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광주전남지부


  • 특집
  • 2015/08 제7호

1985년 뜨거웠던 나날 구로공단

구로공단 역사순례에 다녀와서

  • 이해민 사회진보연대 서울지부 회원
 
학창시절 줄 쳐가며 외웠던 사회교과서 속 구로공단이 생각난다. ‘과거 우리나라의 수출을 주도한 노동집약적 산업의 중심지였다가, 이제는 IT산업에 주력하고 있는 곳’. 만병통치약처럼 IT신화 찬가가 들리던 시절이었으니 나는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대학에 들어와 학생운동을 접하고 나서야, 구로공단이 80년대 노동운동의 원동력이자 민주노조운동의 서막을 여는 거대한 연대파업이 일어났던 장소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이것이 내가 구로공단에 대해 아는 전부였다.

구로동맹파업 30주년을 기념해 기획된 ‘구로공단 역사순례’는 부족한 이해를 갖고 있던 내게 꼭 필요한 자리였다. 지난 6월 27일 쨍쨍 내리쬐는 햇빛에도 불구하고 독산역으로 향했다. 도착하니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역사순례 자료집엔 ‘구로공단 50년, 구로동맹파업 30년 그리고 현재와 미래 역사에게 길을 묻다’라는 제목이 적혀있었다. 50년, 30년이라는 숫자를 보니 까마득하게 느껴졌고, 자료집에 적힌 당시 공장들의 이름들은 다른 나라처럼 생경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낯설어 하는 나와 달리 역사순례에 참가한 중년의 선배노동자들은 아련한 추억에 잠기는 듯 했다. 그들의 기억과 청춘 속으로 함께 다가간다는 생각에 더위가 절로 잊혀졌다. 
 
 

과거의 흔적을 찾기 힘든 구로공단의 오늘

현재 구로공단의 모습은 과거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바뀌었다. 역사기행 하면 흔히 연상하는 것처럼, 이끼 낀 석탑을 보며 '저게 천년 전 신라의 것이다'라고 설명하면 탄성에 젖는 그런 느낌은 아니었다. 대개 애매한 빌딩 앞에 가서 ‘여기가 원래 무슨 자리였다’하는 식이어서 꽤나 상상력이 필요했다.

그래서 ‘공간’보단 ‘말’이 더 중요했다. 투쟁에 함께했던 선배노동자들의 설명은 시시콜콜한 신상정보부터 마음 한 쪽에 여전히 얼룩진 흉터까지 다양하고 상세했다. 설명을 들으며 눈앞의 빌딩을 해체하고 마음 속으로 그 때의 공장 건물을 다시 쌓아올리긴 어렵지 않았다.

구로동맹파업은 1985년 6월 22일 대우어패럴노조의 김준용 위원장을 포함한 여러 노동자들의 구속을 계기로 시작되었다. 지금은 그 자리에 마리오아울렛이 들어서 있다. 1985년 당시 대우어패럴노조는 6월 24일 아침체조를 마치고 바로 파업에 돌입한다.
효성물산, 가리봉전자, 선일섬유도 뜻을 함께 해 가리봉전자의 교대시간인 오후2시부터 파업에 들어간다. 지금은 현대아울렛이 있는 효성물산 공장과 대우어패럴 공장은 매우 가까웠다. 파업 당시 효성에서 “대우 힘내라”하고 외치면 대우어패럴 노동자들이 “효성 힘내라” 응답하기도 했다고.

그러나 꼭 거리가 가까워 동맹파업이 가능했던 건 아니다. 선일섬유 공장은 다른 공장들과는 꽤 먼 양평동에 있는데, 당시 위원장이었던 김현옥 씨는 “구로동 친구들보다 예쁜 우리 간부들하고 선일섬유 해고자들하고 미팅도 하고 그래서 좀 친했다”며 농담을 던졌다. 그만큼 유대가 돈독했다는 회고였다.

노조 결성 과정도 흥미롭다. 당시 선일섬유 노동자들은 생일에 같이 디스코장에 놀러가곤 했다고 한다. 노조를 만들겠다고 결심한 당시 위원장은 생전 처음 가는 디스코장에 따라가 “좀비처럼 흔드는” 친구들을 붙잡아 '쟤는 사무장, 얘는 조직부장' 하자고 결의했다고 회고했다. 디스코로 단결한 셈이다. 디스코를 함께 추던 젊은 노동자들은  그 '흔드는 힘'으로 노조를 세우고 동맹파업까지 하며, 한 여름의 구로공단을 흔들었다.


한 노동조합 위원장이 구속되면 곧바로 우리 모두의 문제라고 받아들이는 그런 정서

부흥사 이야기도 있다. 구로동맹파업이 시작된 지 6일 후인 28일 뒤늦게 파업에 들어간 부흥사 노동자들의 파업은 6시간 만에 아쉽게 진압된다. 당시 집행부는 민주노조로서 준비된 상태를 갖추진 못했었다. 다른 공장 활동가들이 간부들과 함께 괜히 대우어패럴 앞에 가서 설득한 끝에 결국 합류하기로 결정했던 것이다. 

이른 아침 남성노동자들이 먼저 올라가 관리자들을 쫓아내고 여성노동자들이 재단과를 점거하는 시나리오를 짰다. 그런데 하필 당일에 사인이 안 맞아서 우왕좌왕 했단다. 점잖던 계획과는 달리 형광등을 마구잡이로 깨고 재단가위를 휘두르며 싸워 공장 점거에 성공한다.

이처럼 여러 에피소드와 함께 구로동맹파업은 성사되었다. 민족민주열사·희생자 추모단체연대회의 김명운 집행위원장은 “많은 노동자들이 노조 건설을 기뻐하고 함께 몰려다녔다. 우리도 노동조합을 만들어야 하는구나, 하는 마음이 지역 전체에 퍼져있었다”고 설명한다. 구로공단의 노동자들은 민주노조에 대한 염원으로 지역 차원에서 연대할 수 있었다. 한 노동조합의 위원장이 투쟁하다 구속되면 그것을 남의 문제로 받아들이지 않았던 대중적 정서가 있었다는 것이다. 
 
 

구로동맹파업 배경엔 학생출신 활동가들의 숨은 노력 있어

구로동맹파업은 노동자들만의 싸움은 아니었다. 가장 큰 조력자들은 역시 ‘학출’(학생 출신 위장취업 활동가)들이다. 구로공단은 학출들의 주요 활동 지역이었는데, 당시 학생 출신과 노동자 출신 활동가의 비율이 비등비등할 정도였다. 학출 활동가였던 공계진 씨는 부흥사에 취업하러 와서 첫 날에는 쫓겨났다가, 세탁소에 가서 다리미질 하는 것을 대충 익히고 둘째 날 ‘아이롱’ 부서에 성공적으로 취직했다. 앞서 설명한 부흥사의 파업 투쟁에는 공계진 씨와 같은 ‘학출’들의 숨은 노력이 스며들어 있었다. 

학생들은 때로는 자신의 정체를 들키기도 했다. 가리봉전자에서 대의원을 지냈던 성훈화 씨는 같은 기계를 쓰던 친구가 사실 서울대학교 출신이라는 ‘고백’을 듣고 “망치로 뒤통수를 세게 맞은 느낌이 들었다.” 자신은 열심히 공부해서 공장에서 나가 대학을 가려 했는데 이 친구는 왜 내가 나가려 하는 공장에 들어왔을까, 노동자들이 먹고 사는 데 바빠서 기본적인 권리도 모르니 이 친구들이 알려주려 들어온 게 아닐까, 하고 고민하다가 그 이후로 “열심히 데모를 나갔다”고 한다. 본인 말씀대로 “너무 단순했던” 결정 같기도 하지만, 때로는 그런 순수한 결정이 역사를 바꾸는 게 아닐까?
 

무더기 구속과 해고에울며 싸우며 끈질기게 지켜간 민주노조 

구로동맹파업이 ‘깨지고’ 나서 참가자들은 많은 수모를 겪어야 했다. 구속과 해고는 다반사였고 ‘블랙리스트’에 올라 재취업에 상당한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팔아먹을 수 있는 게 자신의 몸뚱아리밖에 없던 노동자들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제2공단과 제3공단을 연결하고 구로공단에서 생산된 물품이 나가는 길이었던 '수출의 다리'는 노동자들의 서러움과 애환을 기억한다. 블랙리스트에 걸려 재취업에 실패하고 수출의 다리에 올라 엉엉 울며 이제 다시는 가리봉 땅을 밟지 않겠다던 노동자들의 눈물이 다리에 스며들어 있다.  

구로동맹파업은 패배했지만,  이 위대한 패배는 이후 폭발적 민주노조 운동의 신호탄 역할을 했다. 1986년에는 1985년의 패배를 딛고 제2의 ‘구로연투’를 하자는 주장도 제기됐다. 그러나 역량의 부족으로 무산되면서 개별사업장의 문제가 부각된다. 1986년 3월 17일 신흥정밀 박영진 열사의 분신이 바로 이 시점에 일어났다. 며칠 후 3월 22일에는 나우정밀 노동자들이 작은 파업을 했다는 이유로 30분 만에 질질 끌려나와 수 십 명이 집단으로 구타당하고 해고당했다고 한다. 바로 이 곳에서, 이제는 커다란 오피스텔이 들어선 나우정밀 자리 앞 공터에서, 그런 일이 있었단다. 옆에는 서광 쟁의부장으로 일하다 분신한 김종수 열사가 일했던 자리에 또 다른 오피스텔이 서있다. 
 

대우어패럴 공장 터에 들어선 마리오아울렛 
다시 머리띠를 매는 가리봉동 노동자들

이후에도 구로공단의 여러 노동조합들은 싸우고 깨지고 또 싸우고 또 깨지며 민주노조를 지켜나갔다. 그게 어떻게 가능했을까 궁금해하던 차에 “우리의 민주노조는 조합원들이 민주적으로 노조를 운영했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이야기가 뇌리에 박혔다. 나우정밀은 1986년 잘 싸우는 학생과 젊은 남성들을 해고하고 ‘아줌마’들을 고용했는데, 남자들보다 훨씬 싸웠다고 한다. 잘못 짚었던 것이다. 민주노조의 핵심은 나이나 성별 같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자본가들은 절대 알 수 없는, 사회 통념을 뛰어넘는 노동자들의 힘의 원천이 있었던 것이다.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 아니다. 우리가 무심코 지나치는 평범한 거리 곳곳에 너무나 많은 이야기들이 숨어 있다. 과거 대우어패럴 자리가 이제는 마리오아울렛으로 바뀌었지만 노동자들은 또 다시 머리띠를 맨다. 하이텍알씨디코리아 자본은 필리핀으로 공장을 옮기겠다고 으르렁대며 노조 와해를 기도하고 있다. 제조업 공장에서 불법파견을 자행하다 이젠 합의사항도 나몰라라 하는 기륭전자는 자본이 얼마나 뻔뻔해질 수 있는지 보여주고 있다. 이렇게 노동자의 존엄을 무시하고 낡은 부품으로 취급하는 자본이 존재하는 한 투쟁은 계속될 것이다.

30년 전 노동자들이 땀 흘려 일하고 싸웠던 곳에 들어선 고층 오피스텔 빌딩들이 묻는다. 너희들은 이제 어떻게 변할 것이냐고. 공장을 다른 곳으로 옮기고 해외로 빼돌리는 자본이 묻는다. 이제 무엇을 할 것이냐고. 아직 어떤 혜안이 떠오르진 않는다. 그럼에도 돌아오는 길에 생각했다. “뭔가 … 뭔가 말야. 내가 해야 할 일이 있지 않을까. (임철우 소설, 〈동행〉 중에서)”●
 
 
 

   구로동맹파업, 그 의미의 재구성

 

서울디지털산업단지에는 1960대 중반 이후 본격화된 남한자본주의 발전의 양상, 특히 경공업 중심 산업구조의 형성과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1960년대 해외차관을 통한 대기업 육성과 그에 기반을 둔 수출전략이 입안되었고, 그에 따라 구로공단은 섬유산업, 특히 Y셔츠, 메리야스 속옷 등 표준화가 가능한 봉제업종 중심으로 산업구조가 형성된다. 

1984년 유화 국면이 열리자, 억눌려왔던 노동자들의 임금인상 요구가 분출하기 시작했다. 이를 기회로 여러 공장에서 노동조합이 결성된다. 학출 활동가들과 학습소모임 활동을 매개로 성장한 노동자들은 사업주의 탄압에 맞서 노조를 지켰고, 노조는 합법적 지위까지 인정받았다.

이들 노동조합들은 사업의 기획부터 일상까지 모든 것을 함께 추진했다. 친밀감을 형성하기 위한 교류도 많았다. 이를 바탕으로 1985년 공동임금인상 투쟁이 기획된다. 동시교섭·동시행동이라는, 사업장 노조의 한계를 뛰어넘기 위한 시기집중 투쟁의 원형을 만들어낸 것이다.

성과는 대단했다. 강력한 임금억제 정책을 펼쳤던 전두환 정권의 임금가이드라인(5.2%)은 무너졌다. 두 자리 수 비율의 임금인상을 쟁취했고, 그 효과는 구로지역 전체로 퍼져나갔다.

전두환 정권은 이를 두고 보지 않았고, 대우어패럴 노동조합 위원장을 구속했했다. 과거 각개격파를 당한 경험이 있었던 활동가들은 이에 맞선 투쟁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단결의 힘을 깨달은 20여명의 노조 간부들도 동맹파업을 결의했다.

파업현장에서는 생존권을 지키려는 경제적 요구와 군사정권의 탄압에 맞서려는 정치적 요구가 자연스럽게 결합됐다. 노동자들은 최저생계비 보장과 같은 생존권 요구만이 아니라, 노동법 개정, 집회·결사 및 언론의 자유 등 법·제도 개선과 정치적 슬로건도 동시에 제기했다.

그런 의미에서 1985년 구로동맹파업은 전두환 정권의 강력한 임금억제 정책과 반노조 정책에 맞서는, 정치·경제적 운동이었다. 그리고 이것이 가능했던 데는 사회변혁 이념으로 무장한 학생운동이 노동자의 자기조직화를 돕기 위해 헌신적으로 현장에 들어갔고, 노동조합 역시 정치운동을 자신의 과제로 삼기 시작해서다.

하지만 전두환 정권의 탄압에 맞설 만큼 노동조합운동은 충분히 성장하지 못했고, 거꾸로 구로동맹파업의 적자(嫡子)를 자임했던 서울노동운동연합(서노련)은 ‘정치적 노동운동의 시작’과 ‘조합주의적 노동운동과의 단절’을 선언하며 급격히 앞서 나가기 시작한다.

1987년 노동자대투쟁을 경과해서야 노동자운동 내 서노련의 한계는 극복되기 시작한다. 대대적인 노조 건설과 함께 정액임금인상을 목표로 하는 공동임금투쟁이 추진되고, 노동해방 이념의 확산과 사회변혁을 향한 선진노동자의 육성이 동시에 시도되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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