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광주전남지부


사회운동

사회진보연대 계간지


2013.가을.11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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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시간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적 분석

현대에 부활한 과거의 노동시간

피에로 바소 |
이 글은 피에로 바소의 『현대에 부활한 과거의 노동시간』(Pietro Basso, Modern Times, Ancient Hours, Verso, 2003)의 결론인 6장을 우리말로 옮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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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신자유주의의 명제

우리가 살펴 본 것처럼 가장 발전한 자본주의 국가에서 자본은 노동시간 단축을 격하게 반대한다. 실제로 임금노동자의 노동시간을 연장하고 노동강도를 강화하고 유연화하려는 추세가 늘어나고 있다. 결론을 다루는 이번 장에서는 우연한 것이라고 볼 수 없는 이러한 현상의 원인을 각각 살펴볼 것이다.
오늘날의 유력한 사회경제적 교리는 이러한 원인을 규명할 능력도, 관심도 없다. 이러한 교리를 따르는 학파와 그 영향권 아래 있는 이들에게는 하나의 원칙만 통용된다. 시장경제라는 틀 안에서 과학, 기술, 노동생산성의 진보는 노동자 대중의 자유시간 확대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윌리엄 그로신(William Grossin)은 이러한 지배적인 견해를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장기적으로 기술의 효과는 논란의 여지가 없다. 기술은 노동에 투여되는 시간을 감소시킨다.’ 하지만 지금까지 이 책에서 제기한 것과 같은 노동시간의 문제는 이러한 학문적 토대 아래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한 문제의 존재가 인식된다고 하더라도, 그 현상은 우발적으로 일어난 이례적 사례로 간주된다. 정치경제 분야에서 지금은 ‘사회과학의 여왕’을 자임하는 신자유주의가 케인즈주의를 압도하고 난 이후부터는 더욱 그러하다.
신자유주의는 시장경제의 ‘자연화’를 이전에는 도달하지 못했던 정도로 철저하게 밀어붙인 정치경제 양식이다. 여기서 자연화의 의미는 자본주의와 같이 특수하며, 곧 사라질, 역사적 형태를 가진 사회의 경제적 조직체를 ‘인간본성’으로부터 내려오는 영원하고 메타역사적인 존재로 변화시킨다는 뜻이다. 시장의 복음을 전파하는 이들에게 시장은 자생적으로 활동할 수 있도록 놓아두기만 한다면 모든 문제, 비단 경제 문제뿐 아니라 모든 인간문제에 대한 자연적 해결책인 것이다. 이러한 조건이 갖추어 진다면 개인의 자유와 사회의 발전은 무한히 보장될 것이다. (하이에크가 제대로 정의 내린 대로) ‘시장이라는 비인격적 힘’에 대한 복종이 전면적이고 무조건적이어야 하는 일종의 종교행위가 되어야 하는 이유이다.
신자유주의자들에게 ‘자유기업’은 시장의 가시적 화신이다. 시장의 자유, 자본의 자유는 기업의 절대적인 자유를 요구한다. 이것이 모든 좋은 것의 기원이 될지니. 하지만 신은 우리가 이러한 자유를 억압하거나 억제하더라도 우리를 도우신다! 불행하게도 자유기업과 자유시장의 적들은 군단을 이루고 있다. 분별없고(시장이 이성 그 이상이므로), 부도덕하다(시장은 그 본성상 윤리적이므로)는 점에서 강령과 조직, 노조를 갖춘 노동자운동은 최악의 적이다. 위기, 부채, 실업, 인플레이션 등 이 모든 사회적 무질서는 시장에 불경한 노동자들이 시장의 자유로운 운동을 가로막거나 방해함으로써 사회와 자기 자신들에게 부과한 천형이다. 하지만 실제로 이러한 ‘집단적’ 노동자들만이 자유시장의 유일한 적은 아니다. 단지 ‘연대’라는 의미에서라도 ‘집단주의’(collectivism)에 굴복한 사람들도 있지 않은가 말이다. 부르주아의 신자유주의적 견해에 따르면 이것 역시 맹목적인 ‘코포라티즘’과 마찬가지다. 시장이 절대적으로 완벽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시장에 대한 대안을 섣불리 내세우면 재앙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이러한 이론적 지반 위에서 일반적으로는 임금노동의 조건, 구체적으로는 노동시간의 가치, 길이, 강도에 대해 논할 여지가 얼마나 남아 있을지는 쉽게 상상할 수 있다. 신자유주의에 있어 임금노동의 유일한 문제는 그 정의상 스스로 만들어 내는 문제, 즉 정당화되지 않고 불합리한 요구를 통해 만들어 내는 문제 밖에 없다. 이것이야말로 유일하게 실제적인 문제이다. 지금까지 20년 동안 신자유주의는 이러한 ‘자유화’라는 과업을 수행해 오면서 일부 성공을 거두어 왔다. 산업간 경쟁, 국가간 경쟁, 남반구와 북반구의 경쟁, 그리고 전 세계 프롤레타리아 사이의 경쟁을 심화시키면서 노동시간은 더욱 길어지고 힘들어졌으며, 앞으로 자본 간 경쟁은 더욱 치열하게 펼쳐질 것이다.
신자유주의에 있어 시장의 자유와 자본의 자유, 사회의 안녕, 따라서 노동자의 안녕은 모두 같은 것이다. 모두 똑같은 고리, 즉 사슬이다. 노동조건의 향상은 복종, 그것이 동의된 복종이건 필요한 경우 주저함 없이 폭력을 사용해 얻어진 복종이건, 노동자들이 시장과 자본에 완전히 복종할 때 이루어질 수 있다. 신자유주의 이론이 최초로 전면 적용된 피노체트 치하의 칠레를 기억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것은 미국 슈퍼자본주의가 제작하고 연출한 ‘공포 영화’였다. 그리고 ‘노동 원천의 불안과 불안정’ 그리고 ‘산업 불안정이라는 조건 아래서 노동 속도, 노동시간, 교대조의 불균형적인 성장’이 이러한 ‘제작’이 제일 처음 불러오는 중요한 결과다.
이러한 점에서 출발하면 우리가 우려하는 문제에 대한 해법은 찾을 수 없으리라. 시장이 자연화되면 노동자들이 겪는 모순은 최소화된다. 신자유주의에 있어 ‘자유기업’과 ‘경쟁 질서’가 모든 ‘열린’ 사회와 노동자를 포함한 그 구성원들의 생활조건을 무한히 향상시키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어떤 상황에서는 물론 시장에 외부적인 요인들 때문에 이러한 조건, 특히 노동조건이 악화되는 것 역시 똑같이 자연스러운 일이다. 어떠한 경우라도 노동시간 동결, 노동시간 증가 및 강도 강화는 자연히 처리될 사안으로, 아예 문제가 아닌 것으로, 시장이 완전히 자유롭도록 놔두거나 자유를 복원시키기만 하면 될 일이다. 걱정할 문제가 아닌 것이다. 하지만 노동시간을 단축하기 위해 투쟁하는 것, 즉 시장의 ‘도덕적 명령’에 반해서 투쟁하는 것은 반생산적인 일이다.
신자유주의가 가진 반노동적 자세는 오랜 경제학의 전통을 물려받은 것이다. 1847년 10시간 노동일 도입을 반대했던 맨체스터의 ‘복지가’ 콥든(Cobden)과 브라이트(Bright)에서부터, 8시간 노동일을 위해 투쟁한 기계공들에 대해 알프레드 마샬(Alfred Marshall)이 보인 생생한 적대감, 1933년 루이찌 에노디(Luigi Einaudi)의 ‘교훈’에 이르기까지, 또 일반적 노동시간 단축의 재앙적 성격에 대해 논한 지오반니 아넬리 경(Giovanni Agnelli Sr)에 이르기까지 그 메시지는 확고하고 명백한 것이었다.
근본적으로 시장경제 시스템에 대한 믿음에 있어서는 신자유주의 못지 않게 케인즈나 케인즈주의자들의 생각도 크게 다르지 않다. 케인즈는 ‘빈곤과 가난, 계급과 국가 사이의 투쟁이라는 문제는 무시무시한 혼란, 하지만 일시적이고 불필요한 혼란일 뿐이며’, 확실한 해법을 위한 ‘자원과 기술’은 이미 자본주의 안에 있고 ‘이를 제대로 사용할 조직을 만들 수만 있으면’ 된다고 말한다. 노동시간 단축에 있어서 케인즈는 그 대의를 지지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케인즈는 시장경제의 기본원칙 상 노동시간 단축을 가로막는 장애물은 없다고 본다. 케인즈가 보기에 장기적으로 노동시간의 급격한 단축과 평등주의적인 분배(‘1교대 3시간 또는 15시간 노동주’)를 가로막는 심각한 제약은 심리적 제약뿐이다. 이는 자본으로부터 유래하는 제약이 아니라, 과도한 노동에 병적으로 들러붙어 있는 우리 안에 있는 ‘본성’으로부터 나오는 것으로, ‘경제적 축복이라는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서 노동에 대한 병적인 집착으로부터 재교육되고, 해방되어야 할 것이다. 노동시간의 일반적 단축은 따라서 본질적으로 심리적교육적 문제인 것이다.
더욱이 케인즈는 이런 놀라운 기술진보를 바탕으로 노동시간이 일반적으로 단축될 가능성을 실질적으로 예측하였다. 그렇지만 문제는 케인즈가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 그러한 기술진보의 자본주의적 사용을 추상한 나머지 인식하지 못하고, 따라서 그러한 실질적 가능성이 실질화되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근본적 요인 또한 추상해 버린다는 점이다.
1930년 당시 케인즈가 안심시키고자 했던 ‘우리의 손자 손녀들’은 지금 머리가 흰 할아버지, 할머니가 되어 있지만 여전히 3시간 노동일이라는 약속의 땅과 비슷하기라도 한 것도 본 적이 없다. 오늘날 1970~1980년대 시점에서 ‘우리의 손자 손녀들’은 다음과 같은 폴 새뮤얼슨(Paul Samuelson) 덕분에 새로운 안심거리(덜 안심이 되는 소리긴 하지만)를 갖게 되었다.

역사적으로 노동시간은 우리가 이미 본 것처럼 점진적으로 단축되어 왔다. 미국 산업에서 토요 노동을 점점 보기 힘들어진다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유급휴가는 아마도 증가추세가 될 것이다. 휴가가 노동자의 생산성을 향상시켜서라기보다는 사람들이 여름과 겨울 휴가로부터 기쁨을 느끼기 때문이다. 더 많이 쉬는 것은 우리가 기술진보의 과실을 향유하기 위해 선택하는 방식이 될 것이다. 우리의 손자 손녀 역시 주당 더 적은 시간 일하는 쪽을 선택할 것이 확실하다. 하지만 이는 선택일 뿐이지 그럴 필요성이 있기 때문은 아니다.
확실성과 가능성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는 이러한 대립선들은 순수한 상태의 ‘사회과학’의 예이다. 모든 것은 파악하기 힘들고 정확하지 않다. 과거 100년 동안 어떤 메커니즘에 의해, 어떤 사회적 권력에 의해, 어떤 상황에서 노동시간이 ‘점진적으로 단축’ 되었는가?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에서 노동시간이 줄어들지 않았다면? 토요 노동이 줄어들지 않고, 여름이건 겨울이건 휴가일이 증가하지 않았고 오히려 줄었다면? 그리고 보통의 우리 ‘손자 손녀’들이 더 짧은 노동주를 선택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더 이상 ‘3시간 노동일’은 얘기되지 않는다. 케인즈의 약속이 얼마나 왜소해졌는지 보라!) 이것을 ‘선택’하는 사람들이 시간제 일자리, 마찬가지로 임금도 일부만 받는 그런 일자리를 택한다는 의미가 있을까? 이것이 그 확실-가능하다는 노동시간의 추가적인 ‘단축’의 결말이란 말인가? 아무도 확실한 답을 알지 못한다. 이런 불명확한 안개 속에서 더 확정적인 답을 찾는 것은 소용이 없다. 그냥 앞으로는 지금보다는 더 적게 일할 것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안심하자. 확실히 그렇다. 사실은 아마도 그럴 것이다.
노동시간에 대한 동시대의 많은 ‘전문가’들, 특히 사회학자들은 심지어 더 낙관적인 견해를 태평하게 늘어놓으며 핵심적인 문제를 피해가는 데 새뮤얼슨 못지 않은 실력을 보인다. 로저 수(Roger Sue)의 예를 한 번 들어보자. (프랑스에만 한정 짓는다면 아즈나(Aznar), 고르(Gorz), 드 푸코(de Foucauld) 같은 이들을 들 수 있을 텐데, 결과는 거의 같을 것이다.) 수는 인간 존재에 ‘자유시간이 새롭게 지배적 시간이 된’ 시대에 이미 접어들었다고 확신한다. 우리가 아직 그것을 현실화할 준비가 안 되어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가 보기에 우리가 맞닥뜨린 모순은 문화적인 모순이다. 노동과 노동시간이 중심이 되는 ‘과거의 질서에 사회가 스스로의 자기표상 안에서 필사적으로 고착되도록’ 하는 것은 단지 조건반사일 뿐이라는 것이다.
하여 ‘탈산업’ 사회에서 더 이상 아등바등 열심히 일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외면토록 하는 것이 이러한 문화적 후진성 때문이라면 적절한 계몽작업(work of illumination)을 통해 그러한 고착을 풀어낼 수 있고 또 그래야만 할 것이다. 새로운 문화적 패러다임. 이것이 기본이다! 이와 함께 ‘사회적 효용성’에 해당하는 부문을 장려하는 정책을 시행하는 것이다. 하지만 수를 비롯한 그의 동료들이 전혀 고려하지 못하는 것은 이들의 ‘신성불가침’한 시장경제는 직접적인 노동시간을 ‘모든 것의 척도’로 간주할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심지어 그러한 척도가 역사적으로 진부해졌다 할지라도 마찬가지이다. 또한 시장경제가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는 시장경제의 사회적 존재에 고유한 이유 때문이지 탈현대화를 통해 사람들의 머리에서 지워버릴 수 있는 정신적 후진성 때문이 아니다. 그리고 오늘날의 사회를 지배하는 ‘효용’의 법칙, 그리고 실제 ‘첨단 기술’ 부분의 논리는 자본 축적의 사적 효용성의 법칙이다. 수를 비롯한 그와 같은 수많은 사회학자들과 지식인들은 이런 문제에 대해서는 아무 관심도 없다.
줄리엣 쇼어(Juliet Schor)는 이런 하릴없는 미망을 갖는 이들과는 다르다. 쇼어는 문제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있으며, 노동시간 단축에 저항하는 것은 기업가 계급이지, 미국의 노동자들이 아니라는 점을 이해한다. 실제로 대다수 미국 노동자들은 노동시간 단축을 지지한다. 하지만 쇼어 역시 기업가들의 반대를 그들이 노동자를 믿지 못해서(또 다시 전적으로 심리적인 요인)라거나, 편협하기 때문이라거나(또 다시 문화적 요인), ‘처음에는 10시간으로 나중에는 8시간으로 노동일이 줄어들수록 생산성이 높아졌다’는 사실을 잊기 때문(역사의식 부재?)이라는 식으로 설명한다. 하지만 자본의 소유자나 관리자들의 문화적 혹은 심리적 태도가 아무것도 없는 가운데 갑자기 튀어나와 편협하게 된 것은 아니며, 현재의 생산과 경쟁 관계가 만들어낸 것이다. 자본가들과 관리자들이 추가적인 노동시간 단축을 격렬히 반대한다면 그 이유는 새로운 생산성 향상을 통해 그러한 단축을 만회하여 수익률 수준을 유지할 능력이 없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쇼어가 장시간노동의 구조적 기초를 하나하나 뜯어보려 시도한 것은 사실이며, 쇼어는 그 기초를 ‘소비주의’의 구조적 강제에 기인하는 것으로 결론 내린다. 하지만 그러한 강제의 기원이 설명되어야만 한다. 실제로 쇼어의 비판적 연구가 끝나는 것도 이 지점이다. 모든 시도에도 불구하고 쇼어는 스스로를 신자유주의 경제학의 논리에서 구제하는 데에는 결국 실패했다. 신자유주의 경제학은 생산의 순간을 자기 연구 영역에서 추방했다. 쇼어는 노동시간 연장의 이유를 생산과정 외부에서 그리고 상품 생산을 관장하는 법칙 외부에서 찾는다. 자본축적 그리고 후기 자본주의 사회의 안정을 비이성적으로 갈구하는 소비자적 열망의 이유와 필요에 대해 쇼어는 보지 못한다.
하지만 다른 많은 이들이 못 보는 것을 줄리엣 쇼어가 인식했다는 점은 인정받아야 한다. 말하자면 쇼어는 노동시간 단축에 대한 저항이 사회의 전 부분이 아니라 특정한 부분, 즉 자본가 계급으로부터 나온다는 점은 인식했다. 그리고 이 자본가 계급은 전혀 거리낌 없이 노동시간 단축을 반대하며, 세계화된 시장에서는 가장 발전한 선진국에서조차 국제적 경쟁 때문에 제약이 있다는 말로 이를 정당화 한다. 프랑스에서, 이탈리아에서, 서구 모든 곳에서, ‘단지’ 주 35시간제로 노동시간을 단축하는 데 대한 자본가 계급의 반대는 실로 치열했다.
전혀 우연이 아닌 이러한 반대에 대한 명확한 설명을 보려면 이탈리아 유수의 기업가로서 이탈리아경총(Confindustria) 사무총장을 지낸 이노센초 치폴레타(Innocenzo Cipolletta)의 다음과 같은 언급을 보면 된다.

주 35시간제로의 법정 노동시간 단축에 관한 논쟁에서 가장 멍청한 말은 노동시간 단축이 반대할 가치가 없는, 움직일 수 없는 역사적 추세라는 언급이다. 오히려 그것이 역사적 추세라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노동시간의 단축분은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점점 감소할 것이다!
실제로 단축 과정은 한계가 명확한 것으로, 이 경우에는 주 0시간노동제가 그 한계가 될 것이다. 나는 지금 모든 노동자들이 일하지 않고서도 돈을 버는 금리생활자가 될 수 있다고[이러한 위치는 이미 치폴레타와 그의 동료들이 차지하고 있다-저자] 믿는 사람은 없을 것이라 생각하며, 평균 0시간을 일한다는 것은 더더욱 가능성이 없다. (중략)
그렇다면 우리가 달성할 수 있는 노동시간 단축의 한계는 명확하다. 이 말은 노동시간 단축(법적, 실질적 모두)을 향한 역사적 경향은 멈출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언제?
언제라고 말하기는 힘들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중단되기 전에 노동시간 단축 과정은 상당히 속도가 느려질 것이다. 이 말은 예를 들어 주 48시간제에서 40시간제로 가기까지 우리가 40년이 걸렸다면[정확히 말하자면 ‘우리’가 아니라 노동자들이고, 40년이 아니라 50년이다 - 저자], 40시간제에서 35시간제로 가려면 훨씬 더 오래, 아마도 80년에서 100년이 걸릴 지도 모른다는 말이다. 그래서 역사적 과정에 주목하여 노동시간 단축이 역사적 경향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이제 하한선 가까이 와 있으니 추가적인 노동시간 단축은 매우 느리게 진행될 것이라고 말해야만 한다는 점은 명확하다.
솔직하게 말해준 치폴레타 씨에게 감사한다. 물론 그의 ‘역사적 논증’은 한 푼 값어치도 없지만 말이다. 만약 이름 붙일만한 가치가 있는 역사적 경향이 절대적으로 광대 바지춤 마냥 중간에서 멈춰야 할 운명이라면 역사는 반역사적 추세로 가득할 것이고, 우리는 역사라는 개념 자체를 바꾸는 편이 나을 것이다. 그렇다면 디오클레티안 황제 정도(주 35시간)에서 멈추는 대신 영점(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 - 서로마 제국 최후의 황제)으로 내려간 로마 제국의 멸망 추세에 대해서는 뭐라고 말할 것인가? 봉건제의 멸망을 향한 추세는 또 어떤가? 최초의 부르주아 ─ 대중적 내전이었던 종교개혁 즈음에서 멈췄으면 꽤나 행복했을 것이지만, 실제로는 250년에 걸친 부르주아의 혁명을 거쳐 한 동안은 아주 느리게 쇠퇴가 진행되다 어느 순간 갑자기 몰락하고 만 봉건제 말이다. 치폴레타의 ‘역사적 논증’은 전혀 설득력이 없다.
하지만 그의 말은 확실한 현실성을 띠고 있다. 쓴 약을 달콤하게 포장하는 우리 ‘전문가’들하고는 다르게 치폴레타는 자본주의 체제 아래서 노동시간 단축을 향한 역사적 추세는 점진적으로 멈추게 될 것임을 안다. 우리는 치폴레타 씨에게 이미 뒤죽박죽이 된 우리 분석에 동의하라고 하지는 않는다. 실용적인 치폴레타 씨는 완곡하게 이야기하지 않았다. 모든 조건이 잘 갖추어진다면 40시간 노동제에서 35시간 노동제로 가기 위해서는 80년에서 100년이 걸릴 것이다. 서구의 기업가들은 이 말에 동의할 것이다. 그리고 제3세계 기업가들 역시 0을 하나씩 더 붙여 800년에서 1,000년 정도로 만들면 그러한 단축에 동의할 지도 모른다.
이것은 명확하다. 일단 ‘역사적 논증’이 말이 되지 않음이 밝혀진 이상 그렇다면 이러한 ‘감속’의 원인은 무엇인가? 한 가지 힌트만 있다. 확실히 노동자들은 생산수단의 소유자들이나 사적 소유의 전도사들이 그러는 것처럼 노동하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다. 게다가 금리생활자는 이미 넘쳐나고, 이들을 먹여살리기 위해서는 노동자들이 필요하니, 노동자들이 모두 갑자기 금리생활자가 될 수도 없다. 여기까지는 명확하다. 하지만 막히는 부분, 그것도 심각하게 막히는 부분은 바로 여기다. 위의 언급에 이어 치폴레타 씨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특히 다시 한 번 ‘역사적’ 관찰을 보면 평균 노동시간과 법정 노동시간의 단축은 고용인 당 자본이 급격히 증가하였을 때 나타났다. 다른 말로 하면 자본이 노동을 대체할 때 나타났다는 것이다. 이러한 대체를 통해 노동생산성을 증가시키고 노동시간 단축에 내재한 비용의 효과를 중화시켰던 것이다. (중략)
오늘날 우리는 더 이상 이런 조건을 누리고 있지 못하다. 노동시장은 세계에서 가장 경직되어 있고, (중략) 기술진보는 일자리를 급격히 증가시키는 것이 아니라 줄이고 있다.
이 글에서 제대로 된 말은 하나도 없다. 20세기 들어 노동시간 단축이 집중적으로 나타난 두 시기인 1917~1919년과 1968~1969년을 보면, 노동시간 단축은 노동자계급의 투쟁으로부터 도출된 것을 알 수 있다. 어느 경우에도 고용인 당 자본이 급격하게 늘어났기 때문이 아니다. 실제로 1917~1919년 당시의 노동시간 단축의 경우 자본과 ‘고용인’ 양자의 대붕괴 이후에 나타났다. 노동시간 단축은 기업가들이 생산성과 노동강도를 증가시켜 노동(혹은 잉여노동)의 축소와 함께 상실되는 이윤을 보상하려는 목적으로 반응하도록 자극하고(19세기 12시간 노동제, 이후 10시간 노동제의 도입 당시 그랬던 것처럼), 그 역도 사실이다. 고용인 당 고정자본의 증가는 노동시간 단축의 원인이라기보다는 결과에 훨씬 가깝다. 어쨌건 고정자본의 증가가 노동시간 단축에 기초적이고 자동적인 원인이라면, 고정자본이 끊임없이 증가하는데 왜 노동시간 단축이 멈추어야 하는지 알 수가 없게 된다.
질문의 두 번째 측면을 보자. 경험적으로 경제 일반이건 일자리이건 급격한 성장이 (더 이상) 창출되지 않는다는 것은 진실이다. 하지만 이러한 상황은 통계를 조작하지 않는다면 이탈리아 뿐 아니라 어디서든 나타나는 현상이다. 1974년 이후로 서구 모든 곳에서 경제성장률은 하락하였다. 이런 전 세계적 규모의 현상을 두고 이탈리아 노동시장의 ‘경직성’을 비난하려면 참으로 대단한 상상력을 발휘해야 할 것이다. 실제로 다른 이유들이 있다. 더욱이 유연화가 더 높은 성장률을 가능케 하기 때문에 노동시간 단축이 유연화를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주장은 완전히 사실과 다르다. 서구에서 가장 유연성이 높은 미국과 영국은 노동시간이 가장 많이 증가한 국가들이다. 이들 나라들은 미국의 경우 43시간(금속은 45시간), 영국은 법정 44.4시간(실제 48시간) 노동주로서 1920년대 수준으로 떨어지기 직전이다. 실제로 서구의 ‘선도적 국가’는 이탈리아 기업가들이 다음과 같은 슬로건을 제출하는 데 영감을 주었다. ‘누구나 일할 수 있도록 더 많이 일하자.’
이제 남은 건 사실진술 한 문장이다. 현재의 사회 시스템 아래서 기술진보는 더 이상 고용을 증가시키거나 노동시간을 단축할 여력이 되지 않는다는 문장이 그것이다. 경제학과 시장경제가 보장한 약속에 대해 역사가 이렇게 가혹하게 응답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왜 기술진보가 이례적으로 가속화된 지금 노동시간 단축을 향한 역사적 추세가 멈추고, 다시 역전되고 있는가? 왜 자본은 생산비용을 낮추는 동시에 노동시간을 줄일 수 없게 되었는가? 19세기 중반 노동시간 단축을 향한 계급투쟁이 힘겹게 진행되었다고 하더라도, 이러한 생산비용 하락과 노동시간 단축의 동반 발생은 일반적이었다. 그리고 사회적 갈등이 더욱 힘겹게 분출된 초기 테일러주의 시대에 들어서도 그러한 조합은 일반적으로 나타났다. 심지어 전후 발전의 30년 주기 막바지에 이르러서도 일반적이었다. 그렇다면 왜 노동시간 단축이라는 이러한 일반적 해법이 오늘날에는 체계적으로 부정되는 것일까?
현재의 사회경제 사상으로는 이러한 질문에 설득력 있는 답을 할 수 없다. 실제로는 현재의 사상은 자본주의 메커니즘, 생산의 자본주의적 사회 시스템을 있는 그대로 보길 거부하기 때문에 이런 질문 자체를 제기할 능력도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자본의 운동을 규정하는 ‘법칙’(law)이 사실은 진짜 법이라는 사실을 굳이 숨기려 하지 않는 경우에도, 그 법칙은 물가 법칙, 임금 법칙, 개인적 소비 법칙, 화폐 유통의 법칙, 기업 간 경쟁 법칙 등으로 나타나지 자본과 노동을 연결하는 특정한 사회적 관계를 규정하는 법칙, 즉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법칙으로 나타나지는 않는다. 하지만 현재 진행되고 있는 기술 혁명에도 불구하고 더 이상 노동시간이 크게 줄어들지 않고, 오히려 더욱 길어지는 이 수수께끼를 적절히 설명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관계로, 이러한 수준으로 돌아가야 한다.

II. 비판적 분석의 최초 요소들

사회적 노동, 사적 영유
‘나의’ 테제는 노동시간 단축에 대한 자본가 계급과 자본주의 국가가 보이는 오늘날의 격렬한 저항, 그리고 노동시간 동결 심지어 연장을 향한 국제적 추세는 매우 견고한 구조적 기반을 가지고 있다는 것으로, 이 주장은 내가 마르크스를 제대로 이해한 것이라면, 전적으로 마르크스로부터 연유한다. 이 기반은 자본의 가치증식(valorization) 과정이 더욱 복잡해졌다는 사실에 연유한다. 그 복잡성이란 결국 상품 생산 속에서 (자본주의적으로 사용되는) 기술, 과학, 기계가 구성하는 부분이 유일한 잉여가치의 원천인 산 노동으로 구성되는 부분보다 점점 더 커져감에 따라 산 노동이 상대적으로 감소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다. 이러한 ‘점진적’ 감소(이러한 감소는 세계적으로 산업 프롤레타리아의 산술적 증가와 모순되지 않는다)는 자본이 ‘잔여’ 노동력을 그 강도와 시간에 있어 극한으로 쥐어짜낼 필요를 키운다. 이러한 필요와 더불어 기술진보의 자본주의적(이윤을 위한) 사용과 노동시간 단축 사이의 격차 확대는 이제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기본 모순에 자리잡는다. 즉, 자본주의가 발전시킨 생산적 노동력의 사회적 성격과 그 사용의 사적 성격 사이의 모순에 위치하게 되는 것이다.
앞으로 몇 페이지에서 ‘나의’ 테제를 완전히 전개하지는 않을 것이며, 현재의 상황에 이르게 된 사회경제 과정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하지도 않을 것이다. 다만 내가 보기에 이 상황을 객관적으로 보고 이해하기 위해 필수불가결한 범주를 제시하는 데서 그칠 것이다. 그 후에는 이러한 질문에 대한 이론적 설명의 도식 정도가 이어질 것이다. 사실이 스스로 말하게 하여 편견 없는 독자라면 현실(reality)과 우리 사회생활에 핵심적인 문제, 즉 노동시간이라는 문제에 대한 지금의 재현(representation) 사이의 간극에 대해 일정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필자의 목적이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획일화된 정형의 시대에 몇 가지 의구심을 제기하고, 현재 ‘의심받지 않고, 의심받을 수 없는 진실’에 비판을 가하는 것, 그리고 현 상태에 대한 반발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면 그것으로 만족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실제 과정을 묘사하고 분석하는 데 우선순위를 둔다고 해서, ‘현대에 부활한 과거의 노동시간’이라는 수수께끼의 기본적 원인을 밝히는 의무를 회피하려는 것은 아니다. 일단 지금 문제가 되는 현상은 설명 불가능한 것도 아니며, ‘계산할 수 없는 경제의 신비’나 사회적 상호작용의 ‘여성적 변덕’ 탓으로 돌려야 할 것도 아니다. 결코 그렇지 않다.
이러한 도식을 통해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본질을 밝힐 것이며, 이러한 본질을 비껴가는 노동시간의 ‘이상한 점’에 대한 모든 논의는 가치가 없다. 객관적, 구조적, 경제적 요소에 너무 많은 비중을 둔 나머지 주관적 요소를 고려하지 않는 것 아닌가라는 이의를 제기할 수 있다. 필자 역시 이러한 분석의 부분적 성격을 기꺼이 인정한다. 경제 문제를 분석함에 있어 실제로 몇 가지 선택적인 기준을 따랐다. 가격과 유통이 아니라 가치와 생산을 다룰 것이라는 말이다. 물론 이러한 범주들은 동일하지 않다. 가치는 가격이 아니고, 생산도 유통이 아니다. 하지만 유통이 생산에 근거를 둔 것과 마찬가지로 가격은 가치에 근거한다. 그 반대임을 증명하려고 한 세기가 넘도록 시도하고(성공적이지 않았다), (제본스를 비롯한 이들이) ‘환상’이라고 평가한 노자간의 대립을 생산자와 소비자 사이의 대립으로 치환하려 했지만(성공적이지 않았다), 이것이 사실이다. 여기서는 가치와 가격의 관계도, 개별 가치와 사회적 가치의 관계도, 시장가격을 결정하는 평균적 생산조건도, 이 분야에서 경쟁의 역할에 대해서도 다루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불가피한 자기제한은 이 연구의 기저에 깔린 이론적 논리에 부합하며, 길고 더 힘든 노동시간으로의 추세를 만들어 내는 가장 감추어져 있고, 등한시되고, 신비에 싸여 있지만, 또한 가장 핵심적인 요인들에 초점을 맞추려는 목적에도 부합한다.
그렇다면 반으로 줄어든 도식, 즉 A-B-C가 아닌 A-B를 고려하자. 하지만 문제가 되는 추세의 물질적(구조적) 기반을 처음으로 알아차리는 것은 그 주관적, 심리적, 문화적 구성요소를 이해하는 데에도 도움이 된다. 왜냐하면 그러한 구성요소 역시 기반을 이루는 것으로, 나뭇가지도 나무 자체인 것과 다를 바 없다.
자본주의적 생산을 그 이전의 생산 형태와 구별짓는 핵심적인 특징은 그 역사적 기원에서도 이해될 수 있다. 마르크스가 말한 것처럼 자본주의적 생산의 시작은 개별 자본가들이 다수의 노동자들을 한 곳에 모으고 이들에게 대량의 상품을 생산케 할 정도로 많은 화폐를 소유하게 되었을 때만 가능하다. 축적을 가능케 하기 위해 끊임없이 확장해야 하는 생산을 위한 대량의 화폐, 대규모 노동력, 대규모 상품들. 이러한 ‘이상적’ 개척자와 그 모방자들의 행위는 시간적으로 확장되고 성장하는 공간으로 확대되어(‘원시’ 자본주의) 전(前)자본주의적 생산에 적합한 ‘사적 노동’을 해방시켰고, 노동수단과 노동과정, 인간 노동력에 점점 더 사회적인 성격을 부여하였다. 그렇지만 이는 노동의 사회화(노동과정에서 인적 협력의 발전)가 자본주의와 함께 태어난 것이라기보다는, 천 년에 걸쳐 발달한 전자본주의적 사회화에 근거한 노동의 자본주의적 사회화가 매우 중요한 역사적 도약을 의미한다고 보는 편이 옳을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집합적인 인간 노동의 무한한 가능성을 보여준 것은 바로 자본주의이다. 자본주의는 많은 노동력을 단일하고 집합적인 사회적 노동력으로 모아 결합시킴으로써 마르크스가 말한 노동력의 집합적 힘으로의 결합을 만들어 낸다.
이 집합적 힘은 우선 노동력의 집중, 그리고 생산 조건과 생산수단의 집중, ‘마지막으로’ 성장하는 노동의 사회화가 가능케 한 이러한 노동과정의 객관적 조건들을 끊임없이 기술적, 사회적으로 혁신해 나간 결과다. 이러한 노동력의 집중사회화 동역학 안에서, 사용가치의 생산에 기초해 있던 작업장 안에서의 수공업적 생산이 불에 타 사라진 재 속에서 마르크스가 말한 사회적 평균 노동이 생겨난다. 이는 교환가치의 생산을 위한 노동으로(사용가치만 갖는 것이 아닌, 상품의 생산을 위한 노동) 노동력의 거대한 사회적이고 집합적인 결합(이 결합의 상징은 공장일 것이다)의 일부분인 한에서만 그렇게 존재할 수 있다. 사회적 평균 노동과 함께 사회적 평균 노동의 질과 양(시간)이 나타나는데, 이는 사회적 노동일과 사회적 노동일이 자본주의적 발전의 서로 다른 단계, 부문, 시기에 갖는 생산성을 표현하는 것이다. 특히 노동의 자본주의적 사회화는 생산력(생산성)의 기하급수적인 성장을 가져오는데, 이는 정확히 노동의 사회적 생산력이다.
파도처럼 끊임없이 밀려와 증가하는 노동력 사이의 협업은 다음과 같은 효과를 모든 사회적 생산 형태와 ‘수준’에 걸쳐 드러낸다. 생산에서 분업, 서로 다른 생산 제조 부문의 차별화와 경쟁, 구식의 도농간 분업 해체, 기계의 창조와 중단 없는 개선, 생산으로 자연력 흡수, 과학 기술을 그 과학 기술을 생산한 노동에서 분리, 노동 수단과 노동 과정의 끊임없는 혁명, 생산과 생산 계획의 과학적 분석, 기계 시스템 창조. 지난 다섯 세기 동안 노동의 자본주의적 사회화는 오래된 사회적 관계와 생산 방식을 전 세계에 걸쳐 더 널리 파괴시키면서, 상품 생산에 필요한 자본의 집중과 노동시간의 단축을 통해 관련된 인간 노동의 생산 역량을 일깨워 온 태풍이다.
이러한 노동의 사회화 과정과 생산규모 확장은 자본의 이윤이라는 ‘악마가 지배’한다. 그 차별적 특징은 세계적 차원으로 보편적 ‘단일’ 생산양식을 만들려는 경향이 있어, 다양한 발전 단계를 거쳐 자본주의적 사회 및 생산관계의 세계화의 기초와 가속기가 되는 세계 시장을 출현시키고, 따라서 자본주의적 교환, 무역, 신용, 유통 그리고 위기의 세계화를 낳는다.
하지만 이렇게 보편적인 사회적 노동이 가진 힘이 무섭게 높아지면서 발생학적 모순(genetic contradiction)이 자리잡는다. 이러한 사회적 힘은 사회 전체의 처분에 놓여지는 것이 아니라 사회의 한 ‘사적’인 부분, 즉 자본의 처분에 놓여진다. 자본을 움직이는 것은 인간의 필요를 의식적으로 만족시키기 위함이 아니라 자본의 자기 확대를 만족시키기 위한 카오스적 욕망이다. 오랜 동안 쌓여온 사회적 노동 조건들을 소유한 자본은 이 조건들을 마치 자기 자신의 특성인 것처럼 사용하고, 자기 자신의 가치증식이라는 특정한 사적 목적, 즉 이윤을 위해 사용한다. 이러한 자본주의적 사회 시스템의 발생학적 모순은 자본과 노동의 객관적 적대로(표면적으로는 그러한 적대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는 경우에도) 드러나는데, 이는 반윤리적인 결과를 무수히 내포한다. 이러한 것들은 생산과정으로부터 출발하는데, 생산과정은 동시에 사회적 노동과정과 ‘사적’ 가치증식 과정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끝은 ‘노동으로부터 자유로운 시간’의 생성으로 결말을 맺게 되며, 이 ‘노동으로부터 자유로운 시간’은 대중의 실업과 금리생활자 계급의 유한(有閑) 시간의 상반된 두 형태로 나타난다.
따라서 노동의 사회화와 사회적 노동의 조건과 생산물에 대한 사적 영유 사이에는 근본적인 모순이 존재한다. 이 말은 두 힘이 동등하여 영구적인 교착상태에 있다는 말이 아니다. 그렇지 않다. 자본주의 체제 아래서는 자본이 사회적 노동을 지배(착취)한다. 집합적인 사회적 노동은 사적 목표에 봉사해야 한다. 즉 이윤의 독재라는 법칙을 따라 자본의 확장에 복무해야 하는 것이다. 물론 이는 노동이 이러한 ‘운명’에 저항하지 않을 때만 그러하다.

이윤을 위한 생산, 자본주의
자본주의적 생산의 핵심은 실로 이윤을 위한 생산이라는 점에 있다. ‘더 많은 양으로 무한히 성장’하는 이윤을 위한 생산이다. 자본주의 아래서는 이윤이,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이윤이야말로 ‘경제라는 기계를 움직이는 원동력’이며 그 유일한 생산요소는 (원료를 제공하는 자연과 더불어) 살아 있는 임금노동이다.
자본주의적 생산은 거대한 집합적 힘이 흐르는 지하의 화산 같다(프리츠 랑 감독의 작품 메트로폴리스에서 묘사된 지하도시처럼). 모든 것은 움직인다. 하지만 이 영구적 운동이라는 영역은 결코 남들이 일컫는 자유의 왕국이 아니다. 모든 사회적 삶을 지탱하는 ‘기계 앞의’ 남성과 여성, 즉 노동자 계급 자체는 법적으로는 자유로울지라도 실질적으로는 예속 상태에 있다. 노동자 계급은 생산에 관여하지만, 생산 조건이나 수단 그 어느 것도 이들 계급에 속해 있지 않다. 과거에 장인 또는 농민이었지만 생산수단을 빼앗긴 이들, 혹은 이들의 자손들이 가지고 있는 유일한 상품은 노동의 에너지이다. 이들은 이 노동의 에너지를 사회적 노동의 조건과 수단을 자신의 ‘재산’으로 소유한 이들의 처분에 맡기고, 또 맡겨야만 한다. ‘처분에 맡긴다’는 것은 노동력, 즉 노동시간, ─ 시간이 ‘인간 발전의 근원’이라는 말이 사실이라면 ─ 곧 이들이 살아있는 시간을 판다는 말이다.
매일 같이 이러한 인간의 살아있는 에너지는 자신을 재구성하기 위해 시장에서 일자리를 구해야 한다. 자신의 노동 에너지를 사서 고용할 금전적, 기술조직적 수단을 지닌 ‘누군가’를 찾아야 하는 것이다. 이들은 이 인간의 살아있는 에너지(하지만 희귀한 상품인양 굴어서는 안 되므로 완전히 구매하지는 않는다)를 구매해서 일을 시키는 자본 소유자 계급에게서 이러한 수단을 찾는다. 상품을 생산하고, 무엇보다 이윤을 생산하기 위해서 그렇게 한다. 이것이 자본주의적 생산의 영구적 운동이 지닌 목적이다. 확대하고, 이윤을 내고, 자본을 가치증식 하는 것.
자본에게 있어 이런 동일한 노동과정은 진정한 인간 욕구를 만족시키는 데 유용한 ‘것들’을 생산해서가 아니라, 가치증식 과정으로서만 의미가 있다. 자본에게 있어 무엇을 생산하는가는 아무 차이가 없다. 그것이 아스피린이건 마약이건, 영계건 광우병 소건, 안나 카레니나건 사라 퍼거슨 전기이건, 맛있는 마멀레이드건 네이팜탄이건 아무 관계가 없다. 모든 제품상품은 동일하다. 이들이 판매가능하다는 점만 의미가 있으며, 판매를 통해 이것들을 생산한 자본이 이윤을 창출한다는 것이다. 개별 자본가의 심리인류학적 유형은, 형식적 소유자건 실제 관리자건 아니면 둘 다건 관계없이, 이러한 자본 그리고 자본주의적 생산, 즉 이윤을 위한 존재로서의 존재양식을 물질화한 것이다.

따라서 자본의 자기 가치증식(잉여가치의 창출)은 결정적이고, 지배적이며, 압도적인 자본가의 목적으로, 자본가 행위의 원동력이며 내용이다.

개별 노동자들이 자기 노동 에너지를 팔거나 팔지 않을 정도의 자유만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개별 자본가, 개별 기업 임원은 이런 저런 것을 ‘마음대로 하거나’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할’ 정도로 자유롭지 못하다. 자선 사업에 투신하거나 ‘비영리 부문’에 몰두한다 하더라도 자본가는 그 자신이 단일한 목적을 가진 ‘시장이라는 비인격적인 힘’의 도구이기 때문에 자유롭지 못하다. 그 단일한 목적이란 바로 이윤이고, 이것이 자본주의 아래서 ‘경제라는 기계를 움직이는 원동력’이다.

부불 노동시간, 이윤
지금까지 말한 내용은 어느 정도까지는 자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이를 통해 주요 질문의 중심에 다다랐다. 이윤의 실질은 무엇인가? 그 기원은 무엇인가?
이윤은 혁신에 대한 보상이다. 이윤은 ‘기업가 위험’에 대한 보상이다. 이윤은 자신의 상품에 특별한 가격이 매겨진 기업가가 시장에서 획득한 수익이다. 이윤은 탁월한 품질의 상품이 만들어 낸 수익이다. 이 말들은 모두 두 가지 근거 없는 가정에 기초한 동어반복이다. 하나는 이윤이 시장에서 만들어진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윤은 어떤 식으로든 명민한(정보를 가진) 자본가와 바보 같은(정보가 없는) 자본가, 아니면 판매자와 소비자 사이의 관계에서 발생한다는 것이다. 상품 시장은 이윤이 실현되는 곳일 뿐, 이윤이 생산되는 곳은 아니다. 자본 간의 관계에 있어 개별 거래를 고려하지 않고 그 합을 계산하면 수익과 손해는 똑같다. 이는 상품의 판매자와 구매자 사이의 관계와 마찬가지다. 사회과학에서 이윤에 관해 유일하게 동어반복이 아닌 설명이 있다면 그것은 이윤이 노동, 그 중에서도 지불되지 않은 노동, 즉 부불 노동시간을 노동수단의 소유자 계급이 노동자 계급으로부터 집단적으로 전유한 것이라는 설명이다.
이윤을 구성하는 (화폐화된) 가치의 ‘잉여는 노동의 ‘잉여’, 즉 잉여노동으로 이는 생산과정 속에서 임금노동(노동자 계급)이 자본(자본가 계급)에 제공한 것이다. 이는 노동의 ‘잉여’로서 자본이 실제로 지불한 노동의 양, 노동시간을 넘어서는 부분이다. 19세기의 한 경제학자는 순진하게도 이러한 ‘잉여’를 노동일 하루의 마지막 시간을 공짜로 일 해주는 것으로 설명한 바 있다. 하지만 그러한 그의 순진함에도 불구하고 그는 현실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이윤이라는 나무가 자라나는 토대를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윤은 따라서 생산과정이다. 이곳이 부불 노동시간의 영유라는 자본주의 사회의 근본적인 사회 작용이 일어나는 장소이다. (법적인) 평등의 원칙과 공개적으로 충돌하는 이러한 사회작용은 어떻게 가능한가? 그 이유는 실제로 작용하는 물질적 관계를 고려하면 자본과 노동의 교환은 ‘자유롭고 평등한’ 당사자들간의 교환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것은 사회적 생산수단과 조건을 독점적으로 보유한 계급과 그러한 수단과 조건이 없는 계급 사이에 일어나는 사회적 불평등 교환이다. 자본을 확대하기 위해 필요한 모든 노동 및 생활시간을 구매할 수 있는 계급과 살기 위해선 자신의 노동 및 생활시간을 임금을 위해 팔아야 하는 계급 사이의 교환이고, 사회적 시간, ‘모든 이’의 시간, 간단히 말해 그냥 시간을 소유할 수 있는 계급과 시간을 박탈당한 계급, ‘시간 없는’ 사람들 사이의 관계이다. 이것이 시간과 노동시간에 대한 오늘날 모든 문제의 핵심이다. 말하자면 시간은 상품, 즉 현금 거래의 대상이다.
이 거래에서 자본은 노동에 대해 노동 ‘시장’(전형적인 구매자 우위 시장)에서 그리고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사회적 삶과 정치적 삶에서 지배적인 지위에 있다. 자본은 이런 지위 덕분에 ‘노동력’이라 불리는 아주 특별한 상품을 활용할 수 있는 것이다. 노동력이 특별한 이유는 보통 상품은 구매에 들어가는 비용만큼의 가치가 있는 반면, 노동력은 주어진 가치 이외에도 자신이 가치의 원천이라는 것이다. 시장에서 x만큼의 가치를 지불하고 노동력을 구매하는 자본가들은 그 x만큼의 가치 이외에도 영구적으로 가치를 생산할 수 있는 힘(육체적 한계와 관계 없이, 육체적 한계는 우리가 보아온 것처럼 신축적이다)을 영유한다. 이러한 힘은 특별하다. 왜냐하면 노동과정에서 ‘손’을 거쳐 가는 무엇이든 그것에 새로운 가치인 ‘잉여’가치를 추가하는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손’이라는 말에 따옴표를 붙인 것은 어떤 형태든 손노동(육체노동)을 하지 않아도 되는 임금노동자는 없기 때문이다(키보드 앞에서 일하는 노동자도 마찬가지이다). 노동력이라는 언급은 ‘집합적인 사회적 노동’을 집단적으로 일컫는 것이다. 이 책에서는 산업 노동자 중에서 커다란 규모를 차지하고 있는 ‘낮은 부분’의 노동자에 집중하고 있지만, 노동력이라는 말에는 저숙련과 고숙련 노동자 모두가 포함된다.
우리가 말하는 ‘잉여’는 노동시간의 잉여를 말한다. (사회적이든 개별적이든) 노동시간, 노동일은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 부분은 임금의 가치에 해당한다. 이 부분은 노동자가 ‘자기 자신’과 가족을 위해 일하는 시간이고, 재생산에 필요한 노동시간이다. 이는 사회적으로나 국제적으로 그러하다. 두 번째 부분은 임금의 가치를 초과하는 부분이다. 그것은 (추가적인 노동시간 또는 잉여노동 시간인) 부불 노동시간이다. 임금노동자, 즉 노동계급은 ‘타자’를 위해 임금을 받지 않고 일한다. 바로 자본가들이다. 더 정확히 이야기하면 자본이다. 사회의 비노동 계급, 구체적으로는 자본가 계급을 유지시키는 것은 이 부불 노동시간이다. 이러한 부불 노동시간이 부족하거나 불충분할 경우 자본은 시장에서 퇴출되지만(실제로 그렇다), 그러한 시간이 풍부하고 성장하면 자본은 번성한다.
따라서 이윤의 내용은 부불 노동, 즉 노동자 계급의 부불 노동시간(잉여노동, 유급 노동시간을 초과하는 노동)에 불과하다. 그리고 이윤을 창출하기 위해서만 존재하는 자본은 부불 노동시간을 잔인하게 추구함으로써 처음부터 차별화된다. 20세기 들어 이러한 이윤추구는 노동을 조직하고 강도를 증가시키는 고도로 발달된 방식을 통해 더욱 충실해져 왔다.
먼저 이 점을 명확히 하자. 자본주의 아래에서 ‘경제라는 기계를 움직이는 주요 원동력’은 이윤 추구다. 자본이 이윤을 창출하기 위해 존재하면, 이윤이 부불 노동시간으로 구성된다면, 자본은 보충적(부불) 노동시간을 영유하기 위해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 최대한 많은 부불 노동시간을 임금노동(이것이 없으면 자본은 ‘죽는다’)으로부터 (추출의 조건 아래서) 추출해 내기 위해 존재한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자본은 가치증식의 척도로서 직접(immediate) 노동시간을 참조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본은 노동시간을 단축하려는 프롤레타리아의 어떤 시도에도 ‘외치고 투쟁하면서’ 반응하는 것이다.

과학기술의 자본주의적 사용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생산과정에서 과학기술이 노동자들의 직접 노동보다 더욱 중요하기 때문에 더 이상 그렇게 ‘외치고 투쟁’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한 견해에 따르면(예를 들어 은행가이자 에세이 작가인 아탈리를 보라), 지금은 ‘만세! 로봇과 컴퓨터가 노동자 계급을 해방시켰다!’라고 소리 질러야 할 때이다. 하지만 이는 잘못되고 바보 같은 견해다. 작업장에 로봇과 컴퓨터가 도입되었지만 최대한 많은 부불 노동시간을 영유해야 할 자본의 필요성은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 또 노동시간을 새롭게 획기적으로 줄인 자본가도 없다. 그 이유는 자본주의라는 배경에서 과학, 기술, 기계는 그 혜택을 사회 전체로 나누는 힘으로 기능하는 것이 아니고, 특히나 노동에 유리한 힘으로 작용하는 것이 아니고, 자본이 강제하는 방식대로 작동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로봇과 컴퓨터는 노동자 계급에 생활시간이라는 선물을 줄 수도 있지만, 사실 그럴 가능성은 없다. 기계 속에 들어 있는 ‘죽은’ 노동에 비해 산 노동의 양이 상대적으로 감소한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실제로 과학기술은 노동의 힘이다. 과학기술을 만든 것은 육체노동이건 지식노동이건 보편적인 사회적 노동이었고, 과학기술을 불붙인 것도 사회적 노동이다. 하지만 이러한 노동력 역시 자본이 전유하여 자기 자신의 힘으로 삼았다. 최초의 부르주아 산업 철학자들은 과학의 산물인 기계에 앤드류 유어(Andrew Ure)가 ‘다루기 힘든 노동의 손’, 즉 노동자들을 쫓아내고 통제하기 위한 기능을 부여하였다. 과학기술의 이러한 ‘고차원’적인 기능을 찬양할 때 그들이 실제로 찬양했던 것은, 과학기술을 자본이 기술적 요소(고정자본)로서 그리고 프롤레타리아에 대한 지배의 도구로서 복속시키고 포함시켰다는 사실이었다. 이러한 ‘고차원적 기능’은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라면 모두 친숙한 포악하고 독재적이라는 낙인을 공장에 부여한다.
유어와 바베지(Babbage) 이후 한 세기 반이 지났지만, 과학기술이 이윤이라는 절대 명령에 복종한다는 사실이나, 과학기술의 이러한 복종 때문에 노동자에게 나타나는 결과, 그중에서 특히 노동시간이라는 측면에서 나타나는 결과는 전혀 변하지 않다.

기술은 풍요 사회로의 길을 연다. 따라서 그 작동에 필요한 모든 것, 특히 인간의 시간을 기계에 복속시킨 것은 진보의 명백한 대가다.
이러한 (사회적으로 지배적인) 원칙이라는 명목 아래서 우리는 노동시간에 대한 기술의 부정적 영향을 수용한다. 교대제, 야간노동, 주말노동 등. 이와 마찬가지로 전체 노동시간 구조는 바짝 조여진다. 속도와 리듬이 빨라진다. 육체적 피로에 정신적 피로가 더해지고 심해진다. 이 말은 생산성 상승 덕분에 노동시간 이외에 노동자가 활용할 수 있는 시간은 더 많아졌지만, 이런 자유시간 중 일부는 기력 회복을 위해 사용해야 하므로 전적으로 혜택이라고만은 볼 수 없다. 노동강도가 높아졌는지 낮아졌는지는 논쟁의 대상이다. 하지만 무시할 수 없는 사회학적 사실은…거의 모든 노동자들이 현재의 노동시간에 대해 불만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심지어 오늘날에도 임금노동자의 노동시간은 시간의 연장이나 강도에 있어 기계의 시간, 아마도 ‘객관적인’ 기술의 시간에 전적으로 복속된다. 이윤추구를 철저하게 추구할 필요에 의한 이러한 시간에 대한 철저한 필요 앞에서는, 노동자들에게 부정적인 모든 결과, 즉 노동자들이 ‘현재의 노동시간에 대해 불만을 가지고 있다’는 명백한(그리고 명백하게 무시되는) 사실은 아무 의미가 없다. 노동자들은 ‘시간에 대해 더 많은 요구’를 표현하지만, 이러한 요구는 ‘끊임없이 확대되는 상품의 생산과 판매를 전제로 하는 이윤 추구가 일어나는 자본주의 시스템의 논리와 충돌을 일으킨다.’
상황은 이렇다. 현재의 생산관계 속에서 과학기술은 자본주의적 가치증식의 도구이며, 부불 노동시간의 추출을 위한 도구다. 이러한 생산의 힘들은 사실 사회화된 육체적, 지적 노동의 산물이면서 이들을 생산하고 재생산하긴 하지만, 노동자 계급의 손에 들어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자본(수 세기 동안 쌓여온 지식 ‘자본’을 포함)을 온전히 영유해온 사회 일부 계층에 속한다. 이러한 힘들이 노동의 질 그리고 노동시간의 길이와 강도와 관련하여 외부적이고 적대적인 힘인 노동과 반목하는 이유이다.
노동의 질과 관련해서 과학기술은 산 노동을 적대한다. 과학기술은 자신을 ‘지적인 생산력’으로 정립하면서 육체(손) 노동과 심지어 ‘비육체’ 노동까지 기계의 부속물로 저하시킨다. 이것이 마르크스가 말한 대로 ‘모든 발명과 진보는 물질적 힘에 생명과 지성을 부여하면서 인간도 단순히 물질적 힘으로 저하시키는 결과를 낳은’ 이유이다.
자본주의 생산양식에서 기계, 즉 ‘인간의 손에 의해 만들어진 인간 두뇌의 기관’은 인간의 지식과 작업 능력을 분절화시켜 노동자를 ‘부분적 인간’, 즉 자기가 하는 일처럼 조각난 인간으로 만들고, 또 ‘부분적으로는 기계’, 즉 ‘기계의 중요치 않은 부속물’로 전락해 기껏해야 일방적인 전문기술의 마스터쯤으로 여겨지는 불구자로 만든다. 테일러주의와 도요타주의가 공장에 대해 이야기한 이러한 측면이 역시 오늘날에도 이어지고 있다는 명백한 확증이다. 소위 ‘탈 포드’ 산업을 기계, 엔지니어, 기술자, 그리고 잘 다려진 하얀 가운을 걸친 극소수의 초숙련공이 만들어가는 세계로 말하는 것은 협잡에 불과하다. 마찬가지로 마이크로 전자 혁명은 기계화에 전형적인 대량생산 작업의 표준화를 폐지시키는 것과는 전혀 관계가 없으며, 이러한 대량생산을 일반 노동의 ‘논리적 양식’으로 확장(이전)시키며, 구상과 실행의 분리를 극단화한다.

이는 마이크로전자 사회에서 가장 변화하지 않는 견고한 특성, 즉 진짜 추세라는 것이 내 판단이다. 점점 더 확산되는 고차원적인 노동과정의 모델화는 자본주의 아래서 새로운 모델의 기획자와 그 속에서 일을 하는 작업자 사이의 분리를 확산시키는 것으로, 마르크스는 이것을 두고 ‘[산 노동으로부터] 노동의 정신적 힘의 분리’라고 지칭한 바 있다.

노동시간의 길이와 강도와 관련하여 19, 20, 21세기의 자본가들은 모두 과학, 기술, 기계에 똑같은 것을 요구한다. 그것은 바로 ‘필요 노동시간을 최대한 줄이고, 잉여 노동시간을 최대한 늘리는 것’이다. 이러한 요구는 이윤의 논리와 부합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요구하는 것은 일의 절약, 고용해야 할 노동력을 최대한 ‘절감’하는 것, 즉 산 노동의 대체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자본은 항상 이윤을 염두에 두고 ‘잔여’ 노동과 생산을 새로운 영역과 국가로 끊임없이 확장해서 노동과정으로 편입된 새로운 노동의 착취를 모두 합리화하길 요구한다. 먼저 외연적으로 노동시간을 연장하고, 다음에는 내포적으로 노동시간의 밀도를 높인다. 마지막으로(이 ‘마지막’이 150년을 끌었다), 이 둘을 결합한다.
그렇기 때문에 어제와 마찬가지로 오늘날에도 기계는 ‘상품 생산에 요구되는 가장 강력한 노동시간 단축 수단’이며 동시에 ‘인간 본성에 의해 정해진 제약을 넘어 노동일을 연장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수단’이자, 노동의 강도를 최대한 높일 수 있는 수단인 것이다. 현대 산업 생산의 행위자로서 기계는 ‘인간 수행원의 연약한 육체와 강인한 의지 안에서 일정한 자연적 저항에 부딪히지 않는다면’ 영구적으로 또 무한한 속도로 작동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본가를 대신하여 지능과 의지를 부여 받은’ 자동기계는 ‘따라서 혐오스럽지만 유연한 자연적 장벽, 즉 인간이 만들어 내는 저항을 최소한으로 줄이려는 갈망에서 생명을 얻는다.’
하지만 모든 조건이 맞아 떨어지면 아침 8시에 돌아가기 시작해서 오후 5시에 멈추는 ‘구식’이지만 여전히 활용되고 있는 그런 조립라인을 떠 올리지 말아야 한다. 밤낮으로 하루 24시간 돌아가는 새로운 연속 생산 사이클을 떠올려야 한다. 모든 산업 부문과 심지어 ‘서비스’ 부문으로 확장되는 사이클, 상품과 사람을 이동시키기 위해 고도 기술이 집약된 트럭, 배, 비행기로 구성된 끊임없는 사슬을 떠올려야 한다. 눈 돌아가는 속도로 영구적인 운동을 하여 모든 면에서 공장을 모방한 사슬 말이다. 아니면 글로벌 정보통신 산업의 새로운 생산 라인을 떠올려야 한다. 정의상 시간(‘진짜 시간’), 즉 속도 그 자체인 시간에 따라 연속적인 시간과 기능을 수행하는 정보통신 산업 말이다.
자본의 힘으로서 과학기술은 생산과정과 상품 유통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다. 그 결과 생산 엔지니어, 기술자, 과학자, 일급 기사들이 행하는 소외된 노동은 자본에게 잉여가치의 중요한 직접 원천이 되었다. 왜냐하면 이들이 아무리 많은 임금을 받더라도 이들은 자신들에게 들어가는 비용보다 더 많은 시간을 고용주들에게 투여하기 때문이다. 이들이 만들어 내는 부가가치의 최대치는 자본이 일반 노동자들의 근육, 손, 신경, (심지어) 머리로부터 부불 노동시간을 짜낼 수 있도록 하는 수단과 방법을 개선하는 데 이들이 얼마나 기여했느냐에 따라 정해진다. 심지어 오늘날에도 공장 노동에서 대부분의 노동자들(기타 생산 부문을 제외한 산업 부문의 5억 고용인구 중에서 75~80%)의 부불 노동시간이야말로 양적으로 보면 자본의 가장 중요한 이윤 원천이다. 만약 가설적으로라도 사람이 하나도 없는 산업이 있다면(산업화 이후 250년이 지났는데 그런 공장은 하나도 없다), 그러니까 처음부터 끝까지 연구실에서 입력을 하면 추가적인 조작이나 보완이 필요 없는 완전 자동기계를 통해 생산되는 시스템이 있다고 가정하면, 몇몇 공론가의 이런 꿈과 같은 공장은 자본 소유자 및 관리자의 악몽이 될 것이다. 지금까지 자본이 잘 심어놓은 금맥은 고갈될 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자본이 수많은 과학자들과 기술자들에게 형편없는 임금을 지급하고 이들을 채찍질해 24시간 동안 부려먹는다고 하더라도 다시는 황금알을 낳지 못하리라.

노동생산성의 역설
과학의 응용과 함께 자본가 계급은 과학기술진보의 모든 혜택을 영유해 왔고 노동시간의 강도를 더욱 높이고 잉여가치의 생산성을 상승시켜 왔다. 그렇지만 일정 기간 이러한 진보는 노동시간 단축과 양립 불가능한 것만은 아니었던 것도 사실이다. 역설적으로 생산성 향상과 노동시간 단축이 양립 불가능해 진 것은 정확히 시간이 지나면서 노동생산성이 오랜 기간 기하급수적으로 상승한 것과 관련이 있다. 하지만 이는 시장경제에서만 기대되는 것이다. 만약 기술과학의 진보를 통해 사회적 자유시간이라는 선물을 전체 사회에 뿌리려 한다면 그것은 이윤의 법칙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기술진보는 노동시간 단축을 더욱 방해할 뿐이다. 그 이유는 역시 미지의 영역은 아니다.
자본주의의 역사적 과정을 생각해 보자. 자본은 지역적 범위에서 낮은 유기적 구성으로 출발하지만, 그 사명은 자신을 세계적 생산양식으로 현실화하고, 고정자본 형태를 노동생산성과 노동의 사회화와 함께 ‘무한히’ 확장하는 것이다. 자본주의 초기 노동자들이 직접적으로 공급한 산 노동은 기계에 포함된 죽은 노동을 압도적으로 상회한다. 기계는 여전히 산 노동과 ‘병행하여’ 노동자의 조력자였다. 잉여 노동시간의 양은 꽤 작았다. 마르크스는 『자본』에서 임금노동의 노동일이 절반으로 나누어진다고 가설적으로, 그렇지만 자의적이지는 않은 수치를 제시한다. 즉 50%는 필요노동이고 50%는 잉여노동이라는 것이다.
노동일의 부불 부분이 상대적으로 제한(전체 노동시간의 ‘단지’ 50%)되어 있고, 노동일은 특별히 길고(10~12시간 이상), 노동의 강도는 상대적으로 완만했다는 이유로 자본가들은 노동시간 중 이윤을 내포한 부분을 증가시킬 여지가 매우 컸다. 실제로 이 여지는 매우 컸기 때문에 격렬한 사회적 갈등에도 불구하고 전체 노동일의 길이가 단축되는 와중에 노동자들의 잉여노동시간은 늘 수 있었다.
마르크스 자신은 영국의 산업이 생산 감소 없이 무제한적 노동일로부터 12시간 노동일, 그리고 1848년 이후로는 10시간 노동일로 변화하는 과정을 관찰했다. 어떤 의미에서 무섭게 노동력을 빼앗아 가는 것이 아니라 ‘할부’로 빼앗아 가는 것이 실제로 자본가 계급에게도 이익이 될 수 있다(개별 자본가들은 반대할 지라도). 왜냐하면 ‘노동일의 연장은 낮은 노동강도에서만 가능할 뿐 높은 노동강도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짧은 노동일이 되어야만’하기 때문이다.
1917~1919년 노동자 계급이 8시간 노동제를 쟁취한 것이 마지막으로 있었던 대대적인 노동시간 단축이다. 이후 자본의 거대한 집중 ─ 중앙화, 노동강도의 비균질적인 상승, 생산기계의 향상(이제 산 노동은 기계와 ‘병행’한다), 자본주의의 보편적 확산이 진행되었다.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8시간 노동제 시대는 저물 것 같은 기색이 없다. 적어도 영국에서는 무제한 노동시간으로부터 12, 10시간 노동제로의 전환이 상대적으로 빨랐다. 반면 10시간에서 8시간으로의 전환은 훨씬 더 오래 걸리고, 더 힘든 과정(혁명의 한 순환이 필요했다)이었다. 거의 한 세기가 지나 ‘더 야심찬’ 기획인 8시간에서 7시간으로의 전환은 여전히 불완전하고, 목표까지는 한참 남았지만 이를 옹호하는 이는 많지 않다.
아까 얘기했던 것이 문제이다. 노동일 중 임금에 해당하는 부분이 더 줄어들고, 노동일의 길이가 줄어들면, 자본이 노동일의 단축을 노동생산성과 강도에서 만회하기가 더 힘들어 진다(지금은 극단적으로 힘들다). 이 역설의 해법은 노동의 사회적 생산성과 자본주의적이고 따라서 사적 이윤의 대립적 관계에 있다. 오늘날의 사회경제 조건에서 노동생산성은 이윤에 복무해야 하지만 심각한 객관적 제약이 있다. 말하자면 이미 착취된 임금노동의 노동시간의 양이고 다른 식으로 말하면 가변자본 대비 거대한 고정자본의 양이다.
마르크스는 탁월한 선견지명을 가지고 노동생산성과 이윤(잉여가치)의 관계, 이미 축적된 자본과 그 추가적인 가치증식 간의 관계를 이론적으로 다음과 같이 정리하였다.

생산성 향상 이전에 자본의 잉여가치가 크면 클수록 전제되는 자본의 잉여노동 또는 잉여가치도 커진다. 노동일 중 노동자와 동등한 구성분이 작으면 작을수록 자본이 생산성 향상으로부터 수취하는 잉여가치 향상분은 작아진다. 자본의 잉여가치는 상승하지만 생산성 발전에 대비하면 훨씬 작은 비율이다. 따라서 자본이 이미 발전되어 있고 더 많은 잉여가치를 생성해 왔다면, 자본은 가치증식을 하기 위해서 즉 잉여가치를 더하기 위해서 곤란을 무릅쓰고 생산성 향상에 나서야만 하지만 이 경우에도 그 비율은 더 작다. 그것은 왜냐하면 하루 중 필요노동을 표현하는 일부분과 전체 노동일 사이의 관계가 항상 여전히 장벽이기 때문이다…. 자본의 가기가치 증식은 이미 가치 증식된 만큼 더 힘들다.
예를 들어 보자. 현재 평균 노동일(8시간) 중에서 임금에 해당하는 부분이 2시간(1/4)이고, 나머지 2시간은 국가가 가져간다고 하자. 그러면 자본이 직접적으로 가져가는 것은 하루 평균 ‘단지’ 4시간에 불과하게 된다. 모든 다른 조건이 동일하다고 보고, 예를 들어 노동생산성이 갑자기 100% 향상(이탈리아에서 대략 20년간 상승한 수치이다)되었다고 한다면, 부불 노동시간 상승분은 결코 100%에 이르지 않고, 25% 정도이다. 즉 상승분은 4시간에서 5시간 ‘밖에’ 안 되는 것이다. 자본에게 있어 ‘더 안 좋은’ 상황은 임금의 가치와 국가가 수취하는 부분의 가치가 절반인 경우이다. 즉 각기 2시간이 아니라 1시간인 경우이다(오늘날 서구 국가들의 평균적인 상황은 이 경계에 근접하였을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 이 경우 두 번째로 100%의 생산성 향상이 일어난다고 하면 부불 노동시간 증가분은 ‘겨우’ 30분(1/8 향상이 아니라 1/16 향상) 밖에 되지 않는다. 결론적으로 이미 높은 노동생산성을 높이는 데에는 큰 문제가 있고, 이를 이윤 상승으로 가져가는 것은 더 큰 어려움이 생긴다. 부불 노동시간으로부터 얻는 이익이 줄어들기 때문인데, 이는 일반적으로 자본의 가치 상승은 노동의 생산력(생산성)의 향상보다 더 낮은 비율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오노(Ohno)가 테일러 자신도 해내지 못했던 목표였던 전체 노동에서 ‘부가가치 노동’이 아닌 부분을 0시간으로 줄이려는데 집착하는 모습을 보면 [자본주의라는] 구조적 지반 위에서 더욱 곤란해진 가치증식에 대해 ‘부가가치’의 독점적 소유자와 관리자가 보편적으로(‘일본’만이 아니다)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자명하다.
피아트 자동차와 관련된 ‘물리적’ 데이터를 살펴보자. 1900년 피아트의 노동자 50명은 일 년에 24대의 자동차를 생산했다. 일인당 연간 차 반대도 못 만든 것이다. 35년이 걸려 일인당 한대 수준을 넘었다. 1949년에 일인당 1.3대가 되었고, 1955년에는 3.3대, 1960년 5.7대, 1970년 8.4대로 상승했다. 1980년 19대로 상상하더니 1993년에는 44대(미라피오리(Mirafiori) 공장)가 되었다. 하지만 3년 뒤 멜피(Melfi) 공장에서는 일인당 64대를 생산했다. 물리적으로 보면 공장 노동의 생산성 향상은 1890년부터 따져보면 1993년 미라피오리 공장 기준 8,800%였고, 1996년 멜피 공장 기준 12,800%였던 것이다. 1949년에 비교하여 보면 피라피오리 공장은 대략 3,400% 이상, 멜피 공장은 5,000% 약간 못 미치는 정도이다. 가치를 기준으로 놓고 보면 이러한 생산성 향상 비율은 크게 줄어들긴 하지만, 피아트 노동자들의 노동일 중 배타적으로 회사만을 위해 일하는 시간이 늘어났는지 알 수 있다. 물론 실질 임금도 늘어났지만 비숙련 노동자의 경우 임금은 월 800에서 1,000유로(교대제 노동자) 정도로, 생존선을 크게 웃도는 것은 아니다. 임금은 기하급수적으로 성장하지 않았지만 회사의 매출(전후 기준)은 1950년 1억5천 리라에서 1997년 50조 550억 리라로 성장하였고, 노동자 수는 단지 50%가 조금 넘는 수준(1952년 71,000명, 현재 118,000명)이 늘어났을 뿐이지만, 일인당 생산액은 1950년 250만 리라에서 1997년 4억2천만 리라로 늘어났다.
이는 과학과 기계화를 자본주의적으로 사용한 결과 그리고 노동생산성 향상의 결과인 고정자본의 확대를 나타낸다. 지금까지 논의한 것처럼 고정자본(공장, 기계, 등)의 성장은 노동생산성 성장과 비례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고정자본은 거대해진다. 자본축적의 중력의 중심은 산 노동에서 객관화된 노동으로 옮겨간다(고정자본 역시 노동의 결과라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축적된 노동이다). 이러한 자본 구성의 변화는 사회적 생산의 잠재력을 높이고 그 모순도 키운다. 왜냐하면 어떤 경우든 자본의 이윤은 생산의 ‘주관적’ 요소, 즉 산 노동의 이윤율로 측정이 되는데, 그 자본에서 객관적인 비중이 (상대적으로) 감소하기 때문이다.
이는 일련의 결과를 산출하는데, 이는 오늘날의 지배적인 경제 이론은 부정하지만 국제경제의 현실을 보면 부각되는 요소이다. 무엇보다 일반 이윤율의 점진적 하락(1950~1982년 공식 통계를 보면 나와 있고, 자본은 이 시기 신자유주의로 대응했다), 생산과 소비의 격차 확대 및 과잉생산의 가능성 증대(통화당국은 과잉생산에 체계적인 억압으로 대응한다), 그리고 자연에 대한 지식 향상과 그 지식을 사적 착취와 자연의 소비를 위해 활용하는 것 사이의 대립 확대 등이 그러한 현실이다. 이 모든 근원에는 사회적 노동력과 이를 사적으로 영유하는 반사회적 힘의 대립이 있다.
이는 더 적은 노동으로 더 많은 생산을 하기위해 자본이 고용규모를 체계적으로 축소(‘린’ 생산)하려는 경향을 설명한다. 월스트리트의 최신 경향인 대규모 정리해고 의도를 내비치기만 해도 주가가 급등하는 현상은 시장에서 (축적된 자본에 비해) 감소하는 노동력으로부터 더 많은 양의 잉여가치를 짜내는 기업의 능력이 얼마나 중요하게 여겨지는지를 보여준다. 기술 혁신이 가장 빠르게 일어나는 곳은 새로운 부분이기 때문에 이 과정은 매우 역동적으로 진행된다. 이 지점에서 회사는 줄어든 노동자를 벌충하고, 자본투자를 최대한 빨리 상환하기 위해 노동시간 단축을 반대하고 노동시간 연장을 위해 무슨 일이든 한다.
지난 25년간 대규모 실업의 확산은 너무나 눈에 띄는 현상이라 거의 누구나 경험적으로 인정할 수밖에 없는 현상으로 간주해 왔다. 세계노동기구(ILO)는 ‘정규고용 가능성의 희박화’에 대해 이야기하고, 다렌도르프(Dahrendorf)는 ‘과소고용’을 ‘후기 노동사회의 천형’으로 일컫는다(나라면 ‘후기 자본주의’라고 하겠다). 경제학자들과 사회학자들은 ‘심리적 실업’률의 상승을 말하면서 ‘실업 경험’의 ‘극화’에 대해 경고한다. 레오티에프(Leontiev)는 장기 실업을 노동절약적 기술 확산의 자연스런 귀결로까지 여긴다. 리프킨(Rifkin)은 ‘노동의 종말’이 임박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들 중 어느 누구도 1세계에서부터 3세계까지 대규모 실업과 불안정 노동자의 증가가 기술과학 진보 그 자체의 결과가 아니라, 기술진보가 이윤 동기에 복속하게 된 때문이라고 이야기하지 않는다. 이들 중 아무도 노동 인구의 팽창과 구호의 팽창이 노동강도의 상승과 극단적으로 높은 노동력 때문이라고, 또 더 긴 노동시간을 추구하는 경향 때문이라고 명확하게는 이야기하지 않는다. 이들 중 아무도 시장경제의 논리가 사회의 노동력을 이중으로 낭비하게 한다는 사실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이 말은 한편에서 시장논리는 생산과정에 고용된 모든 이들을 쥐어짜지만, 배제된 이들의 전적/부분적 무능력을 소모한다는 뜻이다. 이는 두 가지 방식으로 노동을 절약하면서 인간의 노동력을 파괴한다.
이것이 자본주의 아래 노동생산성의 역설이다. 직접적 생산과정에서 산 노동의 기능과 양이 줄어들어 최소화될수록(줄어드는 것이지 사라지는 게 아니다!), 노동시간은 최대 밀도에 근접해 가고, 노동일 중 임금 해당 부분이 줄어든다. 그리고 노동생산성의 추가적인 성장이 이윤율의 증가를 더 많이 가로막는 한편, 노동시간 단축을 방해하고 대규모 실업을 불러온다.
자본주의 사회는 일반적으로 노동으로부터 자유로운 시간의 탁월한 생산자이지만, 케인즈가 ‘해야 될 일을 최대한 나눠서’ 하는 측면에서는 거짓말을 했음을 밝혀냈다(모든 이들이 하루 세 시간). 실제로는 그 반대 방향으로 나아갔다. 사회적 노동의 생산적 힘의 증가와 함께 ‘과잉 노동인구’(안정적 일자리를 얻지 못하는 노동 대중) 역시 증가하였고, 노동자 계급 안에서 과로 노동자와 실업자 사이의 간극은 만성화 되었다. 반면 사회적 차원에서 비생산적 소비, 파괴적 소비, 지대수취자들의 유한 생활은 거대하게 팽창하였다. 따라서 최대한 이성적으로 인간노동을 사용하는 사회는 인간노동의 낭비를 극단으로 몰고 간 사회이다(상품 유통, 여성의 가정생활 말소, 과도한 생산, 그리고 여러 유해하고 반사회적인 생산형태, 군사주의 등). 고도로 생산적인 노동과 장시간 노동의 사회에는 봉건시대 쇠퇴기에 일반적이었던 두 현상이 나타난다. 하나는 사회적 기생의 만연이고, 다른 하나는 실업불안정화의 만연이다. 이 모든 것들은 노동일의 길이는 거의 백 년 동안, 노동주의 길이는 25년 동안 동결되어 있는 상태에서 벌어졌다.
이러한 기술과학 진보가 만들어낸 노동으로부터 자유로운 시간의 ‘비이성적’ 분배는 그 자체로 이윤율 법칙의 효과다. 자본가들이 노동시간 단축보다 소비를 장려하는 경향은 대량 생산을 끊임없이 확대할 필요(잉여노동 대중)와 함께 그에 비례해 고용된 노동자 수를 줄일 필요에 의해 설명된다(총 필요노동 시간). 자본가들이 그 반대로 한다면, 생산비용을 상승시키고, ‘존재하는 이유와 목적인’ 이윤량과 이윤율 모두를 감소시킬 것이다. 상품 소비의 확장은(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이는 자유롭지 않고 개인 외부에서 산업적으로 조직화되고 계획되어 결정된다) 사회 안정에 매우 중요한 요소이면서 노동 생활에서 축소된 인간 기대와 욕구를 충족시키는 명백한(소외된) 수단으로 사회질서를 재확인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탄생과 징조를 드러내려 했던 이러한 가치증식의 어려움이 일반적이 되고 증가하면서 소비 그 자체의 가능성에도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커져가는 소비주의의 ‘보상’은 이제 다시 논쟁의 대상이 되었다. 실제로 거대 소비자인 미국에서도 노동자들에게는 ‘어려운 시절’이 예상되는데, 이 어려운 시절은 꽤 많은 중산층들도 고통스러울 것으로 예상된다. 소비 감소를 피하는 유일한 길은 더 많은 사람들이 더욱 불안정한 상태에서 더 많은 일을 하는 것이다.

세계화와 노동시간
하여 우리의 친구 이노센초 치폴레타 씨가 무의식적으로 마르크스의 어휘를 자기도 모르게 차용하며 노동시간 단축에서 역사적 추세는 ‘노동시간 단축 자체는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점점 감소할 것이다!’라거나 ‘이제 하한선 가까이 와 있으니 추가적인 노동시간 감축은 매우 느리게 진행될 것’이라고 하는 말은 옳다.
완전히 옳다. 서구에서 명목 노동일의 단축, 뒤이어 노동주 단축에 대한 저항은 수십 년 동안 증가하는 경향이었고, 그리고 훨씬 더 큰 규모로 그 반대 방향으로 전환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저항의 구조적 원인은 이른바 자본의 세계화라는 과정을 관찰할 때 더욱 분명해진다. 자본의 세계화는 지금껏 노동생산성과 기술과학의 진보라는 측면에서 고려했던 자본축적 과정의 또 다른 이름에 불과하다.
자본이 세계화하려는 충동은 전혀 새롭지 않다. 애초부터 점차 많은 양의 상품을 생산하여 그 결과로 발생한 (투하된 자본에 대한) ‘잉여’ 가치가 자본으로서 최소한 부분적인 재투자를 보장할 만큼 충분하도록 하는 것은 자본주의 고유의 특성이다. 사실, 생산 규모의 무한한 확장은 노동의 사회화와 마찬가지로 자본주의의 구성요소다. 세계 시장을 창출하고 그것을 확장하는 것은 자본의 ‘내재적 필수 요소’고 자본 발전의 필수 단계며 동시에 그 진화의 종착점이다.
자본의 이러한 충동으로 발생한 국제 분업은 생산력의 세계적 (조화롭지도 완전하지도 않은) 사회화를 위한 기초, 자본주의적 기초이며 당연하게도 이는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전형적인 모순으로 특징을 드러낸다. 따라서 이는 결코 ‘자유롭고 평등한’ 당사자들 간의 보편적 협력의 과정이 아니며, 오히려 가장 집중된 서구 자본, 특히 유럽 자본이 ‘후진 국민’을 예속, 몰수, 착취하는 적대적 과정이다. 유럽의 본원적 축적 기간을 건너뛰고 수 세기를 훑어보면 우리는 이 과정의 두 국면을 구분할 수 있다.
첫 번째 국면은 역사적 식민주의 국면이다. 이 국면에서 서구 자본은 식민지 국가의 소규모 독립 생산자들의 몰락을 촉발했고, 따라서 자신의 산업 생산을 위한 시장을 확보하면서 동시에 식민지 국가들을 농업 및 산업 원자재 그리고 부분적으로 값싼 노동력의 원천으로 활용했다. 이 국면은 현대 부르주아 국가의 탄생과 세계시장의 ‘주변부’에서의 자본주의적 사회경제 관계의 탄생으로 정점을 이루었고, 전 세계에 걸친 ‘유색인’의 민주주의 혁명으로 마감했다.
두 번째는 (진행중인) 금융 식민주의 국면이다. 여기서 서구의 초집중화된 자본(초국적 기업, 국제통화기금, 서구 국가들, 주식시장 등)은 주변부를 자신의 우선적 이익에 철저하게 종속시키고 ‘중심부’로부터 완전한 독립을 미연에 방지할 뿐만 아니라 이들 지역에서 자본주의의 발전을 허용하고, 또 일정 정도 촉진한다. 서구 자본은 피지배국의 풍부하고 값싼 노동력과 초과이윤을 물가안정에 활용한다.
이러한 자본주의적 축적과 자본주의적 사회관계의 전 세계적인 확장 과정에서 서구 자본주의 발전의 특징이었던 현상이 새로운 주인공과 함께 항상 새롭게 나타난다. 즉 뒤에서 치고 나오는 국가들이 우위에 있다는 것이다. 미국이 영국에 대해 그러한 우위를 누렸고, 일본과 독일이 미국을 상대로, 그리고 현재 중국과 아시아 국가들이 서구에 대해 그러한 우위를 누리고 있다. 그 이유는 이들 국가의 유기적 구성이 낮은 수준(작은 불변자본, 많은 가변자본)에 있기 때문이거니와, 노력을 통해 최고수준의 노동생산성과 기술과학 진보를 활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중심’에서 ‘주변’으로 산업화를 향한 이중적 추진의 결과는 먼저 산업 프롤레타리아의 팽창이고, 다음으로 세계 시장의 두 극점을 통합하는 것이다. 이는 더 중앙화된 자본이 축적된 기술과학 지식의 힘을 휘두른다면, 제3세계의 신생 자본주의는 대규모 산 노동의 강력한 힘(잉여가치의 원천)으로 맞서는 형국이 되어 더욱 더 경쟁적으로 통합된다. 따라서 세계시장을 지배하는 서구 열강은 자신들이 활용할 수 있는 모든 경제적, 비경제적 수단을 활용해 이러한 ‘신규 진입자’들이 누리는 경쟁우위를 전유하고, 지금까지의 진보에 근거해 이들 경쟁자들을 물리친다.
먼저 ‘중심’에 해당하는 노동일과 ‘주변’에 해당하는 노동일은 서로 매우 다르다. 중심의 노동일은 짧고 주변의 노동일은 훨씬 길지만 중심부 노동일의 엄청난 강도 덕분에 평균적으로 더 많은 잉여가치를 생산한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주변부에서 축적률과 함께 노동일이 가진 노동강도와 생산성이 급증하지만 노동일의 길이는 근소하게만 줄어듦으로써 양자 간 차이는 감소하는 경향을 보인다. 중국, 한국 및 기타 아시아 국가들이 특히 지난 50년 동안 유럽이 200년에 걸쳐 얻은 성과를 거두고 있다.
자본주의의 세계적 확장과 연결된 이러한 새로운 원동력은 축적 과정의 특정한 어려움을 해결하는 한편, 자본주의적 가치증식이 가지는 새롭고 더 큰 어려움에 직면하였다. 더 큰 생산동력은 사실 자본의 유기적 구성에서 새로운 상승을 이끌어 낼 수밖에 없고, 이는 생산에서 산 노동의 상대적 비중을 감소시킨다. 그리고 앞서 살펴 본 것처럼, 체계로서의 자본주의가 이러한 상황에서 벗어나는 유일한(임시적인) 길은 ‘중심’이건 ‘주변’이건 임금노동을 더욱 체계적으로 착취하여 더 밀도 있고 긴 노동시간을 강제하는 수밖에 없다.
현재의 상황을 보면 금융적 흐름이 세계화된 결과 이것이 노동조건과 노동시간에 미치는 영향을 과소평가할 수가 없다(자본의 세계화의 마지막 측면이고 최종단계). 세계 자본주의의 ‘체계적 통합성’, 즉 ‘차별화되고 위계화된’ 통합성을 융합하는 동시에 이와 동일한 규모로 자본의 거대한 집중을 위해 국제적인 사회적 생산의 모든 부분을 재조정하면서 이런 식의 세계화가 진행된다. 섬유산업부터 금속산업까지, 전자산업부터 기업회계 서비스까지, 그리고 여객선 제조까지도 초민족적 기업의 과점적 힘은 그 이윤량과 이윤율을 상승시키기 위해 모든 것을 다 한다. 목표는 자신의 통제 아래 제조업을, 노동 착취율을 극단적으로 높일 수 있는 또 그럴 수 있다는 조건 아래 제3세계 국가로 이전하는 것이다. 동시에 과점 기업들은 이러한 팽창을 활용해 서구 산업 노동자들에게 부여된 ‘보장’을 다시 파괴하고, 노동자들을 두들겨 패면서 ‘좋았던 옛 시절’은 다 지나갔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한다.
따라서 세계 경제의 ‘주변적’ 영역과 ‘중심적’ 영역 간의 거리는 줄어든다. 서구 산업의 노동조건과 노동시간은 (서비스 산업에서도 마찬가지로 점진적으로) 세계화된 자본이 ‘주변’ 노동자들에게 부여하는 노동조건과 노동시간에 점점 더 좌우되게 된다. 그 역도 마찬가지이다.
섬유 산업은 그 국제적 통합 정도 때문에 이런 경험을 겪은 최초의 분야였다. 서구의 산업 중 섬유산업에서 가장 낮은 임금, 가장 ‘비정형적인’ 노동시간, 극단적으로 높은 노동강도, 극단적으로 높은 여성 노동자 비율, 그리고 대기업의 경우 공방, 도급업체, 가내업체 등에 대한 시간제 일감(삯일) 활용의 확산이 일어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 부문의 기업가들은 ‘더 큰 유연성, 더 긴 노동주, 더 연속적인 교대제, 여성노동자에게 더 많은 야간작업, 시간제 일자리 편성을 강제하도록 더 나아가고자’ 한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기술적 경직성이 큼에도 불구하고, 서구 자동차 산업 역시 ‘중심’과 ‘주변’에서 모두 같은 방향으로 움직인다. 그 전위에는 ‘다른’ 유럽에서 온 기업들이 있다. 폴크스바겐은 그 중에서 가장 ‘다른’ 회사인데, 브라질 제센데(Resende) 공장을 ‘꿈의 공장’으로 만든 조직화 방식은 다음과 같다. 1,000명의 노동자 중에 단 200명이 품질검사, 마케팅, 연구, 설계 부분에서 폴크스바겐에 직접고용 되어 있다. 나머지 800명(생산직 전체)은 도급업체에 고용되어 있다. 단일 조립라인은 여러 직장으로 구분되어 서로 다른 업체가 운영한다. 이 업체(와 노동자)들은 서로 비용절감과 제품 신뢰성 향상 경쟁을 하기도 한다. 임금은 ‘상파울로 자동차 노동자의 약 삼분의 일’이다. 간단히 말하면 800명의 노동자들은 이전에 2,500명의 노동자들이 만들던 것을 생산한다. 노동시간(당연히 교대제이다)은 적기생산(JIT) 방식을 따르는데, 혁신점이 하나 있다. 어떤 이유로든 라인이 정지하면 그 시간 동안 노동자가 벌충해야 하며 초과노동수당은 없다. 꿈 같은 이윤을 위한 이 꿈의 공장은 1996년 문을 열었다. ‘멀리 떨어진’ 피아트 미라피오리 공장에서도 일 년이 지나지 않아 ‘우연히’ 예전에 피아트 정규직 노동자들이 하던 일을 도급업체가 하고 신규 작업은 외주화되는 형태가 등장했다.
‘주변’에서 ‘중심’으로 악화되는 노동조건과 노동시간의 반등 효과는 멈추지 않는다. 전자산업, 광학 제조업, 철강 산업, 항만, 관광산업 등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하지만 특히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과정이 이중 나선 구조로 일어난다는 것이다. 서구 자본은 서구 노동자 계급에게 제3세계 노동자들과의 ‘경쟁’ 비용을 떠안기려 하였지만, 그러한 시도가 성공하면 성공할수록 현재 제3세계에 있는 ‘자연적’ 착취조건 자체가 성에 차지 않게 되었다. 따라서 ‘주변부’ 자본 및 국가와의 긴밀한 협조를 통해 피지배국 노동자 계급이 얻은 성과를 공격하고 있다. 모든 부문에서 노동시간도 그 공격대상이다. 예를 들어야 하나? 아무 곳이나 찍으면 된다. 1970년대 위기 이래 이러한 현상은 무수히 벌어진 일이다. 피노체트의 칠레(피노체트 이후의 칠레도), 페론당 이후 아르헨티나, 인티파 이후 알제리, 무바라크의 이집트(공식 통계에 따르면 나세르 시절보다 하루 1시간 30분의 노동시간이 길어졌다), 스탈린 이후 동유럽 국가들. 이 모든 나라들에서 착취 받는 대중들에 대한 노동조건의 기하급수적인 악화가 나타났다. 또 상당수 국가들이 실질, 일부는 법정 노동시간 제한을 폐지하기도 하였다. 이제 국제통화기금(IMF)이나 세계은행 같은 금융기구의 ‘빈곤의 세계화’ 정책에 대해서는 무슨 말을 할 것인가? 중국과 베트남의 국영기업 노동자이 너무 많이 벌면서 일은 너무 적게 한다며 반대하는 ‘인도주의 단체’에 대해서는 또 무슨 말을 할 것인가?
실제로 여전히 할 말이 많다. 그렇지만 현재는 우리가 서구에서 전체 세계로 눈을 더 넓히면 현대에 부활한 과거의 노동시간이라는 수수께끼는 상당부분 그 비밀이 풀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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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 국제 이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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