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광주전남지부


사회운동

사회진보연대 계간지


2007.6.7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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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⑤ 한국여성운동사] 한국여성노동자운동, 그 길찾기 (2)

여성운동과 노동자운동의 마주침의 공간에서 여성노동권 쟁취투쟁은 가능하다

문설희 | 운영위원, 전국불안정노동철폐연대 교육부장
1987년은 노동운동사와 여성운동사에서 이정표가 되는 해이다. 1987년 7·8·9월 노동자 대투쟁이 그러하고 1987년 <한국여성단체연합>(이하 <여연>) 및 <한국여성노동자회>(이하 <한여노>)의 결성이 그러하다. 1987년 3월 창립된 <한여노>는 '한국 노동운동사에서 최초의 독자적인 여성노동자들의 조직건설이라는 역사적 출발'이라고 평가된다.1) <여연>은 '진보적 여성단체들의 상설적인 여성운동 공동 투쟁체'라는 성격을 표방하며 결성되어 한국여성운동을 대표하는 조직으로 자리 매김한다.2)
그러나 아이러니하게 이 시기를 전후로 하여 집단적이고 조직적인 여성노동자운동은 소멸되었으며 노동의 불안정화 현상은 여성노동자들을 대상으로 광범위하게 확산되었다. 이러한 문제에 대해 당시 노동자 운동과 여성 운동 모두 적절한 대응을 하지 못하였을 뿐 아니라 양자가 서로를 자신의 무능에 대한 알리바이로 삼았다. 이러한 경향은 1997년 IMF 외환위기를 거치며 극대화되었으며, 또한 2007년 현재 비정규직 여성노동자 투쟁을 둘러싼 대응에 있어서도 반복되고 있다.


1. 87년 전후로 시작된 노동의 불안정화, 그리고 남성생계부양자 모델의 확립

1980년대 중후반 이후 여성 생산직 노동자의 비율은 크게 감소한 반면 여성 시간제 노동자의 비율은 눈에 띄게 증가하였다.3) 이는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의 흐름과 더불어 남한사회 산업 구조가 변화하게 됨에 따라 나타난 현상으로, 노동의 불안정화가 여성노동자들을 우선으로 하여 본격화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당시 이러한 문제는 노동자 운동의 중심 투쟁과제로 부각되지 못하였다. 이는 1987년 7·8·9월 대투쟁 이후 활성화된 노동자 운동이 임금인상 및 기업복지를 투쟁의 중심 요구로 해왔던 흐름과 관련이 있으며, 노동자 가족의 중산층 이데올로기 수용과정과 무관하지 않다.
1987년을 전후로 하여 노동자 운동은 중공업 대공장 남성노동자들의 조직된 힘, 즉 사업장 교섭력을 바탕으로 가족임금과 기업복지를 요구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요구는 당시의 노동자 운동의 전투성을 통해 쟁취되기도 하였지만, 남한사회 가족정책의 일환과 맞아떨어지는 것이기도 하였다.
남한사회에서는 1961년부터 시행된 가족계획 사업으로 소가족화 현상이 나타났다. 이와 더불어 산업구조의 변화와 도시화 등과 같은 사회경제적 변화, 생존에 필요한 지식과 경제적 자원을 독점했던 가부장권의 약화라는 이데올로기적 조건의 변화에 의해 남한 사회의 핵가족화가 진행된다.4)
가족임금은 이러한 핵가족 모델의 물질적 조건이 된다. 그런데 이는 양성간의 임금격차를 정당화하고 여성의 노동을 일시적이고 주변적인 것으로 간주하게 만든다.5) 뿐만 아니라 여성에게 무급의 가사노동을 강제함으로써 여성의 이중부담을 강화한다. 생산의 영역에서 남성 노동력에 대한 초과착취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재생산 영역에서 여성 노동력에 대한 초과착취가 전제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가족임금은 남성 가장의 노동을 통해 나머지 가족이 부양될 수 있다는 환상의 물적 조건이 되지만, 이는 사실 허구적인 것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나 노동자 운동은 가족임금을 오히려 노동자민중이 투쟁을 통해 쟁취해야 할 중심요구로 삼았고, 이에 따라 남성 생계부양자와 여성 가사전담자라는 도식은 강화된다.6) 이러한 상황에서 1980년대 후반 여성노동자들이 겪어야 했던 노동의 불안정화 현상이 가시화되지 못한 것은 필연적인 결과라고 할 수 있다. 1970년대 농촌 여성들을 대거 생산직 공장노동으로 흡수함으로써 한강의 기적이라는 산업화의 토대를 마련한 남한사회가 1980년대에 이르러서는 고부가가치 산업 중심으로 재편되면서 유연한 노동력으로써 여성을 활용해 감에 따라 여성노동의 불안정화 현상이 확대되었으나, 생산영역에서 여성의 노동은 결혼 이전의 일시적인 것이거나 혹은 아이들의 교육비 부담 등과 같은 보조적인 것으로 여겨지는 현실에서 이러한 현상은 노동자 운동의 해결과제로 인식되기 어려웠던 것이다.
여성운동 진영 역시 이러한 한계에서 자유롭지는 못했다. 물론 당시 여성노동자들이 급속하게 노동의 불안정화 현상을 겪게 된 현실에 대한 문제의식은 있었으나, 이러한 현상의 원인에 대한 정확한 분석은 부재한 채 경공업이나 여성 중심의 노동운동에 대한 관심이 약화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만 강조할 뿐이었다. 그리고 오히려 1987년 이후 가시화된 '가족투쟁'을 여성운동사에 있어서의 '새로운 영역의 개척'으로 평가한다.7)

"이전의 노동자투쟁에서 가족들이 했던 역할은 파업투쟁 현장에서 남편이나 자식들을 끄집어내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1987년 7·8·9 대투쟁에서 가족들은 변화하였습니다. 처음에 가족들은 남편이 집에 안 들어오니까 궁금해서 농성장을 방문하였는데 그때 비로소 남편이 일하는 작업 환경을 보게 되었지요. 이전에는 허리띠를 졸라가며 살아도 못사는 이유가 남편의 무능력 때문이라고 여겼는데, 진정한 이유는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지요. 남편의 주장이 왜 정당한지, 왜 노조가 필요하며 임금인상이 되어야 하는지를 깨닫게 되었지요. 따라서 이전의 가족들과는 달리 남편들의 요구조건 관철을 위해 함께 투쟁하게 되었지요."8)

1987년 노동자 대투쟁에서 '가족투쟁'이 처음으로 출현하고 노동자 가족이 활발한 투쟁을 벌인 점은 특기할만한 점으로 꼽힌다. <한여노>를 비롯한 여성운동 진영에서도 노동자 부인들을 조직하여 가족투쟁을 일구어내는 것을 노동자운동에 연대하는 여성운동의 역할과 임무로 상정하고 다양한 실천들을 전개해나갔다.9) 그리고 주부 조직화를 이후 여성운동의 과제로 삼기에 이른다. 그러나 이러한 가족투쟁이 노동자 계급을 남성으로 표상하고, 전업주부인 아내와 어린 자녀가 있는 핵가족의 생계부양자로서의 남성 노동자의 이미지를 강화하는 역할을 한다는 것에 대한 비판은 찾아보기 어렵다. 즉 한국사회에서 남성생계부양자 모델이 확립되고 여성의 이중부담이 심화되어 가는 현실을 여성운동조차 인식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렇게 여성운동 역시 가족형태에 대한 맹목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사실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1980년대 후반 여성노동자들이 겪게 된 노동의 불안정화 현상에 대해 적절한 대응이 취해지지 못했던 이유는 대게 노동조합의 남성 중심성에서 찾아지지만, 대공장 남성 노동자 중심으로 노동자 운동이 재편되는 과정에는 산업구조의 변화뿐만 아니라 한국사회 가족형태의 변화도 관련이 있다는 점에서, 남성생계부양자와 전업주부로 구성되는 핵가족 모델에 대해 무비판적이었던 여성운동 역시 당시 여성노동자들의 현실을 비가시화 하는 데에 일정한 역할을 했던 것이다.
<한여노> 및 <여연> 등의 여성운동단체들은 주부 조직화를 새로운 운동의 과제로 설정하면서 탁아소 운영, 직업훈련, 취업알선, 상담 등의 지원활동 및 법제도 개선활동으로 사업 방향을 바꾸게 된다.10) 또한 노동조합 운동이 활성화되면서 대중적 여성노동자 조직화는 노동조합의 과제로 이전되어 가고 있다고 판단하고, 여성노동자회 등의 여성단체를 여성노동문제에 대한 외곽 지원단체로 자리 매김 한다. 그러나 노동(조합)운동에서 여성문제는 부차적인 것으로 치부되었고 여성노동자 조직화는 노동조합의 중심과제로 놓여지지 못하였다. 결국 여성노동자들, 특히 저임금 영세사업장의 여성노동자들과 비공식 부문의 여성노동자들의 현실을 은폐하는 데 있어서 여성운동과 노동자운동은 서로를 알리바이 삼았던 것이다.
이처럼 여성운동과 노동자운동 양자의 한계는 젠더편향적인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에 맞선 대응을 어렵게 하였고, 결국 1997년 IMF 외환위기를 기점으로 여성노동자들은 대량해고와 비정규직화라는 현실에 맞딱뜨리게 된다.


2. 1997년 이후 본격화된 신자유주의 구조조정, 그리고 여성독자노조 건설

1997년 IMF 외환위기 이후 남한사회의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은 본격화된다. 그리고 이는 여성노동자들을 우선적인 대상으로 하였는데, 이렇게 여성노동자들이 속수무책으로 해고되고 비정규직으로 전락하는 것에 대해 기존 노동조합은 무심하거나 무능하였을 뿐 아니라 오히려 동조하는 모습까지 보였다. 여성노동자들은 정규직 남성노동자들의 고용안정을 위한 안전판으로 전락하였던 것이다.11) 1998년 파견법 제정문제에 대한 노조의 대응방식도 마찬가지였는데, 파견 근로대상 업종으로 논의되던 직군 중 '남성 업종'은 협의를 통해 대상에서 제외되었고 결국 '여성 업종' 중심의 26개 직군만이 남겨졌다. 이와 같은 현실에서 여성 노동조합원들이 노동조합에 대한 회의감으로 노조를 탈퇴하거나, 스스로 여성 사안을 제기하기 하는 것을 포기하는 경우가 늘어난 것은 필연적인 일이었다. 결국 여성의 문제를 간과했던 노동자 운동의 '성맹목(sex-blind)'은 많은 여성노동자들이 노조를 탈퇴하고 무관심해지게 하는 직접적인 요인이 되었다. 여성독자노동조합은 이러한 정세적 배경 하에서 건설되었다. 여성의 이해를 대변하지 못하는 기존 노조에 대한 새로운 대안으로 여성독자노조12)가 제시된 것이다.13)
그렇다면 여성노조는 독자적인 여성노동자 운동을 어떻게 실현하고자 하였나?

"이제, 여성노조의 깃발은 올라갔고 이제부터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까지의 추진과정보다 앞으로의 해결과제가 더 많이 남아있다. 수많은 여성노동자들이 영세 미조직 사업장, 비정규직으로 내몰리고 노동권과 인권 사각지대에 처해 있었지만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교섭권과 교섭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성노동자의 당면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여성독자노조가 교섭권과 교섭력을 어떻게 확보할 것인가'가 중요한 과제로 대두된다. 여성노조의 교섭력 확보는 기업별 노조, 정규직 노조를 중심으로 한 우리 노조문화의 틀을 극복해야 할 뿐 아니라 노동시장내의 성평등 실현이라는 과제를 동시에 실현해야 하기 때문에 더욱 많은 어려움이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이는 노조의 힘을 키워나가기 위해 조직화의 경험이 없는, 개별적으로 흩어져 있던 여성노동자들을 어떻게 여성노조의 깃발 아래 결집시켜낼 것인가와도 직결되는 문제이다. 노동운동의 역사, 10만 여명의 조합원을 포함하고 있는 외국의 여성노조는 결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한국여성노동운동사에서도 1999년이 중요한 획을 긋는 한해가 되기를 기대한다."14)

당시 여성운동 진영에서 여성독자노조 건설의 대표적인 의의로 꼽던 것은 바로 교섭권과 교섭력의 강화였다. 업종과 지역에 관계없이, 비정규직, 중소영세사업장 미조직 여성노동자들을 위한 독자적인 노조를 표방했던 것은 결국 조합원 확대를 통한 세력화의 문제로 결론 내려진다. 그러나 더 큰 교섭력 확보를 위한 실리적 선택이라는 것은 여성운동이 그렇게 비판해마지 않았던 기존 노동조합의 모습에 다름 아니지 않은가? 대규모 남성 사업장을 중심으로 한 교섭력에 기반 한 노동자 운동이 중소영세 사업장 여성노동자의 현실 및 여성비정규직문제를 주변화했다고 했을 때, 바로 그러한 노조에 대한 비판에서 출발한 여성독자노조 스스로가 기존 노조의 한계를 답습하였다는 사실은 아이러니하다. 결국 <전국여성노조>는 여성노동자 조직화의 문제를 기존 노동자 운동의 전략을 바꾸는 것으로까지 사고하지 못한 채, 기존 노조의 코포러티즘적 실천을 반복하게 된다. 비정규직 여성노동자들의 투쟁 및 조직화와 관련하여 <전국여성노조>가 보여주는 코포러티즘적 면모는 이러한 문제의 연장선상에 놓여있다고 하겠다.
실업자를 조직대상에 포함시켜 법외노조로 출발한 <서울여성노조>의 경우에는 기존의 노동조합적 실천과는 다른 대안적인 시도를 보여주기도 하였으나, 2003년 전체 조합원의 1/3에 달하는 이들이 조직의 비민주성을 이유로 대거 탈퇴하는 등의 과정을 겪으면서 현재는 이렇다 할 활동을 보이지 못하고 있다. 여성들을 위한 󰡐기쁨이 넘치는 조직󰡑을 만들고자 했던 <서울여성노조>에서 조직 민주화를 둘러싼 갈등이 첨예한 양상으로 발생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는 <서울여성노조>가 기존 노동조합의 문제를 권위적이고 남성중심적인 조직문화·운영 때문으로 여기고 이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으로 여성들간의 의사소통에 기반 한 형식을 초월한 조직운영을 추구했던 점과 관련된다.

서울여성노조는 … 주체의 변혁, 직접민주주의를 통해 건강한 조직을 만들고자 하는 실험을 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기동성 있는 작은 조직을 지향한다. 운동체는 커지지 않고도 수평적인 네트워크를 통해 얼마든지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다. 물론 노조의 힘은 주먹수에 비례한다고 하지만 동시에 조직이 거대화, 집중화되면서 관료적인 운영이 지배하고 그럴수록 여성들의 특수요구는 더욱더 은폐되는 것이 일반적인 경향이다.15)


기존 노동조합의 의사결정과정 및 조직질서를 '권위적=남성적'이라는 이유로 부정하는 경향16)은 반대로 여성들간의 의사소통에 대한 환상을 강화했다. 그러나 여성들의 결집이라는 것 자체로 여성들이 자유롭고 평등할 수 있는 조직과 민주적인 운영이 담보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서울여성노조의 사례를 통해 알 수 있다.
이처럼 '남성 중심적'이고 '가부장적'인 노동조합에서는 여성노동자 조직화가 가능하지 않다는 비판에서 출발한 여성독자노조 역시 여성의 이해를 대변하는 조직으로 성장하지 못하였다. 이는 결국 기존 노동자 운동의 한계에 대한 분석상의 오류와 여성의 독자적 권리에 대한 인식의 미흡함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노동조합이 변혁지향성을 상실하고 코포러티즘적으로 변모한 현실에 대한 진단이 정확하지 못했던 것은 여성독자노조 역시 기존 노동조합의 한계를 답습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그리고 단지 여성들을 조직하는 것만으로 여성노동권쟁취라는 목표가 달성되는 것이 아니며 또한 여성들로 운영되는 것만으로 페미니즘적 조직이 실현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은 여성의 독자적 권리에 대한 질문을 다시금 던지고 있다. 기존 노동자 운동에서 여성의 과제가 부차적인 문제로 치부되었던 원인은 무엇인지에 대한 정확한 분석이 동반되지 않는 상황에서 여성운동의 독자성이 해법으로 등장했던 것은, 조직 형식적인 문제로 여성문제를 왜곡하고 은폐시키는 결과로 이어졌고, 여성의 독자적 권리로서의 여성권은 단지 조직분리의 독자성으로 협소화되었다.17)
1990년대 말 여성운동의 시도가 이렇게 한계를 노정함으로써 여성노동자의 독자적 권리에 대한 정세적 질문, 즉 1980년대 후반 '노동(조합)운동'과 '여성(노동자)운동'이 해결하지 못했던 문제는 1997년 이후 또다시 해결 불가능 한 채로 남겨지게 된다.


3. 2007년 한국사회 여성노동자의 현실, 그리고 새로운 여성운동을 위한 과제

불과 10년 전만 해도 여성이라는 이유로 우선 해고되고, 구조조정의 희생양이 되던 한국사회 여성노동자들은 2007년 현재, 여성이라는 이유로 더욱 많은 기회가 주어지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여성인력 활용방안이니, 중·고령 취약계층 여성노동자를 위한 일자리 정책이니, 이제는 정부가 나서서 여성노동자들의 일자리를 걱정해주는 듯하다.

노무현 정부가 야심차게 제출한 ‘사회서비스 일자리 사업’은 보육, 가사·간병 등 사회서비스 제공을 통해 여성을 ‘가사로부터 해방’시키고 또한 주부와 고령 여성들에게 적합한 일자리를 제공함으로써 성장잠재력 확충 및 연쇄 취업효과라는 일석이조(一石二鳥)의 효과를 누릴 수 있다고 선전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는 결코 여성노동자를 위한 것이 아니다. IMF 외환위기 당시 여성노동자 우선퇴출이라는 방식으로 그 자신의 위기를 관리하고자 했던 신자유주의는 10년이 흐른 지금에 와서는 여성노동자들을 그 자신의 입맛에 맞는 유연한 노동력으로 활용하고 관리하고자 할 뿐이다. 또한 신자유주의 정책이 야기한 10년 간의 변화가 한국사회의 빈곤심화 및 사회적 안전망 파괴라는 심각한 결과를 가져오자, 이 위기관리를 위해 다시 한 번 여성을 적극적으로 이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여성노동자들의 현실을 정확하게 바라보고 신자유주의 메커니즘이 여성을 활용하는 방식을 제대로 분석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그렇다면 현시기 여성노동자운동은 이러한 정세적 요구에 부합하고 있는가?

(…) 우리들의 요구는 정부의 대책대로 상시업무를 하는 전 직종에 대해 즉각 무기근로로의 전환을 시행하라는 것이었다. (…) 무기근로계약으로의 전환은 2002년부터 학교비정규직들의 권익향상을 위해 싸워왔던 전국여성노동조합에게 6년의 투쟁 끝에 한 단계 전진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게 되는 것이기도 하다. (…) 물론 해결해야 할 과제는 앞으로도 많이 남아 있다. 각종 근로조건 등에서 정규직과의 차별을 해소해 나가야 하는 일이 그것이다. 비정규직이라는 이유 때문에 차별이 정당화되었던 잘못된 과거를 청산해야 하며, 이는 학교에서뿐만 아니라 우리사회 전체로 확산되어야 하는 일이다. 무기근로계약의 산을 넘고 차별해소의 산을 넘어갈 것이다. (…)18)

<전국여성노조>에서는 5월 15일 '학교비정규직 전 직종 무기계약 전환 촉구대회'를 열고 여성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무기근로로의 전환을 요구했다. 지난해 8월 정부는 '공공부문 비정규직 종합대책'을 발표했는데, 여기에서는 '반복적으로 근로계약기간을 갱신하여 기간제 근로자를 사용하는 상시적·지속적 업무에 대해서는 원칙적으로 '기간의 정함이 없는 근로자(무기근로계약근로자)'가 담당토록 하고 다만 명백하게 기간을 정하여 사용할 합리적인 이유가 있는 때에는 예외를 인정한다'고 밝히고 있다. 그리고 해당기관에게 상시지속업무를 파악하여 무기계약 전환 계획과 외주화 타당성 검토 요구서를 제출하도록 하였다. <전국여성노조>는 이러한 무기근로계약으로의 전환이 '기간제 노동자들의 정규직화 모델 마련'이라는 입장을 밝히고 비정규직 여성노동자들이 여기에 '포함'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전개하고 있는 것이다.19)
그러나 무기근로계약은 정규직이 아니며 정규직이 될 수도 없다. 정부의 무기근로계약화는 '정규직화'의 최소한의 기본방향마저 뒤엎으며, 새로운 형태의 비정규직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에 다름 아니다. 그리고 이는 여성노동자에 대한 차별적 구조를 더욱 공고하게 할 뿐이다.20) 이러한 무기근로계약으로의 전환이 마치 비정규직 여성노동자들의 문제를 해결할 해법인 양 주장하는 것은 여성노동자들의 열악한 현실을 당장에 바꿔내기란 어렵다는 현실적 조건에 대한 자기합리화에 불과하다. 즉 여성노조는 그 자신이 비판했던 노동조합의 코포러티즘적인 경향성을 스스로 답습하는 모습을 이번 무기계약전환 문제에 있어서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또한 정부가 제시한 조건에 여성들이 '포함'되어야 한다고 하는 것은 여성노동자들의 요구가 될 수는 없다. 이는 신자유주의가 여성들을 단지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적극적으로 '포섭'하기도 하고 '활용'하기도 하는 메커니즘에 대한 몰인식으로, 현시기 여성노동자들의 현실을 바꾸기 위한 투쟁의 요구를 왜곡하는 결과를 낳는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여성노동자 운동의 방향을 둘러싼 이러한 비판은 곧 '정규직 남성 노동자 중심의 노동조합의 이해관계'에 부합하는 것으로 치부되고 있다.21)
이렇게 여성노동자운동이 기존 노동조합이 보여온 코포러티즘적 한계에서 자유롭지 못하고 또한 여성문제를 성별간의 갈등의 문제로 왜곡하는 경향은 현시기 여성노동자들의 현실을 제대로 인식하고 그에 걸맞는 투쟁방향을 제시하는 데에 걸림돌이 되고 있다. 즉 여성 노동의 불안정화에 대항하는 투쟁에 있어서 여성운동과 노동운동 진영이 서로의 무능을 서로의 탓으로 돌리는 안타까운 현상이 또다시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결국 여성노동자들의 권리를 제약하는 원인에 대해 고민을 할 수 있는 역사적 계기들이 소실되는 데에 노동자 운동과 여성운동이 서로에게 알리바이 역할을 했다는 점을 우리는 반성적으로 평가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신자유주의가 여성을 활용하는 메커니즘을 정확히 파악하고 또한 역사적 가족형태가 자본주의의 요구에 어떻게 충실하게 화답하고 있는지를 인식할 수 있어야 한다.22) 나아가 성별화 된 권리로서 여성의 권리를 되찾기 위한 투쟁을 조직해나가야 한다. 여성노동자 운동의 독자성이란 바로 그러한 권리에 기반한 투쟁에서부터 획득될 수 있기 때문이다.

여성노동권 쟁취투쟁으로써 비정규직 철폐투쟁에 임하자
비정규직의 70%가 여성이라는 현실은 여성운동에게 비정규직철폐투쟁의 방향과 전략에 대한 정세적 질문을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현재 비정규직 여성노동자에 대한 인식은 '저임금·미조직의 가장 취약한 노동자', '소수자 내지 사회적 약자' 정도로 그치고 있다. 즉 신자유주의 하에서의 노동 유연화의 결과이자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매개로써 비정규직 여성노동자문제가 제기되지 못하고 단지 힘없는 비정규직 여성노동자 당사자의 안타까운 문제로만 협소화 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이에 대한 대안이라는 것도 노동자 운동 진영에서는 노동조합으로의 조직을 통한 교섭력 강화, 그리고 그러한 사업장 교섭력을 통한 고용평등 쟁취 이상이 제시되지 못하고 있으며, 여성 운동 진영에서는 비정규직 철폐투쟁을 오히려 우회한 채 문제를 성차별 해소의 문제로 국한시키는 오류를 보이고 있다.23)
그러나 신자유주의 구조조정 이후 나타난 노동의 불안정화, 빈곤심화가 '여성노동의 비정규직화', '빈곤의 여성화'로 드러나고 있는 상황에서, 신자유주의 반대 투쟁 및 비정규직 철폐투쟁은 우회될 수 없는 여성운동의 과제이다. 비정규직 여성노동자의 현실은 생계'보조'자, 가사노동의 일차적 담당자라는 여성노동자에 대한 인식과 이데올로기를 넘어 보편적인 노동자로서의 여성의 지위가 확보되지 않는 한 해결될 수 없다. 왜냐하면 성별 분업에 기반한 직무·직종 분리, 저임금 등의 특질을 갖는 여성을 둘러싼 차별적인 노동현실은 남성생계부양자 모델에 기초한 가족임금 이데올로기와 핵가족 유지 전략으로 뒷받침되는 젠더편향적인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의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시기 여성운동은 여성노동권 쟁취 투쟁으로써의 비정규직 철폐투쟁에 임해야 한다. 이는 비단 기존의 노동운동에 여성의 요구를 끼워 넣는 방식이 결코 아니라, 여성권에 기초하여 보편적인 노동자의 권리를 재구성하는 과정을 의미한다. 그리고 비정규직 여성노동자를 노동조합으로 조직화하고, 그녀들의 투쟁을 지지하고 연대하는 것에 국한되지 않는 노동자운동과 페미니즘의 결합을 위한 혁신의 지점을 모색해야 함을 의미한다.

노무현 정부의 '일과 가정의 양립지원 방안' 및 '저출산·고령화 대책'에 대한 비판을 조직하자
얼마 전부터 한국사회는 저출산 현상과 고령화 현상이 함께 이야기되면서 새로운 위기담론으로써 시너지 효과를 내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위기담론에 힘입어 일과 가정의 양립지원 방안이 더욱 활발하게 논의되고 있다.24)
여성운동은 이를 여성노동자의 '기회'로 여기고 노무현 정부의 일과 가정 양립지원을 위한 정책마련과 시행에 동참하고 있다. 그러나 '일과 가정의 양립' 및 '저출산·고령화 현상 해소'라는 담론이 여성의 주변적 노동자 지위를 지속시키고 정당화하는 논리가 된다는 점에서 우리는 오히려 이를 비판하는 입장을 조직해야 한다. ‘일과 가정의 양립'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저출산 현상과 고령화 현상은 누구의 입장에서, 왜 위기적으로 진단되고 있는가? 현재 공고해지고 있는 사회적 담론25) 을 여성노동자의 시각에서 다시금 재구성해야 하는 것이다. 실지로 저출산과 고령화 현상은 그 발생의 원인이 각각 다를 뿐만 아니라 그것에 대한 책임은 바로 현재의 신자유주의 체제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마치 여성의 출산기피와 사회진출로 인한 것인 양 지배계급은 호도하고 있다. 그러나 유연한 노동력으로써의 여성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자 하는 신자유주의가 여성을 다시 가정으로 되돌려보낼 수는 없는 일이니, 여성은 직장생활을 중단하지 않으면서도 출산과 양육을 지속하고 가족을 유지할 수 있어야 하게 된 것이다.
따라서 여성운동은 노무현 정부의 '일과 가정의 양립지원 방안' 및 '저출산·고령화 대책'에 대한 비판을 조직하면서 성별분업 이데올로기를 넘어 여성의 노동자로서의 지위와 권리, 가족 내 재생산 노동의 사회화 문제에 대해 어떤 과제를 제기해야 하는가를 고민해야 한다. 이는 현재 노무현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사회서비스 확충 전략을 위한 일자리 사업'에 대한 비판을 통해 구체화될 수 있어야 한다.

노동조합을 페미니즘적으로 개조하는 실천이 필요하다
2007년 3·8 여성의 날을 전후로 하여 또다시 확인된 이 땅 여성노동자들의 참담한 현실과 처절한 투쟁은 여성이 인간답게 살 권리를 쟁취하기 위해서 노동권 확보는 필수적이라는 사실을 다시금 강조하게 한다. 즉 현시기 여성노동자들이 당면한 정세는 여성 운동과 노동자 운동이 서로가 서로를 전제로 할 것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노동조합의 성맹목(sex-blind)은 이러한 결합을 실현하지 못하게 하는 원인 중 하나로 작동하고 있다. 노동조합의 가부장성과 여성문제에 대한 몰인식은 꾸준히 제기되어 왔고 <운동사회 성폭력 뿌리뽑기 100인 위원회>의 문제제기와 노조 내 여성의 과소대표성에 대한 문제제기들을 계기로 노조 내 상설적 여성기구로서 여성국-여성위원회 신설, 할당제 도입 등의 흐름이 형성되었으나, 그러나 이러한 흐름이 노동자 운동의 페미니즘적 혁신에 어떠한 기여와 한계를 남겼는지는 여전히 모호하다.26)
따라서 여성운동은 기간 노동조합을 페미니즘적으로 개초하는 실천을 위해 진행해왔던 시도를 평가하고 대안적인 노동조합 페미니즘의 단초를 모색할 필요가 있다. 민주노조 건설의 주역이 되었던 70년대 여성노동자 운동의 단절, 여성의 노동의 불안정화와 빈곤심화에 맞선 투쟁의 흐름을 형성하고 있지 못하는 현시기 여성운동의 곤란함의 원인이 바로 이 지점과 관련되어 있다는 점에서 노동조합의 페미니즘적 개조는 여성운동이 우회할 수 없는 과제이다.


1970년대 민주노조 운동을 주도하며 시대의 모순을 폭로했던 여성노동자운동은 1980년대 산업구조의 재편 및 한국사회 가족형태의 변화와 맞물려 소멸한다. 그 이후로 한국사회의 여성노동자 운동은 더 이상 집단적이고 조직적으로 전개되지 못한 채 각개약진, 고립 분산적인 모습을 보인다. 물론 1990년대 후반 이후 곳곳에서 터져 나온 비정규직 여성노동자들의 절박한 투쟁은 여성노동자들의 존재를 가시화 했고, 또한 여성노동권 쟁취를 위한 정세적 질문을 던지고 있으나, 현시기 여성운동은 그에 걸 맞는 운동을 조직할 태세를 갖추고 있지 못하다.
하기에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신자유주의가 야기하는 여성에 대한 빈곤과 폭력에 맞서는 새로운 여성운동이며, 여성운동과 노동자운동의 마주침의 공간이다. 그리고 그것은 여성이 인간으로서, 시민으로서, 노동자로서 온전히 살아갈 권리를 온몸으로 요구하고 있는 이 땅 여성노동자들의 목소리로 채워져 나갈 것이다.


쓰레기를 치우면서 쓰레기 취급을 받아야 했던 늙은 여성노동자들이 노동조합에 가입하면서
비로소 숨을 쉬기 시작했습니다. 워낙 눈치 보고 숨죽이며 살아왔던 인생이라 노동조합에 가입하는 순간까지도 무수한 고민과 두려움이 있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노동조합 활동을 하기 시작하면서 우리는 더 이상 쓰레기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됐고, 입이 있으면 말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쓰레기에서 인간으로 돌아왔습니다.
(…)
노동자의 그 어떤 투쟁이 절박하지 않겠으며, 힘들지 않겠습니까?
마음은 당장이라도 광주로 달려가 광주시청 여성동지들의 손을 잡고 싶습니다.
아무 말 하지 않고 손만 잡고 있어도 우리는 서로를 잘 알고 있으니까요.
멀리서 마음으로라도 동지들의 손을 잡고 있습니다.
힘들더라도 승리하는 그날까지 지금 잡은 이 손을 놓지 않을 것입니다.

-울산과학대 여성노동자들이 광주시청 여성노동자들에게 보낸 연대의 편지글 中


[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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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비정규직 전 직종 무기계약 전환 촉구대회' 참가자 결의문, 2007.5.14



1) 한국여성노동자회협의회,「여성노동자회의 창립과 발전」,『여성노동자회10년사 : 들꽃이여! 불꽃이여! 그대 이름은 여성노동자』, 1998본문으로


2) 이미경,「여연10년사」,『열린희망』, 1998본문으로


3) 1987년에서 1992년에 이르는 동안 남성 생산직 노동자의 감소 폭은 13.6%임에 비해 여성은 35.3%였다. 반면 시간제 전체 노동자 중에서 여성비율은 1980년 45.9%에서 1993년 64.7%로 증가하였다. (한국여성노동자회협의회,『여성노동자회10년사 : 들꽃이여! 불꽃이여! 그대 이름은 여성노동자』,1998)본문으로


4) 이러한 가족형태의 변화는 남한사회의 자본주의로의 이행과정에서 노동력을 재생산하는 역할을 한다. 우리가 핵가족이라고 개념 규정을 할 경우 그것은 비단 가족 구성원의 문제로 환원되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에서 노동력을 재생산하는 제도로서 의미를 갖는다. (이미경,『신자유주의적 '반격'하에서 핵가족과 '가족의 위기'』, 도서출판 공감, 1999)본문으로


5) 실지로 1970년대 이후로 아파트가 보급되기 시작하고 의식주, 양육 수단, 초기 교육이 상품화되면서 가정 내 여성의 역할은 변화되기 시작하였는데, 남편에 대한 내조와 아이의 양육에 대한 여성의 책임이 더욱 강조 된다. 이러한 현실에서 생산영역에서의 여성 노동은 결혼과 출산 이전의 일시적인 것으로, 혹은 아이들 교육비를 충당하기 위한 정도의 보조적인 것으로 위치 지워진다.본문으로


6) 핵가족 모델은 불균등한 역사적 조건의 산물임에도 불구하고, 핵가족으로의 이행은 근대화 진행과 일치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노동자 계급 역시 이러한 핵가족 모델을 자연스럽게 내면화한다.본문으로


7)"가족투쟁이 이렇게 활발해진 것은 우리나라 노동자들이 이제 가족단위로 노동자 세대로서 정착되어 계급운동으로 확고히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는 점에서 매우 고무적이다. 또한 이 가족투쟁의 중심인 부인들의 경우, 적지 않은 수가 여성노동자 출신이라는 사실과 현 사회구조 속에서 기혼여성들도 점점 생활고 등으로 생산현장에 저임금으로 내몰리고 있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여성노동운동의 한 부분으로 이들에게도 앞으로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김지수,「한국 여성노동운동의 현황과 과제」,『여성2』,창작과 비평사, 1988)본문으로


8) 한국여성노동자회협의회,『여성노동자회10년사 : 들꽃이여! 불꽃이여! 그대 이름은 여성노동자』, 1998본문으로


9) 남편들의 열악한 노동조건을 직접 확인하고 투쟁에 동참해야함을 공감하는 현장방문 프로그램, 가족투쟁의 필요성에서부터 자녀교육의 문제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교육프로그램, 가족투쟁위원회 조직을 위한 상담과 지원활동 등이 진행되었다.본문으로


10)이는 1987년 이후의 국면을 민주화의 확대로 규정한 여성운동 진영의 태도와도 관련된다. <여연>은 6월 항쟁 이후를 '불완전하고 왜곡된 상태이긴 하나 자율적인 시민사회 영역이 구축된' 상황으로 평가했다. 이런 인식 하에서 여성노동자들에 대한 지원은 여성노동자들의 요구를 수렴하여 법을 제·개정하는 것에 치중되었다. 하지만 이런 활동을 통해서 오히려 알 수 있는 것은 <여연>이 표방한 기층여성 중심성과 사회변혁운동으로서 여성운동이라는 지향이 분리되고, 기능적으로 결합되게 되었다는 점이다.본문으로


11) IMF가 몰고 온 구조조정에 맞선 첫 싸움이라고 할 수 있는 1998년 현대자동차 노동조합의 파업투쟁은 정리해고를 막기 위해 식당 여성노동자들의 정리해고를 받아들이는 것으로 정리되었다. 투쟁의 '꽃'이 되었던 그녀들이었지만 최종 교섭 안에 '밥 짓는 아줌마'들의 자리는 없었던 것이다.본문으로


12) 비정규직과 정규직 여성노동자, 여성실업자를 대상으로 하고 어떤 상급단체도 두지 않은 <서울여성노동조>이 1999년 1월 11일 조합설립신고를 내고 여성독자노조의 첫 발을 내딛었다. 이어 1999년 1월 15일에 영세사업장 등의 여성노동자 25명을 조합원으로 한 <서울지역 여성노동조합>이 서울시로부터 노조설립 신고필증을 받고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갔다. 그리고 <한국여성노동자협의회>를 중심으로 결성된 <전국여성노동조합>이 1999년 8월 28일 출범식을 갖고 활동전개에 나섰다.본문으로


13) 더불어 여성의 문제를 조직의 중심으로 가져올 수 있도록 하는 제도적 틀거리 마련의 절실함을 근거로 '여성할당제' 등이 대안으로 제시되기도 하였다.본문으로


14) 최명숙,「한국여성민우회 사무직 여성노동자운동의 현황 및 과제」,『여성노동운동 방향에 대한 워크샵 자료집』, 1999본문으로


15) 정양희,「스스로 커가는 풀뿌리 조직, 서울여성노동조합」,『진보평론』2호, 1999 본문으로


16) 여기서 <서울여성노동조합> 구성원 대부분이 반성폭력 이슈를 중심으로 1990년대 대학가에서 형성된 급진적인 페미니즘 운동의 영향을 받은 여성활동가들이었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이들은 위계적인 중앙집권적 의사결정과정을 남성적이라는 이유로 비판했고, 유토피아적 미래 공동체의 상을 예견하는데 치중했다. 또한 남녀 간의 적대감을 증폭시키는 원한의 정치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이는 반성폭력 운동 평가가 필요한 또 하나의 지점이기도 하다. 남녀관계에 대한 적대와 냉소는 노동자운동과 여성운동의 결합을 통한 여성노동자운동의 대안모색을 봉쇄한다는 점에서 냉정하게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본문으로


17) 여성노동자들이 이미 노동의 불안정화를 겪기 시작했던 1980년대 후반, 노동운동뿐만 아니라 여성운동 역시 젠더편향적인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에 맞선 대응에 취약했으며 남성생계부양자 모델을 기초로 하는 핵가족 형태를 수용했다는 사실을 앞서 살펴본 바 있다. 이는 여성운동 역시 여성(노동자)의 독자적인 성별화 된 권리를 쟁취하기 위한 조건에 대해 사고하지 못했음을 의미한다.본문으로


18) '학교비정규직 전 직종 무기계약 전환 촉구대회' 참가자 결의문(2007년 5월 14일) 中본문으로


19) 이혜순,「비정규조직화, 같은 길은 없다」,『노동사회』5월 호, 2007본문으로


20) 정부는 무기근로계약이 정규직이라고 호도하고 있지만, 실제 무기근로계약전환 계획서를 제공하고 있는 공공기관들은 전환계획서에서 정규직 정원을 늘리는 것은 예산문제와 결부되는 만큼 현실적이지 못하므로 차선책으로 무기계약에 대한 대책을 마련하는 것이 적합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또한 이러한 무기근로계약노동자들을 현행 직급체계와 달리 별도의 직급체계를 갖춘다는 계획이다. 즉, 기간제 노동자의 채용방식을 따르고 별도로 평가를 진행하고 처우도 정규직과의 차이를 전제하고 있는 무기근로계약은 차별을 고착화하기 위한 또 다른 형태의 '무기한' 계약직인 것이다. (유현경,「공공부문 비정규직 문제 해결, 투쟁으로 돌파해야 한다」,『질라라비』4월 호, 2007본문으로


21) 일다(www.ildaro.com)에서는 5월 15일자 기사(윤정은, 「노동계, 무기계약 전환 놓고 '찬반' 갈라져」)에서 '무기계약 철회 주장, 누구의 목소리인가'라고 반문한다. 그리고 "정규직 중심의 관점에서 벗어나기 쉽지 않은 노동조합 내부의 현실적 조건이 있으므로 비정규직의 무기계약 전환 계획이나 외주화 타당성 검토 등의 문제에 대해 정부, 사용자, 노동조합의 이해관계로부터 자유로운 여성계나 여타 시민사회 단위에서 적극 개입할 필요가 있다."며 "특히 여성 비정규직의 문제 해결이라는 점에서 여성계가 이 역할을 주도적으로 해나갈 필요도 있다."고 주장한 조순경 교수의 발언을 인용하고 있다.본문으로


22) 기간 여성운동이 역사적 가족형태에 대해 보였던 맹목 역시 현재 여성노동자들의 현실을 정확하게 바라보지 못하게 하는 원인으로 여전히 작동하고 있다. 신자유주의 정권의 일과 가족의 양립 정책, 여성인력활용방안, 저출산 고령화 위기 담론에서 여성운동이 오히려 그것을 수용하고 노무현 정부의 정책 파트너가 되고 있는 현실이다. 그러나 남성생계부양자 중심의 핵가족 모델에 대한 근본적인 비판 없이 여성노동자들의 독자적 권리 쟁취는 불가능하다.본문으로


23)"(…) 비정규직화의 근본 원인으로 지목되는 노동시장의 유연성은 기업이 이윤획득을 위해 핵심적으로 추구하는 것이지만, 일과 삶의 균형을 원하는 노동자에게도 생애주기에 따라 필요한 측면이 존재한다. 오히려 우리 사회 비정규직 문제의 핵심은, 관련 법안이 표류하던 지난 1년 간 비정규직 노동자가 30만 명이나 늘어날 정도로 그 규모가 급속하게 커지고 있으며, 정규직-비정규직 간의 차별이 날로 심화되면서 새로운 신분제도로 고착화된다는 점이다. (…) '비정규직에 대한 불합리한 차별' 철폐를 위해서는 비현실적인 '비정규직 철폐'에 머무를 것이 아니라, '동일가치노동 동일임금'이라는 대안적 원칙을 확인하고, 나아가 이에 대한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대안을 준비하고 실천해야 할 것이다.(…)"
작년 12월 노무현정부의 비정규법안의 통과 직후 인터넷 매체를 통해 '비정규직 철폐'는 여성노동자에게 있어 대안이 아니며 차라리 '동일노동·동일임금 표준임금체계'를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이 발표되었다. (박홍주,「'비정규직 철폐'는 대안이 아니다」(<창비> 주간 논평) 2006.12.19)
이러한 입장은 KTX 승무지부 외주화 반대 투쟁 과정에서도 쟁점적으로 드러났는데, 조순경 교수를 비롯한 여성 운동 진영은 KTX 여승무원 문제를 '고용형태에 의한 성차별의 전형적 사건'으로 보면서 비정규직 철폐투쟁이 아닌 성차별의 문제로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갈 것을 주장하였다. (조순경,「KTX 문제의 성격과 대안」,『철도공사의 성차별과 KTX 여승무원 문제에 대한 토론회 자료집』, 2006.9)본문으로


24)여성인력 활용을 위한 하나의 방안으로써 여성이 육아와 직장생활을 병행할 수 있도록 하는 보육정책 등은 신자유주의가 본격화되던 김대중 정부 시절부터 거론되고 추진된 바 있다. 그리고 최근 노무현 정부는 "현재 운영되고 있는 '일과 가정생활의 양립' 지원제도를 활성화하고 계속해서 증가하는 사회적 요구에 대응하고자하는 별도의 법률(가칭 '일과 가정의 양립지원법')을 제정"하기로 했다.본문으로


25)노동운동 진영에서도 '저출산·고령화 위기' 담론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면서 오히려 그것에 적극 편승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다음은 '저출산·고령화 연석회의' 참여를 둘러싼 쟁점에 대한 조준호 민주노총 前 위원장의 발언이다.
"이 문제에 대해서 파생하는 문제를 확인했다. 정치와는 무관한 연석회의이므로 구체적인 내용에 한정해서 대응하자는 것이 결정이다. 그 밖에는 더 진행하지 않겠다. 대화 창구를 둘러싼 소모적인 논쟁은 많이 극복되었다고 판단한다." 『노동과 세계』371호.본문으로


25)일례로 여성노조에서 제기한 '여성친화적 노동조합 활동 프로그램'을 노동조합을 여성친화적으로 개조하는 방안이자 미조직비정규 여성노동자를 조직하기 위한 방안으로 삼고 적극 수용하는 모습이 보이기도 하나, 이는 기존의 '여성성'을 여성의 '다름'으로 치환할 뿐 ('여성은 관계를 중요시한다','자신의 목소리로 말할 수 있는 소규모 관계를 선호한다','위계적 지휘체계의 위(top)에서 지도하는 것이 아니라 조직의 중심(center)에서 리더쉽을 발휘한다') 여성이 자신을 둘러싼 억압적 현실을 명확하게 인식하고 새롭게 정체성을 재구성하는 과정을 담보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노동자 운동의 페미니즘적 혁신에 미달하는 것이라고 하겠다.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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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 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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