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광주전남지부


사회운동

사회진보연대 계간지


2000.11.1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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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료의 공공성 부재가 초래한 비극

박형근 | 민중의료연합
보건의료체계의 출발: 공공 영역의 실종

자본주의체제에서 보건의료에 대한 국가의 개입은 노동자 민중의 요구를 체제내적으로 순화하기 위한 정치적 필요에 의해 정당화되어왔다. 소비에트 혁명의 성공, 그리고 공황으로 대표되는 자본주의체제의 구조적 모순이 반복되는 상황에서, 체제수호를 위해 자본은 한발 양보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총자본의 이해를 대변하는 '국가'의 이름으로 보건의료시장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였던 것이다. 이 역사적 배경 속에 이루어진 국가개입의 모습은 서구 자본주의 국가는 물론, 2차대전 후에 독립한 대부분의 신생 자본주의국가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런데, 왜 해방 후 우리의 역사에선 국가가 이러한 역할을 수행한 흔적조차 발견하기 힘든 것일까? 이는 분단이라는 우리 현대사의 특수한 상황에서 그 해답을 찾아야 한다. 해방 직후 이 땅에는 민중의 건강에 대한 국가의 책임을 자신의 정치적 내용으로 하는 다양한 정치세력이 분명 존재하였다. 하지만, 한국전쟁 이후 이와 같은 정치세력이 소멸됨에 따라 보건의료에 대한 국가 책임의 목소리는 희석되어갔다. 그리고 민중들의 생존권과 기본권에 대한 요구는 '빨갱이'라는 언명 속에 철저하게 억압되고 통제되었다.
1960년대를 거치면서 국가의 보건의료정책은 새로운 국면을 맞는다. 북한이 발빠른 전후 재건과정을 거치면서 무상의료체계를 수립하였고, 이를 체제 우위의 주요한 선전수단으로 활용하였다. 이러한 상황은 민중의 터져나올 것 같은 열망을 잠재울 수 있는 '당근'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인식케하는 계기가 되었다. 여기에 기반하여 박정희 정권은 사회보험 체계로서 의료보험을 서둘러 도입하였으며, 1977년 최초의 사회보험 체계로 의료보험이 이 땅에 도입되었다. 이후 의료보험은 이 땅을 뜨겁게 달구었던 1980년대의 민주화와 더불어 전국민을 대상으로 급속하게 확대되었다. 그러나 보험 대상은 확대되었지만, 국가나 지방단체가 투자하여 새로 신설된 의료기관은 전무하였다.

그 틈새에서 민간 병·의원들이 급성장하여, 지금은 전체 의료기관의 90%이상을 이들이 차지하고 있다. 1990년대 초까지도 의료보험공단이 지급하는 비용은 진료비 총액의 30%정도밖에 안되었고, 의료보험 재정에 대한 국가의 지원마저 미비했던 점을 고려해보자. 그렇다면, 그간 의료기관 설립과 장비구입에 든 자금 원천은 철저한 이용자 부담의 원칙하에 국민들 주머니에서 나온 돈이라고 할 수 있다. 전국의 병·의원의 규모와 위용을 보면 그 동안 이 땅의 민중들이 자신의 건강을 위해 감내했을 부담을 헤아리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결국 전국민 의료보험이 시행되기까지 우리 현대사의 특수한 정치지형 속에서, 국가는 보건의료에 대해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않은 채 체제 안정화를 위한 최소한의 개입만을 해온 것이다.


신자유주의적 개편전략으로서 국가의 개입

전국민 의료보험이 실시될 무렵, 사회주의권이 몰락하면서 동시에 전세계적으로 신자유주의 질서가 강화되어 갔다. 이시기 우리 경제는 고도성장을 지속하였고, 많은 사람들이 경제 성장의 과실을 누리게 되면서 체제에 대한 위협은 점차 불식되었다. 또한, 북한의 실상이 점차 드러나면서 분단상황에서 체제대립이 갖는 의미도 희석되었다. 그러나, 1990년대 중반을 넘어서면서 다른 문제들이 부각되기 시작하였다.
우선 보건의료체계가 민간중심으로 발전해오면서 이로 인한 여러 가지 비효율성의 문제가 나타났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보건의료비의 증가이다. 국가의 입장에서 보건의료비 증가는 국가경제에 잠재적 부담요소이다. 현재 우리나라 국민의료비는 GDP대비 6%수준으로 결코 높은 편이 아니지만, 문제는 그 증가속도가 만만치 않다는 데 있다. 국가로서는 연 15%이상씩 뛰는 보건의료비를 그냥 방치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둘째는 정부는 신자유주의 구조조정 과정에서 그 충격을 완화하기 위해 사회안전망을 구축하는 일을 시급히 요구받게 되었다. 보건의료체계는 노동시장의 유연화로 비롯되는 사회의 잠재적 불안요인을 달래기 위한 사회안전방의 한 축을 차지하고 있다. 하지만, 지금의 우리 보건의료 체계는 사회적 안전망으로서 제 역할을 기대하기에는 비효율적인 요소가 너무 많다. 외환위기 당시 차관을 매개로 세계은행이 우리나라의 보건의료 개혁을 주장한 것도 동일한 맥락에서이다.
이와 같은 상황을 고려할 때, 국가의 개입은 보건의료의 공공성 확대나 건강권 보장과는 거리가 멀 수밖에 없다. 이는 정부의 여러 정책에서 잘 드러난다. 의약분업 사태로 인한 의료대란에서 제몫을 발휘한 공공의료기관에 대해 적자경영을 이유로 민영화하거나 책임경영기관화 하려는 시도가 최근 몇 년간 끊임없이 계속되어 왔다(목포 결핵병원 매각과 수원의료원 민간위탁, 안성의료원과 군산의료원의 위탁운영, 국립의료원의 책임경영기관 체제). 그리고 1988년 민중 투쟁의 결과물로 쟁취한 지역의료보험에 대한 국고지원 50%지원 약속도 이행되지 않아 지금까지 국고지원 미납액의 규모는 총 5조 3천억에 이른다. 결국 의료보험의 재정위기는 바로 정부가 그 책임을 방기하여 나타난 것이다.

하지만, 정부는 이 문제를 국고지원 확대를 통해 근본적으로 해결하려 하기보다는 오히려 민간보험의 도입을 통해 돌파하려는 의지를 노골화하고 있다. 보험재정 위기국면에 대처하기 위해서 올 4월 규제개혁위원회를 통해서 민간보험의 도입을 적극 추진할 의사를 공식화하였고, 현재 한국보건사회연구원에서 민간의료보험 도입방안에 대한 연구가 진행 중이라는 점이 그 증거들이다.
보건의료에 대한 국가의 책임방기는 부메랑이 되어 돌아오고 있다. 현재 추진중인 의료개혁의 발목을 잡는 것은 국가 기능부재의 틈새에서 50년 이상 고착화된 전근대적 질서와 거미줄처럼 복잡하게 얽혀 있는 이해관계가 아닌가? 영리추구의 민간자원 구조에서 비롯되는 통제불능의 무한경쟁체제 위에서 추진되는 효율화 전략은, 첨예한 이해관계의 덫에 걸려 그 성공마저도 불투명해 보인다. 이제 보건의료에 대한 국가의 태도가 근본적으로 바뀌어야 한다. 그 변화를 거부한다면 언젠가는 그 결과가, 더 큰 위협으로 다가올 날이 분명히 있을 것이다.


의료개혁에 개입하는 시민단체의 오류

보건의료 현안에 대한 시민단체의 개입이 최근 들어 부쩍 늘고 있다. 국민들이 갖고 있는 보건의료서비스에 대한 불만의 수위가 매우 높기 때문에, 의료계의 잘못된 관행을 폭로하고 이에 기반한 도덕적 정당성을 확보하게 되면 국민적 지지를 얻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은 아니다. 나아가 그 토대 위에서 정부나 이해당사자의 관계에 개입하여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낼 수 있다면 시민단체는 우리사회에서 더욱 확고한 지위를 차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의약분업 사태에서 보듯이 시민단체의 이러한 활동은 커다란 장벽에 부딪치고 있다.

이런 상황이 발생하게 된 근본적인 이유는 사회적 합의 이전에 전제되어야 하는 국가의 적극적 역할, 즉 보건의료의 공공성 확보에 대하여 그들이 침묵하고 있는 데 있다. 무질서한 민간자원중심의 보건의료체계에서 건강권 보장을 위한 최소한의 조치로서 포괄적 급여 제공이 이루어지고, 이해당사자의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많은 재정과 정책적 노력이 수반되어야 한다. 그런데, 시민단체는 사회적 합의 이전에 담보되어야 할 국가 역할에 대해서는 애써 외면해 버렸다. 그러다 보니 우선시되어야 할, 국가를 상대로 하는 투쟁은 방기한 채로 무능력한 정부를 대신하여 사회적 합의를 도출하려는 노력은 이해당사자의 반발에 부딪히게 되었다. 그 상황을 도덕적 우위에 의존하여 돌파하려고 노력했지만 시민단체에게는 그럴 만한 힘이 없었다. 제대로 된 국가의 역할을 강제할 투쟁을 간과한데서 명분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소아과학회 추계학술대회에서 의약분업에 적극적으로 개입했던 경실련 사무총장이 행한 고백에 잘 나타나 있다(의협신보, 2000년 10월 26일자).

"... 사무총장은 선진국형 의약분업을 실시하려면 합리적인 의약품 유통체계의 확립과 선진국형 의료재정의 확보 등이 전제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이에 대한 아무런 준비 없이 개혁이라는 이름으로 무책임하게 의약분업을 강행했으며, 시민단체는 의약분업 시행에 따른 정부의 무책임하고 무원칙한 행동에 효과적으로 대처하지 못함으로써 결국 준비안된 정부정책의 시행을 뒷받침한 것으로 비춰진 점은 반성해야 한다고 밝혔다. 의료계에 대해서는 당초의 합의정신을 외면하고 병·의원 휴·폐업에 돌입함으로써 의약분업 파행에 일조했다며, 정부, 의료계, 시민단체 모두 깊은 반성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공적 의료체계의 강화로 나아가야

일련의 보건의료현안을 둘러싼 사태는 그 동안 누적된 국가의 책임 방기에 그 근본 원인이 있다. 지난 50년 동안 왜곡된 질서에서 고착화된 현실적 이해관계의 장벽 앞에서 '합리적 시장질서'를 구축하려는 시도는 심각한 위기를 맞고 있다. 뿐만 아니라 시민단체를 앞세워 의료개혁을 조장하면서 한 발 물러서 관망하던 권력의 핵심마저도, 개혁의 피로감에 젖어들어 철저한 '시장과 경쟁'의 논리로 급선회하려는 조짐이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민간의료보험 도입과 관련된 움직임이 부쩍 활발해지고 있는 상황이다. 이에 맞서는 길은 공적 의료체계의 강화로 나아가는 길 밖에 없다. 설득력 있는 대안으로서 공적 의료체계의 구체적인 상을 만들어 가기 위해서는 많은 논의와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진보진영이 적극적으로 힘을 결집해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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