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광주전남지부


사회운동

사회진보연대 계간지


2007.7-8.76호

사료로 본 87년 노동자대투쟁

정경원 | 민주노총정책연구원 노동운동자료실 연구위원
왜 싸웠을까1)

"대통령직선제 개헌을 통한 평화적 정권이양, 대통령선거법 개정을 통한 공정한 경쟁 보장, 김대중 사면복권과 시국관련 사범들의 석방, 인간존엄성 존중 및 기본인권 신장, 자유언론의 창달, 지방자치 및 교육자치 실시, 정당의 건전한 활동 보장, 과감한 사회정화조치의 단행"
1987년 6월 29일 민정당 대표 노태우가 TV에 모습을 드러내고 사태 수습을 위한 대책을 제시했다. 전두환이 받아들이지 않으면 대표직을 사임하겠다고 했다. 6ㆍ29선언이다. 다음날 전두환은 전격 수용한다는 담화문을 발표했다. 6월 항쟁을 이끌었던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이하 국본)은 의견이 갈렸다. 국민들의 분노 앞에 항복을 한 것이냐, 술수냐. <국본>은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전두환의 항복으로 받아들이고 이후 민주화를 위해 매진하기로 결정했다. 투쟁의 불길은 삽시간에 사그라들었다.
'민주주의'를 그리게 했던 6ㆍ29선언의 내용에 담기지 않은 게 있다. '근로자'로서 퇴근 후면 거리로 뛰어 나갔던 사람들, '중산층', '시민'이라 불렸던 사람들의 요구는 해소되지 않았다. '노동3권 보장하라', '저임금을 박살내자', '최저임금 보장하라', '근로기준법 파업권 쟁취하자' 직선제 쟁취 구호에 밀려 두드러지지 않았지만 6월 항쟁에 참여한 노동자들의 요구였다.2) 민주노총 부산본부 김진숙 지도위원은 이렇게 말한다.

"그때 부산지역의 공단이 사상, 주례, 가야 이쪽에 밀집되어 있었는데, 그때 전부 시위 대오들 때문에 차가 막히고 노동자들이 퇴근해서 쭉~ 걸어서 나오면서 자연스럽게 시위대열에 합류를 하고. 물론 그때 조직된 게 없어서 노동자들이 조직적으로 깃발을 들고 나오지는 못했지만 6월 항쟁 참가자들의 대부분은 노동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마치 6월 항쟁이 이른바 386세대, 태생적으로 노동자들은 낄 수 없는 특정집단의 성과로, 그래서 그 사람들이 성과들을 독식하는 게 대단히 안타까운 점들인데, 노동자들이 그 시위의 중심이 되고 6월 항쟁에서 노동자들이 난생 처음으로 "야, 민주주의가 이런 것이구나. 우리가 뭔가 단결해서 요구하면 대통령도 바꿔내고 세상도 바꿔낼 수 있겠다." 하는 확신을 현장에서, 거리에서 배우게 됩니다.
그런 것들이 자기가 속해있는 공간들 그러니까 이제 회사죠. 회사에 들어가서 그렇게 배운 민주주의를 어떻게 실현할 것인가를 고민하면서 민주노조운동이 비로소 태동하게 되지요.
그동안 대한민국 같은 경우 제대로 된 민주노조운동이 거의 없었다고 봐야돼죠. 유인물 하나만 만들어 뿌려도 다 해고되고 징역 가던 시절이었으니까. 그게 비로소 6월 항쟁이 일어나고 그런 움직임들이 현장으로 들어가면서 조직적으로 노동자들이 현장 내에서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방법들을 고민하게 돼죠. 그러면서 곳곳에서 노동조합들이 만들어집니다." (www.remember1987.net)

6ㆍ29선언으로 사라지던 불씨는 7월 5일 울산 현대엔진 노동조합 결성으로 다시 타올랐다. 회사측은 노조설립신고서를 탈취하기까지 했으나 막지 못했다. 투쟁은 순식간에 온산, 울산 공단을 거쳐 부산, 마산, 대구, 구미, 광주, 전북, 수도권으로 번져나갔다. 공단지대 뿐 아니라 '중산층 시민'이었던 사무직, 병원 등에서도 투쟁이 일어났고 노동조합이 만들어졌다.
7ㆍ8ㆍ9월까지 3,458건의 투쟁이 일어났다고 기록되어 있다. 하루 평균 30건이 넘는다. 노동자대투쟁의 정점은 8월 중순경이었는데 이때는 하루 평균 83건의 투쟁이 일어났다. 참가 인원은 122만 명을 넘어, 10인 이상 사업체 총 노동자 333만 명의 약 37%에 이른다. 업종별로는 제조업이 1,827건(55.2%), 운수업이 1,265건(38.2%), 광업127건(3.8%)이었다.
노동자들은 이 폭발적인 싸움으로 무엇을 얻으려고 했을까.

방세는 하늘위로 치솟고 임금은 바닥에서 빌빌빌 / 저마다 누려야할 행복이 우리와 거리가 먼 곳
장시간 노동에, 피곤에. 휴식도, 나들이도 못하고 / 우리의 조그마한 꿈조차 산산이 부서지는 곳
원하는 것은 돈이 없어 살 수가 없고 / 뜻하는 것은 시간 없어 할 수가 없네
이렇게 우린 언제까지 살 수가 있나 / 이제는 일어나 소리높여 외쳐부르세
아 - 아 임금 인상하라 시간 단축하라 / 아 - 아 함께 뭉쳐 승리하리라
(『성진기업운수노동자투쟁보고서』중)

코리아타코마노조 2인 가구 최저생계비 조사결과.
당시 수도권 운수노동자들이 농성을 하면서 불렀던 노가바다. 정수라의 ‘아, 대한민국’에 가사를 붙였다. 가사를 보니 그렇게 큰 걸 내놓으란 것도 아니었다. 남들 쉴 때 쉬면서 가족나들이 가고 싶고 방세 걱정 안 할 임금을 받고 싶다는 거였다. 이처럼 많은 사업장에서 '임금인상, 노동시간단축, 근로조건 개선' 같이 노동조건을 바꾸자고 요구했다.
노동자들은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생활을 유지하기 어려운 저임금과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고 있었다. 코리아타코마노조에서 1987년 5월 31일을 기준으로 최저생계비를 조사한 자료가 있다. 임금인상 요구 자료로 쓰기 위해 발로 뛰면서 시장조사를 해서 작성한 것이다. 당시 조합원이 젊어서 그런지 1인 최저생계비와 2인 가족 최저생계비를 기준으로 작성했다. 이 자료에 의하면 2인 가족 최저생계비는 328,310원이다. 주거 기준은 방 하나, 가구도 비키니 옷장류, 공중전화 이용은 월 10회, 담배는 은하수 월 15갑, 소주는 월 4병 마시는 것을 기준으로 삼았다. 물론 안주 없이 깡소주다. 겨울용 코트는 5년에 한 벌이고, 여름용 티셔츠도 1년에 한 벌 살 수 있는 정도 기준이다. 그야말로 '최저' 생계비다.
이런 상황은 광산노동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올 봄에 광산노련은 광산노동자 최저생계비를 약 44만2,000원 정도로 책정했다. 이는 고기라든지 과일은 거의 들어가 있지 않고 술도 소주로만 계산하고 한달 술안주 값을 5천 원으로 계산한 그야말로 최저수준의 생활비였다. 올해 한국노총은 4인 가족 최저생계비를 약 49만원으로 책정했는데 물가도 비싼 광산이 49만원이라는 것은 납득하기 어려운 액수였다. 한편 광산노련은 86년 광부의 평균 임금을 39만 5천 원으로 계산했는데 이는 고급 관리직, 사무직도 포함 한데다가 상여금과 장학금까지 합친 다소 과장된 액수였다. 실제로 대부분의 광부는 피로와 재해로 인한 결근으로 이보다 훨씬 적게 받고 있지 않는가?" (『광부의 함성』제3호)
광산노동자들의 요구가 무리라고 생각할 사람은 없었다.


현대중공업노조 개편대책위원회 유인물. 당시 요구가 잘 드러나 있다.
현대중공업에서는 '두발자유화'를 공식적으로 요구하기도 했다. 군부독재도 투쟁으로 물리친 마당에 관리자가 노동자 조인트를 까는 군대식 노무관리를 더 이상 용인할 수는 없었다.
서울의 삼성제약 노동자들은 어용노총 퇴진, 해고 노동자 복직, 조합원 범위삭제 등 민주적 노조활동의 조건을 요구하기도 했다.3)
광산 노동자들은 노동자들을 배제하고 회사와 어용노조 간에 임금인상안을 합의한 데에 항의했다. 13% 인상을 관철하겠다고 '스스로 떠든 말도 어기는 사기노조, 노동자들의 가장 큰 관심사인 임금인상을 노동자 모르게 슬쩍 처리해 버린 도둑노조, 엄청난 조합비를 떼어먹고 냄비, 수건이나 나눠주는 수건노조, 냄비노조'를 바꾸자는 요구였다.4)
어용노조 위원장 퇴진과 함께 제기한 '총회에서 노조위원장을 직선으로 뽑자, 노조비 사용 공개하라' 등의 요구를 통해 민주노조 운영 원리를 쟁취하고자 했다.

노동자들은 임금인상이나 근로조건 개선 투쟁에 머무르지 않았던 것이다. 자신들의 조직인 민주노조를 결성하거나, 어용노조를 민주화시키고자 했다. 온전한 노동 3권을 쟁취하고자 투쟁으로 나섰다.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요구를 관철시키며 승리를 거뒀다.

어떻게 싸웠을까

노동자들이 투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었던 요인은 무엇이었을까. 가장 큰 힘은 단결이다.

마음 약해서 싸우지 못했네 / 돌아서서 욕만 했었네 (아이구 이건 안돼)
혼자 남으니 힘이 없네요 / 내 마음 약해지네요
생각하면 그 얼마나 부끄럽던가 / 나 혼자서 싸워봐야 무엇을 얻나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리네 / 단결해야지 단결해야지 / 우리 함께 투쟁해야지

80년대 젊음을 보낸 사람이면 이 노래 원곡을 알만도 하다. 들고양이들 <마음 약해서>

당시 농성장에서 머리를 맞대고 만든 이 노가바를 들어보면 노동자들이 단결을 무기로 싸웠음을 알 수 있다. 대놓고 싸우지 못하고 그저 돌아서서 욕만 했던 공순이 공돌이. 혼자 싸워봐야 얻을 것도 없고 역시 단결만이 남는 것임을 스스로 알았다.
87년 노동자 대투쟁 이후 많은 노동조합들이 생겨났다. 한국 전쟁 뒤 40여 년 동안 만들었던 것보다 더 많은 수다. 단결의 무기로 민주적 노동조합을 만들어낸 것이며 그 깃발아래 뭉친 것이다.

마산 삼미금속 여성노동자들의 투쟁.
투쟁의 방식도 파업과 시위를 기본으로 했다. 일단 식당이나 운동장에 모여 파업에 들어가면 노동자의 힘에 눌린 자본측이 협상테이블에 앉는 식이었다. 노동관계법의 절차를 무시할 정도로 힘이 있었고, 힘이 곧 '법'이 되었다. 전체 노동자가 기계를 멈추고 운동장에 집결해 집회하는 가운데 교섭을 하고, 바로 보고하는 방식. 이것이 바로 당시 노동자가 택한 쟁의 절차였다.
정권과 자본가들이 '급진세력, 불순세력, 외부세력, 난동자' 운운하며5) 악선전과 공권력 투입으로 대응하자, 사업장의 담을 넘어 지역별, 재벌 그룹별, 산업별로 연대투쟁을 하거나 거리투쟁을 벌였다. 8월 17일 울산에서 6개 사업장의 현대노동자들이 대규모 연합시위를 벌였다. 다음날엔 현대중공업 정문을 출발한 6만여 노동자들이 "어용노조 타도하고 민주노조 쟁취하자"고 목이 터져라 외치며 '아리랑 목동'을 부르면서 남목고개를 넘었다.
마산 수출자유지역에서는 여성노동자들이 투쟁의 대열에 앞장섰고, 창원공단에서는 지게차를 밀고 대로로 나왔다. 광산 노동자들은 철로를 점거했고, 인천에서는 회사측의 구사대 탄압에 맞서 고속도로로 뛰쳐나왔다.
농성 프로그램도 알찼다. 영창악기 노동자들은 아침 7시 기상 - 시위 - 휴식 - 장기자랑 - 투쟁결의 - 투쟁방침 발표 - 오락 - 노래배우기 - 조합원 교육 - 과별 토론 - 촌극 발표 - 공동 그림 그리기 - 하루 투쟁 평가로 농성을 진행했다. 가족 참여 프로그램은 기본이다.

한마디로 '폭발적' 투쟁이었다. 이석규 열사 장례식 이후 전면적 탄압으로 투쟁을 진압하던 때인 9월 3일 동아일보에는 '어젯밤 현대근로자 시청 차량, 기물 부숴'라는 기사가 실렸다. 노동자들이 밤새 중장비를 앞세우고 시내에서 투쟁한 것이다. 많은 노동자가 투쟁 과정에서 구속되기도 했다. '과격근로자 100여 명 구속영장. 검찰 방침. 방화, 파괴, 소요죄 적용 검토, 어제 총 5백8명 연행, 현대 대우 시위배후 등 30명 수배'라는 제목 하에"방화 파괴 폭력 등 극렬 난동을 더 이상 방관할 수 없다고 판단, 치안 차원에서 공권력의 적극 개입을 선언한 첫날인 4일 하루 동안 대우자동차 부평공장 울산 현대중공업 서울회사택시 인천 영창악기 등 전국 9개 노사분규 현장에서 폭력 난동 주동자와 적극 가담자 등 5백8명을 연행, 조사중이다." (9월 5일 동아일보 )


8월 18일 현대중공업 정문을 출발하고 있는 노동자들.
87년 대투쟁이 밑으로부터 폭발적으로 일어나 노동조합 민주화로, 지역조직 결성으로, 나아가 전국 조직 건설로 결실을 보게 된 요인 중 하나는 1980년 광주항쟁 이후 '주체'에 대한 고민을 시작한 사람들이 현장으로 들어가 그 활동과 힘을 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일부는 골방에서 논쟁을 하는 사이 대중들의 투쟁을 맞아 어찌할 줄 모르는 상황에 처하기도 했지만, 직업훈련소를 거쳐 울산으로, 창원으로, 그리고 수도권 곳곳으로 들어가 함께 투쟁한 사람들이 있었다. '외부 불순 세력', 대학물 먹었다는 이유로 일터에서 쫓겨나 해고투쟁을 전개한 사람들. 어떤 사업장에서는 노동자들이 '외부세력 몰아내자'는 구호를 외치기도 했다. 그러나 87년 대투쟁 과정에서 이 '외부세력'에 대한 노동자들의 인식이 바뀌었다. 노동자 스스로 '불순세력'이 되어가고 있었고, '외부세력'과의 연대틀을 만들어간 것이다.

노동자들은 투쟁하면서 언론의 본질도 깨달았다. 초기 언론은 노동자 투쟁에 대해 아예 보도조차 하지 않았다.6) 그러다가 7월 말경에야 파업소식을 전한다. 노동자 투쟁이 지칠 줄 모르고 번지고 그 힘으로 지지를 얻어내자 보도 태도가 달라진 것이다. 열악한 노동조건 등에 대해 취재해서 그나마 노동자 현실을 보여주는 기사 등이 실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한 달 정도 지나 대우조선 이석규 열사의 죽음 전후 언론은 자본과 정권의 요구를 그대로 반영한다. '이제 그만하자.'
게다가 왜곡보도로 노동자를 패는 게 언론이었다. 언론의 왜곡보도가 어찌나 심했던지 연대 단체들은 각종 자료집까지 만들었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도시농어촌선교위원회에서 만든 『노동자 인권탄압과 언론의 왜곡보도』, 인천 공실위 외 단체들이 만든 『노동운동에 대한 언론 왜곡보도 사례집』등이 그 예다. 광산에서는 'KBS 시청료를 내지 말자'는 거부운동도 전개했다.7)

무엇을 얻었을까

노동자는 87년 여름의 대투쟁을 통해 무엇을 얻었을까. 가장 큰 것은 '노동자' 선언이다. '공돌이', '공순이'로 천대하고 비하하던 말을 털어 버린 것이다. 노동자가 생산의 주체이며 이 사회의 주인이라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민주노조운동'을 튼튼히 했다. 어용노조를 몰아내거나 민주노조를 세웠다. 지역에서 전국에서 몸으로 연대하는 기풍을 만들었고, 그 힘으로 연대조직 건설의 기반을 만들었다. 민주노조운동의 이념으로 '자주성, 민주성, 투쟁성, 연대성'을 뿌리내리게 했다.


노동자는 자신의 문화도 만들어냈다. 노동문학, 노동자의 시, 노동자의 노래, 노동자의 그림, 노보 등. 서투르고 투박하지만 노동자는 자신의 목소리를 담아 노보를 찍어 돌리면서 절박함, 기쁨을 맛본 것이다.
서점에서는 '노사관계' 관련 도서 판매 부수가 증가했다. 사회 전체에 새로운 주체인 '노동자'를 등장시켰다.8)

법과 제도 변화의 가능성도 열었다. 민정당은 8월 28일 당노동특별위원회를 열고 "현행노동조합법 중 30인 이상 또는 5분의 1이상으로 되어 있는 노동조합설립요건을 삭제하고 노동쟁의조정법의 쟁의행위 제한 대상중 국공영기업체를 삭제하고 방위산업체도 특별조치법으로 지정한 업체를 제외하고는 쟁의행위가 가능토록 법을 개정키로 했다. 이날 민정당이 개정키로 한 노동조합법 개정안에 따르면 노동조합결성 신고증 교부기간을 현행 30일에서 2일 이내로 단축하고 노조임원결격사유 규정을 삭제하며 현행 법령위반 및 공익을 해할 염려가 있을 때 시정지시를 하고 시정지시를 이행하지 않을 때 행정관청이 노조를 해산 또는 임원개선명령을 내릴 수 있도록 한 규정도 삭제키로 했다. 또 상급노동단체에 위임할 때 조합원 과반수의 동의 및 행정관청에 신고토록 한 현행 규정을 고쳐 총회나 대의원대회 결의에 의해 위임이 가능토록 했으며 단체임금협약의 유효기간은 현재 3년을 넘을 수 없도록 하고 있는 규정을 고쳐 1년으로 단축키로 했다." (1987년 8월 29일 동아일보 1면)

투쟁을 통해 노동악법을 개정할 가능성을 본 노동자들은 이후 이 힘을 모아 지역과 전국 차원으로 연대하여 노동법개정투쟁을 벌인다. 민주노조 건설의 걸림돌이었던 복수노조금지, 연대투쟁의 장애물이었던 제3자개입금지 등 투쟁 과정에서 알게 된 악법을 스스로 없애버리겠다는 투쟁으로 이어진다. 이때도 법 개정 자체만을 목적으로 삼지 않았다. 노동법개정투쟁은 87년 대투쟁 이후 ILO공대위 활동까지 민주노동운동진영의 연대의 틀을 만들어가는 데 가장 확실한 매개로 작용했다.

20년 돌아보기

노동자대투쟁은 6월 항쟁의 투쟁과정을 통해 '민주주의'에 대해 알게 된 노동자들이 자신의 생활공간 전체, 사회 전체를 바꾸기 위해 벌였던 투쟁이었고, 이를 계기로 노동자는 사회 전면에 등장할 발판을 만들었다.
그런데 20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고등학교 근현대사 교과서에서는 "1987년에는 6월 민주항쟁을 계기로 노동자의 힘을 세상에 알리기도 했다. 이를 계기로 노동운동이 기업뿐만 아니라 금융기관, 병원, 정부투자기관까지 확대되었다."라는 정도로 서술하고 있다.
21세기 대안교과서를 자처하는 교과서에서는 좀 길게 서술하고 있다. 6월 항쟁에 대해 두 쪽 정도 할애하고 있고 그 중에 노동자들의 투쟁에 대해서는 "6월 항쟁에 참가하였던 민중들은 이후 자신의 생활현장을 개혁하기 위한 활동에 나섰다. 노동자들은 노동조합을 조직하여 자신의 권리를 실현하고자 하였으며, 농민이나 도시빈민들도 조직을 만들어 생존권을 지키려 했다. 교사들은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을 조직하여 교육의 민주화와 참교육의 실현을 위해 나섰다. 이렇게 6월 항쟁은 정치의 민주화에서 그치지 않고, 사회전체의 민주화를 위한 큰 걸음이 되었던 것이다."라고 적고 있다.
우리가 되새기는 의미나 비중과는 사뭇 다르다. 왜 그럴까. 어떻게 넘어설 수 있을까.
노동자대투쟁의 힘에 비해 역사적으로 정리된 것은 적다. 기록을 남기고 보존해야 한다는 인식도 여력도 없다. 노동자가 자기 역사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보존을 미룬다면 누가 그 일을 할까. 자본과 정권은 '노동자'를 드러내길 바라지 않는다. 힘에 밀려 역사 서술의 한 쪽을 할애한다 해도 시혜의 대상, 수동적 존재 정도로 정리할 것이다. 노동자 스스로 할 일이다.

"7ㆍ8ㆍ9 노동자투쟁에 대한 기록을 수집하고 정리하고 보존하면서 역사 쓰기를 하는 것은 그 수준이 이제 첫 걸음마에 불과한 단계에 지나지 않습니다. 노동자가 자기 역사를 기록하고 역사를 쓰는 일은 스스로가 역사의 주체임을, 해방의 주체임을 확인하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오랫동안 노동자들은 자기 역사를 기록하고 쓸 시간도 여력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다릅니다. 과거를 지배하는 자가, 과거를 지배하는 세력이 미래를 지배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제 노동자가 스스로 자기 역사에 관심을 가지고, 특히 7?8?9 투쟁에 관심을 가지고, 자료를 수집하고 정리하고 기록하는 역사 속에 좀 더 많은 관심을 기울여야 할 때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박준성 / www.remember1987.net)

올해는 1987년 6월 항쟁과 7ㆍ8ㆍ9월 노동자대투쟁 20주년이 되는 해다. 여기저기서 계승을 위한 행사를 하고 있다. 이른바 '386세대', 종교인, 시민사회단체 모두 자신들의 처지와 현실에서 당시 투쟁을 돌아보고 있다. 노동자는 어떤 자세로 노동자대투쟁을 현재로 불러올 것인가.
87년 노동자대투쟁 당시 노동자들은 어용노조 민주화, 자본으로부터의 자주, 노동자간 연대를 밑으로부터의 투쟁을 통해 자연스럽게 형성해갔고, 이것은 평등사회를 지향하는 민주노동운동의 이념으로 자리 잡았다. 그 과정에서 새로운 주체가 형성되었다. 공돌이 공순이에서 노동자로. 조직적으로는 민주노조운동의 결집체인 민주노총도 건설했다. 노동자는 지난 20년 동안 한국사회 전반을 변화시키는 주역이었다.
지금의 모습은 어떠한가. 노동자는 당시 지도자가 '뉴라이트운동'에 앞서거나 여당의 일꾼으로 일하는 것을 보면서 지도부에 대한 배신감, 허탈감을 갖기도 한다. 자신들이 갈아엎었던 어용보다 더한 지도부를 선택하기도 하고, 인간답게 살자고 외치던 노동자가 작업장 내에서의 정규직 비정규직 차별에 대해 눈감고 '고용불안 요소'로 인식하기도 한다. 목숨 걸고 지켜온 민주노조가 현실에 안주하고자 하는 조합원을 '대리'하는 조직으로, 투쟁하는 조합원을 '관리'하는 조직으로 변해가고 있다.
무엇이 문제였을까. 87년 노동자대투쟁에 참여했던 한 선배 노동자는 계급성, 지도부와 조합원의 결합, 노동운동의 이념 문제를 지적하고 있다.

"(당시 노동자대투쟁 때보다 지금이 더 힘들고 암담하다고 느끼는 이유는) 뭐라 그럴까 일정하게 성과를 취하니까 보수화 되는 것도 많은 것 같더라구요. 내가 생각할 때는 많이 보수화되고 있는 것 같아요. 노동운동 자체가 초기부터 좀 더 이념적인 측면을 많이 고민되었다면 노동자들이 현실에 적당히 만족하고 이렇게 정체되는 것은 없을 것 같은데, 초기 운동자체의 방향 자체가 너무 실리적인 노동운동을 많이 하다보니까 방향이 치우친 것 같아요. 계급적인 성격이라든가 우리가 전체 민중을 끌어간다는 생각은 굉장히 약했어요. 많은 사람들이 노동조합을 편협하게 바라보고, 경제적인 안정이 되니까 보수화되는 모습이 많다고 봅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87년을 좋게만 생각할 수도 있고, 세세하게 뜯어보면 그렇지 않은 것도 있는데, 하여튼 중요한 거는 그런 것 같아요. 결국은, 운동하면서 많이 느꼈는데, 대중과 함께 하는 것, 그게 중요하지 않느냐는 거죠. 그게 수준이 높든 낮든 대중이 참여하는 방안을 강구하고, 성장하고, 대중이 참여하고, 대중이 끌어가는 노동운동이 전망을 갖지 않겠느냐, 물론 거기는 대중을 무조건 쫓아가는 것은 아니고, 성장하도록 지원해야겠죠. 대중을 대상화시켜 따라와라 이런 운동은 힘들겠다고 봐요. 그때는 자연발생적이었지만 지금은 자연발생적인 것에다가 조금 더 이념적인 것을 결합시켜 질적으로 높은 대중 참여를 이루어야 되는 것 아니냐, 지도부가 끌어가고 대중들에게 지시하고 지침을 내리고 이런 운동은 한계가 많겠다는 생각이죠."(천창수 전교조 조합원 / www.remember1987.net)

87년 노동자 대투쟁의 경험을 되새기며 민주노조운동 진영은 주체형성, 조직적 틀, 이념과 실천의 문제를 볼 필요가 있다. 비정규직 노동자가 스스로를 노동운동의 주체로 형성해가고 있는 시점에서 민주노조운동진영은 비정규 노동 철폐, 노동기본권 쟁취를 실천적 과제로 놓고 투쟁할 것을 요구받고 있다. 민주노총의 산별 재편방향도 비정규직 노동자 조직화를 그 중심에 두어야 한다. 아울러 노동자들이 밑으로부터 형성된 연대의 틀로 지역조직을 만들었던 의미를 되새겨보아야 한다. 자연스럽게 단결하고 연대할 수 있는 틀이기도 하고, 비정규 미조직 노동자를 조직하는 데는 더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다.

노동자가 민주노동운동의 이념으로 만들어낸 자주성, 민주성, 연대성, 계급성은 지난 20년 활동을 평가하는 잣대이자 이후 활동의 방향성을 잡는 기준이기도 하다. 늘 외치던 것이지만 어느새 빛 바래 가는 원칙들을 다시 세우는 일. 그럴 때 노동자는 과거를 추억하는 '기념'이 아니라 현재를 돌아보고 미래를 설계하는 진정한 '역사'를 가지게 될 것이다.


1) 이 글을 쓰는 데 참고한 1차 사료들은 '노동역사관 1987' (www.remember1987.net)에 데이터베이스화 된 것을 활용했다. 이 홈페이지는 노동운동자료 보존을 주요 사업으로 하는 단체들이 모여 87년 노동자대투쟁 자료를 수집, 정리, 홍보하기 위해 만든 것이다. 참여하는 단체는 민주노총정책연구원 노동운동자료실, 노동운동역사자료실, 성공회대 민주화자료관, 노동사회교육원 마창노련자료실, 노동네트워크, 노동자정보통신지원단, 노동자의 책 등이다.본문으로
2) 기존의 6월 항쟁 연구에서는 '노동자'의 요구나 움직임에 대해 주목하지 않았다. 6월 항쟁 기간 동안 노동자들의 투쟁에 대해 1차 자료를 중심으로 정리한 글은 유경순,「6월 항쟁 속의 노동자투쟁 돌아보기」, 노동조합기업경영연구소,『민주노동과 대안』2004년 6월호 통권70호 참조.본문으로
3) 삼성제약 노동자, 「민주노동자, 시민 여러분께 드리는 글」, 1987. 8. 28. - 서울본문으로
4)가톨릭 광산노동사목협의회 천주교 원주교구 정의평화위원회,『광부의 외침』 3호, 1987. 7. 1. - 강원도 삼척 도계본문으로
5)1987. 8. 11. 현중 이만 사천 노동자에게 드리는 글 -현중 노조개편 대책위원회본문으로
6)노동자대투쟁에 대한 언론의 보도 태도에 대해서는 노항래, 「언론을 통해 본 87년 노동자대투쟁」, 『노동사회』 14호본문으로
7)"KBS 시청료를 왜 내지 말아야 하는지 더 말할 필요가 있을까? 이제 누구든 다 알고 있는 문제라고 생각된다. 한마디로 KBS 시청료는 무조건 내지 않으면 되는 것이다. 그게 잘하는 것이다. 편파보도와 왜곡보도, 통제된 언론에 의해 우리의 입과 귀가 철저히 유린당하고 있는 현실에 대한 항거운동이기에 시청료납부거부운동은 정당하다. 그것은 인간자유의 회복운동이기에 숭고하기까지 하다. KBS는 온 국민을 삶에서 소외시키고 있다. 호화찬란한 스포츠 중계나 호화쇼, 호화스런 차림으로 나오는 연예인들, 퇴폐적이기까지 한 작태들이 공공연히 방영된다. 이른바 국민을 바보로 만들어 자기네들 독재정권유지를 지속시키자는 우민화정책이다. KBS가 진실을 있는 그대로, 있는 그만큼 보도한 적이 있는가?"(『광부의 함성』제3호)본문으로
8) "잇달아 노사분규가 일어나고 있는 가운데 서점가에도 노사관계에 대한 책을 찾는 고객이 부쩍 많아졌다. 종로서적 염상규 차장은 '요즘 들어 이들 책을 사가는 고객이 하루 평균 100명 정도며 사가진 않지만 그냥 들춰보거나 베껴 가는 사람만도 50명은 된다.'고 말했다. 현재 교보문고나 종로서적 을지서적 등 큰 서점에 진열돼 있는 노사관계 책은 70여 종. 이들 중엔 신간도 많지만 분위기를 타고 전에 나왔던 책들이 다시 복간된 경우도 많다." (1987년 8월 25일 동아일보 12면)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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