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광주전남지부


사회운동

사회진보연대 계간지


2008.5-6.82호

1960년대 혁신정당운동의 한계와 과오

편집실 |

1960년대 혁신정당운동의 한계와 과오


419 혁명 직후 1960년 6월 15일 국회는 제3차 개헌안을 의결하고 당일 공포하였다. 원내 과반수를 차지했던 자유당 의원들도 찬성함으로써 개헌안이 압도적으로 가결되었다. 새로운 선거법에 따라 제5대 민의원 233명과 초대 참의원 58명을 뽑는 총선이 예고되었다. 여운형의 근로인민당, 김규식의 민족자주연맹, 조봉암의 진보당 출신의 살아남은 인사들이 주축이 되어 6월 18일 사회대중당의 발기를 선언했다. 한국전쟁을 거치며 그 명맥이 거의 끊겼던 조공남로당, 북로당노동당 계열 인사들 중 일부도 “어떠한 활동도 하지 않는 휴식은 가장 큰 과오”라는 인식에 따라 사회대중당 건설 과정에 조심스럽게 참여했다. 그러나 혁신정당 추진세력은 정치노선의 차이와 복잡한 인맥에 따라 굴곡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총선을 앞두고 사회대중당과 별도로 근로인민당 계열의 혁신동지총연맹과, 민족자주연맹 출신 일부 인사와 서상일이 이끈 한국사회당이 조직되었다. 혁신세력은 선거를 거치며 대중들의 반응도가 높다고 생각했지만 선거결과는 참패였다. 민의원에서 민주당이 175석을 얻어서 압도적인 다수당이 되었다. 혁신정당 중에서 사회대중당이 4석, 한국사회당이 1석을 얻는데 그쳤고, 그나마 당선자들도 자유당이나 한민당에서 이탈한 보수적 인사들었다. 총선 후 진보당 계열만이 사회대중당의 이름으로 남고, 나머지 계열은 사회당, 혁신당, 통일사회당 등으로 균열했다. 하지만 1960년 12월 지방의회선거에서도 혁신세력은 참패했다. 특별시도의회 487 의석 중에 사회대중당 두 명이 당선되었고, 시읍면의회 16,864명 의석 중에 사회당 세 명이 당선되었을 뿐이었다.
당시 혁신정당의 실패에 대한 평가는 분분했다. “조직력이 거의 없었다”, “민주당이 혁신세력의 정강정책을 선거용으로 베껴 쓰면서 유권자의 마음을 움직일만한 새로운 내용이 없었다”, “선거운동방식에서 보수정당과 거의 다른 점이 없었고 심지어 매표공작이나 향응도 서슴지 않았다.” 혁신정당 추진세력이 단일 대중정당 창당과 보수혁신 정치구조를 모색했지만 결국 이합집산을 거듭하며 선거에서 유의미한 정치세력으로 성장하지 못했던 궁극적인 이유는 무엇이었는가? 그것은 혁신세력이 대중운동, 민중운동에 기초하지 못하고 명망가에 의존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혁신계는 정당통합에서 실패했지만, 1961년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민자통)을 결성함으로써 공동 활동을 모색했다. 이는 어떻게 가능했나? 419 혁명 이후 학생운동은 앞으로의 방향성을 두고 좌충우돌했지만, 점차 변혁적인 전망을 품고 민주당 장면정권에 대한 투쟁의 견인차 역할을 했기 때문이었다. 학생운동은 1961년 2월 8일 체결된 한미경제협정이 “경제적 예속화와 내정간섭을 강요하는 불평등 조약”이라며 반대 투쟁을 펼쳤고, 장면정권의 2대악법이라고 불린 반공법과 데모규제법에 대한 시위도 전개했다. 5월에는 민족통일전국학생연맹 결성 준비대회를 개최하여 통일운동의 기운을 북돋았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 혁신세력과 학생운동은 또 하나의 큰 과오를 범하였다. 군부가 쿠데타를 모의하고 있다는 풍설이 정가에 공공연하게 나돌았으나 대부분 안이한 생각에 젖어 있었다. 그들은 “군부쿠데타는 필연적으로 군사파쇼의 독재화로 이어질 것이고, 미국이 이를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믿었다. 그러나 516이 일어나자 군부는 혁신정당, 학생운동, 교원노조를 비롯한 노동운동 인사 3,000명을 구속했고 일부 인사는 사형에 처해졌다. 혁신세력 1세대는 반복되는 투옥, 생계의 위협, 자연연령의 한계로 인해 공중 분해되었다. 석방되거나 투옥을 면한 인사들은 운동에서 아예 이탈하거나 현실정치 참여를 명분으로 야당 신한당에 흡수되었다. 결국 혁신세력 1세대는 운동에서 퇴장할 수밖에 없었고, 다음 세대가 빈 공간을 채우게 되었다. 419 학생운동과 통일민주청년동맹, 민주민족청년동맹과 같은 청년운동에 참여했던 새로운 세대는 더욱 강고한 변혁이념과 조직사상으로 무장하여 516 쿠데타 세력에 저항하기 위한 진지를 구축하고자 했다. 그 맥은 1960-70년대 지하운동으로, 노동현장 진입으로, 또는 민중교육운동으로 이어졌다.

우리가 과거 운동의 역사를 돌아볼 때 그 당시의 한계와 과오는 명백해 보인다. 하지만 동일한 평가기준을 우리 자신에게 적용하는 것에는 주저하곤 한다. 그러나 우리 운동의 교훈은 피를 대가로 얻은 것인 만큼 결코 흘러간 과거사로 치부할 수 없다. 우리는 현재의 과제를 더욱 분명히 인식하기 위해서 지난 역사에서 어떤 교훈을 찾아낼 것인가. 또한 사회진보연대는 우리 운동의 역사에 무엇을 남길 것인가. 역사에 지워질 수 없는 기록을 남긴다는 심정으로 기관지 편집에 임하겠다.

임필수 | 정책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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