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광주전남지부


사회운동

사회진보연대 계간지


2001.12.2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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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의학의 과거와 현재 : 라틴아메리카의 교훈

박주영 | 민중의료인연합
하워드 웨이츠킨(Howard Waitzkin)
셀리아 이러트(Celia Iriart)
알프레도 에스트라다(Alfredo Estrada)
실비아 래머리드(Silvia Lamadrid)*{{*하워드 웨이츠킨과 셀리아 이러트는 뉴멕시코대학 가정의학 및 지역사회의학 교실의 지역사회의학 분과에 재직 중이다. 셀리아 이러트는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소재 아르헨티나노동자 중앙조직에서 일하고 있다. 알프레도 에스트라다와 실비아 래머리드는 칠레 산티아고 소재 사회의학 연구/훈련그룹에서 일하고 있다. 실비아 래머리드는 산티아고 소재 칠레대학에 재직 중이기도 하다.}}

번역 : 박주영(민중의료연합)


라틴아메리카의 사회의학이 연구, 교육 및 임상진료 영역에서 널리 주목받는 분야로 발전해 왔지만 그 성과는 영어권 지역에 별로 알려져 있지 않다. 이러한 지적 공백은 부분적으로 스페인어나 포르투갈어로 된 중요한 출판물이 영어로 번역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흔히 제3세계의 지적이고 과학적인 생산물이 우리 시대의 중요한 과제를 해결하는 데 엄격하고도 적절한 접근이 아니라는 잘못된 인식이 나타난다.
이 글에서 우리는 라틴아메리카 사회의학 분야의 역사를 기술하고, 이 분야 지도자의 일상 활동에 직면한 도전을 서술한다. 그리고 라틴아메리카 사회의학에서 등장한 관련 논쟁과 이론적 접근, 방법론, 주요 테마를 분석할 것이다. 또한 사회의학의 정의, 그리고 사회의학과 공중보건의 차이에 관한 라틴아메리카에서의 시각을 제시한다. 아르헨티나, 브라질, 칠레, 콜롬비아, 쿠바, 에콰도르, 멕시코 등 사회의학의 중심지에서 이루어진 작업에 대한 비판적 검토는 별도의 논문에서 다룬다.
본 연구에서는 스페인어와 포르투갈어로 출판된 문헌과 출판되지 못한 문헌, 과거 기록에 대한 연구, 그리고 사회의학 분야의 지도자, 이 분야에 관여한 의료인과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심층 인터뷰 결과를 검토하였다. (요약된 방법론은 본 논문의 교신저자에게 연락하거나 웹사이트 http://hsc.unm.edu/ lasm를 방문하면 얻을 수 있다)


역사적 발전

라틴아메리카의 시각에서 사회의학의 역사를 설명하는 대다수의 사람은 사회의학의 기원이 유럽에서 비롯되었음을 강조한다. 그러한 역사적 설명에서 보통 독일의 루돌프 비르효(Rudolf Virchow)의 업적을 인용한다. 특히, 1848년 혁명에서 정점을 이룬 개혁운동에서 그의 정치적 행동주의를 통해, 비르효는 사회적 환경이 질병과 사망에 미치는 영향에 관한 영향력 있는 일련의 연구를 시작했다. 그는 병리학적 관찰 결과와 통계 자료를 제시하면서, 질병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근본적인 사회개혁이 필요하다고 주장하였다. 비르효는 사회의학을 "사회과학"으로 정의하는데, 이는 질병을 유발하는 사회적 조건에 초점을 맞춘 것이었다.
비르효의 지지자들은 세기가 바뀌는 시점에서 라틴아메리카로 이주했다. 비르효 추종자는 의과대학에 병리학교실을 설치하는 데 기여했으며 사회의학 교육과정을 마련했다. 예를 들어, 탁월한 독일 병리학자인 막스 베스턴호퍼(Max Westernhofer)는 칠레대학교 의과대학에서 수 년간 병리학교실의 책임을 맡으면서 여러 세대의 학생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여기에는 당시 의대 학생운동가이면서 앞으로 병리학자를 거쳐 미래의 칠레대통령이 될 살바도르 아옌데(Salvados Allende)도 포함되어 있었다.

살바도르 아옌데와 칠레 사회의학의 "황금시대"

칠레 사회의학의 기원은 19세기 중반으로 거슬러 올라가지만, 1918년 전국적 파업 이후 가장 왕성한 활동이 시작되었다. 그 해 동안, 북부 사막지방에서 일하던 초석산업 노동자는 임금 및 수당 인상, 노동조건 개선을 목표로 다른 산업 노동자의 동맹파업을 호소했다. 루이 에밀리오 레커베렌(Luis Emilio Recabarren)은 초석산업 노동자 사이에서 강력한 통솔력을 지닌 조직가로, 영양실조, 전염병, 조기사망의 파괴적 결과를 강조했다.
이후 3년 동안 레커베렌과 그의 정치적 협력자는 경제개혁을 부르짖었다. 이들은 가난한 자를 해치는 질병과 사망을 개선시키는 유일한 실행 가능한 길은 경제개혁이라고 주장하였다. 1920~30년대 동안 칠레에서 사회의학이 크게 번성하였는데, 이는 부분적으로 노동운동의 요구에 대한 응답이기도 했다.
의사이자 병리학자로서 아옌데의 경험은 정치가로서 이후 생애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아옌데는 유럽에서 질병의 사회적 근원을 연구하였던 비르효와 다른 이들의 성과 위에서, 저개발 상황에서 의료 문제를 설명하는 모델을 정립하였다. 비록 비슷한 기기에 북미와 유럽에서 사회의학과 비슷한 활동이 전개되고 있었지만, 이러한 발전은 아옌데가 거둔 성과에 직접 영향을 미치지는 않은 것 같다.
새로 구성된 인민전선 정부의 보건부 장관이 된 아옌데는, 1939년 그의 저서에서 사회 구조, 질병과 민중의 고통과 피해 사이의 관계를 분석했다. 이것이 고전이 된 그의 저서〈칠레의 의료-사회적 현실〉(La Realidad Medico-Social Chilena, The Chilean Medico-Social Reality)이다. 이 책에서 질병을 "가난한 사회적 조건이 낳은 결과로서 개인에 대한 침해"라고 정의하였다. 아옌데는 질병을 초래하는 "노동계급의 생활조건"을 묘사했는데, 이는 당시 라틴아메리카 상황에서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는 것이었다. 그는 저개발, 국제적 상호의존의 사회적 조건 그리고 외채와 노동과정의 효과를 강조하였다. 아옌데는 이 책에서 몇 가지 특정한 건강 문제에 초점을 맞추었는데, 여기에는 모성 및 영아 사망, 결핵, 성병 및 기타 전염병, 정서적 문제, 직업병 등을 포함하였다. 그는 예전에는 전혀 연구되지 않던 문제를 연구하였다. 불법적 낙태의 원인, 치료법의 혁신보다 경제수준 향상으로 결핵이 훨씬 잘 낫는다는 사실, 전염병의 원인으로서 높은 주거밀도, 제약산업에서 카피 의약품과 오리지널 의약품 가격 책정의 차이 등을 분석하였다.
〈칠레의 의료-사회적 현실(La Realidad Medico-Social Chilena)〉로 제시된 보건부 장관의 제안은, 건강 문제를 해결하는 의료적 접근보다 사회적 접근을 옹호하는 독특한 방향을 지니고 있었다. 아옌데는 소득 재분배, 음식물과 의류 공급에 대한 국가 통제, 국가의 주거프로그램, 직업병 해결을 위한 산업 개혁 등을 제안했다. 아옌데는 노동력 생산성 향상의 수단으로 보건의료 서비스 개선을 바라보는 대신, 그 자체로 목적이 되어야 하는 인민의 건강을 중시하였고 의료 영역을 넘어서는 사회적 변화를 옹호하였다.
아옌데가 사회의학에서 취한 분석적 입장은, 1973년 군부쿠데타로 사망할 때까지 그의 정치적 업적 이면에 놓여있다. 병리학 분야에서 비르효와 베스턴호퍼가 이룬 업적 뿐 아니라 스페인내전도 아옌데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그 이후 라틴아메리카 사회의학의 많은 실천가에게도 마찬가지였다. 1930년대 후반 스페인에서 파시즘에 반대하고 더욱 평등한 사회를 쟁취하려는 투쟁은, 망명한 스페인 공화당의 공동체 활동가 사이에서 공중보건의 개선을 위한 운동을 이끌어내었다. 아옌데와 그 지지자들은 스페인의 공중보건운동을 통해 확보한 원칙을 적용하여 칠레의 변화를 도모하기 위해 노력했다.
아옌데는 1950년대 초반 상원의원으로 선출되어 서비스에 대한 보편적 접근을 보장하는 아메리카 대륙 최초의 국가프로그램인 칠레의 국민보건서비스를 창설하는 입법안을 제출하였다. 그는 이 개혁을 더욱 공정한 소득 분배, 고용 안정, 주거와 영양의 개선, 칠레에 대한 다국적기업의 영향력 약화 등을 성취하기 위한 시도와 연결시켰다. 이와 유사하게, 1960년대에는 상원의원으로서, 1970-1973년 사이에는 대통령으로서, 아옌데는 국민보건서비스와 여타 제도에서도 사회 전반의 변화를 달성하려는 개혁을 추구하였다. 아옌데가 통합적 공공보건의료서비스를 옹호하였으므로 칠레의사협회(Colegio Medico)는 그의 정책이 사적 진료 영역에 미치는 영향력을 두려워하여 종종 그를 반대하였는데, 1973년 쿠데타 직전에는 더욱 심했다.

다른 라틴아메리카 지역의 사회의학과 공중보건

다른 라틴아메리카 국가에서 1930년대의 칠레처럼 사회의학에 관한 시각이 정립되고 활동이 활성화되는 데까지 나아가지는 못했다. 그러나 최근 몇몇 연구 결과에서 명확해진 것처럼, 오늘날 사회의학 실천가의 활동은 라틴아메리카 공중보건을 위한 당시의 제반 노력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예를 들어, 많은 라틴아메리카 국가에서 사회의학 분야 지도자들은 록펠러재단의 공중보건 프로그램에 비판적이었다. 왜냐하면 그런 프로그램은 미국의 다국적 기업이 벌이는 사업에서 노동생산성을 향상시키는 것에 초점을 맞추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문헌을 검토하고 인터뷰를 하면서 내린 결론은, 다른 나라들보다 몇몇 국가에서 초기 사회의학의 역사가 훨씬 더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나타났다. 초기에는 브라질, 콜롬비아, 쿠바, 멕시코 등에서도 공중보건을 위한 노력이 있었다. 그러나, 현재 사회의학 분야 지도자의 견해는 이러한 과거의 노력이 그 국가의 사회의학 발전에 미친 영향력은 칠레, 아르헨티나, 에콰도르에서보다 적은 것으로 보고 있다.
예나 지금이나 라틴아메리카의 사회의학 분야 지도자는 사회의학과 전통적인 공중보건을 구별해왔다. 이러한 시각에서 보면, 공중보건은 인구집단을 개인의 합(a sum of individuals)으로 정의하는 경향이 있다. 성별, 연령, 교육수준, 소득, 인종/민족 등 고유한 특징에 따라 개인을 집단으로 분류한다. 전통적인 역학에서는, 그 집단을 구성하는 개인의 특성을 기준으로 특정 인구 집단의 역학 지표를 산술적으로 계산한다. 이와 달리 사회의학 분야의 대다수 연구는 사회 제도뿐 아니라 인구 집단 자체도 개인적 특성을 초월하는 총체적인 것으로 파악한다. 그러므로 사회의학은 문제를 정의하고 해결하는 데 있어서, 개인을 분석단위로 삼지 않고 사회를 분석단위로 채택한다. 이렇게 하여 특정 인구 집단을 단순히 개인의 특성이 아니라, 사회계급, 경제적 생산과 재생산, 문화 등의 범주로 분석할 수 있다.
사회의학과 전통적 공중보건의 또 다른 차이점은, 사회적 맥락의 영향에 대한 고려 여부와 질병/건강의 본질에 대한 인식의 차이에서 드러난다. 사회의학은 "건강-질병"을 이분법적 범주로 파악하기보다 변증법적 과정으로 개념화한다. 생물학의 변증법적 과정에 대한 엥겔스의 초기 해석, 레빈(Levin)과 르원틴(Lewontin)의 최근 해석에서처럼, 비판 역학자(critical epidemiologists)는 사회 조건을 고려한 모델로써 질병과정을 연구해왔다. 이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사회 조건이 바뀌고 그것이 미치는 영향도 변화한다는 점을 주목하기 위해서였다.
한 사회 내지 특정 사회 안에 존재하는 집단의 역학적인 특성을 파악하려면, 경제적 생산 및 재생산, 문화, 주변화, 정치 참여 같은 사회적 조건이 건강-질병의 동적 과정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에 대한 다층적 분석(multilevel analysis)이 필요하다. 이런 이론적 시각의 입장에서, 공중보건 분야에 적용되는 (질병의 존재 여부를 종속변수로 삼는 로지스틱 회귀모형 같은) 다변량 모형은 건강-질병을 역동적 과정으로 인식하는 것을 방해할 뿐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1920년대 아르헨티나에서 후앙 후스또(Juan B. Justo)가 이끌었던 그룹은, 공중보건의 지평을 넘어서기 위해 당시 "위생학적(hygienic)" 개입(higienismo)으로 알려진 노력을 하였다. 위생학적 개입은 전염병 관리, 위생 상태 개선, 영양, 그리고 인구 집단의 건강을 향상시키는 유사한 노력을 강조하였다. 통상적으로 위생학(higienismo)은 국가 개발과 국제 투자를 위한 노동력 생산성 향상이 목적이었다. 외과의사이기도 한 후스또는 사회당의 창립 지도자였고 맑스 자본론의 스페인어 초기 판본 번역에도 기여하였다. 후스또도 아옌데처럼 보건의료 서비스와 건강에 미치는 사회계급의 전반적 영향력에 주의를 기울였다. 그 결과 건강 개선의 기초로서 광범위한 사회 변화를 추구하려는 지역적·국가적 노력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위생학이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하면서 후스또의 입장은 소수 의견에 머무르게 되었다.
아르헨티나에서 발생한 사회의학의 또 다른 성과는 에르네스토 ("체 Che") 게바라(Guevara)의 노선이다. 그는 가족의 기대뿐 아니라 어린 시절 천식을 앓은 경험으로 의과대학에 입학했고 결국 알레르기 의학을 전공하게 되었다. 의대 졸업 후, 그는 남아메리카, 중부아메리카, 멕시코를 오토바이로 순회했다. 그는 이 여행 동안 목격한 가난과 고통에 대한 경험을 통해 건강 상태를 개선하기 위한 전제로서 혁명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게바라는 "혁명적 의료(revolutionary medicine)"에 관한 연설과 저작을 통해, 의사와 보건의료 노동자 조직이 질병의 사회적 기원과 건강 상태 개선을 위한 사회 변화의 필요성을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게바라는 라틴아메리카 사회의학에 깊은 영향을 끼쳤다. 혹자는 게바라의 시각이 부분적으로 아옌데, 후스또, 그리고 게바라 이전의 다른 이에 관한 지식에서 발전된 것이라고 추측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은 확실히 사실이 아니다. 의료에서 나름의 역할모델이 되어주었던 삼촌을 포함한 게바라의 측근에 따르면, 게바라는 수련 과정과 의사 생활 동안 라틴아메리카 사회의학의 초기 성과를 접해보지 못했다고 한다. 그는 오토바이 여행의 경험을 통해 사회적 조건과 건강을 연결하는 자신의 분석을 발전시켰던 것이다. (프란시스코 린치 게바라, 구두인터뷰, 부에노스아이레스, 아르헨티나, 1995)
에콰도르 사회의학 지도자의 유래를 살펴보면 15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세기 초반, 유게니오 에스페뇨(Eugenio Espejo)는 의사로서 그의 활동을 스페인에 대항하는 혁명투쟁으로 연결시켰다. 에스페뇨는 전염병을 관리하려고 노력하는 가운데 빈곤, 불충분한 주거와 위생, 영양실조가 전염병의 폭발적 발생을 가져 왔음을 확신하게 되었다. 이것은 한참이 지난 후에 독일의 비르효가 확신하게 된 사실이기도 한다. 또한 훗날, 20세기 초 사회보장 운동이 전개되는 가운데, "노동계급의 조건"에 대한 파블로 아르투로 수아레즈(Pablo Arturo Suarez)의 책에서는 악화된 건강 결과에 관한 역학적 자료가 제시되기도 하였다. 1930년대에는 의사인 리카르도 파레데스(Ricardo Paredes)가 미국 소유의 광업회사에서 일하던 에콰도르 광산노동자 사이에서 발생한 직업성 폐질환과 사고에 관하여 연구하였다. 이러한 파레데스의 노력은 노동조건 개선을 위한 입법으로 이어졌으며, 다국적기업에 의한 "경제적 제국주의"가 건강에 미치는 영향에 관한 에콰도르인의 인식의 폭을 넓혔다.

1960년대 이후

1960년대 세계적 차원에서 일어난 변화 가운데, 1959년에 시작된 쿠바혁명은 사회의학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의 하나였다. 쿠바 공중보건 체계의 개선은 사회혁명의 일환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건강상의 성취가, 전체 사회의 광범위한 구조 변화의 통합 부분으로 발생하였다. 일차의료, 공중보건, 의학교육, 기획 및 행정, 역학적 감시등의 분야에서 쿠바가 거둔 놀랄만한 성과에 기반한 사회 변화는 다른 나라의 활동가와 학자를 고무시켰다.
쿠바가 라틴아메리카 사회의학의 긍정적 모델을 제시하고 있다면, 칠레는 상반된 두 가지 측면을 동시에 보여준다. 사회의학 그룹은 1970년 아옌데와 인민전선 정부가 승리를 거두었을 때, 초미의 관심을 보였다. 사회의학 분야에 종사하는 많은 이가 새 정부와 함께 일하고자 칠레로 왔다. 아옌데는 무력보다는 선거를 통한 사회주의로의 평화적 이행을 제안했다―그것은 역사상 최초의 평화적 이행인 셈이다. 정부는 "단일한(unified)" 국가보건 프로그램을 추진하였는데, 사적/공적 부문의 공존으로 인한 모순은 점차 줄어들 것으로 예상했다. 그러나 1973년 폭력적인 쿠데타 이후, 인민들 특히 보건의료 노동자에 대한 억압은 유례가 없는 폭력에까지 이르렀다. 사회주의로의 평화적 이행이 실패하고 라틴아메리카 곳곳에서 사회의학을 추구하던 이들에게 상처를 남겼다.
많은 이가 산디니스타(Sandinista)정부의 건강 관련 사회정책에 우려를 표명했지만, 1979년 니카라과 혁명 또한 사회의학의 운동가를 고무시켰다. 몇몇 나라의 사회의학 지도자는 새로운 니카라과 정부의 의료개혁에 기여했다. 여기에는 전염병과 모자(母子)보건을 다루는 광범위한 프로그램이 포함되었다. 비록 문헌으로 발표되지는 않았지만 이들은 니카라과 혁명의 모순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예컨대 니카라과에서는, 사적진료가 허용되어 여전히 주요한 역할을 담당하였고, 심지어는 국가보건서비스 체계에 풀타임으로 고용되어 있는 의료전문인조차 이러한 사적진료 분야에 종사하고 있었다. 정부의 관리는 사적 경제 부문을 강화하는 이 정책이 쿠바에서 일어난 것과 같은 의료전문인의 대탈출(exodus)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한 모순 때문에, 몇몇 사회의학 지도자는 결국 지원활동을 축소하였고, 특히 산디니스타의 선거 패배 후 더욱 가속화되었다.
해방신학은 많은 사회의학 활동가를 고무하는 원천이 되었다. 브라질의 프레이 베토(Frei Betto)같은 신부는 "기초공동체" 참여를 옹호하였다. 그런데 이 "기초공동체"는 종교적 신앙과 사회정의를 위한 투쟁을 융합하는 것이었다. 이 투쟁은 건강을 향상시키고 공중보건 서비스를 개선하려는 노력을 포함하였다. 해방신학의 어떤 지도자들은 기초공동체의 비폭력 방식에 대해 회의적으로 생각하였다. 몇몇 사회의학 활동가는 콜롬비아 혁명운동에 참여했던 신부인 카밀로 또레스(Camilo Torres)의 영향으로 여러 나라 무장투쟁에 동참했다가 훗날 사회의학 분야에 다시 참여하기도 했다.
사회의학에 대한 또 다른 중요한 영향력은 브라질의 파울로 프레리(Paulo Freire)와 그의 협력자의 교육혁신에서 비롯되었다. 성인을 대상으로 한 문맹퇴치 운동을 통해 프레리는 가난한 공동체의 사람의 역량을 강화하는 과정으로서 교육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로, 그는 자신의 고전적 저작 "억압받는 자의 교육학"을 쓰기에 이르렀는데, 소규모 교육 "서클"을 조직하여 학습을 지역주민이 공동체의 구체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것과 연결할 것을 권고하였다. 이후 활동가들은 보건의료 서비스를 개선하기 위하여 이러한 접근법을 대중의 보건교육과 조직화에까지 확장하였다. 프레리 자신도 건강을 위한 역량강화 전략의 적용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프레리의 이러한 지향은 미국의 공중보건에도 영향을 미쳤으나 라틴아메리카 사회의학에 미친 영향은 더욱 컸다.
1970년대 워싱턴 D.C에 근거지를 두고 사회의학 교육과정에 깊은 영향을 끼친 지도자가 나타났다. 아르헨티나에서 의사로서 수련을 받고 칠레에서 사회학을 공부한 후앙 세자르 가르시아(Juan Cesar Garcia)는 1966년부터 그가 사망한 1984년까지 PAHO(Pan American Health Organization, 미주보건기구)의 연구조정관으로 활동했다. 가르시아 스스로는 의학교육, 의료에서의 사회과학, 건강의 사회계급적 결정요인, 라틴아메리카인 차별의 이데올로기의 기초 등에 관한 생산적인 업적을 남겼다. 그는 PAHO에서 일하는 동안 그 자신의 이름으로 맑스주의적 사회철학이 명백히 드러난 몇 권의 저작을 출간하기도 했지만, 필명을 사용하여 더욱 정치적인 색채가 분명한 논문을 출간하기도 했다(A. Mier, 미간행 전언, 1975)
가르시아는 PAHO를 통해 재정적·사회정서적 지원을 함으로써 사회의학에 영향을 미쳤다. 가르시아는 PAHO의 동료인 마리아 이사벨 로드리게즈(Maria Isabel Rodriguez)―그녀는 엘살바도르 대학에서 의대학장을 하다 망명 생활을 하고 있었다―와 함께 연구비 지원, 연구 계약, 연구원 제도 등을 총 지휘 운영하였는데, 이것은 당시 라틴아메리카 사회의학 그룹에게 매우 중요한 것이었다. PAHO의 연구비 지원으로 멕시코시티 Xochimilco 소재 자율도시대학(Autonomous Metropolitan University)에서는 최초의 권위 있는 사회의학 교육과정이 개설되어 라틴아메리카 전역에서 학생이 이 모여들었다. 그는 점점 PAHO 내에서 견제를 받기 시작했으나, 가르시아는 이에 굴하지 않고 지속적으로 주도권을 행사하였다.
사회의학을 지지한 가르시아는 빈센트 나바로(Vincente Navarro)의 업적을 스페인어로 번역하는 데에도 기여하였다. 이 업적은 자본주의와 제국주의, 경제적 자원의 불평등한 분배가 보건의료 서비스와 건강에 미치는 영향과 관련하여 라틴아메리카 사회의학에 영향을 미쳤다. 나바로가 편집인으로 있는 "국제보건서비스잡지(The International Journal of Health Services)"는 라틴아메리카 저술가에게 영어권 논의의 장을 제공해 주었다.

정치적 억압과 생존의 몸부림

우리는 사회의학 분야 지도자들을 만나 24번의 심층인터뷰를 했다. 이중 오직 4명의 응답자만이 어떤 형태로든 정치적 억압으로 고통받은 적은 없다고 말했다. 응답자들은 칠레의 인민전선 정부에서 일했다는 이유, 인권을 위해 활동했다는 이유, 또는 보건의료 분야 운동가로서 활동했다는 이유로 정치적 탄압을 받았다. 그들은 고문당하거나 집단수용소에 투옥되기도 하였고 해외로 추방당하거나 정부의 보직에서 퇴출 되었다. 또한 경제적으로 곤궁에 처하게 되었고, 고용안정을 위협받았으며, 전문직의 특권을 박탈당하거나 정치 활동도 제약받았다.
사회의학의 활동 과정은 정치적, 경제적 조건에 따라 크게 다르다. 칠레와 아르헨티나 출신의 대부분의 사회의학 지도자는 다른 나라로 도피하였다. 남부아메리카의 남단 출신의 이 망명자들은 외국에서 살면서 활동하는 동안, 사회의학의 보급에 큰 공헌을 했다. 조국에 머무를 수 있었던 이들은 생계를 위해 임상검사실 업무, 시장 관련 연구, 심지어는 소매업에 종사해야 했다. 독재정권의 몰락 이후에도 사회의학 연구자는 스스로 대학이나 의대에서 입지를 만들기 위해 시도하면서 많은 어려움에 직면했다. 대다수는 여러 개의 직업을 가졌는데, 보통 임상이나 행정 분야에서 일하면서 사회의학 분야에서는 무보수로 활동하였다.
독재정권이 없는 국가나 브라질같이 독재정권이 다소 덜 가혹해진 곳에서는, 이민을 가야 할 사람들은 거의 없었고, 많은 이들이 계속하여 대학에서 연구하거나 병원에서 교육할 수 있었다. 그러나 콜롬비아에서는 민선 정부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폭력적 전통 때문에 사회의학의 탁월한 지도자들이 죽어가거나 추방되었다. 멕시코, 에콰도르, 쿠바 같은 국가에서 사회의학 관계자는 비교적 안정적인 학자의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다. 현재로서는 멕시코, 에콰도르, 브라질, 쿠바 등지에서 사회의학에 가장 유리한 제도적 조건이 마련되어 있다. 아르헨티나, 칠레, 콜롬비아의 조건은 더욱 불리한 채로 남아 있으나, 사회의학의 참여자는 높은 수준의 생산성을 성취하기 위해 투쟁하고 있다.

이론, 방법, 논쟁

라틴아메리카의 사회의학은 단일하고 균질적인 전통이라기보다는 풍부하고 다양한 분야로 발전해왔다. 격렬한 토론은 이론, 방법, 변화를 끌어내기 위한 전략에 초점을 맞추었다. 예를 들어, 이론적 논쟁은 최신 이론에 반대하는 전통적인 맑스주의적 분석의 유용성에 의문을 던졌다. 이론적 차이는 경제력과, 성과 인종/민족 같은 다른 이슈들간의 선차성에서 발견되기도 하였다. 방법론적 논쟁은 연구의 분석단위로서 개인과 집단의 문제, 계량적 방법론과 질적 방법론간의 균형 등을 다루었다. 또 전략적인 이유 때문에, 사회의학 실천가가 보건분야 국제기구 및 다국적금융기구에 협력하는 정도는 크게 달랐다.
그러나 사회의학 분야를 특징짓는 하나의 공통점은 이론에 대한 강조다. 사회의학의 실천가는, 북아메리카 의학 및 공중보건 분야에서 명시적인 이론이 부재하다는 사실이 이론의 부재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오히려 무이론적(atheoretic) 혹은 반이론적(antitheoretic) 입장은 배후의 이론이 암묵적인(implicit) 것임을 의미한다. 라틴아메리카 비판가들이 이러한 프리즘을 통하여, 암, 고혈압, 직업성 질환에서 사회적 요인보다 생물학적 요인에 주목하는 북아메리카의 경향을 해명하였다. 사회의학 실천가의 관점에서는, 생물학적 측면에 대한 강조는 분석 단위를 개인으로 환원하여 사회적 차원의 개입이 필요한 사회적 요인을 은폐하는 것이다.
이론과 실천 사이의 결합을 언급할 때, 사회의학 실천가는 종종 "praxis"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이탈리아 그람시에 영향 받은 라틴아메리카 사회의학의 지도자는, 사회 변화를 향한 노력에 영감을 불어넣고 그로부터 영감을 얻는 이론을 강조하였다. 연구와 교육 활동은 종종 노동조합과 여성그룹, 아메리카원주민단체와 지역사회 조직과의 협력 속에서 이루어졌다.
맑스주의 이론이 사회의학의 발전을 자극하였지만, 개념적 작업은 라틴아메리카 맥락에서 전통적 맑스주의의 강점과 한계에 초점을 맞추어 왔다. 또한 소비에트연방 같은 사회주의 국가의 부정적 경험은 전통적 맑스주의 이론을 적용시키는데 한계를 드러내기도 했다. 그러나 맑스주의 이론의 어떤 요소들은 개념적 작업과 연구의 근거를 지속적으로 제공하고 있다.
첫째, 사회의학은 경제적 생산관계에 의해 정의되는 사회계급을 강조해왔다. 맑스주의 이론에서 사회계급의 가장 중요한 특성은 생산수단의 소유와 생산과정에 대한 통제 여부이다. 사회의학의 실천가들은, 특히 저개발국가에서 경제적 생산과정의 고유한 조건으로 노동착취가 여전히 남아있다고 주장하였다. 그 결과 그들은 소득, 교육, 직업적 특권 같은 인구학적 특성보다 생산과정에 기초한 사회계급에 관한 시각을 유지해왔다. 경제적 생산에 관한 이러한 이론적 태도 때문에 산업 및 농업 생산 환경에서 노동과정 자체에 초점을 맞춘 연구 주제들이 선택되어 왔다. 멕시코, 칠레, 에콰도르, 브라질의 사회의학 그룹은 노동의 위계, 공장내 생산과정, 노동조건이 신체적·정신적 건강에 미치는 영향에 관한 연구를 시작하였다.
두 번째 초점은 경제적 생산의 재생산 문제이다. 맑스주의 이론은 자본주의 체제가 세대를 건너 생산의 본질적인 착취관계의 재생산을 어떻게 정당화하는가 하는 의문을 던진다. 이러한 재생산을 뒷받침하는 제도 가운데, 성 역할을 전형화 하는 가족 제도에서 특히 두드러진다. 예를 들어, 맑스와 엥겔스는 노동자 착취가 본질적으로 여성 착취와 맞물려 있다고 주장했다. 이는 경제적 생산을 위해 노동력 재생산이 요구되며, 주로 가족 내 여성의 활동을 통해 이것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현대 사회의 여성은 임노동, 가사노동, 자녀양육이라는 "삼중고"를 감내하고 있다. 이러한 이유로 몇몇 나라의 사회의학 그룹은, 여성노동자와 경제적 생산과 재생산에서 그들의 역할에 주목하는 공동연구를 진행해왔다.
세 번째 이론적 초점은 사회의학 그룹의 독자적 사상과 노선으로 이루어진 이데올로기 문제이다. 라틴아메리카 사회의학의 몇몇 이론가는 알뛰세의 관점을 채택하여, 이데올로기가 물질적 존재 조건에 대한 개인의 상상된 관계를 재현한다고 주장하였다. "헤게모니적" 이데올로기는 특정한 역사적 시기에 어떤 사회의 지배계급의 이해를 정당화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지배이데올로기를 탈신비화하는 것은 그 자체로 이론적이고 정치적인 과제가 된다. 라틴아메리카 사회의학 그룹은 이러한 탈신비화 과제에 높은 우선순위를 부여하였다. 초기에 탈신비화 작업이 초점을 맞춘 것은 북아메리카와 유럽 국가가 발전을 촉진한 "개발주의(developmentalist)" 정책이었다. 최근의 탈신비화 작업은 세계은행과 다른 다국적지원기구의 보건의료 정책 비판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들 기구는 거시경제적 시장 원칙에 기초하여 부채 증가, 민영화, 공공부문 축소를 촉진하고 있다.
또한, 현대 유럽의 이론도 라틴아메리카 사회의학에 영향을 주었다. 예를 들어 노동과정에 대한 이탈리아에서의 이론적 노력은, 노동조합과 협력하여 작업을 진행해온 멕시코 그룹의 개념적 접근법에 영향을 미쳤다. 프랑스의 정신분석학과 제도분석은 아르헨티나와 브라질 연구자의 보건의료 연구에 영향을 미쳤다. 일부 망명 중인 아르헨티아인에 힘입은 프랑스 철학의 발전으로, 보건의료 정책의 이데올로기 비판과 변화를 위한 제안이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건강-질병을 변증법적 과정으로 파악하는 이론은 인과관계 추론에 관한 의학과 공공보건 분야의 전통적 접근법을 비판하였다. 사회의학 실천가는 단일병인론(單一病因論)을 비판해왔다. 그들은 비르효와 비슷한 관점을 취하여 특정 원인이 특정 질병을 일으킨다는 단순화된 설명으로는 질병의 발생 가능성을 높이는 사회적 환경을 충분히 고려하지 못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병인, 숙주, 환경 사이의 상호작용을 고려하는 다요인 모델에서조차도 여전히 질병을 정태적인 방식으로 정의하고 있다. 사회의학의 비판에 따르면, 전통적인 다요인 모델은 질병을 존재 여부로 이분화하여 파악하기 때문에 사회적 조건이 건강-질병의 변증법적 과정에 영향을 미치는 사회적 연관을 충분히 설명하지 못한다고 한다. 이러한 분석은 인과관계에 대한 좀더 복잡한 접근법을 제시하는데, 이 접근법에서 사회적·역사적 조건을 명시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라틴아메리카 사회의학 지도자들은 이미 오늘날 미국에서의 방법론적 동향을 예견하고, 1970년대 중반 이후부터 여러 가지 방법론을 결합하여 접근할 것(multimethod approach)을 요구하였다. 이러한 접근법은 개인 수준의 분석과 사회적 차원의 분석 양쪽을 "삼각측량 방식"으로(triangulates) 보완하였다. 초기 연구에서부터 멕시코와 에콰도르 연구자는 계량적인 다변량 분석을, 종종 집단적으로 이루어진 심층 인터뷰("집단 인터뷰") 등의 질적 연구방법과 결합시켰다. 다층적 연구의 최근 접근법은 구조방정식 모델 같은 계량적 기법과, 초점집단 기법과 자동화된 내용분석 같은 질적 연구방법을 결합하고 있다.

제기되는 과제

1) 사회정책, 권력, 건강, 보건의료
라틴아메리카의 사회의학 그룹은 국제 정책의 영향을 강조해왔다. 역사적으로 그러한 작업은 경제적 제국주의, 천연자원의 채취, 저임금노동력의 착취 등의 영향을 분석해 왔다. 좀더 최근에는 국제적 거시경제 정책, 다국적기업과 지원기구의 정치권력에 분석의 초점을 맞추고 있다. 제3세계 국가의 외채 부담은 심각한 고려가 필요한 이슈임이 판명되었다. 공공부문 감축, 공공서비스 민영화, 대국적 기업에 대한 보건의료 분야 시장개방 등은 비판적 주목을 받아왔다. 몇몇 그룹은 다국적 기업과 국제적 지원기구가 주도한 민영화의 결과로서 매니지드 케어(managed care)를 평가하는 연구를 공동으로 수행하기도 하였다. 이들 연구는 공공부문 "안전망(safety net)"이 취약해짐에 따라 서비스에 대한 접근을 악화하였다는 점을 강조하였고, 시장지향적 정책이 빈곤층의 상태를 개선시켰다는 주장을 일축하였다.
사회의학그룹은 자신의 정책연구를 권력 관계를 변화시키려는 조직화의 노력과 연결시켜왔다. 이러한 활동은 대중적 토론을 확대하고 취약계층의 필요를 충족시키려는 방향으로 개혁의 주도권을 바꾸려는 노력이었다. 사회의학 그룹은 멕시코 민주혁명당의 반대 진영과 멕시코 사파티스타 민족해방군, 에콰도르의 원주민연합과 노동자조직, 브라질 노동당과 아르헨티나 노총중앙조직과 공동작업을 진행해왔다.

2) 질병과 건강의 사회적 문화적 결정요소
몇몇 그룹은 사회적·문화적 결정요인에 관한 연구를 개척해왔다. 에콰도르의 연구자들은 상병과 사망의 양상을 설명하면서 도시생태학, 석유생산에서 비롯된 경제적 변화, 성과 노동과정 간의 관계에 주목하였다. 이를 통해 질병률과 사망률 패턴을 설명할 수 있었다. 에콰도르 그룹은 개인적·사회적·문화적 분석단위 수준의 자료를 이용, 사회적 결정요인에 대한 다수준 분석을 수행하기 위하여 계량적인 다변량 기법을 처음으로 사용하였다. 브라질의 연구자들은 다양한 연구방법―역학 분야의 인류학적·비계량적 방법―을 결합하고 다수준 분석 기법을 활용하여, 사회적 불평등의 영향을 매개하는 지역사회, 가족, 생물학적 수준의 기전을 밝혔다.

3) 노동, 재생산, 환경, 건강
이것은 경제적 생산과 재생산에 대한 이론적 강조에서 비롯되었다. 또한 그러한 문제들이 제3세계 나라들에서 건강에 대한 주요 위협을 대표한다는 인식도 있었다. 멕시코 연구자들은 노동조합와 지역공동체와 협력하여 노동과정 및 노동환경에서 비롯되는 신체적·정신적 건강문제를 명확하게 밝히기도 하였다. 이러한 노력 속에서 연구자들은 집단 인터뷰 같은 방법론을 처음으로 개발하였다. 에콰도르 그룹은 산업 및 농업 노동 환경에서 여성이 경험하는 건강 결과가 다르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칠레의 사회의학 그룹은 성, 노동, 환경적 조건을 연결짓는 연구를 수행하였다. 브라질 보건의료기관의 노동과정에 대한 미시적 연구는 브라질 노동자당의 정책적 노력으로 이어지기도 하였다.

4) 폭력, 외상(外傷), 건강
부분적으로는 사회의학 실천가 자신이 폭력에 직면하였던 경험 때문에, 폭력과 외상에 관한 연구가 몇몇 나라에서 높은 우선순위를 차지하였다. 콜롬비아에서는 폭력의 사회적 전통―과거에는 빈곤과 반복되는 폭동에 연결되었으나, 최근에는 마약매매와 준군사조직의 작전을 반영하고 있는― 때문에 폭력이 건강에 미치는 영향에 관한 연구가 이루어졌다. 칠레의 연구자들은 독재정권 시절에 고문을 경험하거나, 추방당하거나, 사망한 구성원이 있는 가족들을 연구해왔다. 미국에서 교육받은 심리학자로 그 자신 준군사조직에 의해 암살 당한 이그나시오 마틴-바로(Ignacio Martin-Baro)는 엘살바도르의 폭력에 관한 심리학적 연구를 진행했다. 또한, 이에 영향을 받은 아르헨티나의 연구자는 아르헨티나 독재정권 시절 "사라진" 3만여 명의 유족에 초점을 맞추어 연구를 진행하였다.

결 론

라틴아메리카의 사회의학은 때로 위험하지만 매우 생산적인 성과를 남긴 분야이다. 성과 있는 작업을 남겼다. 라틴아메리카에서는, 질병과 조기사망의 사회적 원인에 주목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경제적, 정치적 권력관계에 대한 도전이었다. 따라서 사회의학 분야에 대한 참여는 고통으로 이어졌고, 심지어 재능 있고 생산적인 사회의학의 지지자들의 죽음을 초래하였다. 라틴아메리카 사회의학의 주제의식과 성과는 전 세계 의료 및 공중보건 문제와 관련되어 있다. 언어 장벽의 문제와 제3세계의 연구 성과에 대한 회의적 시각 때문에, 의료전문직 사이에서는 라틴아메리카 사회의학에 대한 무지가 보편적이다. 만약 라틴아메리카 사회의학의 성과물에 훨씬 접근하기 쉬웠다면 그들의 학문적 성취는 더욱 나아졌을 것이다.
라틴아메리카 사회의학의 실천가들은 전통적인 공중보건과 구별되는 이론과 방법론을 사용하였다. 특히 건강 문제에 대한 사회적·역사적 맥락을 주목하였고, 경제적 생산과 사회적 인과관계를 강조하였다. 또한, 정치적 실천을 위한 연구와 교육의 연계는, 우리 시대의 가장 중요한 문제에 대한 접근법의 혁신을 가져왔다. 세계화 시대, 미국과 다른 "제1세계" 국가에게 라틴아메리카 사회의학의 용기 있는 작업성과는 매우 가치 있는 시사점을 던져줄 수 있을 것이다.
주제어
보건의료 이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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