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광주전남지부


사회운동

사회진보연대 계간지


2012.7-8. 10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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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벌타협론과 재벌개혁론, 노동자를 위한 선택지는 없다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와 그를 둘러싼 한국경제 성격 논쟁에 대한 비평

박상은 | 정책위원
이제 와서 서평을 쓰기에는 상당히 늦었다. 장하준·정승일·이종태의 대담을 담은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이하『선택』)가 지난 3월에 출간된 이후, 이 책에 대한 수많은 서평이 쏟아져 나왔다. 또한 이를 계기로 경제학자들의 논쟁이 시작되었다. 《프레시안》에서는 ‘한국 경제 성격 논쟁’ 이라는 이름으로 장하준 그룹과 이를 비판하는 이병천, 정태인 등의 논쟁을 연재하고 있다. 《프레시안》뿐만 아니라 《레디앙》, 《한겨레21》에서도 논쟁이 진행되고 있다. 논쟁은 재벌과의 사회적 대타협을 주장한 『선택』과 이를 비판하는 재벌개혁론의 두 축을 중심으로 진행되지만, 양자를 모두 비판하는 이들의 글도 나오고 있다. 이처럼 재벌 논쟁에 참여하는 사람들과 주장의 폭은 더 넓어지고 다양해지는 양상이다.
대결의 두 축은 재벌타협론과 재벌개혁론이다. 한쪽은 ‘재벌 가문과 우리 사회가 타협해 경영권을 보장하는 법적 사회적 장치를 만들어 주되, 노동이나 복지, 세제 등에서 재벌의 양보를 얻어내자’고 주장하고, 다른 한 쪽은 ‘재벌 개혁의 부진으로 인해 발생하는 시장경제 기본질서의 파괴’가 가장 시급한 문제이며, ‘삼성 동물원 상황을 극복하는 재벌개혁’을 무엇보다 먼저 수행해야 할 과제로 본다.
재벌의 착취와 수탈에 시달리는 당사자이자 신자유주의가 강요하는 고통을 직접 체험하고 있는 한국의 노동자들은, 대체 이 두 축 중에서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안타깝게도 둘 중 그 어느 것도 노동자를 위한 선택지가 아니다. 한국의 노동자들이 재벌의 착취와 신자유주의 질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전혀 다른 선택지를 찾아야 한다. 이 글은 경제위기 정세에서 민주노총을 포함한 진보진영이 재벌 논쟁을 어떻게 바라보고 무엇을 실천할 것인지를 제안하기 위해 『선택』과 그를 둘러싼 한국경제 성격 논쟁에 대해 논평한다.


『선택』: 재벌과의 타협을 통한 복지국가 건설

『선택』은 시종일관 ‘경제민주화를 주장하시는 분들’의 주장을 비판한다. 이들의 주장에 따르면 김대중 정부 시절부터 추진되어 온 재벌 개혁은 민주화 운동의 외양을 띠고 있었지만 노동자나 국민을 위한 것이 아니라 미국 월스트리트 금융자본을 위한 것이었다. 이들은 재벌개혁론자들이 노무현의 ‘좌파 신자유주의’를 ‘경제민주화’로 포장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또한 진보진영이 은행을 재벌에 파는 것은 반대했지만, 해외매각은 그냥 두고 보거나 오히려 환영했다는 점도 지적한다. 경제민주화론자들이 이명박과 김대중-노무현의 대립을 강조하면서 마치 김대중-노무현으로의 회귀가 한국사회의 대단한 진보인양 호도하는 오늘의 현실에서, 『선택』은 경제민주화론의 문제점을 지적한다는 점에서 나름의 의의가 있다.
이들은 현재 경제위기와 국민들을 수탈하는 경제체제의 가장 중요한 원인으로 ‘주주자본주의’를 꼽는다. 대기업에 의한 중소기업의 착취도, 비정규직 문제도, 고용없는 성장도, 실물경제에 대한 투자가 줄어든 것도 모두 주주자본주의 때문이다. 이들이 사용하는 주주자본주의라는 용어는 금융자본주의, 신자유주의와 거의 비슷한 용어로 사용된다. 이들의 용어법에서, 금융자본주의는 금융이 실물보다 우위에 선 자본주의를 가리키고, 주주자본주의는 이러한 금융자본주의 하에서 주식 투자자들의 이익 극대화를 기업 경영의 최우선 목표로 삼는 조류를 가리킨다. 또한 이들은 김대중-노무현과 이명박 정부의 차이를 좌파 신자유주의와 우파 신자유주의로 나누어 설명한다. 좌파 신자유주의는 노무현·클린턴·블레어의 신자유주의로, ‘공정한 시장질서’를 강조하기 때문에 대기업의 시장 독점을 경계하고 기업집단에 적대적이며 금융시장 자유화를 강조하지만, 노동시장 유연화 같은 대목에서는 멈칫거린다. 우파 신자유주의라 부를만한 경향은 이명박·레이건·대처의 신자유주의로, 노동시장의 완전한 유연화를 주장하고, 독점 대기업도 용인한다.
저자들의 주장에 따르면 한국에서 주주자본주의는 IMF를 통해 도입되었는데, 재벌 가문은 자신들의 경영권 수성을 위해 주식 펀드들과 일종의 타협을 했다. 그러나 『선택』은 재벌이 국가의 기간산업을 책임지고 있고, 신사업 투자도 재벌밖에 할 수 없으므로, 국민경제에 유효한 측면이 여전히 있다고 말한다. 또한 삼성과 현대자동차 같은 세계적 기업을 키워낸 박정희 정권의 경제개발 정책에서 본받을 점이 있다고 본다. 이들이 볼 때, 규모의 경제가 필요하다는 점에서 재벌 해체는 답이 아니다. 대신 이들은 주주자본주의를 규제함으로써 재벌 가문에 경영권 보호 장치를 마련해 주는 대가로 재벌이 복지국가 건설에 협력하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재벌과 주식 펀드들과의 타협을 재벌과 국민과의 타협으로 돌리자는 이야기인 셈이다.
이렇게 건설될 복지국가는 단지 분배의 영역에 머무르지 않는, 신자유주의에 대한 포괄적 대안을 의미한다. 복지국가는 단지 최빈곤층에 대한 지원뿐만 아니라 기업에서 퇴출된 노동자가 재교육을 통해 재기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산업 고도화를 이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저자들은 연대임금을 통해 한계 기업들을 정리하면서 국가 전체의 산업고도화를 이루어 낸 스웨덴을 모범 사례로 제시한다. 또한 이들은 복지국가 운동 자체가 재벌 대기업에게 위협적이기 때문에, 복지국가 운동과 경제 민주화 운동이 따로 갈 필요가 없다고 주장한다.
또한 이들은 노동자운동의 역할도 강조한다. ‘노동 있는 복지’가 가능하려면 강력한 산별노조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재 한국에서 산별노조는 노동자운동에만 맡겨둔다고 건설되지 않고 국가가 나서야만 가능하다. 민주노총은 기업별 노조에 안주하며 말로만 산별노조를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주자본주의를 규제하면 정말 모든 문제가 쉽게 해결될까? 재벌은 노동자들의 투쟁과 시민들의 여론에 쉽게 압박받을까? 퇴출된 노동자를 재교육시켜 새로운 산업에 투입하는 복지국가의 모습은 바람직한가? ‘이해당사자’의 한 축으로서 산별노조를 정립하는 것이 민주노조가 지향해야 할 방향인가?


이병천, 정태인: 재벌개혁은 복지국가로 가는데 반드시 통과해야 할 관문

이러한 『선택』의 주장에 대해 이병천과 정태인은 ‘재벌옹호론’이라고 비판한다. 실제로 『선택』은 재벌이 마치 주주들에게 억압당하는 것처럼 말한다. 가령 “주식 투자자들이 ‘왜 지난해보다 이윤이 줄었냐’ ‘왜 배당을 덜 하냐’ ‘회사 주가가 어쩌다가 내려갔냐’고 떠드는데, 대기업들이 하청 기업이라고 봐 줄 수 있겠냐”라거나 “한국의 대기업들은 이미 국제 금융 자본이 만들어 놓은 주주 자본주의의 틀 안에서 움직이고 있다. 적대적 M&A 위기를 피하려고 미리미리 알아서 챙기는 거다”라는 식이다. 또 『선택』은 외국자본이라면 불가능하겠지만 국내자본은 여론이나 정치권이 압박하여 양보를 받아낼 수 있는 대상이라고 본다. 이런 대목에서는 저자들이 이윤 최대화를 추구하는 것이 자본의 기본적인 성격이라는 사실을 과연 인식하고 있기나 한 것인지 의구심이 든다. 이 점에서 “수탈할 수 있는데도 타협하는 자본이란 지구상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정태인의 지적은 타당하다.
복지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해법의 기본은 재벌과의 ‘빅딜’이 아니라 재벌 독점 체제를 무너뜨리는 일이라고 주장하는 이병천으로서는 『선택』의 주장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다. 그는 장하준 등이 모든 문제의 원인으로 지목하는 ‘주주자본주의’라는 규정 자체가 오류라고 생각한다. 1997년 이후 한국기업이 주주가치 추구 경영으로 전화한 것은 사실이지만, 한국경제는 미국식 금융자본주의와 같이 금융분야에 경쟁력을 갖고 있지 않고 월가와 같은 금융권력도 없다. 오히려 제조업의 위상이 강화되었으며, 높은 사내유보율과 지분법 이익이 존재하는 것으로 보아 재벌체제의 특성이 존속하고 있다. 따라서 그는 한국의 신자유주의를 냉전 반공주의 개발독재체제의 역사적 유산 위에 올라타면서 생긴, ‘잡종형 신자유주의’라고 규정한다.
이병천은 『선택』이 박정희의 발전국가론을 옹호하는 것에 대해서 특히 심혈을 기울여 비판한다. 그는 이들이 냉전 반공의 정치경제 체제로서 한국의 개발독재가 얼마나 억압적인 노동규율에 입각하고 있었는지를 잘 보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박정희 체제에는 국가의 재벌 지원에 따른 성과규율과 함께 노동규율도 작용했다. 억압적 노동규율이 재벌주도 고투자를 가능케 한 계급적 조건이었는데도, 이를 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병천은 복지국가 발전체제로 가는 경로에서 대기업과의 사회적 대타협을 추구한 스웨덴보다 중소기업 천국인 덴마크 모델에 주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은 한국의 재벌이 사회적 대타협에 나서지 않을 것이라는 기본 인식 속에서,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들이 재벌과의 타협 상대가 되면 비정규직 문제 해결도 어려워지고 양질의 새로운 일자리 창출도 어려워진다는 생각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정태인은 한층 더 노골적으로 말한다. 한국에는 노동자-자본 간의 힘의 균형이 없기도 하거니와, 핵심 세력인 민주노총이 비정규직 노동자나 하청 기업의 수탈에 있어서 국내외 주주 집단에 암묵적으로 동조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사회적 대타협을 이뤄내는 길은 ‘여전히 부글부글 끓고 있는’ 시민들의 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한국의 신자유주의적 정책개혁과 금융화

그러나 『선택』의 저자들이나 그 비판자들이나 신자유주의에 대한 분석에서 오류가 있다. 통상 신자유주의는 시장주의, 작은 정부, 민영화 등으로 이해된다. 『선택』도 이와 유사하게 신자유주의를 이해하고 있다. 하지만 ‘작은 정부’는 신자유주의가 아니라 사실 신보수주의의 표어다. 레이건·대처가 대표하는 신보수주의는 ‘정책의 무력성’을 강조하지만, 클린턴·블레어가 대표하는 신자유주의는 ‘정책개혁’을 주장한다. 신자유주의적 정책개혁은 노동시장 유연화에 동반하는 근로연계 복지, 완만한 인플레와 유연한 화폐정책, IMF 등과 같은 국제기구의 경제개입 옹호 등을 특징으로 한다. 『선택』이 노무현(클린턴·블레어)과 이명박(레이건·대처)을 좌-우파 신자유주의로 구분하는 것은 신자유주의와 신보수주의에 대한 잘못된 이해에 기초한다. 실제로 신자유주의 하에서 거시경제적 관리라는 국가의 역할은 사라지지 않는다. 대신 경제정책이 신자유주의적으로 변화한다고 보아야 한다. 신자유주의에 대한 이러한 잘못된 이해로 인해 『선택』은 신자유주의에 대한 진보적 대안으로 국가주의적 정책을 제시한다.
이병천은 ‘주주가치 추구와 재벌 체제의 공생’을 이야기하면서 한국경제가 금융화했다는 진단을 유보한다. 그러나 한국의 GDP대비 주식시가총액은 1987년 40%대에서 2005년에는 80%를 넘어섰고, 주식시장의 활동성은 미국 다음으로 높다. 또한 제조업의 금융적 투자자산 대비 유형자산의 비율도 외환위기 전 20% 미만에서 외환위기 이후 37%이상으로 높아졌다. 기업의 영업이익 중 배당금으로 지불한 크기 역시 점점 증가 중이다. 가장 심각한 것은 주식시장을 통해 외국인이 재벌을 지배하는 것이다. 도합 시가총액의 20%를 차지하는 삼성전자와 현대차그룹의 경우 외국인이 각각 40-50%의 지분을 보유하고 있다. 『선택』이 쌍용자동차에 대해 ‘무더기 정리해고는 재벌이 저지른 게 아니라 재벌 해체로 인해 불거진 비극적 사태’라고 진단하는 것은 문제의 핵심을 완전히 잘못 파악한 것이긴 하지만, 기업이 국외로 매각되면 ‘먹튀’와 같은 극단적인 형태의 국부유출이 일어나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이병천은 금융의 자유화와 세계화를 통해 노동자들이 애써 생산한 잉여가치나 국부가 유출되는 메커니즘을 강조하지 않는다.
『선택』의 주저자인 장하준은 ‘자본주의의 다양성’이라는 관점에서 현재의 위기를 자본주의의 구조적 위기가 아니라 ‘영미식 금융자본주의’의 위기로 인식한다. 그러나 지금의 위기는 단순한 경기순환적 위기가 아니라 이윤율 하락으로 인한 구조적인 위기이다. 1970년대 이후 구조적 위기에 대응하여 금융의 세계화와 신자유주의가 출현했다. 즉 신자유주의 금융화는 1970년대 이윤율 하락에 대해 반작용한 결과다.
한국역시 이윤율이 1979-1980년과 1997년 외환위기 시기 급락하였는데, 이는 세계 구조적 위기 정세에서 한국도 예외가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우선 1979-1980년 불황 이후 전두환 정권에서 ‘거시적 안정화, 미시적 구조조정’을 기조로 한국에서 신자유주의적 정책개혁이 출현한다. 사실 재벌의 대마불사라는 말은 이 시기에 생겨났는데, 당시 재벌의 저항으로 이러한 정책개혁이 실패했기 때문이다. 정부의 신자유주의 정책개혁은 재벌의 저항으로 인해 실패하거나 3저 호황으로 인해 그 필요성이 사라지는 등 부침을 겪었으나, 자본은 이윤율 하락에 대응하여 고정자본 증대를 통해 이윤량을 증대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는 과잉중복투자를 야기하여 1997년 이윤율 하락으로 인한 경제위기와 외환위기로 귀결되고 말았다. 이런 맥락에서 1997년의 위기는 신자유주의의 과도기에서 본격적인 신자유주의 시대로 진입하는 계기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후 김대중 정부는 각종 금융 자유화 조치에 동반해서 주식시장에서의 투명성과 신용도를 제고하기 위한 기업 소유·지배구조 개선을 골자로 한 재벌개혁을 진행했다. 이른바 ‘신흥시장’에서 글로벌 스탠더드를 확립하려는 목적이었다. 재벌개혁을 필두로 한 신자유주의적 정책개혁의 결과는 노동자들에게 정리해고와 비정규직 증가와 같은 노동신축화로 나타났다.


위기는 그렇게 쉽게 해결되지 않는다

『선택』은 파생금융상품을 규제하면 금융시장의 위험을 근본적으로 제거하고 실물경제 부양이 가능하다고 말한다. 주주자본주의를 규제하기만 하면 많은 문제가 해결될 것으로 여기는 것이다. 그러나 신자유주의가 이전의 여러 제도를 해체한 것은 맞지만, 그 중 일부를 부활시킨다고 해서 현재의 경제위기가 쉽게 해결될 수는 없다. 케인즈주의적 금융억압은 대불황을 극복하기 위한 필요조건이지 충분조건이 아니다. 이처럼 금융을 억압하면 실물경제가 자연스럽게 회복될 것이라는 가정은 1970년대 이후 구조적 위기의 원인을 간과한다. 『선택』의 주저자인 장하준은 자본주의에 다양한 형태가 있다고 보고 이를 비교하여 더 나은 자본주의를 선택할 수 있다고 본다. 이들은 자본주의의 유형을 ‘자유주의적 시장경제’와 ‘조정된 시장경제’로 구분하면서 금융자본주의로 귀결된 전자가 아니라 후자를 옹호한다. 조정된 시장경제에서는 국가가 케인즈주의적 정책보다 더 강력하고 직접적인 방식으로 시장을 조정하기 때문에 더 안정적인 경제성장을 보장한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장하준이 특히 박정희의 발전국가에 주목하는 이유를 알 수 있다.
그러나 한국이 과거의 발전국가 모델을 재현하여 복지국가를 실현하자는 주장은 실현 가능성이 없다. 이것은 동아시아의 발전국가나 북유럽의 복지국가가 미국 헤게모니의 확립과 위기 속에서 형성, 변화한 역사적 맥락을 간과한다. 1970년대 한국을 비롯한 동아시아의 발전주의는 냉전 체제 하 미국의 역개방정책에 의존해서 성장했다. 그러나 1980년대 냉전 체제의 이완과 미국의 경상적자 누적으로 역개방정책이 철회된 이후, 한국은 발전주의에서 신자유주의로 전환했다. 동시에 복지국가도 신자유주의적으로 ‘개혁’됐다. 따라서 지금 발전국가로의 복귀를 통해 스웨덴 모델로 진보한다는 것도 불가능하다.
사실 스웨덴 모델이 형성된 배경에는, 스웨덴이 강력한 노동조합과 사회민주당 간의 제휴라는 조건 외에도 1-2차 세계전쟁에서 중립을 유지함으로써 이후 강력한 수출지향 공업화를 추진할 수 있었다는 지정학적 조건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병천은 『선택』과 달리 박정희의 발전국가를 비판하지만 그가 제시하는 덴마크 모델이 한국적 현실에 그대로 적용될 수 없기는 마찬가지다.
지금과 같은 불황기에, 한국과 같은 반주변부 국가에서 성장기 스웨덴이나 독일에서 제도화된 코포러티즘은 불가능하다. 게다가 유럽의 코포러티즘은 장기 불황과 세계화의 압력 속에서 ‘국가 경쟁력 강화를 위한 코포러티즘’으로 변질되었다. 김대중-노무현의 코포러티즘은 실상 노동자들에게 신자유주의적 노동유연화를 강제하는 수단일 뿐이었다.


재벌의 성장과 착취의 심화

경제위기로 인해 자본간 경쟁이 격화되고 상품 실현 경로가 불확실해지면서 재벌은 생산을 통한 가치창출로 수익을 획득하던 기존의 방식을 변화하여 가치이전, 즉 다른 곳에서 창출된 잉여가치를 자신의 몫으로 흡수하는 전략을 보다 강조하게 되었다. 잉여가치의 이전전략에는 부등가교환 강화와 금융수익 추구가 있는데, 한국의 재벌은 특히 부등가교환 강화, 즉 종속적 관계로 연결되어 있는 기존 하위부품기업들에 대한 단가인하 등의 통제를 강화한다.
재벌은 『선택』이 주장하는 것처럼 단지 “주주자본주의와 사이좋게 잘 지내려다 보니 비정규직 늘리고, 하청 단가 낮추고, 노동자와 중소기업들 희생시키는”것은 아니다. 재벌의 하청계열화는 비단 주주의 이해에 부합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수출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해 ‘내부적 평가절하’에 치중하는 한국 특유의 착취 구조다. 이러한 구조는 1997년 외환위기라는 미증유의 경제위기를 겪으면서 더욱 강화되었다.
『선택』은 “한국 경제가 IMF를 빨리 수습한 건 1998년부터 삼성전자, 현대자동차 같은 대기업의 수출이 크게 신장되면서 외환 보유고가 늘었기 때문”이며, 규모의 경제가 여전히 필요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는 구조조정 및 평가절하를 통해 재벌의 수출경쟁력을 확보하는 성장전략이 저임금 장시간 고강도 노동의 악순환을 강화했다는 사실을 애써 간과한다.
경제위기 상황으로 비정규직 대량해고가 이어지던 2009년 현대차는 창사 이래 가장 큰 수익을 올렸다. 2009년 매출은 전년에 비해 1% 가량 감소했지만, 경제위기를 빌미로 한 하청업체의 납품 단가 인하와 노동강도 강화, 비정규직의 해고를 통한 과감한 비용 절감으로 영업이익을 19%나 증가시켰기 때문이다. 이렇게 현대차와 같은 재벌은 세계 경제 위기 와중에서 글로벌 선두 기업으로 한 걸음 더 발전했다.
한국의 재벌 체제는 대기업을 정점으로 한 수직적 하청계열화 구조를 특징으로 하며 이는 저임금을 기반으로 한다. 이를 바탕으로 한국은 수출-재벌 중심의 세계화를 추진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단지 주주들의 영향을 줄이고 재벌의 경영권을 보장한다고 해서 재벌이 중소기업을 생각하고 비정규직을 고려하여 위계화된 하청계열화 구조를 개선할까? 결코 그렇지 않다. 재벌은 2007-2009년 금융위기를 거치면서 중소부품업체와의 부등가교환을 통한 가치이전 전략이 자신들의 배를 불릴 핵심적인 경로라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재벌은 이 전략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선택』의 주장대로 재벌 체제를 유지하면서 저임금장시간고강도 노동을 개선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재벌체제, 원하청 노동자 공동투쟁으로 맞서야

주주자본주의를 규제하면 재벌이 사회적 타협에 나설 것처럼, 그리고 정부는 기업이 아니라 노동자의 편에 설 것처럼 생각하는 『선택』의 저자들은 노동자들을 사회변혁의 주체로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변화의 객체로 인식한다. 게다가 산별노조를 국가가 나서서 강화하라고 하는 주장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이들은 노동자의 자주적 조직과 투쟁으로 자본과 국가와의 세력관계가 바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런 점에 있어서는 민주노총을 대기업 이기주의로 똘똘 뭉친 집단으로 치부하고 시민사회에 희망을 걸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병천과 정태인도 대동소이하다. 이들은 노동자가 사회적 타협의 한 주체로 등장한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한다는 점에서 일맥상통한다.
『선택』은 노동자들에게 사회적으로 합의를 하라, 그렇게 하면 복지국가가 노동자들에게 지금보다도 훨씬 안정된 삶을 제공해줄 것이다, 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들이 모범사례로 삼는 스웨덴의 강력한 노동조합-사민당 제휴는 거대 법인기업과 국가가 주도하는 국민경제적 성장모델과 생산양식을 바꾸는 데 관심을 두지 않았고, 오히려 그러한 자본주의적 체제의 유지를 조건으로 하는 계급타협을 추구했다. 더욱이 스웨덴의 복지국가는 세계 자본주의가 금융세계화로 수렴하는 과정에서 여타의 서유럽 국가들과 비슷한 신자유주의의 길을 걸으며 변질되고 있다. 계급타협은 복지국가가 위기에 빠지면서 깨지기 시작했다. 이제 대기업과 타협해서 안정된 삶을 보장받는 ‘계급’은 노동자들의 일부분일 뿐이다. 신자유주의 금융화가 시작된 지점이 다를 뿐, 스웨덴과 한국은 계급내부의 분할과 갈등이 심화되고 있다는 점에서 같은 길을 걷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스웨덴 모델을 추구하는 것이 과연 한국 노동자운동의 목표일 수 있는가?
『선택』의 저자들이나 그를 비판하는 논자들은 재벌과의 타협이나 재벌의 개혁을 통해 복지국가가 실현가능하다고 믿는다. 그러나 재벌은 저임금장시간고강도 노동을 기반으로 한 한국경제 성장전략의 다른 이름이라고 할 때, 재벌체제에 대한 도전은 격렬한 계급투쟁을 동반할 수밖에 없다. 노동자가 세상의 주인이라는 선언을 되새기며 재벌에 맞선 노동자들의 투쟁을 조직하자. 그 시작은 노동자계급 내부의 차이를 넘은 원하청 공동투쟁일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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