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광주전남지부


  • 오늘여성
  • 2018/09 제44호

좌절은 없다: 아르헨티나는 이미 임신중지를 승인했다

임신중지 합법화 투쟁에 나선 아르헨티나노동조합총연맹(CTA-A) 인터뷰

  • 김진영
아르헨티나는 한국과 마찬가지로 임신중지를 매우 엄격하게 금지하는 국가 중 하나다. 아르헨티나에선 임신중절 시술을 한 의사와 임신부를 최대 징역 4년 형에 처하고 있다. 임신부의 생명이 위태롭거나 성폭행으로 인해 임신했을 경우만 예외로 인정된다. 

이번 여름은 일곱 번째 시도였다. 6월 14일 임신중지 합법화를 요구하는 100만 명이 넘는 시민들이 의회 앞에 모인 장관을 연출했다. 그 사이 하원 의회는 역사상 최초로 임신 14주까지 임신중지를 허용하는 법안을 가결시키고 상원으로 넘겼다. 아르헨티나 전역은 합법화를 지지하는 초록색 물결과 합법화에 반대하는 하늘색 물결로 양분되었다. 집회 장소가 아니더라도 세월호 리본을 단 사람들을 쉽게 볼 수 있는 것처럼, 초록색 반다나(삼각형 모양의 손수건)를 몸과 가방에 단 사람들이 곳곳에 넘쳐났다. 상원에서의 표결일인 8월 8일을 상징하는 ‘8A’와 “지금 당장 임신중지를 합법화하라(Aborto legal ya)”, “임신중지는 곧 합법화된다(Aborto será ley)”라는 구호를 어디에서나 볼 수 있었다. 

모두를위한낙태죄폐지공동행동(이하 모낙폐)도 8월 8일 서울 용산구 주한아르헨티나대사관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아르헨티나의 임신중지 합법화 지지를 표명했다. 결과는 안타까웠다. 찬성 31표, 반대 38표, 기권 2표. 부결되었다. 

그러나 투쟁은 끝나지 않았다. 아르헨티나 여성들은 “이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고 외치고 있다.  

 ≪오늘보다≫는 아르헨티나 임신중지 합법화 투쟁을 적극적으로 주도한 아르헨티나노동조합총연맹(CTA-A)의 알레한드라 앙그리만 성평등위원장을 서면으로 인터뷰했다. 앙그리만 위원장은 7월 7일 모낙폐 참가단체를 비롯한 56개 단체가 개최한 낙태죄폐지퍼레이드 “여기서 끝내자!”에 6월 14일 하원에서의 승리를 알리며 한국의 여성들에게 연대할 것을 다짐하는 연대 메시지 영상을 보내기도 했다.내용 입력하세요

 

 
인터뷰에 응해준 알레한드라 앙그리만 아르헨티나노동조합총연맹 성평등위원장
 
※ ‘낙태’는 ‘태아를 떨어뜨려 죽인다’는 의미를 지닌 용어로, 이미 임신중지에 대한 낙인의 의미를 포함하고 있기에 이 글에서는 형법 제27장 ‘낙태의 죄’를 지칭하는 경우에만 ‘낙태죄’를 사용하고, 그밖에는 되도록 ‘임신중지’를 사용했다.
 
오늘보다 아르헨티나 여론은 임신중지 합법화를 지지하는 의견이 과반이 넘었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도 아르헨티나 상원은 임신중지 합법화 법안을 부결시켰습니다. 상원에서 과반수가 반대에 투표한 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CTA-A 안타깝게도 의회가 대중의 여론에 반대되는 결정을 내린 일은 이번이 처음이 아닙니다. 많은 나라가 그럴 것 같지만, 아르헨티나에서 선거란 주로 정책이 아닌, 후보자 개인의 신상이나 이미지가 주요 쟁점이 되어 이뤄집니다. 이로 인해 우리의 ‘대표자’가 사회적 이슈들에 대해 어떤 생각인지 제대로 알지 못하는 문제가 생깁니다. 이번 상원 투표 결과에 많은 여성이 낙심했지만, 한편으로 이 투표로 인해 우리는 상하원의원들의 의견 분포를 확실히 알게 되었고 ‘반대’에 투표한 의원들과 가톨릭 사이의 유착관계들도 파악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가톨릭과 정치의 유착관계 문제를 수면으로 끌어올리는 것이 필요하다고 강조하는 이유입니다. 이 문제는 앞으로 여성의 권리를 위한 운동 전반에서 중요하게 작용할 것으로 보입니다.  
 
오늘보다 임신중지 합법화 법안 통과에는 실패했지만, 이번 투쟁이 아르헨티나 여성의 권리를 위한 투쟁에서 새로운 단계를 열었다고 생각합니다. 이번 투쟁의 평가와 전망을 듣고 싶습니다. 
 
CTA-A 비록 상원이 임신중지 합법화 법안을 거부했지만, 우리는 이번 운동이 아르헨티나에서 전례가 없는 성과를 거둔, 아주 중요한 한 걸음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여성들의 움직임은 사회, 언론, 정치와 법적 영역에서 논쟁을 조직하고 영향력을 끼쳤습니다. 이번의 대규모 투쟁은 우연히 벌어진 것이 아닙니다. 지난 몇 년간 여성들이 자신의 몸을 결정할 권리뿐만 아니라 여성에 대한 폭력 철폐, 노동 조건 개선, 성평등을 요구하며 거리에서 운동을 만들어 온 것이 이번 투쟁의 배경입니다. 
 
 

특히 중·고등학교 학생을 포함한 젊은 세대가 임신중지 합법화 운동에 대규모로 참여했다는 점이 고무적입니다. 청년 남성들의 참여도 매우 많았습니다. 청년 세대의 참여는 이 운동을 장기적으로 이어나갈 세대가 형성되었다는 점에서 중요합니다.  

또 주목할 점은 임신중지를 둘러싼 논쟁이, 다른 중요한 논쟁을 촉발시켰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공공의료에 대한 접근권, 여성의 권리 전반, 사회에 대한 가톨릭의 강력한 영향력 문제, 가톨릭과 정부의 유착관계를 끊어낼 필요 등을 제기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동력을 바탕으로 향후 몇 년 안에 임신중지 합법화를 쟁취할 것이라 믿고 있습니다. 
 
 
오늘보다 한국에서도 모낙폐를 결성하고 싸움을 시작했기 때문에, 아르헨티나의 낙태죄 폐지 연대체가 어떻게 운영되어왔는지가 궁금합니다. 아르헨티나의 ‘합법적인,안전한,무상의임신중지권을위한전국캠페인(이하 캠페인)’은 어떻게 결성이 되었고, 어떤 단체들이 참여해왔으며, 어떤 요구들을 중심으로 활동해왔나요? 
 
CTA-A 캠페인은 아르헨티나의 임신중지권 투쟁의 역사를 바탕으로 많은, 다양한 단체들이 전국적으로 모여 만든 연대체입니다. 아르헨티나에는 1년에 한 번씩 전국 여성의 모임(National Women’s Encounter)이 있는데, 캠페인은 30년도 더 전에 이러한 모임 과정에서 생겨났고, 2004년에 연대체로 정식 결성되었습니다. 캠페인 결성에는 페미니스트 그룹들뿐만 아니라 다양한 정치적·사회적 단체와 노동조합에서 활동하는 여성들이 참여했고, 오늘날 참여단체는 305개에 이릅니다. 

캠페인은 3가지 기본 목표를 세웠습니다. 첫째, 아르헨티나의 낙태죄 폐지와 임신중지 합법화를 위한 논의를 사회와 국가를 대상으로 조직합니다. 둘째, 더 많은 여성과 단체들이 이 과정에 참여하고 우리의 요구를 풍부하게 만들 수 있도록 조직합니다. 셋째, 낙태죄 폐지와 합법적인 임신중지를 쟁취합니다. 

캠페인에 참여하고 있는 모든 단체가 동의하는, 우리를 하나로 묶어주는 슬로건은 “결정할 권리를 위한 성교육, 임신중지를 피하기 위한 피임, 죽음을 피하기 위한 합법적 임신중지”입니다. 제가 속한 아르헨티나노총은 오랜 시간 대의원대회 등에서 논의를 거친 결과로, 캠페인이 시작될 때부터 캠페인에 함께 해왔습니다. 
 
오늘보다 임신중지 합법화 법안은 캠페인에 의해 지난 14년 동안 6번 제출되었지만, 입법에 성공하지 못한 것으로 들었습니다. 긴 기간 동안 수차례의 실패를 겪으면서 어떻게 투쟁의 동력을 계속 유지하고 확장했나요?
 
CTA-A 우리는 언제나 이 투쟁이 장기적인 일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법안을 하원에서 통과시키기 위한 준비를 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의 핵심 운동 방향은 아르헨티나 사회와 노동자들이 우리의 요구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되어야 한다는 점을 잊지 않았습니다. 사실 그것이 우리가 의회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가장 주된 방법이기도 하지요. 대중적 힘을 형성해야 한다는 것이 우리가 지난 8월 8일 투쟁에서 제일 강조한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강조한 또 다른 것은 우리 캠페인의 요구가 명확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앞서 말한 우리의 슬로건 역시 매우 명료합니다. 우리가 다양한 요구를 개발하는 과정에서도, ‘낙태죄 폐지’라는 핵심 요구는 다른 요구들과 뒤섞이거나 후퇴한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이 핵심 요구를 올곧게 유지했기 때문에, 핵심 요구를 수정하려는 시도나 논쟁 없이도 점점 더 많은 단체와 함께 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보다 일곱 번째인 이번 합법화 시도에서는 폭발적인 대중투쟁이 두드러졌습니다. 마우리시오 마크리 현 아르헨티나 대통령이 올해 임신중지 합법화를 정치 이슈화했기 때문이라고 보는 언론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단 한 명도 잃을 수 없다(Ni Una Menos, 여성살해와 여성에 대한 폭력에 맞서는 운동)” 운동 같은 사전 흐름이 더욱 중요했을 것 같습니다. 아르헨티나 전역에서 광범위한 시위가 촉발된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CTA-A 아르헨티나의 페미니즘 운동은 지속해서 성장해왔습니다. 일터와 대학과 가정과 거리와 언론과 SNS에서 우리의 담론을 확장하고 논쟁의 장을 열어왔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운동이 아직 그렇게 크고 대중적이지 않을 때부터 투쟁의 경험을 쌓아왔습니다. 그 경험들이 페미니즘 운동의 중요성을 점차 많은 동지에게 이해시키고 확신시키는 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올해의 투쟁은 그 성과라 할 수 있겠습니다. “단 한 명도 잃을 수 없다” 운동이 전 세계적으로도 주목받았고, 최근 몇 년간 페미니즘 운동의 최고점이기는 했지만, 이번 투쟁에서 백만이 넘는 사람들이 거리로 나올 수 있었던 것은 그 운동 하나만으로 설명될 수는 없습니다. 거의 15년에 걸친 우리 캠페인의 투쟁의 경험과 젊은 여성들의 대대적인 참여가 만난 것이 핵심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오늘보다 앞서 이번 투쟁의 과정에서 여성의 생명보호만이 아니라 다양한 여성의 권리들을 제기하게 되었다고 하셨습니다. 한국에서도 낙태죄 폐지 투쟁이 여성을 억압하는 사회 구조 전반을 바꾸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습니다. 투쟁이 어떻게 확장되어왔는지 궁금합니다.  
 
CTA-A 말씀드렸듯이 우리의 슬로건은 ‘결정할 권리를 위한 성교육, 임신중지를 피하기 위한 피임, 죽음을 피하기 위한 합법적 임신중지’입니다. 이 중 포괄적인 성교육 시행 법안은 이미 쟁취했습니다. 비록 몇몇 지역에서는 아직도 제대로 교육이 시행되고 있지 않지만요. 공공의료기관을 통한 피임 접근권도 투쟁으로 쟁취한 상태입니다. 물론 이러한 권리들은 계속 우리의 힘으로 지켜내야 하고, 제대로 시행되는지 지켜보아야 합니다. 이러한 권리들을 쟁취해 온 과정이 오늘날 임신중지 합법화 논쟁의 길을 열었습니다. 

한편 많은 이들은 정부와 교회의 유착관계, 그리고 여성을 억압하는 가부장적 사회구조에 맞서는 것도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는 지배적인 사회구조에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기 때문에 긴 싸움이 되겠지만, 우리가 이를 이미 우리 투쟁의 목표로 잡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오늘보다 우리는 노동조합과 노동자가 사회운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이 임신중지 합법화 투쟁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르헨티나노총은 전국 캠페인 결성 단계에서부터 함께했다고 알고 있는데, 투쟁 과정에서 어떠한 활동을 해 왔나요? 조합원들의 참여를 조직하기 위해 어떠한 과정들이 있었나요? 
 
CTA-A 아르헨티나노총은 1999년에 전국 대의원대회에서 임신중지 합법화를 우리의 투쟁과제로 승인했습니다. 그러나 이 결정 자체로 조합원들의 참여가 조직되는 것은 아닙니다. 안건을 의결하거나 규칙으로 정한다고 해서 조합원들의 자발적 참여가 자동으로 따라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각 지역과 가맹조직에서 모든 여성과 남성 동지들이 활발하게 토론을 해나가야만 한다는 점을 잊지 않고 토론 활성화에 힘썼습니다. 여성 동지만이 아니라 남성 동지들도 참여하게 하는 것 역시 중요합니다. 일단 조합원들이 진심으로 동의가 되면, 이들은 각자의 일상과 각자의 노동조합 활동에서 투쟁 조직에 나섭니다. 그러한 모습을 보는 것이 가장 흥미로웠습니다. ●
 
의회 밖 철야 농성에 함께한 아르헨티나노총
 
‘결정할 권리를 위한 성교육, 임신중지를 피하기 위한 피임, 죽음을 피하기 위한 합법적 임신중지’라는 여성의 재생산 권리 전반을 목표로 장기전을 대비해 온 아르헨티나의 <합법적인,안전한,무상의임신중지권을위한전국캠페인>으로부터 배울 점이 많다. 아르헨티나 노총이 그랬던 것처럼, 장기전을 준비하는 모낙폐와 민주노총은 한국 사회와 노동자들이 여성의 재생산 권리를 이해하고 받아들이게 하는 데 힘을 쏟아야 할 것이다.

이미 15년의 역사를 지닌 아르헨티나 여성들의 투쟁은, 오늘의 실패에 발목 잡히지 않는다. 이들에게는 이미 여성의 온전한 권리가 다가오고 있다. “아보르토 레갈 야(Aborto Legal Ya: 지금 당장 임신중지를 합법화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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