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광주전남지부


  • 특집
  • 2019/03 제50호

'낙태죄' 폐지는 시대의 요구다

'낙태죄' 폐지 투쟁 동향 및 향후 과제

  • 모두를위한낙태죄폐지공동행동 집행위원장 문설희

<2018 인공임신중절 실태조사> 결과가 발표되다

지난 2월 14일 문재인 정부의 <인공임신중절 실태조사> 결과가 발표되었다. ‘낙태죄 폐지와 자연유산 유도약(미프진) 합법화 및 도입’을 요구하는 23만 명의 국민 청원에 대한 답변으로 청와대가 실태조사를 실시한지 1년여만의 일이다.

이번 실태조사는 시작부터 우려가 많았다. 우선 ‘낙태죄’ 폐지 촉구에 대해 실태조사 시행으로 응답하는 것은 결코 적합한 답변이라 할 수 없었다. 2016년 ‘검은 시위’ 등으로 한국사회 여성의 현실과 요구는 이미 폭발적으로 드러난 바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태조사 외에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던 것은 민감한 사안에 대한 회피에 불과했다. 뿐만 아니라 실태조사를 수행한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은 저출산의 원인은 ‘비혼’이며 따라서 저출산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결혼 시장에서 이탈한 고학력 여성과 저학력 남성의 결혼을 위한 백색 음모(선의의 거짓말)가 필요하다는 요지의 연구 결과를 발표한 전력이 있다. 이로 인해 ‘낙태죄’ 폐지 촉구의 국민 청원 취지에 걸맞은 조사를 수행하기에는 부적합하다는 우려가 제기되기도 했다. ‘모두를위한낙태죄폐지공동행동’(2017년 9월 22개 단체가 모여 ‘낙태죄’ 폐지와 성과 재생산의 권리, 여성의 건강권 실현 등을 목표로 활동 중이다. 이하 ‘모낙폐’)은 실태조사에 앞서 “어떻게 출산을 하게 할 것인지 만을 답습해왔던 기존 정책프레임을 전환”하고 “여성의 삶과 건강, 사회적 시민권을 보장하기 위한 정책의 기초가 되어야한다”는 입장을 발표한 바 있다.
 

‘위기 임신’이라는 관점의 문제점

우려대로 이번 실태조사는 여성을 성과 재생산의 주체가 아닌 출산의 도구로 간주하는 관점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만 15~44세 여성 중 생애에 임신을 경험한 사람의 19.9퍼센트가 인공임신중절을 하여 많은 여성들이 위기임신(원치 않는 임신) 상황에 놓이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런 위기상황을 예방하거나 위기상황에 있는 여성을 지원하기 위해 성교육 및 피임교육을 더욱 강화하고, 인공임신중절 전후의 체계적인 상담제도, 사회경제적 어려움에 대한 지원 등이 필요한 것으로 보인다.”이러한 실태조사의 결론에는 ‘낳을 권리’와 ‘낳지 않을 권리’라는 여성의 자율성이 자리할 여지가 없다. 성폭력에 의한 임신, 빈곤 여성의 임신 등 극히 예외적인 상황에 처한 피해자로서의 여성만이 존재할 뿐이다.
 

하지만 2016년 ‘검은 시위’ 참가자들은 국가의 구제를 바라고 광장으로 나온 것이 아니었다. “여성은 자궁이 아니다!”라는 구호가 단적으로 말해주듯 ‘낙태죄’로 인해 여성들이 시민으로서의 온전한 권리를 행사하지 못하는 현실을 알리고, 나아가 여성들의 권리(생명·신체의 안전성, 존엄성, 노동권, 성과 재생산의 권리 등) 실현을 위해 ‘낙태죄’ 폐지가 시급하다고 요구한 것이다. 이처럼 ‘위기임신’이라는 관점으로는 한국사회 여성들의 역사적·보편적 경험인 ‘낙태’의 현실 및 이 시대 여성들의 목소리를 제대로 담지 못한다.


형법 개정 요구 75.4퍼센트! ‘낙태죄’ 폐지는 시대의 요구!

한계적인 결과에도 불구하고 이번 실태조사를 통해 ‘낙태죄’ 폐지에 대한 여성들의 인식 변화가 확연하게 드러난 점은 눈여겨볼 만하다. 조사에 응한 1만 명 중 형법상 ‘낙태죄’[1]를 폐지해야 한다고 응답한 여성은 7535명으로 75.4퍼센트에 달했다. 여성 4명 중 3명은 ‘낙태죄’ 폐지가 필요하다고 보는 셈이다. 모낙폐는 실태조사 결과가 발표된 당일 입장문을 냈다. “낙태죄 폐지 요구는 임신을 중지하고자 하는 여성의 판단을 그 누구도 심판하거나 처벌할 수 없다는 선언”이라는 점을 환기하며 ▲임신중지 합법화와 의료적, 사회경제적 여건 보장 ▲성과 재생산의 권리, 여성의 건강권 보장 ▲제대로 된 피임법의 교육과 접근성 확대 시급, 포괄적 성교육 시행 ▲약물적 유산유도제 도입과 안전한 사용 보장을 촉구했다. 

‘낙태죄’ 폐지는 더 이상 거스를 수 없는 시대의 요구이다. 정부는 더 이상 사태를 관망하는 입장을 취하거나, 소위 ‘위기임신 상황에 있는 여성’에 대한 구제와 지원의 역할에만 머물러서는 안 된다. 또한 여성과 남성 간의 대립을 교묘하게 조장하며 책임을 회피하려 해서도 안 된다. 이번 실태조사에서는 “인공임신중절과 관련해서 국가가 해야 할 일”과 관련하여 “양육에 대한 남성 책임을 의무화할 수 있는 법·제도 신설”과 “피임·임신·출산에 대한 남녀공동책임의식 강화”와 같은 선택지를 두어 결과를 유도한 바 있다. 그러나 ‘낙태죄’를 둘러싼 문제는 단순히 피임 실패에 원인이 있는 것도 아니고, 남성도 처벌하는 것에서 해법을 찾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임신과 출산이 권리가 아닌 의무와 통제의 대상이 되어버린 사회구조와 문화를 근본부터 바꾸어야 할 문제인 것이다. 따라서 여성의 몸을 불법화하고 임신중지를 처벌의 대상으로 삼는 ‘낙태죄’ 폐지가 바로 인공임신중절과 관련해서 국가가 해야 할 일 1순위라는 사실을 정부는 직시해야 한다.
 

헌법재판소의 낙태죄 위헌 판결을 촉구한다!

지난해 5월 헌법재판소 공개변론으로 ‘낙태죄’는 세간의 주목을 받는 뜨거운 이슈가 되었지만, 그 이후 ‘낙태죄’의 위헌성에 대한 결정은 기약 없이 멈춰버렸다. 이를 틈타 보건복지부는 기다렸다는 듯이 인공임신중절 시술을 비도덕적 시술로 규정하고 ‘낙태’ 처벌을 강화하는 의료관계행정처분규칙 개정안을 발표했다. 이에 모낙폐는 헌법재판소의 ‘낙태죄’ 위헌 판결 미루기를 규탄하며 헌법 재판소 앞 릴레이 1인 시위에 돌입했다. 지난해 11월 말부터 시작된 1인 시위는 오는 3월 8일 세계여성의 날에 100일차가 된다.
 

헌법재판소의 판결은 차기 정기 선고에서 다뤄질 것으로 예상된다. <인공임신중절 실태조사> 결과 발표로 ‘낙태죄’가 다시금 이슈가 된 상황에서 판결을 계속 미루는 것도 사법부에게는 부담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실태조사 발표 이후 인공임신중절 허용 사유에 사회경제적인 어려움이 추가될 것인지 여부가 주목을 받고 있다. ‘사회경제적 사유 추가’는 현행 법제도를 보완하기 위한 대안으로 여겨지기도 하지만, 실상 ‘낙태죄’를 존치시키는 꼼수판결에 불과할 뿐이다. 이것이 현행 모자보건법 상의 극히 예외적인 임신중절 허용사유[2]를 확대한 진전으로 오인되어서는 안 된다. 모낙폐는 “또다시 어떤 수준의 경제적 여건에 미치지 못하는 경우에는 아이를 낳지 말아야 한다는 재생산 영역에서의 차별을 되풀이 하는 방식”이자 “기본인권에 해당하는 안전한 임신중지권의 보장에 있어 특정 조건에 대한 증명을 요구하여 허락하는 방식”이라는 점에서 비판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모낙폐는 3·8 세계여성의 날을 맞아 헌법재판소 앞에서 기자회견을, 3월 30일에는 서울 도심에서 대중 집회를 개최하고 ‘낙태죄’ 위헌 판결, 즉 임신중지 전면 비범죄화를 재차 촉구할 계획이다.
 

‘낙태죄’를 폐지하고 여성의 힘으로 역사를 새로 쓰자!

임신중지를 결정한 여성을 범죄자로 낙인찍으면서 한 사회의 재생산에 대한 책임을 여성에게 오롯이 전가해왔던 역사를 이제는 끝내야 한다. 인구감소는 여성의 책임이 아니다. 경제위기로 인한 출산율 급감의 문제를 소위 여성의 ‘출산파업’ 때문인 것처럼 인과관계를 호도하거나, 임신·출산 정책에 대한 개입과 여성노동력 활용을 통해 경제 위기 상황을 관리하려는 시도에 맞서자. ‘태아의 생명권’과 ‘여성의 자기 결정권’이라는 왜곡된 구도도 이제는 끝장내야 한다. 형법 제269조와 제270조는 태아의 생명을 지키는 법이 아니라 여성의 생명과 건강, 성과 재생산의 권리를 침해하고 억압하는 악법일 뿐이다.

임신과 출산은 여성의 고유한 권리이다. 여성이 가족이나 국가의 간섭 없이 임신 여부와 그 횟수를 결정할 수 있어야 한다. 임신상태를 유지할 것인지 중지할 것인지, 아이를 언제 어떻게 낳을 것인지에 대한 판단은 여성이 아닌 그 누구도 대신할 수 없다. 따라서 임신중지를 이유로 여성을 심판하거나 처벌할 권한 역시 그 누구에게도 없다. 임신과 출산의 주체인 여성의 판단이 존중되는 사회, 여성이 성과 재생산에 대한 권리, 모성에 대한 권리를 온전히 행사할 수 있는 사회는 ‘낙태죄’ 폐지와 함께 새롭게 시작될 것이다. ‘낙태죄’를 폐지하고 여성의 힘으로 역사를 새로 쓰자! ●
 

Footnotes

  1. ^ 형법 제269조(낙태) ① 부녀가 약물 기타 방법으로 낙태한 때에는 1년 이하의 징역 또는 200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제270조(의사 등의 낙태, 부동의 낙태) ① 의사, 한의사, 조산사, 약제사 또는 약종상이 부녀의 촉탁 또는 승낙을 받아 낙태하게 한 때에는 2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 
  2. ^ 모자보건법 제14조(인공임신중절수술의 허용한계) ① 의사는 다음 각 호의 어느 하나에 해당되는 경우에만 본인과 배우자(사실상의 혼인관계에 있는 사람을 포함한다. 이하 같다)의 동의를 받아 인공임신중절수술을 할 수 있다.1. 본인이나 배우자가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우생학적 또는 유전학적 정신장애나 신체질환이 있는 경우2. 본인이나 배우자가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전염성 질환이 있는 경우3. 강간 또는 준강간에 의하여 임신된 경우4. 법률상 혼인할 수 없는 혈족 또는 인척 간에 임신된 경우5. 임신의 지속이 보건의학적 이유로 모체의 건강을 심각하게 해치고 있거나 해칠 우려가 있는 경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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