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광주전남지부


사회운동

사회진보연대 계간지


2001.7-8.1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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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조아 민주주의와 정치적 혐오

김진균 | 대표, 서울대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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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들 서구나 북구의 국가들은 사회보장제도가 발전하였다고 평가한다. 그 제도를 발전시키는 노력으로 그나마 근대 '민주주의' 국가의 체모를 세우고 내부의 분열을 적게 하면서 구성원의 일체성을 발전시켜왔던 것이다.
그러나 항상 그러한 것은 아니었다. 1980년대 영국은 이미 경제체제의 비융통성과 비민주성에 의하여 공공기업을 민영화시키고, 그 동안 발전시켜온 사회보장제도를 퇴보시켜 흔히 '두 국민'정책을 시도하여 내부의 깊은 균열을 내고 있다. 그 여파는 결국 대다수 국민들에게 '정치'를, 부르조아 '민주정치'를 신뢰하지 않고 혐오하며 따라서 기존 체제에 균열을 일으키는 행동을 자아내지만 기득권층은 이를 이해하기 어렵다. 새로운 형태의 '정치적 무관심'이 대두한 것이다. 투표율이 극도로 낮아지는데, 유권자의 반수가 참여하고 거기서 다수표를 ?득한다한들 이미 그 속에는 정치를 이탈한다는 '정치적 태도'를 더 많이 나타내는 다수가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사실 서구에서 이러한 정치적 혐오는 역사가 깊다. 그것을 간단히 추적해 보면 1884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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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0년대는 유럽에 있어서 자유와 평등과 형제애가 실현될 수 있는 '가장 혁명적인 열광'이 충만했던 시기였다. 그러나 1848년 프랑스, 혁명의 수도 파리에서 자행된 '노동자에 대한 학살'은 그 열망을 환멸로 바뀌게 하였다. 1830년 혁명의 실패로 탄생한 국왕 루이 필립을 추방하는데 부르주아와 노동자계급은 합심하였다. 그러나 노동자가 남자보통선거실시와 노동자의 국민국가 참가, 대규모의 국민작업장의 설치를 일사불란하게 요구하는 노동자의 혁명적 정신에 깜짝 놀란 부르조아는 보수적인 기동경비대(주로 도둑과 룸펜프롤레타리아)를 동원하여 그때까지 동맹관계를 맺어온 노동자들을 학살하였다. 3000명이 학살되고 수천명이 투옥되었다. 이로서 루이 보나파르트가 대통령으로 선출되어 봉건파와 군주파가 손잡고 유럽을 보수반동의 분위기로 조성해 갔다. 부르조아는 그들의 동맹군이었던 노동자계급을 두려워했다.

당시 대표적인 혁명가였던 마르크스, 바쿠닌, 헤르?, 프루동 등은 부르조아를 '모욕'의 표적으로 삼았다. 그리고 서구 부르조아 민주주의에 대한 신뢰를 상실하였다. 물론 이들은 정치와 국가 그리고 노동자계급 자체에 대한 생각도 달랐지만, 일치한 것은 부르조아 민주주의를 모두 반대한다는 점이었다. 프루동이나 바쿠닌이 주도했던 무정부주의운동이나 19세기 1880년대 후반에 나타난 생디칼리즘은 모두 정치 자체, 국가 자체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기조를 확고하게 가지고 있었다. 오직 마르크스만이 프롤레타리이트를 완벽하고 전능한 것으로 믿었으며 이 프롤레타리아트가 정치권력을 장악함으로서 국가의 계급성을 궁극적으로 제거할 수 있다고 믿었다.("프롤레타리아트는 조국도 없다"는 마르크스의 말이 갖는 진정성을 이해해 보라. 그들이 진정으로 믿고 의지할 국가가 없다는 말인 동시에, 노동자운동의 원초적인 국제주의적 성격을 가장 들어낸 언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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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1년 파리코뮨이 일어날 때까지 노동자들과 혁명가들이 1848년 학살로 그냥 좌절된 채 세월을 보낸 것은 아니었다. 마르크스주의, 노동조합주의, 블랑키주의, 프루동주의, 라쌀레주의, 바쿠닌주의가 부르조아의 전면적 탄압 속에서도, 각각 혹은 연대하면서 운동을 발기하고 추진하면서 결국 1864년 9월에는 소위 제1인터내셔널이라고 지칭되는 '국제노동자협회'를 창립시켰다. 부르조아들은 국가형태를 자본주의운동이 빚어내는 이해 대립 갈등을 노출하기 시작하여 결국 프랑스와 프로이센은 1870년에 전쟁을 하기에 이르렀다. 군비가 뛰어난 독일군에 의하여 전쟁은 순식간에 끝장이 났는데 6주일간의 전쟁을 치르고 1870년 9월에 프랑스는 독일에 완전히 항복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프랑스 파리 시민들은 떨쳐 일어나 보나파르트 정권을 타도하고 공화제를 수립하였다. 물론 당시 파리는 독일군에 의해 둘러 싸여 있었다. 그러나 파리시민들과 노동자들은 '코뮨'을 탄생시켰다. 파리의 프롤레타리아트는 지배계급의 실패와 배반을 겪으면서 공무관리를 그들의 손에 의해 수행되어야 한다는 확신을 관철시키고자 하였다. 코뮨은 비록 정당도 강령도 가지지 않았던 약점이 있었지만 몇 가지 중요한 정치적 결정을 수행하였다. 교회와 국가의 분리, 교회에 대한 보조금 지급의 폐지, 상비군의 폐지와 민병으로의 대치, 경찰로부터의 정치적 성격의 배제 등이 특히 주목되는 것이었으며 무상 보통교육제도수립, 단두대의 철거 등 여러 가지 경제적 사회적 시책도 실시하였다. 그러나 해산되지 않고 있던 부르조아 군대는 곧 반격을 시작하였다.

코뮨이 비록 자본주의를 대신할 새로운 사회형태로서의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라는 발전된 정치형태라고 평가되었지만, 미숙한 조건에 의하여 70여일만에 붕괴되었다.
3만명 이상의 노동자계급의 남자 여자아이들이 무차별로 학살되었다. 4만5천명 이상의 사람들이 체포되고 그 중 1만 5천여명이 감옥에 투옥되었다. 많은 사람이 스위스, 영국, 그리고 미국으로 망명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노동자계급의 처지는 참담하였다. 그러나 부르조아들은 만족하였고 '이제 사회주의는 영원히 제거되었다'고 떠들었다. 파리는 '난동의 온상이며 붉은 혁명가들과 무정부주의자 및 미친 여자들의 전당'이라고 하면서 노동자를 '붉은 교외'로 내몰고 파리시내의 구성을 보수화시켰다. 유럽 전체가 노동자를 감시하고 '인터내셔날'을 박해하기 시작하였다. 노동자계급을 중심으로 하는 사회주의운동도 여러 갈래로 나눠지고 부르조아들도 국가별로 내부분열을 거듭하면서 서로 반목해 가는 양상을 전개하였다. 그것이 극도로 제1차 세계대전으로 나타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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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후 '인터내셔날'도 분열되고 노동자계급운동도 분열되었지만, 서구의 부르조아 민주주의에 대한 노동자계급의 혐오가 씻어진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노동자계급의 부르조아 민주주의에 대한 혐오로 인해, 마르크스주의는 정면으로 노동자계급정당을 건설하고 국가권력을 장악하는 것으로 전화되어 혁명을 꿈꾸게 하였고 이와는 달리 무정부주의운동은 마르크스주의의 노선과는 달리 '국가'자체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운동방향을 설정했던 것이다. 그 어느 것이나 운동의 성격은 '국제주의'를 띠고 있었다. 드디어 20세기 초에 러시아혁명이 있었고 그 70년 후 소련이 해체된 지금에 성찰해 보면, 소련에서 '사회주의민주주의'가 발전되지 못했다는 평가가 제기되었다. 이것도 하나의 뼈아픈 역사적 실험이었으리라고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혐오가 팽배하더라도 국가의 중심권력을 어떤 형태로 설정해야 하는가는 언제나 기본적 과제가 될 것이다. 한나 아렌트의 성찰을 빌리자면 대중적인 사회운동이 고조되고 국가권력이 전복되더라도 그것 자체가 진보를 담보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 적어도 그 전복되는 시기에 중앙의 권력을 다투는 세력 중에 '진보적 세력'도 적절하게 있어서 그 순간에게 기민성을 발휘하여 권력을 장악하는데 나서야만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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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래 한국의 정치적 '민주주의'가 피지배블록에게 '혐오'를 주는데는 충분하고도 남는다. 지배블록은 대다수 민중에게 삶의 터전을 박탈하는 공세를 취하고 있다. 경제적으로 터전을 파괴하거나 불안정한 상태로 몰아내는 동시에 '국가의 공권력'을 난폭하게 사용하고 있다. 아마도 한국의 노동자들은 아주 처참한 신세로 떨어지고 있다. 이럴수록 역사적 교훈을 배워야 한다고 본다. 민중으로 하여금 국가권력에 대한 깊은 성찰과 관심을 더욱 고조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국가의 중앙권력에 도전하는 민중세력과 그 조직을 만들어가야 할 것이다. 현재 자본주의가 지구화로 더욱 세계화되는 추세와 마찬가지로 지구적 민중연대의 가능성도 제고되고 있으므로 여기에 연대하는 힘을 성장시켜야 함은 당연하다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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