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광주전남지부


사회운동

사회진보연대 계간지


2000.11.1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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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에서 뺨맞고 만보걷기한 이야기

김준근 | 광주진보연대, 전남대 사회학과 석사과정
'새로운 대안을 보여줄 수 있겠지'

야간 열차를 타고 서울에 도착해 보니 아직 동틀 무렵도 멀었다. 10월 20일 서울행동의 전야제가 열리고 있는 숭실대에 다다르니, 이미 많은 동지들이 내일 행동을 위해 몸을 부대끼며 새우잠을 청하고 있었다. 서울에서는 아셈반대를 위해 벌써 많은 투쟁을 이어왔다고 한다. 10월 16일에는 일본계회사 오므론 앞에서 한·일 투자협정에 반대하는 집회가 있었고, 18일과 19일에도 노동법 개악을 저지하기 위한 경총 앞 규탄집회, 신자유주의 정책에 의한 불안정 노동에 항의하는 집회가 이어졌다고 한다. 며칠을 이어 달려온 사람들. 세계 각국에서 보여준 신자유주의 세계화 반대투쟁의 정신을 서울로 잇기 위해, 새벽녘에도 전국 각지에서 속속 사람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내일 아침 날이 밝으면 우리도 이들과 함께 신자유주의가 아닌 '새로운 대안이 있다(There is new alternative)'는 사실을 보여줄 수 있겠지.


위에서 내려다보고 밑에서 올려다보고

정말이지 놀러가기 좋은 날씨였다. 그 높고 푸른 가을 하늘에 헬기가 없었다면 난 헛생각을 했을지 모른다. 깨끗한 현대식 건물(뱅뱅사거리 한국중공업 본사) 앞에서 쪼그려앉아, 밤새 타고 온 기차 때문에 지친 육신을 그대로 가라앉히고 눈을 감고 헛생각을 했을지 모른다.
내 깜빡잠을 끈질기게 깨운 것은 투쟁을 호소하는 앰프의 거친 목소리가 아니라, 끊임없이 내 머리 꼭대기에서 나를 내려다보면서 투덜거리는(?) 경찰 헬기였다. 다른 것은 잘 안 보여도 경찰이라는 글씨는 너무나 선명하게 잘 보였다. 전경이 이미 까맣게 와 있었지만, 헬기에 써진 글씨를 보고 사방을 둘러보니 온통 경찰 뿐이었다. 검은 것은 폴리스이고 컬러풀한 것은 사람이었다. 징하게도 많았다.
헬기 운전수(?)는 우릴 보고 비웃겠지. 자기 발 아래에서 웅성되는 인간들-전경들과 우리들은 자기와는 종족이 틀린 인류일 것임을 확신하면서…. 어쩌면 헬기 운전수보다 더 높이 우리 머리꼭대기에 앉아있는 28명의 정상(?)들은 이렇게 주먹쥐고 앉은 우리와는 다른 인류인지 모른다. 서로 다른 인간들. 위에서 내려다보기와 밑에서 올려다보기. 신자유주의!!! 그들 멋대로 생각하기!!! 아!!! 얼마만큼 높이 올라갈 수 있을까? 내가 생각한 높이만큼 그들은 아래의 깊이를 생각할까?


투쟁을 다루는 저들의 방식

헬기는 계속 날고 우리들은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가야 한다. 삼성동 무역센터에 있는 아셈회의장에 가서 아래의 깊이를 보여주어야 한다. 헬기운전수보다 더 높이 앉아있는 정상들을 우리들의 삶의 깊이로 데리고 와야 한다. 겨우 도로 2차선만 허용(?)해준 경찰들. 그들이 들고 선 특수플라스틱으로 가공된 방패가 자연스럽게 내 어깨를 스친다. 언제까지 허용(!)해 줄 작정인가?
행진하는 곳곳에서 몸싸움이 일어난다. 방패가 날아오고 곤봉이 바람소리를 낸다. 더 이상 노벨평화상을 이야기하면 오히려 대한민국 경찰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순금으로 만든 평화상 메달에 노벨의 초상화를 지우고 시커먼 철망 헬멧을 그려라!!!

심한(?) 몸싸움을 하는 도중에 갑자기 달려든 그 분기탱천한 곤봉이 하필이면 내 빰을 때리고, 오른손 손목을 내리치면서 사라졌다. 내 옆에 있는 동지는 머리를 맞고 얼굴이 피범벅이 되어서 주저앉았다. 주위를 둘러보니 전경들은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반듯하게 방패 뒤에 서 있고, 행진은 계속되고 있었다.
야, 이거 골치아픈 싸움이구나! 싸움을 하려면 제대로 해야 하는데, 과격분자(?)는 곤봉으로 때리고, 앞만 보고 걸어가는 사람(?)은 그냥 내버려두고…. 이것이 체제내화된 투쟁과 그렇지 않은 투쟁을 다루는 저들의 방식인가? 몸을 추스려 동지들이 있는 곳으로 갔다. 다행히 민중의료연합 동지들이 있어서 현장에서 응급조치를 할 수 있었고, 난 정해진 행진코스를 체제내화된 방식(?)으로 걸을 수 있었다. 어느 정도 가다가 행진대열은 강남역 앞에서 멈추어 서있어야 했다. 여기까지가 경찰의 허용범위였다.

강남역을 끼고 오른쪽으로 돌아 그냥 직선으로 뛰어가기만 하면 아셈타워가 나온단다. 어찌할 바를 모르고 분위기가 뒤숭숭한 가운데, 연행자가 있다는 얘기가 들리고, 봉고버스 위 사회자는 모두 앉아서 동지들이 풀려날 때까지 농성을 하자고 한다. 그러나, 사회자의 비장한 다짐은 채 1분도 지켜지지 못했다. 황당하게도 다음 집회장소로 옮기기 위해서 여기서 해산해야 한다는 지도부(?)의 방침이 전해졌기 때문이다. 그 사이 연행된 동지들이 풀려난 걸까? 부어오른 내 뺨은 창피하게 더 붉어지고 말았다.


더 늦으면 아셈회의는 끝나버린다!

점심을 먹고 올림픽 공원으로 갔다. 버스로 가는 도중 삼성동 아셈회의장을 지나갔다. '성벽화된 요새'처럼 그 곳에는 노란 바리케이트가 쳐져있었고, 그 안에는 장갑차, 소방차, 닭장차, 페퍼포그 같은 특수한 차와 경찰같은 특별한 인간들만 있었다. 이런 특수하고 특별한 것들의 정상(?)들은 역시 보이지 않았다. 왜 나는 그들을 볼 수 없을까? 나도 60억 지구인구 중에 누구와도 대체할 수 없는 특이성을 지닌 인간 중 하나인데…. 버스에서 내리니 올림픽 공원에는 이미 꽤 많은 사람들과 단체들이 모여 있었고 매향리폭격장 폐쇄를 위한 집회를 열고 있었다. 우리는 대열 뒷쪽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약국에서 사온 마데카솔 연고를 뺨에 바르고 붕대감은 손을 만지작거리는데, 매향리폭격장폐쇄 집회가 끝나고, "아셈2000 신자유주의 반대 서울행동의 날" 본집회가 시작되었다.

아! 이것이 진짜구나! 집회를 하는데 진짜가 있고 가짜가 있겠느냐만은 오전 집회의 아쉬움(?)을 달랠 겸 이렇게 생각하고 제대로 된 한판, 우리의 힘을 모아서 장갑차를 빵구(?)낼 위력을 상상해보았다. 그만큼 우리는 오랜만에 많이 모였다. 그리고 정말이지 오랜만에, 나는 일어서서 인터내셔널가를 불렀다. '깨어라 노동자의 군대, 굴레를 벗어던져라…' 아! 바로 이 노래가 끝남과 동시에 아셈회의장으로 달려가고 싶었다. 이 가슴찡한 기분으로 달려가고 싶었다.
그러나 대회사를 들어야 했고, 외국 참가자의 연대 연설을 들어야 했고, 신자유주의 반대 서울선언문을 다 읽을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우리는 존경받는 유명한 활동가를 보기 위해서, 외국 NGO활동가의 이야기를 통역으로 듣기 위해 여기에 모인 것이 아니었다. 신자유주의로 인해 스스로의 삶 자체가 너무나 위태롭고, 그래서 날마다 TV에서 아셈은 유럽과 아시아 국가들의 평화와 공존을 위한 행사라고 우아하게 떠들어대는 게 너무나 역겨워서, 당장 그 거짓을 박살내고 참자유와 인민의 다양한 삶이 충분히 보장되는 평등세상을 만들겠다는 의지로 여기에 모인 것이다. 오전 집회를 오후 본집회를 위해 아꼈다면, 지금 우리는 연설을 듣고 있을 여유가 없다.

더 늦으면 아셈회의는 끝나버린다. 그 전에 삼성동으로 달려가서 악쓰고 돌아다녀야 한다. '당신들의 생각은 순전히 너희들만의 잘못된 생각이고 회의이므로 지금 당장 멈춰라! 남한 민중을 비롯한 각국 인민들의 삶을 논의하는 자리가 아니면, 아까운 돈과 전기를 그만 쓰고 사라져라! 그리고 보아라, 세상 일이 너희들이 맘 먹은대로 전부 그대로 되는 것은 아니다!'


그들만의 세상은 더 커지는데

나는 조급함(?)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데 4시가 넘어 '앉아서 하는 집회'가 끝나고 순서(?)를 정해서 행진을 시작했다. 걷다보니 해가 기울어 어둠이 밀려오는 것을 보고 성질이 났다. 도대체 무얼 하자는 말인가? 아무튼 삼성동 아셈회의장 근처-잠실경기장 앞에까지 도착. 얼마 전부터 집회를 하면 생기는 폴리스 라인을 지키며 열심히 따라온(?) 우리들은 경찰이 쓰레기차로 만든 거대한 바리케이트 앞에서 멈췄다. 약간의 몸싸움이 있고, 곧바로 정리집회가 시작되었다. 앰프에서 우리들의 오늘 투쟁은 역사에 남을 것이라는 이야기가 들리는가 싶더니, 한 연사가 본집회가 평화적으로 끝나서 너무 다행스럽다고 말에는 그만 피가 거꾸로 솟았다. 그렇게 집회가 정리되었다.

마치 아셈 본회의가 끝나는 시간에 맞추려는 것처럼 말이다. 내 참, 어이가 없다. 더 이상 가지 못하게 한다고 우리가 안 갈 이유가 없었다. 바리케이트를 부수든지, 돌아가든지, 흩어져서 다시 모이든지, 아니면 아예 드러눕든지 해야 할 것이 아닌가? 그 날씨좋은 낮 시간에는 모여서 연설이나 듣다가 이게 뭔 꼴인가? 아, 차라리 아까 낮에 삼성동에서 버스에서 내려 혼자라도 뛰어갈걸…. 이렇게 그들만의 세상은 진보(?)하는구나!!!
내려오는 길에 터미널까지 가는 지옥철은 역시 사람을 죽여주더군!!! 난 왜 강남에서 빰맞고 이제 와서 광주에서 지랄하나!!!

나중에 들은 이야기이지만 아셈회의에 NGO들을 위한 사회포럼인가 뭔가를 설치할 계획이라고 한다. 누가 사회포럼 설치해 달라고 그 고생해가며 여기까지 걸어왔단 말인가? 아셈이 신자유주의 세계화를 확산시키기 위한 기구라는 것은 누가봐도 자명한 일이거늘, 어째 지도부들은 그렇게 혼란스러워 하는가? 화려한 수사와 다양한 악세사리에도 불구하고 아셈의 성격을 규정하는 것은 단 한줄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왜 애써 외면하려고 하는가?

다음날 아침, 부은 얼굴을 감싸고 아셈 폐막식을 중계하는 TV를 보는데, 김대중의 폐막 연설이 나의 귀를 스치고 지나간다.

"정상들은 가능한 한 조속히 뉴라운드 협상을 출범시키기 위한 노력을 다른 WTO 회원국들과 함께 강화할 것에 합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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