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광주전남지부


  • 노동보다
  • 2018/12 제47호

탄력근로제는 경사노위 입장인가

민주노총은 경사노위 참여를 단호히 거부해야

  • 사회진보연대
문재인 정부가 탄력근로제를 확대하겠다고 소매를 걷어붙였다. 지난 11월 5일 문재인 대통령과 여야 4당은 탄력근로제 확대 도입 입법에 합의했다. 문재인 정부의 이런 시도는 15년 전 노무현 정부를 빼닮았다. 2003년 노무현 정부는 주 노동시간을 44시간에서 40시간으로 줄이는 동시에, 탄력근로제를 1개월 단위에서 3개월 단위로 늘렸다. 문재인 정부도 주 초과 근로시간을 28시간에서 12시간으로 줄인 직후 탄력근로제 확대를 시도하고 있다.

한편 문재인 정부는 사회적 대화기구를 표방하는 경제사회노동위원회(이하 경사노위) 출범에도 힘을 싣고 있다. 대통령이 직접 출범식에 참석해 정치적 상징성을 보탰다. 역대 정부는 고용·임금·노동시간 등 규제 완화가 필요할 때마다 사회적 대화기구의 문을 두드려 왔다. 1996년 김영삼 정부, 1998년 김대중 정부, 2003년 노무현 정부 모두 그랬다. 탄력근로제 논란과 함께 경사노위가 출범하는 지금의 상황은 언제나 있어왔던 이벤트였다는 얘기다. 

사회진보연대는 탄력근로제 확대에 반대한다. 민주노총 현 집행부의 경사노위 참여 시도에도 우려를 표한다. 우리는 노동 신축화와 사회적 대화기구가 한국 사회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 분명하게 알고 있다. 민주노총이 경사노위 참여를 두고 우왕좌왕하는 것은 노동자계급에 또 한 번 죄를 짓는 일이다.
 


 탄력근로제 = 임금이 삭감되는 장시간 근무제

 
탄력근로제는 사업주에게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노동자를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는 특혜를 주는 제도다. 사업주는 탄력근로제를 이용해 초과근로수당 지급과 법정노동시간 관련 규제를 피할 수 있다.

1~2월에는 일이 많고, 3월에는 일이 적은 사업장이 있다고 가정해보자. 이 사업장의 시급은 1만 원이다. 노동자들이 1~2월에 잔업·특근을 40시간만큼 했다면, 사업주는 초과근로수당으로 시급 50퍼센트에 해당하는 20만 원을 지급해야 한다. 그런데 탄력근로제에서는 계산법이 다르다. 사업주가 일이 적은 3월에 근무시간을 40시간 줄이면, 초과근로수당 20만 원을 지급하지 않아도 된다.

탄력근로제는 초과근로의 계산 단위를 하루 노동시간(8시간) 단위가 아니라 2주 또는 3개월의 주간 노동시간 단위(80시간이나 504시간)로 바꾼다. 그래서 사업주는 초과근로수당을 절약하고, 노동자는 기존에 받던 초과근로수당을 빼앗긴다. 심지어 탄력근로제에서는 주당 노동시간 상한도 52시간에서 64시간으로 증가한다. 당연히 노동자는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이전보다 더욱 빨리 지칠 수밖에 없다. 장시간 노동이 건강에 미치는 영향은 익히 알려진 대로다.
 

탄력근로제는 탄력고용제의 다른 이름

 
문재인 정부는 탄력근로제를 현행 3개월 단위에서 6개월 또는 1년 단위로 확대하려 한다. 3개월 단위 탄력근로제가 기업이 현장에서 사용하기에는 충분히 유연하지 못하다는 이유에서다. 기업단체의 조사에 따르면 탄력근로제 적용 기업은 5퍼센트도 채 되지 않는다. 전경련, 경총 등은 탄력근로제가 1년은 되어야 실효성이 있다고 주장한다.

기업들이 기를 쓰고 탄력근로제를 확대하려는 이유는 제도적으로 노동 강도를 강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일이 많을 때 고강도로 40시간, 일이 없을 때 저강도로 40시간 일하는 것보다, 일이 많을 때 고강도로 50시간, 일이 적을 때 고강도로 30시간 일하는 것이 기업의 입장에서는 이득이다. 같은 80시간 근무라도 노동시간을 어떻게 배분하는가에 따라 총 노동 강도에서 차이가 생긴다. 물론 노동 강도를 높여도 임금은 전혀 증가하지 않는다. 기업이 노동시간 신축화로 노리는 게 바로 이것이다. 기업은 이윤을 유지하기 위해 노동시간이 단축될 때 노동 신축화로 노동 강도를 강화하고자 한다. 실제로 1990~2000년대 유럽에서는 노동시간 단축과 신축화가 동시에 이뤄져, 기업 이윤에는 부정적 영향이 없었다.

이런 식의 노동 강도 강화는 노동자에게 큰 손해다. 두 가지 이유에서다. 첫째, 앞서 봤듯 노동자는 임금과 건강 모두에서 손해를 본다. 노동시간 신축화를 통한 노동생산성 향상은 기술 진보나 자본 투자를 동반하지 않는 순수한 노동 강도의 강화일 뿐이다. 둘째, 경제위기 상황에서 노동자의 소득, 일자리가 크게 위험해진다. 노동 강도 강해져도 일감이 꾸준히 늘어나면 상관없지만, 반대로 노동 강도가 되돌릴 수 없을 만큼 강화되었는데도 경기침체로 일감이 감소하면, 고용은 이전보다 몇 배로 불안해진다. 이런 식으로 노동시간 신축화는 고용 불안을 증폭시킨다.
 

사회적 대화기구는 독이 든 사과 

 
노동 신축화, 즉 고용·임금·노동시간 관련 규제를 자본이 마음대로 조정하게 허용하는 제도 변화를 사회적 대화로 관철하는 것은 정부와 자본의 일관된 전략이다. 정부와 자본은 사회적 대화기구에서 노동운동의 노동기본권 보장 요구를 들어주는 척하며 노동 신축화를 관철해왔다. 1996년 김영삼 정부는 ‘노사관계개혁위원회’에서 3제(정리해고제, 파견제, 탄력근로제) 처리를 목적으로 3금(복수노조 금지, 정치 활동 금지, 제3자 개입 금지) 해지를 제시했다. 1998년 김대중 정부는 노사정위원회에서 정리해고제 즉각 실시와 파견제 확대를 처리할 목적으로 교원노동조합 인정, 노동조합 정치 활동 보장, 실업자 초기업노조 가입 허용 등을 빅딜로 제시했다. 2006년 노무현 정부도 노사관계선진화로드맵이란 이름으로 비슷한 빅딜을 시도했다.
 
 
이러한 ‘빅딜’은 노동자들에게 큰 문제를 야기했다. 첫째, 노동자의 피해가 너무나도 컸다. 정리해고제, 파견제 시행으로 발생한 해고와 비정규직 피해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지금의 ‘헬조선’을 만든 원흉이라 봐도 무방하다. 둘째, 그 댓가로 노동운동이 얻은 변화는  불완전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20년 간 빅딜의 대상이었던 교원의 노동기본권은 아직도 미완이고, 초기업노조와 관련한 제도도 엉망이다. 만약 사회적 대화기구에서 노동자들의 손익을 따지는 대차대조표를 작성한다면 대규모 적자로 도배되어 있을 것이다.

문제는 이런 쓰라린 경험에도 불구하고 민주노총 현 집행부가 경사노위 참여를 적극 추진하고 있다는 것이다. 홍영표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는 탄력근로제 확대를 주장하면서 ILO 협약 비준, 전교조 합법 노조 지위 회복, 공무원노조 해직자 문제 해결 등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경사노위 산하 노사관계위원회도 이와 비슷한 입장을 공익위원 권고안이란 형태로 발표했다. 그러나 실제 내용을 보면 경총이 요구하는 대체 근로 허용 등 사용자 대항권을 노동기본권과 동시에 처리하겠다는 뜻을 담고 있다. 결국 경사노위에 참여해 탄력근로제의 부작용을 최소화하고, 노동기본권과 관련한 제도 개혁을 따내야 한다는 민주노총 현 집행부의 기대는 실현 불가능하다. 오히려 탄력근로제는 합의해주고, 노동기본권 확보도 경총에 밀려 후퇴하는 정반대의 결과로 끝날 가능성이 높다. “역사는 한 번은 비극으로, 또 한 번은 희극으로 반복된다”했던가. 현재 민주노총이 딱 그 꼴이다.
 


민주노총, 거래의 기술보다는 노동자계급의 대안을 제시해야

 
1996년 정부와 자본은 3제를 통과시키는 과정에서 국회 날치기 통과라는 무리수까지 두었다. 물론 자본 측에서는 나름의 ‘합리적 이유’가 있었다. 일촉즉발의 경제위기 상황 때문이었다. 한국 경제는 1990년대 중반 이윤율이 폭락하며, 해외부채, 무역적자, 금융기관의 부실채권 등이 모두 증가했고, 남미와 아시아를 휩쓸던 외환위기 영향권에도 노출됐다. 날치기 통과 이후의 일이었지만 1997년 재벌 대기업의 연쇄 부도와 IMF 구제금융은 그 당시 자본이 얼마나 절박했는지를 방증해주는 사례다. 1990년대 중반의 자본가들은 노동자를 쥐어짜 이윤을 늘리지 않고서는 살아날 방법이 없었다. 그리고 결국 IMF의 도움을 받아 1998년부터 시작된 노동시장 신축화로 한국의 자본가들은 경제위기를 극복하고 이윤율을 회복할 수 있었다.

지금의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다. 예전보다 경제 제도가 선진화되어 외환위기 같은 극단적 상황이 닥치지는 않겠지만, 반도체를 제외한 중화학공업 전반의 부진, 엄청난 가계 부채, 내수 침체, 하락하는 경제성장률 등으로 한국 경제는 총체적 위기 상황에 빠져 있다. 2007년 세계 금융위기 이후 이윤율도 하락하고 있다. 문재인 정부는 최저임금을 올려놓고 감당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자 산입범위를 조정해 인상 효과를 무력화했다. 이제는 노동시간을 단축한 후 탄력근로제를 확대해 노동 강도를 높이려 하고 있다. 혁신성장이란 이름으로 이전 정부들과 비슷한 규제 완화도 추진 중이다. 문재인 정부 역시 20년 전과 비슷하게 노동자를 쥐어짜 경제위기를 지연해보려 한다.

이런 상황에서 민주노총은 대체 무엇을 가지고 사회적 대화를 하려는 것인가? 노동 신축화와 불완전한 노동기본권 개선을 교환한 지난 사회적 대화의 잘못된 역사를 되풀이하려는 건 아닌가? 아니라면 혹시 현 집행부가 ‘거래의 기술’로 노동자계급의 위기를 해결할 수 있다는 환상에 빠진 것은 아닌가? 이도 저도 아니라면 이미 조직된 노동자는 단체협약으로 탄력근로제를 무력화할 수 있으니 미조직 노동자는 내팽개치고 실리라도 챙겨보자는 안일한 인식을 하고 있지는 않은가?

오늘날 민주노총에 필요한 것은 자본과의 대화가 아니다. 자본주의 위기를 노동자 계급의 대안으로 돌파할 지혜와 실력이 필요하다. 국가 부도를 교섭 테이블 위에 두고 자본의 모든 요구에 굴복해야 했던 1998년의 경험을 뼈저리게 반성해야 한다. 노동자 계급의 대안이 없다면, 위기 앞에서 노동자는 자본의 협박에 굴복할 수밖에 없다. 지금 한국의 위기를 직시하고, 민주노총이 사회를 변화시키기 위한 자신의 대안부터 만들어야 한다. 탄력근로제를 입장료 삼아 경사노위에 참여하겠다는 것은 민주노총을 두 번 죽이는 일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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