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광주전남지부


  • 노동보다
  • 2018/07 제42호

카메라 뒤의 노동을 외치다

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가 출범하다

  • 진재연
촬영장에서 스태프들이 농담 반 진담 반 건네는 ‘노동착취’라는 단어가 가슴을 후벼팠어요. 물론 나도 노동자에 불과하지만, 적어도 그네들 앞에선 노동자를 쥐어짜는 관리자 이상도 이하도 아니니까요.
하루에 20시간 넘는 노동을 부과하고 두 세 시간 재운 뒤 다시 현장으로 불러내고 우리가 원하는 결과물을 만들기 위해 이미 지쳐있는 노동자들을 독촉하고 등 떠밀고 제가 가장 경멸했던 삶이기에 더 이어가긴 어려웠어요.
故 이한빛 PD의 유서 중에서
2016년 10월 26일 티브이엔(tvN) 드라마 <혼술남녀>의 조연출 이한빛 PD가 드라마 종영 다음 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의 유서에는 아주 오랜 시간 당연하게 여겨왔던 방송제작환경의 문제점들이 고스란히 적혀 있었다. 20시간이 넘는 초장시간 노동, 위험한 촬영 현장, 폭언과 모욕이 떠나지 않는 군대식의 위계적인 상하 관계, 다층적인 하청 관계 … 위로가 되는 드라마를 만들고 싶었던 한 젊은 PD의 죽음은 두껍고 단단한 방송 산업의 문제들을 세상에 드러나게 했고, 현장 노동자들이 조금씩 용기내어 목소리를 내게 했다. 
 
씨제이이엔엠(CJ E&M)은 나약한 개인의 죽음이라며 책임을 회피했다. 그러나 진상규명을 위해 힘 모아준 시민들과 의 활동이 이어지자 2017년 4월 공식 사과했다. 
 

이한빛PD의 유족들은 대책위의 여러 활동가들과 함께 이한빛 PD의 뜻을 잇고자 법인을 설립했다(사단법인 방송노동환경개선을위한한줄기의빛한빛). 그리고 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를 만들었다. 그 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가 지난 5월 31일 개소식을 열고 본격적인 출발을 준비하고 있다. 
 

방송산업의 빛과 그림자 

“잠을 안 재워요”, “이러다 정말 죽을 것 같아요” 현재 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로 들어오는 현장 제보 내용들이다. 주로 초장시간 노동과 관련한 제보가 대부분이다. 얼마 전 종영된 tvN의 <나의 아저씨>나 현재 방영되고 있는 에스비에스(SBS)의 <시크릿 마더>, 엠비씨(MBC)의 <검법남녀> 등 인기 드라마 스태프들의 노동 환경에 관련한 제보도 있었다. 20시간도 훌쩍 넘는 말그대로 초장시간 노동. 여기 언급한 드라마들뿐만 아니라 한국의 모든 드라마 현장에 해당하는 오랜 관행임은 방송 산업 종사자들이라면 누구나 다 알고 있다. 방송 현장의 스태프들은 20시간 넘게 일하고 겨우 2~3시간 눈을 붙이려고 찜질방으로 우르르 들어간다. 찜질방이 아닌 제대로 된 숙소를 잡아달라는 게 현장 노동자들의 요구일 정도다. 하지만 누워서 자면 제 시간에 못 일어날까봐 다시 버스로 올라가는 스태프들도 많이 있다. 

스타 배우들의 몸값은 1~2억을 넘기는 건 예삿일이다. 하지만 한켠에는 최저임금도 못 받는 스태프들이 허다하다. 소위 말하는 ‘쪽대본(시간에 쫓긴 작가가 급하게 보낸, 바로 찍을 장면의 대본)’으로 진행하는 촬영은 생방송을 방불케 한다. 몇 날 며칠 밤을 새는 건 당연한 일일 정도다. 잠깐 쪽잠이라도 잘 휴게공간도 없어 세트장 한쪽에 몸을 구겨 넣는 게 촬영 현장의 일상이다. 잠을 못 잔채 디졸브(방송업계 은어. 밤샘 촬영을 계속해 화면이 교차되듯 오늘인지 내일인지 모르는 사이 다음 날이 온다는 의미)된 상태로 일하다 졸음운전으로 사고 위험에 노출되기도 한다. 차량 운전 씬을 찍을 때는 그 흔한 안전장비 하나 없이 견인차량 위에서 위험천만한 상황을 감수해야 한다. 

근로기준법이 개정되었다고 한다. 노동시간 특례업종에서 드디어 방송업이 제외되었다. 이제 방송업 노동자들의 노동시간도 줄어들 수 있다고들 한다. 하지만 20시간이 넘는 초장시간 노동 관행이 바뀌지 않는 상황이 반복된다면? 방송계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삶이 나아지지는 못할 것이다. 방송 현장의 대부분의 노동자들이 프리랜서라는 이유로 노동자성을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그렇다 보니 당연하게도 근로기준법의 사각지대에 놓이는 노동자들이 많다. 최소한의 법적인 보호조차 받지 못하는 실정인 것이다. 이러한 노동조건이 개선되지 않는 상황에서 근로기준법이 개정되었다는 얘기는 딴 세상 얘기만 같다.
 

미디어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삶에 한 줄기 빛이 되기 위하여

 
지금까지 한류를 선도하는 문화콘텐츠를 만들어 온  것이 방송 산업이다. 누군가의 삶에 작은 위로와 빛이 되었다면, 그것을 만들어 온 노동자들도 행복해야 하지 않을까. 방송을 하고 싶어서, 드라마를 만들고 싶어서 꿈과 열정을 갖고 방송계에 발을 들여 놓은 젊은이들이 더 이상 좌절하지 않고 일할 수 있도록 이제라도 방송 산업의 노동 환경이 바뀌어야 한다.

쉽지는 않다. 앞서 적었듯 프리랜서라며 근로기준법의 적용조차 받지 못하는 방송 산업 노동자들이 많다. 하지만 어려운 상황에도 불구하고 많은 미디어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모이고 있다. 스스로의 제작 환경을 바꿔나가기 위해 움직이고 있다. 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는 이한빛PD가 삶의 마지막까지 부여잡고 고민했던 지점들을 놓치 않을 것이다. 그리고 미디어 비정규직 노동자들과 함께 갈 것이다. 이한빛PD의 죽음을 넘어 방송 산업 노동자들의 벗으로 새롭게 태어날 것이다. 빛이 머물렀던 시간, 그 시간들이 우리에게 주었던 울림을 기억하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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