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광주전남지부


  • 책보다
  • 2018/10 제45호

정치의 배반, 포퓰리즘의 역습

야스차 뭉크, ≪위험한 민주주의≫

  • 이준혁

마지막 정치인, 마지막 함성

8월 25일. 존 매케인 미국 상원의원이 세상을 떠났다. 향년 81세. 2008년 그가 공화당 대선후보로 나섰던 시절의 한 에피소드가 회자되었다. 한 집회에서 자신의 지지자가 버락 오바마 당시 민주당 대선 후보를 ‘아랍인’이라 비난하는 말을 꺼냈다. 매케인은 바로 마이크를 뺏어 들고 자신의 경쟁자를 변호했다.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미국 시민입니다. 단지 저는 어쩌다 보니 그와 근본적 이슈들에 있어 의견이 다를 뿐입니다.” 가짜 뉴스를 이용하기보다는 품위 있는 경쟁을 추구한 것이다.

매케인의 미담이 회자되는 건 역설적으로 지금의 민주주의 정치가 그렇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을 비롯하여 전 세계를 휩쓸고 있는 극우적 포퓰리스트[1]들은 혐오와 증오의 발언을 서슴지 않는다. 혐오는 주로 외국인, 이주자를 대상으로 하지만 때로는 정치, 경제 분야의 엘리트, 때로는 좌파, 때로는 정치적 반대파를 향하기도 한다.

매케인의 장례식에는 오바마를 포함한 전직 대통령들이 초대되었다. 그 시각, 트럼프는 골프를 치고 있었다. <워싱턴 포스트>은 다음과 같은 평을 남겼다. “지난 20년간 전직 대통령들과 모든 주요 정당의 후보들이 함께한 이날 장례식은 이 나라가 한때 당연한 것으로 여겼던 세계적인 지도력에 대한 우울한 마지막 함성이었다.”
 
 

자유민주주의 내부의 위험

여기서 소개할 책 《위험한 민주주의》는 민주주의 정치가 붕괴하는 우울한 시대의 이야기를 다룬다. 정치학자이자 자유민주주의의 열렬한 수호자이기도 한 작가 야스차 뭉크는 프란시스 후쿠야마의 그 유명한 《역사의 종말》을 인용하며 긴 책을 시작한다. 1989년 후쿠야마는 냉전은 끝났고 그로 인해 “서구 자유민주주의가 보편화”되고 최후의 승리자가 되었다고 선언했다. 저자는 묻는다. 대체 ‘자유민주주의의 최종적 승리’는 어디로 갔냐고. 25년 전만 해도 3분의 2가 넘는 미국인들은 자유민주주의 체제에서 사는 것을 자랑스러워했다. 지금은 3분의 1 이하만 같은 생각을 가지고 산다. 25년 전만 해도 민주주의의 기본 원리와 규범에 대해서는 정파를 막론하고 서로 존중하는 모습이었다. 이제는 자유민주주의의 가장 기본적 규범을 부수려는 포퓰리스트들이 큰 권력을 얻고 있다. 그리고 저자는 말한다. 지금은 더 이상 평시가 아니라고. 민주주의 적들로부터 자유민주주의를 지키려면 ‘특별한 길’로 나아가야 한다고.
 
자유민주주의가 직면한 위험을 명확히 알려면 그것이 무엇인지부터 알아야 한다. 저자의 정의를 따라가 보자. 우선 ‘민주주의’는 국민의 뜻을 공공정책으로 재구성하는 일련의 제도를 일컫는다. 물론 그 방식은 선거다. 반면 자유주의는 법치주의 이름 아래 모든 개인의 권리를 보장하는 체제다. 여기서 말하는 권리에는 언론, 종교, 출판, 결사의 자유와 같은 것들을 포함한다. 저자가 명시적으로 쓰지 않지만, 재산권 등도 포함된다. 자유민주주의는 이 둘을 합친 정치적 시스템이다. 개인의 권리를 보호하면서도 국민의 뜻을 국가의 정책으로 변환하는 정치체제다.
 
저자는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의 결합은 필연이 아닌 순전히 우연이라고 한다. 그 때문에 자유민주주의는 태생적으로 두 가지 방식으로 삐뚤어질 수 있다. 민주주의가 반자유주의가 되어 (소수자를 포함하는) 시민의 권리가 국민의 이름으로 침해되는 경우가 있다. 파시즘을 생각하면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또 다르게 자유주의가 반민주주의가 되어 엘리트의 권리만을 보장하는 왜곡된 정치로 나갈 수 있다. 이 상태에서는 아무리 선거를 치르더라도 국민의 뜻이 국가 정책에 반영되지 않는다. 저자는 전자를 ‘권리 보장 없는 민주주의’, 후자를 ‘민주주의 없는 권리 보장’으로 칭한다.
 

자유주의의 습격, 포퓰리스트의 복수

현존 질서를 꾸준히 옹호하는 저자지만 문제의 원인은 겸허하게 인정한다. 먼저 포문을 연 것은 반민주주의가 되어버린 자유주의라고. 정확히 말하면 지난 수십 년 동안, 정계와 재계의 엘리트들이 대중과 자신을 뚜렷하게 분리해왔다고 지적한다. 세계화가 진행되면서 수많은 중요 사안들이 정치 공론장을 떠나 각종 무역협정이나 국제 독립기관들의 손에 처리되고 있다. 지난 30년 동안 서구의 정치에서 법원, 관료기구, 중앙은행, 초국가적 기구의 역할이 비대해졌다. 동시에 로비스트의 활동, 정치자금의 규모도 대폭 증가했다. 일례로 미국 하원의원에 당선되려면 1986년에는 60만 달러 정도면 충분했으나 지금은 160만 달러로도 부족하다. 정치 엘리트들의 카르텔이 더욱 공고해지면서 국민들과의 거리는 더욱 멀어졌다.
 
저자는 이러한 병폐를 해소하려면 엘리트들에게서 권력을 빼앗아 국민에게 결정권을 되돌려주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도 이러한 슬로건을 내거는 이들이 다름 아닌 ‘새로운 포퓰리스트’들임을 잘 알고 있다. 미국의 트럼프부터 오스트리아, 프랑스, 스웨덴 … 민주주의의 전통이 뿌리 깊은 유럽에서 극우 포퓰리스트들은 ‘엘리트들의 카르텔’을 맹렬하게 공격하고 있다. 그리고 자신을 국민 뜻의 진정한 대변자로 상징시킨다.
 
그들의 주장은 간단하다. 우리 시대의 가장 시급한 문제들, 예컨대 불평등과 빈곤, 불안전 등의 해결책은 다른 엘리트적 정치가들이 말하는 것보다 훨씬 간단명료하다고. 대다수의 평범한 국민들이 본능적으로 무얼 해야 하는지 이미 알고 있으며 그 진정한 목소리가 정치 체제에 통하기만 한다면 대중의 불만은 빠르게 사라질 것이라 외친다. 물론 미국 서부의 부유하고 자유민주주의를 선호하는 유권자들은 트럼프를 반민주주의자라고 부르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저자는 그렇게 보기 어려운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본다.
 
나아가 저자는 새로운 포퓰리스트의 부상이 자유민주주의가 처음부터 가지고 있던 한계에서 비롯된다고 본다. 저자의 표현을 빌리자면, 지난 30년간 서구에서 '민주주의 없는 권리 보장'이 몰아쳤고 이제 그 반작용으로 '권리 보장 없는 민주주의'가 휘몰아치는 게 지금의 현상이다.
 

실패의 원인

무엇 때문에 자유민주주의는 실패했는가. 저자는 세계대전 이후 자유민주주의가 승승장구한 이유는 세 가지라고 한다. 그리고 정확히 그 이유들에서 지금 실패하고 있다고 진단한다.
 
자유민주주의가 승승장구한 첫 번째 원인은 대부분의 시민의 생활 수준이 향상되었다는 점이다. 1935년에서 1960년까지 미국 일반 가정의 소득은 2배가 되었고 그다음 15년 동안 다시 2배가 되었다. 이때도 시민들은 정치인을 좋아하진 않았으나 적어도 선출된 공직자들이 공약은 지킬 것이며 자신들의 삶도 좋아질 거라 믿었다. 오늘날 그런 신뢰와 낙관은 사라졌다. 시민들은 미래를 불안해한다. 정치인에 대한 불신도 훨씬 강해졌다.
 
두 번째, 시민들 간 차이가 매우 적었다. 대부분의 성공한 민주주의 국가에서 대체로 한 인종 혹은 민족 집단이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했다. 시민들 간의 동질성에 의존하여 제 기능을 해온 것이 민주주의였다. 지금은 어떤가. 저자는 수십 년 동안 대규모 이민과 사회운동, 세계화 때문에 많은 것이 변화했다고 본다. 국민 일부는 변화를 환영하지만 다른 일부는 위협과 분노를 느끼고 있다.
 
마지막으로 이전의 대중매체는 정계와 재계 엘리트의 전유물이었다. 일반 시민이 신문, 라디오, TV를 운영하기란 매우 어려웠다. 정치 엘리트들은 이를 이용하여 극단적 관점을 소외시켰고 자유민주주의 정치는 큰 원칙에서는 비교적 합의된 상태로 움직였다. 그러나 이제는 인터넷과 소셜미디어의 시대가 되었다. 불안을 조성하려는 선동자들은 매우 손쉽게 극단적이면서도 가짜인 뉴스를 엄청난 속도로 퍼뜨릴 수 있게 되었다.
 
 

새로운 희망: 자유민주주의의 귀환?

저자의 결론은 꽤 명확하다. 포퓰리스트들이 다시는 권력을 잡지 못하게 하려면 자유민주주의가 다시 한번 시민들의 요구에 부응해야 한다는 것이다. 저자는 자유민주주의의 기본 원칙(개인의 인권 보장, 다수에 의한 지배)이 문제가 아니기에 그것이 가능하다고 믿는다. 단지 그러한 기본 원칙들이 아직 실현되지 않았을 뿐이다. 자유민주주의의 보편적 원칙을 버리기보다는 궁극적으로 실현되도록 싸워야 한다고 주장한다. 외국인, 이주민들에게도 포용적인 민주주의 체제, 경제적으로도 조금 더 포용적인 체제가 실현되도록 말이다.
 
그러나 단지 과거의 원칙을 다시 수립하는 것으로 지금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을까. 저자가 지적하는 자유민주주의가 실패한 원인들만 보아도 극복이 쉽지 않아 보인다. 세계 자본주의의 위기는 점점 심각해지고 있다. 저자의 말대로 포용적 경제 체제를 만들려면 기득권을 지키려는 정계, 재계 엘리트들을 강력하게 통제해야 한다. 무릇 위기의 시대이기에 이들의 반발도 거셀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강력한 힘을, 대체 어디에서 만들 수 있단 말인가. 저자는 (포퓰리스트의) 야당들의 연대와 엘리트들의 자성에 호소할 따름이다. 도덕적으로야 올바를지 모르지만, 현실에서는 무력하기 그지없다.
 
시민 내부의 동질성을 회복 역시 비슷한 한계를 보일 가능성이 크다. 저자도 언급하듯이 당시의 동질성은 강력한 힘을 가진 특정한 인종, 성별, 민족 집단이 다른 정체성을 억누른 것이나 마찬가지기 때문이다. 백인, 남성, 자본가 … 과연 새롭게 부상하고 있는 페미니즘, 소수민족의 운동에 자유민주주의는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새로운 시민적 정체성이 필요할 것이나 여기서 저자는 해법을 명확히 제시하지 않는다. 그저 포용과 자성을 호소할 것임을 미루어 짐작할 따름이다.
 
결말 부분의 여러 한계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찬찬히 읽어볼 가치가 있다. 트럼프와 극우 포퓰리스트들이 어떻게 부상하게 되었고 무엇이 문제인지, 현존 체제의 문제는 무엇인지 조목조목 짚어주기 때문이다. 저자의 말대로 우리는 이 체제의 불안정이 어떤 의미인지 이제 막 알기 시작했을 뿐이다. ●
 
 

Footnotes

  1. ^ 인민주의, 포퓰리즘, 인기영합주의 등 여러 표현이 있으나 이 글에서는 책의 표현에 따라 포퓰리즘, 포퓰리스트로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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