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광주전남지부


사회운동

사회진보연대 계간지


2009.11-12. 9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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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운동과 여성③ 클라라 체트킨

독일 사회주의 운동과 세계 여성노동자 운동의 헌신적 지도자

김유진 | 조직국장
클라라 체트킨(Clara Zetkin, 1857.7.5.~1933.6.20.)은 ‘세계 여성의 날’을 최초로 제안한 독일의 혁명가로 매년 3월 8일이면 우리는 그녀의 이름을 듣게 된다. 세계 여성의 날은 1910년 2차 국제 여성노동자 회의에서 제안되었고 1911년 처음 개최되었다. 첫 세계 여성의 날 행사에서 세계 각국 여성노동자들은 무장한 경찰에 맞서 대규모 투쟁을 벌여 여성노동자의 힘을 확인시켰다. 1917년 러시아 혁명의 시작도 세계 여성의 날에 즈음한 여성들의 횃불로부터였다. 매년 3월 우리는 현재 여성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가 무엇이며 이에 맞서 어떻게 싸울 것인가를 고민한다. 그 때마다 우리는 오늘에 되살아나는 클라라 체트킨을 만난다.
이번 연재에서는 사회주의 여성운동의 지도자 클라라 체트킨의 삶 가운데 노동조합과 당의 헌신적 조직가로서, 세계 여성노동자 운동의 지도자로서, 수정주의 노선과 제국주의 전쟁에 반대한 평화주의자, 국제주의자로서의 모습들을 살펴보고자 한다. 이는 사회변혁과 여성해방을 결합시키려 한 혁명가의 삶으로부터 오늘날 우리의 나아갈 바를 고민하기 위해서다.
클라라 체트킨은 76년에 이르는 일생의 대부분을 사회주의 이념의 실현, 여성운동의 건설과 확산을 위해 헌신했다. 격변하는 시대 속에 격정적 투사로 살았던 긴 세월에 비해 그녀의 삶과 고민을 깊숙이 들여다 볼 수 있는 자료는 많지 않다. 다만 그녀의 수많은 연설과 기고, 편지의 내용이 책으로 남아있고, 그녀가 편집장이었던 잡지 『평등』을 통해서 일부를 접할 수 있다. 그녀의 일생이 길고 치열했던만큼 먼저 당시의 시대적 배경과 함께 그녀의 일생을 짧게 살펴보고 그 중에서 주목할 만한 몇 가지 장면으로 다시 들어가보자.

식지 않는 이상과 열정을 가진 혁명가 클라라 체트킨

클라라 체트킨이 혁명운동에 헌신했던 당시는 독일이 영국의 세계적 헤게모니와 경쟁하며 산업과 무역을 발전시키고 제국주의 정책을 펼쳤던 시기다. 급격한 산업의 발전은 독일 사회민주당(SPD, Sozialdemokratische Partei Deutschlands, 이하 독일사민당)과 자유노동조합의 급격한 성장 배경이 되었다. 독일사민당은 1914년 당시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사회주의 정당이었고, 자유노동조합 또한 유럽 최대의 노동조합으로 성장했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까지에 이르는 고도의 경제 성장에서 여성노동자의 산업 부문 진출도 급격히 증가했다. 독일의 여성 대중 조직화는 독일사민당의 직접적인 영향 하에 급격히 성장했다.
1908년 이전까지는 여성의 정치활동이 금지되어 있었고, 비스마르크의 반사회주의법 하에서 사회주의 운동도 많은 탄압을 받았지만 사회주의 여성들의 운동은 성장했다. 독일의 여성운동은 사회 경제적 조건의 급격한 변화 속에서 여성들의 사회적 지위가 변화함에 따라 구시대적 여성억압을 타파하고자 하는 여성들의 의지로부터, 그리고 여성 노동자를 사회주의 혁명에 동원하기 위한 독일사민당의 필요로부터 시작되고 조직되었다. 사회주의 여성노동자운동은 당시 상당한 전통을 가지고 있던 부르주아 여권운동의 대중적 영향을 능가해 20만에 이르는 여성들을 당과 노조로 조직했다. 클라라 체트킨은 여성 노동자들을 여기에 동참시키고 여성 문제를 제기하는 데 열정적인 활동을 벌였다. 특히 그녀는 여성 억압의 원인을 자본주의에 대한 마르크스적 분석에서부터 도출하고 마르크스주의와 여성운동을 결합시키기 위해 일생을 헌신한 활동가로 평가되고 있다. 나아가 그녀는 국제 여성노동자 회의를 창설하고 세계 여성의 날을 제안, 조직하는 등 사회주의 여성운동의 국제적 확산에 크나큰 기여를 했다.
그러나 이내 독일의 눈부신 경제성장과 제국주의 정책 하에 수정주의가 등장하고 제1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독일사민당은 분열한다. 체트킨은 로자 룩셈부르크, 칼 리프크네히트 등과 함께 스파르타쿠스단에 합류하고 독일 공산당 창설에 동참했다. 이들은 독일사민당이 의회주의를 통한 사회주의로의 이행이라는 수정주의를 수용하고, 국제주의적 이상을 기각하고 제국주의 전쟁에 찬성해 민족주의적 경향을 강화하는 데 맞서 격렬한 투쟁을 벌였다. 1918년과 1919년 독일 노동자들의 혁명적 봉기가 독일사민당과 군대에 의해 패배한 후 로자 룩셈부르크와 칼 리프크네히트는 잔혹하게 암살당했다. 다행히 죽음을 피할 수 있었던 체트킨은 그 후 1919년 결성된 독일공산당(KPD, Kommunistische partei Deutschlands)의 중앙위원회에서 일하며 로자와 칼의 이상을 이어가고자 했다. 1920년 이후 그녀는 제3인터내셔널(코민테른) 집행위원회의 멤버로 러시아와 베를린을 오가며 활동을 벌인다. 코민테른의 서기 활동과 병마로 인해 소련에 머무르면서 그녀는 국제적색원조(MOPR, International Red Help)라는 조직을 지도하기도 했다. 미국에서 인종차별에 의해 살인혐의를 뒤집어쓰고 사형당할 위기에 처한 스코츠보로 흑인 청년들을 구제하기 위해 국제적 지원을 조직했던 일은 그 대표적 활동이다.
그녀의 마지막 투쟁은 파시즘과 맞섰던 것이다. 그녀는 1932년 독일 연방의회 개원사를 하러 나서서 파시즘에 맞설 노동자계급의 연합전선을 건설하자고 연설했다. 당시 연방의회 제 1당이었던 나치스 의원들 앞에서 파시즘을 격렬하게 공격하는 연설을 한 것이다. 70대 중반 클라라 체트킨의 목소리는 그녀가 일생동안 그랬던 것처럼 두려움 없이 당당했다. 그녀는 1933년 6월 세상을 떠날 때까지 제국주의 전쟁에 맞선 활동에 헌신했다.
이렇게 짧게 살펴보아도 혁명과 전쟁의 시대 한 가운데에서 한 치도 비켜서지 않고 열정적으로 살았던 그녀를 느낄 수 있다. 이제 클라라 체트킨의 탄생과 성장, 그리고 그녀 삶의 중대한 시점들로 다시 돌아가보자.

클라라 아이스너의 탄생과 사회주의자로의 성장

우리가 기억하는 여성 혁명가들 대부분이 그렇듯 클라라 체트킨 또한 교육받은 여성이었다. 클라라 아이스너(Clara Eissner)는 1857년 섬유노동자들이 거주하는 마을 뷔데라우에서 오르간 연주자인 아버지 고트프리드 아이스너와 프랑스 혁명의 이념을 신봉했던 어머니 조세핀 비탈레 사이에 태어났다. 어머니 조세핀은 교육받은 여성으로 뷔데라우에서 여성들을 위한 교육 협회를 설립하기도 했고, 종교제도에 대해 강력하게 비판해 남편과 대립하기도 했다. 조세핀은 클라라가 평생 동안 여성의 권리에 대해 관심을 갖고 헌신하게 되는 데에 큰 영향을 주었다.
클라라의 부모는 교육을 위해 1872년 라이프찌히로 이사해 곤궁한 생활을 했다. 당시 여성은 김나지움에 입학할 수 없었지만 명석했던 클라라는 반슈타이버대학 사범학교에 무료로 입학했다. 이는 여성에게 허용된 당대 최상의 교육과정이었고, 교육받은 여성들이 가질 수 있는 직업은 대개 교사였다. 대학에서 그녀는 아우구스테 슈미트, 루이제 오토 등을 스승으로 만나 여성 권리 운동에 대한 의지를 높였고 사회주의에도 관심을 갖게 된다. 이 때 배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영어는 그녀가 나중에 국제 사회주의 운동에서 활약할 수 있는 바탕이 되었다. 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하고 교사자격증을 취득한 클라라는 러시아 망명학생그룹과 인연을 맺고 독일사회민주주의자들의 모임에 참석해 빌헬름 리프크네히트 등 사회주의자들과 만났다. 그녀는 이후 스승들뿐 아니라 가족과도 인연을 끊고 마르크스주의를 더욱 열심히 공부하기 시작했다. 이 때 만난 새로운 스승 오십 체트킨(Ossip Zetkin)은 러시아 망명자로, 후에 그녀와 사실혼 관계로 10년을 함께 한다. 그는 목수 일을 하며 혁명 활동을 하고, 모임이 끝난 후 클라라에게 과학적 사회주의를 강의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클라라는 오십과 함께 노동자들에게 강의도 할 수 있게 되었다.
1878년 중반에 클라라는 독일사회민주당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조직적으로 활동하지만, 여성의 정치 활동이 법적으로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에 당원이 될 수는 없었다. 같은 해에 비스마르크의 반-사회주의자법이 통과되자 그녀는 당과 추방된 지도자들을 위해 자금을 모으며 비합법 활동을 벌였다. 1880년 오십 또한 체포되어 독일에서 추방당하자 그녀는 독일을 떠나 오스트리아, 스위스 취리히로 옮겨가며 당 중앙조직을 재건하고 당 문헌을 독일에 배포하는 활동을 했다. 1882년 파리로 가서 오십과 함께 살며 두 아들 막심과 콘스탄틴을 낳았는데, 독일 시민권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혼인신고는 하지 않았다. 파리에서의 삶은 무척 고단했다. 추방당한 사회주의자들은 직업을 구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둘은 집필, 번역 작업을 했고 클라라는 주부, 어머니, 가정교사로도 일했다. 하지만 수입은 적었고, 심지어 1885년에는 입고 있는 옷 외에 아무 것도 없이 거리로 내쫓기기도 했다. 그녀는 가사와 양육, 생계를 책임지는 열악한 일상 속에서도 정치활동에 참여하며 파리의 사회주의 노동 여성들을 결집시키는데 힘썼다. 하지만 파리에서의 고단한 삶으로 두 사람 다 건강이 나빠졌다. 클라라는 다행히 건강을 회복하지만 오십은 이로 인해 1889년 세상을 떠나게 된다.

사회주의 여성운동의 국제적 지도자로

1886년 가난과 과로로 건강이 악화되어 잠시 독일로 돌아간 클라라는 라이프찌히의 비밀회합에서 첫 연설을 하게 된다. 서른 즈음에 하게 된 첫 연설에서 그녀는 운동에서 증대하고 있는 여성들의 역할, 그리고 아우구스트 베벨의 『여성과 사회주의』라는 책에 대한 의견을 제시했다. 망명 생활에 관한 이야기와 여성문제를 다룬 연설은 대단히 인기를 끌어서 다른 그룹들에서도 요청이 쇄도했다. 몇 개월에 걸친 독일에서의 활동 후 파리로 돌아가 1889년에 오십이 사망하기까지 클라라는 가사일과 간호에 전력을 다했다. 오십의 죽음은 큰 충격이었지만, 그녀는 이내 수습하고 1889년 개최된 제2인터내셔널 창립대회 준비 조직위원회에 참가했다. 그녀는 베를린 노동여성 대표로 대회에 참가하도록 결정되었는데, 당시 대회에 참석하는 19개국 대표 400명 중 여성은 클라라를 포함해 8명이었다고 한다.
이 후 수 년 동안 인터내셔널의 서기로 활동하면서 그녀는 노동조합 운동과 당 운동에서 수많은 역할을 했다. 그녀는 제본공 노동조합 실행위원으로 활동했고, 브러쉬공, 의류, 목제공, 손장갑 제조공 등의 노동조합과 몇 개의 남부 노동조합에도 관여했다. 재단사 및 재봉사노동조합에서도 활동했다. 또 그녀는 독일 사회민주당 최초의 여성 당 집행부로 활약했다. 1908년까지는 공식적으로 당원이 될 수 없었지만, 대신 별도의 여성 집회에서 여성들의 대표를 선출할 수 있었다. 체트킨은 1892년 초부터 매년 모든 당 대회에 여성협의회 대표로 파견되도록 선출되었고 1895년에는 당 최상위 지도자 중 한 명이 되었다. 여성의 정치참여가 인정된 후 1909년에는 교육부를 책임지는 독일 사회민주당 중앙위원회에 선출되었다. 노조와 당에서 그녀의 활동은 주로 독일 전역의 당 지부를 찾아다니는 연설자 역할을 비롯해 전단 작성과 배포, 해고되거나 파업 중인 노동자 지원, 그리고 민족이나 국제적인 차원의 노동조합 대회 계획을 지원하는 것이었다. 그 중에서도 여성 노동자들을 교육하고 조직하기 위한 그녀와 여성 지도자들의 활동은 많은 성과를 낳았다.
한편 클라라 체트킨은 1891년부터 25년 간 여성 잡지『평등』의 편집장으로 활동했다. 그녀는 재정적 어려움과 내용에 대한 비판 속에서도 25년 가까이 『평등』을 지켰다. 1902년 『평등』은 독일 사민당의 공식 기관지가 되었고, 제1차 세계대전 발발 후에는 전쟁에 반대하는 여성들의 국제적 기구로 인정받기에 이른다. 그리고 1917년 클라라 체트킨은 적극적인 반전 활동으로 『평등』 편집진에서 제명된다. 그녀가 했던 많은 연설과 『평등』의 원고를 통해 여성문제에 대한 그녀의 분석과 입장의 변화를 볼 수 있다.

독일사민당의 여성문제에 대한 인식

독일사민당은 미조직된 여성들을 당과 노조에 동원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겼다. 미조직 여성들이 정치투쟁과 경제투쟁에서 우익적으로 동원되거나 남성 노동자와 경쟁하도록 활용되었기 때문이었다. 대다수 남성들은 여성들이 자신들의 일자리를 ‘훔친다’고 생각했지만 사민당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여성의 진출은 거부할 수 없는 조건이라고 보았다. 이에 여성 노동자들을 조직하는 데 당 중앙과 지역 지도자들의 활발한 지원이 이어졌다.
당시 독일의 여성노동자들은 대부분이 미숙련 노동자로 남성들도 조직되지 않은 부문에서 일했다. 여성들은 농업, 가내 노동, 목화 산업, 미숙련 직물 제조업 등에 집중되어 지리적으로 분산되어 있었고, 저임금 장시간 노동에 시달렸다. 따라서 교섭력도 없고 손쉽게 대체되었기 때문에 안정적인 조직이 어려웠다. 그래서 독일사민당으로 조직된 여성 당원들은 대개 당원의 아내인 주부였다고 한다. 한편 여성들은 투표권과 정치적 참여의 권리가 없었고, 교회의 영향을 많이 받아 대다수 여성들이 독일사민당을 불경시했다. 또한 일부 조직된 여성들은 노조와 당에 만연한 성차별주의에 밀려나기도 했다.
독일사민당이 여성 노동자 조직화에 많은 역량을 쏟은 것은 사실이지만, 사회주의로 조직된 여성의 이상적 모델은 남편의 높은 이상 추구에 헌신하는 희생적인 아내였다. 사회변혁에서 여성문제의 공백은 1910년대에 독일사민당과 자유노조연합이 20만여 여성 노동자들을 조직하는 눈부신 성과를 달성했음에도 이 후 그 성과가 유실된 것에서 드러난다.
여성문제에 대한 독일사민당과 독일 노동자운동의 공백은 독일 사회주의 운동이 가졌던 여러 공백 중 일부다. 독일의 사회주의 운동은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직접적 영향 하에 세계 최대 규모의 당과 노조를 건설하고 엄청난 노동자들의 지지를 받았음에도 수정주의와 민족주의를 수용하는 실용주의적 노선을 택한다. 독일 사민당과 노조 운동은 1870년대 독일이 통일과 함께 중화학 공업 중심의 급격한 산업화를 이루고 영국 자본주의가 유력한 경쟁자로 등장하는 상황에서 성장했다. 산업사회로의 급속한 이행은 대규모 노동력의 이동을 필요로 했다. 출신지역이나 인종, 종교, 직업, 숙련도에서 노동자간 이질성이 심화되었고 그 중에서도 여성은 전형적인 미숙련 노동자였다. 하지만 당시 독일의 노동자운동은 숙련공들을 중심으로 성장했고 노동자들의 가장 빈곤화된 집단에 대한 조직화에는 언제나 어려움을 겪었다.
독일 사민당이 여성문제를 사회주의 운동에 여성 노동자를 동원하는 문제로 기계적으로 인식했던 것은 독일 사회주의 운동의 대중적, 이론적 토대를 그 배경으로 한 것이었다. 산업의 발달은 자본가들의 산업별 조직화에도 토대가 되었고, 노동자운동을 진압하기 위한 자본의 대응도 강력해졌다. 또한 성장하는 산업은 필연적으로 더 큰 시장을 요구했고 제국적 팽창을 자극했다. 노동자운동 진압을 위한 강력한 국가 개입과 제국주의 정책 하에서 독일 노동자운동은 상대적으로 고임금 노동자들의 숙련과 지위를 방어하려는 실용적 성격을 띠면서 민족주의에 포섭되었다.
여성문제에 대한 독일 사회주의 운동의 공백은 클라라 체트킨을 비롯해 당시 여성 지도자들도 자유로울 수 없는 문제였다. 동원의 관점에서 이루어진 운동은 변혁운동과 여성운동의 기계적 결합에서 오는 수많은 한계에 부딪힐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여성노동자들의 비참한 삶을 알리고 그녀들을 조직했던 사회주의 여성들의 활동은 여성문제에 관한 이론을 진척시킬 대중적 토대를 마련했다.

여성문제에 대한 클라라 체트킨의 입장

“… 오늘날 그토록 고통스럽게 느껴지는 여성노동의 유해한 결과는 일단 자본주의 체제 자체가 소멸함으로써만 사라질 수 있다.”
1889년 파리, 2인터내셔널에서의 연설

1889년 프랑스혁명 100주년 기념일, 파리에서 개최된 2인터내셔널에서 클라라 체트킨은 ‘여성노동 철폐 주장을 비판’하는 연설을 했다. 이것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여성의 지위에 대한 그녀의 분석을 최초로 제시한 연설이었다. 당시 남성들은 일하는 여성들은 타락했고, 그들에 의해 남성의 임금이 압박받기 때문에 여성들은 가정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남성노동자와 경쟁해 임금을 떨어뜨리는 것은 여성의 노동 그 자체가 아니며, 남성노동을 더욱 철저히 착취하기 위해 값싼 여성노동을 이용하는 자본주의가 문제라고 주장했다. 산업 발전 과정에서 싼 값의 여성노동과 생산수단의 개선은 여성 노동자에 대한 수요를 증가시켰고, 여성 노동자의 유입은 남녀 노동자 간의 경쟁과 분열을 불러왔다. 체트킨은 여성의 임금이 낮은 것은 그들이 노조로 뭉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보고 남녀 노동자 전체의 이해관계에서 볼 때 여성노동자를 노동조합으로 포함시키는 것이 가장 긴급한 과제라고 주장했다. 또한 여성의 노동은 여성의 독립과 해방을 위한 가장 중요한 전제 조건이므로, 여성 노동자들은 사회주의 기치 하에서 남성과 동맹함으로써만 자신의 해방을 쟁취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체트킨의 연설은 파리 대회에서 민족의 차별 없이 남녀 노동자의 동일노동 동일임금 요구를 원칙으로 채택하도록 하는 성과를 낳았다.
한편, 당시 그녀는 여성노동자들에 대한 특별한 보호에는 반대했다. 노동계급의 일반적 이상과 여성의 이상을 분리시키지 않기 위하여 임신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여성노동자들에 대한 특별한 보호조치를 반대했다. 그녀는 자기 해방을 향한 싸움에서 여성들이 투사가 되는 데는 남성들과 전혀 다를 바가 없다고 말했다. 보호조치에 관한 당시의 입장은 당시 여권주의 운동에 대한 방어 측면도 고려되었겠지만 그녀가 아직 여성 억압의 이데올로기적 측면을 충분히 인식하지 못했다는 점을 시사한다. 모성을 부정하고 여성이 남성과는 다른 사회적 경험을 가지고 있음을 고려하지 않는 절대적 평등이란 개념은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중에 체트킨은 입장을 정정해 여성노동자에 대한 ‘보호법’을 옹호한다. 노동 여성들에 대한 법률적 보호는, 여성들이 열악한 노동으로 인해 죽음으로 내몰리는 상황에서 여성의 진정한 노동의 자유를 보장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었다. 여성은 어머니로서 가지는 특별한 기능과 더불어 취약한 사회적 지위 때문에 많은 위험에 처한다. 그 때문에 여성이 노동으로부터 철수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면 여성노동자에게는 특별한 보호가 필요하다고 입장을 정정한 것이다. 이러한 체트킨의 입장 변화는 엥겔스를 필두로 한 당시 대부분의 마르크스주의자들과 같은 것이었다. 보호입법을 통해 여성 노동자의 취약한 조직화를 보완하고 가내노동을 금지시키는 동시에 부르주아 여권주의와의 분리 선을 명확히 그으려는 맥락이었다. 그러나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보호입법을 주장하면서 여성 노동권 요구를 철회한 것은 아니지만, 국가를 여성노동의 취약성을 보완하는 도구로 활용하고자 했던 보호입법의 옹호는 운동 주체로서 여성의 자율성을 부정하는 효과를 낳기도 했다.

“여성노동의 계속적인 증가와 그 결과라는 관점에서 볼 때, …… 남성노동자들에게 하는 것과 똑같은 정도의 관심을 여성노동자들에게 기울이지 않는다면 노동운동은 자살을 범하게 될 것이다.”
『평등』, 슈투트가르트, 1894년 11월 1일

클라라 체트킨을 비롯한 사회주의 여성들은 전국 순회강연, 클럽, 교육 집회, 위원회 등을 통해 여성 대중에게 다가갔다. 여성노동자들에게 접근하는 데 따르는 어려움 때문에 그녀들은 노동계급 여성의 사회적 지위를 조사하는 데 많은 정력과 시간을 쏟았다. 체트킨은 독일 여성 노동자 현황을 발표하면서 여성노동자 조직화가 어려운 원인과 조직화를 위한 과제를 제시했다. 먼저 여성 조직화가 어려운 것은 1) 여성들이 미숙련 노동, 가내 산업에서 대다수 일하고 있다는 점, 2) 집과 공장에서 이중의 부담을 지고 있기에 시간이 없다는 점이 주요한 이유라고 보았다. 또 하나 중요하게 지적한 것은 3) 여성들의 정서적 상태였다. 여성들 대부분은 자기 일을 결혼 전의 일시적 노동이라고 여기고 있으며, 체념, 유대감의 결핍, 소심함, 공장주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스스로 나서기를 어려워한다는 것이다. 이 문제는 경제적 관계의 변화만으로 해결될 수 없으며, 여성들이 가족과 사회에서의 종속적 역할에서 비롯된 나약함과 의존성을 스스로 극복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일임을 그녀는 강조했다. 즉 여성들을 조직할 때는 그녀들의 오래된 조건과 경험에 따른 특성을 고려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조사 보고를 통해 체트킨은 남성 노동자들의 변화를 함께 주문했다. 여성노동자들이 동등하게 노조로 조직되기 위해서는 남성들이 여성노동자들을 유혹할 수 있는 여성으로 보기를 멈추어야 하며, 성적 목적으로 여성들을 괴롭히기를 그만두어야 한다고 했다. 여성들을 조직하는 것은 노동자운동에서 광범위한 대중을 포함시키는 것임을 강조하면서 남성들이 여성들을 동등한 동지로 고려하는 데 익숙해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여성들이 당과 노조 활동에서 남성과 동등하게 참여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1908년 여성의 정치 참여가 합법화되면서 기존의 여성 조직들은 대부분 당으로 통합되었다. 여성 조직의 제도적 자율성에 대한 요구도 있었지만, 여성의 분리주의를 거부하며 완전한 통합에 찬성하는 입장이 다수였다. 여성의 정치참여 합법화로 여성당원이 급증했지만, 여성협의회의 활동은 당으로의 통합 이후 여러 제약에 직면했다. 여성들 중 오직 한 명이 집행위원회에서 인정될 수 있었고, 남성들은 여전히 자신들의 대표로 여성을 선출하지 않았다. 또 독일사민당의 남성들이 아내나 딸을 당원으로 조직해야 한다는 결의사항은 약화되었다. 통합 이후 여성들은 아동노동위원회와 복지정책 영역을 장악하고 확대했는데, 이러한 외연적 확장은 오히려 여성운동의 보편적 전망을 제한했다. 1908년 이전에는 위원회 활동이 여성 조직화의 주요 경로이자 정치 참여를 고무하는 역할을 했다. 하지만 통합 이후 여성들의 활동이 여기에만 제한된 것은 1908년 이전의 여성운동과 변혁운동이 결합하기 어려웠던 것이 단지 법적 제약 때문이 아니라는 점을 보여준다. 사회주의 여성들 또한 이 분야를 여성들의 특수한 문제로 인식하는데 머물러 스스로의 전망을 제한하는 한계를 보였다.
노조운동에서도 여성들은 일상적으로 조롱의 대상이 되었다. 여성 노동자들에 대한 당시 노동자운동의 인식은 조합비 책정에서도 드러난다. 대다수의 노조들은 성별에 따라 조합비를 달리 책정했는데, 여성들의 조합비가 적게 책정된 것은 그만큼 여성의 노동이 저평가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여성 지도자들은 여성노동력에 대한 가치 평가를 높이는 중요한 조치로 여성의 조합비 인상을 주장하기도 했다.
체트킨은 당 내에서 남성들의 반여성적 편견과 싸웠다. 여성들이 여성 차별에 항의할 때 남성 지도자들은 항상 농담으로 어수선한 분위기를 만들어 넘겨버리려 했다. 체트킨은 여성의 문제제기를 웃음거리로 만드는 것은 “혁명적 이론과 결렬”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당은 실행위원회에 참석할 여성 대표 자리에서 체트킨을 끌어내렸고, 새로 선출된 루이제 찌츠는 여성조직들을 당으로 완전히 통합하고 여성운동의 입장을 당의 결정과 일치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변혁운동에서 여성해방이 갖는 의미와 여성문제의 독자성에 대한 인식의 부재로 당과 노조에서 여성운동은 후퇴하고 있었다. 반면 체트킨의 여성문제에 대한 인식은 발전하고 있었다. 초기 체트킨과 여성 지도자들은 여성문제를 경제적인 관점에서만 인식해 여성 문제의 진정한 해결은 자본주의 철폐에서만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체트킨은 여성을 상류계급, 부르주아 계급, 노동계급으로 분류하고 가족 내 여성억압의 문제는 주로 상류, 중류계급 여성과 관련된 문제로 보았다. 또 자본주의 이전의 사회에서는 여성도 생산 활동을 함께 했기 때문에 여성문제는 드러나지 않았다고 보았다. 그러나 1890년대 후반에 이르러서는 자본주의에 대한 투쟁만으로는 충분치 않다고 인식하면서 재생산과 가족 등 여성의 고유한 문제로 고민을 확장하게 된다. 이러한 변화는 『평등』이 가정주부와 어머니인 여성들과 어린이들을 위한 보충판을 제공하게 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그 전까지 『평등』은 조직된 여성들에 대한 교육과 선동을 가장 중요한 과제로 삼았다. 보충판에서는 어머니들이 이타심과 계급연대감정을 불어넣고 어린이들의 독립적 사고력을 발전시킬 것을 제안하고 있다. 또 어린이들에게 과학과 기술, 생물학, 문화인류학에 대한 글을 제공하고, 노동의 존엄성을 강조했다. 1903년 경 11,000부가 배포되던 『평등』은 1914년에 이르러 125,000부로 증가했고 분량도 12 페이지에서 24 페이지로 늘어났다.

“여성선거권 …… 그것은 우리에게 ‘목표’가 될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최후 목표를 위한 싸움의 한 단계로서 여성 선거권을 쟁취하고자 한다.”
1907. 8. 18. 베를린 국제사회주의자 대회의 연설

여성 참정권 투쟁에 있어서도 클라라 체트킨은 국제적 기여를 했다. 1908년 코펜하겐에서 결정된 세계 여성의 날 제정도 여성참정권 요구를 주 내용으로 했다. 1907년 7월 체트킨은 최초의 국제 여성노동자 회의를 창설하고 슈투트가르트에서 단결력을 과시했다. 국제 여성노동자 회의의 결의를 바탕으로 그녀는 1907년 베를린 국제사회주의자 대회에서 각국 사회주의 운동이 여성의 보통선거권 쟁취를 위해 힘써야 한다고 주장했고, 동의안이 채택되었다. 그녀는 여성의 발전과 활동을 제약하는 사회적 장애물을 제거하는 데 있어 선거권 쟁취 운동이 가장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지 않는다는 입장을 명확히 밝혔다. 왜냐하면 선거권이 여성 억압의 근본적 문제를 해결하지 않기 때문이다. 대신 선거권이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 남녀 간에 발생하는 사회적 갈등들에 맞서 싸울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한다는 의미에서 부분적으로 그 중요성을 인정했다. 그렇기 때문에 노동자 계급의 참정권 투쟁은 선거권의 쟁취를 ‘목표’로 삼는 부르주아 여성의 운동과는 명확히 다르며 최후 목표를 위한 싸움의 한 단계, 무기로서 여성 선거권을 쟁취해야 한다고 말했다.
여성이 사회적 노동에 참여하고 자신과 가족의 생존을 위해 싸우는 주체가 되면서 여성들은 오랜 세월 당연하게 생각했던 정치적 무능력에 대해 스스로 불평등하다고 인식하게 되었다. 하지만 당시 전개되었던 참정권 운동에서 여성 노동자들은 딜레마에 빠졌다. 소유 계급 여성들에게 국한되는 여성 투표권 운동을 지지할 것인가, 아니면 남성에게 국한되는 보편적 투표권을 지지할 것인가. 체트킨은 여성 노동자들이 변혁 운동에 굳건하게 참여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기본적 권리로 선거권을 사고했다. 사회주의 진영의 선거권 운동은 제한된 여성선거권이나 단계적 확대 계획 같은 절충안이 아니라 모든 선거권 투쟁을 여성 선거권 쟁취투쟁으로, 즉 보편적 선거권 쟁취라는 사회주의적 원칙에 입각한 투쟁이 되어야 함을 강조했다. 그녀는 투쟁이 이 원칙에 충실하면 할수록 더욱 더 철저하게 광범위한 남녀 노동자 대중을 흔들어 깨울 것이며, 이 과정에서 당장 선거권을 쟁취하지 못하더라도 이 행동들 자체가 미래의 승리를 위한 과정이라고 주장했다. 체트킨은 여성선거권 쟁취 투쟁에서 사회주의진영이 더 넓은 근거와 설득력 있는 목표, 신뢰를 얻는다면 노동자 계급의 단결을 강화하고 부르주아 계급의 반목을 초래하는 것이 가능하리라고 보았다.

수정주의와 제국주의에 맞선 투쟁

“억누를 수 없는 수백만의 함성이 터져나와야 한다. 살인을 중지하라! 파괴를 중지하라! 인민을 죽음으로 몰아가는 전쟁을 종식하라! 평화! 평화! 영원한 평화를!”
『평등』, 슈투트가르트, 1914, 11,7. 검열관에 의해 삭제됨.

당내에서의 갈등은 여성 조직의 독립성과 영향력 문제로 국한되지 않았다. 체트킨은 독일사민당의 수정주의와 제국주의에 대항하는 일에서도 정력적인 활동을 벌였다. 급속한 경제 성장과 민족적, 제국주의적 팽창 정책 하에서 독일사민당 지도부는 선거 승리를 사회주의로의 통로로 암암리에 인정하면서 계급투쟁에 대한 신념을 포기해가고 있었다. 체트킨은 칼 리프크네히트와 로자 룩셈부르크와 함께 베른슈타인과 당의 수정주의에 맞서 싸웠다. 체트킨은 당의 교육요원으로 로자를 임명하도록 하고, 마르크스주의 이론이 더 많은 중점을 차지하도록 애썼다. 또한 노동자들의 파업과 러시아 혁명을 지지하는 캠페인을 전 독일로 확산시키면서 의회주의가 아닌 노동자의 자발성과 힘을 더욱 강조할 것을 촉구했다.
제국주의에 대한 당의 수정주의적 해석은 제국주의와 식민지 소유는 원칙적으로 반대해야 할 죄악이 아니라 개량할 수 있는 혼재된 축복이라는 주장에까지 이르렀다. 체트킨은 군사력 유지와 확대에 대해 부르주아 정당들과 똑같은 이해관계를 주장하는 자들을 강력히 비판했다. 1911년 예나 당대회에서는 로자와 함께 전쟁 계획을 좌절시키기 위한 대중행동 결의를 요구했다. 이 안은 일부 수용되었지만 제국주의에 대한 반대는 관철되지 못했고, 이후 독일의 대외 정책에 대해 독일사민당은 행동하지 않았다. 독일 민족의 단결이라는 민족주의 이데올로기와 군국주의의 결합은 독일사민당과 노동자들을 애국주의로 흡수했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노조와 기업가 단체는 전쟁 중 모든 노동쟁의를 중지하는 ‘성내 평화’에 합의하고, 제국의회는 전쟁채권 발행을 승인했다. 독일사민당은 전쟁 중에 다른 정당과의 투쟁이나 반정부활동에 참여하지 않을 것을 약속한다. 체트킨은 8월 14일 독일 사회민주주의자들이 전쟁채권 발행에 찬성하는 표를 던졌을 때 공개적으로 당의 입장을 비난한 최초의 인물 중 한 사람이었다. 체트킨은 『평등』에 전쟁에 대한 반대 입장을 계속해서 표명했다. 당의 검열로 잡지에 검은 공백이 늘어가는 만큼 『평등』은 전쟁에 반대하는 여성들의 국제적 기구로 인정받게 되었다. 체트킨은 당의 제지에도 불구하고 1915년 스위스 베른에서 ‘불법적으로’ 국제 여성노동자 회의를 조직했다. 이 회의는 전쟁에 대한 사회주의자의 반대 입장을 최초로 조직적으로 표명했다. 이 비합법적 활동 때문에 그녀는 체포되어 넉 달 동안 보호감금조치를 당했고, 이후 1917년 5월 『평등』 편집진에서 제명당했다.
1917년 체트킨은 독일사민당을 떠나 독립사회민주당(USPD)으로 이적하고, 1918년 로자 룩셈부르크, 칼 리프크네히트, 프란쯔 메링 등과 함께 스파르타쿠스단에 합류했다. 1918년 경 독일의 패전이 확실시 되자 독일 내부에서 많은 균열이 발생했다. 하지만 러시아와 같은 혁명으로 나아가지는 못했고 1920년까지에 이르는 노동자들의 봉기는 잇따라 실패하고 결국 독일사민당과 자유군단에 의해 진압되었다. 독립사회민주당도 전쟁 후 분열했고 체트킨은 많은 이들을 이끌고 스파르타쿠스단의 후신인 독일공산당(KPD)에 참여했다. 1919년 1월 15일 지속되는 혼란의 원흉으로 지목된 로자와 리프크네히트가 정부에 의해 잔혹하게 살해당했다. 당시 멀리 있어서 죽음을 면할 수 있었던 체트킨은 충격 속에서도 로자의 모든 정신적 유산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고, 로자와 리프크네히트의 삶을 기리는 원고를 『라이프찌히 인민신문』에 실었다. 둘의 죽음 이후 로자는 독일공산당 내에서 가장 중요한 전쟁 전 세대 지도자로서 중앙위원회에서 활동하고 바이마르 공화국 첫 국회부터 마지막까지 독일공산당원으로서 연방의회의 의석을 유지했다. 하지만 독일에서 그녀의 활동은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1920년 봄 코민테른 실행위원회의 여성서기로 임명된 그녀는 서기 활동과 건강 문제로 소련과 베를린을 오가다가 점차 소련에 정착하게 된다. 60세가 넘은 그녀는 소련에서 국제노동계급운동에 헌신하고 인종주의와 전쟁에 반대하는 운동을 펼쳤다.
1932년 체트킨은 시력 상실과 질병, 그리고 나치의 살해위협을 무릅쓰고 베를린으로 돌아갔다. 8월 30일 독일 연방의회에서 개원사에서 최고령자로서 명예의장이 된 그녀는 연단에 등장해 파시즘을 격렬하게 공격하는 연설을 했다. 연단 앞에는 당시 의회의 제 1당이던 나치스의 의원들이 앉아 있었다. 75세의 이 투사는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파시즘을 물리치기 위한 모든 노동자 계급의 연합전선을 형성하자’고 외쳤다. 1933년 1월 히틀러가 권력을 장악했고, 체트킨은 소련으로 돌아가 6월 22일에 세상을 떠났다. 사망 직전에 그녀가 남긴 최후의 저작은 『제국주의 전쟁에 저항하는 근로인민들』이라는 원고였다. 질병으로 인해 완성할 수는 없었던 이 원고에는 제 1차 세계전쟁 동안의 반전운동, 전쟁이 전체 인민에게 미친 영향, 소련에 대항하는 전쟁을 개시하려는 자본주의 국가와 이에 대한 소련의 정책에 대한 분석을 담고 있다. 또 전쟁의 시기에 처참했던 여성들의 삶도 담았다. 체트킨은 세상을 떠나기 직전까지 ‘민족 간의 평화는 언제나 노동계급의 이익’이라고 반복해서 주장하며, 노동자들이 어떤 주저함도 없이 제국주의 전쟁에 저항하는 투쟁에 모든 힘을 쏟을 것을 촉구했다.

“십자가를 지고 고통을 참는 자가 아닌, 어리석은 노예가 아닌, 굳건하게 투쟁하는 여성으로부터 강력한 남녀 투사의 세대가 자라난다. …… 우리 머리 속의 강인한 사고와 가슴 속의 뜨거운 소망을 먹고 자란 아이들, …… 우리를 능가할 훌륭한 남녀 투사들이 바로 우리의 뼈로부터 자라날 것임을 확신한다.”
『1907. 8. 18 국제사회주의자대회』, 베를린

클라라 체트킨의 삶은 견결한 혁명가의 삶 그 자체다. 그녀가 사회주의와 페미니즘에 있어 뛰어난 이론가로 주목받는 것은 아니지만, 최초로 여성 억압에 대한 분석에서 마르크스적 분석을 결합하고자 했고 거대한 여성 노동자 대중의 조직화를 이끈 조직가로서 그녀는 언제나 타협과 맞서 싸운 투사였다.
여성 문제나 당의 이념과 전략을 둘러싼 논쟁에서 그녀의 주장은 이론적으로 잘 정리되어 있지 않다. 또 그녀 삶의 개인적 고뇌나 기쁨을 담은 기록도 별로 없어서 가족과 사랑에 대한 여성으로서의 고민을 찾아보는 것도 쉽지 않다. 그래서 ‘여성의 해방은 자본주의의 철폐를 통해서만 궁극적으로 가능하다’는 그녀의 주장을 통해 그녀를 그저 여성문제에 관심이 많았던 마르크스주의자라고 평가하기도 한다. 물론 체트킨이 경제적 조건의 변화만으로 해결될 수 없는 여성문제에 대해 충분히 이론화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전통적 가족과 여성상이라는 지배 이데올로기 하에서 엘러너와 로자 등 탁월한 여성 사회주의자들도 여성으로서의 삶에서 끊임없이 갈등했던 것을 상기한다면, 체트킨의 주장과 실천들에 대한 평가 또한 당대 여성들의 삶, 여성운동과 사회주의 운동의 상황에서부터 출발해야 할 것이다.
여성해방과 사회변혁에 있어서 체트킨의 입장도 넓게는 독일의 사회주의 운동의 여성 대중 조직화 전략이 갖는 의의와 한계를 공유한다고 볼 수 있다. 독일 사회주의 운동은 여성들을 동원할 필요성에 의해 광범위한 조직화를 실행했고 이는 사회주의 운동이 여성 문제를 인식하는 계기가 되었다. 한편 여성 문제의 독자성에 대한 인식과 실천의 부재는 여성 대중의 눈부신 조직화에도 불구하고 그에 상응하는 이론적, 조직적 실천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체트킨도 처음에는 부르주아 여성운동의 영향력으로부터 노동 여성들을 분리시키기 위해 계급의식을 강조했다. 그러나 한편 여성 문제를 둘러싼 당내에서의 갈등, 여성의 주체적 성장을 가로막는 가족 문제 등을 차차 인식하면서 고민을 확장하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수정주의와 전쟁에 맞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전력을 다했던 모습에서 발견할 수 있는 ‘인민의 보편적 해방’에 대한 그녀의 신념은 여성문제에서도 마찬가지로 치열했다. 클라라 체트킨은 직접 여성 대중을 조직하는 과정에서 부딪힌 문제들로부터 새로운 여성운동의 필요성을 후세대가 고민할 수 있게 해주었다. 분리주의적 여권운동도 아니고 사회주의 혁명으로의 여성 동원에 그치는 것도 아닌, 사회변혁운동과 여성운동이 도구적으로 결합하는 것도 아닌 새로운 여성운동. 변혁운동으로서의 보편성과 여성문제의 독자성이 결합되는 새로운 여성운동을 고민할 가능성이 클라라 체트킨이 헌신한 대중적 여성운동으로부터 열릴 수 있었다. 앞서 연재했던 엘러너와 로자에게 사랑과 가족, 여성문제의 고유한 쟁점들이 그녀들 개인의 과제로만 남았었다면 체트킨은 그 문제들을 사회변혁의 과제와 결합시킬 수 있는 대중적 여성운동의 경험을 마련한 것이다. 이러한 체트킨의 성과가 사랑, 결혼, 가족, 여성 억압에 대해 이론화하고 새로운 사회상을 그렸던 콜론타이의 획기적 시도를 가능하게 한 것이 아닐까.
마지막으로 클라라 체트킨의 삶에서 인상적 요소였던 투철한 의지와 헌신을 다시 생각해 본다. 가족과 사회에서의 종속적 지위로부터 해방되고자 하는 여성 스스로의 의지와 헌신, 의식화 노력에 대한 강조는 그녀 개인의 경험에서 도출된 것으로 보인다. 그녀는 남편을 간호하고 아이들을 키우고 생계를 부양했고, 남편 사후에는 적극적인 사회주의 운동가로서의 정치적 역할도 고스란히 해낸 여성이다. 이 과정을 통해 스스로 혁명가가 된 경험이 노동 여성들의 조직화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100년 전과 마찬가지로 지금도 신자유주의는 전체 노동자의 삶의 질을 저하시키고 단결을 저해하는 유연한 노동력으로서 여성을 활용하고, 세계 자본주의의 위기로 인한 사회적 위기는 가족과 여성의 역할 강화를 요구하고 있다. 노동자운동과 여성운동의 통합적 전망을 밝히는 일이 시급한 지금, 우리에게 클라라 체트킨과 같은 의지와 헌신이 필요한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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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이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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