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광주전남지부


  • 필름X정치
  • 2017/02 제25호

붕괴한 성역, 건재한 성역

영화 <스포트라이트>를 통해 본 한국의 언론 현실

  • 박장준 사회진보연대 회원
 
성직자들이 수십 년 동안 집단적으로 어린 소년, 소녀들에게 성범죄를 저질렀다. 그리고 조직적으로 은폐했다. 진실은 수십 년 뒤 지역언론 《보스턴 글로브》의 탐사보도로 드러났다. 이 신문사는 2002년부터 가톨릭 성직자들의 성범죄에 관해 600여 건의 기사를 썼고, 그 결과 보스턴 교구에서만 사제와 수도사 249명이 기소됐다.

교회는 사건을 덮었고, 경찰은 공작에 가담했다. 언론마저도 침묵했다. 피해자들이 도처에 있었지만 진실은 알려지지 않았다. 과거 누군가 딥 스로트(deep throat, 비밀제보자)와 스모킹 건(smoking gun, 결정적 증거)을 찾았을지 모르지만 판사가 다니는 교구에 따라 재판 결과가 달라지는 보스턴에서 이 사건은 ‘비밀’이 됐다.
 

시민들이 언론을 견인하다

영화 <스포트라이트>는 이 사건에 기초하고 있다. 미국의 3대 일간지로 꼽히는 《보스턴 글로브》는 지역사회 지배블록의 한 축인 교회를 제대로 감시하고 취재하고 보도하지 않았다. 과거에는 심지어 제보를 덮어버리기까지 했다. 영화는 이 관계에서 자유로운 편집장이 부임한 뒤 탐사보도팀이 사건을 파헤치고 지역사회를 뒤흔든 보도를 한 과정을 담았다.

그래서 영화에서는 언론의 역할과 기자의 태도가 유독 강조된다. 한국에서 시민들이 군사정권의 보도지침을 폭로한 기자를 응원하고 자발적으로 《말》지를 구독했던 것처럼, 시민들이 《한겨레》라는 신문을 만들고 ‘좌편향 블랙리스트’ 언론들을 계속 호출하고 응원하는 것처럼, 지금 광장의 시민들이 JTBC와 ‘뉴스타파’에 열광하는 것처럼 말이다.

영화 속 ‘모범언론’은 그래서 수준 미달의 언론과 저널리스트가 활약(?) 중인 현실을 더욱 돋보이게 한다. 청와대에 굴종한 공영방송, 삼성 같은 재벌에는 유독 약한 언론, 트래픽만 경쟁하는 인터넷신문 그리고 자기검열에 빠진 저널리스트들 말이다. 

성역을 구축하는 데에만 일조했던 이런 언론들이 갑자기 감시자로 변신한 것은 시민들이 ‘국가 의전서열 1위’ 박근혜를 끌어내리기 위해 광장에 뛰쳐나오면서다. 몇몇을 제외한 대다수 언론은 성역이 무너질 위기를 목격하고 나서야 움직였다. 영화 속 언론과 현실의 언론이 다른 점이 여기 있다. 현실에서는 피해자인 시민들이 언론을 압박하고 견인했다.
 
 

여전히 건재한 성역

문제는 여기서부터다. 언론은 탄핵이라는 정치적 성과를 목전에 두고 전향했지만, 성역이 무너져내리는 상황을 중계하고 지배블록 내 균열을 확인하는 역할만 하고 있다. 세월호 참사, 백남기 농민 죽음, 역사교과서 국정화, 성과·퇴출제, 노동개악, 공공부문 민영화, 핵발전소의 뒷배들…. 진짜 성역은 건재한데도 언론은 관심이 없다.

사적 공간에서 은밀하게 가해진 폭력들과 그 가해자들뿐만 아니라 자본주의 사회에서 벌어지는 착취와 착취자들, 모두가 목격한 가운데 벌어지는 제노사이드와 지배세력들…. 성역은 폭력, 착취, 혐오, 차별의 공간, 주체, 구조들이다. 이 성역들은 서로 끈끈하게 엮여 있다. 오늘 광장에서 무너지고 있는 것은 그 일부의 일부다.

“이게 나라냐”라는 냉소와 분노로 시작한 촛불은 이제 비정규직, 여성, 장애인, 이주민, 성소수자들이 자신의 권리를 전개하는 제2막에 접어들고 있다. “박근혜가 물러나면 우리 삶이 나아지느냐”는 질문은 권력자의 교체만으로 각자의 성역들이 깨지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정확히 지적한다. ‘광장을 넘어서는 운동’을 주문한다.

촛불 이후 시민과 노동자의 권리는 이전과 달라야 한다. 시민들은 광장에서 자신들과 국가의 관계를 바꿔냈지만 지금 시민들 앞에는 박근혜보다 더 높고 공고한 벽들이 있다. 삼성, SK, 현대차, 핵마피아, 극우 관리자들, 국가폭력, 국가정보원, 악덕노무관리자들 같은 성역들이 버티고 있다. 운동은 이곳에서 계속돼야 한다.

이제는 박근혜보다 공고한 성역들에 맞서 저항할 공간을 만들어야 할 때다. 이 운동이 성공하려면 언론이 달라져야 한다. 시민들이 국가와의 관계를 재정립하는 것처럼 언론은 그 동안 유착해온 성역과의 관계를 끊어내야 한다. 언론이 스스로를 바꾸는 운동을 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그래야 촛불이 진짜 성역들 앞에서 재점화될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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