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광주전남지부


사회운동

사회진보연대 계간지


2001.12.2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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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테러리즘, 혹은 테러리즘 반대의 진실

박준도 | 편집부장
“전쟁은 다른 수단에 의한 정치의 연속” (클라우제비츠)
“국가 = 강압(강제)의 철갑에 의해 보호되는 헤게모니(동의)”(그람시)


1. 테러는 범죄다?

9.11 테러 참사와 보복 전쟁 이후 매우 주의 깊게 살펴야 할 것이 있는데, 특히, ‘테러는 범죄다’는 통념이 그렇다. 불행히도 그 통념을 주의 깊게 보는 것은 실시간으로 본 세계무역센터 빌딩이 붕괴되는 참혹한 장면과 일방적으로 전개되는 보복 전쟁의 긴박감으로 거의 불가능했다.
그렇지만, 보복 전쟁부터 시작하여, 모든 정치적 공세가 테러는 ‘범죄’여서 가능했고, 제기된 모든 쟁점(심지어 반전, 평화까지)도 이를 전제하기 때문에 예사롭게 넘길 문제만은 아니다. 테러방지 법안의 ‘테러’ 정의는 매우 당혹스런 것이고, 결코 예사로운 문제가 아니다. 이 위험신호를 모두 인정한다면, 지금 우리가 제기하는 의혹은 매우 정당하고, 또한 중요하다. 지금부터라도 이 통념이 동반하는 이데올로기를 문제삼아야 한다. 적어도 이 순간, 테러가 범죄인지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테러가 범죄라는 통념은 다음을 포함하고 있다. 민간인에 대한 비정상적인 혹은 비이성적인 폭력, 안정된 사회 특히, 미국을 위협하는 체계적인 폭력, 그리고 무엇보다도 대중들의 거부감. 따라서 테러(테러리즘과 동의어)란, 무차별적인 대상(민간인)을 공격하여, 폭력을 전시하고 공포를 조성하여 자신의 목적을 획득하는 극단적인 행위라는 것이다. 테러의 사전적인 정의가 ‘전율스러운 공포’인 것을 비추어보면, 이것은 매우 놀라운 것이다. 이데올로기의 경계가 분명하고, 정의(定意) 자체가 정치적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대상을 구체적으로 제한하고 있다 테러방지법의 ‘테러’는 정의가 모호한 것도 문제지만, 경계가 제한적이고 일방적인 것이 더 큰 문제이다. 사건, 범죄 사실은 모호한데, 적용 대상은 일방적이다. 정부를 향한 모든 행동은 문제 삼을 수 있지만, 정부가 가하는 테러를 규제할 수가 없다는 말이다. 동일하게 미국의 테러방지법은 미국의 테러를 규제하거나 처벌할 수가 없다.
. 여기에는 ‘관제테러’가 빠지고, ‘미국의 테러’도 빠진다. 대다수 관변 학자들이 테러리즘을 특정한 사실(事實) - 프랑스 혁명 당시 자코뱅의 공포정치 - 에서 기원을 찾는 것도, ‘부르주아들로 하여금 공산주의 혁명 앞에서 전율케 하라’는 문구만을 근거로 ‘폭력 혁명 = 테러리즘’으로 규정하는 것도 이 같은 사정 때문이다.
시민사회는 물론이거니와 진보진영마저 이 문제에 대해서만큼은 주의 깊게 보지 않았는데, 이것은 몹시 흥미로운 것이다. 사실, 9.11 테러는 단지 미국만의 문제가 아니다. 많은 논자들이 지적하듯이, 9.11 테러는 미국의 영토를 향한 초유의 공격이라는 점에서, 안전한 전쟁이라는 우상을 파괴하는 역사적인 사건이었고, 이것은 미국 본토(!)의 국민을 두렵게 했다. 하지만, 그 심리적인 파장은 훨씬 넓게 퍼져나갔다. 전 세계의 모든 사람들(특히, 미국의 우산 밑에 있는 사람들)이 세계무역센터 빌딩이 무너지는 것을 생생하게 목격했기 때문이다. 가장 안전하다는 미국의 본토, 심지어 미 국방성조차 공격받고, 미국의 대통령마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황망히 숨어버렸는데, 지구상에 안전한 곳이 어디 있단 말인가? 미국의 언론은 연일 계속해서 생중계로 공포감을 확산시켰고, 미국의 문제로 제한하지 않았다. 테러는 전 세계 모든 시민의 문제였고, 이에 호응하듯 모든 시민은 각 국의 예(禮)를 따라 애도하였다. 그리고 ‘테러에 대한 적의’도 공유했다. 미국도, 해외도 아닌, ‘집에 있는 나도 안전하지 못하다’는 두려움으로 무차별적인 테러에서 자신을 보호해 줄 어떤 것을 요구하였고, ‘국가는 테러로부터 국민을 보호할 의무가 있다’는 이데올로기가 이에 화답하였다. ‘테러 반대, 전쟁 반대’는 이 이데올로기에 결코 자유롭지 않다.
이때, 국가가 사자의 탈을 쓰고 있는지, 여우의 가면을 쓰고 있는지는 다소 모호하다. 그렇기 때문에 국정원이 주도하는 테러방지법에 대해 민주당과 한나라당 소속 의원들조차 의구심을 품고 있다. 그들은 아직 자신에게 행해진 고문, 도청, 감금이라는 국가 테러를 기억하고 있다. 하지만, 국정원이 이것을 여우의 가면이라고 확신하게 할 수만 있다면, 그들은 태도를 바꿀 것이다. 매우 매력적인 선물일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의혹을 제기하는 것은 더더욱 의미가 있다. 테러의 정의가 대 테러리즘 정책이 현실화되면서 형성되었다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말이다. 21세기 테러의 양상을 살피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거꾸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문제의 출발점은 이것이다. ‘대 테러리즘의 진실’. 이것은 다음과 동일하다. 대 테러리즘은 어떻게 국가 테러를 은폐하고 전위시키는가?


2. 저강도 전쟁과 국가 테러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국 강경파(매파)의 견해는 단일하지 않았다. 전략적 조언은 여러 면에서 일치했지만, 기본적인 개념이 달랐다. 전쟁은 본질적으로 군사적 대치 상황이고, 목표는 영토를 장악하거나, 적의 주력 부대를 격파하는 것이라는 고전적인 입장이 있었고, 한편에는, 전쟁이란 근본적으로 두 개의 사회체제 사이의 대립이고 목표는 인민대중이며 적의 정치적․사회적 조직을 파괴하는 것이라는 입장이 있었다. 그린베레, 해병대 등 전술부대가 (군이 아니라) 농민을 상대로 ‘반란진압’을 수행하기도 했지만, 전자의 입장이 사태를 주도하였다. 국방성은 양적인 전쟁을 선호했고, 2차 세계대전 보다 많은 폭격으로 베트남의 절반을 달 표면처럼 만들었다. 하지만, 1968년 1월 구정공세 이후, 그러니까 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이 36개의 지방수도(전체 44개)를 동시에 공격하고, 사이공이 미국 대사관 마당까지 진격하자, 전세는 기울기 시작했다. 비록 미군과 사이공 군대의 반격으로 베트남 민족해방전선 게릴라들의 피해가 더 컸지만, 미국은 정치적으로 그리고 군사적으로도 패배했다. 그리고 그로부터 10여 년 뒤 미국은 ‘반란진압’에 실패했음을 시인한다.
이보다 3년 전인 1965년, 미국은 인도네시아 지도자 수카르노가 매우 위험한 중립주의자임을 확신했다. ‘지도 받는 민주주의 체제’를 이끄는 ‘혁명의 위대한 지도자’는 중국에 보다 친화적이었다. 그리고 군부와 국민당(관료기업자), 이슬람세력(상공업자, 지주, 부농층), 공산당(농민, 노동자)간의 균형을 유지하는 연합정권의 대통령임에도, 공산당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아이젠하워 행정부가 이미 전복을 시도했으나, 실패한 경력도 있던 터였다. 9.30 운동본부가 주도하는 혁명(수카르노가 동의했음이 분명한)이 발발하자, 이를 빌미로 수하르토의 군부와 이슬람세력은 대학살을 시작했고, 곧 이은 반혁명 쿠데타로 수카르노를 실각시켰다. 이때 50만 명 혹은 100만 명의 인도네시아 인민(주로 농민)들을 무참히 살해하였는데, 죄목은 공산당이거나 그들을 지지한다는 혐의였다. 이렇게 해서 비 공산국가 최대 공산당이라는, 당원만 350만이 넘는 인도네시아 공산당(PKI)이 완전히 궤멸한다. 미국은 이 대학살 때 군부에 무기를 지원했고, 공산당원이라며 명단을 넘겼다. 존슨대통령은 “인도네시아 군부를 고무시켜서 기회가 왔을 때 좌파 정당 PKI를 소탕할 수 있게 했다”는 보고를 받았다. 98년, 수하르토가 IMF의 권고사항을 무시할 때까지 미국은 ‘우리사람’이라며 공개적으로 지지했다.
1970년 칠레의 대통령 선거에서 좌파연합의 대통령 후보이자 사회주의자인 아옌데가 대통령 후보에 당선되자, 미국은 신경질적으로 반응했다. 1963년부터 매년 3백만 달러 이상을 쏟아 부으며, 우익 언론과 정당을 지원하고, 선거를 방해하고, 선전을 했지만, 지고 만 것이다. 급기야 군사령관 슈나이더를 제거하고, 직접 쿠데타까지 계획하지만, 이것조차 뜻대로 되지 않았다. 베트남 전 패색이 짙은 때, 칠레 선거혁명이 확산되고, 심지어 이 여파가 프랑스, 특히 이탈리아 공산당에까지 미칠까 전전긍긍해야 했다. 대통령선거 직후, 더욱 노골적으로 자금을 지원하고, 우익들이 파업과 데모로 반혁명 대열을 조직하고, 대대적인 경제 봉쇄로 경제가 어렵게 되었지만, 1973년 신임투표에서 아옌데의 지지율은 오히려 상승했다. 칠레의 우익과 미국은 계획을 바꾸지 않으면 안됐다. 미 국방정보국은 CIA가 실패한 쿠데타 계획을 부활시켰다. 9월 11일 칠레의 해군과 미국의 전함이 때맞춰 합동 군사훈련을 하고 있었고, 피노체트가 주도하는 군부와 경찰은 쿠데타를 일으켰다. 아옌데는 그 자리에서 사살되었고, 수만 명의 정치 활동가, 노조운동가, 농민 등이 재판 없이 처형되거나 실종되고, 암살되었다. 70년대 라틴아메리카에서의 ‘콘도르 작전’은 국가 테러의 정점이다. 최근 공개된 ‘테러 기록 보관소’의 자료에 기반을 두어 이를 추적한 것으로는 본 호에 실린 Pierre Abramovici “라틴아메리카의 더러운 30년 전쟁”을 참고. 아울러 마약분쟁을 빌미로 한 국가 테러 콜롬비아플랜에 대해서는 제임스 페트라스 “플랜 콜롬비아의 지정학”(2001.11) 참고

니카라과에서 미국의 실험(!)은 보다 전략적이고, 보다 근본적이었다. 1979년 니카라과 혁명을 전복하기 위해 미국은 저강도 전쟁의 기본 행동 4가지(경제전쟁, 심리전쟁, 외교전쟁, 그리고 군사전쟁)를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모든 경제원조와 신용은 취소되었다. 대외무역은 통상금지를 강요당했고, 인도주의적 원조마저 제한되었다. 혁명은 빈곤이라는 사실을 확인시켜주기 위해서였다. 콘트라의 라디오 방송은 “산디니스타는 민중을 굶주리게 하고 있고, 모든 식량을 소비에트와 쿠바에 수출하고 있다”는 악랄한 선전만을 했다. 그러나 심리전에서 가장 높은 위상을 차지했던 것은 콘트라의 직접적인 테러였다. 납치와 고문, 암살, 약탈로 인민들이 혁명에 참여하지 못하도록 했다. 이는 자국(미국) 국민에게도 예외가 아니었는데, 니카라과 인민들과의 유대를 방해하기 위해서였다. 산디니스타를 지지하는 선거결과를 왜곡하였고, 사회주의 국가만 지원하도록 해서, 미국의 대외정책을 정당하게 만들었고, 니카라과에 대한 불신을 높였다. 무엇보다도 긴요한 것은 군사전쟁이다. 미국은 오르테가에 저항하는 콘트라 반군을 사실상 조직, 끊임없이 교전상태를 유지하였다. 미 해군은 온두라스 근처에서 각 국과 해상훈련, 기동훈련을 하였고, 범위는 점점 넓어져 콘트라 반군과도 진행하였다. 긴장상태를 유지시킨 것이다 이것의 목표는 분명했다. 하나, 니카라과가 모든 자원을 국방으로 대량 전환하도록 강요하여, 경제를 긴축으로 유지하게 한다. 둘, 대규모 재래식 군대를 조직하게끔 하여, 군 전술에서 민심을 이반시키고 효율성을 떨어뜨린다. 셋, 니카라과로 하여금 외교적으로 고립시킨다. 니카라과 국경 주변의 군사행동은 니카라과로 하여금 ‘늑대다’라고 소리치게 하였다. 니카라과는 미국의 침략이 임박했다고 호소했다. 그러나 그것은 실제로 일어나지 않았고, 아무도 니카라과의 경고를 신뢰하지 않았다. 1983년 10월 미국은 그레나다를 침공하여 혁명정부를 군사적으로 전복했다. 니카라과는 두려움 속에서 계속 경고하였지만, 악순환만 반복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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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 국제 사법재판소는 니카라과의 기소를 받아들여, 미국이 국제법을 위반하였고, 따라서 일체의 전쟁 책동을 중단하고, 모든 것을 배상하라고 판결하였다. 미국은 무시했다. 이번 판결로 국제 사법재판소의 위신이 땅에 떨어졌다며 개탄했을 뿐이다. 1990년 2월 마침내 미국은 뜻을 이루었다. 계속되는 경기 침체와 식량 부족, 전쟁준비로 니카라과 인민들은 지쳤고, 테러와 내전은 멈추지 않았다. 니카라과 인민들은 혁명에 동참하는 것을 두려워했고, 염증을 느꼈으며, 미국의 체제를 받아들였다. 총선거에서 미국이 지원하는, (당선을 전제로) 니카라과 지원을 확실히 약속 받은 UNO의 차모르가 당선했다. 그사이 내전과 테러로 3만여 명이 사망한다. 전체 인구가 300만이니까, 우리로 치면, 40만이 미국의 국가 테러로(직접적이든, 사주해서든) 죽은 것이다.

미 제7특수부대 전 사령관인 존 워펠스타인은 솔직하게 말했다. “저강도 전쟁이란 대중차원의 통합전이다……. 저강도 전쟁을 보다 정확하게 묘사하자면 혁명과 반혁명 사이의 전쟁이다.” 반란진압 전문가들이 제기한 이 새로운 전략의 논점을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1) ‘평정’은 전략적 목적으로서, 전술적 목표는 영토가 아니라 민중이다. 2) 군사력에만 의존하면 역효과를 초래할 뿐이며, 작전을 성공하기 위해 그 지역의 정치․문화․사회․경제적 조건에 대한 확실한 정보가 필요하다. 3) 반혁명은 ‘국가건설’, 즉, 대안적 사회체계의 건설과 함께 실시되어야 한다. 4) 미국은 독자적으로 행동하지 않으며, 이스라엘, 대만, 한국, (UN)과 같은 제3그룹의 동의를 확고히 한다. 5) 선진제국과 마찬가지로 제3세계에서도 미국은 기술의 우위를 최대한 활용해야 한다. 6) 현지 국가의 민중 뿐 만 아니라, 미국의 체계, 국민도 목표다. 섬머즈 대령은 이 모든 논점을 아주 간단히 요약했다. “군사적 수단은 정치적 목적에 종속시켜야 한다.”
미국은 자신의 힘을 전 세계에 투사(投射)해야 했다. “무장한 예언자는 모두 성공하는 반면, 무장하지 않은 예언자는 실패”하기 때문이다. 한때 뛰어난 연기파 배우였던 레이건은 그 역할을 다했다. 그는 ‘악의 제국’ 소련을 원색적으로 비난했고, 그것을 제3세계 민중들로 투사했다. 레이건 행정부는 제3세계의 ‘불안정성’과 ‘테러리즘’의 배후로 ‘악의 제국’을 지목하였다. 그리고(!), 소련에 대한 직접적인 군사행동보다는 이들을 위협하는 구체적 실체, 즉, 니카라과, 앙골라, 캄푸치아, 리비아, 파나마, 그라나다 및 아프가니스탄을 제물로 삼았다. 국제법을 신경 쓰는 것은 거추장스러운 일이었다. 미국은 자신에 대한 모든 도전을 가혹하게 응징했다. 자신들이 ‘미칠 수도 있다’는 것을 제3세계 민중들에게 각인시켰다. 그들은 과거 ‘학대’의 기억을 되살렸다. 이것은 의심할 여지없이 (국가)테러다.
그러나 이것이 근본적으로 과거와 차이가 났는데, 이제 그들은 더 이상 은막의 정치에 기대지 않아도 되었다. 독재정권을 뒤에서 배후 조종하는 위험을 굳이 감수할 필요가 없었다. 레이건의 진정한 혁신은 여기에 있다. 이것은 할리우드에서 배운 거의 동물적인 본능이었다. 그는 ‘반란진압 캠페인’을 하였다. 이것으로 대중이 직접 전쟁에 참여하게 한 것이다. 자강도 전쟁의 교안대로 대중을 상대로 대중을 점령한 것이다. 이들 내에서 간혹 발생한 ‘테러’는 혹여 있을지 모를 민중의 유대를 방해하였다. 제3세계에서 그들은 ‘자유투사’에 대한 ‘우정’을 과시하며, 공개적인 지원을 약속하고, 그것을 이행하였다. 제3세계는 분열하였고, 자중지란 끝에 미국의 길을 택하게 된다. 이때 누가 지도자가 되는 지는 과거처럼 중요하지 않았다. 이미 제3세계 인민들이 미국의 길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이제 미국이 굳이 미제의 앞잡이를 내세울 필요가 없다. - 불필요한 오해를 사서 반미투쟁에 전전긍긍해야 할 이유가 없다. 이것은 정치적인 전쟁의 새로운 차원이다. 미국은 반혁명을 수출할 수 있다는 정당성을 부여받았다. 대중에게서 말이다. 이것은 의지와 법 그리고 심지어 가능성(!)까지 모든 권리를, 아니 모든 전리품을 한꺼번에 노획하는 새로운 이데올로기 투쟁이다. 말 그대로, ‘대중적 수준의 전면전’이다. 이렇게 해서 국가테러는 ‘은폐’된다. 이 전쟁은 미국을 ‘정당’하게 하였기 때문이다.

3. 테러리즘과 이슬람

1979년 이란 혁명은 미국이 이제껏 본 적도 없고, 상상도 못했던 혁명이었다. 그들은 자신을 거대한 악마(Great Satan)라 부르는 매우 적대적이고 비합리적인 집단과 직면해야 했다. 더구나 이 적대적인 집단은 미국이 거의 예측할 수 없는, 이해하기도 어려운 종교집단이었다. 혁명의 주도세력인 시아파는 강력한 신정일치를 주장했고, 호메이니 자신은 12대 이맘(영적인 인간)의 화신이었다. 이것은 (적어도 미국이 보기에) 근대의 시계를 거꾸로 돌려놓은 것이다.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이웃의 이라크는 물론, 사우디아라비아에서조차 혁명의 여진이 감지되었다. 이제 중동에서 미국은 아랍민족주의가 아니라, 이슬람 원리주의를 상대하는 국면으로 전환해야 했다. 혁명 이전의 이란, 샤 왕조의 팔레비 국왕이 이끄는 이란은 미국의 충성스러운 동맹자였다. 부흥하는 아랍민족주의의 확산을 막고 소련의 페르시아 접근을 봉쇄하는 동시에 페르시아 만에서의 미국의 영향력을 보증해주었던 충성스러운 동맹자였던 것이다.

미국의 중동정책은 절묘한 균형을 유지하는 것에 있다. 이곳은 천연자원의 불균등 교역이 이뤄지는 곳이고, 그만큼 (직접 식민 지배를 하려는 것이 아닌 이상) 정치적 안정을 달성하려는 미국의 관심은 지대하다. 하지만, (미국인들의 눈에) 불행히도 이곳은 정치적 안정을 이루기가 곤란한 조건이 있다. 첫째, 이스라엘 건국과 그로 인한 팔레스타인 지역 아랍인들의 불안정성이다. 이스라엘과 석유의 안보를 동시에 달성한다는 이중모순에 대해서는 이미 지적한 바가 있다 김용현 ‘미국 대중동정책의 역사적 배경과 전망’ (사회진보연대 2001.10) 참고
. 둘째, 근대 민족국가를 형성하기 위한 영토와 민족주체가 모호하다는 점이다. 헤게모니국가로서 가장 강력한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는 이란조차도 페르시아 인은 50%밖에 안 되며, 25%나 되는 민족이 얼마 전 구소련 연방에서 독립한 아제르바이잔의 아자르인 이며, 나머지가 쿠르드족, 투르크멘인 등이다. 이란은 인종적 화약을 지고 있는 셈이다. 친미 국가 터키는 20%이기는 하지만, 전체 쿠르드족의 절반이 살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종교적 교조주의를 버리는 것은 무장해제나 다름없다. 셋째, 내부적으로 이를 확실히 통제할 수 있는 국가도 없으며, 아랍 전체를 조율할 수 있는 지역 강국은 더더구나 없다. 여기에 단일한 이념도 없다. 이슬람은 단일하지 않다. 중동은 어떠한 반란에도 취약한 통제 불가능한 지역이었다.
따라서 미국에게 사활적인 이해가 걸려있지만 정치적으로 가장 취약한 지역이 바로 이곳 중동이다. 이곳은 지정학적으로 가장 멀기도 했다. 첫째와 둘째 조건이 예측 불가능함을 의미한다면, 첫째와 셋째는 통제 곤란함을 의미한다. 이곳에서 미국의 통치전술은 다른 지역과 분명히 구별된다. 이런 점에서 이슬람의 발전 전망 역시 서구, 특히 미국과의 반정립 과정에서 왜곡을 겪는다 좀더 자세한 내용은 지난 호와 이번 호에서 연재되고 있는 호오벨트 ‘이슬람의 봉기’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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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이란 혁명은 바로 이 같은 정치적 취약성이 상징적으로 드러난 혁명이었다. 그 징후는 곳곳에서 드러났다. 1979년 11월, 이슬람 학생들은 이란 주제 미국 대사관을 점령하였다. 그들은 미국인 52명을 444일간 억류하였다, 처음에 미국은 강경 대응했지만, 구출작전이 노출되고, 인질들이 분산되면서 국내 여론은 점점 안 좋아졌다. 결국, 내정간섭을 하지 않는다는 각서에 서명하고서야 인질이 석방되었는데, 이것으로 미국은 심한 모멸감과 극심한 적대감, 그리고 무기력에 빠졌다. 동년 사우디의 이슬람 원리주의자들도 ‘그랜드 모스크’를 점령하여 사우디 왕가의 정치, 경제력의 독점을 강력히 비난했다. 81년 무슬림 형제단은 개방화와 친미노선을 걷고 있던 사다트 대통령을 암살했다. 사방에서 이슬람이 봉기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레바논의 헤즈볼라 활동은 치명적이었다. 아랍어로 ‘신(神)의 당(黨)’-헤즈볼라는 이란 혁명 후 호메이니를 광적으로 숭배하는 가난한 젊은이들로 이루어졌다. 이란의 헤즈볼라는 혁명이 성숙하면서 혁명 방위대의 통제를 받지만, 레바논의 헤즈볼라는 이스라엘의 레바논 침략을 계기로 급속하게 성장하였다. 그들은 베이루트 교외 남쪽 빈민지역의 시아파 청년들을 조직하였다. 1984년 10월 폭탄을 가득 실은 트럭이 레바논 주둔 미 해병대 사령부로 돌진하는데, 이 자살테러로 미 해병대원 242명이 사망했다. 당시 별다른 대 테러리즘 전술을 개발하지 못했던 미국은 레바논에서 미군을 철수시켰다. 레이건은 이미 레바논을 가리켜 “미국의 사활을 거는 중요한 나라”라고 공언한 적이 있었다. 한편, 레이건은 “테러리스트와 거래하지 않는다. 인질의 몸값을 지불하지 않는다. “고 반복해서 선언했지만, 85년 5월 헤즈볼라에 잡혀있는 인질을 석방시키기 위해, 이란 지도부와 비밀교섭을 개시했다. 미국은 이란에게 (대이라크 전쟁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대전차, TOW 미사일, 대공 미사일 부품 등을 매각했지만, 2명의 미국 인질만을 돌려 받았을 뿐이다. 매각 대금은 니카라과의 콘트라 반군으로 흘러 들어갔는데, 레이건이 이 모든 것을 직접 서명했다. 이른바 ‘이란-콘트라’ 스캔들이다. 레이건 행정부는 사건을 부정하기 위해서라도 이란-이라크 전쟁에서 이라크를 지원했고, 88년 미 전함 빈센즈 호는 이란 민간 여객기를 격추시켰다. 11월 레이건은 이란 경제 봉쇄조치를 다시 채택했다. 확실히 미국은 당황했고, 테러는 여러모로 미국의 정치적 취약성- 중동에서 통치의 위기를 드러내는 징후였다.

그렇지만 사실, 이슬람에 대한 미국의 태도는 석연치 않은 면이 있다. 문화적 이질감과 상대주의에도 불구하고 여러 면에서 모호했다.
미국은 수에즈 전쟁(2차 중동전쟁)을 전후하여 위세를 떨친 아랍 민족주의를 위험하게 여겼다. 소련은 이스라엘의 시오니즘을 비판하며, 아랍에서 영향력을 확대하였고, 미국은 외교적인 수단 외에는 별다른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김용현 “같은 글”(2001.10) 참고, 이집트 나세르의 아랍민족주의에 대해서는 김용현 “아랍 사회주의의 이념과 현실”(2001.5) 참고.
. 이런 상황에서 미국은 이슬람 국가들이 자신의 힘으로 공산주의와 나세르의 세속적 민족주의에 맞서 힘의 균형을 이루기를 바랐다. 미국은 아랍 민족주의와 이슬람 세력이 대립하면 이슬람에 손을 들었다. 60년대 이집트-미국의 관계가 악화되었던 것도, (나세르 암살을 기도한 적이 있는) 이슬람 원리주의 세력인 모슬림 형제단을 지원했던 것 모슬림 형제단의 국제조직은 CIA와 사우디아라비아 왕제의 적극적인 지원 속에서 만들어졌다
도 이런 맥락에서였다. 그렇게 해서, 수에즈 전쟁 직후 발생한 권력의 공백에서 미국은 이란, 사우디, 터키라인을 중심으로 조금씩 헤게모니를 키워가고 있었다. 물론, 이집트의 사다트가 ‘아랍 민족주의’가 아닌 ‘이슬람’의 기치로 이스라엘과 전쟁을 하기도 하고, 1,2차 오일위기로 잠깐 긴장이 감돌긴 했지만, 73년 4차 중동전쟁의 패배와 뒤따른 경제위기로 범 아랍 신화는 빛을 바랜다.
79년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했을 때, 미국은 이들 이슬람 원리주의 종교지도자들이 가지고 있는 반공감정을 활용하는 것이 현명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50,60년대 아랍민족주의에 대항하여 점진적으로 영향력을 늘릴 때, 이슬람이 사상적 무기였음을 잊지 않았던 것이다. 아프가니스탄 침공에 비하면, 이란 혁명은 (상대적으로) 부차적인 문제이다. 아프가니스탄에서 미국은 무자헤딘을 은밀하게 지원했다. 그리고 이곳에서 CIA의 게릴라 훈련은 이슬람의 가르침과 하나로 통합되었다. 이슬람의 신성함이 무신론자인 소련군대로 인해 훼손당하고 있으니, 아프가니스탄의 이슬람은 아프간 좌파 정부를 전복시켜 아프간 이슬람의 독립을 쟁취해야 한다는 것이다 임필수 “1978년 이후의 아프가니스탄”(이번호)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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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밀월관계는 냉전 해체 이후에도 지속되었다. 그리고 이 지역에서 유일하게 독립을 지켜온 아프가니스탄은 그 자체로도 소연방 해체를 가속시키는 상징적 존재였다. 소연방 남부의 독립 국가는 아르메니아와 그루지야를 제외하고는 모두 이슬람국가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카스피 해 연안의 천연자원을 독점적으로 점유하려는 러시아의 시도를 곤란하게 했다. 수많은 논자들이 지적한대로 문제의 초점은 풍부한 천연자원에 있다. 그러나 지정학적으로건, 역사적으로건 미국과 서구에게는 이곳이 먼 곳이었다. 이 지역의 영유권은 구소련 연방에 있었다. 소연방의 해체 이후 러시아는 배타적인 수성이 관건이었지만, 미국과 서방은 접근할 수 있는 여지라도 확보해야 했다. 러시아는 지역분쟁에서 신생독립국을 보호하겠다는 명목으로 군사기지를 주둔시켰다. 아울러 (러시아 주도의) 독립국가연합(Commonwealth of Independent States CIS)을 제안하여 러시아를 통제로 다시 묶어 놓으려 했다. 신생독립국가의 지원은 미국에게 접근의 여지를 준다. 이 지역 신생독립국가는 거의 이슬람 국이다. 그리고 여전히 이곳에서 러시아의 영향력을 견제할 수 있는 것도 이슬람이다. 90년대 미국의 대 이슬람 정책의 기본 방향을 제시하고 있는 메리디언 선언은 다음을 명시하고 있다. “미국 정부는 이슬람을 서양에 대적하거나 세계평화를 위협하는 차세대 ‘-주의’로 보지 않는다.” 클린턴 행정부는 문명충돌론을 수차례에 걸쳐 공식적으로 부인했다. 아울러 중앙아시아의 신생 무슬림 국가의 모델이 될 이슬람 국가의 위치를 강조했다.
현재 러시아의 이슬람교도는 소연방해체 이후에도 13%(2천만 명)나 된다. 체첸의 독립과 이슬람의 부흥(특히 천연자원을 풍부히 가지고 있는 중앙아시아 국가)은 이 같은 불안정성을 다시 가속시킬 가능성이 크다. 여기서, 체첸의 독립은 이슬람(특히 이란)의 정치적 불안정성도 증폭시킨다. 이 작은 나라의 독립은 인종적 복합체인 이곳에 정치적 위기를 가중시킬 뿐이며, 그 파급력은 터키는 물론 서남아시아에까지 이르게 된다. 이것은 미국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천연자원을 개발하려는 신생독립국가들에게 서구의 도움은 절실하다. 러시아는 이것을 지원할 힘이 없다. 신생독립국과 이슬람에 대한 지원은 미국에게 개입의 여지를 준다. 하지만, (통제되지 않는) 이슬람의 급격한 부흥 역시 이곳의 정치적 위기를 가중시킬 것이다. 특히, 이 같은 배후에 미국과 서방이 명백해지면, 최악의 상황-러시아가 이곳의 개발을 아예 거부하는 상황에 빠질 수도 있다. 상황을 굳이 자극하는 것은 미국에게 별 이득이 되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정치적)이슬람은 미국에겐 여전히 중요한 열쇠이다. 단언하기는 어렵지만 지금과 같은 극악한 사태에서도 미국은 (정치적) 이슬람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미국은 이슬람을 상대로 하는 균형의 정치를 잘 알고 있고, 경험도 풍부하다. 포기하거나 버리기에는 아직 때가 이르다. 미국이 작전명을 ‘성전’에서 ‘무한정의’로 고친 것도, 전직 CIA 이기도 한 헌팅턴이 이번 전쟁을 ‘문명충돌’이 아니라 ‘문명 대 야만’이라 한 것도 같은 맥락일 것이다.


4. 인도주의적 개입, 불량국가, 대 테러리즘의 진실

미국의 전 합참의장 존 샬리 카시빌리 장군은 ‘전쟁 이외의 활동’(operations other than war) - 즉, 외교로 대처해야 하는지, 무력으로 대응해야 하는지 판단하기 어려운 분쟁이 빈번하게 발발할 것이라고 경고하면서, 안정된 신세계질서를 구축하기 위해 저강도 분쟁을 주목해야 할 것이라고 했다. 분쟁은 다차원적으로 전개되었다. 탈식민지 과정의 산물은 물론, 과거 양극 체제 속에서 드러나지 않았던 종교, 종족, 인종 갈등, 마약, 범죄 등으로 확산되고 있다. 하지만 불행히도, 개별국가 차원에서는 이것을 제압할 수 없었다. 대부분의 분쟁 당사국들은 해체국가이거나 해체중인 국가들이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분쟁이 그들만의 문제로 볼만큼 개별적이지는 않았다. (상대적으로) 안정된 민족 국가를 형성했던 나라라 할지라도, 경제 위기로 인한 통치의 불안정성으로 국민적 통합력을 제고하기가 어려운 것은 마찬가지였다. 따라서 인근 지역의 불안정성이 자국으로 이전될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결국 분쟁이 분쟁 당사국의 문제라 할지라도 지역 헤게모니 국가에서 이를 적절히 해결할 수 있는 정치력을 발휘하지 못하면, 관련된 인근 국가로 바로 확산되고, 심지어 지역 헤게모니 자국에까지 영향이 미친다. 터키-쿠르드족 문제와 유고-세르비아-코스보, 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 인도네시아-동티모르 모두 명분만 ‘인도주의적 개입’이었지, 사전 혹은 사후진압이었다 거꾸로, 수수방관하는 경우도 있다. 심지어, 89년 이라크가 쿠르드 족을 학살할 당시 미국은 침묵했고, 심지어 전쟁 직후 91년 이라크 남부의 시아파 교도를 학살하고 다시 북부의 쿠르드 족을 학살할 때에도 미국은 관대했다. 지역을 안정시키기 위한 책동이었기 때문이다. 91년 동티모르의 딜리 대학살 당시만 해도 미국은 인도네시아에 관대했다. 역시 안정을 위한 학살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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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미국이 보기에) 지역 안정을 해치면서 고의로 도발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라크와 북한이 대표적이고, 리비아, 이란에서부터 (아직 불량국가라는 딱지가 붙지는 않았지만) 체첸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북한은 ‘핵-미사일’로 도발한 경우고, 체첸은 ‘분리 독립’으로 도발한 경우다. 이라크의 경우 조금 더 특별하다. 이란을 상대해서 싸운다는 이유만으로 (정치적 이슬람을 부담스러워하던) 미국과 아랍 국가의 지지를 받다가, 한 순간에 둘 모두에게 버림받았는데, 죄질이 훨씬 안 좋아서다. 쿠웨이트 점령은 미국의 핵심적인 이해(석유뿐만이 아니라, 금융자본까지)를 분배할 것을 요구한 것이었고, 중동의 패권을 인정받으려는 야욕이었다.
불량국가든, 지역적 안정을 위협하는 인종적, 종교적 분쟁이든 금융자본에게는 모두 죄악이다. 자본이동을 경직시키고, 안정적인 자본 투자를 방해하기 때문이다. 미국이 경찰국가를 자임했던 것은 그들만이 해결할 수 있어서가 아니라, 그들이 해결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전히 테러의 문제는 간단하지 않았다. 이것은 비대칭적이고, 위협적이었다. 1997년 미국 [4개년 국방정책 검토(QDR)]는 “미국의 통산 전력 우세로 말미암아 적대국들은 미 본토의 미국인이나 해외의 우리 군사력 내지 이해를 공격하기 위해 비대칭적인 수단을 사용하려 할 것”이라며, 비대칭 위협을 중요한 의제로 다루었다. 1999년 합참본부가 발표한 [합동 전략 검토 : 비대칭 전쟁 방안]에서 비대칭 전쟁의 포괄적인 개념을 정리하는데, 다음과 같다. “비대칭 전쟁은, 미국이 예상하는 작전 방법과는 판이한 방식으로 미국의 장점을 우회하거나 약화시키는 동시에 미국의 약점을 유린하는 전쟁이다. 비대칭 전쟁은 충격이나 혼란을 야기하는 등 심대한 심리적 타격을 입혀서 상대방의 주도권이나 의지를 약화시키는 것을 목표로 한다. 비대칭 방식은 상대방 약점을 정확하게 파악할 것을 필요로 한다. 비대칭 방식은 기존의 방식과는 다른 독창적인 전술이나 무기, 기술을 사용하며 전쟁 작전의 모든 단계(전략, 전술 등)에 적용될 수 있다.” 미국의 대응 전략은 우주전과 정보전에서 압도적으로 우세하여, 이 힘의 투사능력을 배가시키자는 것이다. 전시나 평시에 관계없이 군사적으로-정치적으로 압도하겠다는 말이다. 2001년 [QDR]에서 이것은 힘의 우위에 기반을 둔 파괴력의 보증으로 드러난다. “국방 정책 검토의 주요 목표는 국방 정책의 기초를 과거의 ‘위협에 기초한’ 모델에서 미래 지향적 ‘능력에 기초한’ 모델로 전환시키는데 있다. 이러한 힘에 기초한 모델은 적국이 누구이며 전쟁이 어디에서 발생할 것이냐는 것보다는 가상 적국이 어떤 방식으로 전쟁을 벌일 것이냐에 초점을 둔다……. 미국은 핵심 분야에서 군사적 우월성을 유지하는 동시에 새로운 분야의 군사적 우위를 개발하고 적에게 비대칭적 우위를 허용하지 말아야 한다.” 요약하면, 비대칭적 위협이 가지는 불확실성을 격퇴하기 위해 압도적인 군사적 힘을 기반으로 강력하게 통제하겠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 군사적 힘과 노여움을 확실히 ‘투사’할 필요가 있다.

80년대 전까지, 테러가 국가를 위태롭게 한 적은 없었다. 또 어느 누구도 테러가 국가 안보를 흔들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디스코텍에서 미군이 폭탄 테러로 희생되었다고, 지역 국가의 안보가 위태로울 이유가 없었다(한국에서 미군이 도끼만행으로 살해되었다고, 국가 안보에 문제가 될 리 없듯). 테러는 그저 각 국 치안기관이 알아서 할 일이었다.
세계 헤게모니가 미국에게 귀속되고 비대칭 전쟁을 향한 가능성이 커지면서, 테러는 더 이상 전쟁의 규칙 밖(전쟁을 보조하는 후방교란)으로만 머물지 않았다. 80년대 초반, 잠시나마 미국이 이슬람에 대한 정치력을 상실한 듯 보였던 것은 그들이 이것을 이해하지 못했기(혹은 이해하려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소련이 더 이상 자신의 맞수이거나 그럴 의욕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 미국은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불확실한 도전에 대응하기 시작했다.
86년 미군 병사 2명이 폭탄 테러로 사망하였다. 베를린의 디스코텍에서 폭탄테러로 사망한 것이다. 미국은 본토 국민이 당한 것도 아니고, 민간인이 당한 것도 아니었지만, 과거와는 다르게 대응했다. 리비아가 테러를 조정했다며 리비아를 폭격했다. 당시 유엔총회에서 ‘미국은 국제법과 유엔헌장을 위반했다’며, 비난결의안을 채택하였지만, 미국인의 66%가 지지했다. 이 섬뜩할 만한 지지율은 향후 미국의 대 테러리즘이 어떻게 전개될 것인지를 암시했다.
1995년 미국 전략 사령부는 ‘냉전 이후 전쟁 억지대책의 기본 요점’이라는 보고서에서 “미국의 이익이 치명적으로 공격당할 경우, 비이성적으로 반드시 보복하는 국가”로 비쳐지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거기에는 선제 핵무기 사용도 포함되었다. “우리 자신을 지나치게 이성적이고 냉철한 머리의 소유자료 묘사하는 것은 자살행위이다……. (미국이) 경우에 따라서 통제 불능일 수도 있다고 비춰지는 것이 오히려 적국의 정책 결정자들이 두려워하고 의심하도록 조장하고 강화하는 데 유익할 것이다.” 이른 바, 미칠 수도 있음을 보여주어야 한다. 대 테러리즘은 미국이 국가 테러를 더욱 강화해서 두려움에 떨게 하겠다는 것이다. 무자비한 보복으로 테러를 중지시키겠다는 것이다.
9.11 테러 이후 미국은 자신이 분노하고 있다고 전 세계를 향해 경고했다. ‘생중계된’ 테러장면으로 이미 자신을 미국 시민과 동일시한 다음이었기 때문에, 이 분노가 정당하다고 여겼다. 미국은 빈 라덴이 범인이라는 증거만 제시하면, 국외로 추방시키겠다는 탈레반의 협상안도 무시했다. 탈레반의 전쟁 포로도 살해했다. 탈레반은 투항을 했지만, 미국은 전쟁 중이라고 대답했다. 86년 리비아 폭격이 카다피의 어린 딸의 목숨을 거두는 것으로 그쳤다면, 이제 미국은 빈 라덴은 물론이거니와 오마하르 자신과 그의 가족, 친지의 목숨까지 거두려 할 것이다. 학살은 당분간 지속될 것이다. 테러의 불확실성을, 이슬람의 불확실성을 어느 정도 제거했다는 확신이 생길 때까지 말이다. 이것이 가지고 올 정치적 효과를 고려해보면, 아프가니스탄에서의 다른 쟁점(천연자원, 친미정권)들은 상대적으로 부차적이다. 연이어서 생각해보면, 이라크 역시 미국 입장에서는 예측하지 못한 행동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저강도 전쟁의 공격 목표가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면-그것은 민중이고, 이슬람 사회체제다- 후세인 정권을 전복할 기회하지 않고(기회도 있었고, 가능했다), 주기적으로 폭격만 하는지 이유가 분명해진다. 적어도 지금 이 순간 알 수 없는 불확실성을 제거하는 데에는 후세인이 권좌에 있는 게 적절하다. 가끔씩 북한을 가리키며, ‘다음은 너야’라고 소리치기만 하면 된다. 이것을 저강도 차원의 Win-Win 전략이라고 하면, 지나친 비약인가?
정확히 그들의 작전명은 ‘무한정의’가 아니라 ‘무한공포’이다.

이렇게 하여 대 테러리즘, 혹은 테러 반대는 국가테러를 은폐하고 전위시켰다. 테러를 반대하는 국가 테러. 미국의 각종 전쟁교범에서 대 테러리즘은 저강도 전쟁 전략의 일환으로 포함되어 있다. 교범은 행동의 통일을 강요하는 것이다 종래의 특수부대와 대 테러 부대와의 차이는, 테러리스트가 눈치 채지 않게 급습하여, 테러리스트들이 인질을 죽이거나 자폭하는 시간적․심리적 여유를 안주는, 극히 단시간 내에 그들을 제압하는 전투능력이다. 이것을 위해서 인질들과 테러리스트를 분리시키는 것이 필수적이다. 여기서 제압이란 테러리스트의 몰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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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로 귀족사회를 제어했던 타르퀴니우스를 쫓아낸 후, 로마의 호민관들은 공화정을 선언하면서 로마법을 공표 했다. 강제를 받지 않는다면(공포), 사람들은 결코 선하지 않기 때문이다. 강제-공포는 로마의 호민관들에게도 매혹적이었다. 오늘 지금 우리가 마주치고 있는 테러방지법이 여기에 놓여있다. 2001년 9.11 테러와 보복전쟁으로 대중의 공포가 내면화되었다. 특히, (테러의 공포가 아니라) 보복 전쟁의 공포는 자신의 인권 침해를 정당화시켰다. 미국은 탈레반을 ‘불고지죄’로 삼족을 멸하였다. 두려운 것이었지만, 정당하기도 했다. 바로 이 공포의 기억이 남아 있을 때, 부르주아는 행동을 통일시켜야 한다.
한국은 82년 테러방지 종합대책으로 86년 아시안 게임, 88년 올림픽에서 대 테러 대비가 매우 훌륭하다는 공인을 받았다. 미국 의회 조사국이 북한은 테러 지원에 수동적이라며, 차별화를 제안하고, 북한이 ‘테러자금 조달억제에 관한 국제협약’과 ‘인질억류방지에 관한 국제협약’에 정식 서명하고, 9.11 테러 직후 반 테러 성명을 발표했다. 하지만, 지배계급은 더 많은 것을 요구할 것이다. 정치의 위기가 가져올 대중의 분노를 (힘과 권위, 두려움으로) 통제하기 위해서이다. 지금 국정원의 반동은 단지, 조직 이기주의의 발로가 아니다. 향후 계급지배의 정치 방침을 제안하고 있다. 대중의 불안정성을 통제하기 위해 국가는 많은 노력을 기울일 것이고, 상시적인 감시시스템으로 사태를 돌파하려 할 것이며. 대 테러 전선은 확대될 것이다. 정치전선에서 국민과 체계에 대한 승리는 전쟁(계급투쟁)의 승리를 보증하기 때문이다. 오늘 국가는 분명히 ‘여우의 가면’을 쓰고 있다.
지금 시기 “테러 반대”는 “대 테러리즘”의 공포 앞에서 침묵할 뿐만 아니라, 정당성마저 부여하고 있다. “테러 반대”는 “대 테러리즘”을 지지하기 때문이다. 어떤 미사여구로 치장한다 할지라도, “테러반대”는 미국의 으름장 - “내편 아니면 테러 지지자” - 에 “예”라고 대답한 꼴이다. 두려운 것이고, 미국의 선택이 옳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제 문제는 이것이다. “테러 반대”와 함께 싸울 것인가, “테러 반대”에 대항하여 싸울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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