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광주전남지부


사회운동

사회진보연대 계간지


2001.1-2.1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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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패권은 과연 지속될 것인가?

피터 워터맨(Peter Waterman) |
<b>서론</b>

나는 이 문제에 대하여, 나 스스로 이 질문을 과거 20여년동안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리고 그 사실에 대해 개인적으로 의아해하고 있기에 한 번 대답해보려 한다. 내가 만일 50년도 전에 처음으로 반미시위에 참가하였고 그 이후로부터 미 패권에 대항하여 싸워왔다면 거기에는 반드시 무언가 좋은-또는 중요한-이유가 있지 않을까?
15년전 호주의 좌파학자인 밥 오코넬이 한 말이 기억난다. 국제적 지배계급의 개념에 대해 논하면서 그는 무소불능의 힘은 존재하지도, 존재할 수도 없다고 말했었다. 그는 그것보다 국제적 자본주의의 헤게모니를 안전하게 하는 요인은 헤게모니의 유일성이 아니라 억압받고 착취 받는 이들의 분열이라고 이야기했었다. 나는 분명히 이 말을 가슴으로 받아들였다. 그렇기 때문에 이 글에서 미국 헤게모니를 본질적으로 고찰하려면 그 주제에 파묻혀야 할 필요성을 느낀다.


<b>미국 헤게모니에 대한 전통적 접근</b>

미 헤게모니에 대해 생각하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모두가 어느 정도의 이해에는 도움을 주지만 그 어느 것도 세계화의 시대에는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 중 하나는 현실주의든 이상주의든, 부르주아 자유주의적 국제정치 이론에서 비롯되며 국가와 국제-또는 초국가적인-기구들을 사람들, 민중, 계급과 사회운동보다 우선하여 세계적 사회관계의 주제로 본다. 이 전통은 미국 헤게모니를 다른 국가들과 블록에 비교한 상대적 권력의 차원에서 해석하려 한다. 현실주의자들은 (냉소적 이성에 의해 고무된) 지배엘리트에 대하여 서로 자문하고 자로 재며 기록할 것이고, 반면에 이상주의자들은 (계몽낙관주의에서부터 결론을 얻어) 국제연합(UN)과 세계정부와 같은 차원의 해답들을 제시하려 들 것이다.

그러나 UN은 세계정치의 주체로서의 민족국가와 그 중 가장 강력한 하나의 패권을 상정한다 하더라도 과거 50년보다 더욱 더 큰 위기에 빠져있다.

또 다른 전통은 물론 마르크스·레닌주의 정치경제학이다. 가정상의 국제노동계급과 국내·국제 자본가계급을 설정하면서 이들은 계급과 국가에, 그리고 노동자계급(그리고,또는 억압받는 민중과 국가들)을 필요불가결하며 기정사실화되어있는 사회주의 미래의 작인(作因)으로 보는 다소 고정화되어 있는 경향이 있다. 이 접근은 습관적으로 미국을 제국주의로, 그리고 세계화를 제국주의의 가장 상위에 있는 현상으로 본다. '(노동)해방'은 이 전통에서 가장 주요하게 두 기본적 계급간의 국제적 충돌과, 독일 공산당의 노래에서 보이듯이 '세계 사회주의공화국의 탄생'으로 간주되어 왔다.

하지만 이들에 의하면 동시에 노동자계급의 자신들의, 즉 자국의 지배계급을 타도하는 것이 우선된다고 하였다. 그리고 이 지점이 바로 그 계획이 혁명적, 그리고 개혁적 틀에서 난관에 부딪힌 지점이 아닐 수 없다.

신 마르크스주의는 기본모순을 계급에서 국가간의 것으로 방향을 선회했으며 해방의 작인(作因)을 선진 자본주의의 노동자계급에서 자본주의 주변부의 민중과 국가로 교체하였다. 이는 두 가지 가능한 결과(또는 과정)들을 제시했다. 하나는 민족자본주의이며 하나는 사회주의였다. 이 접근 역시 미국을 제국주의의 차원에서 해석했다. 남아있는 민족자본주의 국가들(인도와 같은)과 공산주의국가들(중국, 쿠바와 같은)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이러한 전망과 계획의 좌절에 적응해 갔다.


이데올로기와 문화를 중시하는 Critical theory는 지배(domination)에 고착화되어 있으며, 계속적으로 대중이 어떻게 조작되고 지배되어 왔는지에 대한 장황한 설명을 들고 나온다. 미국은 대개 사상적 또는 문화적 지배(문화적 제국주의의 이론)의 측면으로 서술하며, 이 이론은 대중과 해방을 위한 힘과 교감하는 듯 보이지만 정작 이들을 그들 자신의 해방작인으로 간주하지는 않는다. 또는 만약 그들을 해방의 주체로 간주한다 하더라도, 그들의 행동에 많은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이 전통에서 지배적 자세는 결코 정치적 제안과 계약(engagement)이 아니며 비판과 비관론이기 때문에, 이 학파는 실험의 고충을 겪지 않아도 된다.


<b>세계화의 위기</b>

나는 세계화란 본래, 세계적 범주에서의 사회관계의 확장과 심화라고 생각한다. 이 과정은 싫든 좋든, 자본주의와 국가통제주의의 초기적 발전단계에 대한 개혁·합리화, 비평, 또는 반대에 기반한 이론들을 도마 위에 올려놓았다. 세계화는 국제정치 이론에서의 해방이론과 폭도이론(insurrectionary), 민족국가 범위에 대한 긍정적 생각들에 특별히 해를 끼쳤다.

세계화(그리고 혹은 이에 의해 촉발된 다른 움직임들)가 이러한 이론들에 의의를 제기하고 있는 이 때, 어쩌면 이것들이 지니고 있는 힘과 흡입력을 생각해 볼 때, 다른 어떠한 접근이 존재한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너무 극단적일 것이다. 그러한 것을 도출해 내기 위한 지난 몇 년간의 노력 끝에 나는 이론적으로 비평적인, 그리고 사회적으로 헌신적인 세계화이론이라 부를 수 있는 것에 주목(또는 이에 대한 인정을 제안)하게 되었다.

나는 자본주의의 국가산업 식민시기와 그것을 넘어서는 세계 정보서비스 단계 사이에 뚜렷한 구별을 둔다. 현재의 이 단계는 나에게 있어 복잡한 자본주의 질서의 하나이며 자본과 국가들 사이에서뿐만 아니라 경제, 기술, 군사력, 감시, 문화, 성(性)과 인종 사이에서도 점차 증대하는 상호의존도가 생기는 시기이다. 이 이야기는 더 이상 지배와 저항, 해방이 하나의 특별한 사회적(예를 들면 공장이라든가), 지리적(자본주의 고리의 약한 연결고리와 같은) 현장에서 벌어지고 있다고 볼 수 없음을 의미한다. 힘의 확산은 자본주의를 더 쉽게 스며드는 동시에 더 취약한 구조로 만든다.

더 쉽게 스며든다 함은 자본주의가 과거보다 더 널리, 더 깊숙이 그리고 더욱 더 많은 형태로 더 많은 활동무대에서 존재하고 있음을 뜻하는 것이고, 더 취약하다 함은 개별적 사안들과 주변현장들이 과거보다는 조심스럽게 균형을 이루고 있는 잘 짜여진 시스템을 손상시킬 확률이 높다는 말이다. 정보화된 자본주의 사회는 더군다나 컴퓨터화 되어있고, 훨씬 문화·소통적이어서 유연성과 취약성을 겸비한다고 볼 수 있다.

나는 따라서 세계화를 자본주의의 한 단계, 또는 이데올로기 이상으로 본다. 이것은 동시에 인류의 역사와 상호교제의 발전에 새로운 장(場)이라고 할 수 있다. 세계화는 국가산업 식민주의시기에 갇혀있거나 뒤집혀 찾을 수 없었던 해방운동의 가능성을 제공한다.


<b>신자유주의 세계화 시대의 미국</b>

양극 모델(미국 vs 소련)과 셋으로 나뉘어진 세계(제1세계, 2세계, 3세계)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지금, 미국은 단 하나의 초강대국으로 남아 있다. 적국들의 소멸, 또는 혼란과 경쟁국들의 분할, 전통적 대중, 좌익운동의 방향감각 상실로 미국의 힘은 실로 100년 전의 대영제국(해질 날이 없다던)에 비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세계화는 모든 것이 미국과 그 다국적 기업들에 의해 지배당하고 빼앗기고, 그들에게로 흘러가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더군다나 미국이 세계의 경찰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원심력이 존재할 때는 구심력 역시 존재한다. 세계화된 소비자서비스 자본주의는 그와 관계된 가치들과 함께 밖에서 주입된 것만큼이나 국가들 내부에서 자라난다. 미국은 세계가 교통정리되기를 원하지만 자신들이 그 경찰관으로 보이고 싶어하지는 않는다. 그들은 지역과 국가들이 스스로를 정리하기를 원한다.

미국과 자본주의는 보다 일반적으로 레닌주의에서 그람시주의로 이행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여기서 후자는 특칭계급에 의해 받아들여지는 문화적 사상적 힘을 의미한다.) 1990년대에 이미 세계화에 반대하는 국가들, 자본가들 그리고 엘리트 이데올로그들은 사라졌다. 영국인들이 TINA(from Thatcher's There Is No Alternative')라고 부르는 이데올로기와 라틴아메리카인들이 pensamiento unico (하나의 생각)라고 부르는 것은 세계에 일반화되었다. 미 헤게모니가 과거보다 더 문화적이고 사상적이라는 얘기는 물론, 콜롬비아 계획에서처럼 그들이 가장 거칠고 가장 전통적인 경제, 정치와 군사 제국주의적 무기들을 사용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미국이 분명히 선호하는 것은 자유로운 상품(주로 미국의), 서비스, 가치와 이데올로기의 세계적 유통을 보장해 주는 민족적, 또는 지역적인 자유민주주의 정권이다. 미국은 이러한 것들이 최소한도의 계급갈등과 시민활동 안에서 이루어지길 바라고 있다. 미국은 세계화된 소비자로서의 민족시민을 재구성하고 싶어한다. 이 곳에서의 지배적 가치는 소비주의이다. 이것이 세계에 제공하는 것은 일반화되고 동시에 공허한 자유민주주의- 시민들의 참여가 5년마다 열리는 선거에서 두 TV 인물의 인터뷰 사이에서 갈등하는 것으로 전락해버린 민주적 삶-이다.

이 전략의 모순은 깊고 많으며 세계뿐만이 아니라 미국 자신에도 영향을 미친다. 미국은 다른 어느 산업화된 자본주의국가보다도 큰 빈부의 사회-경제적 차이를 지니고 있으며 그 간극은 점점 더 커져가고 있다. 일자리와 공동체는 파괴되고 중산층조차도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치는 상황에서 노동시간은 점차 길어져만 간다. 미국의 정당정치와 총선은 중류층의 투표하는 50%를 겨냥한 것이지, 투표하지 않는 가난하고 백인이 아닌 나머지 50%를 위한 것이 아니다. 가장 크고 심각한 사회적 갈등은 계속된다. 이 글을 쓰고 있는 페루에서조차 직장동료끼리 총기를 난사하거나 아이들이 학교에서 총격전을 벌이는 일은 없다.

미국은 그들만의 토착민 시민군이 있다. 이들 가여운, 그러나 위험한 사람들 사이에 떠도는 이야기들 중 하나는 유엔이 '검은 헬리콥터'(믿기지 않는다면 웹사이트에 가보라)의 도움을 받아서 미국에게 세계화와 세계정부를 떠맡기려 한다는 것이다. 더 작은 주변부국가들 사이에서는 우리가 알고 있는 가장 비싸고 환경 파괴적인 필수품인 자동차가 더욱 더 유행으로 번지고 있다. 사회복지 국가의 유물들이 파괴되면서 사회연대의 가장 형식적인 종류가 쇠퇴해가고 경쟁적 개인주의와 사회적 다윈주의는 더욱 더 발전해간다.

세계가 만약 미국화 되고 있다면 미국은 동시에 세계화되고 있다. 이러한 세계화-제3세계화-는 합법적이든 불법이든 이주자들의 숫적 증가보다 심각한 것이다. 이것은 또한 미국이 마약의 생산과 수입에서 행하는, 그 지금까지의 해답으로는 마약 복용으로 이어지는 사회적 갈등을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국내외로 마약과의 전쟁을 선포한 문제와도 관련이 있다. 이 나라는 두려움, 혐오와 폭력으로 가득찬 나라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미국의 영화와 텔레비전은 현실을 창조하는 것만이 아니라 현실을 반영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우리는 과연 미국의 헤게모니가 지속적으로 군림하는 양상을 보게 될 것인가? 아니면 또 한 번 로마제국의 쇠퇴와 멸망을 보게 될 것인가? 아마도 둘 다일 것이다. 새로운 헤게모니는 세계를 지배할 지는 모르나 점점 더 그가 추진하고 있는 세계화에 종속되어갈 것이다.

미국은 세계적인 레벨에서는 자국 국가와 기업의 이익을 표출하면서 동시에 숨기는 국제적 사례들을 장려하곤 한다. 미국은 UN에 기업을 소개하고 국제 노동조직들을 무시하면서, 그리고 UN이 과거에 미국의 수출초과액에 부과했던 그나마의 미약한 제약에도 적용받지 않는 금융사례들을 보강하면서 이루어내고 있다. 이것은 모든 것이 '건설중인 세계시민사회'라는 공동의 장(場)에서 이루어지는 비율이 점차 증가하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위험부담이 높은 전략이다. 세계화는 국제통치와 국제금융에 일반 대중의 관심을 집중시킨다.


<b>'밑으로부터의 세계화' 시대의 미국</b>

지금까지는 그리 좋지 못했다. 헤게모니가 외부의 제약들과 내부의 모순들 속에서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은, 그 자신들에게나 세계에 미치는 악영향을 결코 감소시키지 못한다. 그러나 미국 내에서 그들이 직면해야 하는, 커져가는 모순이 각각 불만으로 이어지고 그 불만들은 과거보다 눈에 띄게 더 세계적이고 국제주의적인 사회운동으로 다시금 이어진다.

대중적인 입장에서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에 대한 입장은 적어도 3가지 경향으로 갈린다. 그 첫째가 거부(종교적, 인종적, 민족적 그리고 때로는 사회주의적 근본주의자들), 둘째가 축하(자본주의가 제공하는 통신적, 문화적 생필품들과 보상에 대한, 또는 그것을 통한) 그리고 마지막이 아주 작지만 계속적으로 성장하고 있는 급진적 민주대안(그것을 초월하기 위해 다른 방법을 추구하는 것)이다. 세계화, 정보화된 자본주의는 어떠한 활동도 요구하지 않는다. 소비자는 지칠 때까지 살 수 있으며 또는 TV를 통해서 대리만족을 얻을 수도 있다. 현재 가장 중요한 운동은 때로는 국제적이고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미국을 밖에서와 같이, 안에서도 위협하고 있는 근본주의자들(rejectionist)이다.

그러나 급진적 민주주의 운동이 그 규모의 빈약함과 비주류성을 딛고 현재까지는 가장 놀라운 충격을 안겨다 주었다.

내가 지금 여기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사실 과거보다 더 상호의존적이며 정보화된 지금 세계에서, 가장 멀고 다채로운 부분에 영향을 미치는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에 불만을 표시하는 여러 운동의 연속적 흐름이다. 이 운동은 옛날의 노동·사회주의, 민주·헌법주의, 민족·인민주의 운동과 또한 1960년대 말의 반국가·자유주의 운동과도 관련이 있고, 또 동시에 차이를 가진다. 그것은 현재 운동의 다양성(여자와 소수민족, 학생과 노동자를 포함하는)이나 전술(합법적 집회에서 군중 수동저항, 그리고 소유물에 대한 폭력까지)에서 나타나는 것만은 아니다.

차이는 문자 그대로 과거의 inter-nationalism과 오늘날의
국제연대(solidarity)로 드러난다. 과거의 전술이 한 지역을 해방시키기 위한 것이었다면 새로운 전술은 세계를(물론 그 지역을 포함하는) 해방시키기 위한 것이다. 국제연대 운동은 세계 문제들-때로는 국가 단위별로, 또는 지역별로 특별한-과 직면한다. 그리고 이 운동은 민족과 현지 민주주의, 그리고 권한부여를 포함하는 세계 해답을 제시한다.

이 운동은 명백히 헤게모니의 안팎에 동시에 존재한다. 시애틀 전쟁은 제3세계에서 1980년대에 시작된 지역적, 또는 국가 단위의 폭동이 가장 극적으로 터져나온 사건이었다. 사태는 1990년대 UN글로벌컨퍼런스에서의 비정부 토론회의에서 힘을 얻었고 부르셀과 제네바에서 1990년대에 열린 반대시위(대부분 국가간 금융기구와 회의들에 반대하는)에서 거리로 번져나가기 시작했다. 그 가장 혁신적인 모습은 1994년 멕시코 치아파스의 세계화된 현장에서 그 지역 토착농민들과 함께(NAFTA가 처음 업무를 시작하는 날에 맞추어 일어난 폭동으로부터) 나타났다.

이 모든 것은 21세기 도시 시애틀에서 1999년에 최고조에 다다르게 되었다. 그 때 이후로 우리는 또 하나의 세계화된 지역인 볼리비아의 고립된 코차밤바이서 또 하나의 봉기가 성공적으로 진행되는 것을 보았다. 시위는 전세계로 인터넷을 통해 생중계되다시피 했고, 그 지도자는 또다른 반대집회에 참가하기 위해 워싱턴으로 비행기를 타고 날아갔다. 늦은 2001년 1월 우리는 세계사회포럼이 브라질 포르토 알레그레 지방에서 열리게 되고, 스위스 다보스에서 세계경제포럼이 열리면서 또 하나의 저항방법을 보게될 것이다. 그러나 더 이상 의존적인 사건들은 아닐 것이다. 어쩌면 그 때 비로소 항의에서 제안으로 넘어가는 역사적 한 걸음을 떼게 될런지도 모르지 않는가?

시애틀을 강타했던 tsunami와 그 이전의 물결에 대해서는 많은 서방 자본주의국가, 정보기관, 또는 미디어의 지각이 예민한 지적이 있었다. 몇몇은 그 초계급적, 초운동적, 초국경적 성격에 대해 언급했었고 몇몇은 점차 더 강화되는 그 반자본주의적 성격에 주목한다. 많은 이들은 그 체계적 연락시스템과 통신수단을 언급하며 이러한 물결들이 새로운 전자 기술을 단순히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 세계화 기술의 파괴적, 집합적, 창조적, 일반화시키는 힘을 이해하고 있다는 점을 거론한다.

그러나 이 작고 서로 공통점 없는 움직임의 힘과 잠재력에 대한 가장 두드러진 척도는 미국과 세계엘리트 국가들간의 무시못할 혼란이었다. 혹자는 일련의 시위들을 난폭하고 무식하며 반남부적이라고 비난했다. 이는 압도적으로 비폭력적이고 축제같은, 그들의 교육적 소통행위와, 남쪽 운동의 공통된 존재와 참여를 놓고 보았을 때 너무나도 허약한 주장이 아닐 수 없다. 다른 이들은 그들이 이제 자신들이 해답이 되고자 하는 재앙들의 계속된 원인으로 판명된 후, 도덕적 우월성 또는 자비로운 임무를 거듭 강조하고자 했다.

또 다른 부류는 아주 약간 불투명하고도 거칠게, 시민사회에서 '이성적인', 그리고 '비이성적인' 힘들의 차이를 구분하려 했고 세계적 신케인즈주의로의 방향 선회를 위한 몸짓을 보여주었다. 시애틀이 온건주의운동과 급진주의운동, 노동자들과 환경운동가들을 한데 어우르려는 시도와 역량을 보여준 이상, 이 마지막 전략은 쉽게 성공하지는 못할 듯 하다.

나는 마지막으로, 제목에 나와있는 질문에 대한 내 대답이 틀린 것이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민족국가의 개념으로서 규정된 헤게모니 측면에서 생각한다면, 자본주의를 그 밑바탕으로, 신자유주의적 세계화를 그 현재형태로 하는 지금 모습에서 관심이 멀어질 수도 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미국의 이 두 가지 모두에서 지니는 걸출함을 인정해야 한다.

우리가 진정 알아야 하는 것은 1)미국이 어떤 종류의 헤게모니를 행사할 것인가? 2)우리가 어떻게 하면 지금의 제한된 힘으로, 이 이른 시기에, 이같은 혼란을 초래한 반-헤게모니를 확장시키고 심화시킬 수 있을 것인가? 3)이같은 움직임이 어떻게 자본주의 세계화를 억제하고 동시에 세계자본주의를 넘어서는 문명을 발전시킬 수 있을 것인가? 일 것이다.

내가 하고싶은 가장 중요한 말은, 이 투쟁에서 미국이 문제의 주된 부분이며 역시 해답의 주된 부분이 될 것이며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font color="##003366">●피터 워터맨은 헤이그 사회학 연구소에서 1998년 은퇴하였다. 그는 <세계화, 사회 운동과 신 국제주의, 카셀(런던, 1998)> 의 저자이며, (paperback edition, Continuum, London, 2001) 로날도 뭉크와 함께 <세계화 시대의 전 지구적 노동: 신(新)세계 질서 하에서의 대안적 노조 모델, (맥밀란, 런던, 1999) (한국판, Seoul, 2000)>을 공동 편집했다. 그는 현재 제인 윌리스와 함께, <장소, 공간, 그리고 새 노동 국제주의, Blackwells(Oxford, 2001)>을 공동 편집하고 있다. 그는 미국 Working USA에서 현재 특별호, <노동의 원인을 위한 사회적 조항, Spring, 2001> 을 게스트 편집하고 있다. 그는 학계와 정치, 노동 신문들에서 영어, 스페인어, 그리고 미 대륙, 인도, 아프리카에 걸쳐 왕성한 저서 집필을 했으며 1994년부터 영국, 미국, 남아공, 스페인, 멕시코 등지에서 임시로 교편을 잡고 있다. 그의 현 관심사는 세계화, 정보통신, 연대 그리고 국제주의자들의 생애이며 또한 그의 웹사이트이다. </fo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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