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광주전남지부


  • 오늘평화
  • 2017/04 제27호

너븐숭이와 평화공원, 제주의 두 4·3기념관을 가다

69주년 제주 4·3 항쟁을 맞아

  • 박상은 편집실
오래 전 인상 깊게 본 다큐멘터리가 있다. 재일조선인의 남한 방문이 잠시 허가된 시기, 한 여성이 몇 십 년 만에 고향을 방문하는 과정을 그린 다큐멘터리였다. 그녀가 몇 십 년 만에 방문한 고향은 바로 제주도. 그녀는 일제시기가 아니라 4.3 때 제주도를 떠난 여성이었다.
 
돌이켜보면 그 다큐멘터리와, 대학에 들어와서 배운 ‘잠들지 않은 남도’라는 노래, 몇 년 전에 본 영화 ‘지슬’, 그 외에 지나가며 얻어 들은 ‘남조선노동당 제주도당’이라는 이름이나 ‘양민’ 강조의 문제점 등등이 내가 4.3항쟁에 대해 가진 기억의 거의 전부인 것 같다. 
 

열흘간의 제주도 여행. 당분간 이런 기회는 없을 테니 이번에야말로 4.3과 관련한 장소를 보고 오자고 생각했다. 두 곳의 기념관에 다녀온 뒤에 내가 얼마나 ‘알고 있다’는 착각에 빠져 있었는지 깨달았다. 해방정국의 조선에 대해, 제주도에 대해, 4.3에 대해, 나는 아는 것이 별로 없었다.
 

너븐숭이 4.3기념관

한라산 기슭 봉개동에 있는 4.3평화공원과 조천읍 북촌리에 있는 너븐숭이 4.3기념관. 이번 나의 목표는 이 두 곳이었다. 어디를 먼저 갈까 고민하다 너븐숭이 4.3기념관으로 향했다.
 
제주시내에서 버스를 타고 30여분을 달리면 북촌리에 도착한다. 내릴 정거장을 놓쳐 한 정거장을 더 간 덕분에 북촌초등학교를 지나, 4.3길을 따라 걸으며 기념관에 가게 되었다. 처음 만난 것은 흰색과 붉은색 리본으로 된 4.3길 표식. 나중에 알고 보니 이는 최근 북촌리 인근에 새롭게 조성된 길이었다. 거대한 돌무덤을 지나 조금 가니 ‘옴팡밭’이 나온다. 4.3 당시 시신이 밭에서 뽑아 던져놓은 무처럼 쌓여있던 곳이라고 한다. 설명을 읽고 뒤돌아서니 ‘순이삼촌 문학비’가 보인다. 바닥의 돌들은 아무렇게나 엎어져있던 시신을 상징한다고 한다. 그 이야기를 듣고 문학비 주변을 보니 정말 그래 보인다. 눈물이 왈칵 났다.

조금 더 기념관 쪽으로 걸어가면 위령비가 나온다. 위령비 너머로 푸른 바다가 보인다. 바다가 보이는 아름다운 풍광과 하룻밤 사이 수백 명이 희생된 역사가 한 곳에 존재한다는 것 자체로 비극이 더욱 사무치게 다가왔다. 위령비와 각명비 뒤의 시를 읽고 있으니 다시 한 번 눈물이 났다.
 
 
기념관 바로 옆 애기무덤을 지나, 너븐숭이 4.3기념관으로 향했다. 너븐숭이 기념관에는 4.3사건 중 가장 희생자가 많았던 북촌리 사건에 대해서 주로 설명이 되어 있어 4.3 전반에 대해서 알기는 어렵다. 대신 북촌리 지역의 이야기를 자세히 살펴볼 수 있다. 40여 년이 지나 문민정부가 들어선 1993년에야 마을에서 자체적인 조사위원회가 꾸려졌다는 기록을 보면, 내 가족과 이웃이 희생자라고 말 한마디 하지 못한 긴 세월이 어떠했을지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된다. 손글씨로 쓴 조사록을 보니 더 애잔한 마음이 들었다.

기념관을 보고 있으니 몇 가지 궁금증이 생겼다. 남로당 제주도당이 1947년 4월 3일에 무장투쟁을 선포한 이유, 해설을 해주신 할아버지가 이 기념관을 나서면서 4.3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이유 등 … 그 의문들은 4.3평화공원에 가서 풀렸다. 
 

4.3평화공원

4.3평화공원은 상당히 규모가 큰 시설이다. 기념관을 먼저 돌아보고 공원으로 갔다. 기념관에는 일제 말기 섬 전체가 참호가 된 제주도의 상황부터, 해방정국과 미군정의 정책 등이 자세히 설명되어 있고, 4.3 전에 일어난 3.1운동 기념식에서 경찰의 발포 등도 언급되어 있다.  이는 4.3이 어떤 배경에서 일어나게 되었는지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무장대 지도부 김달삼과 경비대 제9연대장 김익렬과의 평화협상 등 학살을 피할 길이 있었고, 그것이 어떻게 가로막혔는지 구체적으로 해설하고 있다. 3만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희생되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는 사실을 생각하니 더욱 마음이 아팠다. 기념관을 꼼꼼히 돌아보는 것 자체로 4.3에 대해 많은 내용을 알게 된다. 대충 훑어보지 말고 꼭 찬찬히 돌아보길 바란다.

기념관뿐 아니라 공원도 반드시 들러야 한다. 기념관 정문으로 나와 조금만 걸어가면 위령비가 나온다. 지금까지 만난 위령비와는 다르게 규모가 매우 크다. ‘정부가 돈을 들여 만들면 이 정도 규모까지도 되는구나’ 따위 생각을 하다 가까이 가니 ‘아, 이래서!’ 라고 혼잣말이 터져 나왔다. 위령탑 주위를 둘러싼 검은 비석들이 단순한 조형물인줄 알았는데, 희생자의 이름이 적힌 각명비였던 것이다.

각명비에는 내가 이번에 제주도에 와 처음으로 익힌 지명들 밑에 수많은 희생자들의 이름이 적혀있었다. 기가 막힌다. 내가 이런 땅을 멋도 모르고 밟고 다녔구나. 남원과 위미가 좋다느니, 애월과 세화바다가 예쁘다느니 하면서. 각명비에도 이름이 적히지 못한 사람들도 꽤 많다고 하니 마음이 아팠다. 북촌리에서도 마찬가지였지만 ○○○자, ○○○처 라고 적혀있는 사람들이 종종 눈에 띈다. 저 두 살배기 아이는 그 때까지 이름이 없었을까. 아니면 동네주민들이 누구네 집 자식과 부인은 이름을 몰랐을 수도 있지. 이들의 이름을 증언해줄 사람도 없었던 것이다.
 

‘비설’이라는 조형물도 꼭 돌아보고 와야 한다. 한라산에 피난을 갔다가 동사한 어머니와 어린아이의 사연을 형상화한 이 조형물에서 감동받고 눈물 흘린 사람도 많다고 하는데 나 역시 가슴이 먹먹했다.

기념관을 다 보고 내려왔는데 숙소로 돌아가는 버스가 2시간 뒤에나 도착한단다. 인적 드문 길을 한참 터벅터벅 걸어내려 왔다. 혼자 걸으면서 할 수 있는 일은 생각 뿐.

새로운 사실을 알았더니 새로운 질문이 또 생긴다. 제주도의 인민위원회 활동, 무장대에 대해서도 더 알고 싶다. 남한 단선단정(단독선거·단독정부) 반대 흐름과 제주읍에서의 선거 무산에 대해서도 설명이 충분치 않다.
 
  

백비[1]

서울에 올라와 ‘노동자역사 한내’가 만든 자료를 받아 보았다. 역시나 몰랐던 내용이 튀어나온다. 전국적으로 열린 1947년 3.1운동 기념식에 어떤 배경이 있었는지, 또 제주도에서의 경위도 더 자세히 나와 있다. 무장대 지도자 이덕구의 삶에 대해서도, 또 가족묘가 조성되어 있다는 사실도 새로이 알게 되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여전히 잘 모르겠다. 4.3은 뭘까. 7년간의 긴 시간 동안 지속된 4.3의 성격은 무엇인가. 항쟁이라면 그 속에서 어떤 평가를 남겨야 하는가. 평화와 상생의 섬으로 거듭나자는 말로는 풀 수 없는 수많은 고민들이 여전히 꼬리에 꼬리를 문다. 이래서 기념관에 들어서자마자 ‘백비’가 있었던 것인가. “언젠가 이 비에 제주 4.3의 이름을 새기고 일으켜 세우리라” 4.3이 어떤 이름으로 새겨져야 할지 아직 모르겠는 나는, 아무래도 다시 제주에 가야겠다. ●
 
 

Footnotes

  1. ^ 어떤 까닭이 있어 글을 새기지 못한 비석
오늘보다 나은 내일을 향한 우리의 전망, 오늘보다
정기구독
주제어
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