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광주전남지부


사회운동

사회진보연대 계간지


2001.1-2.12호
첨부파일
1-2역사.hwp

공무원들의 쿠데타

고지훈 | 회원, 서울대국사학과 박사과정
<b>경찰이나 군인이 파업을 한다면 세상이 어떻게 될까?</b>

한때 이런 생각을 하던 사람들이 있었다. 아니, 경찰 뿐 아니라 군인들이 파업을 한다면, 혹은 그들이 데모와 집회를 한다면…. 참 꿈같은 이야기지만 실제로 그런 일이 있었다고 한다면 이상할까? 구 소련이 무너질 때 그와 비슷한 일이 있었다고 한다. 국가와 정부의 명령에 반해서 혁명대열에 참여했던 경험이 있었기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구소련이 무너지는 과정에서 시위진압에 나섰던 군인들의 '명령거부'가 꽤 충격적이었다. CNN에 의해 집중적으로 보도되었던 사건이었다. 사회주의 혁명이 최초로 성공했었던 러시아도 군인들이 혁명대열에 참여하면서 그야말로 혁명이 진행되기 시작했다.

우리의 경우는 어떨까? 노동쟁의나 학생들의 집회를 진압하라고 파견된 군인이나 경찰이 시위진압명령을 거부한다는 것은 우리 상식으로는 쉽지 않다. 왜냐고? 우리는 아직 권력과 권력기구를 구분하는 것에 익숙치 않기 때문이다. 아니, 그런 경험이 없었기 때문이다. 아니, 더 정확히, 그런 경험이 있었다고 생각해볼 겨를이 없었기 때문이다. 너무 오랜 세월을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가는 권력기구와 억압기구 하에서 살아왔으니까. 우리는 그 동안 경찰, 군인, 공무원 등등의 집단을 리모콘을 가진 집단이 원하는 대로만 움직이는 꼭두각시로 이해해 왔다. 앞으로는 그래선 안되겠지, 또 과거에도 꼭 그렇지만은 않았고.


<b>임정의 쿠데타</b>

한국사에서 '군란', 즉 군인들이 일으킨 폭동은 사실 많지 않다. 허다한 많은 사건들은 대개가 주모자의 이름을 따서 '~~의 난'이라고 이름지어진다. 비교적 근대에 가까운 시기에 일어났던 '홍경래의 난'을 포함하여 대부분은 난을 일으킨 주동자의 정치적 야심을 실현하기 위해 '동원'되었을 뿐이었다. 또한 사회경제적 배경과 원인을 곁들인다고 하더라도, 기껏해야 군인은 조역에 불과했다. 또 군인신분이라고 해도 난에 참가한 이상은 '평범한 민초'로 되돌아갈 수밖에 없다. 軍이라는 아이덴티티를 유지한 채 권력에 도전한 경우는, 쿠데타 혹은 쿠데타적 사건을 제외한다면 전무하다.

또 그런 경우는 난을 주도한 몇몇 수장급들에게만 위험을 무릅쓴 대가가 돌아간다. 이런 의미에서, 首長의 명령에 단순히 복종하여 동원되는 장기판의 卒과 같은 존재가 아니라, 정말 자신들의 의지를 기반으로 일어난 '비교적 근대적인 사병들의 반란'을 따지자면 임오군란이 되지 않을까 싶다. 뭐, 워낙 잘 알려진 그리고 교과서에서 충실해 배운 바 있는 사건이기 때문에 자세하게 설명할 필요는 없지만, 이 사건의 중요성은 두말할 나위가 없어 보인다.

왜냐고? 국가와 정부라는 고용주에 반해서 일으킨 최초의 파업 혹은 데모였기 때문이다. 이런 전례가 있었기 때문에(?) 좀 더 시간이 지난 뒤인 1946년에도 남한의 국가공무원들은 또 한차례 국가와 정부, 그리고 권력에 반해 한차례 파업을 일으킬 수 있었다.
사실 한국 현대사에서 공직자의 파업 혹은 태업에 관해 말하자면 가장 선진적인 분자들이 경찰과 검찰이었다. 해방과 더불어 가장 먼저 직장을 이탈하여 '국가사무'를 방기했던 계층들이기도 했다. 이에 대해서 남한을 점령했던 책임자들은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첫번째로 공포와 불안이 공무원을 사로잡았다. ; 그리고는 공황이 엄습했다. 정치적 불안은 행정적인 분열을 초래했다. 법과 질서는 위기에 처했다. 8월 15일 제국의 붕괴 이후 하지가 도착하는 사이의 시기는 거의 무정부상태에 가까웠다.

그러나 미군이 '공황(panic)'이라고 불렀던 상황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곧 이어서 미군이 도착했기 때문에. 주인님이 누구인지 명확해지자, 누구의 명령을 따라야 할 지가 분명해지자, 누가 밥을 주는 사람인지가 명확해지자, 이들은 다시 도둑을 향해 짖기 시작했다. 미군의 남한진주와 함께 법원과 검찰소 그리고 경찰서는 충실한 공무원들로 채워지기 시작했고, 한동안 썰렁했던 남대문 형무소를 비롯한 전국 각지의 감옥들은 죄수들로 다시 활기있게 돌아가게 되었다.
그런데, 한동안 잘 굴러가던 '고용주와 피고용인', '주인과 하인', '정부와 공무원'의 관계에 불을 지르는 사건이 발생했다. 바로 모스크바 3상회담 결정이 그것이었다. 모스크바 3상회담의 내용이 일반에 알려진 것은 1945년 12월 28일 신문보도를 통해서였다. 외신의 전달과정에서 동아일보 등을 비롯한 몇몇 언론들에 의한 언론플레이에 의해서, '소련의 제안', '조선의 소련 연방편입설' 등 악성 루머가 횡횡했지만, 어쨌건 강대국에 의한 조선문제 개입에 전국민적 알레르기 반응을 불러내기에는 충분한 이슈였다.

해방이라는 대형사건 앞에서도 충실히 생업에 종사하였던 거의 모든 사람들이, 이 문제에 대해서만큼은 대대적인 시위와 파업을 조직할 수 있도록 분기탱천케 했으니까. 아무튼 소련과 미국 그리고 조역으로 등장한 영국의 외상들이 머리를 맞대고 짜낸, 조선에 대한 신탁관리결정은 남한 최초의 공무원 파업의 불씨를 당기게 된다.
파업 지도부도 재빨리 결성되었다. 김구와 중경임정 인물들을 중심을 '탁치반대국민총동원위원회'가 12월 28일 결성되어, 이후 반탁운동을 총지휘하겠다는 선언을 내놓았다. 그와 동시에 결의문도 한쪽 내놓았는데, 그 가운데 다음과 같은 내용이 들어있다.


<b>"재정은 지원자의 희망과 정부의 보조로써 충용할 것"</b>

언제나 그렇듯이 투쟁위원회가 국민의 성금으로 운영되는 것은 통상적인 루트이다. 프로야구선수협의회나 그를 돕기 위한 지지운동도 그렇게 운영된다. 하지만, 반탁투쟁위원회의 성금은 물론 희망하는 국민의 성금도 있지만, '정부의 보조'도 빠지지 않았다. 경실련을 떠올리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제게 도대체 무슨 단체일꼬? 하는 일은 '무정부' 혹은 '반정부' 혹은 '낫 정부(NGO)'까지는 아니더라도 분명 한바탕 혼란을 몰고 올 단체인거 같은데 정부자금으로 일을 한다….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여기에 더하여 'GO를 지향하는 NGO' 반탁위원회와 임정인사들을 향해, 각 정당과 사회단체는 노골적인 정부행세를 하라고 요구하기도 하였다.

"1945년 12월 29일, 각정당 사회단체대표자회의에서는 임정에게 주권행사를 건의"라는 다소 섹시한 헤드라인 하에 {동아일보}에 실린 기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보도하였다.

"… 열렬히 토의한 결과 다음과 같은 건의안이 가결되어 임시정부에 건의하기로 되었다…. 우리 임시정부에 즉시 주권행사를 간망할 것"

즉, 신탁통치 반대를 위해 결성된 반탁총동원위원회에서는 당시 서울에서 '개인자격'으로 활동하던 그러니까 NGO로 활동하고 있던 임정세력에게 'N'字를 과감하게 떼버릴 것을 요구하기로 했다는 것이다. 이쯤되면 '재원은 정부의 보조로 충당할 것'이라는 성명의 이유가 짐작될만도 하다. 그들은 요구할 것을 요구한 셈이다. 순서가 약간 뒤바뀌긴 했지만. 반탁위원회에게 힘을 실어주기 위해서 1945년 말 남한에서는 약간은 '해프닝'에 가까운 최초의 그리고 지금까지로는 유일한 '공무원 파업'이 선포되었다.

1945년 12월 29일 / 군정청조선인직원,탁치반대 총사직결의하고 시위행진
29일 아침 총파업을 단호히 결행한 군정청 조선인 직원은 다음과 같은 성명서를 내었다.

<성명서>
… 해방 이후 우리들 군정청 조선인직원은 이 군정청이 조선의 독립을 준비하고 촉진하는 기관이라는 것을 믿었기에 이에 협력을 해왔던 것이다. 그러나 이 군정청이 조선의 독립을 촉진하는 기관이 아니요, 신탁통치를 위한 기관으로 전환하게 된 오늘날 우리들은 이 이상 더 이에 협력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총사직으로서 신탁통치에 대한 절대반대 의사를 표명하며 앞으로 전개될 3천만 총의에 의한 독립운동에 합류하여 끝까지 싸움하기를 성명한다.
-군정청 조선인직원 일동

이 날의 공무원 총사직 투쟁을 보도하고 있는 {동아일보}를 보면, 29일 이 행사에 참여한 공무원의 숫자는 대략 3천여명으로 잡고 있다. '파업'이란 용어 대신에 志士的 뉘앙스를 풍기는 '총사직'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것은 아직까지는 공무원들의 단체행동권이 보장되어 있지 않았고, 또 노동조합이라는 형태로 포괄되지도 못했기 때문이었다. 총사직은 개개인의 사직결의의 단순한 산술적 합일 뿐이다. 총사직을 인수분해하면 결국 개개인의 사직원 제출, 즉 개인행동으로 귀결될 뿐이다. 그에 반해 개개인의 근로거부로 인수분해될 수 없는 파업은 노동조합이라는 '결의의 총화', '개인의지의 화학적 반응물'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결국 그들의 행동은 '노동의 거부'로 드러날 수밖에 없기 때문에 감히 우리는 이날 행동을 '최초의 공무원 파업'이라고 일단은 불러도 되지 않을까 한다.

아무튼 12월 29일 촉발되었던 공무원들의 파업결의는 삽시간에 번져나갔다. 역시 같은 날 사법부의 총파업 결의가 나왔고, 31일 서울시청 공무원 3천명의 총파업 돌입, 이듬해인 1946년 1월 1일 경기도청 공무원의 총사직 결의, 같은 날 서울의 전사법기관의 총파업 선언 등이 뒤이었다. 급기야는 경찰공무원의 신분에도 불구하고 반탁회합을 가졌던 서울시내 8개 경찰서장들이 일제히 반탁의 기치하에 사직서를 제출하기도 하였다. 정부-권력과 공무원 갈등의 절정이라 할만한 사건이었다.

1945년 말과 1946년 1월 초에 발생한 국가 공무원들의 대규모 파업 혹은 사직 사태는 미군정에 의해서 '쿠데타'로 명명되었고, 곧 무참하게 진압된다. 경찰서장들의 사직서를 수리하고 임정 요인들에 대한 협박과 설득작업으로 이내 공무원들의 파업사태는 진정이 되었다. 이후 반탁투쟁은 이승만과 김구를 중심으로 순수한 'NGO' 운동化 하였다.


<b>우리는 권력기구인가, 노동자인가?</b>

최근 필자는 공무원노조를 준비하고 있는 사람들을 만나본 적이 있었다. 알게 모르게 진행되고 있던 공무원 노동조합의 결성움직임이 구체화되었던 것은 지난 1998년 초였다고 한다. 노사정위원회에서 공무원의 노동기본권을 단계적으로 인정해주기로 함에 따라, 우선은 '직장협의회' 형태로 1999년 초부터 결성되기 시작했다고 한다. 직장협의회의 궁극적인 목표는 공무원노동조합의 결성이라고 하는데, 4.19 당시 결성되고 1989년에 재결성되었던 교원노조를 제외한다면 해방 이후 최초의 공무원 노동조합의 결성이 목전에 다가온 것이다.

하지만 노동조합 결성을 위해서 직장협의회가 넘어야 할 산은 많아 보인다. 현재 상태에서는 경찰, 소방직 공무원, 교정직 공무원 등 핵심적인 권력기관(?)이 직장협의회를 건설할 수 없는 것으로 되어 있다고 한다. 무엇보다 필요한 것이 경찰일텐데. 게다가 공무원 노조가 노동 기본권을 완전히 확보하기에는 아직은 무리가 많이 따르는 것도 문제겠지만, 무엇보다도 공무원을 바라보는 일반인들의 시각이 그렇게 따스하지는 않다는 점이다.

필자만 하더라도 공무원을 크게 두려운 집단(고위층), 무사안일한 집단(중간층), 불쌍한 집단(하위직 혹은 계약직)의 세가지로 구분시킨다. 그 때문에 불가피하게 피해를 보는 하위직 공무원들도 많을 것이다. 이들에 대한 이미지가 나쁜 것은 전적으로 '리모콘을 쥔 자'들 때문이다.
공무원 노동조합의 주축이 될 집단은 물론 하위직 공무원들일 것이다. 이들은 노조를 결성할 권리가 있다. 그들도 노동자이니까. 근데 쉽지 않은 문제는 그렇게 공무원 노조가 결성된다면, 과연 그들이 파업을 할 수 있을까하는 점이다. 이건 여타의 노동쟁의와는 차원이 다른 문제이다.

지금도 지하철 노조가 파업을 하면 얼마나들 시끄러운가! 국민의 발을 볼모로 어쩌고 저쩌고…. 해방정국에서 국가공무원들의 사실상의 파업행위가 가능했던 것은 전국민적인 공감대가 형성되었기 때문이었다. '신탁에 대한 반대'. 물론 이에 대한 역사적인 평가에 대해서는 이론의 여지가 있지만, 그리고 당시 파업을 진행시켰던 공무원들 가운데에는 골수 우익분자들이 포함되어 있었고, 또 그들의 의도란 당시 권력을 향해 맹렬하게 돌진하고 있던 우파들과 같았을 수도 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들은 자신들의 행동을 통해서 권력기구가 언제나 권력자와 같은 편에 서있는 것은 아니란 점을 온몸으로, 실천적으로 보여주었고 또 그것이 역사적인 선례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가까운 미래에 결성될 것으로 예견되는(?) 공무원노동조합이 노동기본권을 완벽하게 갖춘 완전한 노동조합이 될지는 미지수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노동조합'이란 현판을 내거는 이상, 그들은 이제 권력기구가 아닌 같은 노동자라는 사실이다. 신탁이라는 매국적(?) 결정에 공무원들이 보였던 전투성을 언젠가 우리 공무원노동조합도 한번 보여주기를 기대해 본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주제어
노동 이론
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