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광주전남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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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진보연대 계간지


2009.5-6.8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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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폐ㆍ금융과 전쟁의 세계사

금융세계화와 군사세계화의 이해

최윤정 | 정책위원
2008년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로 촉발된 미국 경제위기는 신용공급의 위기를 넘어 은행위기로 전개되고 있다. 민간 기업의 파산위험이 대형 상업은행, 보험사, 거대 제조업체로 번지고 있다. 미국의 경제위기에 대한 대책으로 연준은 대규모 유동성 공급과 수량완화정책을 내놓고 있으며 미 재무장관 가이트너는 2차 부실자산구제계획으로서 금융안정계획을 통해 구제금융을 확대 투입하기로 했다. 미국 정부는 구제금융 외에도 금융제도 개혁에 대한 논의도 진행하고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금융기업들도 위험관리의 개선 방안을 제안하고 있다. 이를테면 금융거래의 표준화나 금융기관 내 사업부문과 위험관리부문의 의사결정을 분리하고 새로운 금융상품은 체계적인 사후평가를 받게 하여 리스크관리를 강화하는 것 등이다.
하지만 현재의 위기는 금융이 실물경제의 원활한 작동을 효과적으로 지원하는 역할을 한다는 교과서에 쓰여있는 순진한 인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따라서 우리는 화폐 금융제도의 역사적 변화와 그 계급적 함의, 그리고 그것이 자본주의 체계에 끼친 효과를 종합적으로 인식해야 한다.
실제로 1970년대부터 전개되는 금융세계화는 1980년대의 외채위기와 1990년대 이후의 외환위기처럼 세계경제의 구조적 불안정성을 심화시켰다. 금융세계화는 실물경제와 유리되어 가공자본을 중심으로 엉청난 거품을 형성했다. 이처럼 금융세계화에 고유한 모순을 인식하기 위해서는 특히 20세기 미국의 헤게모니 아래 확립된 화폐/금융제도의 메커니즘과 그 변화양상을 이해해야 한다. 또 미국을 위시로 한 금융세계화가 미국의 군사력을 바탕으로 지지되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은 오바마의 경제정책과 더불어 군사지배력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미국의 의도를 이해하는 데 필수적이다. 이 글은 이현, 이태훈의 <화폐ㆍ금융과 전쟁의 세계사>(공감, 2009)의 내용을 소개함으로써 금융세계화와 군사세계화에 대한 이해를 돕고자 한다.

화폐/금융제도의 역사와 금융세계화

현대적 화폐/금융제도의 형성

네덜란드는 발츠해 지역에서 생산된 곡물의 무역을 독점하고 어업, 해운업, 조선업 등에서도 경제적 우위를 차지했다. 네덜란드는 유럽 내 무역망은 물론 포르투갈과 스페인의 상업망을 계승, 확대하면서 세계무역의 지배자가 되었다. 네덜란드의 상업적 성공은 은행업의 발전을 가져왔다. 특히 1609년에 설립된 암스테르담은행은 17세기 중후반 60-70년동안 국제금융의 중심으로 기능했다. 그러나 현대적 은행제도와 신용업무는 네덜란드가 아니라 영국에서 본격적으로 발전했다.
영국은 네덜란드의 상업적 성공을 민족경제에 기초한 산업의 발전과 결합하기 시작했는데 이 과정에서 1694년에 설립된 영국은행은 현대적 은행제도의 확립에서 핵심적 역할을 담당했다. 나폴레옹 전쟁은 영국의 화폐, 금융제도의 발전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전쟁 중에 영국정부는 해외의 자국 군대를 유지하는 한편, 동맹국들에게도 보조금과 금융원조를 제공했다. 이러한 전시 자금조달을 계기로 전쟁이 끝날 무렵 런던은 국제대부의 중심이 되었다. 1844년 은행법의 제정을 통해 영국은행은 발권을 독점하고 금준비를 집중하는 ‘은행의 은행’ 또는 ‘최종대부자’로 변모했다.
19세기 철도와 전신의 발달은 민족시장과 세계시장을 형성했다. 산업 생산의 증대와 더불어 시장을 매개로 한 경제활동이 활발해지고 국제무역 또한 급증하자 화폐의 유통비용의 절감을 위한 제도적 혁신들이 모색되었는데 민족적 화폐제도의 확립은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이었다. 영국은 1816년에 공식적으로 금본위제를 채택하면서 최초로 산업기술에 기초한 대량주조제도를 확립함에 따라 화폐가치를 안정화시켰다. 영국이 선도한 이러한 현대적 형태의 주조제도는 다른 나라들로 확산되어 유사한 화폐제도가 형성되었다. 민족적 화폐제도의 확립은 재정적 필요를 만족시킴으로써 민족국가를 강화했다. 19세기 화폐개혁을 통해 국가는 자신의 영토 내에서 화폐의 발행을 독점하게 되었다.
1870년대 초까지는 은본위제나 복본위제를 채택한 국가들이 많았고 금본위제를 채택한 영국은 오히려 예외적인 사례에 속했다. 그러나 1870년대부터 미국과 독일을 비롯한 주요 국가들이 금본위제를 채택하기 시작했고 1900년대 초에는 비유럽 국가들도 금본위제로 이행했다. 영국은 세계 최대의 무역국일 뿐만 아니라 가장 많은 자본을 해외로 수출하는 ‘세계의 은행’이었기 때문에 파운드가 다른 화폐보다 훨씬 중요한 국제적 지불수단이 되었다. 항상 금으로 태환할 수 있는 파운드가 사실상 금과 동일시되었기 때문에 국제무역의 결제를 위한 보편적 수단으로 사용되었던 것이다. 금본위제는 산업적 우위에 기초한 영국의 일방적 자유무역정책을 금융적으로 지지했으며 이를 통해 영국을 중심으로 한 세계시장의 팽창이 가속화되었다. 그러나 고도금융의 중심지였던 런던은 1차 세계전쟁을 거치면서 천문학적인 전쟁비용으로 인해 몰락했고 이로써 영국 헤게모니의 기초였던 금본위제도 붕괴되었다.

20세기 미국화폐, 금융제도

1890년대부터 1914년까지 미국에서는 ‘법인혁명’을 통해 법인자본이라는 새로운 자본형태가 출현했다. 법인자본은 소유와 관리를 분리했는데 이에 따라 은행이 아니라 주식시장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금융제도가 발전했다. 1920년대에는 법인자본이라는 사적 영역에서 금융의 이익에 조응하는 첫 번째 관리자혁명이 추진되었다. 슬론주의로 대표되는 관리자혁명은 생산과정의 수직통합을 유통과정으로 확장, 완성하고 생산라인과 관리스탭의 분업을 확립했다. 특히 이 시기에 모건(Morgan) 같은 투자은행과 경쟁하는 상업은행도 인수합병을 통해 집중, 거대화되었고 자회사로 증권회사를 설립하여 증권시장에도 적극 참여했다. 그러나 규제되지 않은 금융활동은 거시적 불안정성을 낳았고 그러한 불안정성은 금융자본의 국제적 이동과 결합되어 결국 1929년 뉴욕 증권시장의 붕괴를 야기했다.
이에 따라 로저벨트는 1933-35년에 긴급은행법, 글래스-스티걸 은행법, 금준비법 등을 통해 화폐, 금융제도의 개혁을 단행했다. 긴급은행법은 회생 가능한 은행에 대폭적인 대부를 해 주는 제도였고 ‘글래스-스티걸 법(Glass Steagall Act)’은 미 의회가 33년 제정한 은행법과 증권법 가운데 은행법의 일부 조항으로 은행의 증권업 겸영을 허용하지 않겠다는 것이 요지이다. 이 법은 투자은행과 상업은행의 분리를 강제했고 이 법으로 비대해져 가던 미국 상업은행의 규모는 축소됐고 은행 내 증권 자회사나 증권부서는 투자은행(증권)으로 독립해 나갔다. 모간 그룹에서 모간스탠리가 투자은행(증권사)으로 떨어져 나왔고 보스턴 은행에서 퍼스트 보스턴이 독립됐다. 한편 금준비법은 중앙의 연방 준비은행들이 보유하고 있는 금화, 금지금, 금증서 등을 모두 연방의 재무부가 소유하도록 한 법으로 재무부는 각 은행들에게 새로운 양식의 금증서를 발행하고 은행에서 넘겨받은 금의 구체적인 액수는 재무부 회계기록부의 대변(貸邊)에 기입하도록 했다.
여기서 가장 큰 변화는 금본위제를 폐기하고 중앙은행이 발행하는 불환지폐제도를 확립한 것이었다. 불환지폐는 민족적 경계 내에서 강제로 통용되는 보편적 등가물로서 국가화폐다. 국가화폐의 발행이 더 이상 금준비에 의해 제약되지 않았기 때문에 자본축적의 조건을 반영하는 탄력적인 화폐공급이 가능해졌다. 상업은행과 투자은행이 분리되었고 상업은행의 안전성을 강화하기 위한 법적, 제도적 장치들이 마련되었다.
1937년부터 2차 세계전쟁까지 공적 영역에서 두 번째 관리자혁명, 즉 케인즈주의적 경제정책이 확립되었다. 케인즈주의에 따르면 국가는 사적 기업활동에 개입하지 않지만 그 활동이 야기할 수 있는 거시적 불안정성에 대처해야 했다. 정부는 재정적자 형태의 추가적 화폐지출을 통해 거시경제적 활동수준을 관리했다(‘투자의 사회화’). 거시경제적 관리의 핵심적 전재조건은 금융에 대한 억압(‘금리생활자의 안락사’)이었다.
모든 국가들이 금을 본위화폐로 사용했던 19세기에는 국제적 지불수단으로서 세계화폐라는 문제가 제기되지 않았던 반면, 각국이 자신의 국가화폐를 발행하는 20세기에는 어떤 화폐를 세계화폐로 사용할 것인가라는 문제가 제기되었다. 국가화폐에 내재된 특수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944년에 금태환을 전제로 해서 달러를 세계화폐로 확립하고 국가화폐들 사이의 환율을 고정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브레튼우즈체제가 합의되고 2차 세계전쟁 이후에 현실화되었다.

20세기 세계화폐/금융제도와 금융세계화

브레튼우즈체제의 형성
국제금본위제는 1914년 금융위기와 그에 후속한 1차 세계전쟁에 의해 사실상 해체되었다. 2차 세계전쟁 이후 금본위제를 대체하는 새로운 세계화폐/금융제도는 1930년대에 일반화된 금융억압을 자유주의적 형태로 수용한 케인즈주의에 기초하여 재건되었다. 1944년 미국 뉴햄프셔의 브레튼우즈에 모인 44개국 정상들은 영국의 케인즈와 미국의 화이트의 초안에 기초하여 전후 세계화폐/금융제도에 관한 협정을 체결하였다. 케인즈와 화이트의 초안은 각국 정부에게 금융자본의 국제적 이동을 통제할 권리를 부여했고 경상계정에 은폐된 자본이동에 대한 검색 및 국제적 협력과 규제 등을 제안했다.
브레튼우즈체제는 미국의 달러를 세계화폐로 채택했다. 이를 위해 외국 정부가 요청할 때 미국 정부가 달러를 금과 태환할 것을 의무화했다. 또 전간기 동안에 발생한 경쟁적인 평가절하로 인한 폐해를 방지하기 위해 고정환율제를 실시했다. 브레튼우즈체제는 금융자본의 국제적 이동을 금지하고 고정환율제를 유지함으로써 민족국가에게 경제정책의 상대적 자율성을 부여했다.
초민족적 법인자본은 크게 세 단계를 거치면서 세계경제를 재조직했다. 초기에 초민족적 법인자본은 보호무역장벽에 의해 차단된 해외시장에 진출하기 위해 해외자회사를 설립한 후, 현지생산을 통해 시장을 장악했다. 그리고 자회사에서 생산된 상품을 무역장벽이 낮은 다른 국가, 주로 미국으로 수출했다. 마지막으로 법인자본은 민족경제의 경계를 초월한 수직적 통합을 통해 세계적 분업을 기업내 분업으로 재조직했다.
자본의 초민족화는 자본과 상품의 국제적 흐름을 19세기와 다른 형태로 변형시켰다. ‘장기 19세기’에도 다국적 자본이 존재했으나 이들은 해외에서 획득한 이윤을 본국으로 송금함으로써 민족 경제의 무역수지와 환율의 안정에 기여했다. 그러나 20세기 초민족 자본은 더 이상 해외에 진출한 민족자본이 아니라 모국의 민족경제와 운명을 공유하지 않는 자본, 민족경제를 초월한 자본이다.

브레튼우즈체제의 붕괴
미국은 법인자본의 초민족화로 인해 1970년대 초반부터 무역수지적자가 누적되기 시작했다. 베트남전쟁을 통해 막대한 양의 달러가 해외로 유출되었고 세계시장에 과잉달러가 축적되고 이것이 유로달러시장에 집중되면서 미국 정부는 해외 달러를 통제할 수 없게 되었다. 런던의 금시장에서 1960년대 초반부터 금에 대한 투기가 발생하면서 브레튼우즈체제는 동요하기 시작했다. 금의 시장가격을 온스 당 35달러의 공식가격 이상으로 인상하려는 압력이 가중되면서 금에 기초한 고정환율제가 위기에 처했던 것이다. 1960년대 후반부터 프랑스를 위시하여 달러와 금의 태환에 대한 요구가 급증하자 1971년에 닉슨 정부는 일방적으로 금태환을 중지했다. 그 후 서유럽과 일본을 중심으로 달러의 가치를 온스 당 38달러로 평가절하하는 스미소니언 협정이 체결되었다. 그러나 미국은 달러의 공식적 평가절하에 반대하면서 이 협정을 무시했고 결국 1973년 3월에 고정환율제가 최종적으로 붕괴하였다.
고정환율제가 붕괴된 이후, 국제통화기금의 특별인출권을 통해 세계화폐로서 달러를 대체하려는 논의가 시작되었다. 그런데 1973년 12월에 석유수출국기구가 원유의 가격을 4배 가까이 인상하면서 1차 석유위기가 발발했다. 이에 미국은 석유달러를 흡수하기 위해 미국계 초민족은행에 대한 규제를 완화했다. 석유달러가 초민족은행을 통해 환류되면서 새로운 세계화폐를 창조하고 자본통제를 다시 강화하려는 시도들이 무산되고 결국 순수한 달러본위제와 변동환율제로 전환되었다.
변동환율제는 세계경제에서 기축통화로 기능하는 달러, 엔, 마르크 사이에 공식적 평가가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기존 제도의 해체를 의미했다. 환율의 급격한 변동은 자본의 수익성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기 때문에 자본은 환차손을 회피하기 위해 선물이나 옵션 같은 다양한 파생금융상품을 사용했다. 그 결과 외환거래의 규모가 급격히 증가했는데 그 증가율은 무역거래나 해외직접투자의 증가율을 훨씬 상회했다. 국제결제은행에 따르면 외환시장의 1일 거래액은 1989년 5천7백억 달러에서 2004년 1조9천억달러로 급증했고 이 중 단 5-8%만 무역과 투자에 관련된 것으로 추정된다. 외환시장 자체가 실물경제로부터 상대적 자율성을 획득함으로써 외환거래 자체가 시세차익을 겨냥한 투기의 대상이 되었다. 환율의 불안정성과 외환투기는 상호 강화를 통해 외환시장의 급격한 팽창을 가져왔다.
외환시장의 거대한 팽창과 환율의 극심한 변동으로 나타나는 국제화폐제도의 불안정성은 금융위기의 가능성을 내포한다. 국제적인 자본통제가 유효했던 1960년대까지 외환위기는 만성적인 국제수지적자가 발생한 국가에서만 일시적으로 발생했고 그것이 미치는 경제적 파장도 크지 않았다. 그러나 브레튼우즈체제가 붕괴한 이후 금융자본의 국제적 이동이 급증하면서 외환위기는 일반화된다. 게다가 외환위기의 경제적 파장은 지역적/세계적으로 확산된다.

초민족은행 중심의 금융세계화
1958년에 유로달러시장, 1963년에 유로채권시장이 형성되면서 국가의 규제를 받지 않는 새로운 초민족적 금융시장이 형성되기 시작한다. 이 시장을 창설한 것은 영국의 은행들이었지만 점차 미국계 은행들이 참여하면서 유로시장을 주도했다. 유로시장은 중앙은행의 지불준비금 요구에 종속되지 않았고 은행 간 거래가 높은 비중을 차지했기 대문에 원리상 신용창조가 용이했다. 그리고 민족적 금융규제에 종속되지 않았기 때문에 높은 이자율과 조세혜택 등이 제공되었다. 1960년대 중반부터 이윤율이 하락하면서 초민족적 법인자본이 모국으로 송금하지 않은 해외 이윤을 생산에 재투자하는 대신 유로시장에서 운용하면서 이 시장은 급성장했다. 또 1973년 석유위기로 산유국의 막대한 석유달러는 유로시장이 팽창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이렇게 해서 초민족은행을 중심으로 한 금융세계화가 시작된 것이다.
1970년대는 미국이 경제불황을 극복하기 위해 신용팽창정책을 실시했기 때문에 저금리기조가 유지되었다. 실질금리가 제로 또는 마이너스인 상황에서 주변부의 국가들은 값싼 해외신용에 의존하여 공업화를 추진했다. 마이너스 실질금리가 유지되는 상황에서는 외채의 증가가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1979년 이란혁명과 2차 석유위기가 발발하고 달러위기가 발생하면서 일부 산유국들은 달러를 기피했고 연준의장인 볼커는 고금리정책을 통해 달러위기를 극복하고자 했다.
민족화폐로서 달러가 세계화폐로서의 지위를 유지하는 조건은 금과의 태환을 보장하는 것인데, 이 같은 조건이 부재한 상황에서 달러를 세계화폐로 사용하기 위해서 미국은 해외의 달러유동성을 유지하면서도 과잉달러를 흡수해야 했다. 볼커의 고금리정책은 세계화폐로서 달러의 지위가 상실되는 것을 막기 위해 해외의 과잉달러를 흡수하려는 조치였다. 달러의 쇠퇴를 막고 부채-인플레이션 순환을 단절시키기 위해 연준이 미국의 이자율을 급속하게 인상한 결과 적자재정을 중심으로 하는 재정정책은 약화되었고 통화량에 대한 엄격한 통제와 이자율의 탈규제(고금리), 신축적인 환율변동(강한달러) 같은 화폐정책이 전면에 부상했다. 동시에 금융규제가 폐기되고 반독점법에 입각한 기업규제가 약화되면서 금융과 기업에 대한 탈규제가 일반화되었다.
이에 따라 케인즈주의 하에서 억압되었던 금융이 해방되었고 화폐, 금융제도는 급속하게 변화했다. 규제장벽이 점차 약화되면서 이전에는 분리되어 있는 금융기관들은 통합을 추진하거나 각각의 금융기관의 전통적 시장을 공격하면서 다양한 금융상품을 개발했다. 그러나 금융자유화의 효과는 모순적이었다. 그것은 금융의 권력을 확대했지만 금융의 불안정성을 심화시켰다. 연준은 규제를 벗어난 은행의 새로운 신용화폐들을 관리할 수 없었다. 연준의 통제를 벗어난 새로운 금융상품은 수익성이 높은 대신 위험도 높았다. 금융의 불안정성은 이자율상승과 부채증가를 일반화했고 채무불이행의 상황이 빈발했다. 특히 인플레이션이 만연했던 1970년대 낮은 이자로 달러를 대부 받았던 신흥공업국은 고금리로의 전환 이후 외채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게다가 자본도피에 의해 외채문제가 악화되었다. 결국 1982년 8월 멕시코의 파산 선언을 시작으로 남미를 비롯한 제3세계 외채위기가 폭발하였다.
채무불이행으로 폭발한 부채위기는 은행들의 채무상환시기의 재조정을 강제했고 은행들은 추가적인 손실을 회피하기 위해 대부의 팽창을 자제했다. 대부자본의 비용이 급증한 상황에서 법인자본은 주식발행, 유보이윤 적립 등 자기자본의 비율을 증가시킴으로써 은행에 대한 의존을 축소해갔다. 전통적인 고객을 상실한 은행은 수익성이 높은 투자처를 발견하기 위해 모험적인 투자를 하게 되었다. 전통적인 대부업무를 좀 더 위험한 영역으로 확대했던 전략은 악성채무의 증가 때문에 더 이상 유지될 수 없었고 대신 은행들은 과거의 대부업무에서 벗어나서 새로운 전략, 즉 ‘부채의 증권화’와 증권관련 업무를 확대, 심화했다. 이에 따라 모기지론, 자동차할부금융, 신용카드매출채권 등 은행의 전통적인 금융자산이 자본시장에서 거래될 수 있는 증권으로 변화했다. 은행은 자회사 설립의 형태로 규제를 회피하면서 증권시장에 참여했다.

증권시장 중심의 금융세계화
1980년대 중반부터는 연금기금, 투자신탁기금, 금융화된 초민족적 법인자본 등이 새로운 금융투자자로 등장했다. 이들이 주도하는 금융세계화는 대부자본이 아니라 가공자본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가공자본의 급속한 성장을 가져온 핵심적인 원동력은 주식시장이었다. 주식시장의 세계적 팽창을 가져온 첫 번째 계기는 영국이 외국인에 의한 직접투자와 증권투자를 모두 허용하는 금융개혁을 단행한 이른바 ‘금융빅뱅’이었다. 영국이 주식시장을 통해 해외자본을 적극적으로 흡수함에 따라 미국을 비롯한 중심부의 다른 국가들도 잇달아 주식시장을 개방했다. 그 후 해외증권투자는 비약적으로 증가했다.
주식시장의 세계적 팽창을 가져온 두 번째 계기는 신흥시장의 출현이었다. 1982년 외채위기가 발생한 이후 채무국이 수입억제 정책을 수용하는 조건으로 원리금 상환을 재조정해주는 부채-부채전환을 골자로 하는 볼커 플랜이 제시되었다. 그러나 수입제한은 채무국 경제의 생산력 발전을 저하시켰기 때문에 이들의 원리금 상환능력은 더욱 약화되었다. 이에 따라 1985년에 발표된 베이커 플랜은 자본재 수입 및 외국인 소유에 대한 제한 철폐, 국영기업의 사유화, 균형예산 등 채무국의 생산성을 높이기 위한 경제개혁을 촉구했다. 그러나 상업은행 및 국제통화기금과 세계은행이 채무국의 경제개혁에 필요한 장기차관을 거부함으로써 베이커 플랜 역시 실패로 돌아갔다. 베이커 플랜이 발표된 이후 달러로 표시된 부채를 채무국의 민족화폐로 표시된 증권투자로 전환하는 부채-증권전환이 확산되기 시작했고 1989년 이를 외채문제의 해결책으로 공식화한 브래디 플랜이 발표되었다. 이를 계기로 채무국의 금융시장이 개방됨으로써 신흥공업국은 신흥시장으로 변모하였다. 신흥시장은 1994년 멕시코의 외환위기, 나아가 1997년 동아시아의 외환위기를 계기로 급속히 발전하였다.
1990년대 중반부터 다시 급증한 인수/합병의 지배적 형태는 비공개기업의 차입매수가 아니라 대규모 공개기업의 합병 또는 일부 사업부문의 흡수였다. 이러한 인수/합병은 자본의 집중을 통해 이윤량을 증대시켰고 부진한 부문으로부터 자본을 철수시키고 구조조정을 추진하는 방법이 될 수 있었다. 주주들은 더 많은 배당을 위해 관리자들의 성과에 지속적인 압박을 가했고 관리자들은 이에 대응해서 대규모 구조조정을 단행함으로써 기업의 실적과 재무구조를 개선했다. 화폐적 토대와 괴리된 가공자본의 지배 속에서 관리의 기본적 기능은 사회적 비용과는 상관없이 주주의 배타적 이익을 위해 이윤율을 극대화하는 활동에 종속되었다.
증권시장의 폭발적 성장에 기초한 금융세계화가 전개되면서 전통적으로 지배적인 금융기관인 은행의 비중은 감소하고 미국과 영국의 연금기금과 투자신탁기금 같은 비은행 금융기관이 금융시장의 주요 행위자로 등장했다. 또 가공자본 중심의 금융세계화는 초민족적 법인자본의 금융적 축적을 촉진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초민족적 법인자본은 더 이상 산업자본이 아니라 지주회사를 중심으로 조직된 ‘산업을 지배적 요소로 하는 금융그룹’으로 변모했다. 금융법인기업의 이윤 중에서 금융적 활동에 따른 이윤(이자, 배당금, 자본이득 등)이 차지하는 비율이 확대된 것에서 이러한 변화를 확인할 수 있다. 예컨대 미국의 비금융법인기업 전체가 획득한 이윤에 대한 금융이윤의 비율은 1970년 10%미만에서 1980년 20%, 1990년 45%로 상승하였다.
기존의 은행과 법인기업이 증권시장의 행위자로 변화하면서 1990년대 씨티은행, 모건체이스 같은 대규모 상업은행들이 증권업무를 중심으로 재편되었다. 상업은행과 투자은행을 분리시켰던 글래스-스티걸은행법은 유명무실해졌고 결국 1999년에 양자의 결합을 허용하는 금융서비스현대화법으로 대체되었다. 동시에 골드만삭스, 모건스탠리, 메릴린치 같은 투자은행은 주로 기관투자가를 상대로 증권을 대규모로 인수하거나 거래했다. 또한 비금융법인기업도 금융활동을 다각화했다. 1990년대 말 미국의 비금융법인기업은 실물자산 90%이상의 금융자산을 보유했다.

금융세계화와 금융위기
1990년대 가공자본의 지배 속에서 본격화된 자본의 금융화는 신자유주의 이념과 정책에 의해 뒷받침되었다. 예컨대 중앙은행은 금리생활자의 구매력을 보호하고 증권시장에 대한 신뢰를 강화하기 위해 인플레이션을 적극적으로 억제하는 활동을 펼쳤다. 화폐정책은 금융의 이익에 호의적인 정책을 강제하기 위한 결정적 수단이 되었다. 화폐정책의 중간목표는 통화량에서 이자율로 수정되었고 플러스의 실질금리를 유지하는 선에서 저금리정책이 추진되었는데 이는 주가와 반비례 관계를 갖는 이자율을 낮게 유지해서 증권시장을 부양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자본의 금융화와 신자유주의적 정책개혁은 이윤율 하락과 그에 따른 구조적 위기의 결과일 뿐이며 대안적인 축적체계와 제도가 될 수 없었다. 오히려 그것은 기존의 화폐/금융제도를 역전/해체함으로써 금융위기의 가능성을 증가시켰다. 1980년대에 은행 중심의 금융화는 제3세계 외채위기를 야기했고 이는 은행위기로 이어졌다. 1990년대에 증권시장 중심의 금융화도 금융위기의 형태를 변화시켰을 뿐이었다. 대부자본의 팽창이 채무불이행과 은행파산을 야기했던 반면, 가공자본의 팽창은 투기와 거품으로 인한 증권시장 붕괴를 야기했던 것이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2000년 신경제 거품의 붕괴로 인한 증권시장의 위기였다.이 위기는 결국 ‘연착륙’으로 귀결되었지만 증권시장붕괴의 위험은 사라지지 않았다.
현재 가공자본 중심의 금융세계화는 미국의 재정적자와 무역적자, 즉 ‘이중적자’의 지속적인 누적에 기초하여 진행된다. 미국은 동아시아로부터의 수출달러환류와 유럽/중남미로부터의 자본도피를 통해 자본을 수입하면서 이중적자를 유지할 수 있었다. 미국이 이중적자를 유지할 수 있는 것은 결국 달러의 발권이익에서 기인한다. 브레튼우즈체제가 붕괴한 이후에도 미국의 군사력에 의해 뒷받침되는 달러를 대체할 수 있는 화폐는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 세계화폐의 지위를 둘러싼 경쟁은 해당 국가들 사이의 정치적/군사적 갈등을 야기할 수 있다. 그러나 사회주의 진영이 붕괴한 이후 미국의 군사력은 다른 민족국가들을 압도할 뿐만 아니라 유럽연합과 일본은 미국에서 사실상 군사적으로 종속되어 있기 때문에 유로와 엔은 세계화폐로서 달러를 대체할 수 없다.
그러나 가공자본 중심의 금융세계화와 미국의 이중적자는 무한정 지속될 수 없다. 그것은 한편으로 금융적 축적이 잉여가치를 생산할 수 있는 토대를 지속적으로 침식하기 때문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이중적자로 표현되는 미국의 부채경제가 지속될 수 없기 때문이다. 미국의 이중적자가 일정 수준을 초과하면 세계적 차원의 금융위기가 초래될 것이다.


전쟁과 평화운동의 역사와 쟁점

근대적 전쟁의 특징

자본주의와 함께 발전한 현대의 전쟁은 크게 두 단계를 거치면서 발전한다. 첫째, 중세 말부터 무역혁명과 중상주의를 계기로 상인자본과 전쟁이 결합되고 전쟁이 경제적 목적에 종속되기 시작했다. 둘째, 산업혁명이 발생하고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 발전하면서 전쟁의 산업화가 진행되었다. 영국 헤게모니에서 무기 생산의 산업혁명은 무기의 대량생산을 가능케했고 교통통신혁명은 전쟁의 규모와 속도를 높이고 지휘 통제체제를 강화하였다. 러시아가 남진하고 영국, 프랑스가 이를 저지했던 1853년 크리미아 전쟁은 최초의 산업화된 전쟁으로 군비의 성능이 병사의 개인적 용맹이나 조직력을 압도하기 시작했음을 보여주었다.
1차 세계전쟁을 전후로 전쟁의 산업화는 더욱 심화되었다. 1870년대 다른 유럽국가들의 군비기술 발전에 위기의식을 느낀 영국은 해군을 중심으로 군산복합체를 형성하기 시작했다. 군비생산에서 대규모 산업자본의 중요성이 커지면서 군대와 민간기업이 긴밀히 결합하기 시작했다. 프랑스 혁명 시기에 등장한 징병제는 19세기 후반에 군사경쟁의 격화와 함께 유럽전역으로 확산되었는데 군산복합체의 등장과 징병제의 일반화는 산업화된 전쟁과 민족국가간 전면전의 결합을 의미했다.
2차 세계전쟁을 거치면서 군산복합체는 미국에서 군산학복합체로 발전한다. 이것은 과학기술이 산학협동이라는 형태로 법인자본에 포섭된 미국 자본주의의 특수성에서 유래했다. 1, 2차 세계전쟁을 계기로 미국의 군사기술은 과학 기술과 밀접히 결합되어 발전했다. 2차 세계전쟁은 과학 기술의 군사적 중요성을 보여주었다. 대표적인 것이 공군에서의 전술경쟁으로서 폭격기술이었는데 폭격기는 적국의 상공 깊숙이 침투하여 폭격을 가함으로써 적국의 산업적, 경제적 토대를 붕괴시키고 대중적 사기를 꺾었다.
미국 헤게모니에서는 전쟁이 자동화된 대량살상전쟁으로 변모한다. 전후 냉전이 전개되는 과정에서 미국은 소련의 공격에 대한 상시적 대비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첫째, 무기의 살상력을 높이는 원자탄과 수소폭탄 등의 핵무기 개발을 추진하고 둘째, 자동화된 미사일 방어체제를 구축하기 시작한다. 전쟁의 이러한 새로운 양상은 민족국가 간 전면전을 초과하는 것이었다. 궁극의 살상력을 확보함으로 인해 전쟁은 인류의 절멸을 야기할 수 있게 되었다. 군대의 전문화와 함께 인민이 전쟁에서 배제됨으로써 민족이 전쟁의 주체가 될 수 있는 물질적 조건은 소멸하였다.
이러한 세계전쟁은 역사적 자본주의 분석 하에 이해되어야 한다. 아리기는 역사적 자본주의 분석에서 세계전쟁은 헤게모니가 붕괴된 결과이며 역사적인 헤게모니의 성격을 통해 설명되어야 할 대상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네덜란드 헤게모니 이후 세계전쟁은 헤게모니의 역사 속에서 이해될 수 있다. 영국은 산업혁명을 통해 안정적인 축적체계를 형성하고 제국주의 팽창전략에 따라 유럽 외부의 세계를 식민지로 포섭하고 국제 무역망을 형성한다. 19세기 후반 자본주의의 구조적 위기가 시작되면서 실물적 축적은 금융적 축적으로 전환된다. 경쟁국들은 영국을 모방하여 식민지 확보에 나선다. 제국주의 열강들 사이에서 식민지 쟁탈 경쟁이 격화되면서 1,2차 세계전쟁이 발생하고 마침내 영국 헤게모니는 최종적 위기에 직면한다. 1,2차 세계전쟁을 거치면서 확립된 미국의 헤게모니는 영국의 자유무역과 달리 자유기업을 토대로 세계시장을 재건한다. 전후 베스트팔렌 체계가 아시아, 아프리카로 확대되면서 새로운 민족국가들이 세계시장에 포섭된다. 미국은 국제기구를 통해 이러한 민족국가들의 주권을 일정하게 제약함으로써 미국의 지배가 공식적으로 관철되는 국가간 체계를 형성한다. 나아가 소련과의 냉전과 군비경쟁은 ‘공포의 균형’에 의한 장기간의 평화체계를 창출한다. 이는 미국의 법인자본이 초민족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 조건이 되었다.

새로운 전쟁의 양상: 군사세계화

1970년대 미국의 축적체계가 구조적 위기를 겪으면서 실물적 축적에서 금융적 축적으로 전환된다. 1980년대 초에 금리인상과 긴축정책이 실시되면서 세계의 유휴자본이 미국으로 집중되고 국내의 과잉자본과 함께 금융적 축적이 나타난다. 미국은 이를 이용하여 대대적인 군비확충을 시도하고 그 결과 무리한 군비경쟁을 감당할 수 없었던 소련이 붕괴한다. 이에 따라 미국 헤게모니 하에서는 쇠퇴하는 헤게모니 국가에 금융력과 군사력이 동시에 집중되는 양상이 발생한다. 이 때문에 전쟁은 중심부가 금융적 축적을 지속할 수 있는 안정적인 세계적 통치성을 확보하기 위해 주변부의 갈등을 관리하는 양상으로 전개된다. 즉 금융세계화를 보완하는 군사세계화가 동시에 진행되며 군사세계화의 최대 목표는 초민족자본의 안정적인 축적을 보장하는 것이 된다. 예컨대 부시는 2002년 <연두교서>에서 세계화의 안정성 유지를 미국의 ‘사활적 이익’으로 정의하고 이를 수호하기 위한 예방적, 선제적 군사개입을 선언한 바 있다.
군사세계화에 따른 새로운 전쟁은 지정학적 위치에 따라 상이한 양상으로 전개되는데 주변부 지역은 세계경제에 선별적으로 포섭되고 이와 함께 선별적 배제라는 새로운 양상이 나타난다. 우선 선별적 포섭이 이루어지는 유고슬라비아나 라틴아메리카 같은 지역에서는 내전이 전개된다. 그러나 선별적 배제지역이더라도 중심부 국가의 이해가 달려있는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같은 지역에는 직접적인 군사개입이 벌어진다. 한편 선진국들의 통치 프로그램에서 완전히 방치된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지역은 완전 배제 지역으로서 생태파괴로 인한 기근과 질병이 만연하고 국가붕괴가 나타난다.
새로운 전쟁은 중심부 내부에서도 진행되는데 금융화와 구조조정에 대한 대중적 저항이 빈발하면서 이에 대응하는 ‘폭동과 테러와의 전쟁’이 진행된다. 금융세계화에 따른 민족국가의 동요와 새로운 전쟁의 출현은 무중심적인 약탈자의 침략 속에서 사회가 붕괴하고 전쟁상태가 만연했던 중세 말기와도 유비된다. 이러한 ‘신중세적 무질서’는 금융세계화를 뒷받침하는 군사세계화의 일반적 양상이다. 미국의 금융력과 군사력의 우위를 통해 축적체계의 위기가 일정하게 관리되면서 중심부의 전쟁 가능성은 높지 않은 대신, 그러한 통치성을 유지하기 위한 새로운 전쟁이 주변부 지역으로 확산될 가능성이 더 높아진다.
인류의 절멸을 가능케 하는 대량살상무기의 발전과 인간을 배제하는 지휘/통제체계의 발전은 더 이상 전쟁이 사회 변혁의 수단이 될 수 없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군사세계화에 대응하는 평화운동은 평화라는 가치의 원칙적 수용을 요구하며 이러한 결합을 위해서는 금융자본이 주도하는 ‘위로부터의 세계화’에 반대하여 사회운동이 주도하는 ‘아래로부터의 세계화’를 지향하는 대안세계화운동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대안세계화운동으로서 반전운동은 군사세계화의 원인이 되는 금융세계화를 비판하고 초민족적 연대와 새로운 공동체의 건설을 지향해야 할 것이다.

군사세계화와 결합하고 있는 금융세계화에 대한 세계사회운동의 대안은 미국 정부가 내놓은 것처럼 위험관리가 아니라 전면적인 금융억압이다. 유럽의 금융거래과세연합(ATTAC)은 주류에서 언급하는 금융개혁 수단들이 금융자본주의를 유지하고 부자들을 보호하며 단지 금융투명성과 같은 표피적 개혁을 추진한다면서 비판하면서 신자유주의의 중심축 특히 자본의 세계적 이동성을 중단시키는 것이 시급하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새로운 금융체계를 위한 기본적 필요조건으로서 1)‘시장의 자기규제’를 대체하는 새로운 국제경제질서 2)금융시장의 실물경제 지배의 해체 3)‘투기꾼’이 그 대가를 지불한다는 원칙 4)유럽연합(EU)의 개혁과 유럽중앙은행에 대한 민주적 통제 등을 제시하고 있다. 물론 파국적 위기를 낳는 금융메커니즘에 대한 규제를 강화한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자본주의 경제가 안정과 번영을 구가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자본에게 주어진 특권적 권력을 조금이라도 빼앗아오기 위한 ‘정세적’ 문제제기가 필요하고 무엇보다 이를 통해 금융세계화의 본질을 폭로하는 것이 핵심적일 것이다. 민중운동 진영은 현재의 경제위기가 자본의 이윤율 하락을 만회하기 위한 지배계급의 신자유주의적 전략에 의해 초래되었음을 폭로하고 경제위기의 책임을 노동자, 민중에게 전가하려는 자본에 맞서 광범위하고 지속적인 투쟁을 해나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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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국제 이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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