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광주전남지부


사회운동

사회진보연대 계간지


2009.11-12. 9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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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운동의 역사, 현황, 쟁점

김진철 | 교사
교사운동의 역사

1980년대 초중반의 교사운동은 소수 명망가 중심의 운동이라 할 수 있습니다. 1982년 발족한 한국YMCA 중등교육자협의회를 중심으로 한 공개적인 활동과 지역별 비공개 소모임 활동의 두 가지로 대별할 수 있습니다.
1987년 6월 항쟁을 거치면서 각 학교에 조직된 평교사회를 바탕으로 1987년 9월 민주교육추진 전국교사협의회(약칭 전교협)가 창립됩니다. 전교협의 최대 회원은 약 3만 명 정도였습니다. 1988년에는 교과모임 형태의 대중적 교사 모임들이 하나 둘 만들어져 갑니다. 이러한 대중적 교사 운동의 분출을 배경으로, 지금은 전향했지만, 당시에는 노동운동가로 유명했던 장명국 씨 등이 교원노조 결성의 필요성을 강력하게 제기하면서 1989년 전교조 결성으로 이어집니다.
당시 교원노조 결성의 근거는 크게 세 가지였습니다. 첫 번째 근거는 전교협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이 예정되어 있어 붕괴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두 번째는 평교사회가 법적 근거가 없는 조직이라는 것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는 노조는 법적 근거를 가지고 있고 노조만이 단체교섭을 통해 합법적인 활동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대중적인 교육선전지에 실린 내용이기 때문에 노조건설론의 깊은 배경까지 알 수는 없습니다. 다만 그 논리가 지나치게 단순하고 상황논리에 의존하고 있다는 느낌이 있습니다.
당시 전교협 내에는 전교조를 결성하자는 입장과 지금은 아직 노조를 결성할 시기가 아니라는 시기상조론이 같이 있었습니다. 시기상조론을 주장한 사람들 중에는 학교간 연대 조직에서 활동했던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전교조가 결성되자 ‘기왕 결성되었으니 최선을 다하자’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집니다.
전교조 결성 직후, 정부의 탄압으로 1500여 명의 교사가 해직되고 합법적인 활동이 불가능해집니다. 이때 전교조 주류에서 내놓은 입장은 「장기적 관점」이라는 문서에 수록되어 있습니다(1989년 10월 24일 ‘살아있는 전교조를 염원하는 한 교사’라는 명의로 제출되었습니다). 이 문서는 ‘현재 전교조가 정권의 탄압으로 공개적인 활동이 불가능하다. 비공개 조합원이 일상 활동을 통해 조직을 안정화하고, 조직을 재건하자’는 것이 주요 내용입니다. 이것을 이른바 ‘기존안’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이러한 노선에 대한 이견으로 ‘기존안을 폐기하고 공개적인 활동을 통해 분회재건 투쟁을 전개해야 한다’는 입장이 나왔습니다. 이러한 입장은 학교간 연대 조직 운동이 활발했던 서울지역에서 주로 제기되었습니다. 전교조 운동사에서는 이러한 주장을 ‘비판안’이라고 부릅니다. 그래서 두 입장의 논쟁을 ‘기존안-비판안 논쟁’(기비논쟁)이라 합니다. 이 논쟁 과정에서 소위 말하는 전교조의 정파분립이 이뤄졌습니다. 그런데 전교조 정파는 전략을 둘러싼 이견이 아니라, 합법화라는 ‘전술논쟁’ 과정에서 분리정립되었습니다. 그래서 소위 전교조 정파는 학생운동이나 노동자운동에서 이야기하는 정파와는 조금 다른 성격을 가집니다.
저는 1989년부터 1997년까지 전교조는 지속적으로 약화되었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조합원이 지속적으로 축소됩니다. 전교협 회원 3만 명, 전교조 결성 시 1만 5천 명이었던 조합원 숫자는 제가 발령받던 1992년에는 7천 명 수준까지 줄어듭니다. 7천 명의 조합원 중에서 활동적인 조합원은 3천 명 정도였던 것으로 추산됩니다.
1994년에는 해직교사들이 ‘전교조 탈퇴각서’를 쓰고 복직합니다. 당시 전교조 조합원은 투철한 이념보다는 조선시대 선비와 같은 순수함과 양심으로 인하여 해직된 경우가 많아 탈퇴각서를 수용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전교조 지도부의 방침은 노동조합의 실무를 담당할 소수의 인력을 제외하고 탈퇴각서를 쓰고 복직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따라 약 100여 명 정도만 제외하고 탈퇴각서를 쓰고 복직하도록 조직방침이 전해졌습니다. 그런데 해직자는 전교조 탈퇴각서를 쓰지 않아서 파면, 해임된 분들입니다. 해직자 중 100여 명은 탈퇴각서를 쓰고 복직을 할 수는 없다며 복직을 거부합니다. 일부에서는 “지도부 먼저 탈퇴각서 쓰고 복직하라”고 비판합니다. 그리고 일각에서는 해직자 중심으로 지도부를 구성하는 것에 대해 비판 의견도 있었습니다.
1992~3년에는 이른바 비판안이 분화를 합니다. 하나의 흐름은 현대교육연구회고, 또 하나의 흐름은 합법적교원단체건설추진위, 이른바 ‘합추’입니다. 합추는 ‘불법화되어 전교조가 공개적인 활동이 어려운 상황에서 합법적인 교사대중조직을 건설해서 국면을 타개해야 한다’는 입장이었습니다. 비판안에서 분화한 두 흐름은 침체된 전교조를 어떻게 바꿀 것인가를 놓고 논쟁을 벌입니다.
김대중 대통령이 집권하면서 1997~8년 전교조 합법화와 정리해고제를 교환합니다. 전교조는 공식적으로 1999년 7월 1일자로 합법화되지만 1998년에는 이미 합법화 국면이 열렸습니다. 합법화를 맞이하여 내부의 움직임이 복잡해집니다. 합추는 전교조가 합법화되지 않을 것을 전제로 했기 때문에 비판안의 두 흐름(현대교육연구회 대 합추)의 쟁점이 소멸합니다. 이에 따라 1997년 하반기부터 현대교육연구회, 합추, 그리고 초등 교사 중심의 서초연(서울초등교육연구회) 등 서울지역 활동가들이 모여 통합을 모색합니다. 이 흐름이 현재 전교조 내에서 ‘교찾사(교육노동운동의 전망을 찾는 사람들)/진보교육연구소’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분열되었던 비판안이 통합을 모색하던 이때, 거꾸로 이번에는 기존안 내에서 분화가 이뤄집니다. ‘10인 안’을 제출하신 분들은 김대중 씨의 대통령 당선에도 불구하고 전교조 합법화가 이뤄지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1998년 1월 겨울연수에서 당시 전교조 내 10명의 시도지부장 명의로 ‘교사운동의 전략전환론’, 곧 조직전환론(교원노조 포기론)이 제기됩니다. 이것을 주도한 것이 이른 바 ‘참솔’ 진영입니다. ‘참솔’은 이들이 나중에 발간하게 되는 기관지 명칭입니다(‘참교육실천연구회’를 결성한 10인안 그룹은 기관지로 『참솔』을 발간합니다. 유상덕, 최교진, 김민곤 등 원로 교육민주화 운동가들이 주축이었습니다). 이 분들은 민주당 등의 개혁세력에 친화적인 그룹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존안의 일부는 10인안에 반대하여 노조고수를 주장합니다.
나중에 분열되었던 기존안 진영은 다시 참교육실천연대(참실련)로 규합됩니다. 2003년 전교조 위원장 선거에서 참솔 진영과 ‘교육과 노동 포럼’은 ‘혁신과 단결을 위한 전국모임’(통칭 혁단)을 구성하여 이수호 집행부를 당선시킵니다. 그리고 혁단은 지금의 참교육실천연대로 이어집니다.

신자유주의와 교사운동의 재편

1990년대 후반 교사운동을 이야기하며 ‘신자유주의 반대 투쟁’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당시 교사운동 진영은 1995년 5ㆍ31 교육개혁안을 제대로 비판하지 못했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학교에는 전근대적인 잔재가 많이 남아 있었습니다. 그래서 신자유주의의 위험을 제대로 보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일부에서는 선택, 자율로 포장된 내용에 솔깃하기도 했습니다.
기존안 진영은 5ㆍ31 교육개혁안 활용론을 갖고 있었습니다. 활용론은 학교의 봉건적 잔재 청산에 5ㆍ31 교육개혁안을 활용하자는 것이었습니다. 기존안 진영에서는 신자유주의에 동의하는 사람들이 여럿 나왔습니다. 비판안 진영에서도 이에 대해 제대로 된 비판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비판안 진영에서는 천보선, 김학한 선생이 1998년 출간한 『신자유주의와 한국 교육의 진로』(한울)를 통해 신자유주의에 대한 명확한 비판 입장을 갖게 됩니다. 이 책은 이후 교사운동 담론에 큰 영향을 끼칩니다.
2003년 네이스 투쟁은 정보인권을 제기하며 사회적인 주목을 받았지만, 사실 교육운동사에서는 단발성 사안이라는 측면에서 크게 평가하기는 어렵습니다. 이에 비해 2001년 전개되었던 7차 교육과정 투쟁은 사회적 주목을 받지는 못했지만, 교육운동사에서는 매우 의미 있는 투쟁으로 기억됩니다. 교사는 교육과정이 얼마나 큰 의미가 있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신자유주의적인 교육과정이 들어오는 시점에 교사운동이 이를 반대하는 투쟁을 전개합니다.
2000년, 2001년 전개된 7차 교육과정 투쟁은 당시 진보교육연구소, 교찾사 쪽 사람들이 적극적으로 제안해서 진행된 것입니다. 교찾사와는 대립적 위치에 있었던 당시 전교조 이수호 위원장은 7차 교육과정 저지 투쟁에 적극적으로 나섰습니다. (마지막에 가서 일방적으로 ‘파업찬반투표’를 유보하기는 하였지만.) 교찾사는 7차 교육과정 투쟁, 교육총파업을 제기하면서 서울 중심이라는 지역적 한계를 극복하고 전국적인 연락망을 형성합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2002년 12월 전교조 위원장 선거에서 비판안/교찾사 쪽의 원영만-장혜옥 선생이 기존안/주류/혁단/참실련 쪽의 김민곤 선생을 꺾고 최초로 당선됩니다.
교찾사 회원은 정치적으로 매우 다양한 성향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교찾사 내에서는 정치적인 쟁점을 잘 드러내지 않는 편입니다. 전교조 내 정파가 교사운동 내부의 전술적인 논쟁 과정에서 탄생했다는 것이 그 이유라 할 수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교찾사는 전교조 내에서 선도적인 투쟁, 급진적인 투쟁을 주장하던 비판안을 계승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장점일 수도 있지만, 때로는 발전과 논쟁을 저해하기도 하지 않나하는 생각이 들곤 합니다.

교사운동의 세 가지 쟁점

첫 번째 ‘자본주의에서 교육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사회운동 진영은 단순하게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아시다시피 자본주의 사회에서 교육은 상당히 한계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사운동은 전술적 구호를 제출해야 합니다. 사회운동 진영에서 교사운동을 비판하려면 ‘어떤 운동을 하자’는 제안을 해야 합니다.
사회운동 진영에서 보는 교육과 교사운동에서 생각하는 교육은 조금 다릅니다. 사회운동 진영이야 ‘자본주의 사회의 교육은 계급재생산을 위한 도구이고 이데올로기적 장치다’라고 말하면 되겠지만, 교사운동은 다릅니다. 교육은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한 물음에 답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교육의 목표를 ‘총체적 인간을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런 목표는 실현하기 어렵고 그 목표, 내용, 방법이 이론적으로 정리되어 있지도 않습니다. 앞으로 교사운동 내에서 이런 작업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두 번째 쟁점인 ‘교사란 누구인가?’는 교사라는 존재에 대한 존재론적 접근입니다. 서관모 선생은 신중간계층이라고 규정하기도 합니다. 우리도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 『교사와 계급』 같은 책을 읽기도 하지만 이론적으로 불분명합니다. 전교조의 위기를 이야기하기에 앞서 교사가 왜 보수화되고 있는지, 왜 신규 조합원이 가입하지 않는지에 대한 물음이 필요합니다. 교사론도 나오지 않은 상황에서 20대 교사론은 더더욱 규명이 어렵습니다.
교사운동의 쟁점 중 마지막 하나는 ‘교육을 어떻게 만들 것이냐’는 물음입니다.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 원영만-장혜옥 집행부 당시 『공교육개편안』이라는 책자가 나왔습니다. 지금은 잊힌 내용이지만, 사실 이러한 작업은 매우 소중합니다. 이 작업은 한 5년 정도를 주기로 계속 업그레이드를 해야 합니다.

교사운동의 과제와 전망

(이하의 내용은 참석자의 질문에 대한 답변을 정리한 것이다.) 그 동안 전교조가 학생인권, 보충수업과 야간자율학습, 사교육비 문제 등 교육현안에 대한 발언은 제대로 하지 못했습니다. 지금도 인권교사모임 같은 것을 하는 분도 있지만, 대부분의 고등학교에서 보충수업과 야간보충수업에 반대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사교육비도 마찬가지입니다. 대안학교에 자녀를 보내는 조합원은 그래도 낫습니다. 특목고와 같은 학교에 자녀를 보내는 조합원이 얼마나 많습니까.
우스갯소리로 ‘부부교사는 중소기업이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실제로 부부교사는 대한민국에서 소득 상위 20% 정도 됩니다. 서울지역 교사는 강남, 목동과 같은 부자 동네에 사는 경우가 많습니다. 요즘 교대, 사범대에 가는 학생도 그렇습니다. 가난하지만, 똑똑한 학생이 교대와 사대에 진학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어려운 임용시험을 뚫고 교사가 되면 엘리트의식이 있습니다.
요즘 교사 활동가, 전교조 활동가 재생산이 어렵다는 것에 동감합니다. 1980년대만 하더라도 세미나 조직이 있었습니다. 이때 세미나 조직에서 활동했던 사람들이 지금 40대 중후반입니다. 지금 전교조에서 가장 왕성하게 활동하는 사람들입니다. 지금 전교조 조합원 중 활동가는 경험이 많지만 나이도 많습니다. 신규 교사와는 나이 차이가 너무 많이 납니다. 저만 하더라도 1년 간 휴직 후 복직했더니 완전 아저씨 취급입니다. 그런데 기존 활동가들도 억울합니다. 요즘 투쟁이 많은데, 역량은 많지 않으니 과부하가 걸립니다. 이 사람들한테 조직화 사업까지 하라고 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별도의 역량이 투입되어야 합니다. 여기서 역량은 아무래도 사람과 재정입니다.
기간제 교사 조직화를 위해 많은 재정과 활동가가 필요하다는 것에 동의합니다. 그런데 현재 전교조 활동가들이 기간제 교사를 만나는 것에 어려움이 많습니다. 교장은 기간제 교사가 전교조 조합원과 친하게 지내는 것을 달갑지 않게 생각합니다. 전교조 조합원과 친하게 지내는 것이 다음 해에 기간제 교사 재계약 거부의 이유가 되기도 합니다.
학교 내 비정규직 문제는 솔직히 더 어렵습니다. 전교조를 장기적으로 학교대산별로 개편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습니다만, 이것은 매우 장기적인 전망입니다. 한국에서는 교사와 나머지 직원의 처우가 굉장히 다릅니다. 이것은 학교비정규직노조나 민주노총 조직활동가가 투입되어 노동운동가의 자세로 조직해야 할 문제로 보입니다.
교사에 의한 교육운동과 달리 학부모운동, 청소년운동은 약간 다른 뉘앙스로 받아들여집니다. 청소년운동은 마치 청소년에 의한 인권운동적 차원에서 이뤄지는 것 같습니다. 학부모운동도 그런 차원이 강합니다. 그런데 교사운동은 그 동안 교육운동과 등치되어 왔습니다. 교사운동을 교육운동이라 부르는 것이 전체운동에서 교사운동의 분절을 가져온다는 지적에 동의합니다. 다만 현재 교사운동 혹은 교육운동의 개념이 확장 중이라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우리가 지향하는 교육운동은 ‘민중교육권 운동’입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최소한 ‘동일노동 동일임금’ 정도가 실현되지 않으면 교육이 정상화 되는 것은 매우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점에서 현재의 교사운동이 다른 운동과 만나야 합니다.
주제어
노동 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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