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광주전남지부


  • 특집
  • 2017/05 제28호

외환위기 이후 20년, 여성·가족 정책 변천사

  • 김경민
장면 하나.
30대 비혼 여성 A씨는 한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싱글들한테는 혜택이 없어요. 들어갈 데가 없어요. 돈이 많으면 문제가 아닌데, 내가 당장 뭐 결혼을 안했다고 해서 길에 살아야 하는 건 아닌데. 혼자 살면 결혼 준비 중인 사람처럼 대접받는 것 있잖아요. 너무 불쾌하죠.” (유정미, <독립과 연대로 준비하는 노후>, 2012) 

장면 둘.
50대 후반의 여성노동자 B씨는 요양보호사로 일한다. 그녀는 환자를 돌보다 발을 헛디뎌 넘어지면서 팔을 크게 다쳤다. 그러나 병가를 낼 수 없어 깁스를 하고 환자를 돌봐야 했다.
“요양보호사나 청소원, 미화원 말고는 이 나이에 선택권이 없다”고 한다. (잘릴까봐… 아파도 숨겨야하는 서글픈 ‘인생 이모작’, 《국민일보》)

장면 셋. 
광주에서 혼자 살고 있는 70대 여성 C씨는 시장에서 김치를 훔치다 잡혔다. 
“배가 고픈데 먹을 게 없어서”였다. 그녀는 노인기초연금 20만원을 지원받아 15만원을 월세로, 나머지 5만원을 식비로 사용했다고 한다. (“배 고파서”…빈곤 70대 노인, 김치 절도 입건, 《머니투데이》) 
 
가족의 해체가 남의 이야기가 아니게 된 요즘이지만, ‘가족’이 기본생활을 책임져야 한다는 믿음과 ‘여성의 자리는 가족’이라는 인식은 여전히 우리 삶을 지배하고 있다.

4인 가족을 중심으로 한 복지정책은 1인 가구를 사각지대로 내몰고 있고, 여성은 가정을 꾸려 출산을 하더라도 이후 노동시장에 복귀하기 쉽지 않다. 복귀 한다 하더라도 선택지는 주로 비정규직·시간제 일자리다. 노동시장에서의 임금격차는 연금격차로 이어져 여성 노인은 빈곤에 더욱 취약하다. 

한국에서 가족은 부족한 국가 복지 기능의 완충지로 존재해왔다. 사회적 재생산의 공간으로서 가족은, 여성을 ‘최후의 복지 제공자’로 여겨왔고, 여성의 희생을 당연시했다. 재생산 노동은 의심할 여지없이 여성의 몫이었으며, 일부 고임금 노동자를 제외하면 여성도 노동시장에서 임금 노동을 하는 경우도 상당했다. 

IMF 외환위기 이후 본격화된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은 이전에도 어려웠던 여성의 삶을 파탄냈다. 여성의 희생은 더 이상 감내하기 힘든 수준에 이르렀다. 
 
이는 가족의 위기, 재생산의 위기로 드러났다. 이 시기부터 저출산·가족 해체 현상이 사회적 문제로 대두됐다. 이를 해결하고자 다양한 여성정책이 제시되어 왔지만 지금까지 ‘워킹맘’의 절규는 이어지고 있으며, 결혼 제도 밖의 여성들 역시 고단한 삶을 이어가고 있다. 

아래에서는 이러한 현실과 제도 사이의 모순이 본격화 되었던 IMF 이후 가족이 어떻게 유지되어 왔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김대중 정부: 일도 잘하고 집도 잘 돌보라

IMF와 함께 들어선 김대중 정부는 1999년 <새천년을 향한 생산적 복지의 길: 국민의 정부 사회정책 청사진>을 발표하고 여성정책의 근간을 모성보호, 직장·가정의 양립 지원, 평등고용 세 가지로 제시한다. 

IMF 이후 대다수 국민의 삶은 나빠지고 있었으나 비정규직화·빈곤화의 경향은 특히 여성에게 두드러졌다. 본격적으로 시행된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에서 일차적인 정리해고 대상은 여성이었다. 기업들은 ‘생계부양자’는 남성, ‘가사 담당자’는 여성이라는 인식 아래에서 맞벌이 여성, 장기근속 여성을 가장 먼저 인력감축 대상으로 결정했다. 

결과적으로 다수의 가정에서 소득이 줄어들었고, 이를 보충하기 위해 여성은 ‘생계보조자’로서 저임금, 불안정 노동시장에 뛰어들어야 했다. 구조조정 과정에서 일자리를 잃었던 정규직 여성은 비정규직으로 재취업했다. 가사노동과 육아의 일차적 책임이 여성에게 있다는 생각은 변하지 않았으며, 여성이 뛰어든 노동시장은 말 그대로 기울어져 있었다. 시간제, 비정규직, 저임금 일자리가 여성들을 기다렸다.   

2001년, 여성 정책은 또 다시 전환을 맞이했다. 휴가 정책과 보육 정책에 대해 국가가 현금 및 서비스 지원을 본격화한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국공립시설 확충, 차등적 보육비 지원 등이 있다. 이를 “일·가족 양립의 책임을 여성과 가족에게 전담했던 과거의 가족의존적인 성격에서 탈가족주의로의 변화”로 정책방향이 전환되었다고 평가하기도 하지만, (전윤정, <휴가정책·보육정책으로 본 한국 일가족양립정책의 형성과 변화>,) 결국 한국에서 보육정책은 시장화된 서비스공급구조로 정착됐다고 보는 게 설득력있다. 

가사노동과 육아의 사회적 책임을 통한 탈가족화의 실현은 달성이 요원했다. 
 

노무현 정부: 결혼하고 출산해야만 건강가정

2004년 노무현 정부 하에서 ‘건강가정기본법’이 제정된다. 이혼, 저출산 등으로 해체상황에 직면한 가정문제에 국가가 직접 개입하고 지원하고자 만들었다는 이 법에서 가족은 “혼인, 혈연, 입양으로 이루어진 사회의 기본단위”로 정의되며, “모든 국민은 혼인과 출산의 사회적 중요성을 인식하여야 한다”고 명시되어 있다. 

2년 뒤인 2006년에는 제1차 저출산고령사회기본계획(새로마지플랜2010)이 제출된다. 이는 중앙정부 차원에서 처음으로 공식 발표된 저출산 대책으로, 경력단절 여성 재취업·수요자 중심의 보육 지원 등이 포함되었다.

2000년대 이후 저출산이 사회적인 문제로 대두되면서 이를 해결하기 위해 (출산을 전제한) ‘가족’을 강조하고, 보육정책을 확대하고자 한 점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건강가정기본법’은 건강한 가정을 기존의 핵가족(+부양할 노부모)으로 재정의함으로써 이미 존재하고 있는 다양한 가족의 모습을 ‘건강하지 못한 가족’으로 만드는 억압적 발상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또한 사회서비스 시장화를 중심으로 한 일·가족 양립의 지원 기조로 인해 여성의 재생산노동을 보편적 서비스가 아니라 시장화된 서비스로 대체했고, 이러한 사회서비스 일자리는 노동시장에서 다시 여성의 몫이 되었다. 저출산, 고령화, 가족의 해체 등을 해결하고자 제시된 정책들은 다시 이 불안정 요소들을 여성을 활용해 완화시키려 한 것이다.   
 

이명박·박근혜 정부: 퍼플잡과 고용율 70% 달성 로드맵 

이명박·박근혜 정부의 정책 역시 이전까지의 기조를 유지하는 수준에서 제시됐다. 이명박 정부는 ‘퍼플잡’ 정책으로 탄력적 근무제도를 도입해 여성이 일하면서도 직장과 가정을 모두 지킬 수 있도록 했다. 그러나 탄력적 근무제는 노동시장에서 남녀의 분리를 강화하고, 저임금 일자리가 여성에게 집중되도록 한다. 또한 공공보육 시스템을 충분히 갖춘다면 굳이 여성에게만 탄력적 근무제를 도입할 필요가 없다.

박근혜 정부는 ‘고용율 70% 달성을 위한 로드맵’을 발표하면서 이를 위해 여성 취업 유도가 핵심적이라고 밝혔다. 그 중에서도 특히 경력단절여성의 재취업을 강조했다. 그러나 경력단절여성이 선택할 수 있는 일자리는 주로 사회서비스 일자리이다. 사회서비스 일자리는 주로 여성이 사회로 나오면서 생기는 돌봄의 공백을 메우는 자리이며, 그 가치가 평가절하 되어 있어 불안정한 일자리인 경우가 다수다. 이렇듯 가시적인 수치에만 몰두하는 정책으로는 여성의 자립이 불가능하다. 오히려 가정 내에서 가사·양육은 여성의 몫이라는 인식을 강화할 뿐이다.
 
 

2017 대선에는? 

앞서 확인했듯 외환위기 이후 지금까지의 여성정책들은 저출산·고령화에 따른 부담을 여성을 통해 완화하고자 하는 시도였다. 결과적으로 여성의 이중부담과 노동의 불안정성을 강화한 셈이다. 그렇다면 2017년 대선에서 제출된 정책들은 어떨까?

눈에 띄는 것은 육아휴직, 보육 관련 공약들이다. 문재인 후보는 남성(배우자) 공동 출산 휴가 기간 확대·아빠 육아휴직 보너스제, 안철수 후보는 성평등 유아휴직제, 유승민 후보는 여성과 남성이 동등하게 육아휴직 제도를 활용할 수 있는 기회 보장, 심상정 후보는 배우자 출산휴가제 기간 확대를 공약으로 냈다. 모든 후보가 육아휴직의 부모 공동 사용을 제시한 것이다. 육아휴직이 남성에게 최초로 확대된 것은 1995년인데, 그럼에도 남성의 사용률이 높지 않았으며 여성들조차 직장 내 분위기 등으로 사용하기 어려웠다.

이런 점에서 관련 공약이 쏟아지고 있다는 사실은 반길 만하다. 특히 여성들이 육아휴직을 사용하기 어려웠던 이유가 휴직 기간 직장 동료의 업무가 과중된다는 점이었는데, 심상정 후보의 ‘돌봄지원인력센터’ 설립은 그러한 문제에 주목한 것이라 볼 수 있다. 또한 국·공립 보육시설의 비율을 높이겠다는 공약 역시 공통분모다. 민간 보육시설의 비중이 높아 대부분의 가정이 부담을 느끼는 가운데, 이 역시 한걸음의 진전이다. 
 

가족의 위기를 넘어

그러나 이러한 육아휴직, 보육 관련 공약은 현재 우리가 처한 문제의 부분적이고 대증적인 해법에 불과하다. 대선후보들의 공약에서는 고용과 노동 부문에서 유연근무제를 도입하겠다는 공약과 임금 보전을 위한 별다른 조치 없는 노동시간 단축이 동시에 제시되고 있다.

여성의 노동을 평가절하한 채로 이뤄지는 일·가정 양립, 출산을 전제로 한 ‘가족’의 상, 그러한 가족에 의존적인 여성·가족정책은 점점 현실과 괴리되고 있다. 저출산의 원인을 여성에게 돌리고, 가족 해체 현상을 위기의 징후로만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이는 자발적·비자발적 독신 가구도 생존할 수 있는 사회, 여성이 가족에 종속되지 않고도 자립할 수 있는 사회, 이성애적 결합을 넘어 다양한 결합이 가능한 사회로 나아가야 한다는 기층의 목소리이기도 하다. 이러한 목소리들을 수렴하는 것이 오히려 ‘위기’를 극복하는 출발점이 될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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