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광주전남지부


사회운동

사회진보연대 계간지


2001.10.19호
첨부파일
-장애인.hwp

이동권은 생존권, 세상을 바꾸기 위해 우리는 투쟁한다!

김도현 | 노들장애인야학 교사
한국사회 장애인 이동권의 현실-우리는 무엇을 위해 투쟁하는가?

당연하고 재미없는 이야기부터 좀 해보자. 사람은 동물이다. 한 곳에 붙박여 살아가는 식물이 아니기에 이동을 해야한다. 그래야만 생존하고 살아갈 수 있다.
일반인들에게는 이동할 수 있는 권리, 즉 이동권(Right of Mobility)이라는 개념이 다소 생소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것은 마치 공기가 없이는 살아갈 수 없지만, 공기를 마시는 것을 하나의 권리로서 이야기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 사회에도 450만 장애인들이 살고 있지만1), 일반인들이 거리에서 그리고 대중교통이라고 하는 버스나 지하철에서 장애인들을 만나기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은 한국 사회에 장애인들이 없어서가 아니라, 한국 사회의 구조가 장애인들을 창살 없는 사회감옥 속에 가두어 버렸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의 장애인들은 집밖 활동 시 여러 가지 이유로 불편을 느끼거나 이동의 불가능을 경험하게 된다. '2000년도 장애인실태조사'에 따르면 장애인들은 집밖 활동 시 전체 장애인의 64.5%가 불편함을 호소하고 있다.

<표1>


그리고 집밖에서의 활동 시 불편사항을 살펴보면 대중교통수단과 각종 건축물의 편의시설 부재가 매우 심각한 상태이며,(대중교통수단의 편의시설 부족이 52.5%, 계단·승강기의 편의시설 부족이 59.0%) 이동을 보조할 수 있는 개호인(介護人)의 필요성이 매우 절실함을 알 수 있다.(몸이 불편해서가 76.1%, 외출시 동반자가 없음이 34.6%)

<표2>


이러한 간략한 통계에서도 드러나듯이 한국 사회의 대다수 장애인들은 장애인을 배제한 채 구축된 이 사회의 구조 속에서, 기본적인 이동할 수 있는 권리를 보장받지 못하고 있다. 이동할 수 있는 권리는 단지 자신이 가고자 하는 곳으로 자유롭게 이동하고자 하는 욕구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으로서 생존하고 사회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기본이 된다. 한번 생각을 해보자. 이동하고 돌아다닐 수 없는데, 어떻게 사람을 만나 사회적 관계를 형성하고, 학교에 다니며, 일터에 나가 노동을 할 수 있겠는가? 극도로 제약된, 그리고 열악한 이동권의 현실 속에서 한국 사회의 장애인들은 전체 장애인구 중 51.6%가 초등학교 졸업이하의 학력을 지닌 채 살아가고 있으며2), 70%이상의 장애인들이 실업상태에 처해 있다.3)
우리는 이렇듯 생존권을 쟁취하기 위해 투쟁하고 있는 것이다. 살아남기 위해.


오이도역 수직형 리프트 추락참사

올해 초, 오이도역에서 일어난 수직형리프트 추락참사는 한국 사회 장애인 이동권의 현실을 그대로 드러낸 사건이었다.
지난 1월 22일 지하철 4호선 오이도역에서 박소엽(71, 여, 지체3급), 고재영(71, 남)씨 부부가 장애인용 수직형 리프트를 이용하다가 철심이 끊어지면서 추락해, 박소엽씨는 사망하고 고재영씨는 다리가 부러지는 중상을 입는 사고가 발생한 것이다.

지하철역사에 장애인·노약자 등을 위해 설치된 이동편의시설에는 계단난간 형태의 레일을 부착해 이동케하는 고정형 리프트, 간이형 엘리베이터라고 할 수 있는 수직형 리프트, 그리고 엘리베이터가 있다. 그러나 고정형 리프트는 지하철을 한번 이용하기 위해 보통 20-30분의 시간이 소요될 뿐만 아니라 잦은 안전사고에 시달려 왔으며, 비용이 적게 든다는 이유로 엘리베이터 대신 최근에 설치되기 시작한 수직형 리프트 역시 아무런 설치기준, 안전기준이 존재하지 않아 이번 사고는 어쩌면 예견된 것이나 다름없었다고 할 수 있다4). 오이도역에 설치된 수직형 리프트의 경우에도 설치된 지 3개월도 지나지 않아 이와 같은 참사가 발생하였다.
이를 계기로 구성된 '오이도수직형리프트추락참사대책위원회'는 서울역 선로점거투쟁, 세종로 정부종합청사 앞 1인 시위, '장애인과 함께 지하철을 함께 탑시다' 행사 등을 통해 우리 사회에 장애인 이동권 문제를 하나의 화두로서 제기하게 되었으며, 이후 보다 안정적이고 조직적인 투쟁을 전개하기 위해 4월 20일 장애인의 날을 기점으로, '장애인이동권쟁취를위한연대회의(이하 장애인이동권연대)' 발족하게 된다.


장애인 이동권 쟁취를 위한 투쟁의 깃발을 올리면서

7월23일. 오전부터 비가 억수같이 내렸다. 바로 오늘 "장애인이동권쟁취를위한 시청 앞 천막농성 돌입 기자회견"이 오후 1시부터 세종문화회관 거리에서 있을 예정이었다. 그리고 기자회견 후 처음으로 "장애인과 함께 버스를 탑시다!"라는 투쟁을 계획하였던 날이었다.
하염없이 오는 비는 바로 장애인들이 외출하기에 가장 힘들게 하는 주된 장애물이었다. 오전부터 봇물처럼 쏟아져 걸려오는 전화는 "비가 오는데 그대로 진행하는가요?" "얼마나 준비한 투쟁인데 그까짓 비가 온다고 지금 멈추나! 힘들고 외롭기는 어차피 마찬가지다. 비가 와서 사람이 몇 명 모이지 못한다고, 아니면 조금 더 많이 모인다고 크게 달라질 것 없는 투쟁이다. 지금 이 투쟁에 참여할 사람은 비가 오나 오지 않으나 어차피 몇 명 없는데..."

"장애인이동권쟁취!" 당연한 구호임에도 불구하고 단어에서 풍겨 나오는 투쟁 강도의 차이로 인한 갈등들은 조직내부에서도 계속되었다.
과연 '쟁취!'라는 말이 장애인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는 실천과제인가. 오히려 시혜와 온정의 시각으로 길들여진 일반인들과 특히 착하고 순종적인(?) 장애인, 그리고 정부에 친화적이고 돈의 고리에 얽혀있는 많은 장애인단체들에게 거부감만 일으키고 대중으로부터 고립되어 혼자만 자위하는 투쟁이 되지 않을까. 괜히 강성으로 '쟁취', '투쟁'만을 외치면서 깝작대다가 미움을 받아 그나마 정부로부터 받는 떡고물마저 못 받는다면 어떡하지(그래서 돌아선 발빠른 우리의 동지도 있지 않은가). 그리고 철로점거와 버스점거 등의 투쟁을 80년대 투쟁방식 운운하며 나의 주장을 관철하기 위해 일반인들의 발목을 잡는 집단이기주의라는 비판의 화살을 날려보내기도 한다(특히 장애인단체와 장애인들이 더 그러한 비판을 보내왔다).
시청 앞에서 천막농성은 계획되었지만 과연 몇 명이나 농성을 함께 할 수 있을 것인가. 또한 재정은 단돈 몇 만원도 없는데 어떻게 재정은 마련할 것인가. 회의에서는 항상 누가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 것인가'가 큰 갈등의 고리였으며 막막한 과제였다.


천막투쟁을 진행하면서

이 사회에서 장애인들은 철저하게 소외되고 배제되었으며 그로 인한 뼈아픈 차별, 그 차별마저도 어쩔 수 없는 자본의 질서로 편입되어 버렸다. 또한 장애인들에게는 그 모순된 현실에 체념하고 순종하며 마침내는 스스로 억압을 자초하고 유지하는 자기 의식을 강화해버린 것이다.
천막투쟁을 준비하면서 나타난 투쟁노선에 대한 갈등들은 그러한 모순된 현실과 자기 의식에 대하여 비판을 통해, 무기력한 자기 자신의 저항을 조직하기 위한 과정에서 나타나는 치러야 할 대가였다. 그러한 대가가 없이 장애인운동의 역사성을 가질 수 없는 것이었다.

천막투쟁에 소요되는 재정은 200만원을 빌려서 뺏지 2만개를 제작해 천막농성을 과정에 [장애인이동권확보를위한백만인서명운동]을 함께 진행하면서 시민들에게 팔아서 보급투쟁하기로 했다. 투쟁조직으로 천막농성단을 조직키로 했다. 장애인당사자조직이니 외치면서 장애인계에서 수십만명의 회원을 자랑하는 대표적인 장애인단체라 표방하는 큰 조직들에 대한 미련은 버렸다. 그들의 입장에서는 이미 정부의 떡고물인 보조금에 단체의 목줄이 달려있는데, 당위성 때문에 하루를 외치다 돈줄이 말라 조직이 고사하면 큰일이니까. 노들장애인야학, 피노키오자립생활센터 등 작은 단체들 중심으로 천막농성단을 조직하였고, 조직된 사람들은 휠체어를 탄 장애인 기껏해야 10명도 되지 않았다.

장애인이동권쟁취를위한 천막농성 투쟁을 선포한 7월 23일. 오후 1시 투쟁을 선포하기 위한 기자회견 바로 전 억수같이 퍼붓던 비는 감쪽같이 멈추었다. 그리고 어차피 소수라 생각했던 투쟁의 시작에서 함께 참여한 사람들은 100명의 대오는 충분히 되었다. 휠체어를 탄 장애인들도 20여명이나 되었고 함께 연대투쟁을 하기 위한 비장애인들도 생각보다 많이 참여하였다. 기자회견을 마친 후 세종문화회관에서 시청까지 '장애인과 함께 버스를 탑시다!'로 버스타기 투쟁을 벌였다.
시청에 도착하니 가장 먼저 반기는 것은 전투경찰뿐이었다. 시청 앞에서 쇠사슬로 천막을 묶어가면서 천막을 치기 위한 투쟁은 방패와 컷트기로 무장한 경찰의 무자비한 폭력진압으로 쇠사슬과 천막은 산산조각이 나버렸고 많은 사람들이 다치고 연행되었다. 투쟁 첫날부터 순조롭지 않았다. 산산이 부서진 천막뼈대를 옆으로 치우고 그 자리에서 노숙투쟁을 진행하였다. 7월 23일부터 29일까지 일주일간 시청 앞 노숙투쟁에서 천막치기를 세차례 시도했고 천막에 쇠사슬을 묶어 저항해보았지만 그때마다 천막은 경찰의 컷트기에 의해 잘게잘게 잘려져 버리고 압수당했다. 마침내 경찰은 시청 앞에서 60여명을 연행해버렸다. 그 투쟁의 대가로 경찰로부터 시청 앞 대신에 서울역광장에서 천막농성장을 확보할 수 있었다.
7월 30일부터 8월24일 새벽 경찰과 서울역으로부터 강제철거 당하기 전까지 서울역 광장에서 천막농성을 진행하였다. 서울역 광장에서 오전9시부터 오후11시까지 "장애인이동권확보를위한백만인서명운동"을 본격적으로 돌입하였다. 하루에 3,4천명의 서명을 받았다. 그 결과 지금은 10만명에 가깝게 서명을 받을 수 있었다. 장애인의 이동권을 쟁취하는 것이 결코 쉽지 않는 그리고 일회성의 사업으로 해결될 수 없는 지난한 과정과 투쟁이 요구되는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질긴 투쟁의 과정을 지켜내고 포기할 수 없는 이동권 쟁취에 대한 절실함을 [백만인 서명운동]을 통해 사회적 합의를 만들어 가는 것이다.
8월의 태양을 정면으로 돌파하면서 버스타기 투쟁, 국무총리면담투쟁, 시민사회단체연합 서명전, 장애인이동권쟁취를위한문화제-버스를 타자!, 그리고 3차버스타기 투쟁에서의 원천봉쇄 등 8월 24일 새벽에 경찰과 서울역에 의해 강제철거 당하기 전까지 처음 조직된 인적물적 자원으로 도저히 불가능해 보였던 투쟁을 온 몸으로 함께 동지들의 연대투쟁으로 가능하게 만들었다.
처음 장애인이동권연대는 서울시청 앞에서 천막농성을 전개하고자 하였으나, 이를 폭력적으로 진압하려는 공권력과의 충돌 속에서, 4개의 천막이 부서지고 2차례에 걸쳐 44명의 연행자를 발생시키며, 7월 23일부터 일주일간의 노숙투쟁을 전개하였다. 이후 서울역으로 거점을 옮겨 진행되던 천막농성은 8월 23일 진행하고자 했던 버스 탑승 투쟁이 경찰에 의해 원천봉쇄 당하면서 극한 대치 상황을 불러오고, 결국 24일 새벽 공권력과 서울역 공안들에 의해 강제 철거당하게 된다.

장애인이동권 쟁취를 위한 구체적 요구사항

장애인이동권연대의 첫 투쟁사업인 서울역 천막농성과 장애인이동권 쟁취를 위한 100만인 서명운동은 우리의 요구사항인 ▲지하철의 모든 역사에 승강기를 설치할 것 ▲장애인도 대중버스를 이용할 수 있도록 대책을 즉각 강구할 것 ▲장애인·노인·임산부 등의 편의증진에 관한 법률(이하 편의증진법)을 개정·강화할 것5) ▲장애인이동권 확보를 위해 정부와 장애인단체가 함께 협의할 '장애인이동권정책위원회'를 설치할 것 등에서 드러나듯이, 장애인 이동권 문제에 있어 중요한 축을 이루는 '대중교통' 문제를 우리 사회 전체와 정부를 향해 본격적인 '의제'로 제기하는 투쟁으로서 그 의미를 지닌다 할 것이다.

현재 전체 지하철 역사 중 엘리베이터가 설치된 역사는 전체 역사 366곳 중 21.3%인 78곳에 불과하다. 그리고 가장 일반적인 대중교통이라고 하는 버스는 단지 비장애인들에게만 '대중'교통일 뿐, 대부분의 장애인들에게는 원천적인 접근이 불가능한 현실이다.
외국의 경우, 1980년대부터 저상버스가 보편화되고 있는데, 버스 밑바닥이 낮은 저상버스는 마치 길에서 걷는 듯 탈 수 있어 장애인은 물론 노인, 임산부, 아동 등 모든 이동약자에게도 안전하고 편리한 교통수단이라 할 것이다. 지난 97년 서울시에서도 장애인등 이동약자가 승차하기 쉽도록 버스 밑바닥 높이를 현행 78㎝에서 38㎝로 낮춘 저상버스 도입을 발표했으나, 4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 시행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표3>


이러한 현실 속에서 서울시는 '장애인편의시설 확충·정비 5개년 종합계획'에 의해, 지하철의 경우 설치 '가능한' 역사에는 '되도록' 승강기를 설치하고, 버스의 경우에는 서울시를 4개 권역으로 나누어 무료셔틀버스에 의해 장애인의 이동권을 해결하겠다는 안이한 전시 행정적 정책을 제시하고 있다. 특히 버스 문제에 있어 현재 시범적으로 10여 대의 무료셔틀버스가 운영되고 있는 북부지역의 경우, 단지 하루 3차례(토요일 오후, 일요일 운행 안함) 정도 복지관이나 장애인 밀집거주지역 등을 겨우 연결하고 있을 뿐이다.
무료셔틀버스와 같은 교통수단(STS: Special Transport Service)은 일반 대중버스를 장애인이 이용할 수 있다는 전제 하에, 일종의 보조수단으로서의 성격은 지닐 수 있을지언정 이를 통해 전체 장애인의 이동문제를 해결하겠다는 발상은 장애인의 제한된 사회활동을 전제로 한 것일 뿐만 아니라, 버스의 운행시간에 장애인의 생활주기를 맞추어야 하며, 근본적으로 장애인의 사회통합을 저해하는 정책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서울역 천막농성과 100만인 서명운동은 서울시와 정부를 향해서는 그들의 안이하고 기만적인 장애인 대중교통 정책에 제동을 걸고, 이후 편의증진법 개정의 과정에서 그 동안 배제되어 왔던 대중버스의 문제를 법적으로 강제하기 위한 목표를 지니며, 전체 사회 구성원에 대해서는 장애인 이동권 문제의 심각성에 대해 공유하고 우리의 요구사항에 대한 사회적 합의를 만들어 가고자 하는 것이다.

8·29 버스점거 농성, 그리고 투쟁의 성과

공권력에 의해 서울역의 천막농성장이 강제 철거 된 뒤 일주일 후인 8월 29일, 장애인 이동권연대는 극적인 버스점거 농성을 감행하게 된다. 30명의 휠체어 장애인들을 비롯한 90여명의 장애인이동권연대 회원들은 혜화동 로터리에서 6-1번 시내버스 4대를 나누어 타고 광화문으로 향했으며, 이중 마지막으로 탑승했던 버스가 세종문화회관 앞 정류소에 정차하는 순간, 버스 안팎에서 쇠사슬과 수갑으로 버스와 몸을 묶고 버스를 점거한 것이다. 버스 차창에는 '장애인 이동권 완전쟁취'라는 구호가 나붙었으며, 버스 지붕 위에 올라간 동지들은 '장애인도 버스를 타고 싶다'라는 플랭카드를 내걸고 공권력의 강제 해산에 저항하며 처절한 투쟁을 전개하였다. 이 날의 버스 점거 농성은 결국 93명의 연행자를 발생시키며 4시간 여만에 종료되었지만, 이를 계기로 다시금 투쟁의 구심을 형성하며 일정한 사회적 여론형성에도 성공하게 된다.6)

한 달여 간의 노숙투쟁과 천막농성 기간 동안 꾸준한 서명운동을 통해 8만여 명의 시민들과 각계각층의 인사들이 서명운동에 동참해 주셨고, 서울시와 정부에 대해서는 그들로 하여금 먼저 협상 테이블을 제안케 하는 등 일정한 성과를 내오고 있다. 하지만 아직까지 가시적인 성과를 이야기하기에는 이르다고 할 수 있으며, 보다 장기적이고 지속적인 투쟁이 있을 때만이 장애인의 이동권 확보를 위한 일보 진전은 가능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진정한 투쟁의 성과는, 천막농성의 과정에서 이동권 문제의 가장 직접적인 당사자인 중증장애인분들이 투쟁의 대열에 함께 할 수 있었다는 것, 그리고 일정한 사회적 지지와 여론을 형성하며 투쟁에 소극적이었던 장애인단체들을 투쟁의 대열에 합류하게끔 견인해 낼 수 있었다는 것, 또한 진보진영 내의 많은 단체들이 연대서명운동과 문화제 등을 통해 장애인 이동권 문제를 운동적 관점에서 인식하고 함께 연대할 수 있었다는 부분일 것이다.
장애인 이동권 완전쟁취를 위한 우리의 투쟁은 이제, 이제부터가 시작인 것이다.


진보운동, 무엇을 위해 함께 할 것인가

아직은 역사가 짧고, 열악한 상황에 있는 장애운동에서, '장애해방가'는 대중에게 알려진 거의 유일한 투쟁가이다. 이 노래의 선창(agitation)은 이렇게 시작된다.
'자본주의의 벽을 넘어, 장애해방의 그 날까지 투쟁, 투쟁...'

'장애'를 중심으로 형성되는 모순은 그 처참함과 심각성에 비해 한국사회에 있어 아직까지 '진보운동'으로서 올곧게 자리매김 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효율성과 생산성의 논리에 의해 움직이는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장애인의 문제는 항상 뒤틀리고 억압당할 수밖에 없으며, 자본의 논리와 대척점에 존재하게 된다. 더구나 한국과 같은 반주변부, 주변부 자본주의 국가에서는.
이제 기존의 진보운동은 장애운동에 대해 감성적 연대감을 넘어, 자본주의의 극복에 있어 또 하나의 강력한 연대세력으로서 성장할 장애운동의 세력화라는 관점에서, 자본주의의 벽을 넘어 진정한 민중해방, 인간해방을 만들어가고자 하는 전체 진보운동의 발전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었으면 한다.
그렇다면 우리 함께 할 수 있지 않을까. 멕시코 치아파스 어느 원주민 여성의 말처럼, 당신의 해방이 나의 해방과 긴밀하게 결합되어 있다면, 너의 해방과 나의 해방이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해방만이 가능한 것이라면.


1) 정부에서 실시한 '2000년 장애인실태조사'에서는 우리나라의 장애인구를 전체인구의 3.09%인 1,449,500명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러나 세계보건기구(WHO)의 통계에 의하면 각국의 전체 인구 중 평균 10%를 장애인구로 파악하고 있으며, 각국의 장애인 출현률은 독일의 경우 8,4%, 미국은 20.6%, 호주는 18.0%로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현실은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으나, 한국의 경우 법적인 장애인의 정의와 범주가 대단히 협소하게 설정되기 때문에 나타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2) 한국보건사회연구원, 2000년도 장애인 실태조사, p.141
3) 한국기능장애인협회에서 실시한 "서울시 장애인 경제활동 조사보고서"에 따르면 경제활동인구의 74%가 실업노동자인 것으로 나타났다.
4) 이전까지「승강기 제조 및 관리에 관한 법률」은 승강기의 종류를 엘리베이터와 에스컬레이터로 한정하여, 장애인용 리프트에 대해서는 아무런 설치 및 안전기준을 적용하지 않았고, 이에 따라 수많은 안전사고가 발생하였다. 오이도역 추락참사와 투쟁이후에야 산업자원부는 승강기의 범위에 장애인용 리프트(고정형/수직형)가 포함될 수 있도록 동법을 개정하여 입법예고 하였다. 그러나 고정형리프트는 근본적으로 '장애인이 안전하고 편리하게 이동할 권리'를 전혀 보장할 수 없는 시설이라 할 것이다.
5) 편의증진법은 기본적으로 건축물에 대한 편의시설만을 규정하고 있다. 따라서 일종의 건축물로 간주되는 지하철 역사는 일정한 관련법규가 존재하지만, 대중버스는 장애인의 이용을 보장할 수 있는 관련법규나 조항이 전무할 실정이다.
6) 8월 29일 버스점거 농성은 당일 MBC, KBS, SBS 3개 방송사의 저녁뉴스를 통해 보도되었으며, 30일자 주요일간지(한겨레, 동아, 조선, 중앙등)의 사회면에 기사화 되었다. 그리고 31일자 한겨레와 동아일보에서는 이례적으로(?) 사설을 통해 장애인이동권문제의 심각성과 정부의 대책마련을 촉구하였다.
주제어
빈민 민중생존권
태그
노동유연화 국가고용전략회의 타임오프 노조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