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광주전남지부


사회운동

사회진보연대 계간지


2001.9.1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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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은 어떻게 사라지는가

신문의 왜곡과 편파보도 방식에 대한 소고

이승철 | 전국언론노동조합 편집국
공정과 진실에서 판단·가치·왜곡·배제에 이르기까지

도대체 공정한 보도란 무엇일까?
언론 언저리에 가까이 접근한 적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던졌을만한 오래된 질문이다. 신문이나 방송에 의해 단 한번이라도 공격을 받은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한번쯤 가졌을만한 의문이기도 하다. 나와 다른 의견이 기사로 실렸을 때, 그러나 그 기사가 따지고보면 사실 새빨간 거짓말은 아니라는 것을 스스로 알고 있을 때, 질문은 더 큰 무게로 다가온다.
수많은 명예훼손과 보도금지 가처분, 민·형사소송과 언론중재를 경험한 각 언론사와 그 언론사의 기자들이 아무 생각 없이 기사를 작성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 나름의 축적된 기술과 트릭을 갖고 있는 것이 오히려 당연하고 자연스럽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해당 기사와 기자를 문제삼을 수는 없다는 사실을 그들은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렇다면 애초에 공정한 보도란 없는 것일까?
사전적 의미의 '공정'은 '공평하고 올바름'이다. 공평은 '한쪽에 기울지 않고 공정함'을 뜻하고, 올바름은 '옳고 바름'을 뜻한다. 온통 개념어 투성이다. 그럴 수밖에 없다.
공정보도의 잣대에는 사안에 대한 가치판단, 즉 뉴스 밸류(News Value)가 개입되어 있기 때문이다. 어떠한 사회현상이나 상황, 새로운 발견에 대해 그 사안이 과연 제한된 화면과 지면 안에 기사화될만한 내용인가를 판단하는 기준이 있기 마련이다. 이 판단의 과정은 각 언론사의 '편집회의'라는 기제를 통해 형성된다. 언론운동계에서 목이 터져라 외치는 '편집권 독립' 역시 이와 같은 맥락에 서있다.
왜곡과 과장, 축소를 일삼는 언론사들이 내세우는 핑계도 바로 이것이다. '모든 기사는 회사의 논의구조를 통해 형성된 기사가치 판단에 의한 것'이고 '그 중심에 바로 사시(社示)가 있다'는 논리다. 사실 따지고 들면 틀린 말은 아니다.
예컨대, 사측의 일방적 구조조정에 항의해 1천명이 가두에서 시위를 벌인 같은 날, 남해안 어귀 철새 도래지에 한동안 오지 않았던 철새들이 찾아들었다고 치자. 과연 무엇이 더 중요한 기사일까?
필자의 생각에는 전자에 더 무게를 두고 싶으나, 사실 대부분의 신문들은 후자에 더 무게를 두는 편이라고 생각한다. 노동자들의 시위기사는 단신으로 짧게 처리하거나 '교통혼잡' 등을 가미해 기껏 커져봐야 2단∼3단 정도일 것이다. 그러나 철새기사는 천연색 사진과 함께 실릴 수도 있다. 실제로 이런 일들이 많이 일어난다.
'두개 모두 보도하면 될 것 아닌가'라고 항변할지 모르나,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한정된 지면과 방송시간 속에 세상에서 일어난 모든 일들을 다 담기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이렇게 생각해보는건 어떨까? 최소한 신문과 방송에 사실은 없다. 기자에 의해, 데스크에 의해 굴절되고 다소 변형된 '보도'가 존재할 뿐, 그것이 진실 그대로의 '그것'은 아니다.
그래서 언론운동 일각에서는 '공정보도'라는 말 대신, '객관보도'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도 한다. 어찌되었든, 최소한 사물에 대해 있는 그대로 보도해 달라는 것이다. 그러나 한꺼풀만 벗겨보면, 이 역시 앞의 내용과 별반 다를 바가 없다.
모든 언론사는 자신의 색깔과 목소리를 가질 수밖에 없다. 자신의 기준에 따라 기사화할 내용을 발췌하고, 자신의 시각에 맞게 현상을 묘사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고도로 발달한 우리나라 언론이 그들의 시각으로 계급적 진실을 왜곡·축소하고 역사의 다수파를 배제하는 방식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아래에서는 노동자들의 파업을 중심으로 일그러진 보도행태의 기법에 대해 대표적인 사례를 유형화해 간략하게 살펴보도록 한다.


▲ 본질의 호도
2000년 6월 29일. 서울 도심 한복판에서는 한편의 시가전이 펼쳐졌다. 호텔롯데. 이무영 경찰청장은 지난해 6월 29일 새벽 4시 10분을 기해 1차로 19명, 2차로 38명 총57명의 경찰특공대 '솔개부대'(지난 83년 서울올림픽과 아시안게임을 앞두고 대테러 대응을 위해 창설된 경찰특공대는 특수부대 출신자로 제한되며 △40㎏의 모래주머니를 지고 100m를 19초 안에 달리고 △2,000m를 7분30초 안에 달릴 수 있는 체력을 갖춰야 한다. 시위진압현장에 이들이 등장한 것은 96년 한총련 연대항쟁과 98년 조계사 분규 이후 세 번째였다)를 투입해 롯데호텔 농성조합원 진압에 나섰다. 롯데호텔 파업투쟁의 핵심 골자는 비정규직 철폐와 일방중재조항 삭제였으며, 이후 경찰의 음주폭력진압 의혹과 사측 간부에 의해 이뤄진 광범위한 성희롱, 정부의 구시대적 노동정책 등까지 확산됐다.
모두가 잘 알고 있다시피, 비정규직 철폐는 신자유주의적 노동시장 유연화 정책과 함께 대두된 노동계의 최대현안이었고, 호텔롯데는 IMF 이후 비정규직의 비율이 급격히 증가하여 전체 직원 2800여명의 56.9%를 차지하고 있었다.
일방중재조항은 노사협상이 결렬될 경우, 원칙적으로 노사 양측이 함께 신청토록 되어있는 중재절차를 일방의 신청만으로 가능하게 하는 제도이다. 이 조항 적용사업장 대부분이 '불성실 교섭→불법파업 유도→경찰 투입'이라는 악순환의 고리를 의도적으로 형성하며 노조 파괴를 유도하고 있다는 사실은 이미 노동계의 상식이다.
하지만, 당시 보도의 중심에 서있었던 것은 '집단 이기주의'와 '호텔적자', '외국인 투숙객 불만'이었다.
경향신문은 2000년 8월 22일자 사회면 <숫자로 본 호텔롯데 파업, 투숙률 40%이하-512억 손해>를 통해 '호텔측은 이번 파업으로 막대한 금전적 피해를 입었으며 이미지 타격은 이에 비할 바가 안된다'고 보도했다.
대한매일도 6월 30일자 <불법행동 엄단해야>라는 사설을 통해 롯데호텔 노조원들의 파업은 '집단이기주의의 도미노현상'으로 '국민들이 국가공권력을 우습게 보기 때문'이라고 썼다. 또 같은 날 '집단이기주의 안된다'는 시리즈와 사회면 기사, 7월 3일자 사설을 잇따라 게재하며 이번 사태의 책임을 '눈앞 이익에 급급해 극한대결을 자초한 노조'에 돌리면서 '우리사회에 일상화된 밀어붙이기식 파업문화는 바뀌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6월 30일 조선일보도 사회면 '손님배려는 없었다'는 기사를 게재, 외국인 투숙객들의 불편만을 강조하고 농성하며 불고기를 굽기도 했다며 사태의 본질을 호도했다.
중앙일보와 동아일보도 진압특공대의 일방적 폭력에 대해 침묵한 채 축소보도로 일관했으며, 특히 중앙일보는 사회면 '롯데호텔 파업에 서울일대 객실난' 기사를 통해 '호텔 객실부족으로 일본인 관광객이 줄어들 것'이라고 초점을 흐리는 어이없는 보도태도를 보였다.
대부분의 신문과 방송이 롯데호텔 사태의 본질을 직시하고 갈등의 원인과 해법을 제시하기 보다는 호텔의 금전적 손실이나 투숙객 감소, 객실난, 집단이기주의 등으로 호도했다는 비난을 면치 못했다.
비단 롯데호텔만이 아니다. 파업사업장에 대한 언론사의 보도는 이같은 맥락을 크게 벗어나지 않고 있다. '우리가 보도한 내용은 사실이다'는 이유로 문제의 근본을 놓친 보도가 연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대표적인 악의적 보도 행태다.


▲ 합법성과 명분
'명분'과 '합법'의 잣대 사이를 입맛대로 오가는 기사 역시 파업보도의 대표적 현상 중 하나다.
적법한 쟁의절차를 거쳐 법률상 아무런 문제가 없는 파업에 대해서는 실체가 불분명한 '여론'과 '명분'을 운운하며 노동자들의 투쟁을 패륜으로 몰고가는가 하면, 사회적 정당성과 명분을 갖춘 파업에 대해서는 일방의 불법주장을 여과없이 받아들여 기사화하는 것은 물론, 이를 확대재생산하는 방식이다.
1998년 지하철 파업 당시 중앙일보의 한 사설은 '예전같으면 권위주의 정권에 대한 투쟁이라는 최소한의 명분이나마 갖췄지만 지금은 그나마 없다'고 지적했다. 과거 권위주의 정권 하 투쟁은 언론으로부터 불법의 화살을 맞아야 했다는 사실을 그들은 잊었을까?
최근 '이 가뭄에 무슨 파업이냐'고 목소리를 높였던 우리 언론들. 그러나 가뭄은 파업과 아무런 직접적 연관이 없다. '엎친 가뭄에 덮친 파업'이라는 천재적 문구(?)도 문학적 관점에서는 높이 사고 싶으나, 논리학적 측면에서는 낙제점을 면키 어렵다.
지난 6월 지면을 온통 수놓았던 대한항공 조종사 파업도 좋은 예다.
6월 12일 대한항공 조종사 노조가 파업에 돌입하자마자 각 언론사들은 일제히 '연봉 1억원 조종사 파업 명분 없다'고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다. 함께 파업에 돌입한 아시아나항공노조에 대해서도 '아시아나항공 관계자'의 말을 빌어 “가뭄 등 비상시국에 임금인상만으로 파업에 돌입하기에는 아무래도 명분이 약한 것 같다”고 비난했다.
언론의 몰아치기에 결국 조종사노조는 임금인상안을 철회하는 강수까지 둘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러한 조종사노조의 '자구책'은 신문과 방송에 크게 다뤄지지 않았으며, 오히려 언론은 '불법파업' 주장을 내보내기에 급급했다. 노동위원회의 행정지도를 지키지 않은 쟁의행위 돌입은 불법이라는 주장이다. 조종사노조는 이에 대해 그간의 판례와 노동법학자들의 해석 등을 제시하며 당국과 언론의 주장이 사실과 다르다고 알렸지만, 신문과 방송은 이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명분'의 잣대로 피해를 입은 것이 비단 대한항공조종사 뿐만은 아니다. 지하철과 한국통신, 한국전력 등 대부분의 공기업과 공사, 국립대병원, 대기업 노동자들은 매년 쟁의행위에 앞서 이러한 공격을 마치 통과의례처럼 받아야만 했다('국민을 볼모로한 파업' 등은 이의 대표적인 사례다. 이에 대해서는 후술한다).
약 보름에 걸쳐 언론의 십자포화를 맞은 조종사노조는 사측과 동등한 위치에 서있기조차 어려웠을 것이다. 결국 대한항공조종사노조는 원안에서 대폭 후퇴한 안으로 사측과 협상을 마무리지을 수밖에 없었으며, 이어 7명의 파업주동자가 파면을 당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하지만 조종사파업 이후 불과 며칠도 지나지 않아 당국의 일방적 주장만을 따른 언론의 보도가 거짓임이 드러났다. 대법원 제1부(주심 서성 대법관)가 6월 26일 중노위의 '노사간 교섭을 더 진행하라' 는 행정지도 결정을 어기고 파업에 돌입한 혐의(업무방해)로 기소된 현대자동차서비스 노조 충북지부 이길호(46)지부장에게 무죄를 선고한 원심을 확정한 것이다.
이후 공공연맹의 적극적인 언론중재 요청 등에 따라 많은 일간지들에 단문성 반론보도와 정정보도가 이어졌지만, 이것으로 노조에 가해졌던 폭력이 치유됐다고 할 수 있을까? 결과적으로 조종사노조는 쟁의의 합법성을 인정받았고, 피해를 감수하면서까지 언론이 잣대로 내밀었던 명분까지 획득했다. 그리고 언론은 자신이 발표한 내용과 주장이 사실과 거리가 있음이 증명됐지만, 과연 누가 더 많은 상처를 받았을까?


▲ 국민을 볼모로 한 파업
최근들어 나타난 언론보도의 최대피해자는 누구일까? 나는 주저없이 '지하철노동자'와 '병원노동자'를 꼽고 싶다. 그 어느 집단이나 개인도 양과 질 모두의 측면에서 이들만큼 집중포화와 일방적 매도를 당했던 적은 없다.
지난 1998년 4월 지하철 파업보도는 가장 악의적인 왜곡보도로 언론사에 기록됐다. 지하철노조는 8일만에 무력하게 파업의 깃발을 내려야 했다. 언론의 태도는 지하철노조 파업 이전부터 예고되고 있었다.
지하철노조의 파업은 공사측이 단체협약을 일방적으로 파기하고 무차별적인 구조조정을 추진하면서 촉발된 것이었다. 시작부터가 공격적이라기보다는 생존권 사수를 위한 방어적 투쟁의 성격이 짙었다. 그러나 신문과 방송은 파업 이전부터 쟁의의 배경과 원인에 대한 분석은 외면한 채, 경제위기 논리 아래 정리해고를 정당화하려는 자본과 정부의 입장만을 충실하게 대변해 왔다. 오히려 더 나아가 "시민의 발을 볼모로 한 파업은 용납할 수 없다"며 파업의 부당성을 강조해 왔다.
19일 파업돌입과 함께 상황은 더욱 악화됐다.
언론은 파업기간 중 '파업은 불법이다'는 검찰쪽 주장에 장단을 맞추며 정부의 강경대응을 주문하기에 이른다. 중앙일보는 4월 20일자 사설 <누구를 위한 파업인가>에서 '정부의 용단' 운운하며 공권력 투입과 같은 극단적 대응을 부추겼다. 하루 10억원의 적자를 내는 지하철에는 당연히 구조조정이 필요하다는 논리도 잊지 않았다. 하지만 지하철이나 철도, 통신, 전력 등과 같은 사회간접자본 공공사업장들은 이윤창출보다는 공공성을 목적으로 해야 한다는 주장과, 과연 적자의 핵심이 인력구조 때문인지에 대한 분석은 찾아볼 수 없었다.
조선일보의 22일자 사설은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조선일보는 <시민들이 견뎌야 태업 끝난다> 제하의 사설을 통해 "설령 파업이 장기화되고 운행이 중단되더라도 이를 악물고 참아내자, 그래야 시민을 볼모로 걸핏하면 벼랑끝으로 치닫는 노조의 의도된 전술을 극복해낼 수 있다"고 주장했다. 조선일보가 '시민볼모작전'이라고 이름붙인 노조의 투쟁은, 그러나 사실 그들의 주장과 거리가 멀었다. 지하철노조의 주장은 시민 누구나 편안하고 부담없이 지하철을 이용할 수 있도록 공사의 공공성을 강화하고 운행의 안전도를 재고하기 위한 것이었다.
병원도 크게 다르지 않다.
세계일보는 지난 6월 <노동운동 이것만은 고치자 6 - 안중에 없는 국민불편>에서 병원을 비롯한 일부 사업장의 쟁의행위를 비난했다. 문화일보도 <상처만 남긴 항공-의료대란 : 국민볼모파업 이제 그만>을 내보냈다. 대한매일도 <해도 너무한다 병원까지> 사설을 개재했다. 조선일보 역시 14일자 <왜 아픈사람 볼모잡나>에서 노조를 공격하고 나섰다.
그러나 보건의료노조 산하 병원 10곳이 일제히 파업에 들어간 6월 13일, 서울대병원 파업참가자는 전체 2200여명 가운데 900여명에 불과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노조는 파업기간 중 응급실과 수술실 근무인원은 대부분 업무에 참여하도록 하고, 일반병동에서도 최소한의 인원은 근무하도록 하는 등 환자 불편을 줄이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보였다.
결국 '시민볼모'로 누가 더 많은 반사이익을 얻었는지 생각해보면 결과는 자명하다. 자본과 정부, 언론의 삼각편대 공격으로 만신창이가 된 것은 다름 아닌 노동조합이다. 시민을 볼모로 한 언론의 독설과 비방을 멈추지 않는 한, 이같은 현상은 반복될 수밖에 없다.


▲ 보도외면
왜곡보도의 유형을 정리하던 중 이를 지켜보던 누군가가 한숨을 쉬며 이야기한다.
"그래도 어떻게든 파업이 보도되는 게 어디야?"
가장 오래된 우리 언론의 단골메뉴, 보도외면에 대한 지적이다.
과거 신민당사를 점거로 알려진 이른바 'YH사건' 역시 언론의 사태외면에 대응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뤄진 것이었다. 군사정권 시절부터 시작된 이러한 '不보도 관행'은 대부분의 경우 정부와 사용자측의 폭력동원과 밀접하게 연관돼 나타난다는 데에 더 큰 폐해가 있다. 파업 등 노동쟁의를 봉쇄하기 위해 공권력이나 사설폭력이 투입되는 현장이 발생할 때, 언론이 이에 대한 선전과 홍보를 게을리 해 노동자에게 이중의 폭력을 가하는 셈이다.
이 문제는 서론에서 잠시 언급한 기사가치에 대한 판단과도 연관되는 문제이겠지만, 명징한 의도적 외면에 드러나는 경우도 허다하다.
최근의 가장 대표적인 사례는 바로 울산의 효성과 태광 등 화학섬유 사업장이다.
효성의 파업찬반투표 저지를 위한 사측의 집단휴가명령 등 부당노동행위와 대규모 용역깡패 투입, 오길성 화학섬유연맹 위원장 통장 가압류, 태광의 조합원 1인당 20∼30억원에 이르는 손해배상청구와 가압류 등 수많은 뉴스아이템이 있었다. 그렇지만, 언론은 이에 대해 '모르쇠'로 일관했다. 그나마 효성 용역깡패 투입이 경찰에 적발되자 그제서야 보도하기 시작한 것이 거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민주노총 손낙구 교육선전실장도 지난 6월 20일 신문개혁국민행동이 주최한 <언론사 파업보도 토론회>에 참석한 자리에서 "최근 노동보도의 주된 흐름은 완전한 무관심 또는 무차별 융단폭격의 양극화 현상으로 나타나고 있다"고 진단했다.
이 밖에도 레미콘과 한통계약직, 삼미특수강 등 장기투쟁사업장의 경우, 이미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고 있는만큼 이에 대한 조망과 해결모색 등이 주요한 언론의 임무임에도 불구하고 적절히 진행되지 못했다는 것이 노동계 안팎의 지적이다. 또 언론사노동조합의 경우 '동업자 봐주기' 관행에 묻혀 쟁의사업장 소식이 제대로 보도되기란 가뭄의 콩나기보다 어려운 현실이다.


▲ 허위보도
기본적 사실관계에 대한 미확인보도와 확인작업 없이 일방의 주장만을 사실인양 기사화하는 이른바 '허위보도' 역시 작지 않은 문제다.
소(所)를 다투고 있는 사안이나 동일 사안에 대한 해석이 엇갈리는 경우, 일방의 목소리만을 근거로 '불법파업'으로 몰아붙이는 것이 대표적인 형태다. 대한항공조종사 파업 당시 모든 언론이 이를 '불법파업'으로 낙인찍었던 것은 대표적인 사례다.
명확히 단체협상 대상임에도 노동법을 들어가며 '경영권 침해'로 왜곡하는 경우도 많다. 중앙일보가 6월 14일자 사설에서 노동관계법과 헌법에서 보장하고 있는 단체교섭 사항인 '외국인조종사의 신규채용 금지, 단계적 축소'를 "경영권 침범이기 때문에 결코 수용할 수 없는 사안이다"라고 보도한 것은 그 한 사례다.
경향신문이 6월 5일자 25면에서 '과격시위 다시 고개' 기사 중 "효성 울산공장에서는 쇠파이프를 든 노조원들과 나무몽둥이를 든 용역과 관리직 사원들이 충돌했다"고 표현하며 용역깡패가 소지했던 칼과 전기봉을 누락해 마치 노조가 일방적 폭력을 휘두른 것처럼 묘사한 것은 좀 더 지능적인 수법이다.
조선일보는 6월 5일자 보도에서 효성공장에 (이미 해산된) 사노맹이 개입했다는 어처구니 없는 주장까지 사실인 양 펼쳐놨다.
이에 앞선 지난 1999년 지하철 파업 당시, 일부 신문은 사용자 입장에 서있던 서울시의 주장을 아무런 확인 없이 받아들이며 '조합원 지하철 고의고장 의혹' '규찰대가 조합원 감금 의혹' 등 노조에 치명상을 입히는 허위보도를 무작위로 지면에 펼쳐놨다.
파업 중 노사합의로 쟁의행위가 중단된 데에 대해 '파업철회'라고 보도하는 것이나 병원사업장을 공공연맹 소속사업장으로 보도하거나, 임협중인 사업장이 타결된 것처럼 보도하는 것, 조선일보가 "12일 민주노총 산하 공공연맹이 파업전야제를 가진 서울역 앞은 온통 쓰레기로 뒤덮여 버리기도 했다"는 기사는 이제 일상적이기까지 하다. 공공연맹은 집회 뒤 청소용역업체로부터 받은 영수증을 언론중재위원회에 제출했다.
언론의 이같은 '미확인 허위보도'나 '의도적 허위보도'는 매체에 대한 신뢰도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는 것은 물론, 피해당사자로 하여금 치유하기 어려운 해악을 준다는데 그 문제점이 있다. 특히 반론보도나 정정보도가 받아들여진다고 하더라도 이전에 나갔던 기사와는 지면배치와 크기 면에서 비교가 안 되는 경우가 많아 그나마 사후약방문식 처리방법에 머문다는 지적도 있다.


▲양적인 불균형
기사의 질이나 시각은 둘째 치더라도, 주장의 양적 불균형현상 역시 심각하다. 이는 각 신문의 기획기사 시리즈물을 통해 더욱 극명하게 나타난다.
세계일보는 6월 20일부터 8일간 심층보도한 <노동운동, 이것만은 고치자> 시리즈에서 노동조합을 헐뜯는데 6회를 할애했다. 반면 사용자측에 대한 지적은 26일자 7회 <무성의한 使> 하나에 그쳤다.
조선일보도 같은 달 3회에 걸쳐 내보낸 5꼭지의 기획물 <노사, 새로 시작하자>를 통해 일방적인 노동조합 공격에 나섰다. 조선은 이 기사들을 통해 제목과는 다르게 노동자 일방만(!)을 비판하기에 급급했다. "싱가포르에서 태국과 필리핀 노무자 사이의 사소한 시비가 난동으로 발전했을 때 신고를 받은 싱가포르 경찰은 M16 소총으로 무장하고 30분만에 현장을 봉쇄했다"는 내용을 모범답안으로 제시하며 더욱 강력한 진압을 주문하기까지 했다. 노동조합이 왜 거리에 나서게 됐는지, 왜 시위현장에서 폭력사태가 발생하는지에 대한 노동자의 설명은 들어볼 길이 없다.
외부필자의 기고문이나 칼럼, 해외논단, 독자투고, 사설에서는 더욱 불균등이 심화된다. 그나마 객관성이 보장되는 스트레이트 기사 역시 마찬가지. 여기에서는 더욱 세심하게 불균형을 이룬다. 사측과 정부측 멘트에 대해서는 '밝혔다'고 표현하는 한편, 노동조합의 발언은 '주장했다'로 표현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 결과중심 보도와 늑장보도
지난 해부터 촉발돼 올 상반기 민주노총 투쟁의 중심에 서있었던 대우자동차 사태(대우차 사태와 관련한 구체적 언론보도 비평은 사회진보연대 11호 「화염과 폭력의 곡필을 멈추라」참조)는 우리 언론에게도 많은 숙제를 안겨줬다.
사태를 유혈폭력진압까지 몰아간 데에는 정부와 채권단의 '흔들림 없는 해외매각 일변도 정책'이 크게 작용하기도 했지만, 상황이 그 지경에 이르도록 철저하게 외면했던 언론의 책임도 크다는 지적이다. 즉 언론이 미리 예측가능하고 그래서 충분히 사회적 논의를 통해 예방할 수 있었던 사태를 애써 외면하거나 도외시해, 결국 극한의 상황까지 몰고갔다는 것이다. 이 질책의 중심에는 우리 언론의 오랜 관행인 늦장보도와 결과중심 보도가 자리잡고 있다.
다시 대우차 문제로 돌아와보자. '노조의 구조조정 동의서'와 '대우차 사태의 근본적 원인과 해법'이라는 이름의 '현상'과 '본질' 사이에서 모든 신문과 방송들은 좀 더 자극적인 '현상'과 '노동자 책임전가'에 손을 들어줬다. 대우차가 정치쟁점으로 떠오른 폭력진압사태 이후에도 언론의 관심은 사태의 발전과정과 근본적 해법보다는 여야간 폭력사건 책임 정치공방에 더 쏠렸다. 이렇게 보도되는 내용들마저도 이미 상처가 곪아터진 이후에나 나오기 시작했다.
대우차 사태 초기, 공기업의 민영화, 해외매각, 이른바 구조조정을 촉구하는 목소리들이 다시 신문을 채우기 시작했다. 특히 포드의 대우차 매각포기 발표 이후, 우리 신문과 방송은 외국에 기업을 팔아넘기는 것이 우리 경제를 살리는 지상과제인양 보도했다. 사회 속에 현존하는 의견대립을 두고 활발한 찬반논쟁을 펼쳐 올바른 가치판단을 유도해야 할 언론이, 자기책임을 방기하고 자본측의 의견에 전적으로 의존함에 따라 상황을 칼끝대립으로 몰아간 것이다.
대우차 보도가 급물살을 타기 시작한 4월 10일 유혈사태 이후에는 '결과중심보도'로 공이 넘어갔다. 그러나 '늦은 감이 있어도' 제대로 된 대안논쟁이나 근본적 해결방식에 대한 진중한 토론을 기대했던 많은 노동자들은 다시 한번 실의에 빠져야 했다. 폭행에 대한 근원적 접근은 찾아보기 힘들었으며, '사태 책임자 처벌'은 '폭행 책임자 처벌'로 국한됐다. '폭력사태와 부상자 발생'이라는 결과에만 천착한 근시안적 보도였다는 평가다.
물론, 언론이 처음부터 제대로 보도했다면 대우차 사태가 말끔히 처리됐을 것이라고는 볼 수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언론의 직무유기가 기각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본연의 역할을 포기할 때, 사회적 공기라는 이름도 버려야 한다.


▲ 강자중심의 보도태도
1998년 현대자동차의 파업보도는 노사문제에 대한 한국언론의 재벌편향적 태도를 극명하게 보여줬다. IMF 이후 기업구조조정 과정에서, 정리해고 강행에 반발한 현대자동차노조의 파업은 향후 대기업 정리해고의 시금석이 될 중요한 사건이었다. 따라서 언론은 정리해고의 정당성과 회사측의 정리해고 회피노력이 얼마나 성실하게 이루어졌는가를 심층보도하여 바람직한 해법을 찾는데 주력해야 했다. 그러나 언론은 '노동시간 단축' 등 노조의 주장은 외면한 채 재벌의 일방통행식 구조조정 주장만을 편들고 나섰다.
파업사태 초기 '원만한 타결'만을 외치며 무기력했던 언론은 물리적 충돌이 발생하고 공권력 투입이 예고된 8월 17일과 18일이 되어서야, 기다렸다는 듯이 국가경제 손실과 엄정대처를 소리높여 주장하고 나섰다. 정부의 중재로 타협이 이뤄졌던 8월 24일 신문 사설들은 일제히 (당시의 합의내용이 절대로 노동자에게 유리한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구조조정에 나쁜 선례를 남겼다'며 자본측 주장을 늘어놨다. 이러한 관행은 계속 이어지고 있다.
조선일보는 올 공공부문 파업 당시 "국민적 고통은 아랑곳하지 않고 '제몫찾기'만을 고집하는 집단"이라는 개인의 주관이 걸러지지 않은 기사를 내보냈다. "구조개혁이 가장 부진하다는 비판을 받고 있는 공공부문 노조까지 나서서 구조조정 중단을 주장하는 것은 설득력이 없다"고도 덧붙였다. 그러나 공공부문의 경우 1, 2차에 걸친 강도높은 구조조정의 결과로 무려 13만명의 노동자가 이미 거리로 쫓겨난 상황이다.
사실 대부분의 언론은 강자중심의 논리를 전파하면서 어쩌다 약자의 수호자 행세를 하는 보도행태를 보이는 것이 대부분이다. 현직에 있을 때는 비판이나 고발기사를 내보내는데 주저하다가도 일단 권좌에서 물러나면 그제서야 하나씩 터뜨리는 우리 언론의 방식도 이러한 태도와 무관하지 않다.
현실사회에 있어서 노사문제의 상대적 약자는 노동자들이다. 사회적 약자의 편에 서야 한다고 되뇌이는 언론들마저도 결국 사용자와 정부 등 강자의 논리를 펴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데올로기는 비평에 의미를 불어넣는다

이 밖에 △민주노총 분열조장(조선일보와 동아일보는 이번 6월 총파업을 민주노총 임원선거와 연관지으면서, 민주노총이 향후 내부 분열에 휩싸이고 집행부 문책론이 등장할 전망이라고 서술했다) △파업 사후 민·형사상 책임촉구(<정부를 '물'로 보는 사람들>동아 6.16 이규민 칼럼 / <불법파업 지켜만 볼텐가> 경향 6.14 정구현 연세대 경영대학원장 칼럼 / <불법시위 손해배상 각오해야> 동아 6.20 사설 / <주한 일기업인 '재팬클럽'보고서 - "노조 불법해위 해도 처벌조차 받지 않아"> 조선 6.14 등) 등의 미시적 측면에서의 악의적 보도도 점차 증가하고 있는 추세다. 외국인 CEO의 발언과 OECD 등 국제기구를 들먹이며 민주노총을 공격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서두에 밝힌 것처럼, 나는 개인적으로 신문이 각자의 색깔과 주의주장을 갖는 것은 오히려 권장할 만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덮어놓고 사태를 왜곡하거나, 자신의 경향성을 빙자해 악의적 보도를 일삼는 것은 다른 차원의 문제다. 최근 언론이 가지고 있는 막강한 사회적 권력을 볼 때 더더욱 그러하다.
지난 6월 20일 열렸던 <언론사 파업보도 이대로 좋은가> 토론회에서 언론인출신의 한 교수는 "사실 데스크나 사주의 압력에 의해 기사내용 전반이 조정되는 경우는 그리 빈번하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다. 오히려 문제는 사태의 중심으로 들어가려 하지 않는 기자들의 게으름에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어 "한 분야에 대한 전문지식을 가질 수 없도록 만드는 현재의 보도시스템과 주는대로 받아쓰는 기자실 문화, 높은 임금과 사회적 지위가 오늘날의 기사작성 패턴을 만들었다"고 풀이했다. 개별 기자의 고착화된(의도했던, 의도하지 않았던) 성향과 기사작성 방식, 세계관, 물적 조건 등등이 왜곡을 양산하고 있다는 말이다.
모든 비평에도 역시 일정정도 상식의 잣대와 당파성이 개입된다. 자신의 계급적 위치와 이해관계가 매체를 생산하고 바라보는 데에 끼여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이렇듯 다른 시각들이 치열하게 경쟁하고 대립하며 싸운다. '언론이 사회의 거울'이라는 표현은 이같은 의미에서도 적용된다. 역사 깊은 사회적 적대 속에 누가 우위를 차지하고 있는가, 어느 편이 헤게모니를 장악하고 있는가가 지면에 숨김없이 드러난다. 강력한 이데올로기 장치인 언론은 운동의 정당성, 교육과 선전, 이데올로기적 방어(그것이 어느 편이던간에) 등을 수행할 도구로 작용한다.
우리에게 정작 필요한 것은, 되지도 않는 '조선일보를 진보매체로 바꾸는 일'이 아니라 노동자민중의 이데올로기 선전기구를 만드는 일이다. 조선일보를 반대하는 운동이나, 지면을 낭비해가며 쓰는 언론비평이 의미있기 위해서는 이것에 천착해야 한다. 우리의 시각으로 그들의 논리를 공격하고 설득력을 얻어가며, 대중을 우리편으로 끌어올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전제 하에 우리는 당당하게 '진실이 왜곡되고 편파적인 보도가 이뤄지고 있다'고 주장할 수 있다.
주제어
민중생존권
태그
민주노총 선거 민주노조 총연맹 임원선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