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광주전남지부


  • 여는글
  • 2016/10 제2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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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남기 선생님을 생각하며

  • 구준모 오늘보다 편집실장
활동을 하다 힘들어하는 친구가 있으면 가끔 이런 말을 한다. 인생은 길고 세상의 변화를 위한 활동은 다양할 수 있으니, 지금의 구속과 압박 속에서 너무 괴로워하지 말자고. 스무 살에 운동을 시작하고 우리 세대라면 일흔까지는 운동하며 살 수 있으니까, 50년 중 1~2년 아니 5년 정도라도 잠깐 쉬거나 다른 일을 할 수도 있다고. 조급해하지 말고 평생 할 수 있는 운동의 동력을 만들자고. 그러나 이 말 끝에는 찝찝함도 따른다. 권태와 회의 속에서 일희일비하는 내가 정말 그럴 수 있을까?

지난달 우리 곁을 떠나신 백남기 선생님은 내가 짐짓 진지한 체를 하며 했던 이런 말들을 온몸으로 살아온 분이셨다. 1968년 대학교 입학 후 학생운동으로 세 차례 제적을 당했다. 유신 철폐 시위를 기획하고, 총학생회를 민주화하고, 전설로 남은 중앙대 4000 학우의 한강 도하 시위를 주도했다. 피신 중에 수도원에서 5년을 보내기도 했다. 신군부 계엄군에게 체포되어 옥살이를 하던 중 1981년 3·1절 특사로 가석방되고, 고향 보성으로 귀향했다. 고향에서는 농사를 짓고 소를 키웠다. 1983년 정치활동 규제가 풀리고, 1986년부터는 가톨릭농민회에 가입해 활동했다. 1980년대 말부터 90년대 초반까지 민주화와 사회변혁의 열망이 가장 뜨거웠던 시기에 가톨릭농민회 보성·고흥협의회 회장, 전남연합회장, 전국 부회장 등 주요 직책을 두루 맡았다. 우리밀 살리기 운동에도 일찍이 헌신했다. 

백남기 선생님에 대한 기억들은 그의 인품을 보여주는 일화들을 담고 있다. 유신 시대 법정에서 판·검사들에게 역사의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호통을 칠 정도로 대담한 용기를 가지고 있었으나, 평소에는 말이 많지 않고 궂은일에 앞섰다. 휴대전화나 신용카드를 사용하지 않았고 검정고무신을 즐겨 신었던 선생님은 부인에게 면소재지는 5천 원, 광주는 1만 원, 서울은 5만 원으로 정해진 용돈을 받아 활동에 참가했다. 지역 사회의 지도적 활동가로서 선거 출마 권유도 받았으나, 늘 거절하고 후배들을 육성하고 독려하는 데 힘썼다. 

그러나 그는 필요한 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2015년 11월도 그랬다. 농민대회와 민중총궐기에 참여하기 위해서 예순아홉의 나이에 거리로 나섰다. 상여를 따라 어깨춤을 추며 행렬을 따랐다고 한다. 그리고 시위대 선두에서 차벽 앞에 섰다가 조준하여 직사로 쏟아진 경찰의 물대포를 맞고 쓰러졌다. 그렇게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고 317일째 되는 날 하늘로 가셨다. 일흔 살 생신을 하루 넘긴 날이었다. 

유신과 신군부에 맞서 투쟁하고, 농촌 공동체를 살리기 위해 헌신하고, 신자유주의가 파괴한 농업을 되찾기 위해 애써온 삶. 돈과 권능이 아니라 정의와 진실을 좇아 살면서, 소박한 미소와 건강한 웃음을 잃지 않았던 활동가 백남기. 작은 지면에나마 기록하고 싶다. 진심으로 ‘선생님’이라고 부르고 싶은 고귀한 사람을 억울한 죽음을 통해, 너무 늦게 알게 되어 원통하다. 그의 삶을 기억하고, 그의 꿈을 잇기 위해 무엇을 할 것인지 함께 고민하고 행동하리라 다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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