그릇이 빛난다
-최종천 「투명」 중에서

그 의문은 게을러지거나 굶어죽을 정도가 되면 쉽게 망각될 것이다. 우리는 경멸과 슬픔 속에서 때때로 이를 확인한다. 투명하고 잘 보이는 세계의 모순이 불투명하고 잘 보이지 않는 의문을 품는 와중에 삶은 이어진다. 피로한 잠이 육체를 감싸더라도 정신은 드물게 빛을 발한다. 시는 이렇게 분노와 슬픔과 회한의 시간을 지나, 노동을 사유하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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