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광주전남지부


  • 책보다
  • 2016/05 제16호

여성혁명가 주세죽의 비극

손석춘 장편소설, 《코레예바의 눈물》

  • 김유미 편집실 기획국장

여성혁명가 주세죽

“민족해방운동가들은 전체 조선 민중에 비하면 한 줌도 안 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도 우리 수업에서 중점적으로 다루는 이유는, 당시 시대적 과제가 해방이었고, 이들이야말로 해방 후 국가를 이끌어갈 정당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대학 시절 일제의 침략사를 배우는 수업 첫 시간에 들은 얘기다. 그렇다. 민족해방운동가들은 독립을 ‘최종 목표’로 싸운 이들이 아니라, ‘독립 이후의 사회’에 대해 미리부터 치열하게 고민하고 분투한 이들, 그래서 그 사회를 이끌어갈 정당성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우리 역사의 비극은 이들 중 대다수가 해방 후 한반도를 이끌어가는 주체가 되지 못했다는 사실에 있다. 분단과 전쟁의 파고 속에 민족해방운동가들의 다수는 설 자리를 잃거나, 아예 목숨을 잃었다.

박헌영은 해방 이후 비극적인 운명을 맞이한 인물 중 하나다. 일제침략기 사회주의 계열 민족해방운동의 중심에 섰던 그는 분단 과정에서 월북했으나 김일성에 의해 ‘미제의 스파이’로 몰려 숙청당했다. 그리고 남한에서는 다른 사회주의 계열 민족해방운동가들과 마찬가지로 오랜 기간 ‘금기의 인물’이었다.

<코레예바의 눈물>의 주인공은 혁명가 박헌영과 함께 열정적으로 활동했던 조선의 혁명가 주세죽이다. 하지만 역사 속의 그녀는 ‘조선 최고의 미인’이라거나 ‘처음에는 박헌영과, 이후에는 김단야(박헌영과 매우 가까운 동지였던 사회주의 민족해방운동가)와 결혼한 스캔들의 주인공’으로 언급되기 일쑤다. 혁명가로서의 발자취보다 외모에 대한 평가, 흥미를 자극하는 연애사가 더 많이 회자되는 것은 그녀가 여성이라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이렇듯 수십 년이 흐른 지금도 그녀가 기억되는 방식에는 여성의 현실이 반영된다. 그렇다면 1920~30년대 ‘여성’ 조선 혁명가로 살아가는 일은 과연 어떠했을까? <코레예바의 눈물>은 주세죽의 1인칭 시점으로 이 흥미롭고도 중요한 문제에 접근한다.
 

사회주의 운동과 여성운동

중등학교 시절 3.1운동에 참여한 이력이 있던 주세죽은 피아노를 배우기 위해 상해로 유학을 떠난다. 그곳에서 혁명운동을 하는 조선의 청년들을 만나면서 피아니스트의 꿈을 접고 혁명가의 길에 뛰어든다. 그녀는 동지들과 함께 조선공산청년회의 기관지 <올타(‘옳다’는 조선말을 소리나는 대로 읽은 것)>를 만드는 일에 매진했고, 박헌영과 사랑에 빠져 결혼식도 올린다.

1922년 경성에 돌아온 그녀는 문화통치 국면(3.1운동 이후 조선총독부에 의해 열린 유화국면)에 개입해 활동한다. 이러한 시대적 특성은 그녀가 사회주의 운동과 동시에 여성운동을 경험할 수 있도록 이끈다.

당시 국내 여성운동은 기독교계 교육계몽운동이 중심이었다. 그녀는 임금 착취, 성차별, 민족 차별로 겹겹이 고통 받는 여성들의 현실을 직시하고, 계몽운동의 한계를 역설하며 젊은 여성들을 조직했다. 여성의 경제적 독립 없이 여성해방은 불가능하다며 직업교육을 하기도 했다. 박헌영과 김단야 등이 일본경찰에 의해 검거 당해 구금되었던 기간에도 그녀와 여성 동료들의 활동은 이어져 마침내 1924년에는 사회주의 여성단체인 ‘조선여성동우회’를 창립한다.

소설 속 그녀는 여성이란 조건을 혁명 운동에 적절히 활용하기도 한다. 동료인 허정숙과 ‘여자라고 일본경찰의 경계가 더 허술한 것도 성차별’이라고 우스개를 하면서 허술한 감시망을 이용해 상해에서 조선으로 들어가고, 함흥에 있는 가족들에게는 결혼도 했으니 앞으로는 ‘출가외인의 거리’를 두자고 말한다. 혁명 운동을 만류하는 가족의 간섭을 끊어내고, 혹시나 이후에 가족이 받을 수도 있는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서다.

물론 혁명 운동에서 여성이라는 조건은 득이 되기보다 제약인 경우가 많았다. 외래문화에 대한 분별이 없고 성을 밝힌다며 신여성이 비난받는 사회 분위기, 정조 관념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해 여성활동가가 끊임없이 자기검열과 갈등을 겪는 것, 활동과 모성의 권리가 충돌하는 현실, 사회주의 조직 내의 여성이 주변적 위치에서 일하게 되는 상황 등 소설 속에 등장하는 여성 혁명가들의 고민은 해방 후에도 오랫동안 지속된 것들이다.
 

두 번째 결혼

1920년대 말부터 30년대 초 주세죽은 ‘코레예바(조선 여자)’라는 러시아 이름으로 모스크바에서 공부한다. 1932년에는 코민테른의 지시로 박헌영, 김단야와 함께 상해로 가 활동하는데, 이듬해 박헌영이 일본경찰에 의해 다시 검거된다. 이번엔 박헌영이 살아나올 수 없으리라는 예상 속에 주세죽은 김단야와 가까워져 재혼을 한다. 그녀의 두 번째 결혼은 당시 사회주의 운동에 동참했던 다른 이들로부터 많은 비난을 받았다.

소설은 주세죽의 두 번째 결혼을 이해하기 위해 레닌과 콜론타이를 불러온다. 모스크바에서 만난 주세죽, 박헌영, 김단야는 레닌과 그의 아내 크루프스카야, 레닌이 뒤늦게 사랑에 빠진 이네스 아르망 세 사람의 관계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 대화를 통해 세 사람은 혁명가에게 사랑이란 무엇인지, 레닌의 두 번째 사랑에 대한 ‘너그러운 이해’는 어쩌면 여성과 남성에 대한 이중 잣대 때문에 가능한 게 아닌지 물음을 던진다.

인상적인 것은 주세죽이 모스크바의 국제공산학교에 다니던 시절 알렉산드라 콜론타이의 강연을 듣는 장면이다. 콜론타이는 사랑과 가족이 갖는 의미에 대해 공론화하며, 남성과 여성의 결합이 과거 가족 모델보다 자유롭고 서로를 구속하지 않는 형태로 바뀌어야 한다고 주장한 여성혁명가다. 레닌과 콜론타이의 이야기는 주세죽의 삶 역시 사랑과 결혼에 대한 전 세계 사회주의자들의 고민 속에 함께 존재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모순을 딛고

주세죽의 일생에서 가장 비극적인 대목은 민족해방운동 과정에서 겪은 숱한 어려움들이 아니다. 박헌영과 마찬가지로, 평생을 사회주의 운동에 투신했으나 바로 그 사회주의 국가의 이름으로 비극적인 최후를 보내야 했다는 사실이다.

스탈린 치하의 소련은 급격히 분위기가 바뀌고 조선 사회주의 운동의 지도자 여럿이 일제의 밀정이라는 의심을 받는다. 1937년 김단야가 마찬가지의 혐의로 소련 경찰에 체포되면서 주세죽도 ‘위험분자’로 분류되어 카자흐스탄의 크즐오르다라는 지역으로 5년 유배형을 받는다. 그런데 형기가 끝나고 1945년 조선이 독립한 후에도 그녀는 고국으로 돌아가지 못한다. 소설의 초반부는 이 시절의 주세죽이 스탈린에게 보내는 청원의 형식을 띠고 있다. 

고국으로 돌아가게 해달라는 그녀의 청원은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결국 주세죽은 해방된 조국을 밟아보지도 못하고, 죽은 죽 알았던 박헌영과 재회도 못한 채 1953년 눈을 감는다.

주세죽의 삶이 해방 이후 70년이 지나 ‘소설’의 형식을 빌어서야 우리와 만날 수 있었던 것은 그 자체로 남북한 역사의 비극이자 국제공산주의 운동의 아이러니다. 현실사회주의의 모순을 딛고 새로운 운동을 일구는 일은 주세죽 같은 이들의 치열한 인생 구비마다의 고뇌와 결단을 복원하는 일과 동떨어져 있지 않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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