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광주전남지부


  • 특집
  • 2015/06 제5호

브레이크 없는 일본의 군사화

  • 구준모 편집실장
 
1991년 부동산 거품의 절정을 맞은 일본 경제는 1993년 이후 20년 넘게 장기불황에 빠졌다. 물론 22년 내내 암울한 전망이 지배했던 것은 아니었다. 1990년대 초반까지만 하더라도 대다수 전문가들은 당시의 위기를 1980년대 후반에 발생한 거품경제의 조정으로, 즉 경기순환적 상황으로 파악했다. 1993년 0퍼센트에 근접했던 실질GDP 성장률은 1996년 2.6퍼센트까지 상승해 불황이 끝난 듯했다. 하지만 1997년 대형 증권사의 도산으로 상징되는 일본 금융기관의 몰락과 1998년 아시아 금융위기로 인하여 일본 경제는 다시 불황에 빠져들었다.

이 위기는 쉽게 극복되지 않다가 2003년을 기점으로 세계경제의 호황에 기대어 2퍼센트 안팎의 성장률을 이어가며 2006년에는 1997년 이후 최초로 소비자 물가지수와 기업 물가지수가 모두 플러스를 기록했다. 

그러나 2008년 세계 경제위기는 다시 상황을 바꿔놓기에 충분했다. 2009년 일본은 전후 최악인 마이너스 5.5퍼센트 성장률을 기록하게 되었다. 따라서 지난 20년간의 장기불황과 디플레이션은 1993~95년, 1998~2002년, 2009년 이후의 세 시기로 구별된다. 그리고 각각의 디플레이션이 발생한 원인으로 거품경제의 조정, 불량채권의 처리, 세계 금융위기의 영향을 꼽을 수 있다(이정환, 〈장기불황, 구조개혁, 생활보수주의〉, 《일본비평》 10호).

장기불황 시기 일본인들은 삶의 질의 역전 없는 하락을 겪은 나머지 기대마저 갖지 않기 시작했다. 가장 핵심적 문제는 노동시장의 격차와 불안이 커지고, 물가 하락보다 더한 소득 하락이 진행된 것이다. 

장기불황을 맞닥뜨린 일본 정부는 해법으로 신자유주의 개혁을 제시했고, 기업들도 노동 부문의 구조조정에 돌입했다. 그 결과 1990년대 중반부터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비율이 크게 늘어났다. 1999년에는 노동자파견법이 개정되어 그전까지 26개 업무로 한정되었던 파견노동의 대상 범위가 몇 가지 업종을 제외하고 자유화되었고, 2000년대 초반 고이즈미 정권은 추가적인 노동유연화를 진행시켰다. 이러한 변화는 노동자들의 소득도 하락시켰다. 일본의 노동자 실질임금 총액은 1997년 이후 계속 하락하여, 2012년 노동자 실질임금 총액이 1997년의 85퍼센트 수준에 불과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일본 국민들의 생활을 지탱하던 기업에 의한 노동자의 보호와 가장에 의한 가구의 보호라는 생활보장 체계는 붕괴되었다. 몇 년 전 한국으로 수입되었던 <파견의 품격>과 같은 드라마가 일본에서 유행한 것이 바로 2000년대 중후반이었다.
 

민주당의 실패? 그 이전에 일본 사회당의 몰락! 

일본 경제가 최악의 길을 걷던 2009년은 일본에서 전후 최초로 단독 정권교체를 이루어낸 시기이기도 했다. 장기화된 민중들의 불만이 새로운 정치세력에 대한 지지로 나타난 것일까? 

민주당은 2009년 9월부터 2012년 12월까지 3년 3개월이라는 짧지 않은 기간 동안 집권했다. (물론 이 시기 민주당은 자민당 출신 정치 거물인 오자와의 영향력이 매우 컸던 보수 자유주의 정당이었다.) 사회당의 몰락과 공산당의 고립이라는 일본 진보정치의 한계 속에 최초로 집권한 민주당에 일본의 사회운동이 적지 않은 기대를 품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나 일본 민주당 정권은 처참하게 무너졌다. 집권 시 최대 공약이었던 생활복지 확대와 오키나와 미군기지 이전 문제에 있어서 모두 실패했다. 민주당은 세계경제 위기의 여파에서 일본 경제를 구하지 못했으며, 2011년 동일본 대지진과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의 수습에서도 무능한 모습을 보여줬다. 결국 민주당 정권은 일본 국민들의 실망 속에서 내부 분열까지 겹쳐, 2012년 말 중의원 선거에서 자민당에게 참패(308석에서 57석으로 추락)하고 정권을 내놓았다.

민주당 정권의 실패와 아베 총리의 재등장으로 대표되는 일본 정치의 우경화는 좌파의 몰락 후에 발생한 풍경이다. 역사적으로 일본에서 보수와 진보의 구분선은 일본의 침략 전쟁과 전후 평화헌법 체제에 대한 태도에 따라 갈렸다. 전쟁에 대해 반성하고, 비무장 중립을 견지하면서 평화헌법을 지켜야 한다는 ‘호헌·평화주의’ 세력을 진보라고 한다면, 침략이었음을 부정하면서 헌법 개정과 친미 군사동맹을 주장하는 ‘개헌·무장주의’ 세력을 보수라고 할 수 있다. 또 진보진영은 자위대 해체와 미일 안보조약 폐기를 주장하면서, 보수진영의 헌법 개정을 통한 무장 강화를 견제했다. 이런 구도는 1950년대부터 냉전 시대가 끝날 때까지 계속됐다.

일본의 진보진영을 대표하던 것은 사회당이었다. 공산당보다 급진적이라는 평가를 받을 정도였던 사회당은 10만 명의 당원으로 1000만 표의 득표를 자랑하던 일본의 제1야당이었다. 서구의 사회민주당과는 달리 사회당은 공식적으로 1970년대까지 복지 정책을 개량적이라는 이유로 수용하지 않았고, 사회주의로의 이행을 원칙으로 삼았다. 

그러나 사회당의 급진적 색채는 1985년 ‘신선언’을 계기로 포기되고, 유럽형 사민주의로 전환되었다. 이때까지도 자위대 해체와 미일 안보조약 폐기 정책은 유지되다가, 이마저 포기하는 때는 1995년이었다. 1996년 사회당은 사민당으로 이름을 바꿨는데, 일련의 노선 전환 과정에서 논쟁과 분열을 거듭하면서 6석의 군소정당으로 몰락하고 말았다.

사회당의 몰락에는 일본 노동운동의 우경화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좌파 노동운동의 구심이었던 총평은 사회당의 튼튼한 '빽'이었다. 10만에 불과한 당원으로 제1야당의 명성을 유지할 수 있었던 배경에 바로 총평이 있었다. 그러나 1960~70년대 일본 경제가 고도성장하는 과정에서 급진적 공공부문 노조보다 실리적 민간부문 노조의 힘이 강력해졌고, 복수노조를 악용한 자본의 공격과 민영화 압박 속에서 총평의 지도력은 무너지게 된다. 결국 1989년 총평이 해산되고 보수적인 일본노동조합총연합회(렌고)에 흡수되게 된다. 총평의 해체로 일본 사회당은 인적, 물적 후원자를 상실하게 된다.

일본 진보진영 몰락의 다른 원인은 익히 우리에게 알려져 있는 1960~70년대 좌파의 분열, 이론과 노선에 대한 결벽증, 살인까지 불사한 분파주의다. 또한 노동운동으로 대표되는 조직화된 진보진영이 광범위한 중하위층 노동자들의 조직화에 실패하고, 경제적 실리주의에 갇혀 ‘낡은 기득권’의 일부로 전락한 까닭도 있다. 일본에서 새로운 노동운동을 시도하는 청년들이 ‘유니온’이라는 이름을 고집하는 이유에는 노동조합에 덧씌워져 있는 분파주의와 경제적 보수주의를 도저히 수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일본 사회운동은 
생활보수주의를 벗어날 수 있는가?

그렇다고 해서 일본의 사회운동이 완전히 몰락한 것은 아니다. 아니, 우리는 최근에 촘촘하게 뿌리 내리고 있는 일본의 협동조합과 지역운동에 주목해오지 않았나? 또한 일각에선 일본의 프리터노조나 청년유니온을 새로운 노동운동의 모델이 아닌지 기대하지 않았나?

1990년대 이후 일본에서는 ‘생활’이나 ‘생활자’라는 말이 거의 모든 정당의 정치 슬로건에 포함되었다. 시민운동과 주민운동도 그러한 용어들의 의미를 적극적으로 수용했다. 사회주의권의 붕괴와 냉전의 해체, 노동운동과 사회당이 몰락하는 상황이었다. 일본 사회운동은 정치나 이념이 아니라 생활에, 노동자나 시민이 아니라 생활자에 주목했다. 무엇보다 생활에 대한 주목은 장기불황과 신자유주의 개혁이라는 구조적 폭력에 맞서 자기 삶과 공동체를 지키기 위한 노력이었다. 하지만 일본에서 이러한 노력은 시스템의 변화보단 개별적인 삶을 보호하려는 ‘보수적’ 흐름이었다.

공동체를 위한 활동을 통해 장기불황과 신자유주의 개혁의 부정적 여파로부터 지역공동체를 지켜낸다는 논리는 시민사회론자와 지식인, 사회운동가들에게 폭넓게 받아들여졌다. 이런 논리는 보수적 지식인과 정치인들에게도 수용되었다. 장기불황이라는 일본 경제의 구조적 폭력과 진보진영의 몰락이라는 정치적 대안의 부재 속에서 발생한 이러한 일본 사회의 대응을 ‘생활보수주의’라고 볼 수 있다.
'생활을 지키는 힘이 된다'는 구호가 담긴
일본 민주당의 포스터

그러나 생활보수주의에는 큰 한계가 있다. 자기가 속한 공동체 중심의 닫힌 공공성을 추구하고, 정치적 이슈를 미시화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민주당은 2007년과 2009년 선거에서 ‘생활이 제일’이라는 슬로건으로 집권했다. 하지만 생활 이슈는 극우 정치인도 활용할 수 있는 것이었다.

2000년대 높은 인기를 구가한 이시하라 도쿄도지사는 요코다 미군기지를 이전하겠다는 공약으로, 2008년부터 오사카시장을 역임한 하시모토는 오사카도를 만들어 지역을 발전시키겠다는 공약으로 인기를 끌었다(지난 5월 17일 오사카도 구상에 대한 주민투표 부결). 이들은 모두 일본의 전쟁 범죄를 부인하는 망언으로 한국에도 이름을 떨친 정치인들이다. 

신자유주의 개혁이나 호전적인 대외정책에 의문을 품고 장기불황을 종식시켜야 한다고 느끼지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운동에는 나서지 않는 시민들. 나아가 입장을 갖기를 꺼리고, 투표장에도 나서지 않은 사람들. 자기 가족과 그들을 둘러싼 좁은 공동체가 좀 더 나아지면 좋겠다는 마음만으로 생활에 열중하는 것이 생활보수주의의 자화상이다. 그리고 그것은 자민당의 ‘아베노믹스’와 민주당의 ‘생활이 제일’ 슬로건에 적극 활용되고 있다.

경제의 구조적 폭력과 정치적 대안의 부재라는 이중 제약 속에서 생활과 생활자를 통해 사회변화의 작은 단초라도 찾고자 하는 것이 일본 사회운동 전반의 고민이다(한영혜, 〈일본 시민운동에서의 ‘생활’의 의미〉, 《일본비평》 4호). 일본에서 유니온이란 이름으로, 또는 개별적인 사회이탈 행동으로, 프리터나 청년의 자기보호 운동이 부상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 파악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러한 일본 사회운동의 전망 속에서 어떤 희망을 찾을 수 있을까. 어쩌면 일본의 군사화 폭주에 브레이크가 없는 것은 그것이 ‘생활’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기 때문이 아닐까? 한편 정치적 대안을 상실하고 내부로 움츠러드는 사회가 보여주는 모습에서 우리는 얼마나 떨어져 있는가? 

일본의 군사화를 민족주의적 감정으로 비난하는 데에 그친다면 우리의 미래는 일본과 가까울 것이다. 구조적 폭력에 맞서는 정치적 운동을 만드는 문제는 우리 사회운동에게도 피할 수 없는 질문으로 다가와 있다. 일본의 경험이 우리에게 던지는 과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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