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광주전남지부


사회운동

사회진보연대 계간지


2011.3-4.9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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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말리아 해적과 아프리카의 비극

대테러 전쟁과 식민지 유산의 청산 없이 해적 문제는 결코 해결될 수 없다

수열 | 정책위원
설 연휴는 해적 얘기로 가득했다. 향후 정치권의 향방을 결정한다는 이른바 ‘설 민심’이 정치나 세금 이야기가 아니라 머나 먼 아프리카 땅의 해적 이름으로 채워졌다. 해적에 대한 분노, 단호한 응징의 목소리 속에는 피격된 선장의 몸에서 한국 해군의 총탄이 발견되었다는 것도, 군사작전이 가져다 줄 참극의 가능성도 중요하지 않았다. 아랍에미리트 원전 수주의 이면 계약 문제와 충청권 개발 문제, 구제역 문제로 시끄러운 정국을 덮기 위한 대통령의 전격 담화가 시답지 않지만, 그렇다고 해적을 두둔하기도 어려운 상황에서 우리는 상당한 난감함에 빠져야 했다.


해적이라는 이름의 비즈니스

현재 소말리아 인근 해역을 비롯해 다양한 지역에서 벌어지고 있는 해적질은 단순 강도를 넘어 하나의 ‘산업’이라 칭할 수 있을 정도의 규모로 성장했다. 과거 소말리아 해적은 소말리아 인근 해역이나 자신들의 본거지 주변에서만 활동했다. 정박 중이거나 항해 중인 선박에 올라 타 선박 운행을 위해 금고에 보관 중인 현금을 털거나 선원들의 금품을 뺏어가는 형태가 많았다. 그러나 이제는 활동 범위나 조직 규모가 몰라보게 커졌다.

현재의 해적은 배의 이동 경로를 사전에 파악하는 팀, 직접 배를 나포하는 팀, 해적 본거지에서 협상을 진행하는 팀, 협상 결과에 따라 돈을 받아오는 팀 등으로 구성돼 매우 조직적으로 움직이고 있다. 그들은 장거리 원정에 필요한 위성항법장치를 갖춘 모선과 승선에 필요한 장비(갈고리, 사다리 등)를 갖춘 서너 척의 스피드 보트를 이용해 움직인다. 자동소총은 물론 로켓추진탄(RPG)도 보유하고 있다. 나포한 어선을 모선으로 활용하는 경우도 있는데, 조업 중인 다른 어선과 함께 이동할 경우 적발하기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해적 산업이 커지면서 나포 사건이 일어났을 때 협상을 도와주는 협상 전문가들도 등장해 협상 당사국과 해적 양쪽에서 수수료를 챙긴다. 이들은 대부분 런던 선박거래소의 브로커들과 연결되어 있거나 소말리아의 군벌 출신인 것으로 알려진다. 해적 소탕을 위해 여러 나라가 군사작전에 나서면서 위험성은 커지고, 이 산업에 연루된 사람들이 많아지니 ‘몸값’의 규모도 점점 커진다. 이렇게 챙긴 돈의 일부는 소말리아 지역 군벌의 자금으로 흘러들거나 두바이의 은행을 통해 세탁이 이루어진다고 한다.

분명, 현재 발생하는 해적 행위는 영화 속에 등장하는 낭만이 아니라 중대한 범죄 행위다. 각종 첨단 장비와 무기를 동원해 무고한 사람들의 생명을 위태롭게 만들며, 이를 이용해 몸값을 뜯어내는 조직범죄다. 그러나 문제는 해적질을 제외하고 소말리아 사람들이 돈을 벌 수 있는 수단이 별로 없다는 데에 있다. 산업 기반은 커녕 다른 나라들처럼 돈이 되는 부존자원도 별로 없다. 미국 중앙정보국(CIA)이 추정한 바에 따르면 소말리아의 1인당 국민소득은 600달러 이하로, 전 국민의 절반 이상이 하루 1달러 이하로 생활하고 있다. 소말리아의 해적은 근절되어야 하지만, 군사작전을 통한 소탕이 결코 해결책이 될 수 없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해적에 나서는 상황에서 소말리아인 전부를 ‘소탕’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우리는 해적이 아니라 자경단

소말리아는 남한의 6배가 넘는 637,000㎢의 면적에 8-9백만 명 정도가 살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전체 인구가 얼마인지 측정할 수 없을 정도로 정부의 기능이 붕괴되어 있기 때문이다. 1991년 독재 정권이 무너지면서 소말리아는 20년째 내전 상태에 놓여 있다. 현재 과도정부, 소말리랜드, 푼틀랜드 자치정부 등 3개 지역으로 분화되어 있으며, 10여 개의 군벌이 상호 갈등하고 있다. 해안선이 3,000㎞에 달하는 소말리아는 풍부한 어장을 갖추었고, 내전이 시작되던 무렵 고기잡이가 주요 생계 수단이었다.

그러나 정부가 붕괴되고 혼란스러운 시절이 계속되자 소말리아 해안에는 외국 선박들의 불법 조업이 시작됐다. 외국 선박들은 정부의 통제가 미치지 못하는 틈을 타 소말리아 연안의 해산물을 싹쓸이 해갔다. 유럽의 거대한 쌍끌이 선박들이 매년 3억 달러 이상의 참치와 새우, 바다가재를 비롯한 해상 생물들을 쓸어갔다. 조그만 어촌 마을들은 하루아침에 생계수단을 잃어버리고 굶주림에 시달려야 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배들도 나타났다. 그들은 거대한 드럼통을 소말리아 바다에 버리고 사라졌다. 유럽에서 톤당 1천 달러의 처리비용이 드는 폐기물을 톤당 3달러만 주고 바다에 버렸다. 이렇게 버려진 폐기물에는 중금속뿐만 아니라 핵폐기물도 포함되어 있었다. 해안가 마을의 사람들은 병들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알 수 없는 복통에 시달렸고, 기형아가 태어나기 시작했다. 2005년에 쓰나미가 휩쓸고 지나가면서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되었다. 버려지고 깨진 수백 개의 드럼통이 파도를 타고 해변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3백 명이 넘는 사람들이 방사능 질병으로 사망했다. UN의 소말리아 특사 아흐메두 아브달라는 “누군가 여기에 핵 물질을 버리고 있다. 카드뮴이나 수은 같은 중금속도 있다”라고 말했다.

해안가 마을 사람들이 소형 보트를 이용해 불법 조업선이나 폐기물 투기 선박들을 막기 시작했다. 때때로 그들은 배에 승선해 조업이나 투기에 대한 대가, 즉 일종의 벌금을 걷었다. 외국 선박들의 불법 조업과 폐기물 투기로 생계 수단을 잃고 병에 시달리던 사람들은 이렇게 거두어들인 돈을 마을의 생계에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우리가 말하는 ‘소말리아 해적’의 출발이다.

이들은 스스로를 해적이 아니라 ‘소말리아 해안 자경단’이라 부른다. 수굴레 알리라는 해적 리더 중 한 명은 해외 언론과의 전화 인터뷰에서 “우리는 스스로를 해상 강도라 여기지 않는다. 우리 바다에서 불법적으로 조업을 하고 투기하고, 무기를 운반하는 자들이 해상 강도다.”라고 말했다. 소말리아의 한 독립 언론 사이트가 실시한 여론 조사에서 응답자의 70%가 ‘해적들은 나라의 영해를 지키는 국가 방위군으로, 그들을 지지한다’고 답했다.

물론 이러한 사실이 현재 산업화된 해적 행위를 정당화시켜주진 않는다. 그러나 군사작전을 통한 해적 소탕이 소말리아 해적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없다는 점은 분명히 보여준다. 불법 조업과 폐기물 투기로 생계 수단을 빼앗기고 질병에 고통 받는 소말리아 사람들은 다른 나라들에 대한 적개심을 키울 수밖에 없었다. 냉전이 끝나고 자신들의 전략적 이해가 사라지자 소말리아를 버렸던 미국은 ‘알 카에다와의 연계’를 운운하며 소말리아에 군사적으로 개입하기 시작했다. 심지어는 이웃 나라 에티오피아를 부추겨 전쟁까지 일으켰다. (이에 대해서는 뒤에서 다시 다룬다.) 오랜 내전으로 식량 확보조차 어려운 소말리아에서 해적 행위는 거의 유일하게 현금을 만질 수 있는 사업이다. 현실에 대한 절망, 외국에 대한 분노 속에 소말리아 사람들은 오늘도 해적 사업에 뛰어들고 있다.


너도나도 몰려들어도

현재 소말리아 인근에는 20여개 국가가 해군함을 파견해 해적 문제에 대응하고 있다. 그 형태는 크게 세 가지로 분류된다. 첫째는 연합해군 산하 ‘151-연합함대’(CTF-151)다. 151-연합함대는 해적 문제에 대응하기 위해 2009년 1월 창설되었다. 한국을 비롯하여 미국, 영국, 터키, 호주,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파키스탄, 캐나다, 덴마크 등 22개 국가가 참가하고 있으며, 30여 척의 군함과 항공기를 운용하고 있다. 둘째는 유럽연합(EU) 차원의 활동이다. 원래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를 통해 이루어지던 해적 퇴치 활동이 2008년 12월부터 EU의 ‘아틀란타 작전’으로 이어지고 있다. 프랑스 주도 아래 독일, 영국, 그리스 등이 군함과 군용기를 파견하고 있다. 셋째는 개별적으로 군함을 파견한 경우인데 일본, 중국, 러시아, 인도, 이란 등이 여기에 해당된다. 소말리아 인근 해역에서 군사 작전을 벌이고 있는 국가들은 UN 안보리 결의 1816호와 1846호에 따라 소말리아 과도정부와 협의를 통해 소말리아 영해에 진입할 수 있는 권한을 확보하고 있다. 한번 권한을 확보하면 유효기간 내에는 사전 통보 없이 자유롭게 소말리아 영해에 출입하면서 군사 작전을 수행할 수 있게 된다.

이렇게 엄청난 규모의 군사력이 집중되고 있지만 소말리아의 해적 산업을 막기에는 역부족이다. 순찰해야 하는 범위만 해도 아덴만, 오만만, 아라비아해, 홍해, 인도양 등 너무 넓다. 그러나 군함의 보통 항해속도는 30노트로, 시속 약 55㎞ 정도에 불과하다. 우연히 현장에 있지 않으면 신고를 받고 출동해봤자 해적의 나포 행위를 사전에 막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렇다고 무작정 군함 파견을 늘릴 수도 없다. 비용이 많이 들고 전력 공백이 생기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나라들이 자국 군대를 동원하는 것은 해적퇴치 외에도 얻을 수 있는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파견된 군대는 자국 선박의 보호 업무와 해적 대응 등 일상적인 군사작전 수행을 통해 일반적인 해상 훈련에서는 경험하기 힘든 군사훈련을 할 수 있다. 소말리아 해적들의 화력이 예전에 비해 성장했다고는 해도 각국의 해군력에 비하면 '새발의 피' 수준이다. 복싱에서 선수의 기량을 향상시키기 위해 일부러 져주는 스파링 파트너처럼, 각국은 군사력 향상을 위해 소말리아 해적을 이용하는 셈이다.

이러한 셈법은 소말리아 해적 퇴치에 나서고 있는 국가들 사이의 견제를 보더라도 알 수 있다. 현재 EU의 아틀란타 작전 사령관은 영국 해군이 맡고 있고 사령부 역시 영국의 노스우드에 설치되어 있다. 이는 아틀란타 작전을 주도한 프랑스의 해군력 증강에 대한 우려 때문이었다고 한다. 유럽의회의 한 의원은 “EU의 독자행동이 NATO와의 기능 중복 등 불필요한 혼란을 가져올 것”이라며 해적퇴치를 빌미로 한 군사력 증강 움직임을 우회적으로 비판한 바 있다.


해적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보았지만

2006년 6월, 소말리아 이슬람법정연맹(Islamic Courts Union)이 수도 모가디슈를 장악했다. 이슬람법정연맹은 소말리아의 이슬람법정과 사업가, 지역 관리들이 바탕이 되어 1999년 4월 전국적인 연대체로 만들어진 조직이다. 이슬람법정은 이슬람 율법인 샤리아의 적용을 담당하는 일종의 법관들로, 1990년대 내전으로 혼란한 소말리아의 치안을 담당하기 위해 자체적인 무장력을 키우기 시작했다. 이슬람법정연맹은 소말리아 사람들에게 치안, 식량, 교육 등 각종 사회서비스를 제공했다. 또한 미국의 물밑 지원을 받는 것으로 알려진 군벌들에 맞서 싸우면서 대중의 지지를 넓혀갔다. 소말리아 전역으로 세력을 넓힌 이슬람법정연맹이 2006년 가을에 군벌 연합을 몰아내고 모가디슈를 장악하면서 내전의 끝이 보이는 듯 했다. 소말리아에는 안정이 찾아왔다. 7월에는 10여 년간 폐쇄되었던 모가디슈 국제공항이, 8월에는 중동과 아프리카를 잇는 교두보라 할 수 있는 모가디슈 항구가 다시 문을 열었다.

소말리아의 해적 행위도 주춤했다. 이슬람 율법은 도둑질을 큰 범죄로 여긴다. 이슬람법정연맹은 자체 해상경비대를 구성해 해적 근거지를 소탕하기도 했다. 모가디슈에서 약 500㎞ 떨어진 하라데레를 비롯해 삼호 드림호가 피랍되어있던 호비요 등 동부 해안가 일대 해적들의 전초기지를 장악해나갔다. 2006년 이슬람법정연맹의 대표 셰이크 하산은 한국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해적질도 이슬람이 범죄로 금지하기 때문에 소말리아 땅에서 모두 몰아내려 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의 말은 실현될 수 없었고, 소말리아의 안정도 오래가지 않았다. 그해 말 미국의 대테러 전쟁이 소말리아를 삼켜버렸기 때문이다. 주춤했던 해적 사건은 폭발적으로 증가하기 시작했다.


소말리아를 집어 삼킨 대테러 전쟁

미국은 2001년 9·11테러부터 소말리아를 주시해왔다. 장기간의 내전으로 혼란스러운 틈을 타 알카에다 등 이슬람 극단주의 세력이 소말리아로 흘러들었다거나 소말리아 이슬람 진영과 헤즈볼라가 연계되어 있다, 이란 정부가 소말리아의 이슬람법정연맹을 지원한다는 얘기가 흘러나왔다. 미국 부시 대통령은 “소말리아가 알카에다의 도피처가 되는 것이 가장 우려스럽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슬람법정연맹이 모가디슈를 장악하자 미국은 위기감을 느꼈다. 미국은 소말리아에 이웃한 에티오피아를 부추겨 전쟁을 일으켰다.

에티오피아와 소말리아는 오랜 동안 영토 분쟁을 겪어 왔다. 에티오피아의 동부 오가덴 지역은 주로 소말리족이 거주하고 있는데, 이들은 에티오피아로 부터의 분리를 주장하며 무장투쟁을 벌여 왔다. 1977년에 소말리아가 소말리족이 살고 있는 영토를 회복하겠다는 ‘범소말리아 주의’를 내세우며 에티오피아를 침공했다. 서부소말리아해방전선을 필두로 한 오가덴의 반군 조직들은 소말리아 정부군과 함께 에티오피아에 맞섰다. 1978년까지 이어진 이 전쟁은 결국 에티오피아의 승리로 끝났지만, 오가덴 지역의 무장 투쟁은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오가덴 지역의 문제로 불안을 느낀 에티오피아 정부는 이슬람법정연맹의 소말리아 장악을 일종의 위험신호로 받아들였다. 이슬람 원리주의 세력이 소말리아를 장악하는 것에 대해 기독교 국가인 에티오피아가 지닌 거부감도 한 몫 했다. 미국의 군사적 지원을 받은 에티오피아는 2006년 12월 초 이슬람법정연맹과 교전을 시작했고, 12월 20일부터는 전면적인 공세를 펼쳤다. 결국 12월 28일 이슬람법정연맹은 수도 모가디슈를 포기하고 소말리아 남부 지역으로 쫓겨 갔다. 에티오피아는 친 에티오피아 성향의 임시정부가 정권을 잡도록 지원했다.

이후 미국은 보다 직접적으로 소말리아에 군사적으로 개입했다. 미국은 소말리아에 2007년부터 2008년까지 최소 다섯 번의 미사일 공격을 퍼부었다. 2007년 1월에 소말리아 남부 항구도시 키스마요에 대대적인 공습작전을 벌이면서 미군 당국은 알카에다 지도부 3인방을 겨냥한 작전이라는 점을 분명하게 밝혔다. 미국의 대테러 전쟁이 소말리아로 확대되었음을 공식적으로 시인한 것이다.

앞서 언급한 151-연합함대를 통해서도 대테러 전쟁이 소말리아로 확대되었음을 알 수 있다. 151-연합함대가 소속된 연합해군은 9·11 테러 이후 전 세계에서 진행되는 미국의 ‘항구적 자유 작전’을 해상에서 추진하기 위해 2002년 10월 구성되었다. ‘항구적 자유 작전’은 미국이 전 세계에서 벌이는 모든 대테러 전쟁을 통칭하는 작전명으로 아프가니스탄, 필리핀, 키르키즈스탄, 그루지아, 사하라 그리고 소말리아에서 펼쳐지고 있다. 연합해군은 이 중 ‘아프리카의 뿔(소말리아의 별칭) 작전’을 담당하고 있으며 해적퇴치, WMD를 비롯한 불법무기 차단, 테러 근절이 주요 임무다. 151-연합함대 창설로 해적퇴치 임무를 이양한 150-연합함대는 지금도 151-연합함대와 동일한 지역에서 대테러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


제2의 아프가니스탄이 되어가는 소말리아

대테러 전쟁의 확대는 2006년 소말리아 정국 안정을 수포로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이후에도 소말리아 안정의 기회를 파괴했다. 2008년 5월 1일 미국은 테러리스트를 소탕한다는 명목으로 소말리아 다사마렙 지역에 크루즈 미사일을 퍼부었다. 소말리아 과도정부와 반군 간의 평화회담을 앞두고 진행된 이 공격으로 30여 명의 소말리아인이 사망했다. 이 중에는 이슬람법정연맹의 소장파 그룹이 분화해 나온 ‘알 샤바브’(아랍어로 ‘젊은이’이라는 뜻)의 전 간부인 에이든 하시 이로우가 포함되어 있었다. 알 샤바브는 미국 정부의 테러조직 명단에 올라있는데, 미국은 공격 후 원래 목표로 했던 테러리스트가 사망했다고 발표했다. 평화회담은 수포로 돌아갔다. 알 샤바브가 보복 의지를 천명하면서 알샤바브와 정부군, 에티오피아군은 모가디슈를 중심으로 치열한 전투를 이어갔다.

미국의 싱크탱크 미국진보센터(CAP)가 2008년 4월 펴낸 보고서는 ‘소말리아 이슬람주의 진영은 에티오피아의 침공 이후 폭발적으로 성장해왔다. 2006년 말에 비해 지지 기반도 대폭 넓어졌으며, 더욱 급진적 성향을 띠고 있다. 미국과 에티오피아의 목표와는 정반대로 소말리아 이슬람 진영의 테러 연계 가능성은 도리어 커졌다’고 밝혔다. 미국의 파상공세에 파키스탄 국경지대까지 쫓겨 갔던 탈레반이 남부 헬만드주를 중심으로 세력을 넓힌 것처럼, 모가디슈에서 쫓겨 갔던 이슬람법정연맹은 소말리아 남부 지역을 중심으로 세력을 정비해 다시 모가디슈를 위협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미국과 미국을 등에 업은 에티오피아의 침략과 점령이 소말리아 전역에서 저항 세력을 키웠기 때문이다. 어마어마한 군사력과 비용을 들이고 있지만 해적도, 저항 세력의 성장도 막지 못한 채 아프가니스탄에서처럼 미국과 동맹국들은 소말리아라는 늪에 빠져들고 있다.


식민지배와 냉전의 유산

소말리아는 아프리카 국가들 중 드물게 단일 인종(소말리족)과 단일 종교(이슬람교 99%)로 이루어져 대략 10세기경부터 평화롭게 살아왔다. 단일 인종이라 해서 차이가 없는 것은 아니다. 소말리족은 6개의 거대 씨족으로 구분되며, 각각의 씨족은 여러 개의 하위 씨족으로 나뉜다. 그리고 하위 씨족은 또한 부계 혈족 중심의 가족군인 ‘레르’(Reer)로 세분화된다. 각각의 씨족이 분할되어 있지만 언어와 종교, 생활양식의 동질성은 소말리아에 천년의 평화를 가져다주었다.

그러나 제국주의 침략으로 상황은 바뀌었다. 19세기 후반 서유럽의 식민지 침략 과정에서 프랑스, 영국, 이탈리아에 의해 분할되었던 소말리아는 1960년 7월 1일 영국령을 북부지구로, 이탈리아령을 남부지구로 한 ‘소말리아 공화국’으로 독립했다. 공화국은 식민지배가 남긴 유산을 극복해야 했다. 영국과 이탈리아의 상이한 식민지 지배 정책 때문에 남부와 북부는 행정제도, 사법체계, 재정제도는 물론 공식적인 언어 표기조차 달랐다. 소말리아의 정치지도자들은 남부와 북부의 통합을 포함해 오가덴 지역처럼 에티오피아와 케냐, 지부티로 분할된 소말리족의 거주 지역을 통합하려 했다. 이른바 범소말리아 주의에 입각한 강경한 대외정책이 추진되면서 소말리아 내부의 정치사회적 분열을 억누를 수 있었다.

하지만 인접 국가들과의 잦은 분쟁으로 인해 소말리아의 대외 정책은 주춤할 수밖에 없었다. 외부와의 갈등이 잦아들자 내부의 혼란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전통적인 씨족과 하위씨족을 기반으로 한 다양한 조직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1969년 3월 선거에서는 124개의 의석을 놓고 68개 정당 및 정치조직들에서 1천여 명의 후보가 난립했다. 1969년 10월 15일 대통령의 암살로 사회적 분열은 최고조에 달했고, 경찰과 연합한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켜 군 사령관이었던 모하메드 시아드 바레가 정권을 잡게 된다. 씨족 및 부족주의 타파와 분열 없는 민족주의를 주창한 바레 정권은 소말리아의 통합을 위해 노력했다. 1972년에는 수정 로마 알파벳을 공식 언어로 채택해 식민지배 이후 서로 다른 언어기술 체계 때문에 생겨난 정치적 종교적 갈등을 수습했다.

처음부터 '사회주의'를 천명한 바레 정권은 소련과 긴밀한 관계를 맺었다. 그러던 중 1974년에 에티오피아에서도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나 왕정을 쓰러뜨렸다. 소련은 영토분쟁 중이던 에티오피아와 소말리아를 놓고 저울질하다 전략적 판단에 따라 에티오피아를 선택했다. 앞서 언급했던 1977년 소말리아의 오가덴 침공 당시 소련은 에티오피아를 지원했고, 소말리아는 소련과의 관계를 단절했다. 소련이 떠난 자리는 미국이 메웠다. 소련제 무기 대신 미국제 무기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바레 정권이 22년간 장기 집권하면서 소말리아의 미래는 점점 어두워져 갔다. 사회주의의 기치도, 부족주의 타파의 노력도 사라졌다. 독재자는 도전세력들의 부상을 막기 위해 점차 자신의 씨족과 양자(養子)의 씨족에서만 사람을 등용했다. 공무원직의 분배는 물론 사회적 자원과 경제적 기회의 배분 등 소말리아 사회 전반이 특정 씨족을 중심으로 돌아갔다. 그러자 독재자에 대항하는 군벌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들에게는 소련과 미국이 준 양질의 무기들이 있었다. 1991년 1월 연합한 군벌들이 쿠데타를 일으켜 독재자를 몰아냈다. 정국의 주도권을 놓고 갈등하던 군벌들이 전투에 들어갔고, 기나긴 소말리아 내전이 시작되었다. 20년간 지속된 내전은 소말리아를 세계에서 손꼽히는 ‘실패한 국가’로 만들었다. 기아와 전쟁의 피해로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됐다. 1992년 한 해에만 40만 명이 굶어 죽었고, 2006년에는 정부군과 반군의 전투로 6천 명이 사망하고 100만 명 이상이 난민 신세가 되었다.


실패한 국가? 실패하게 만든 국가!

그러나 이 실패는 소말리아만의 잘못이 아니다. 가깝게는 내전 종식의 기회를 앗아간 대테러 전쟁의 확대를 들 수 있지만, 멀게는 식민지배가 남긴 상처 때문이다. 이는 ‘블랙 아프리카’ 대부분에서 찾아볼 수 있다. 아프리카 국가들의 발전구조는 유럽의 식민지배로 심각하게 왜곡되었다. 그리고 제국주의 국가들은 아프리카를 떠나면서 아프리카 신생국의 경제구조를 유럽의 종속 하에 있도록 조작해 놓았다. 그 특징은 크게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아프리카의 노동력을 철저히 이용했다. 아프리카 대륙을 거대한 자원 및 원료 시장으로 만들어 이윤을 독점했지만 공업을 발전시키지는 않았다. 노예무역을 통해 아프리카의 경제활동인구를 말살시켰고, 경제발전에 필요한 기초적인 자원을 박탈했다.1)

둘째, 서구의 필요에 의해 농업을 발전시켰다. 그러나 이는 아프리카인의 식량재배와는 거리가 먼, 오직 서구의 필요에 기초한 커피, 땅콩, 면화, 차 등의 환금작물로 채워졌다. 환금작물 중심의 농업 구조는 식량자급을 불가능하게 만들었고, 아프리카 국가 대부분은 엄청난 양의 식량을 수입에 의존하게 되었다. 그러나 국제 시장의 영향에 민감한 환금작물의 특성상 보다 싼 시장이 등장하자 곧 경쟁력을 잃어버렸다.2) 마르크스가 『자본』에서 이야기했듯, “주요 산업지역으로 남아 있는 세계의 한 부분을 위하여 다른 세계의 한 부분을 농업 생산물 지역으로 변화시킨 것”이다.

셋째, 공업원료를 값싸게 대량으로 공급받기 위해 의도적으로 1차 원료산품의 가격을 낮게 유지했다. 반면 자신들의 공업 제품을 비싸게 수출하는 정책을 고수했다. 대부분 1차 산품들을 수출하는 아프리카 대륙은 무역에서 지속적인 하락을 경험했다.

아프리카는 세계에서 가장 많은 식량을 수입해야 하는 지역이다. 또한 지속적인 무역 불균형 때문에 외채 규모는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식량 수입과 외채에 대한 이자 지출이 전체 재정에서 막대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이는 아프리카의 자립과 발전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가장 큰 요인이다.


아프리카에 대한 착취를 중단해야

우리가 무력을 이용한 해적 소탕을 긍정할 수 없는 것은 인질의 희생을 부를 수 있는 군사작전의 위험성 때문만이 아니다. 오늘날 소말리아의 해적 문제는 제국주의 침략에서부터 대테러 전쟁까지 아프리카의 구조적인 저발전 문제와 자본주의의 폐해를 집약적으로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식민지 쟁탈 과정에서 아프리카 대륙에 임의적으로 그어진 국경선은 종족과 종교 갈등을 촉발하는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제국주의 국가들의 식민 지배는 아프리카 대륙의 경제구조를 왜곡했다. 아프리카 신생 독립국의 발전 가능성은 애초에 거세당한 채 대내외적 갈등으로 사회적 역량을 소진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소말리아 역시 아프리카의 많은 국가들처럼 쿠데타를 통해 군사 정권이 등장하게 된다. 냉전 시기 미소 진영은 전략적 이해에 따라 경제·군사적으로 소말리아를 지원했고 장기 독재를 묵인했다. 독재 정권이 무너지자 다양한 씨족 그룹들의 갈등이 터져 나왔지만 냉전 종식으로 소말리아의 전략적 중요성이 떨어지자 미국은 소말리아를 외면했다. 그들이 떠난 자리에는 수많은 무기만이 남아 내전의 수단을 제공했다. 내전 이후 서구의 불법 조업과 폐기물 투기로 수많은 사람들이 기아와 질병으로 숨졌다. 17년 간 내전으로 피폐해진 소말리아가 내부의 힘을 통해 안정을 찾으려던 무렵 미국의 대테러 전쟁이 소말리아를 집어 삼키면서 혼란은 증폭되었다. 해적 사건은 폭발적으로 늘어났고 미군의 폭격, 미국과 에티오피아의 지원을 받는 정부군과 반군의 전투로 2006년에만 6천 명이 사망하고 100만 명 이상이 난민이 되었다.

이러한 구조적 원인에 대한 접근이 없다면, 그리고 아프리카에 대한 역사적인 착취를 중단하지 않는다면, 해적 문제도 아프리카의 비극도 끝나지 않을 것이다. 2007년 10월 ‘휴먼라이츠워치’는 보고서를 통해 ‘소말리아는 현재 세계에서 가장 무시되고 있는 비극’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우리는 이러한 문제를 분명하게 직시해야 한다.


1) 16세기부터 3백 년 동안 아프리카에서 유럽이나 아메리카 대륙으로 건너간 흑인 노예의 숫자는 학자마다 다르지만, 대략 1천 5백만 명 정도로 추정된다. 항해 중에 사망한 숫자까지 합하면 약 4천만 명에 달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는 당시 아프리카 대륙 전체 인구의 1/3에 해당하는 수치다. 유럽과 아메리카 대륙은 이들의 노동력을 이용해 그들의 산업을 번창시켰지만, 아프리카 대륙은 심각한 노동력 부족을 겪게 된다. 본문으로

2) 세네갈은 원래 쌀 생산국으로 식량의 자급자족이 가능했다. 그러나 프랑스는 베트남 쌀이 훨씬 싸기 때문에 세네갈의 쌀 생산지를 모두 땅콩 생산지로 바꿨다. 땅콩은 세네갈 전체 수출의 80% 이상을 차지하게 되었다. 그러나 세네갈의 땅콩은 곧 가격 경쟁력을 잃어버렸고, 세네갈은 주요 식량곡물 수입국이 되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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