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광주전남지부


사회운동

사회진보연대 계간지


2001.3.1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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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개혁 , 자유주의적 개혁의 막다른 골목?

장석준 | 편집위원
<b>또다시 지리한 이전투구</b>

'언론개혁'이 난리다. 새해 대통령 연두기자회견에서 툭 튀어나온 언론개혁이라는 화두가 온 나라를 들끓게 만들고 있다. 아니, 온 나라가 들끓는 것처럼 보이도록 신문 지상을 채우고 있다. 특히 '조·중·동'이라 불리는 <조선일보>, <동아일보>, <중앙일보>가 그렇고, <한겨레>, MBC가 그렇다. 급기야는 한나라당이 조·중·동의 십자포화에 부화뇌동해 집권당의 '언론개혁'이라는 말을 '언론탄압'이라 번역해주었다. 지난 2월 8일부터는 언론사 세무조사가 실시되고 12일부터는 공정거래위원회의 불공정거래 및 부당내부거래 조사가 실시됐는데, 이 너무도 당연한 절차에 대해 야당은 '탄압'이라는 말을 서슴지 않고 있다. 급기야는 '무서운 입' 김영삼까지 뛰어들어 진흙탕을 만들어주었다. 이게 무슨 일인가? '개혁'이라는 말의 참신함은 간 데 없고 세상사람들은 다시 한 번 이전투구만을 목도하고 있다.


<b>산적한 신문개혁의 과제들 </b>

작금에 '언론개혁'이라고 불리는 사안은 사실은 '신문개혁'을 이르는 것이다. 그런데, 이 글에서 필자는 보통 이 주제를 다루는 글들의 맨 나중에 따라붙는 내용을 오히려 제일 처음에 이야기하려 한다. 언론개혁을 가장 일관되게 주장해온 언론개혁 시민운동과 언론노동조합운동(이들의 광범한 연대체가 언론개혁시민연대다)의 개혁요구가 그것인데, 이는 다음과 같은 대안들로 이뤄져 있다.
하나는 신문사 소유구조의 개혁이다. 언개련은 대기업 뿐만 아니라 특정개인 혹은 가족집단의 소유에 대해서도 소유제한을 두는 것으로 정기간행물등록등의사항에관한법률(이하 정간법)을 개정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국세청의 이번 세무조사는 그 초점이 상당부분 사주의 개인비리에 맞춰져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사주의 소유지배로 인한 폐해를 강조하는 언개련의 입장과 만나는 데가 있다. 문제는 아직 정간법개정이라는 제도적 절차는 일정에 올라 있지 않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편집권 독립이다. 일단 소유 집중을 막음으로써 소유주에 의한 편집권 침해를 최대한 막고, 더 나아가 소유주 전체에 대해 편집권의 항상적인 독립권을 보장하자는 것이다. 그 구체적인 장치는 편집위원회를 통해 노사가 합의하여 편집규약을 제정하게 하는 것인데, 이 역시 정간법의 개정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마지막은 신문유통구조의 변화다. 조·중·동 세 신문이 한국의 신문시장을 독점하고 있다는 것은 이미 상식이다. 그런데, 이는 결코 시장에서 이들이 차지하는 논조와 정보의 우수성에서 비롯되는 것은 아니다. 경품이나 서비스 제공 등 갖가지 파행 경쟁과 신문지국과 본사 사이의 주-종관계, 심지어 지역폭력조직과 연관되기까지 하는 진짜 '조폭'적인 행태 등이 이들 신문의 독점기반이 되고 있다. 이를 혁파할 수 있는 길로 언개련은 공동판매제의 도입을 주장하고 있다.

여기에 다시, 한 신문이 시장의 30% 이상을 지배할 수 없게 하는 프랑스식 제도 등이 대안으로 더해진다. 이 부분에서도 여당은 제도수립 일정까지는 제시하지 않고 있다. 하지만, 어쨌든 공정거래위가 파행 경쟁양태를 조사하기로 하면서 언개련 요구에 일정하게 부응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언개련은 이 모든 제도적 조처들로 나아가기 위한 출발점으로서 국회내에 언론발전위원회를 설치하는 것을 제안하고 있다. 언론개혁이 정쟁의 이슈가 되는 가운데, 이 안이 얼마나 실현가능할지는 알 수 없지만 말이다.

아무튼, 일단 여기까지만 보면 이번만은 여당이 개혁의 칼날을 제대로 뽑은 것처럼 느껴진다. 언개련 등의 요구가 제도적 차원으로까지 관철된다면, 우리가 견뎌야 할 세상은 이전보다 나아질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문제는 여전히 그런 언감생심할 일이 과연 가능하겠는가 하는 데 있다.


<b>신문개혁, 민주화의 대단원인가?</b>

많은 이들이 공통으로 지적하는 것은 신문개혁이야말로 개혁의 끝이며 결정적인 마침표라는 것이다. 한국식 용법에 따르면 '개혁'이라는 것은 1987년 이후 시작된 부르주아 민주화(그러니까 자유주의적 민주화)가 특히 김영삼, 김대중이라는 한국 부르주아 정치세력의 두 역사적 지도자를 통해 관철되어온 과정이다. 그런데, 하나회를 싹쓸이하고 재벌'개혁'이라는 것을 입에 담으며 김정일과 악수하기까지 한 이 두 대담한 지도자도 결코 제대로 착수할 수 없었던 것이 바로 신문개혁이었다.

모든 위로부터의 개혁이 그렇듯이, 한국의 소위 민주화세력이 추진한 개혁이란 것도 기존 권위를 치워버린 그 자리에 새로운 권위가 필요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가령, 기무사와 하나회를 치워버린 자리에 안기부와 검찰이 자리하는 식이다. 그런데, 1987년 민주화 이후 그러한 권위의 중심이동에서 가장 큰 덕을 본 것이 바로 한국의 보수언론들이다. 이들은 과거 군부정권 시기에 받은 온갖 특혜를 통해 강력한 물적 토대(특히 유통배급망)를 갖춘 상태였는데, 6월항쟁 이후 열린 자유의 공간에서 이러한 물적 역량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군부를 물러서게 한 것은 민중의 힘이었지만, 민중들은 막상 새로운 자유의 공간에 자신들의 말을 수놓을 역량을 갖추지 못했다. 1987년 당시 이 땅의 민중운동에는 이후 흔하게 보게 될 비합법간행물들조차 없었다. 새롭게 등장한 여론의 힘을 삽시간에 장악한 것은 기존의 보수언론들이었다. 바로 조·중·동. 그리고 이들은 민주화가 일정하게 진전된 후 찾아온 대중문화의 범람 속에서 유유히 상승의 물결을 탔다. 이들은 연예면을 잘 요리함으로써 삐라성의 정치면을 사람들에게 읽히는 기술을 터득해갔다. 이것은 68 당시 서독 학생운동을 공격한 것으로 유명한(그리고 지금도 그런 방식으로 적녹연정을 공격하고 있는) 독일의 황색신문 <빌트>지가 이미 완벽하게 써먹어온 그런 기술이었다.

이미 집권과정에서 각각 군부파쇼 잔당의 한쪽 편과 손잡은 바 있는 김영삼과 김대중으로서는 이런 조·중·동 세력과 굳이 대결할 필요가 없었다. 오히려 행복하게 야합하면 모를까? 김영삼의 실토는 그 결정적 증거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주당이 이번에 자칫 무모하게 보일 정도로 날이 선 개혁바람을 일으키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누구 말대로 김대중 세력이 그래도 김영삼 세력보다는 상대적으로 '진보적'이기 때문일까?

결코 그렇지는 않다. 이번에 김대중 정권이 신문개혁의 칼을 뽑은 것은 전적으로 대선까지 2년을 남겨둔 민주당이 정권 재창출에 대해 갖는 불안감 때문이었다. 주류신문들이 정권에 대해 지금과 같은 논조를 유지하는 한 정권 재창출은 불가능하다는 것, 이것은 한나라당이 폭로한 기밀문건이 아니라도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런데, 조·중·동이 굳이 현재 여당에 대해 등을 돌리고 있는 것은 김대중이 더 진보적이기 때문이라기보다는 김대중보다 더 보수적인(그러면서 유력한) 카드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즉, 지배세력의 사회재편프로그램의 첨병으로 나섰다가 대중의 불만을 받을 대로 받은 민주당 대신, 그러한 불만을 민중주의적으로 이용하여 집권할 수 있을 것으로 믿어지는, 그러면서 김대중 정권보다 더 보수적인 (그래서 또한 마음에 드는) 이회창이라는 카드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어쨌든 이런 역학관계 속에서 신문개혁은 시작됐다. 그러면, 우리는 이 난투극이 정권의 상대적 진보성에서 비롯됐든 아니면 역학관계로부터 비롯된 것이든 상관없이 개혁의 진행을 관람하기만 하면 되는 것일까? 상황은 그렇게 느긋하지만은 않다.


<b>자유주의적 개혁의 모순 </b>

신문개혁의 움직임에 박수치는 사람들도 동상이몽을 꿈꾼다. 인간사에서 이런 일은 어쩌면 당연한 것일 수도 있다. 우선 앞에서 이야기한 정황으로 인해 신문개혁으로 '몰린' 집권여당이 있다. 원래 부르주아 정치세력들이 다 그럴 수밖에 없지만, 이들에게는 어떤 강령적 요구보다는 정략적 의도가 강하다.
실상, 개혁전선의 핵심은, 전부터 일관되게 이 글 첫 머리의 개혁요구들을 주장해온 언개련 등 시민사회운동 세력이다. 애초에 대통령 연두 기자회견을 통해 '언론개혁'이라는 말이 터져나왔을 때, 언개련은 이를 극히 경계하고 시민들의 힘에 의한 개혁을 주장하는 성명서를 발표해서, 조·중·동의 능숙한 데스크에 의해 개혁반대론으로 보도되는 곤혹을 치르기까지 했다. 그만큼 이들은 집권세력의 전략적 의도와 자신들의 운동적 요구를 대중들이 선명하게 구분시킬 수 있게 하는 데 노력을 쏟고 있다. 국민운동 방식의 언론개혁운동을 천명하고 있는 것도 바로 이 대목 때문이다.

신문개혁 전선의 또 하나의 세력은 <한겨레>를 필두로 한 비주류언론과 MBC 등 방송매체다. 국민주 기업형태를 취하는 두 신문인 <한겨레>와 <경향신문>, 그리고 주류 언론시장으로의 진출을 목타게 염원하는 <문화일보> 등은 정부의 신문개혁 조치들에 대해 우호적인 논조를 보이고 있다. 그리고, 조·중·동과 미래매체 부문에서 계속 경쟁관계를 유지해온 방송사들도 그러하다. 이들에게는 언론 종사자로서의 진정한 개혁의지와, 경쟁 참여자로서의 기회주의적 의도가 함께 존재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아무튼 이들도 현재 개혁세력의 한 축이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지적해야 할 것은 이러한 전선 구성으로 인해 야기될 수밖에 없는 필연적인 모순이다. 김영삼 문민정부가 출범한 이래 모든 개혁은 금융실명제든 전·노 구속이든 모두 집권세력과 시민사회 내 개혁세력의 공조로 이뤄졌다.

이것이 소위 개혁전선의 일반적인 구도였다. 정권의 안정과 재생산을 위해 지극히 전략적인 의도로 집권 부르주아 정치세력이 선택한 의제범위 안에서, 그 의제에 열렬히 화답하는 시민사회 내 개혁세력이 앞장서고 나서는 것이 지금까지의 양상이었다. 이번도 마찬가지다. 언개련으로서는 지금까지의 교훈(경실련이 대표적이다) 때문에 의식적인 구별정립에 여념이 없지만, 전선이 이렇게 형성된 것 자체는 결코 부인할 수 없다.

시민사회론의 주창자들 중 일부 주장에 따르면, 한국사회에서는 이런 방식이 아니고서는 개혁전선이 형성될 수 없다. 달리 말하면 집권 부르주아 정치세력의 정치게임적 선택에 일정하게 의존하지 않고서는 효과적인 민주화 시도가 불가능하다. 그런데, 이는 정확히 상황의 한 쪽 면만을 본 것이다. 개혁전선이 바로 이렇게 이뤄져왔기 때문에 1990년대 이래의 모든 개혁은 대중들에게 그 진정성을 설득할 수 없었다. 그 정도의 개혁조처마저도 인정하지 못하는 수구특권층의 공격에 대해서 이의 강력한 방어자로 나서야 할 대중들이 수동적인 자세를 취한 것이 이제까지의 양상이었던 것이다. 금융실명제 후퇴가 그랬고, 전·노 사면이 그랬다. 그렇게밖에는 수행될 수 없다는 개혁의 메커니즘이 결국 개혁의 불안정성과 불가능성, 말하자면 그 실패를 낳는다. 필자는 이를 '위로부터의 개혁'의 모순, 즉 자유주의적 민주화의 모순이라고 부른다.

지금까지의 상황을 보건대, 상황은 결코 다른 방식으로 진행될 것 같지 않다. 형식적으로 언론발전위원회가 구성되는 정도가 아니라면, 한나라당의 방해 속에서 제대로 된 입법개혁은 이뤄지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그렇게 되면 이 국면을 살릴 수 있는 유일한 방도는 1980년대 KBS 시청료거부운동 이상의 국민운동 뿐이다. 언개련의 진정성을 의심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일단 이렇게 시작된 소위 개혁 국면 속에서 수동적인 여론조사 이외에 대중들의 동원을 성사시킬 방법은 그다지 뚜렷이 보이지 않는다.


<b>또 다른 모순 - 개혁, 그 다음은? </b>

하지만, 신문개혁의 모순은 이것뿐만이 아니다. 만약 개혁세력이 주장하는 개혁이 이뤄진다고 치자. 그 때 세상은 분명 더 좋기만 할 것인가? 답은 결코 분명치 않다. 조·중·동의 주식이 방씨, 홍씨, 김씨로부터 또 다른 자본가들에게로 분산된다고 하자. 그리고 편집권이 형식적인 독립성을 확보한다고 하자. 그렇다고 우리는 김대중의 칼럼을, 김상택의 만평을 더 이상 보지 않아도 될 것인가? 조·중·동의 언론인들이 이미 적극적으로 내면화하는 이데올로기들은 이미 더 이상, 사주의 일방적인 지침에 따를 뿐인 것이 아니다. 특히 1987년 민주화 이후 이들 신문사의 종사자들은 그들이 이 사회에서 자연스럽게 점유하고 있는 지위의 버팀목으로 어떤 이데올로기를 선택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것이 꼭 단일한 파시즘 이데올로기 같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어쨌든 그들 논조의 합은 그것에 가까운 무엇이 된다.

그럼, 공동판매망이 형성된다고 해서 언론시장은 완전히 재편될 것인가? 이것 역시 지극히 불투명하다. 개혁세력들이 셈해 넣지 못하고 있는 것은, 신문사들 사이의 저질경쟁을 욕하면서도 자연스럽게 조·중·동을 선택하는 대중들의 놀라운 관성이다. 이것은 특별히 한국인의 나태함에서 비롯되는 것은 아니다. 무릇 그 어떤 대중적 이데올로기지형도 커다란 충격 없이는 변화할 수 없다. 그리고 그러한 역사적 충격의 시기에 그에 값할만한 대담하고 새로운 내용을 지향하는 매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또한 변화란 없다. 모르긴 해도, 지금의 <한겨레>가 정확히 지금 조건에서 공동판매망만 확보한다고 해서 조·중·동의 지배력을 결정적으로 잠식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하물며 <경향신문> 정도의 양시양비론, <문화일보>의 右왕左왕이야 더 무슨 말을 하겠는가?

이상은 결국 신문이 사람들의 이데올로기를 다루는 기관이라는 점에서 비롯되는 독특한 모순이다. 조·중·동이 문제인 것은 그들이 국민들에게 퍼뜨리는 '부정적 감정'에 있다고 할 때, 그러한 '부정적 감정'은 오직 그것을 능가하는 '긍정적 감정'을 통해서만 극복될 수 있다. 이것이 스피노자 선생의 윤리학의 ABC다. 지금 개혁세력들은 전략과 진정성의 동거 속에서 비틀거릴 뿐만 아니라 '부정적 감정'에 '제도'라는 울타리를 치기만 하면 뭔가 될 것이라는 안이함에 빠져 있다.

하지만, 지금 요구되는 것은 이 글의 맨 앞에 언급한 그런 형식적 장치들을 '어떠한 식으로든' 관철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그러한 방식으로는' 결코 만들어질 수 없는 이념적 대중운동을 통해서 그것에 강력하고 새로운 이데올로기 내용을 동반시키는 것이다.
지금 그것은 당연하게도, 김대중 정권을 포함해 이 땅의 지배세력 모두가 합작으로 빚어낸 디제이노믹스 3년의 모순에 대한 정면대항, 그리고 그런 저항 속에서 분출할 상상력들에 대한 인정이다. 물론 모든 진보세력은 언론개혁의 최소강령에 대해 아낌없이 지지하고 연대할 것이다. 파시스트 논자들에게 타격을 입히는 일에 즐겁게 동참할 것이다. 하지만, 많은 자칭 통일전선론자들의 허풍과는 정반대로, 운동의 진정한 생명력은 우리의 내용을 일정하게 퇴행시킨 가운데 얻어진 최소합의가 아니라 최소합의의 형식적 개혁성을 비로소 실질적인 것으로 만들 바로 그 우리의 내용에 있다.
저들을 비판하기 이전에, 우리는 그것을 해낼 수 있을 것인가?
주제어
정치 민중생존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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