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광주전남지부


  • 특집
  • 2016/12 제23호

87년 6월에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

  • 임필수 사회진보연대 정책교육실장
1987년 대선 유세 현장에서 시민들의 야유를 받고 있는 노태우 당시 민정당 후보
 
2016년 박근혜 퇴진 운동은 규모 면에서 87년 6월 항쟁과 비교된다. 나아가 정치적 구도나 쟁점 측면에서도 흥미로운 유사점을 발견할 수 있다. 하지만 직접적인 결과마저 닮아버리게 된다. 많은 이들이 6.29 선언을 ‘전 국민의 위대한 승리’로 받아들였지만, 그 직선제 개헌에 의한 승자는 군부 독재의 계승자 노태우였다. 어떻게 이런 결과에 도달하게 되었나? 우리는 과거에서 어떤 교훈을 얻을 것인가?
 

6.29 선언 후 노선 분화

1987년 6.29 선언은 ‘예기치 않은 승리’였다. 6월 투쟁에 참가한 집단들은 6.29 선언에 대한 인식과 투쟁노선에 따라 짧은 시간 내에 분기했다. 먼저 움직이기 시작한 것은 민주당이었다. 민주당의 입장은 한 마디로 ‘선거혁명론’이었다. 김영삼 계열이 여야민주화 공동선언을 전제로 한 반면, 김대중 계열은 거국중립내각을 전제로 했다는 점에서, 즉 여당에 대한 태도라는 측면에서 상이한 입장을 드러냈다.
 
민중운동 역시 분화되는데, 크게 보면 ‘군부독재 종식투쟁론’과 ‘군부독재 타도투쟁론’으로 나눠졌다. 군부독재 종식투쟁론이란 현재의 운동역량으로는 물리력으로 군부독재를 타도하는 것이 불가능하므로 선거에서 군부독재의 재집권을 저지하자는 주장이었다. 반면 군부독재 타도투쟁론이란, 군부독재는 선거가 아니라 민중의 힘에 의해서만 종국적으로 타도될 수 있으므로 비타협적 반군부독재 전선을 강화하는 데 주력하자는 입장이었다.민중운동의 입장은 다양한 스펙트럼으로 변형된다. 예컨대 ‘범민주과도정부론’의 온건한 판본은 전두환-노태우 일당이 즉각 퇴진하고 군부정권을 제외한 모든 정당, 단체, 각계각층의 대표로 과도정부를 구성하며, 이를 바탕으로 선거에서 노태우의 재집권을 저지하자는 입장이었다. 여기서 과도정부는 양심수 석방과 해고노동자 원상회복, 공정한 선거관리를 임무로 한다.
 
급진판본은 더 강한 의미의 ‘임시혁명정부론’이었다. 그것은 군부독재와 타협한 선거로 민주화를 달성할 순 없으므로, 독재를 완전히 타도해 새로운 정부(자주적 민주정부 또는 민중민주주의정부)를 건설해야 한다는 관점이었다. 따라서 과도정부는 새로운 정부로 나아가기 위한 대체권력으로 구성되어야 하며, 당면 시기엔 미제와 군부파쇼의 음모를 폭로하고, 새로운 정부에 관한 강령을 선전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7-8월 노동자투쟁

“민족민주운동 내부에서의 군부독재타도 투쟁론과 군부독재종식 투쟁론 사이의 현란한 논쟁은 민족민주세력의 한계의 표현인 동시에 군부독재 반격에 대처하지 못한 결과이기도 하다. 대우조선 이석규 열사 장례식을 거치면서 현 정권의 폭력적 탄압, 용공좌경척결 공세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한 민족민주세력은 결과적으로 노동자들과 유리되었다.”
- 1987년 11월, <기사연 리포트4>
 
6.29 선언은 ‘민중승리의 산물’이자 ‘군부독재와 미국의 역공세’라는 이중성을 지니고 있었다. 1차적 승리를 2단계 승리로 이끌고 나갈 분명한 노선을 제시하고, 조직을 구축하며 군부와 미국의 역공세를 차단해야 했다. 그러나 오히려 군부와 미국의 역공세가 상당한 효과를 거두는 양상이 나타났다. 군부독재는 노동자운동을 포함해 기층 민중운동에 대해서는 강경하게 탄압하며 노동자의 폭력을 부각시키고 ‘패륜집단’으로 몰아 노동자와 중간층을 분리했다. 또 선거 분위기를 주도하며 과도정부나 군부독재 즉각 타도를 외치는 민중운동을 고립시켰다.
 
하지만 노동자투쟁은 단지 기층 민중의 생존권투쟁이라는 측면뿐만 아니라, 6월 민주화 투쟁의 의미를 이어받아 민주화의 저변을 확대한다는 의미도 지녔다.
 

개헌과 국본의 개헌요강

야당은 6.29 직후 개헌 협상과 대선을 요구했다. 통일민주당은 6월 30일 <헌법개정안 시안 마련을 위한 특별위원회>를 구성해, 개헌 협상을 추진했다. 이때부터 야당은 사실상 국본(87년 6월 항쟁의 주축이었던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의 약칭)에서 이탈했다. 개헌 협상의 전 과정은 여야 각 4인으로 구성된 ‘8인 정치회담’에 맡겨졌다. 그들이 100여 개에 이르는 쟁점사항을 토의하고 협상함으로써 합의를 도출했다. 그러나 주요 내용은 권력구조와 선거규칙에 집중됐을 뿐, 실질적 민주화 의제는 모호하게 정의되거나 제외됐다.
 
반면 국본은 개헌의 기초가 되는 ‘헌법개정요강’(개헌요강)을 만드는 데도 1개월 이상 소요했다. 7월 13일 산하에 헌법개정특별위원회가 설치됐지만 이는 “개헌협상에 임하는 여야가 국민의 열망에 부응”하도록 촉구하는 ‘자문조직’이었을 따름이지, 이를 관철시키기 위한 운동조직은 아니었다. 8월 4일 국본 최초로 전국총회가 개최되어 독자적인 개헌요강을 발표했다. 그러나 전국총회의 주요 방침은 ‘선거혁명론’이었고, 독자적인 개헌요강의 위력은 반감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이는 여야 협상에서 무시됐고, 국본은 속수무책이었다. 10월 27일 국민투표를 통과한 헌법개정안은 10월 29일 공포됐다.
 
삼성의 부당노동행위를 규탄하며 삼성제품을 부수고 있는 삼성중공업 노조
 

1987년 대선, 군부독재의 재집권

이제 6월 항쟁의 성과는 ‘대통령 직선제의 실시’ 외에는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는 것처럼 느껴지게 됐다. 대선이 다가올수록 야당과 민중운동은 점점 더 큰 논란에 빠졌다. 8월 초까지는 후보단일화에 대한 낙관적 기대가 압도적이었다. 하지만 김대중은 8월 통일민주당을 탈당, 창당을 선언하고(10월 28일), 김영삼은 통일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지명됐다(11월 9일). 양 김씨는 단일화 없이도 승리할 수 있다는 근거 없는 확신에 가득 찼고 단일화에 대한 어떤 사회적 압력도 그 확신을 바꾸지 못했다.
 
민중운동 역시 김대중에 대한 비판적 지지론, 후보단일화론, 독자후보론으로 분기했다. 그 계기는 10월 13일 민통련 성명, ‘범국민후보로 김대중 고문을 추천한다’였다. 그 근거는 민중운동이 독자적 정치세력화를 성취하고 보수야당과 동등한 입장에서 민주연립이나 제휴를 추친하기 어려우므로 민중운동과 가까운 후보를 지지하고, 진보적 요구와 정책을 관철하자는 것과 민주당 내 후보단일화가 어려워졌으므로 재야의 힘을 한 쪽으로 몰아줘야 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비판적 지지론’은 즉각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민통련은 “조급히 김대중 지지 선언을 하여 김대중의 한 지지세력으로 전락했다”고 비판하며, “(양김에게) 조건을 제시해 경쟁적으로 민족민주운동의 주장을 옹호·지지하게 하는 유연하고 고차원적 전술과 거리가 멀다”고 주장했다. 후보단일화 흐름은 <군정종식 단일화쟁취 국민협의회>(국협) 결성으로 이어졌다.
 
한편, 국협 발기와 같은 날 백기완 후보가 대선 후보에 등록했다. 백기완 선본의 양축은 제헌의회(CA)그룹과 인민노련(인천지역민주노동자연맹)이었다. 제헌의회그룹은 당면 시기가 혁명적 정세에 가까운 고양기(3저호황 효과의 퇴조, 노동자투쟁의 가속화)이므로 합법공간에서 민중정당을 결성하고, 반(半)합법조직으로 혁명적민주주의연합의 건설해야 하며, 선거공간 내 선전선동을 강화하자고 주장했다. 반면 인민노련은 선거시기 과제가 ①민족민주전선, 합법정당, 계급(계층)조직 결성, ②군사파쇼 타도와 민주정부 수립인데, ②의 과제는 ①의 과제에 종속된다고 봤다. 따라서 독자후보를 출마시켜 ①의 임무에서 부르주아 정파에 원칙적 비판을 가하며, ②의 임무에서 부르주아 정파와 제휴하여 민주진영 전체의 후보를 단일화(민주연립정부 구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후보단일화는 실패했고, 김영삼은 2위, 김대중은 3위를 했으며, 민주연립정부 수립도 실패했다. 민중운동의 비판적 지지론, 후보단일화론, 독자후보론 모두 철저한 자기 평가를 할 수밖에 없었다. 명확한 자기 진단이 있어야 이후 방향을 도출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87년에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

타도대상이었던 군부독재는 협상대상이 되었고, 대선에서의 경쟁 상대가 됐다. 6월 항쟁의 성과는 매우 제한적이었다. 2011년 ‘아랍의 봄’ 당시 튀니지와 이집트의 경우, 대통령 즉각 퇴진, 집권당 해체(주요인사 공직선거 출마금지), 의회 해산과 제헌의회 선거가 이뤄졌다.
 
이는 87년 당시 민중운동의 주체적 조건이 취약했기 때문일 것이다. 국본에서 야당이 이탈한 후, 민통련과 노동자운동, 학생운동 세력은 스스로 새로운 국면을 열어낼 만큼 충분한 동원력을 형성하는 데 어려움을 느꼈다. 6월 투쟁의 성과를 도약삼아 2단계 투쟁국면을 열기 위해선 명확한 정세인식과 투쟁, 노선에 관한 광범위한 합의가 있어야 했지만, 대선이 가까워질수록 민중운동 내 간극만 벌어졌다.
 
한편 7~8월 노동자 대투쟁이 전개됐으나 야당은 이를 의도적으로 무시했다. 민통련을 비롯한 재야운동도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했다. 6월 항쟁의 최대 성과는 7~8월 노동자 대투쟁이지만, 둘이 조우하기 위해선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또 후보단일화의 가능성이 희박해진 9월 말 이후에야 ‘반독재투쟁 강화’ 요구가 부상하기 시작했다. 민중운동 진영은 ① 여야의 개헌협상 과정에 독자 개헌요강을 성안했으나 어떤 직접적 영향력도 행사하지 못했고, ② 비판적 지지를 통해 민간민선정부 출범에 성공하지 못했고, 독자후보를 매개로 민주연립정부 수립도 강제하지 못했다.
 
물론 1987년이 민중운동의 종말은 아니었다. 엄정한 자기 평가 속에 새로운 단계의 운동을 조직하기 위한 헌신적 활동으로 나아갔다. 노동조합을 비롯해 계급조직을 건설하기 위한 노력이 지속적으로 전개되어 결실을 맺었고(1990년 1월 전노협 건설), 민족민주전선을 강화하기 위한 노력이 있었으며(1989년 1월 전민련 발족), 논란 끝에 합법정당 건설도 현실이 되었다(1990년 11월 민중당 창당). 군부파시즘에 대항한 학생운동과 노동현장 이전을 거쳐 형성된 지식인 집단과 민주노조운동으로 부상한 노동자집단이 규합되고, 이념과 강령, 규율로 무장한 혁명세력으로 성장하는 계획으로서 노동자정당 건설도 추진됐다. 어찌 보면 87년 이후 이런 실천을 통해 진정한 의미에서 민중운동이 출현했다고 말할 수 있다.
 
2016년 12월 오늘의 상황을 보자. 박근혜 대통령의 3차 대국민 담화 후 새누리당은 역공세를 펼치며 국회협상을 주도하겠다는 의지를 보이고 있다. 야당은 여당의 공세에 동요하며 혼란을 겪고 있다. 물론 사회운동은 1987년 이후 외형적으로는 큰 성장을 이루었고, 퇴진운동 조직에서 주도적 역할을 하고 있으나 여전히 국면을 이끌고 나갈 정치적 지도력이나 지적·문화적 헤게모니는 취약하다. 사회운동은 지금까지 폭로된 특혜, 특권, 비리, 부정, 이 모든 사안들에 대한 분노를 한국사회의 총체적 개조를 향한 대중적 운동으로 이끌고 나갈 방안을 두고 고심하고 있다. 기실 ‘이게 나라냐’는 문제제기는 있으나, 그래서 어떻게 바꿔야 한다는 뚜렷한 공감대가 대중적으로 형성되었다고 아직 말할 수 없다. 나아가 개헌이나 대선 국면에 통일적으로 대응하기 위한 합의가 있다고 전제하기도 어렵다.
 
1987년의 민중운동은 아직 지혜와 경험이 아직 미숙했다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지금 시점에서도 동일한 말을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가 이미 경험한 역사의 교훈으로부터, 주체적 상태에 대한 정확한 진단으로부터, 우리 현실에 대해 더욱 냉철한 인식을 벼려야 하는 이유다. 이것이 박근혜의 3차 담화 이후 열린 2단계 국면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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