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광주전남지부


  • 오늘세계
  • 2016/10 제21호

이탈리아 노총, 노동권을 다시 쓰다

노동개악 맞선 권리장전 제정운동

  • 류미경 민주노총 국제국장
렌치 정부가 강행한 ‘일자리법’으로 대표되는 이탈리아 노동 개악은 박근혜 정부 노동 개악의 본보기로 언급되는 사례다. 이탈리아 정부 스스로 “유럽 내 가장 성공적인 노동시장 개혁”이라고 평하기도 한다. 이탈리아 사용자 단체는 ‘일자리법’을 통해 무기계약직 일자리가 늘어났다고 대대적으로 홍보했고, 한국의 전경련은 이를 한 겹 더 포장하여 “이탈리아 노동개혁 이후 정규직 채용이 상승”했다며 “한국도 노동유연성 높여 고용을 창출해야” 한다며 노동 개악 관련 법안을 20대 국회가 통과시킬 것을 촉구하기까지 했다. 과연 이탈리아 일자리법은 본받을만한 사례인가?
 
 

악법 폐기 및 ‘새로운 노동법’ 제정운동

650만 조합원을 대표하는 이탈리아 제1노총(CGIL, 이하 이탈리아노총)은 지난 해 민주노총 20주년 국제 심포지엄에 참석하여 “일자리법으로 인해 사용자는 더 쉬운 해고와 법적 책임 약화라는 특혜를 얻었다”고 비판하고 악법을 폐기하고 새로운 법을 수립하는 투쟁을 전개할 방침이라고 소개했다. (《오늘보다》 2015년 12월호, <청년을 보호하는 건 노동 개악 아닌 노동조합> 참조) 당시 얘기한 대로 이탈리아노총은 지난 7월 1일 노동 개악을 무력화하기 위한 3개 의제에 관한 국민투표를 발의하는 서명을 대법원에 제출했다. △불규칙한 고용을 기반으로 하는 비숙련 일자리에 현금 대신 바우처를 지급하는 노동바우처 제도 폐기 △부당하게 해고된 노동자에 대한 조치로 원직복직이 가능하도록 법 개정 △파견·하청 등 간접고용 노동자들에 대한 원청 사용자들의 책임을 인정하는 법 도입이 그것이다. 이탈리아노총은 세 안건에 대해 각각 110만 명씩 총 330만 개의 서명을 모았다. 여기까지가 ‘악법 폐기’ 운동이다. 

이탈리아노총은 이에 그치지 않고 노동법을 새롭게 다시 쓰는 운동을 펼치고 있다. ‘보편적 노동권을 위한 헌장(이하 헌장)’이라는 제목을 단 이 캠페인의 취지는 최근 몇 년간 진행된 노동 개악으로 불안정한 형태의 고용이 확대되면서 헌법에 명시된 노동권 원칙이 적용되지 않는 노동자가 늘어났다고 보고, 헌법상의 권리가 모든 노동자들에게 적용되도록 헌법의 원칙을 재확인하고 이를 새긴 법을 새롭게 도입한다는 것이다.
 

‘헌장’ 무슨 내용을 담고 있나

헌장은 세 부분으로 구성된다. 모든 노동자에게 적용되어야 할 헌법상의 원칙을 재정의하는 내용이 한 축이고, 고용 형태에 상관 없이 모든 노동자가 단체교섭에 관한 권리를 누리고 민주적으로 대표될 수 있도록 교섭틀을 재정비하는 내용이 다른 한 축이다. 고용 불안을 없애기 위해 고용계약(고용관계)에 관한 원칙을 새롭게 세우는 내용이 세 번째 축이다. 

첫 번째 축인 ‘모든 노동자를 위한 권리장전’에는 모든 노동자에게 보편적으로 적용되어야 할 기본적인 권리를 23가지로 정리하여 제시하고 있다.* 더불어 이러한 권리가 고용 형태에 상관 없이 모든 노동자들에게 보장되고 확대되어야 하는 기본적인 권리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두 번째 ‘민주주의, 대표성, 노동자 참여, 교섭’에 관한 부분은 확대된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한 도구로서 노동조합을 강화하는 것을 취지로 제시하고 있다. 이탈리아노총은 단체교섭권이 헌법이 보장하는 권리임에도 불구하고 한편으로는 불안정 노동의 확대로 이러한 권리를 행사하지 못하는 노동자들이 늘어났고, 또 한편으로는 사용자가 단체협약을 제대로 이행하지 않더라도 법적 제재가 전혀 가해지지 않는 게 현실이라고 진단한다. 따라서 모든 노동자들이 단체교섭권을 행사하도록, 공공부문/민간부문, 대공장/중소영세사업장, 정규직/비정규직 가릴 것 없이 모든 노동자가 참여할 수 있는 교섭모델을 제시하는 새 법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마지막으로 사용자가 해고를 쉽게 하고 불안정한 형태의 고용을 남용하도록 허용한 노동 개악을 무효화하기 위해 해고 요건을 다시 강화하고, 기간제·파견·파트타임 등 불안정한 형태의 계약에 대한 규제를 재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탈리아 정부는 1997년에 임시직을 합법화하고, 2008년에는 노동바우처 제도를 도입했다. 2012년에는 재정난을 이유로 한 노동자의 해고를 쉽게 했고 2014~15년 ‘일자리법’은 “근무연차에 따라 보호조항이 늘어나는 무기계약직”을 도입하고 이에 따라 채용된 노동자에 대해서는 부당해고 판정을 받더라도 복직은 불가능하고 금전적 보상만 가능하도록 했다. 2014년에는 기간제 고용을 자유화했다. 따라서 헌장은 부당해고가 남발되지 않도록 금전적 보상뿐 아니라 피해 회복을 위한 조치로 복직을 명시해야 하고, 해고 절차 역시 엄격하게 규정할 것을 제시한다. 
 

<모든 노동자를 위한 권리장전>의 23가지 기본적인 권리

 

△일할 권리 △인간다운 노동조건에 대한 권리 △서면으로 분명하고 투명하게 명시된 노동조건을 제공받을 권리 △표현의 자유 △안전한 노동환경에 대한 권리 △휴식에 대한 권리 △일가정 양립에 대한 권리 △고용·직업상 평등한 기회에 관한 권리 △구직·고용 과정에서 차별받지 않을 권리 △사생활 보호-원격 조종으로부터 보호 △개인정보 보호에 관한 권리 △정보 접근권 △산재 발생 시 적절한 보상에 관한 권리 △일방적 근로계약 변경으로부터 보호받을 권리 △지식에 대한 권리 △발명 및 창조적 노동의 결과물을 보호받을 권리 △정당한 사유 없이 계약 갱신을 거부당하지 않을 권리 △비자발적 실업 혹은 조업 중단 시 소득을 보장받을 권리 △생활에 필요한 연금을 보장받을 권리 △부당 해고로부터 보호받을 권리 △단결권과 단체교섭권 △불법적인 고용 및 폭력·강요·협박·착취를 통한 노동에 동원되지 않을 권리

 

 

법안 자체보다 
대중적 운동에 무게 실어

이탈리아노총은 이 운동을 제안하면서 “모든 노동자들에게 적용될 존엄성을 복원하는 법 제정에 관한 대중적 논쟁을 촉발”한다는 목표를 제시했다. 따라서 새로운 노동법 제정을 위한 운동은 완결된 법안을 제출하는 데 그치지 않고, 노동 개악이 파괴한 헌법의 원칙을 재확인하고 모든 노동자가 누려야 할 권리가 무엇인지에 관한 대대적인 토론을 약 9개월 동안 조직했다. 

올 1월 수산나 카무소 사무총장이 기자회견을 통해 헌장 운동을 선포한 후, 캠페인 버스가 전국 곳곳을 순회하며 헌장의 내용을 소개했고, 모든 사업장에서 조합원 토론을 진행하고 정해진 양식에 따라 토론 결과를 상세히 기록하여 제출하도록 했다. 또 이에 관한 입법발의를 위한 서명 운동을 대대적으로 전개하여 9월 29일 하원 의장에게 전달한다. 이 날은 이탈리아노총 창립 110주년을 기념하는 날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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