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광주전남지부


  • 기획
  • 2016/04 제15호

1980년대 유럽 평화운동

최초의 핵무기 군축을 이끈 퍼싱-2 반대운동

  • 구준모 편집실장
 
핵실험과 군사훈련, 사드 배치 추진까지 한반도를 둘러싼 무력시위의 악순환이 강화되고 있지만, 평화운동은 여전히 부재중이다. 역사에 대한 반추가 필요하다. 1980년대 초 유럽에선 핵전쟁의 위험이 고조되고 동시에 반전평화운동이 부흥했다. 특히 미국의 핵무기 배치 계획에 맞선 대중운동이 유럽 각지에서 벌어져 수백만 명이 참가했다.

1970년대 초반은 냉전시대의 적대가 이완되는 ‘데탕트의 시간’이었다. 미국과 소련이 군축 협상에 나섰고 동서 간의 경제 교류도 늘어났다. 미국과 소련은 전략무기제한협상(SALTⅠ)을 통해 장거리 핵무기인 대륙간 탄도미사일, 잠수함발사 탄도미사일을 더 늘리지 않기로 합의했다.

봄날은 오래가지 않았다. 1977년 미국이 중성자탄의 유럽 배치를 검토하고 소련이 중거리 탄도미사일 SS-20을 배치하면서 핵무기 경쟁은 다시 격화되었다. 더군다나 1979년 12월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고, 1980년 11월 호전적인 반공주의자 레이건이 미국 대통령에 당선되자 양측의 긴장이 고조됐다. 두 번째 냉전이 시작된 것이다.

미국 주도하에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는 1979년 12월 유럽의 핵전력을 강화하기 위한 신형 중거리 미사일인 퍼싱-2 108기와 크루즈미사일 464기의 배치를 결정했다. 유럽에서의 핵전쟁을 대비하겠다는 신호였다.
 

전사: 중성자탄 반대 운동

1980년대 평화운동의 태동에 영향을 미친 사건은 1977~78년 벌어진 중성자탄 반대 운동이다. 중성자탄은 방사능 방출량을 최대화한 반면 폭발로 인한 열과 폭풍의 영향은 줄인 핵무기로 1977년 미국이 처음으로 개발에 성공했다. 같은 해 NATO가 이 새로운 무기의 유럽 배치와 생산을 검토 중이라는 사실도 드러났다. 중성자탄은 ‘사람은 죽이고 재산은 보호하는’ 무기로 유명해졌고 좌파들은 ‘최고의 자본주의적 무기’라고 부르기도 했다. 

중성자탄 반대 운동은 네덜란드에서 가장 활발하게 벌어졌다. ‘네덜란드 교회간 평회위원회(IKV)’와 공산주의자들이 주도한 ‘중성자탄 중단’은 함께 운동을 벌였고, 중성자탄 반대 서명을 100만 건 이상 받았다. 당시 네덜란드 인구는 1400만이었다. 이 운동의 성공으로 네덜란드 국방부 장관이 1978년 5월 사임했다. 특히 IKV는 단순히 중성자탄을 반대한 것이 아니라 ‘전 세계 모든 핵무기의 제거’를 목표로 했고, 이를 위해 네덜란드에서부터 핵무기를 없애려고 했다.

중성자탄 반대 운동은 네덜란드와 덴마크에서 세를 얻었고, 1978년에는 노르웨이로 확산되었다. 이 운동은 1980년대 유럽 평화운동의 성공적인 서막이었다. 중성자탄에 대한 유럽 민중의 저항은 미국에게 매우 뼈아팠다. 대중적 저항에 의해 유럽 정부들이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자, 미국은 새로운 미사일 배치를 NATO의 결속력을 시험하는 잣대로 사고했다. 1980년대 미국 레이건 정부의 많은 이들은 퍼싱-2와 크루즈미사일 배치의 시간 계획을 지키는 것이 평화운동을 정치적으로 패배시키기 위해서 꼭 필요하다고 여겼다.
 

평화운동 불붙다

1979년 NATO의 새로운 핵무기 배치 결정은 미사일 배치가 예정된 국가들에서 강력한 저항을 불러왔다. 평화운동의 전통이 있었던 서독, 영국, 네덜란드에서는 물론이었고, 벨기에와 핵무기에 대한 논란이 별로 없었던 이탈리아에서도 운동이 불붙었다. 

네덜란드와 벨기에에서는 1979년부터 1985년까지 미사일 배치 반대 운동이 벌어졌다. 중성자탄 반대 운동을 성공적으로 벌인 네덜란드 평화운동은 새 미사일 배치가 결정되기 전인 1979년 11월 위트레흐트에서 2만 명의 행진 시위를 성사시켰고, 한 달 뒤에는 NATO 회의가 열린 벨기에 브뤼셀에서 7만 명이 참여한 집회가 열렸다. 서독의 운동은 조금 늦게 시작됐지만 1981년부터 성장하기 시작해 나중엔 가장 규모있는 투쟁을 펼쳤다. 서독은 동서가 맞부딪히는 냉전의 최전선이었고, 퍼싱-2를 비롯하여 가장 많은 신규 핵무기의 배치가 추진되었기 때문에 저항의 중심지가 될 수밖에 없었다. 핵무기 배치는 이탈리아 정치에도 영향을 미쳤다. 평화운동의 전통이 미미했던 이탈리아에서는 크루즈미사일 기지가 건설되던 시칠리아에서 발생한 투쟁이 이탈리아 전역으로 확산됐다. 

반핵무기 운동의 전통이 강했던 영국에서도 1958년에 결성된 핵무기군축운동(CND)을 중심으로 운동이 벌어졌다. 1980년 10월 런던에서 8만 명이 도심 행진에 나서기도 했다. CND는 보수당 대처 정권의 공세 속에서도 일방적 핵무기 포기를 목표로 내걸고 싸웠다.
 
 
당시 영국에서는 1980년대 평화운동의 상징적인 두 가지 사건이 발생했는데 그린햄커먼 평화캠프가 그중 하나다. 새 핵무기가 배치될 미군기지 공사장 옆에 눌러앉아 농성을 벌이던 여성들은 캠프를 평화운동의 상징으로 만들었다. 이 투쟁을 본떠 영국의 11개 미군기지에 평화캠프가 만들어졌고, 페미니즘운동과 평화운동의 결합이라 평가됐다. 두 번째는 1980년에 영국의 역사학자 EP 톰슨이 주도해 시작된 ‘유럽 핵무기 군축’(END) 호소다. 이 호소에는 퍼싱-2와 크루즈미사일뿐 아니라 소련의 SS-20에도 반대하고, 폴란드에서 포르투갈까지 핵무기 없는 유럽을 만들자고 제안이 담겼다. 나아가 END는 소련이나 동유럽의 개인들이나 독립적 조직들로부터도 지지를 얻었다.
 

북으로 남으로 확산되다

평화운동의 들불은 북쪽으로 번졌다. 노르웨이와 덴마크에서 ‘핵무기 반대’라는 같은 이름의 단체가 결성돼 저항에 나섰고, 중립국인 핀란드에도 영향을 끼쳤다. 이들은 ‘노르딕 비핵지대’를 목표로 활동했다. 반면 스웨덴의 집권당인 사민당은 이 구상에 별 관심이 없었으나, 1981년에 열린 ‘노동평화포럼’에서 평당원과 노동조합원들 사이에서 큰 호응을 얻었다.

남유럽의 사회운동도 화답했다. 미군기지와 핵무기가 배치돼 있었던 그리스에서 사회당 당수 안드레아스 파판드레우는 1980년 유럽 핵무기 군축 호소에 서명했다. 이때부터 비공산당계 평화운동은 사회당과 긴밀한 관계를 맺었다. 1981년 집권한 그리스 사회당은 미군 철수, NATO 탈퇴, 발칸 비핵지대 구상을 공약으로 내걸었다. 아테네 근교의 미군기지 1곳이 폐쇄됐지만, 사회당이 1989년 선거에서 패배해 철수는 중단됐다. NATO 탈퇴나 비핵지대 구상도 추진되지 못했다. 그밖에 터키, 스페인, 포르투갈에서도 평화를 위한 저항이 전개됐다.
 

소련 對 NATO

당시 유럽에선 핵전쟁 발발에 대한 대중들의 공포가 컸었다. 1980년 10월의 런던 시위에서 “저항해서 살아남자”라는 구호가 등장한다. 미사일 기술이 발전해 목표물에 대한 정확도가 개선되면서 선제 핵공격에 대한 우려가 높아졌고, 한편으로는 컴퓨터 기술이 사용되면서 오작동으로 인한 우발적 핵전쟁 가능성에 대한 경고도 잇따랐다. 실제로 미국은 1970년대에 유럽에서의 군사 전략을 변경해 선제핵공격 옵션을 우선순위에 두었다. 

한편 운동이 성장하면서 평화운동 내에서 논쟁적인 문제들도 부상했다. 첫 번째는 소련의 군사정책에 대한 입장이었다. 다수는 소련의 핵정책과 SS-20 미사일 배치, 아프가니스탄 침공에 비판적이었다. 반면에 예를 들어 공산당과 관계를 맺고 있었던 서독의 평화운동 일각과 독일평화동맹(German Peace Union)은 1984년까지 소련의 미사일 정책에 대한 반대를 거부하다가, 이후 입장을 바꿨다. 미국을 소련보다 더 호전적인 패권 세력으로 본 이들은 소련에 대한 비판에 소극적이었다. 

두 번째 논쟁은 NATO에 대한 견해차였다. 독일 사민당을 비롯해 이와 관계된 그룹들이 공산권의 위협으로부터 유럽의 안보를 지키기 위해 NATO가 필요하다는 입장이었고, 급진적인 그룹들은 냉전의 도구인 NATO를 해체하는 것이 유럽에서 평화를 구축하는 길이라 주장했다.
 

최초의 핵군축을 이끌다

이런 논쟁 속에서 유럽 평화운동은 ‘일방적 군축과 핵무기 폐기’란 입장을 벼려냈다. 협상을 통한 상호군축은 군비 증강과 핵무장으로 안보를 확보하려는 군사주의적 안보 노선 속에 머물 뿐이었다. 미소 간의 전략무기제한협상은 앞에선 협상을 하면서도 뒤돌아서서는 군사력을 증강시키는 것이어서, 결코 군축을 이끌어내지 못한다는 것을 반증했다. 반면 ‘일방적 군축’은 평화운동이 군비축소를 압박하고, 이 힘을 바탕으로 쌍방 간의 평화주의적 연대를 실현시키자는 제안이었다. 군사적 긴장을 전제한 소극적 평화가 아니라, 아래로부터의 평화운동에서 비롯된 적극적 평화를 대안으로 제시한 것이다.

평화운동이 성장하면서 일방적(선제적) 군축은 구체적 요구로 떠올랐다. 하지만 아쉽게도 대중들의 광범위한 지지를 이끌어내는 데까지 미치지는 못했다. 평화운동이 고조되었던 1983년 영국의 조사기관 마플랜(Marplan)이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영국인 61퍼센트가 크루즈미사일 배치에 반대했지만, 일방적 핵군축에 찬성한 사람은 21퍼센트에 그쳤다. 영국은 CND가 일방적 핵군축을 내걸고 활발히 활동한 나라였다.

1980년대 유럽의 평화운동은 그들의 주장대로 신규 미사일 배치 백지화와 일방적 핵군축을 달성하지는 못했다. 1983년부터 네덜란드를 제외한 나라들에서 애초 계획에 따라 신규 미사일이 배치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성장한 평화운동의 역량은 최초의 핵무기 군축 합의인 중거리핵미사일폐기협정(INF)으로 결실을 맺었다. 1987년 12월 미국의 레이건 대통령과 소련의 고르바초프 서기장은 중·단거리 지상발사 미사일을 폐기하는 협정에 서명했다. 이로써 미국이 유럽에 배치한 퍼싱-2와 크루즈미사일, 그리고 소련의 SS-20 미사일이 폐기되었다. 1991년 6월 1일까지 미국의 846기, 소련의 1846기가 사라졌다. 수백 만 명이 참가하며 1980년대 유럽을 휩쓴 핵군축 평화운동이 핵무기 경쟁에 브레이크를 건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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