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광주전남지부


사회운동

사회진보연대 계간지


2001.11.2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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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럼비아2.HWP

푸토마요 지역과 플랜 콜롬비아

Cecilia Zarate-laun | 콜롬비아지원네트워크
번역: 장한일 (사회진보연대 한반도위원회)

2000년 말 미국의회와 클린턴 행정부는 ‘플랜 콜롬비아’라고 불리는 광범위한 차원의 프로젝트를 통과시켰는데, 그 목표는 콜롬비아의 남서부에 위치한 푸투마요(Putumayo)에서 군대를 훈련시키고 군사장비를 지원하는 것이다.
푸투마요는 콜롬비아와 페루의 자연적인 경계지역으로 서부에서 동쪽으로 흐르고 있는 강 이름에서 유래하였다. 332,434의 인구를 가진 것으로 알려져 있고, 우림 지대와 3개의 지역으로 구분된다. 이 지역에는 오랜 기간 주요한 교통수단으로 사용되었던 푸투마요 강과 카쿠에타(Caqueta)강이 있다. 1985년 조사된 바에 따르면 11,900의 원주민이 살고 있다.
푸투마요가 식민지가 된 것은 16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데, 금을 찾기 위해 스페인인들이 침략해서이다. 카톨릭 선교사 등은 잉카 제국의 후예들인 이 지역 원주민들을 이용해서 정착지를 건설했다. 19세기경 콜롬비아 정부는 스페인 선교사들이 푸투마요 지역의 ‘크리스찬 문화’를 이식시키도록 승인했다. 이러한 콜롬비아 정부의 합법적인 대행자들은 1980년까지 원주민들의 공동사회를 파괴할 것을 목표 하였으나 1958년 콜롬비아 원주민들의 투쟁의 결과로 변화하기 시작했다.
1993년 발표된 푸투마요에 대한 보고서에 따르면 이 지역의 경제 발전은 대부분이 폭력적으로 점철된 6단계로 구분할 수 있다.

1. 고무 경제(Rubber Economy): 19세기 말부터 1920년대까지로써 세계경제에 아마존 경제가 통합되기 시작한 과정이다. 주로 영국인의 수중에 있던 고무 농장은 강을 따라 있었고 이 강들은 생고무를 운송하는데 주된 운송통로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말레이시아에서 고무가 싼 값에 생산되면서 푸투마요의 고무산업은 쇠퇴하기 시작했다. 고무 산업의 발전과정에서 Casa Arana라는 회사에서 일하는 수천의 원주민들이 죽었다. 페루의 판사 Carlos Vlcarcel이 리마에서 발행한 책에 따르면 10년 동안 고무 농장에서 2만 명이 죽었다고 한다.

2. 국경 경제(Frontier econmy): 1933년 콜롬비아 정부는 아마존에 대한 권리를 지키기 위해서 페루와 싸운 뒤에, 이 지역에서의 방위와 군사력를 강화시키기 위해 인근 지역에서 푸투마요로 농민을 이주시켰다. 콜롬비아 정부는 Puerto Leguizamo라는 마을을 건설하기 시작했고 이 지역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기 위해서 Florencia와 Pasto로 이어지는 도로를 건설했다.

3. 1950년대의 경제(The econmy of the 1950s): ‘폭력의 시대’(1946~1957)로 알려진 콜롬비아의 이 기간 동안, 혼돈과 제도적 무질서 속에서 20만 명이 죽었고, 이는 푸투마요와 같은 멀리 떨어진 지역으로의 폭력적인 이주를 낳았다. 콜롬비아에서 가장 기름진 땅은 도시의 소수 몇몇의 손에 집중되었다. 그리고 아마존 지역이 기름진 땅이라는 잘못된 믿음에 따라 이 지역으로 수많은 농민들이 이주하였다. 그러나 도로와 자본의 결핍, 토지의 낮은 생산성들은 이 지역 정착민들로 하여금 환멸을 느끼게 하였다.

4. 1960년대의 경제(The economy of the 1960s): 1960년대의 푸투마요의 발전은 석유 붐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이것은 도로를 건설하게 하였고, 마을은 성장하기 시작했고 행운을 찾아 이 지역으로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1963년 석유 시추가 시작되었고, 1973년 Texaco는 석유매장지역을 정부에 반납하는데 합의하였으며, 이에 따라 국영석유회사(ELO-PETROL)가 발전하였다. 이 기간동안 이 지역 인구는 석유매장지역의 노동자들과 곡물(옥수수, 카사바, 바나나 등)을 키우기 위해 강 계곡에 모여 사는 농민들로 구성되어 있다. 불행하게도 이런 식민화의 역동적인 과정에서, 국가는 유용한 서비스를 제공하거나 농장과 시장을 연계하는 도로를 건설하거나 혹은 시민들의 안전을 보장하는 활동을 한 적이 없다.

5. 코카 경제(The coca economy): 1970년대에는 불법적인 코카(coca)재배가 수많은 사람들을 끌어들였고, 코카 경제는 석유 붐에 의한 것보다 많은 돈을 벌어 주었다. 콜롬비아 정부는 합법적인 작물을 재배할 수 있는 기술과 금전을 지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The Cali and Medellin Cartels(마약카르텔)는 농민들에게 코카를 키우도록 하였고, 이를 통해 이득을 취하였다. 2000년 3월, 콜롬비아에서는 12만 헥타르 이상의 코카를 재배하고 있었으며 푸투마요의 농민 60%인 5만 명이 이 작업을 하고 있다. 100일마다 1헥타르에서는 1250킬로의 코카 잎을 생산하는데, 1킬로의 분말 코카를 생산하기 위해서는 568킬로의 코카 잎이 필요하다. 결국 평균적으로 1헥타르에서 2.2킬로의 분말 코카를 생산한다는 의미이다. 1993년 1킬로의 코카가 600달러였으며 영국에서는 10,500달러에서 40,000달러 정도에서 판매된다. 콜롬비아 농산성에 따르면 분말 코카를 사는 사람이 지불하는 1000페소 가운데 콜롬비아 농민들에게는 겨우 6페소만 돌아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코카를 생산하는 농민들은 전통적인 작물을 생산하는 것보다 더 큰 이득을 볼 수 있다.

6. 최근 경제(The current economy): 푸투마요의 최근 상황은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그리고 전략적 요소들의 혼합 상황을 반영한다. 게릴라와 민병대 그리고, 콜롬비아 정부는 푸투마요의 땅과 자원들을 분할하고 있다. 콜롬비아 정부는 플랜 콜롬비아를 통해서 미국이 자신의 생산물을 팔거나 이 지역의 원자재들(특히 광물과 열대유림)을 접근하려는 미국의 이해관계를 충족시키고 있다. 미국정부는 특별히 남미에서의 ‘안정성’을 증진시키는데 큰 관심을 기울이는데, 이는 미국의 주요 무역 파트너인 브라질이나 석유공급지역인 베네주엘라와 같은 인근 지역으로 폭력과 무질서를 전파하는 결과를 막기 위해서다.


인권의 침해

1980년대 푸투마요에서 전쟁은 시작되었고 코카작물 재배나 게릴라 출현과 관련있는 사람들이 이 과정에서 죽었다. 페루와 에콰도르 경계에 푸투마요가 있어서 코카 운송에 최적의 경로로 이용되었고 운송을 지키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무장하였다. 농민들과 원주민들은 코카 잎의 높은 가격으로 많은 돈을 벌었으나 그들의 전통적 삶은 변화했고, 갈등을 해결하기 위하여 폭력적 방법을 사용하는 빈도가 늘어났다.
지방의 권력은 자유주의와 보수주의라는 부패한 두 개 정당 정치인들 손에 있었다. 국가적 수준에서도 똑같다. 석유 산업으로 높은 수입이 있었지만, 이들 정치인들은 주변지역을 위한 전기발전이나 전화, 정수 사업과 같은 것에 투자하지 않았다. 그들이 도로를 짓는다 하더라도 석유 산업이 발전한 마을을 연결하기 위한 도로 건설만 했을 뿐이다. 1983년 FARC(콜롬비아무장혁명군)는 마약왕들의 폭력으로부터 농민과 원주민 그리고 정착민을 보호하기 위해 푸투마요에 32번째 부대를 설치했으며, FARC는 거대한 마약상들의 소란을 불러일으킨 ‘그라마제(gramaje)'라고 불리는 세금을 책정했다.
1986년, 특히 푸에르토 아시스 지역에서는 애국연합(the Union Patriotica, UP)이라는 합법적인 제3의 정당이 매우 강력하였다. UP는 공산당, 무기를 내려놓고 정치의 장으로 뛰어든 FARC 게릴라, 다른 그룹의 활동가, 그리고 다른 두 개의 전통적인 당으로 인해서 불행해진 사람들 등등의 정치적 입장을 대변하는 당으로 발전했다. 만약 누군가가 Voz라는 콜롬비아 공산당의 소식지를 가지고 다닌다면 그것은 자신의 생명을 위험스럽게 만드는 행동이다. UP의 지지자들은 자동적으로 게릴라나 그들의 동조자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1989년 3월 4일 푸에트로 아시스에 있는 UP의 본부는 수색 당했고 그들의 책들은 처분되었다. 리고베르토 토레스 라는 UP의 협력자는 경찰에 의해서 살해되었고 12명의 UP 활동가들이 처형되었고 나머지는 다른 지형으로 추방되었다. 이 모든 것들은 마약상들의 돈으로 무장한 군대나 민병대들에 의해 UP를 제거하기 위한 작전의 일환이었고 결국, 1989년 UP는 정치 무대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1980년대에는 ‘푸투마요의 시민운동‘이라는 두 번째 움직임이 조직되기 시작했다. 그들은 다원주의적이며 게릴라들을 도와준다는 의심를 받았다. 1987년 이들의 지도자가 살해되었으며, OZIP라는 원주민 운동의 지도자 15명이 처음 4년 동안 살해되었다. OZIP은 콜롬비아 정부를 압박함으로써 땅에 대한 권리나 기술적인 지원 혹은 인권의 신장과 같은 것들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그러나 정부는 원주민들을 잠재적인 게릴라로 인식하였고, 결국 반란자들과 내통했다는 이유로 이러한 풀뿌리 운동들을 압살하고 말았다.
1987년 민병대 본부는 푸에르토 아시스 근처에 있는 엘 아줄에 세워졌는데 이들 민병대는 메데린 카르텔, 로드리구에즈 가차와 같은 마약왕들의 개인적 군대였다. 국가의 지도층은 이러한 민병대 본부가 있는 것에 대해서 비난했지만, 마약에 대항한 전쟁은 중간 정도 크기의 마약상들에게만 제한되었으며, 이러한 전쟁은 정부가 마약에 대항해서 무언가를 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일종의 쇼에 불과했다. 이 지역의 경찰들은 이미 매수된 상태였다.
마약거래상들과 FARC 간의 초기관계는 일종의 협조관계였으며, 상대방에 대한 공격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FARC의 제32부대의 조직원 2명이 엘 아줄에 있는 공항의 통제권을 획득했고, 그들은 공항을 보호해준다는 명목으로 세금을 내라고 요구했다. 로드리구에즈 가차에 의해서 고용된 저격수가 그들을 죽였고 FARC와 작은 게릴라부대인 EPL은 엘 아줄 공항을 공격했다 하지만 이들은 전투에서 패배했다. 1990년엔 FARC가 이 지역을 다시 장악했으며 그곳의 민병대 60명을 죽였다.
콜롬비아 정부군이 시민들을 괴롭히고 있을 때 행정 기관은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채 이러한 문제들을 묵인했다. Los Combos라고 불리는 그룹이 이 지역 대부분을 통치했으며 마약상들의 정치적 경제적 권력은 날로 막강해졌다. 자유주의와 보수주의 그룹의 활동가들은 좌파나 혹은 그들에 대항하는 반대세력을 억압하기 위해 민병대와 동맹을 맺었고 푸에르토 아시스의 경찰 책임자는 민병대의 훈련 센터를 묵인하고 그들이 이 지역에서 활개치는 것을 용인해서 민병대의 공범자라는 비난을 받게 되었다.
다른 인근 지역에서 온 200여명 정도의 젊은이가 민병대 훈련 센터에서 훈련을 받고 있으며, 로드리구에즈 가차가 암살된 후 민병대들은 카를로스와 피델이라는 카스타노 형제의 지도력 아래 놓이게 되었다. 카를로스 카스타노는 오늘날 AUC라는 전국적으로 악명 높은 이 나라 최대의 민병대의 지도자이다.
인권 상황은 계속 악화되었고, 1991년 1월 23일 모코아에서 5킬로 떨어진 Las Palmers rural school이라는 학교에서는 대학살이 발생했다. 게릴라라는 의심에 의해서 5명이 처형되었는데 희생자 가운데에는 25살 먹은 선생님도 있었다. 그 선생님은 학생들이 보는 앞에서 죽었는데, 아이들은 그가 선생님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러나 관련자는 그들 모두가 게릴라였다고 말했으며 그들을 죽인 콜로넬 린나레스(Colonel Linares)는 그들이 석유 파이프라인을 폭파하려 했던 게릴라였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푸투마요 정부의 한 사람이 이 이야기를 반박하였고, 그는 희생자들을 알고 있었으며 모코아에는 파이프라인이 없다고 말했다.
이 모든 사건들은 주민들을 두렵고 불안하게 했으며 우울하게 할 뿐만 아니라 분노하게 했는데, 이는 시민으로서의 권리를 정부가 전혀 신경 쓰지 않은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1990년 콜롬비아 대통령 가르비리아는 위원회와 실무그룹을 형성하였고, 새로운 헌법 제정을 논의하기 위해 모든 시민들이 참가할 수 있게 했다. 푸투마요에서 열린 마을 회의에서 마을 주민들은 지역 정부의 행정력의 부재를 비난했을 뿐만 아니라 마약상들과 민병대와의 밀월관계 그리고 마을 주민들을 지켜주는 것에 실패한 점 등을 성토했다. 새 헌법을 승인하기 위한 국민투표가 실시되는 날, 정부군은 FARC 공격했고 FARC는 이에 대해서 국가의 주요 경제시설을 파괴하는 것으로 화답했다.

푸투마요의 최근 상황

1998년 민병대는 다시 푸투마요 지역으로 돌아왔으며 이들은 현재 이 지역의 대부분을 점령하고 있다. 민병대는 도시 지역을, 게릴라들은 농촌 지역을 세력권에 두고 있는데 이러한 상황은 무척 어려운 상황이다. 도시사람이 농촌으로 가면 그들은 민병대나 민병대의 협력자로 낙인찍혔고, 농민이 도시로 오면 즉시 게릴라로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경우에 그들은 죽임을 당하게 되는데 결국 1999년 푸투마요에서 13번의 대량학살과 77명이 숨지는 사태에 이른다.
1980년대에는 코카의 가격이 수요와 공급이라는 시장에 의해서 결정되었지만 오늘날은 민병대와 게릴라에 의해 코카의 가격이 책정되는 듯 하다. 달리 표현하자면 푸투마요에는 시장이 없는 셈이다. FARC는 1킬로의 코카 가격을 책정하고 그들이 승인한 사람에게만 판매를 허용했다. 이는 민병대들도 마찬가지다.
일반적으로 1킬로의 코카인은 약 6800~7700 달러이며, 농민들이 1헥타르로부터 얻는 실제 이득은 약 90달러이다. 그런데 농민들이 옥수수를 재배할 경우 100킬로 당 얻을 수 있는 실제 수입은 4.5달러이다. 게릴라들은 농민들이 곡물을 재배할 경우에만 코카 재배를 허용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또는 게릴라들은 자기들이 통제하고 있는 지역에서의 마약 소비를 금지하고 있다.
1990년대부터 푸투마요의 사람들은 코카 농장 파괴작업에 콜롬비아 군대와 함께 미군 부대를 목격할 수 있었다. 미군부대가 라틴 아메리카의 군인들을 훈련시키기 위해서 푸에르토 레귀자모(Puerto Leguizamo) 지역으로 오던 해의 말부터 이러한 작업을 종종 이루어졌다.
이로부터 우리는 푸투마요에서 식민지 개척자들이 그들의 생존을 보장하는 유일한 농업생산물이라는 이유로 코카를 재배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이 문제의 근원은 기술적 지원이나 금전적 지원 그리고 도로 확충이나 판매 전략 등의 지원이 없는 한 결코 해결될 수 없는 사회적 갈등이다. 주변 지역에서 모여든 푸투마요의 농민들은 코카를 재배하는 것 말고는 어떠한 생존의 대안도 가지고 있지 않다. 결국 군대를 투입하고 하는 것들은 근본적인 해결방안이 아니다.
또한 지역 사회는 여러 가지 문제로 시달리고 있는데 아이들은 공부를 하지 않고 코카 농장에서 일하는 일꾼이 되려하고 있다. 게다가 지금 코카농장에 대한 제초제가 살포되는 상황에서는, 다수의 사람들이 게릴라가 되길 원하고 있다. 농민들은 평화적인 수단으로 대체작물을 키우는 것을 선호하고 있으며 기술적이고 재정적인 지원을 바란다. 오랫동안 콜롬비아는 불법적인 마약의 생산과 유통 경로라는 점에서 핵심적인 논쟁지역이었다. 1998년 콜롬비아는 UN에서 마약과의 싸움에 관한 새롭고 더욱 균형적인 세계 전략을 세울 것을 국제사회에 요청하였다. 1998년 UN은 “대안적 발전”(alternative developement)에 초점을 맞춘 새로운 합의에 도달했다. 콜롬비아에서 생존을 위해 불법적인 코카 재배를 해야만 했던 사람들에게 사회경제적 대안을 제시하는 것이다. UN 역시 다른 지역으로 불법적인 작물의 재배가 옮겨지는 것을 막기 위해 국가간 협력과 이들 농민들의 고용을 위한 새로운 방안 창출을 강조했다.
1998년 파스트라나 대통령은 마약과 관련한 새로운 계획을 공개했는데, 여기에는 불법적인 작물을 수공업적인 방법으로 제거하는 것도 포함되어 있다. 이 계획은 사회적 측면을 강조하고 경제 인프라의 구축 그리고 인권의 신장에 초점을 두었다. 그러나 1999년 말 이 계획은 평화 건설이라는 논리에 따라 뒤집어 졌고, 결국 미국과 쌍무적으로 합의된 플랜 콜롬비아의 일부가 되고 말았다. 마약과의 전쟁은, 억압적이고 군대에 의해 해결되는 형태를 취하게 되었으며, 미국의 국가적 안전을 보장한다는 취지에 따라 주도되었을 뿐, 콜롬비아 자체의 필요성이나 유엔에 의한 외교적 노력에 대해서는 거의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플랜 콜롬비아의 70퍼센트가 전투용 헬기를 사고 복잡한 정보 장비를 구입하거나 군대를 훈련하고 무장하는데 지출되었다. 뿐만 아니라 제초제를 뿌리고 코카 작물의 성장을 공격하는 생물학적인 방법도 동원되었다.
그런데 푸투마요와 같은 지역은 전형적인 아마존 우림 지대로서 이 지역을 파괴하는 것은 생물학적인 다양성을 침해하는 행위이다. 열대 우림을 베어내고 강과 물 그리고 토양을 파괴하여 동식물이 성장할 수 있는 자연 조건들을 빼앗는 행위들이 자행되었는데 이러한 행위를 삼중의 파괴라 불렀다. 코카가 자라면 제초제를 뿌리고 다음엔 농부는 다른 지역으로 이동해서 다시 코카를 키우는 악순환이 끊이지 않는 것이다. 콜롬비아 정부의 전문가가 제시한 자료에 따르면 코카 1 헥타르 당 열대 우림 4 헥타르가 파괴되었다. 제초제는 미생물을 죽이는데 이러한 파괴는 자연의 생물학적인 순환 고리를 끊는 행위이다. 제초제 안에 있는 화학 성분이 퍼지면서 토양을 비롯한 자연 환경이 변형, 파괴되었고, 이는 인간이 식용으로 할 수 있는 작물의 성장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또한 농민들도 제초제에 의한 육체적 고통을 호소하고 있다.
2001년 1월 푸투마요는 플랜 콜롬비아의 주요 공격 대상이 되었고, 파괴적인 제초제 살포가 이루어졌다. 세계는 푸투마요가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는 지옥이 되도록 결정했으며, 그곳에 사는 사람들을 희생자로 만들자고 결정했다. 당장 급히 필요한 것이 사회적 해결 방안인 때에, 그들은 군대로 문제를 해결하고 있다. 그로 인해서 주민들의 모든 권리가 파괴되었다. 이는 가난한 자들이 자신의 나라에서 천민으로 전락하게 만드는데 있어, 플랜 콜롬비아가 어떻게 기여했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사례가 될 것이다.(Z Magazine 200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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