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광주전남지부


2019 여름.167호
첨부파일
2019_여름호_[07]_사회운동사1.pdf

한국전쟁 이후 냉전기의 통일정책과 통일운동: 1960~1987

남북한 통일정책과 통일운동, 역사와 평가①

임필수 | 사회진보연대 정책교육국장

1. 들어가며 


2018년부터 2019년 2월까지, 세 차례의 남북정상회담과 두 차례의 북미정상회담으로 한반도 정세가 격변할 수 있다는 기대가 매우 높아졌다. 특히 북미정상회담의 개최는 그 자체가 역사적 사건이었고, 그동안 변화를 가로막았던 여러 쟁점이 일거에 해소될 수 있다는 희망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하노이 2차 북미정상회담이 분명한 성과 없이 끝나면서 상황이 마치 정상회담 프로세스 이전의 원점으로 되돌아간 듯하다. 

그에 따라 잠재된 쟁점도 다시 되살아나고 있다. 궁극적 쟁점은 이번 협상의 목표가 무엇인가라는 문제다. 거칠게 말하자면, 이번 협상은 △2005년 9·19 공동성명에서 확인한 한반도 비핵화를 위한 협상이어야 하는가, 아니면 △북한의 핵동결·핵군축을 실질적 목적으로 하는 협상이어야 하는가? (9·19 공동성명은 “6자회담의 목표가 한반도의 검증 가능한 비핵화를 평화적인 방법으로 달성하는 것임을 재확인”한다고 명시했다.)

이러한 시각 차이는 한국 사회운동 내에도 엄존한다. 예를 들어 《민플러스》에 실린 ‘4·27시대 연구원 칼럼’을 살펴보자. 2차 북미정상회담 직전에 발표한 “2차 북미정상회담, 한반도 새 역사를 쓸 것이다” (2019년 2월 22일)는 북미협상이 핵동결·비확산 협상이라고 규정했다.
 
북미정상회담의 기본 성격은 핵보유국 간의 대화와 담판이다. 이 회담의 본질은 북한이 핵무력을 완성하여 상호 간에 핵공격이 가능해진 조건에서 고조된 핵전쟁 위험을 피하기 위한 평화회담이다. (…) 결국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는 상호주의 원칙에 따라 한반도라는 지리적 범위에서부터 단계적 동시행동으로 점차 그 수준과 범위를 넓혀 나가는 방향이 될 것이다. 단계적 군비통제와 군축이다. (…) 이와 관련 북미는 어느 정도 합의를 이룬 듯하다. 김정은 위원장은 4불 원칙(핵무기 생산, 시험, 사용, 전파중지)에 의거한 핵동결, 비확산을 현 단계 비핵화의 수준으로 제시하였다. 즉 핵무기 생산을 하지 않기 때문에 영변핵시설을 비롯한 생산시설을 해체할 수 있고, 핵 시험을 하지 않기 때문에 핵 시험장, 미사일 발사대 등을 폐기할 수 있는 것이다. 또 사용, 전파 중지를 담보하기 위하여 새로운 별도의 조치 등도 합의될 수 있을 것이다.

즉 북한의 의도는 명백히도 핵동결·핵군축이며, 미국도 이에 합의했다는 주장이었다. 하지만 정상회담 결렬을 통해 미국의 의도가 그렇지 않다는 것이 밝혀졌다. 그 후 “북 최고인민회의 시정연설 이후의 정세변화”(2019년 4월 22일)는 북한이 기존 협상목표를 수정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고 분석한다. 
 
[시정연설은] “트럼프 정부가 조미관계 전환문제와 그 출발인 제재해제 문제에 관심이 없다면, 북도 (…) [그] 문제에 집착하지 않겠다는 초강경 선언인 셈이다. (…) 조미 3차 협상이 다시 준비된다 해도, 북이 영변핵시설 영구 폐기에 상응해 미국에 요구할 조치는 대북 안전보장 문제, 즉 대북 핵무력 철수와 상호 군사력 후퇴방안이 될 가능성이 높다. (…) 만약 미국이 이런 협상의 원칙과 내용을 거부한다면 3차 조미정상회담은 기대와 다르게 열리지 못할 수 있다. 당연히 핵미사일 모라토리엄도 순차적으로 깨질 것이다. 이는 조미관계에서 ‘불과 불’이 마주치던 2018년 이전으로 돌아갈 수 있음을 의미한다. 그런데 양상은 유사하지만 새로운 정세는 과거의 반복만은 결코 아닐 것이다. 북이 한반도 비핵화 전략을 선언하고, 핵미사일 시험을 선제적으로 중지한 뒤 조중, 조러관계는 획기적으로 진전되었다. 중러가 미국이 UN과 NPT체제를 앞세우며 주도하던 대북 제재에 협조할 명분도 사라졌다.”
 
만약 미국이 현재 북한이 제시하는 핵동결·비확산 협상을 수용하지 않는다면, 북한이 획기적으로 진전된 중국, 소련과의 우호관계를 배경으로 핵·미사일 실험을 재개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는 주장에서는 ‘호전성’마저 느낄 수 있다. 즉 이 글은 단지 북한의 의도를 진단하는 것을 넘어, 북한의 핵·미사일 프로그램의 정당성이나, 향후에 발생할 수 있는 추가적인 핵·미사일 실험의 정당성을 주장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2006년 10월 북한이 1차 핵실험을 단행한 후, 사회운동 내에서 북한 핵에 대한 시각 차이는 이처럼 분명히 상존했다. 북한이 핵 프로그램을 가속화하면서, 그 차이는 좀처럼 좁혀지지 않고 있다. 

그러나 북한은 최소한 1980년대까지는 ‘한반도 비핵지대화’를 주창했다. 북한은 1976년 비동맹 정상회담에서 ‘조선반도 비핵지대화’를 제기했고, 1986년 6월에도 「조선반도에서의 비핵지대, 평화지대를 창설할 데 대한 제안」을 발표했다. 또한 1986년 9월에는 ‘조선반도에서의 비핵·평화를 위한 평양국제회의’를 개최해 80여 개 국가 대표를 초청하기도 했다. 

1990년대 초반까지 통일운동 역시 한반도 비핵지대화를 지지했다. 예를 들어 1990년 1차 범민족대회 서울 채택 결의문(1990년 8월 17일)을 보면, “민족생존을 근원적으로 위협하는 핵무기는 즉각 철거되어야 하며 한반도를 비핵평화지대로 선포해야 한다”고 명시했다. 나아가 1990년대 조국통일범민족연합(범민련)의 강령에는 “한(조선)반도를 비핵, 평화지대화한다”는 조항이 명시되어 있었다. 그런데 2001년 9월에 개정된 범민련 강령에서는 이러한 조항이 빠져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북한의 입장 변화를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또한 한국의 사회운동, 통일운동 일각의 인식 변화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역사적으로 반공반북주의가 엄존하는 현실에서, 최소한 민중운동 내에서는 북한에 대한 비판적 평가는 유보하는 분위기가 존재했다. 또한 북한의 통일정책, 한반도정책을 적극 지지하는 입장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최근 『NL 현대사』라는 책이 출판되었다. 이 책은 《한겨레신문》의 박찬수 기자가 2016년에 연재한 기사를 묶어 낸 것이다. 또한 민주노동당 분당과 통합진보당 사태 이후로 『경기동부』라는 제목의 책도 출판되었다. 박찬수는 NL운동의 공과 과에 대한 객관적 토론을 더 이상 미룰 수 없다고 지적했다. 필자도 이러한 평가에 공감한다. 하지만 이 글에서 다루는 사회운동의 흐름은 현재에도 진행형이며, 필자나 사회진보연대도 사회운동의 한 축을 이룬다는 점에서 단순히 ‘외부자’의 시각이 될 수 없다는 점도 분명한 사실이다.

이 글은 남한과 북한의 통일정책, 한반도정책에 대한 객관적 인식을 전제로 한국 사회운동에서 다각적으로 나타났던 사회운동의 흐름을 비판적으로 분석하고자 한다. 글의 중심 주제는 좁게 말하면 ‘통일운동’ 평가이고, 더 넓게 말하면 민족과 변혁 문제에 관한 사회운동의 흐름에 대한 평가다. 이를 위해 그 배경이 되는 남북한의 통일정책도 시기별로 최대한 압축적으로 설명한다. 이 글은 두 번에 나눠 연재될 것인데, 첫 번째 글에서 다루는 시기는 1960년대부터 1987년까지다. 냉전의 해체가 본격화되는 때를 기준점으로 전후로 나눈 셈이다. 먼저 1972년 7·4 남북공동성명 이전까지의 남북관계와 사회운동으로부터 시작한다. 
 
 

2. 1970년대 7·4 남북공동성명 이전까지 남북관계 


1) 남한, 4·19 혁명과 5·16 쿠데타
북한, 연방제에서 남조선혁명론으로


이승만 정부는 정전협정에 조인하지 않았다. 이승만 정부는 정전협상에 강력히 반대했고, 정전협정이 완성되어간 마지막 단계에서는 정전 불(不)방해의 조건으로서 한미합동방위조약의 체결, 국군의 전력 확대, 대규모 경제원조를 미국에 요구했다. (그에 따라 1953년 10월 한미 양국 장관이 한미상호방위조약에 서명했다.) 전후 시기 이승만 정부는 통일방안으로서 대외적으로는 ‘유엔(UN) 감시 하의 남북한 총선거’를 내세웠으나, 국내적으로는 북진통일론을 포기하지 않았다. 한편 전후 북한은 최우선적으로 경제복구에 힘을 쏟았다. 1950년대 북한은 통일방안으로 ‘외세의 개입 없는 자유로운 남북총선’을 주장하였지만, 이 역시 이승만 정부와 합의를 통해 실현될 가능성은 없었고. 따라서 정치공세라는 성격이 강했다.  

그렇지만 1960년 4·19 혁명에 의해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하면서 상황이 급변할 여지가 생겼다. 유영구에 따르면 1960년 4·19혁명 직후, 북한의 대남사업부는 7월 총선에서 혁신계 인사나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인물을 당선시켜 원내교섭단체를 세우는 것을 목표로 제시했다. 그러나 총선에서 민주당이 압승을 거두고 혁신계가 참패하자 방향을 전환한다. 즉 남쪽의 사람들에게 북에 대한 공포를 해소해주며, 남한체제의 독자성을 보장해주는 통일 방안으로 ‘평화통일론에 입각한 남북연방제’가 모색된다.

당시 북한에서 집중 논의된 통일방안은 ①총선거에 의한 통일, ②연방제 방안, ③중립화 방안 세 가지였다. 그런데 총선거든 연방제든 결국 중립화 통일선언을 하게 될 것으로 보았기 때문에 중립화 방안은 큰 쟁점이 되지 않았다. 문제는 총선거냐 아니면 연방제냐는 것이었다. 총선거는 남측이 두려움을 지니고 있고, 유엔 감시하의 총선거는 외국간섭 문제가 따르니 곤란하므로, 연방제 논의가 대두되었다. 하지만 연방제를 하면 결국 남조선 혁명을 포기하게 되는 것이 아니냐는 문제도 제기되었다. 논란 끝에, 현실적으로 남한에 조성된 정세는 혁명의 국면이라기보다는 평화통일에 유리한 국면이라는 판단에 따라 결국 연방제와 평화통일론이 북한의 공식 입장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여기서 북한 역시 연방제 통일론과 남조선혁명론이 모순관계에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인식했다는 점이 중요하다. 이 문제는 뒤에서 다시 다룬다.

그리하여 1960년 8월 14일 북한은 8·15 해방 15주년 기념보고에서 연방제를 제시한다. 즉 남북의 정치제도를 그대로 두면서 두 정부의 대표들로 구성된 최고민족위원회를 조직하여 주로 남북조선의 경제발전을 통일적으로 조절할 것을 제안했다. 또한 같은 해 11월에는 남한의 농업 및 공업을 발전시키고 주택건설을 진행하는데 필요한 재정지출을 북한이 부담하겠다는 제안을 내놓기도 했다. 즉 북한은 남북연방제에 의한 남조선 경제부흥을 제안한 셈이었다.

하지만 북한의 이러한 시도는 민주당 장면 정부의 거부로 결실을 거두지 못했다. 1960년 총선에서 민주당은 이승만 정부의 ‘무력 북진통일론’은 배제하였으나, 통일을 위한 남북총선거 이전에 남북연합위원회를 구성하자거나, 통일 이전에라도 남북교류를 진행하자는 주장도 거부했다. 즉 민주당의 통일정책 역시 보수성·소극성이라는 측면에서 이승만 정부와 대동소이했다. 또한 장면 총리는 ‘경제제일주의’를 내세웠는데, 이 역시 박정희정부의 ‘선건설·후통일론’과 동일한 맥락이었다. 

그 후, 1961년 반공을 국시로 내걸은 5·16 쿠데타가 벌어졌다. 쿠데타 세력은 바로 당일부터 남북교류 주창자들을 일제히 검거하기 시작했다. 이로써 1960년대 남북합작에 의한 통일론은 수면 아래로 가라앉게 되었다. 나아가 1964년 베트남 통킹만 사건으로부터 1968년 남파게릴라사건(일명 ‘김신조부대’)과 푸에블로호 사건에 이르기까지, 동아시아 지역 전역에서 냉전이 극도의 긴장상태로 지속됨에 따라 남북관계도 완전히 동결되었다. 또한 북한의 경제지원·조절 제안 대신, 박정희 정부는 1965년 한일협정 이후 한국이 일본의 경제적 후배지로 통합되는 경제개발계획을 추진한다. 이는 냉전의 쇼윈도우로서 일본·남한에 대한 미국의 역개방 정책을 배경으로 했다.

북한은 5·16 군사쿠데타 다음 해 1962년 6월, 남한 당국이 당장 북한과 통일문제에 대해 협의할 의사가 없다면 먼저 남한에서 미군 철거, 남북 간의 평화협정 체결, 남북군대 축소라도 협의할 것을 제안했다. 하지만 이 역시 박정희 정권에서 논의될 수 없었다. 이러한 조건에서 1964~65년에 이르러서 북한은 남조선혁명론을 다시 강하게 제기한다. 즉 “남조선 동무들도 누가 당을 조직해주고 지도해줄 것을 기다릴 것이 아니라 공산주의 기본원칙을 똑똑하게 안 다음에는 당도 자체로 조직하고 전략전술도 자체로 세우며 투쟁 속에서 자신을 단련해야 합니다.” 또한 이에 조응하여 ‘3대 혁명역량 강화론’을 주창하게 된다. 여기서 3대 혁명역량이란 북한의 사회주의혁명역량, 남한의 민주주의혁명역량, 국제 반제혁명역량을 뜻했다. 이에 따라 남한혁명의 전략적 독자성이 승인되고, 남한에서 독자적인 지하정당 구축을 위한 시도가 강도 높게 추진되었다. 즉 이때부터 북한의 대남사업은 조선노동당의 도당, 군당, 또는 당세포 조직 복구, 구축이 아니라 새로운 독자적 혁명정당 건설로 바뀌게 되었다. (이러한 변화에 조응하여 북한은 1963년 대남사업을 담당하는 기구들을 통합하여 남조선국으로 승격, 개편했고, 이는 1964년 2월 4기 8차 전원회의 이후에 대남사업총국으로 확대되었다.)

이러한 변화가 현실화된 흐름이 바로 1960년대 중반의 통일혁명당 창당 노력이다. 조희연에 따르면 1968년에 검거된 통일혁명당의 중심 인사들은 과거의 친척이나 지인을 매개로 월북을 감행했고, 북한의 지원을 받으며 남한에서 조직을 형성했다. 유영구에 따르면, 이때 북한은 남한 출신 가운데 북한에서 부부장급(차관급) 이상을 지낸 간부 5~6명을 통혁당 중앙지도부 성원으로 준비시켜 남한 조직과 배합할 예정이었다고 한다. 그 정도로 매우 높은 전략적 의미를 부여했던 것이다. 하지만 1968년 중앙정보부가 통일혁명당을 검거했다고 발표하면서 이런 계획은 무산되었다. 그 후로도 남한 당국에 검거된 최후의 통혁당 사건인 1979년 ‘삼척 지하조직망 사건’ 이전까지 ‘통일혁명당 재건 사건’이 지속적으로 발생했다. 이런 점에서 통혁당 재건 공작활동이 지속되었다고는 추정할 수 있지만, 남조선혁명을 위한 ‘참모부’를 건설한다는 애초 계획 수준에 도달했는지 여부는 의문이 제기될 수밖에 없을 듯하다.


2) 1970년대 미국의 데탕트 정책과 남북한 교차승인론:
1972년 7·4 남북공동성명


1960년대 북한의 시도가 좌초된 후, 1960년대 말, 1970년대 초에 들어서면서 동아시아에서 새로운 국제정세가 조성되었다. 1969년 1월 닉슨 행정부의 출범이 그 출발점이었다. 1969년 7월 닉슨대통령의 괌 독트린과, 1970년 2월 의회에 제출한 외교교서 「70년대 미국의 외교 정책: 평화를 위한 신전략」이 발표되었다. 그 요지는 아시아에서 미국의 동맹국이 침공을 받을 경우, 당사국이 지상군 인력동원의 일차적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즉 아시아의 방위책임은 기본적으로 아시아인이 담당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닉슨 행정부는 1969년 11월에 주한미군 감축을 지시하고, 1971년 3월 주한미군 7사단 2만 명이 한국에서 철수한다.

한편, 그에 앞서 1969년 로버트 스칼라피노는 남북한 유엔 동시가입론과 남북한 교차승인론을 제기한다. 남북 각각을 하나의 완전한 주권 독립국가로 인정, 상호 승인하고 유엔에도 동시 가입할 것을 촉구한 것이다. 이렇게 된다면 분쟁이 발생하더라도, 그것은 쌍방의 존재를 인정하고 불가침 협정을 맺은 상태에서 일어나는 서로 독립된 국가 사이의 전쟁이 된다. 따라서 유엔 동시가입과 남북 교차승인은 북한이 추구해온 ‘민족해방’ 논리를 무력화시킬 수 있는 방안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데탕트 분위기를 반영해, 박정희 대통령은 1970년 8·15 경축사에서 “통일 노력의 본격화는 70년대 후반기에나 가능할 것이라고 말한 바가 있다”고 전제하면서도, 북한이 “무장공비 남파 등 모든 전쟁 도발행위를 즉각 중지하고 (…) 대한민국의 전복을 기도해 온 종전의 태도를 완전히 포기하겠다”고 선언하면, “남북한에 가로놓인 인위적 장벽을 단계적으로 제거해 나갈 수 있는 획기적이고도 보다 현실적인 방안을 제시할 용의가 있다”고 밝혔다. 또한 북한이 “UN의 권위와 권능을 수락한다면, UN에서의 한국 문제 토의에 북한이 참석하는 것도 굳이 반대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획기적이고 현실적인 방안이란 무엇이었나? 최근 증언에 따르면 이때 청와대는 경제교류, 문화교류, 서신교류와 같은 비정치적 남북교류를 북한에 제안할 대담한 의도도 있었으나, 당시 법무부에서 대통령의 남북교류 제의는 “헌법상의 통치권의 범위를 넘는 것”이라고 반대하여, 결국 획기적이고 현실적인 방안이라는 모호한 표현으로 수정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북한은 1970년 박정희 정권의 8·15선언에 대해 격렬한 거부 의사를 보였다. 오히려 1970년 11월 조선노동당 5차대회 중앙위원회 사업총화보고에서 남조선에서 혁명투쟁의 참모부로서 통일혁명당이 출현하였으며 (1969년 8월 서울에서 통일혁명당 중앙위원회가 조직되었다고 밝힌다) 남조선에서 미국과 박정희 정권이 전복되어야만 조국통일이 순조롭게 실현될 것이라고 발표했다.

한편 김대중은 박정희에 한발 앞서 미국 내에서 제기되던 전략적 구상을 수용했다. 1970년 10월 6월 신민당 대통령 후보 지명 기자회견에서 ‘남북교류와 공존에 기반한 평화통일론’과 ‘4대국 평화보장론’을 제안했고, 1971년 3월 24일 대통령 선거 공약으로 정식화했다. 남북 간의 부전(不戰) 선언, 평화협정, 감시기구의 확대 개편을 통한 국내적 공존, 4대국과의 국교수립과 불가침조약을 통한 국제적 공존을 주창했다. 또한 적십자회담 외에 기자 교류, 문화, 예술, 학문의 교환, 체육 교류, 방송의 상호 청취, 그리고 경제적 교류의 확대를 주장했다. 

북한 역시 1971년 4월 김대중의 대선공약에 대해 “일련의 제한성이 있기는 하나 전쟁을 반대하고 나라의 평화를 요구하며 외세를 반대하고 남북교류와 평화통일을 주장하며 파쇼독재를 반대하고 민주주의를 지향하고 있는 것에 대해 지지를 표명한다”고 밝혔다.

나아가 1971년 7월 15일 닉슨 대통령이 텔레비전과 라디오를 통해 1972년 5월 이전에 중국 베이징을 방문한다고 발표한 후, 1971년 8월 6일 북한은 미국의 대(對)중국 접근이 “패배자[미국]의 행각이며, 중국 인민의 큰 승리”라고 선언하면서(이른바 ‘백기론’), 동시에 “남조선의 민주공화당[박정희 총재]을 포함한 모든 정당, 사회단체 개별 인사들과 접촉할 용의가 있다”고 밝힌다. 이는 박정희 정부와는 절대 대화할 수 없다는 정책이 확실히 바뀔 것이라는 신호탄이었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1971년 8월부터 남북적십자 회담이 개시되고, 1972년 극적으로 7·4 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된다. 그렇다면, 1970년대 남한 내에 운동 세력은 이러한 정세를 어떻게 보았나? 
 
 

3. 1960~70년대 북한의 혁명론, 통일론과
남한의 변혁운동


1980년대 이른바 ‘마르크스주의의 부활’, 즉 한국사회성격 논쟁이나 NL(민족해방)·CA(제헌의회) 논쟁, NL(민족해방)·PD(민중민주) 논쟁 이전에도 북한의 대남정책(혁명론, 통일론)이라는 쟁점에 관한 이견, 나아가 논쟁이 존재했는가? 

1960~70년대에 실존했던 ‘지하조직’, 예를 들어 인민혁명당(인혁당)과 통일혁명당(통혁당), 남조선민족해방전선(남민전)은 모두 정보당국에 의해 적발되어 실체가 얼마간 드러났을 뿐이고, 핵심자가 처형되었기 때문에, 우리가 접할 수 있는 자료로는 그 완전한 실체를 파악하기 어렵다. 따라서 이러한 지하운동 내에서 우리의 관심사가 되는 쟁점에 대한 인식을 명확하게 파악하기 어렵다. 

다만 조희연에 따르면 1960년대에는 “혁명운동을 하는 인자들 사이에서는 북한과의 연계와 북한으로부터의 지원을 받는 것 자체에 대하여 (비록 법적 탄압의 강도는 크다고 하더라도) 일정하게 ‘수용적’ 자세가 존재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에 관해서는 1960년대 학생운동의 중요한 인물 가운데 하나인 김정강 씨의 구술을 참조할 수도 있다. 
 
6·3사태 배후조직으로 지목된 서울대 문리대 ‘불꽃회’는 우리가 당시 구상하던 전국 대학 내 마르크시즘 소조(小組) 중 하나일 뿐이었다. (…) 1961년부터 은밀히 지하 학생 부문조직을 구상해가는 과정에서 이른바 ‘김일성 문제’가 제기됐다. 김일성이 소련군 대위일 뿐 가짜 독립운동가라는 점과 그가 권력투쟁 과정에서 박헌영을 간첩으로 몰아 죽였다는 ‘풍설’은, 이미 널리 퍼져 ‘공인된 학설’이 돼 있었다. 그 진위를 판가름하기 위해 나는 일제 때 자료를 발굴해갔다. (…) 대한민국 임시정부 각료였던 유림(柳林·1894~1961) 선생을 문리대에 초청해 애국 강연을 들은 일이 있었다. 강연이 끝난 뒤 선생께 김일성에 대해 물어보니 “소싯적의 김일성을 잘 안다. 김일성이 중학교 다닐 때 만주에서 더러 만났다. 잘 웃고 낙천적이고 사람이 좋았다. 뒤에 들으니 만주에서 중공군에 들어가 무슨 부대장을 한다더니만, 저렇게 영웅이 될 줄은 나도 몰랐어”라고 했다. 김일성이 가짜는 아니었으나 김일성파는 폭발적인 문제를 안고 있었는데, 그것은 박헌영을 ‘미제의 고용간첩’으로 몰아 처단한 것이었다. 현실적으로 김일성이 조선노동당을 장악하고 있는 조건 아래서, 긍정적 측면과 부정적 측면을 종합한 결론은 김일성의 정통성을 정치적으로 인정하자는 것이었다.
 
또한 조희연은 인혁당에 관해서도, “80년대 논쟁에서 NL 대 CA, NL 대 PD의 대립을 통혁당 노선 대 인혁당 노선의 대립과 대응시켜 보는 견해도 존재한다. 이에 대해서 차이의 맹아적 요소가 존재하였을 수 있으나 (…) 기본적으로 잘못되었다고 생각한다”고 지적했다. 즉 북한과의 관계에 있어서 ‘전략적 인식’이라는 측면에서는 큰 차이가 없었으나 ‘전술적 관계설정’이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조희연의 견해에 기초할 경우, 남한의 ‘자생적 사회주의’의 흐름 속에서 북한에 대한 비판적 인식은 1964년 인혁당 사건 이후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1970년대에야 본격적으로 나타난다고 추측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역시도 분명한 자료를 통해 확인하기는 쉽지 않다. 이런 조건에서 재일교포 작가 이회성이 1976~1979년에 쓴 장편소설 『금단의 땅』(미래사, 1988)은 우리가 관심을 두고 있는 쟁점에 관해 그 단편을 파악할 수 있는 텍스트다. 이 소설은 일본의 잡지 『군상』(群像)에 연재되었는데, 이미 1970년대라는 시점에 쓰인 글이고, 당시로서는 한국 내에서는 전혀 발표될 수 없었던 내용이라는 점에서 당대의 인식을 얼마간 보여준다고 판단할 수 있다.
 

1) 1970년대의 논쟁1: 이회성, 『금단의 땅』 


일단 소설을 약간 소개해보자. 이 소설의 주인공은 박채호와 조남식이다. 그 둘은 소수의 동지들과 함께 ‘자생적 사회주의’의 등장을 목표로 은밀히 조직결성을 도모하며, 동시에 각자 공개활동을 전개한다. 박채호는 1950년대 후반 고려대학교에 입학하여 4·19를 경험하고, 그 후 남북학생회담을 추진하는 운동에도 참여한다. 그는 4·19 혁명을 계기로, 미지의 학문에 대한 굶주림으로 마르크스, 레닌, 모택동의 저술을 섭렵하기 시작한다. 그는 1961년 5·16 쿠데타 이후 ‘파쇼집단’과의 투쟁 속에서 점차 ‘자생적 사회주의’라는 자신의 사상을 수립해 나간다. 그 후 신분을 위장하기 위해 국토통일원에 들어가고, 다시 고려대학교 강단으로 돌아온다. (그는 통일원에 들어간 덕택에 북한의 자료에 자유롭게 접근할 수 있게 되는데, 이로 인해 오히려 더 북한에 대한 비판적 인식을 더 정교하게 가다듬는다.) 한편 조남식은 재일교포로서 일본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1967년 서울에 와 1968년 서울대학교 사회학과 석사과정에 입학한다. 그는 ‘청토회’라는 학생써클을 조직하며 《청토》라는 회지를 발간하고, 빈민촌 활동을 전개하기도 한다. 1971년 1월 조남식은 중앙정보부에 끌려가게 되는데, 중정에 포섭된 다른 재일교포 학생의 ‘증언’을 토대로 북한의 간첩이라는 죄목을 쓰게 된다. 그는 학원간첩단을 조직하여 1971년 4월의 대통령 선거를 겨냥한 대규모 학원소요사태를 계획한 것으로 조작된다. 

그럼 이제 소설 속에서 다루고 있는 중요한 주제를 살펴보자. △1972년의 7·4 남북공동성명과 통일문제, △남한의 사회운동과 반공주의 문제, △북한사회에 대한 인식 문제로 나누어 본다. 
 
(1) 7·4 남북공동성명과 통일문제 
박채호와 함께 학생운동을 했던 동료 중에 일부는 북한 사회주의에 매료되기도 했으나, 그는 점차 북한의 행동방식에 회의를 품기 시작한다. 예를 들어 1968년 1월에는 남파 게릴라(이른바 김신조부대)의 청와대 습격사건이 벌어지고, 11월에도 남파 게릴라가 울진, 삼척에 상륙한 사건이 발발했다. 북한 방송에서는 “남조선에서 무장유격대가 봉기했다”며 마치 남조선 인민 내부로부터의 봉기인 것처럼 보도하고, 산악지대와 농촌지역에서 빈농과 광부가 그에 호응하여 유격대에 합세하고 있으며 나아가 도시습격을 위한 대담한 작전을 전개 중이라고 선전했다. 그러나 박채호는 이를 북한의 ‘극좌모험주의’의 발로라고 보았다. “인민이라는 토양이 얼어붙어 있을 때 무모한 게릴라활동을 벌이면, 군사적·정치적·도덕적 타격을 받을 뿐이다”, “남한의 ‘인민’들은 무장게릴라를 환영하지 않는다. 환영하기는커녕, 6·25 동란의 참상을 되새기며 공포에 떨었다. 반공의식을 더욱 부채질 할 수 있는 조건들이 모두 갖추어져 있었다. (…) 북한의 위험한 모험은 남아 있는 불씨마저도 꺼드릴 가능성이 있었다.”

또한 1971년에 최초로 시작된 남북적십자회담도 쟁점이다. 남북적십자회담은 1971년 8월 대한적십자사가 KBS방송을 통해 이산가족 찾기를 위한 회담을 북한에 제안하고, 북한의 조선적십자회가 평양방송을 통해 제안을 받아들이며 시작됐다. 예비회담은 1971년 9월부터 1972년 8월까지 판문점에서 총 25차례 개최됐다. 본회담은 1972년 8월부터 1973년 7월까지 평양과 서울을 오가며 총 7차례 개최됐다. 그러나 실제 성과는 없었다.

하지만 박채호는 1971년 3선에 성공한 박정희 정권이 남북적십자회담을 정치적으로 활용할 것을 경계했다. “민족의 비원을 달성한다는 명목 하에 이 회담을 정권유지의 도구로 삼는 것은 참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남한에서 남북적십자회담을 제안하기 전, 사법파동(7월), 광주대단지 사건(8월 10일), 실미도 사건(8월 23일)이 연거푸 터져 나오고 있었다.

바로 이 시점, 1971년 8월 박채호는 통일혁명당의 당원 나도경과 만난다. 자연스럽게 대화 주제로 남북적십자회담이 오른다. 이 시점까지는 둘이 서로의 실체를 완전히 파악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으나, 몇 차례의 만남을 통해 점점 실체를 파악하게 된다.
 
박채호    남북적십자회담은 인도주의 정식에 입각해서 이루어진다고 합니다. 그건 좋습니다. (…) 하지만 국내에서는 그 인도주의의 한 조각도 내주기 아까워하던 자들이 어떻게 북한사람들에게 인도주의를 마구 뿌린다는 겁니까. (…) 정치의 연장(延長)으로서의 인도주의, 이건 오히려 불쾌감 밖에 주지 못해요. 달콤한 환상을 뿌리는 정치적 허구죠.
나도경    [박정희 정부는] 설사 시늉만일지라도 어쨌든 ‘인도주의’를 내걸지 않으면 안 되었으니까요. 그들이 거기까지 몰린 건 그들에게 불리한 겁니다. 닉슨이 백기를 들고 중공에 갔듯이 말입니다. (…) 박정희는 닉슨의 흉내를 낼 수밖에 없었던 건 아닐까요? (…) 진심으로 달리지 않으면 민중에게 버림받고 맙니다. (…) 민중은 남북교류를 원하고 있어요. (…) 남북교류가 이루어지게 되면, 남한사람들이 북의 참모습을 접할 수 있게 됩니다. 반공사상으로 흐려져 있던 그 눈이 참된 모습을 보게 되는 겁니다.
박채호    [박정권은] 우방국과 충분히 대책을 세운 뒤에, 데탕트 시대에 걸맞은 반공 공세를 취하고 나오는 것뿐이죠. 박 대통령은 평화공존정책으로 노선을 바꾸고 있어요. “민주주의와 공산독재 가운데 어느 쪽이 국민을 보다 나은 삶으로 이끄는 사회인지, 한번 경쟁해보자”고 말하고 있으니까요. 박 대통령은 닉슨이 북경에 갔을 때 ‘백기’를 들었다고 생각지 않는 모양이에요. 평양의 분석은 그런 점에서 지극히 천진난만한 것이었죠. (…) 그런데 박 대통령은 (…) 북한측이 자기를 남한측의 스폰서로 승인하게 만들려는 작전으로 나오고 있어요. (…) 자칫하면 분단이 고정화되고, 남한에 있는 민주세력의 성장이 방해받게 되지 않을까요? (…) 타도 대상과 협상하는 것은 도무지 말이 안 돼요. 정말로 협상이 가능한 정권과 손을 잡아야 합니다. 
 
이러한 논쟁은 1980년대 후반, 통일운동을 둘러싼 논쟁을 연상시킨다. 북한바로알기 사업이나 북한과의 직접적인 교류 사업이 △반공·반북 이데올로기를 약화시키며 반통일적인 남한 정부를 압박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는 주장과, △민선 파쇼에 다름 아닌 노태우정부의 북방정책을 사실상 승인함으로써, 반정부투쟁의 동력을 약화시키며, 나아가 남한정부가 주도하는 북방정책의 본질을 묵과하게 될 것이라는 주장이 첨예하게 대립했다.(뒤에서 자세히 살펴본다.) 

한편 박채호와 나도경은 통일혁명당이나 북한의 민주기지론에 대해서도 의견을 나눈다. 박채호는 이렇게 말한다. “통혁당의 강령이 ‘이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식으로 만들어진 것처럼 여겨집니다. (…) 한국의 정치, 역사, 경제적인 조건에 딱 부합되는 것이라고는 할 수 없어요. 어딘지 모르게 퉁명스러운 느낌이 들어요.” 또한 “모택동은 ‘혁명은 총구에서 생겨난다’고 말했지만, 한국혁명의 경우에는 일률적으로 그렇게 말할 수는 없지 않을까 생각해요. (…) [그] 테제가 기계적으로 적용되어버리면 강력한 무력을 준비한다는 군사사상이 되어 결국 무력통일론이 우세한 지위를 차지하게 될 겁니다. 그것은 끝없는 군비확장을 초래할지도 모릅니다. (…) 그러니까 남한에서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사상이에요. 말하자면 ‘혁명은 사상에서 생겨난다’지요.”

소설 속에서 나도경과 박채호는 1971년 12월 24일에 다시 만난다. 이번에는 통일방안이 화두에 오른다.
 
나도경    지금 남북한은 ‘협상’의 길을 모색하고 있습니다. 현재 진행중인 남북적십자회담이 궤도에 오르면, 조국통일에의 실마리가 풀릴지도 모르죠. 그렇게 되면. (…) 통일로 가는 중간단계로서 남북연방제를 실시하고, 장차는 남북총선거로 통일정부를 수립하게 될 겁니다. 
박채호    남북총선거나 남북연방제는 평화통일노선에 토대를 둔 통일전선을 지향하고 있어요. 그러나 통일전선이란 적대관계에 있는 대상과는 맺을 수 없지 않습니까? 타도대상인 박정권을 남북연방제의 대상으로 삼는 건 좀 이상하지 않을까요? 그건 마치 자본주의와 사회주의가 결혼하는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국제적으로는 데탕트가 가능해도, 국내의 계급투쟁에는 데탕트가 있을 수 없어요. (…) 따라서 박정권과의 협상에서는 남북총선거는 물론 남북연방제도 불가능합니다. 
 
다음해인 1972년 7월 4일, 그 유명한 7·4 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된다. 중앙정보부 이후락이 5월 2일 북한에 들어가 김일성, 김영주, 박성철을 만났고 쌍방 합의에 의한 공동성명이 발표된 것이다. 공동성명 1항에서 다음과 같은 조국통일 원칙을 합의하였다.
 
첫째, 통일은 외세에 의존하거나 외세의 간섭을 받음이 없이 자주적으로 해결하여야 한다. (자주)
둘째, 통일은 서로 상대방을 반대하는 무력행사에 의거하지 않고 평화적 방법으로 실현해야 한다. (평화)
셋째, 사상과 이념, 제도의 차이를 초월하여 우선 하나의 민족으로서 민족적 대단결을 도모하여야 한다. (민족대단결)
 
이렇게 7·4 남북공동성명에서 제시된 통일 원칙은 ‘자주·평화·민족대단결’로 요약된다. 이후락은 성명을 발표하는 자리에서 이번 조치는 긴장완화를 모색한 데 불과하며 긴장완화 자체는 아니라고 못박고, ‘총력안보’의 기치 아래 ‘대화 있는 대결의 시대’를 대비해 달라고 강조했다. 또한 김용식 외무부장관은 “공동성명이 나왔다고 해서 북한을 사실상 또는 법적으로 하나의 국가로서 인정한 것은 아니다”라고 밝혔다. 반면, 1971년 대선에 도전했던 김대중 신민당 의원은 신중한 말투로 공동성명에 원칙적인 찬성 의사를 표했다.

소설 속에서, 이번에는 감옥에 갇혀 있는 조남식이 7·4 공동성명을 발표한 북한의 의도에 의문을 제기한다. “내용은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하다. 그러나 북한은 왜 박정권과 손을 잡았을까? 그것도 중앙정보부의 두목과 협상해서.” 그는 통방하는 노(老)혁명가와의 대화에서 이렇게 말한다. “아무래도 남한의 정치정세에 대한 평양의 대응방식에는 비관적인 견해가 뒤에 깔려 있는 것 같습니다. 남한에서는 당분간 혁명세력의 진출이 어렵다는 견해지요. 그래서 7·4 공동성명이라는 평화적 방법을 취한 게 아닐까요? 만약 남한에 정권을 탈취할 수 있는 혁명세력이 진출해 있다면, 이런 식으로는 나오지 않았을 겁니다.”

한편 박채호는 7·4 남북공동성명이 “통일과 혁명을 변증법적으로 관련지어 생각하는 시점이 모호해져 있다“고 평가한다. “계급모순을 지닌 한국에서 통일문제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회주의 사회로의 이행이라는 시대적 명제를 안고 있으며, 이런 관점을 간과한다면 통일에의 진로에 차질이 생긴다”는 것이다. 예컨대 7·4 남북공동성명에는 상호내정간섭을 하지 않는다는 항목이 들어 있는데, 이 합의를 준수하려면 북한은 남쪽의 지하당 조직을 해체하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이다. 또한 북한은 남한에서 미군이 철수하면 남북통일이 가능하다는 전망을 품고 있는 듯한데, 이는 박정권이 보잘 것 없는 괴뢰정권이라는 시각을 전제로 한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미군이 철수하더라도 곧 박정권이 붕괴하지 않을 것이다. 지난날에는 미 제국주의가 남쪽의 주인이었으나, 이제는 박정권이 주요한 지주가 되고 미국은 유력한 배후세력의 위치로 후퇴하고 있다. 즉 ‘신식민주의’.

또한 그는 7·4 공동성명이 “위로부터 하달된 밀실에서의 교섭”이며, 이는 현저하게 권력주의적 경향을 보인다고 진단한다. 혁명은 외부로부터 들여올 수 없고, 한국사회의 내부모순이 격화해 가는 과정에서 발전해 갈 수밖에 없다. 그런데 북한에 제시하는 혁명론은 1930년대의 반제반봉건 민주주의 혁명론에 기반을 두고 있다. 반제는 여전히 옳지만, 문제는 ‘반봉건’이다. 과연 박정권이 봉건지주를 주체로 하는 봉건세력의 경제적 토대 위에 구성된 것인가? 봉건지주는 이미 오래 전에 몰락했고, 그 대신 독점자본이 한국을 지배하고 있다. 지금은 후진국형 반봉건 투쟁이 아니라 반독점 싸움이 필연적으로 상정된다. 따라서 남한에서는 반제투쟁과 병행해서 반독점으로서의 반파쇼 투쟁을 전개하고, 이 과정으로서 민주주의 혁명을 추진해야 한다. 

요약하면 남쪽에서 기본적 임무는 먼저 박정권을 쓰러뜨리고 나서 민주주의 원칙을 철저하게 관철하는 신민주주의 정권(인민민주주의 정권)을 수립하고 사회주의 국가권력을 창출해 가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남쪽에서 생긴 혁명적 당파에 의해 이러한 임무를 수행하는 것이다. 북한이 그렇게 하지 않고 전쟁 방식이나 상부에 의한 협상 방식에 매달릴 경우, 이는 관료주의적이고 모험주의적 발상일 수밖에 없다. 현재 북한이 주력해야 하는 것은 오히려 사회주의 건설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는 것이다. 즉 인민생활을 향상시키고, 경제경쟁에서 사회주의 제도의 탁월성을 발휘함으로써 남쪽 민중이 사회주의 건설이 인간을 풍요하게 하는 위대한 사업이라는 확신을 갖게 하는 것이다. 박채호는 이러한 자신의 노선을 ‘선(先)혁명, 후(後)통일’이라고 명명한다.
 
(2) 1970년대 한국의 사회운동과 반공주의
한편, 7·4 공동성명 이후, 정세는 숨 가쁘게 돌아간다. 1972년 10월 유신이 단행되고, 1973년 6월에 박정부의 6·23선언이 발표되며(남북한 동시 유엔가입 제안, 공산권과의 호혜평등 외교 천명), 1973년 8월 김대중 납치사건이 벌어진다. 또한 1971년 10월 위수령 발동 이후 침묵했던 학생운동이 1973년 10월 서울대 문리대, 11월 서울공대 교내시위를 출발점으로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1974년 1월 8일 긴급조치 1, 2호가 발동되어 유신헌법에 반대하는 자는 영장 없이 체포되어 15년 이하의 징역을 받게 되었다. 이때부터는 1971년 남북적십자회담이나 1972년 7·4 남북공동성명으로 촉발된 남북관계 개선 문제나 나아가 통일 문제가 남한사회 운동의 쟁점에서 가라앉게 되고, 유신철폐, 나아가 박정권 퇴진이라는 쟁점이 전면에 부각하게 된다. 

소설 속에서는 1974년 4월 3일로 예정된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의 궐기를 앞두고, 박채호와 그의 제자이자 동지인 송홍조가 만나 이 운동에 대한 얘기를 나눈다. 
 
송홍조    저는 토착 사회주의를 믿고 그 과학적 사회주의가 한국이 택해야 할 올바른 길이라고 인식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실은 우리 편이어도 좋을 사람들이 우리의 사상을 의심하고, 기독교 학생은 우리를 거북하게 여기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 실제로 학생운동을 이끄는 주류는 기독교계 학생이고, 그들은 (…) 강한 반공정신을 갖고 있습니다. (…) 그리고 민주회복운동을 하고 있는 학생은 ‘빨갱이’ 딱지가 붙을까봐 두려워서 우리와 공동보조를 취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박채호    우리의 존재는 무엇보다도 우선 역사적 산물이라는 게 중요해. 즉 이 나라의 역사 발전과정에서 생겨난 혁명집단이라는 사실이 중요하지. 그리고 내일을 향하여 열려 있는 미래의 당이야. 권력당이 아니라 혁명당으로서의 노선과 강령을 가진 토착 사회주의 정당. (…)
송홍조    아직 창당기념일도 갖지 못한 존재에 불과하지 않습니까?
박채호    민주주의가 자라지 않는 곳에서는 사회주의를 아무리 외쳐도 소용없어. 즉, 민주주의가 자라는 곳에서만 사회주의를 전망할 수 있지. (…) 파시즘이 사라지고 나서 민주주의가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파시즘을 타도하기 위한 투쟁 속에서 민주주의 사상은 태어나고 자라는 것이야. (…) 예를 들어 김지하는 독실한 천주교 신자이고 공산주의자는 아니야. 나는 공산주의자이지만, 기독교신자는 아니야. (…) 서로가 자유롭게 사상을 성숙시켜 가면서 민족의 난국에 공동대처해야 하고, 그날이 바로 민주주의가 승리하는 날이라고 나는 믿고 있네. (…) 우리나라의 기독교도에는 여러 부류가 있어 (…) 혁신적인 기독교인도 적지 않아 (…) 마음 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날이 오면, 상당히 극적인 광경도 일어날 수 있는 거야.
송홍조    그런 사람들이 있다 해도, 북한의 사회주의를 지지하느냐 어떠냐는 별 문제이겠지요.
박채호    나는 이제까지 북한 사회주의의 방식을 숨김없이 비판해 왔어. 하지만 북한에는 인민경제의 토대가 있고 (…) 인민대중이 계급적 차별에서 해방되어 있다는 사실을 놓쳐서는 안 돼. 그런 점에서 우리는 북한체제를 비판할 권리도 갖고 있지만, 좋은 점은 좋다고 말해야 할 의무도 갖고 있어. (…) 북한문제는 우리들의 내부모순으로서 파악하고 그 토대 위에서 전체를 보는 입장을 견지해야 한다고 생각해. 그러지 않고, 북한 때문에 남한의 혁명운동이 불가능해졌다고 보는 것은 책임회피이고, 일종의 사대주의가 돼버려. 
 
이러한 대화는 두 가지 쟁점을 담고 있다. 즉 △기독교가 주도하는 민주화운동은 ‘자생적 사회주의’ 운동의 동맹세력인가? △북한의 변화 없이 남북 합작 방식의 통일은 가능한가? 소설 속에서 박채호는 전자에 대해서는 기독교운동의 급진화 가능성을 승인하며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또한 후자에 대해서도 북한이 ‘최종심급’에서는 사회주의의 긍정적 요소를 포함하고 있으므로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북한이 대남노선의 오류를 시정하고 사회주의 건설에 주력한다면 앞으로 긍정적 역할을 할 수 있다고 평가한다. 하지만 이러한 시각은 1970년대의 관점이므로, 현재의 시점에서는 다시 쟁점이 될 것이다. 
 
(3) 북한사회에 대한 인식 문제: 한국전쟁과 북한 후계자 문제 
한편 소설 속에서는 민청학련 사건과 (2차) 인혁당 사건이 발발한 후 1974년 5~6월, 박채호는 나도경의 동생으로 통혁당 활동을 조력하는 나경리, 북에서 내려온 공작원 고용엽과 연달아 만나게 된다. 이는 통혁당 또는 북한과의 남은 쟁점들을 다루려는 소설가의 의도로 보인다. 
 
나경리    그 (한국)전쟁을 일으킨 건 대체 어느 쪽인지.
박채호    누가 먼저 38선을 넘었느냐 하는 것은 결말이 나지 않는 입씨름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당시의 국내외 정세를 면밀히 분석해보면, 하나의 판단을 내리기는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나경리    그건 역시 ‘조국해방전쟁’이었나요? (…) 하지만 그렇게 되면 공화국이 남반부를 해방하려고 전쟁을 일으킨 것이 되는데, 사실이 그런가요?
박채호    내 나름대로의 견해는 갖고 있습니다만 단정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언젠가는 이 문제도 부각될 날이 오겠지요. 대담하고 솔직한 평가, 군사적 평가가 아니라 정치적 평가, 거짓 없는 성실한 평가. (…) 레닌은 붉은군대를 폴란드에 진격시켰지만 무력에 의한 혁명수출은 잘못이었다고 나중에 자신을 비판한 적이 있습니다. 이런 솔직한 태도가 공산주의자의 미덕이 아닐까요.
 
또한 박채호는 북한의 후계자 문제를 제기한다. “혁명과 통일은 대를 이어서 수행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하더군요. (…) 하지만 그것과 자기 자식을 후계자로 내세우는 것이 어떤 논리적 필연성을 갖는단 말입니까. (…) 거기서는 어떤 왕권신수설이 전개되고 있는 겁니까?”

소설의 마지막은 1974년 6월에 박채호가 조남식과의 관계가 포착되어 체포되는 사건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즉 소설은 대략 1971년부터 1974년까지를 다루는 셈이다.) 

소설에서 다루는 주제는 정리해보면 광범위하다. △1968년 남파게릴라 사건부터 1971년 남북적십자회담, 1972년 7·4 남북공동성명에 이르는 북한의 대남정책(일반적으로 말하면 혁명론, 통일론)에 대한 평가 문제, △또한 이를 반영하는 통일혁명당의 노선이라는 문제라는 당면 문제로부터 △한국전쟁에 대한 평가 문제, △북한의 후계자 문제까지 다룬다. 그리고 이러한 문제에 대한 비판적 인식에 기초하여 ‘토착적 사회주의’ 또는 ‘자생적 사회주의’ 운동의 전망과 윤곽을 제시하기도 한다. 
 

2) 1970년대 논쟁2: 남민전과 전민노련 


이회성의 소설은 어쨌든 픽션이지만, 이태복 씨의 증언에 따르면 위에서 언급했던 쟁점은 현실 운동에 실존했던 것이다. 그에 따르면, 1977년 말, 1978년 초, 흥사단 아카데미 동료인 이은숙을 통해 남민전 지도부 신향식이 접촉해왔다. 이때 한국사회 성격, 당면 과제, 조직노선에 대해 의견을 나누었다. 그의 말을 들어보자. 
 
그는 한국사회는 미제가 지배하는 완전한 식민지라고 주장했고, 나는 해방 직후 그랬지만 1960~70년대 경제발전에 의해 한국의 독점자본은 중심축을 갖고 있기 때문에 식민지 규정에 동의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는 미제의 강점으로부터 조직을 해방시키는 게 가장 시급한 과제라고 말했으나 나는 민주화투쟁의 진전 여하에 따라 민족적 과제의 해결 수준이 달라질 것이라고 말했다. 

운동의 사령부, 참모부 없이 승리할 수 없다는 그의 주장은 어디까지나 당위적 논리이지 지금 우리 운동의 발전과정에 반드시 적합한 논리는 아니며, 민주주의적 과제의 해결주체는 결국 노동자계급과 그 동맹자들이기 때문에 그 투쟁을 지도하는 참모부의 구성도 이 투쟁과정에서 축적된 지도역량에 의해 이루어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대부분의 주제에 대해 견해를 같이할 수 없었던 나는, 특히 박헌영 문제에 관한 그의 태도를 보고 지나치게 북의 체제에 기울어 있다는 것을 직감했다. 그는 북의 공식적인 태도처럼 박헌영도 미제의 간첩이고 스파이라고 말했다. 나는 스탈린주의 폐해를 한국의 운동가들이 그대로 받아들이는 태도를 이해할 수 없다면서 역사 앞에 진실되기보다는 현존 권력에 맹종하는 태도야말로 한국 내의 어용세력과 같다고 응수했다.
 
이러한 인식 차이 역시, 북한의 혁명론, 통일론과 남한의 ‘토착 사회주의’, ‘자생적 사회주의’의 시각 차이를 반영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겠다. 즉 이회성의 소설이 제시한 논쟁 축이 남한 사회운동 현실에도 실존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3. 7·4 남북공동성명과
한국의 재야운동, 기독교 사회운동 


한편, 1972년의 7·4 남북공동성명은 한국의 재야운동이나 기독교 사회운동에도 큰 충격을 주었다. (1970년대의 재야운동이나 기독교 사회운동에 뿌리를 둔 ‘통일운동’이 1980~90년대 통일운동의 중요한 한 축을 형성했으므로, 이 글에서도 그 흐름을 다룬다.)

1970년대 이른바 ‘재야운동’의 출발점은 1971년 4월 18일에 결성된 민주수호국민협의회였다. 박정희와 김대중의 대결로 대선 분위기가 고조되는 가운데 결성된 민주수호국민협의회는 1971년 대선과 총선이 ‘민주헌정사의 분수령’임을 강조하고, 국민들에게 권력의 탄압이나 금전적 유혹에 굴하지 말고 주권을 공명정대하게 행사해줄 것을 호소했다. 즉 야당 후보 지지를 공개적으로 천명하지는 않으면서, ‘공명선거 쟁취’를 주요 목적으로 제시했던 셈이다. 민주수호국민협의회는 87명의 개인으로 구성되는데, 초기 구성원 46명은 언론계 3명, 종교계 11명, 학계 11명, 법조계 4명, 문화계 12명, 여성계 1명, 지방 4명으로 구성되었고, 대표위원은 김재준, 이병린, 천관우였다.

이 중에서 김재준은 송창근, 한경직과 함께 조선신학교-한국신학대학-한신대학(교)를 설립한 주역이다. 김재준은 5·16 쿠데타 이후 학장 정년을 만 60세로 단축하는 조치로 인해 한신대 학장직에서 물러난 후, 한일국교정상화 반대를 계기로 장준하와 함께 사회운동에 투신한다. 김재준은 해방 전 북간도 용정에 위치한 은진중학교에서 재직했는데, 당시 그의 제자는 강원룡, 문동환, 안병무로 모두 기독교 사회운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다. 조선신학교에 다닌 문익환도 그의 제자로 분류할 수도 있다.

1972년 7·4 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된 후, 민주수호국민협의회는 성명서를 발표하여 남북 긴장상태의 완화와 교류를 개시해야 하며, 이는 조국통일을 위한 민중의 참여를 전제로 하는데, 민중의 자유의사 표현을 억압하는 특별조치법, 국가보안법, 반공법이 폐기 또는 수정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제시한다. 당시 한국교회의 반응이 대체로 ‘신중론’에 가까웠던 것에 비하면, 상당한 차이가 있는 주장이라고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한국기독교장로회(기장) 성명(1972.7.11.)은 일부 내용에 대해서는 “우리의 긍정을 보류한다”는 입장을 피력했고,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성명(1972.7.18.)은 “7·4 공동성명에서 나타난 정신을 지지”한다고 하면서도 다음과 같은 우려를 표했다.
 
사상과 이념 제도의 차이를 초월하여 우선 하나의 민족으로서 민족적 대단결을 도모하여야 한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통일을 위하여 우리의 민주적 이념을 경시함을 의미할 수는 없다. (…) 우리는 민주주의적이며 반공적인 질서와 교육을 소홀히 할 수 없고 대화의 밑바탕이 될 우리의 민주적 힘을 강화하여야 한다. (…) 성급한 남북대화 때문에 반공적인 여론이 억압되는 경우에는 심히 우려되는 사태가 벌어질 것이다.
 
기독교교회협의회는 ‘자주’라는 원칙이 미군철수와 연관이 있으며, ‘민족대단결’이라는 원칙이 남한의 민주주의 이념과 반공질서를 무너뜨릴 수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김흥수에 따르면, 1970년대 기독교 사회운동의 주요 관심은 민주화 문제였다. 박정희 정부는 기독교교회협의회를 필두로 한 종교계의 정치비판 세력을 ‘용공’(즉 공산주의를 용인하는 세력)으로 몰아갔고, 기독교교회협의회는 인권운동과 민주화운동이 용공이 아님을 변호해야 했으며, 반공적 입장을 분명히 보여주어야 했다. 즉 이 상황에서 교회는 통일운동에 소극적일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결국 1970년대까지 냉전의 틀과 반공주의적 입장 때문에 교회는 진정으로 통일에 어떤 공헌도 하지 못했다는 말이다. 
 
(1) 장준하와 7·4 남북공동성명
한편 장준하는 《씨ᄋᆞᆯ의 소리》에 “민족주의자의 길”(1972.9.)이라는 글을 발표한다. 
 
어떻든 이 분단체제의 그 세계적 주범인 양극 냉전체제도 긴장완화니 해빙이니 하고 근본적으로 새로운 모습으로 변해 갔다. 미국과 소련, 미국과 중공의 대결과 대립의 완화, 소련과 중공의 동맹과 대립의 과정은 근본적으로 우리의 주변정세를 바꾸어 놓았다. … 외세에 의한 자기분열을 강요했던 자기부정의 조건이 스스로 변화하는데, 그래도 우리는 어리석게도 자기부정을 고집하고 있어야 한단 말인가? (…)

민족적 양심에 살려는 사람 앞에 갈라진 민족, 둘로 나누어진 자기를 다시 하나로 통일하는 이상의 명제는 없다. 이를 위한 안팎의 조건을 만들어 가는 일 이상의 절실한 과제는 없다. 어떤 논리도, 이해도 이 앞에서는 뒤로 물러나야 한다. (…)

모든 통일은 좋은가? 그렇다. 통일 이상의 지상명령은 없다 (…) 공산주의는 물론 민주주의, 평등, 자유, 번영, 복지 이 모든 것에 이르기까지 통일과 대립하는 개념인 동안은 진정한 실체를 획득할 수 없다. 모든 진리, 모든 도덕, 모든 선이 통일과 대립하는 것일 때는 그것은 거짓명분이지 진실이 아니다. (…)
남북공동성명과 적십자회담의 결과로 진실로 평화적인 민족통일의 길이 열린다면 이보다 더 위대한 일은 세계사에도 우리 민족사에도 없을 것이란 말을 감히 하겠다.
 
 
장준하는 이 글에서 몇 가지 주장을 덧붙인다. 첫째, 주변 열강은 남북의 평화공존을 요구할 가능성이 높은데, 이는 무력대결보다는 낫지만 통일의 길은 아니며 분단을 항구화할 수 있다. 둘째, 주변 열강이 현상동결을 요구할 때 남북한 정권 담당층이 통일을 진전시킬 수 있을지 의구심이 든다. 그러므로 통일문제는 민중 스스로가 관여하고 밀고 나가야 한다. 셋째, 우리는 지금까지 정치적 자유를 위해 싸웠는데, 이는 민족적 자유를 확보하기 위한 수단이기도 하다. 따라서 민족 전체가 향유할 정치적 자유가 확보되기 위한 법적인, 현실적인 조치가 단행되어야 한다. 넷째, 통일을 위해서는 정치·경제·문화적 자주성을 확보하고 하나의 민족을 향해 남북이 서로 개혁해야 한다. 그 현실적인 단계로 ‘복합국가론’이나 복합사회적 제도와 체제를 신중히 검토해야 한다. (이스라엘이 그 귀중한 사례가 될 수 있다.) 

즉 장준하의 주장에 따르면, 북한의 체제와 남한의 체제를 지양하는 ‘복합국가’라는 새로운 통일국가의 상을 통해서 민족통일이 가능할 수 있으며, 이러한 지상과제를 위해 남과 북의 정권 담당층은 기득권도 포기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2) 문익환과 장준하
『문익환 평전』에 따르면 이러한 장준하의 입장은 ‘통일지상주의’라 하여 상당한 내부 비판자를 양산했고, 선민주 후통일이냐, 선통일 후민주이냐는 논쟁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그러나 문익환은 전율할 듯이 감격했다. 문익환은 이렇게 회고했다. 
 
그때 나의 관심은 남과 북으로 갈라진 ‘국토’가 아니라 ‘민족’이었다. 그 후로 민주냐 통일이냐는 문제가 제기되었을 대 이 둘을 하나로 묶어준 것이 바로 ‘민족’이라는 개념이었다. 남과 북으로 갈라진 국토는 무력으로도 하나가 될 수 있지만, [남북 각각] 주종관계로 갈라진 겨레를 하나로 묶는 길은 ‘민주’의 길밖에 없다는 것은 재론의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한편 1975년 8월에 발생한 장준하의 ‘의문사’ 이전 시점에, 베트남 전쟁의 결과, 1975년 4월 사이공의 함락도 문익환에게 충격을 주었다. 즉 자유주의가 독재를 하면 분단된 사회의 민중은 공산주의를 선택해서라도 국민통합의 길을 가게 된다는 것이었다. 
 
월남전 종식이 나에게 준 충격[은] (…) 이 땅에서 (…) 민주화의 가망이 없다는 것이 우리 겨레의 확신이 되면 우리 겨레도 월남 민중과 같은 불행한 선택을 하게 된다. 민주냐 독재냐가 아니라 두 독재[남의 독재와 북의 독재] 가운데서 어느 하나를 선택하지 않으면 안 될 궁지에 몰리면 우리 겨레도 어쩔 수 없이 월남 민중과 같은 선택을 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구나.
 
문익환 목사는 장준하의 죽음 이후, 사회운동에 본격 투신하게 된다. 그는 1976년 3월 1일 ‘3·1 민주구국선언’ 설명서를 작성하여 명동성당에서 발표하는 데 적극적인 역할을 하고 다음날 구속되어 최초의 옥중생활을 시작한다. 그때 그의 나이는 59세였다.

하지만 7·4 남북공동성명 이후 유신체제라는 조건에서 통일운동이 본격화된 것은 아니었다. 다만 문익환 목사는 1977년 12월 형집행정지로 출소한 후 환영회에서도 “갈라진 민족의 통일이야말로 자신의 기원의 핵심”이라고 밝혔고, 1978년 7월 5일 결성된 민주주의국민연합 결성식에서도 “민주화가 이룩되지 않고서는 통일을 이룩할 수 없고, 통일을 이룩한다고 해도 민주화가 되지 않으면 그 통일은 무의미하다. 민주통일을 이룩하는 데 힘을 한데 묶자”고 주창한다. 이러한 흐름은 1980년대 후반 강력하게 분출한 통일운동의 한 축을 이룬다.
 
 

4. 유신체제에서 신군부로: 북한의 고려민주연방제 제안


1) 남한의 유신체제와 북한의 사회주의 헌법


그러나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처럼, 7·4 공동성명 이후 남한에서는 박정희 정권이 1972년 10월 유신을 통해 장기집권을 도모했다. 북한은 1972년 12월 ‘사회주의 헌법’을 제정하여 국가주석직을 신설했다. 북한의 1972년 헌법 역시 국가주석직과 중앙인민위원회를 창설함으로써 권력집중형 국가기관 체계를 창출한 것으로 평가된다. 특히 국가주석의 권한이 막강해졌다. 국가주석은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으로부터 특사권, 외국사신 신임장과 해외주재 대사·공사의 소환권, 조약 비준권과 폐기권을 이관 받고, △내각 수상으로부터 군통수권과 행정집행기관(정무원)의 지도권을 이관 받으며, △‘국가주권의 최고지도기관’인 중앙인민위원회를 직접 지도하게 되었다. 

나아가 1970년대에 이르러 김정일 후계구도가 본격화된다. 김정일의 지도력 확립과정을 크게 세 단계로 나누는 분석에 따르면, 1967~74년이 김정일 체제가 확립되는 1단계다. 이때는 특히 그가 당내 경쟁그룹의 숙청을 주도한 것으로 평가된다. 김정일은 우선 1967년 박금철·이효순 사건을 통해 당 내 이른바 ‘갑산파’ 숙청을 주도했다. (이들의 죄목은 함경도 출신 자파 계열 출신 인사를 연고주의에 따라 대거 등용하고, 갑산파의 투쟁경력을 과장했으며, 각종 비리를 저질렀다는 것이었다. 또한 이들이 당의 경제이론을 거부하고 가치법칙의 이용과 균형발전을 주장하여 수정주의 경제이론을 유포했다는 것도 포함되었다.) 1967년 사건은 당의 2인자를 둘러싼 투쟁이라는 성격을 지녔기 때문에 김정일의 지도력이 확립되어가는 첫 번째 단계의 시작으로 간주된다. 

또한 그는 1969년 김일성의 동생 김영주와 함께 김창봉·허봉학 사건을 통해 군부 숙청을 이끌었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그들은 1968년 청와대 기습사건이나 울진삼척지구 침투사건을 주도하면서 군벌관료주의와 좌경모험주의를 저지른 것으로 규정되었다. 또한 군의 간부화나 현대화를 반대하고 훈련보다는 부업과 축산작업반을 강조하여 군대의 규정을 문란하게 했다는 죄목을 받았다.) 이처럼 남로당 세력, 소련파, 연안파 인사에 이어 갑산파, 김일성 직계인 동북항일연군 세력의 핵심인사까지 숙청당함으로써 김정일의 경쟁그룹은 거의 와해되었다.

그리고 이와 때를 같이 하여 ‘혁명적 수령론’과 ‘유일사상’이 체계화된다. 1967년에 이론화되는 혁명적 수령론의 초기 형태에서는 수령을 “통일단결의 유일한 구심이며 혁명과 건설에 대한 유일적 영도를 실현하는 혁명의 최고수뇌”라고 규정하며 수령에 대한 태도가 진정한 혁명가와 기회주의를 갈라내는 가장 중요한 기준이라고 주장했다. 수령을 절대화하려는 시도는 1974년 김정일이 제시한 「유일사상체계 확립을 위한 10대 원칙」을 통해 정확히 드러난다. 「10대 원칙」은 위대한 수령 김일성에 대한 신격화, 절대화, 신조화, 무조건화를 강조했다(김일성동지를 충성으로 높이 우러러 모셔야 한다, 김일성 동지의 권위를 절대화해야 한다, 수령님의 교시를 신조화해야 한다, 교시 집행에서 무조건성의 원칙을 철저히 지켜야 한다 등).

과연 1972년 7·4 공동성명 이후, 이처럼 남과 북에서 박정희 대통령, 김일성 주석 각각이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기로 한 강력한 조치들이 남북대화에 부정적 영향을 끼쳤던 것인가? 홍석률(2012)은 “박대통령이 안보논리를 빌미로 독재를 강화한 것은 내부적으로 정치적 분란을 일으켰을 뿐 아니라 한반도 평화유지에도 걸림돌로 작용했던 것”이며, 이와 마찬가지로 “김정일의 후계자의 부상은 유신체제의 수립이 그러했듯이 남북대화의 진전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주장한다. 즉 “남북대화에 임하는 두 정부의 태도는 진정성을 갖고 실질적인 문제해결을 도모하기보다는 보여주기 위해 명목적으로 대화한 측면이 없지 않았다. 게다가 남북대화로 조성된 유동적 상황을 내부 정치에 노골적으로 활용하였으니 (…) 남북의 집권세력은 1972년 가을과 겨울 헌법 개정을 단행하여 현실정치적으로 얻을 것을 얻었던 만큼 이후의 대화의지는 더욱 감소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2) 유엔에서의 외교경쟁과 1976년 데탕트의 종결


실제로 7·4 공동성명 이후 남북 간의 외교경쟁이 가속화되면서, 남북 모두 자기 진영 국가들이 상대방과 외교관계를 맺는 것을 차단하기 위해 노력했다. 남한은 미국이 북한과 접촉하면 “북한이 더욱 건방져지기 때문에 남북대화가 어렵다”는 입장을 피력했고, 북한 역시 남한정부를 고립시켜야만 북한과의 대화에 나설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외교경쟁 차원에서, 1973년 6월 23일, 박정희 대통령은 「평화통일 외교정책에 관한 특별선언」(6·23선언)을 전격적으로 발표했다. 남북한 동시 유엔가입을 제안하고, 공산권과의 호혜평등 외교를 천명한 것이다. 데탕트의 분위기 속에서 한국의 유일 대표권을 유엔에서 관철시키기 어려웠고, 북한의 국제기구 가입을 막기도 어려웠다. (예를 들어 1973년 5월 북한은 세계보건기구WHO에 가입했다.) 즉 남한정부가 현실적이고 유연한 대외정책을 제시해 외교경쟁에서 선수를 친다는 구상이었던 셈이었고, 따라서 이를 두고 북한과 사전에 협의한 바도 없었다.

이에 반해 북한 역시 같은 날, 1973년 6월 23일 「평화통일 5대강령 제의」를 통해서 유엔 동시가입과 교차승인에 대해 강력한 거부 의사를 표현했다. 북한이 유엔 동시가입 및 교차승인에 대한 거부의 근거로 제시한 것은 △하나의 민족국가인 조선이 국제적으로 두 개의 국가로 공인되어 조선의 분열은 영원히 고착되며, △이는 오히려 정세를 안정시키는 것이 아니라 항시적 긴장과 전쟁의 화근만을 더욱 빚어낼 것이며, △남조선정권은 가짜 정권이며 완전한 식민지군사기지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UN에 들어갈 자격이 없으며, △UN의 이름으로 “분할하여 통치하라”는 제국주의의 낡은 통치술을 합리화시켜줄 뿐이며 △결국 통일문제 해결의 참다운 방도가 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결국, 1973년 8월 북한은 김대중 납치사건과 6·23선언을 비난하며 남북대화의 중단을 선언하게 되었다. 그리고 남한을 우회하여 1974년 3월 북미평화협정 체결을 주장하게 된다. 이는 남북대화를 재개하지 않겠다는 명백한 의사표시였으나, 미국은 북미관계를 남북관계와 연계해서 보았던 종래의 입장에 따라 이러한 제안을 수용하지 않았다. 당시 미국은 남한을 제치고 북한과 양자관계를 맺어야 할 만큼 북한과의 고유한 이해관계가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즉 미국의 입장에서 볼 때, 북한은 중국과 달리 중요한 전략적 전환의 대상이 아니었다. 

북한은 북미평화협정 체결이라는 전략에 따라 유엔군사령부 해체 문제를 강력히 제기하기 시작했다. 실제로 1974년, 1975년 유엔총회에서는 유엔사 해체 문제가 논의 안건에 올랐다. 1975년 30차 총회에서, 서방측은 “휴전협정에 직접 관련된 모든 당사국이 협의하여 휴전협정의 유지를 위한 대안적 조치를 마련한다면 1976년 1월 1일까지 유엔군 사령부가 해체되기를 희망한다”는 결의안을 제시했다. 반면 공산측은 유엔군 사령부의 철폐, 외국군 철수, 휴전협정의 ‘진정한’ 당사자 사이의 협상으로 휴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대체할 것을 주장하는 결의안을 제출했다. 1975년 표결 결과, 놀랍게도 두 가지 결의안 모두 다수표를 얻어 채택되는 이변이 발생했다. 이는 두 가지 결의안에 대해 모두 찬성표를 던졌던 국가들이 존재했다는 의미다. 

하지만 1976년 8월에 발생한 ‘판문점 도끼살인사건’은 한반도 데탕트의 종결자 역할을 했다. 이로 인해 북한에 대한 국제여론이 악화되었다. 예를 들어 1976년 유엔총회를 앞두고 유엔사 해체 문제에 관해 북한의 입장을 지지하는 결의안이 자진 철회되었는데, 이는 그만큼 지지 분위기가 차갑게 식은 상황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3) 전두환 군사쿠데타와 북한의 고려민주연방제 창설 제안: 제2기 남북대화의 시대 


1979년 박정희 사후, 전두환 소장은 1979년 12·12 쿠데타, 1980년 5·17 비상계엄, 5·18 광주학살을 계기로 실권을 장악했다. 1980년 9월 1일 전두환 대통령이 취임한 직후, 10월에 북한은 「고려민주연방공화국 창설방안>」 제안한다. 당시 북한은 1970년대에 이미 제기했던 평화정착~남북합작방식의 통일(연방제통일)을 재확인하면서도 그 전제조건으로서 전두환 군사파쇼 청산을 내세울 수밖에 없었다. 즉 북한은 고려민주연방공화국 창설의 전제조건으로서 △남한에서 군사파쇼통치 청산, 사회의 민주화 실현, 민주적 정권으로의 교체 (반공법·국가보안법과 폭압통치기구의 폐지, 정당, 사회단체, 개별적인 인사들의 자유로운 정치활동 보장) △긴장상태의 완화와 전쟁위험의 제거 (북미평화협정 체결, 주한미군 철거), △미국의 ‘두 개의 한국’ 정책 저지, 미국의 내정간섭 중단을 제시한 것이다. (‘고려민주연방공화국’ 제안에 대해서는 뒤에서 다시 한번 다룬다.) 

하지만 놀랍게도 전두환 대통령은 1981년 1월 신년연설에서 “남북당국 최고책임자 상호방문”, 즉 정상회담을 제안한다. 북한이 초청하면 본인이 북한을 방문하고, 김일성 주석이 내려오면 모든 협조를 제공하겠다고 밝힌 것이다. 나아가 6월에는 판문점이나 제3국에서 만날 수도 있고 북한이 제시한 연방제 통일방안도 의제로 수용할 수 있다는 입장을 표명했다. (6·5 제의.) 그러나 북한은 1981년 1월과 6월, 거듭해서 남한의 제안을 거부했다. “현 남조선 정부와는 어떤 형태의 대화나 접촉도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반면 전두환 정부는 점점 더 공세적으로 대북제의를 내놓기 시작했는데, 1982년 1월 「민족화합민주통일방안」을 제시했다. 「남북한 기본관계에 관한 잠정협정」을 체결하고, 향후 남북대표로 구성된 ‘민족통일협의회의’를 구성해 통일헌법의 초안을 마련하자는 것이었다. 그 직후 2월에는 ‘20개 시범실천사업’을 제의했다. 하지만, 북한은 이에 대해서도 “남조선 현 집권자는 협상의 마당에 앉을 자리가 없다”며 남한 당국을 배제하고, 「남북정치인 100인 연합회의」 소집을 제안했다. 

이처럼 남북대화가 동결된 가운데, 1983년 10월 9일 미얀마(당시 버마) 아웅산 국립묘지에서 폭발사건이 발생해 한국의 각료 4명, 고위관리 13명이 사망하는 대사건이 일어났다. 한국정부는 즉각 ‘북괴의 소행’으로 발표했고, 미얀마 정부는 10월 11일 관련자 3인을 체포 또는 사살하고 11월 4일 최종 수사결과, 북한의 지령을 따른 북한 공작원이 주범이라고 발표했다. 당시 버마는 북한의 전통적 우방국이었는데, 이 사건을 계기로 북한과 단교했다. 반면 북한은 10월 17일 이후 ‘전두환의 자작극’이라고 주장했다. (그 후 1985년 남북정상회담을 위한 비밀접촉에서 남측 수석대표 역할을 했던 박철언에 따르면, 1985년 남한을 방문한 허담 특사는 아웅산 테러 사과 문제에 대해 “시인할 수도, 사과할 수도 없는 것이니 ‘역사’에 맡기고, ‘과거를 불문하고 앞으로 그러한 불행한 일이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서로 노력하자”는 수준에서 유감의 뜻을 전했다고 한다.) 

당시 전두환 대통령은 전쟁까지 갈 수 있었던 상황을 본인이 억제했다고 자찬했는데, 실제로 테러사건으로 궁지에 처한 북한이 1984년 3월 LA올림픽(1984년)을 비롯한 국제경기에 남북단일팀을 구성하기 위한 남북체육회담을 제의하자 남측이 이를 전격 수용했다. LA올림픽 단일팀 구성은 우여곡절 끝에 성사되지 못했다. (북한은 결국 올림픽에 불참했다.) 하지만 8월 말에 남한에 수해가 발생하자, 9월에 북한은 적십자회를 통해 한국 수재민에게 구호물자를 제공하겠다고 제안하고, 한국정부가 수락함으로써 남북 적십자 간 수재물자의 전달이 이뤄졌다. 이를 계기로 다방면에 걸친 남북 접촉과 대화가 이뤄졌다. 1972년 박정희 정부 시기 이후로, ‘제2기 남북대화의 시대’가 개시된 것이었다. 

1984년 11월에 남북적십자 예비접촉이 개시되어, 남북 적십자 본회담이 중단된 지 12년 만인 1985년 5월에 본회담이 다시 열려 12월까지 세 차례 개최되었다. 특히 1985년 9월 20~23일에는 서울과 평양에서 최초로 이산가족 상봉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1984년 11월 15일 분단 이후 최초로 경제분야회담이 개최되어 1984년 11월까지 네 차례 진행되었다. 또한 1985년 7월, 9월에는 남북국회회담 개최를 위한 예비접촉이 두 차례 이뤄졌고, 같은 해 10월에는 남북체육회담이 열리기도 했다. 

또한 1985년 4월경부터 전두환 정부는 남북정상회담을 성사시키기 위한 비밀외교에 착수했다. 이를 주도한 것은 당시 안기부장 장세동과 안기부장 특보 박철언이었다. 9월에는 북측 허담 특사가 서울로 오고 10월에는 남측 장세동 특사가 평양을 방문하여 실제 성사 분위기가 무르익는 듯하였으나, 오히려 장세동 특사의 방북 후, 전두환 대통령의 태도가 크게 바뀌어 정상회담 조기 실현 지시가 철회되었다. 전두환 대통령은 북측에서 남북 정상회담의 전제조건으로 제시한 대규모 군사훈련(즉 팀스피리트 86)의 중단을 무시하고 1988년까지 강행한다는 방침을 밝혔다. 그러자 북한이 1986년 1월 20일, 팀스피리트 훈련을 이유로 모든 남북대화를 거부함으로써 공개적인 남북대화는 전면 중단되었다. 그 후로도 1987년 3월까지 정상회담을 위한 비밀접촉이 여러 차례 있었으나 결국 성사되지 못했다. 

그렇다면 전두환 정부는 왜 이렇게 적극적인 드라이브를 시도했는가? 당연히 그것은 쿠데타와 민중학살을 통한 집권이라는 치명적인 ‘원죄’를 벗어나 정치적 정당성을 만회하려는 시도로 보아야 할 것이다. 또한, 전두환 정부는 정치적 정통성 문제를 풀기 위한 또 하나의 방편으로 최규하 내각이 포기했던 올림픽 유치를 다시 추진했는데, 대회의 성공적 개최를 위해서라도 북한뿐 아니라 소련, 중국과 관계개선을 도모하려 했다. 그래서 전두환 정부가 비밀리에 남북정상회담을 개최하려고 추진할 때도, 북한이 그 의제, 결과, 합의선언을 미리 정하자고 주장한 반면, 남한은 정상 간 만남 자체가 중요하다는 입장을 피력했던 것이다.

반면 1980년대 상반기 북한의 대남정책을 일관성 있게 이해하기는 매우 까다롭다. 북한은 왜 1980년대 초반 전두환 정부의 대화제의를 무시했나? 말 그대로 남한의 군사파쇼를 대화 파트너로 인정할 수 없다는 의도였는가? 아니면 점차 심각해지는 경제난 속에서 통일문제에 대한 열의가 감소한 것인가? 

앞에서 필자가 인용한 백학순은 후자에 가까운 견해를 제시한다. “전 대통령이 (…) 북한의 ‘연방제 통일방안’을 정상회담 의제로 수용할 의사가 있다고 밝혔는데도 북한이 6·5 제의를 거부”했고, “이는 1970년대부터 심각한 경제악화를 겪고 온 북한이 ‘본격적인 통일논의’와 그것이 초래할 ‘부정적 영향’을 감당할 엄두를 내지 못했을 가능성을 부인하기 어렵다.” “또 1970년대 세계적인 ‘석유파동’으로 경제적으로 결정타를 입어 (…) 유럽 선진 자본주의국들과 일본으로부터 턴 키 방식으로 도입한 각종 최신 플랜트들에 대해 채무지불 불능상태에 빠졌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북한이 1980년대에 들어 이제는 더 이상 단일통일국가를 자신들이 원하는 조건과 방향으로 만들어 낼 능력이 없다고 판단함으로써, 예전의 ‘공세적’ 입장에서 주장할 수 있었던 ‘단일국가’를 더 이상 주장하지 못하고 이제는 ‘방어적’ 입장에서 ‘연방국가’를 ‘통일의 최종형태’로 제안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남한의 군사파쇼를 대화 파트너로 인정할 수 없었고, 따라서 그 상대방을 교체하기 위해 1983년 테러사건이 발생한 것인가? 그렇다면 왜 1984~85년 제2의 ’남북대화기‘가 열렸던 것인가? 이러한 대화는 왜 다시금 중단되었나? 1987년 11월에 대한항공 858편 폭파 사건은 왜 발생했던 것인가? 이러한 문제에 대해 당장 명확한 답을 내놓기는 어려울 듯하며, 앞으로 더 면밀히 검토되어야 할 듯하다. 
 
 

5. 전두환 집권기, 재야의 통일인식 


전두환 집권 초기 남한의 대북정책이나 북한의 대남정책에 대해, 사회운동 진영에서 나온 깊이 있는 분석을 찾기가 쉽지 않다. 이는 당시 사회운동이 처해 있던 정세적 조건을 반영할 것이다. 먼저 신군부는 1980년 5월 17일 김대중을 비롯해 26명의 재야인사를 연행해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을 조작했다. 이로써 재야 지도자 그룹과 학생운동이 큰 타격을 입었다. 5·18이라는 충격 이후, 투쟁력을 회복하기 위해 노력했던 학생운동의 경우도 무림-학림 논쟁(1980년 12월)이나, 「야학비판」-「학생운동의 전망」 논쟁(1982년)에서 볼 수 있듯이 ‘반파쇼투쟁’의 구체적인 실천방안에 모든 관심과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다가 전두환 정부가 1983년 후반기 이른바 ‘유화국면’을 조성하면서 사회단체들이 재조직되고 사회운동이 재활성화되기 시작했다. 그런데 정부는 1982년 12월에도 김대중을 비롯해, 광주·인혁당·전민련 관련자, 계엄위반자 47명을 석방하는 조치를 취하는데, 이때 문익환 목사도 형집행정지로 출옥한다. (문익환 목사는 1976년 민주구국선언으로 구속된 것을 시작으로, 1982년까지 7년 동안 1년여를 빼고는 줄곧 투옥생활을 했다. 따라서 이 기간 동안 감옥 밖에서 사회 활동이나 강연·저술 활동을 할 시간이 많지 않았다.) 1984년에는 민중민주운동협의회(민민협), 민주통일국민회의(국민회의)가 결성되고, 두 조직이 통합하여 1985년 3월에는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이 출범한다.

문익환 목사는 1984년 8월 장준하 9주기 추모강연, 「통일문제 인식의 현단계」에서 통일문제에 관한 본인의 생각을 종합적으로 제시한다. 먼저 1980년대 초반, 남한과 북한이 각자 통일방안을 제시하면서 공방을 주고받고 있는 상황에 대해 이렇게 언급한다. 
 
남쪽의 교차승인제와 북쪽의 고려연방제가 한 치도 물러설 수 없이 맞대결하고 있는 까닭은, 그 둘이 다 국민의 통일방안이 아니라 기득권자인 집권층의 통일방안이기 때문입니다. 현정부는 국민이 통일에 관해서 무슨 말이나 하는 것이 질색입니다. (…) 국민의 뜻을 모은 통일방안이 나와야 합니다. (…) 기득권 수호에밖에 관심이 없는 독재정부는 아무리 좋은 방안이라도 상대편에서 제안한 것이면 무조건 반대하고 보는 것이 그 생리입니다. 남북한의 통일논의가 지금까지 평행선을 긋고 있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 교차승인제나 연방제는 통일의 실체가 아니라 절차이며 형식입니다. 그러면 통일의 실체는 무엇인가? 저는 그것을 자유와 평등의 통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는 남한과 북한의 현 체제, 또는 그 기득권을 지양하며 자유와 평등이 실현되는 방향으로 통일이 이뤄져야 한다는 의미이므로, 남한과 북한 각각에 대한 비판적 인식을 전제로 한 것이었다. 또한 문익환은 《말》 창간호(1985.6.) 인터뷰에서 “남북 모두 지배자와 피지배자로 분열되어 있는데, 이것을 극복, 통일하는 것이 민족통일이라고 생각한다”, “지배와 피지배 관계가 일소된 사회를 성취해 내는 것이 민족의 통일이고 민주화라고 생각하며, 그러므로 민주화와 민족통일은 하나”라고 하였다. (훗날의 관점에서 보면, 이러한 기본적 입장은 NL의 통일론에 가까운가, 아니면 PD의 통일론에 가까운가? 숙고해 보면 이 역시 흥미로운 쟁점이 아닐 수 없다.) 

또한 그는 통일문제를 보는 네 가지 시각이 있다며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민주화를 염두에 두지 않은 통일론, △통일을 도외시하는 민주화 주장, △통일문제를 민주화보다 더 중요시하는 입장, △통일보다는 민주화에 더 무게를 두는 입장. 그러면서 문익환 목사는 세 번째 입장과 네 번째 입장은 “서로 견제, 보완하면서 나가면 된다”고 주장한다. “두 입장이 강조점까지 통일하려다가는 운동 자체를 깰 위험성마저 있기 때문에, 서로 인정하면서 한 운동으로 집결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그는 한반도 통일이 세계평화에 기여해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중립화’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렇다면 1984년 8월 이후 다방면의 남북접촉·대화가 이뤄지기 시작한 국면에 대해서는 어떻게 평가했나? 민주통일국민회의(의장 문익환)의 1985년 1월 7일의 신년기자회견문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 민주통일국민회의는 현시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온 민중에게 통일논의의 자유를 크게 확대하고 이에 필요한 정보와 자료를 앞으로 적극 제공해 나갈 것이며 나아가서는 모든 종류의 남북대화와 교류에 이 땅의 민주화를 위해 노력하는 민중민주 운동단체들이 자주적으로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바입니다.

명시적이지는 않으나, 당국 간의 접촉, 대화에 대해 완전히 부정적이지는 않은 뉘앙스로 볼 수 있을 듯하다. 한편 이와 비교해 볼 때, 민주통일국민회의 백기완 중앙위원의 입장은 얼마간 차이가 존재했다.  

통일논의는 그 동기, 출발의 계기가 근본적으로 민중 민족운동으로 있어야 하고 통일문제를 위한 대화, 논의 문제는 그것이 정권담당자들의 반민중, 반민족, 반민주적 탄압행위로 감행될 것이 아니라 분단 상황의 제 모습인 예속과 착취로부터의 해방, 자유의 구조적 박탈로부터의 해방, 그 완결로서의 강제분단으로부터의 해방을 위한 양심적이며, 감격적인 민중·민족운동으로 전개될 수 있도록 모든 법률 제도가 개폐되어 합법화되고 그것이 민족적으로 정당화되어야 한다.
 

당시의 대표적 지도자에 포함되던 문익환, 백기완의 통일론은 민중주도, 민족자주라는 관점에서는 분명히 일치했지만, 정부의 남북교류와 중립화 통일론이라는 문제에 대해서는 시각 차이가 존재했다는 것이다. 이는 문익환 목사의 표현을 따르자면, ‘통일문제를 더 중요시하는 입장’(즉 당국 간 교류도 인정하는 입장)과 ‘민주화에 더 무게를 두는 입장’(즉 반파쇼투쟁을 강조하는 입장) 간의 차이라고도 해석할 수도 있을 터이다. 하지만 문 목사의 견해를 따르자면, 일단은 “서로 [차이를] 인정하면서 한 운동으로 집결”하면서 이견을 해소해 나가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이견은 실천적으로 결코 사소한 차이는 아니므로 잠재적 쟁점이 되는 것은 분명하다. 다만 전두환 정부가 1984~85년 남북대화 국면에서도 여전히 통일 논의를 독점하면서 민중운동에 대한 탄압을 지속했으며, 1985년 하반기부터 ‘개헌투쟁’ 문제가 당시 남한 운동 내에서 최대 쟁점으로 부상했고, 1986년 1월부터 공개적인 남북대화가 중단되는 상황이 이어졌기 때문에, 이러한 쟁점이 더 크게 부각되지 못했을 것이다. (한편 1980년대 전반기의 사회운동을 다루기 위해서는 반미투쟁의 부상이나 반제운동 그룹인 NL의 태동에 대해서도 언급해야 하지만, 이는 뒤에서 다룬다.)   
 


6. 통일혁명당에서 한국민족민주전선으로

 
한편, 이 시기에 통일혁명당이 한국민족민주전선(한민전)으로 개편되었다는 주장도 특기할 만하다. 1968년 통일혁명당 사건 이후에도 과연 남한에 통혁당의 실체가 존재했냐는 것이 불확실하므로, 이 조직이 1985년 한민전으로 재편했다는 것도 당연히 불확실하다. 그렇다면 존재 여부도 불확실한 단체를 왜 다루는가? 첫째, 이 글에서는 이러한 ‘재편’을 북한의 대남노선의 변화를 함의한다고 해석하고, 이를 분석한다. 둘째, 당시 부상했던 NL운동이 실제로 그 영향을 받았다고 스스로 주장했다. 셋째, 한민전에 대한 분석은 1980년대 후반, NL~PD 논쟁을 이해하는 단초가 되기 때문이다. 아래 표는 1969년에 발표된 「통일혁명당 선언·강령」과 1985년에 발표된 「한국민족자주선언」을 비교한 것이다.
 

1) 경제강령 비교: 
남한의 ‘매판자본’ 또는 ‘독점자본’을 어떻게 볼 것인가? 


통혁당의 강령과 비교했을 때, 두 가지 특징적인 변화를 찾을 수 있다. 첫째, 한민전은 한국사회의 성격이 ‘식민지 반(半)봉건사회’에서 ‘식민지 반(半)자본주의사회’로 변화했다고 전제한다. 한국경제의 특징은 미국의 ‘원조’와 ‘차관’에 대한 의존, 미국 독점자본의 침투다. (하지만, 1985년 시점에서 볼 때, 한국이 라틴 아메리카처럼 외국자본의 ‘해외직접투자’가 지배적이라는 분석은 분명히 오류다. 한국에서는 해외직접투자가 억제되고, 재벌이 육성되었다.) 그에 따라 1970년대 말, 1980년대 초에 반(半)봉건사회에서 반(半)자본주의로 전환되었고, 국내 매판반동세력 중 지주계급의 지위는 하락하고 매판자본가의 비중이 높아졌다는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경제 강령을 보면, 1969년 통혁당의 강령은 “외국독점자본가와 매판자본가 소유의 공장, 광산, 은행, 산업기관을 몰수·국유화”하고, “외국자본의 유입을 막는다”고 명시했으나, 1985년 강령에는 오히려 “민족자본의 자립적 성장에 저해되지 않는 외국인들의 투자는 제한하지 않으며, 그 이권을 보호한다”고 말했다. ‘국내 매판자본’ 문제는 모호한데, “매판기업들을 제외한 모든 기업인과 중소상인의 사적 소유를 보호한다”는 언급은 있으나 그렇다고 ‘국내 매판기업’(즉 재벌)을 몰수·국유화한다는 직접적인 언급은 없다. 왜 그럴까? 

이는 북한의 경제현실을 반영하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1970년대 북한은 차관 도입을 통한 경제개발을 시도하다가 결국 이를 갚지 못해 모라토리엄을 선언해야 했다. 그에 이어 북한은 1984년 합영법을 제정한다. 서방 자본주의 국가를 포함한 모든 국가들로부터 자본과 기술을 유치하기 위해 합작회사의 경영활동을 보호하며 외국자본의 이익금 송금을 인정한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북한에서는 외국자본의 유치를 적극적으로 도모하면서, 남한에서 외국자본을 몰수한다거나 유입을 막는다는 정책은 심히 불균형한 것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한 발 더 나아가 생각해본다면, 북한은 당시 해외교포, 즉 재일교포의 북한투자를 유치하려 하고 있었다. (이는 1970년대 이후 화교자본의 중국진출과 유비할 수 있다.) 만약 남북관계가 크게 변화해서 남한의 ‘매판자본’이 북한에 투자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남한 ‘매판자본’의 대북투자는 적극 지지하면서, 남한 내에서 ‘매판자본’의 몰수·국유화를 추진한다는 것 역시 심히 모순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따라서 한민전 강령에서 남한 ‘매판자본’ 문제는 모호하게 처리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 아닌가. 

그런데 이러한 문제는 머지않아 현실의 문제가 되었다. 1989년 1~2월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북한의 조국평화통일위원장인 허담의 초청으로 한국 ‘경제인’ 최초로 북한을 방문했다.그는 금강산 관광사업을 공동 추진하는 방안, 철도 차량 및 선박을 합작 생산해서 소련에 수출하는 방안, 시베리아 석탄이나 암염을 공동 채취해서 중국에 수출하는 방안을 합의하고 돌아왔다. 그 후 1992년 1월에는 김우중 대우그룹 회장이 방북해, 개성시에서 서쪽 약 100km 거리인 황해도 해주에 경공업 단지 200만 평을 조성하기로 합의했다. (이는 850만 평인 개성공단의 24% 정도 되는 규모다.) 이는 심각한 쟁점을 야기하는데, 북한의 입장에서 외국자본이나 한국자본의 유치가 필요했다고 하더라도, 그런 이유로 한국 운동의 변혁노선이 바뀌어야 하는가? 이러한 입장은 곧 PD 진영의 ‘반제반독점’ 강령과 충돌될 수밖에 없었다.

예를 들어 노동계급 그룹이 제출한 「남한 노동자계급의 강령초안 및 해설」(1989년 5월)에서는 다음과 같은 강령이 제시되어 있었다.
 
나. 제국주의와 독점자본의 민중수탈 체제를 타파하고 민중의 통제에 기초한 경제를 건설한다.
△ 제국주의 자본과 독점자본 및 주요 기간산업을 국유화하여 국가경제계획의 토대로 삼는다.
△ 불평등한 경제협정, 외채 등 제국주의와의 불평등한 경제관계를 완전히 청산하고 제국주의의 경제적 침략을 봉쇄한다.
△ 중소자본가와 도시의 소생산자 및 농민에 대해서는 소유권과 생산 및 영업활동의 자유를 보장한다. 
 
또한 인천지역민주노동자연맹(인민노련)도 유사한 강령을 제시한다. (1989년 2월 20일 개정.)
 
△ 권력과 결탁하여 민중의 피땀을 가로채고 민족경제를 팔아먹어온 독점재벌은 해체되고 기간산업은 국유화되어야 한다. 
△ 직접투자 또는 차관의 형태로 들어와 우리 노동자와 민중을 착취·수탈해온 일체의 제국주의 자본은 몰수, 국유화되어야 한다. 
 

2) 통일강령 비교: 완전 연방제를 어떻게 볼 것인가? 


둘째, 통일혁명당 강령에서 통일방안은 남한에서의 인민민주주의 혁명 후 정치협상을 통해 평화선언을 선포한 후, 남북 총선거를 통한 통일 중앙정부 수립으로 제시된다. 또한 1969년 통혁당 강령에서는 ‘중립화’에 관한 언급은 없고, 제국주의·식민주의에 반대하는 ‘반제반미공동유대’가 제시될 뿐이다. 그러나 한민전 강령에서는 ‘중립화’와 ‘연방형식의 통일국가’가 제시된다. 즉 중립화와 연방제라는 단계가 등장한 것이다.

앞에서 언급했다시피, 1960년 시점에 제시된 연방제는 ‘과도적’ 연방제안이었다. 그리고 1960년대 통일혁명당 창당 시도에서 드러나듯이 ‘남조선혁명’을 완전히 포기한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연방제’라는 동일한 표현 속에서 그 내용이 실질적으로 변천되는데, 1980년 고려민주연방국 창설안에 이르면 그것은 ‘완전’ 연방제안으로 변화한다. 여기서 ‘완전’ 연방제라는 것은 통일국가 그 자체가 ‘연방제’를 원리로 삼는다는 것이다. 
 
해방 후 오늘까지 북과 남에는 오랜 기간 서로 다른 제도가 존재하여 왔으며, 거기에서는 서로 다른 사상이 지배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조건에서 민족적 단합을 이룩하고 조국통일을 실현하려면 어느 한쪽의 사상과 제도를 절대화하지 말아야 합니다. (…) 한 나라 안에서 서로 다른 사상을 가진 사람들이 같이 살 수 있으며 하나의 통일국가 안에 서로 다른 사회제도가 함께 존재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사상과 제도를 결코 남조선에 강요하지 않을 것이며 오직 민족의 단합과 조국통일을 위하여 모든 것을 복종시킬 것입니다.

우리 당은 북과 남이 서로 상대방에게 존재하는 사상과 제도를 그대로 인정하고 용납하는 기초 위에서 북과 남이 동등하게 참가하는 민족통일정부를 내오고 그 밑에서 북과 남이 같은 권한과 의무를 지니고 각각 지역자치를 실시하는 연방공화국을 창립하여 조국을 통일할 것을 주장합니다.

연방 형식의 통일국가에서는 북과 남의 같은 수의 대표들과 적당한 수의 해외동포 대표들로 민족최고연합회의를 구성하고 거기에서 연방상설위원회를 조직하고 (…) 연방국가의 전반적인 사업을 관할하는 것이 합리적일 것입니다.

고려민주연방공화국은 어떠한 정치군사적 동맹이나 블록에도 가담하지 않은 중립국가로 되어야 합니다.
 
즉 남한과 북한이 각각 자신의 사상과 제도를 유지한 채 연방공화국을 창설하자는 제의인데, 여기에는 두 가지 문제가 제기된다. 첫째, ‘완전’ 연방제안은 곧 남북합작 방식의 통일을 의미하는데, 이는 박정희 정부나 전두환 정부와 같은 ‘군사파쇼’ 정부도 파트너가 될 수 있다는 의미인가? 사실 「고려민주연방국창설안」에서는 이렇게 언급한다. “우리는 남조선에서 미제와 그 앞잡이들의 식민지파쇼통치를 청산하고 조국을 통일함으로써 (…) 우리 민족의 밝은 앞길을 열어 나가야 합니다.” 즉 전두환 정부는 완전 연방제의 파트너가 될 수 없는 것처럼 말한다. 그렇지만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1984~85년에는 남북접촉·회담이 활발하게 진행된다. 그렇다면 ‘군사파쇼’는 연방제 통일의 파트너는 될 수 없지만, 접촉·교류의 파트너는 될 수 있는 것인가? 그렇다면 노태우 정부는 어떠한가? 민정당 후보로 나섰던 노태우 대통령을 수장으로 하는 정부는 파트너가 될 수 있는가? 이는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통일을 중시하는 입장’과 ‘민주화에 무게를 두는 입장’ 간의 차이일 수도 있고, 북한의 대남정책을 지지하는 입장과 남한의 독자 변혁노선을 제시하는 입장 간의 차이를 의미할 수도 있다. 

둘째, ‘완전’ 연방제의 경우 남한의 경제구조는 어떻게 되는 것인가? 남한 체제의 모순이 지양되는 사회인가? 고려민주연방제안은 연방국가의 경제 문제에 관해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북과 남 사이의 경제적 합작과 교류는 북과 남의 서로 다른 경제제도와 기업체들의 다양한 경제활동을 인정하는 기초 위에서 실시되어야 합니다. 연방정부는 북과 남에 있는 국가소유와 협동단체소유, 사적 소유와 개인소유를 다같이 인정하고 보호하여야 하며, 자본가들의 소유와 기업활동에 대해서도 독점과 매판행위를 추구하지 않고 민족경제의 발전에 이바지하는 한에서 그것을 제한하거나 침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즉, 위에서 언급한 통혁당과 한민전의 경제강령 상의 문제가 이미 1980년의 「고려민주연방국창설안」에서 예고되고 있는 셈이다. 
 

3) 한민전과 남한 운동의 독자성이라는 쟁점


셋째, 한민전의 강령과 직접 관련되는 것은 아니지만 한 가지 더 지적할 바가 있다. 한민전은 1987년 대선국면에서 ‘야권후보 단일화’를 지지한 것으로 알려졌다. 즉 한민전은 △정권과 민정당 후보의 퇴진을 위한 투쟁과 거국중립내각 수립을 위한 공동투쟁, △공동투쟁을 기초로 한 민주세력들과의 단합과 이를 위한 야권단일화, △미국의 정치개입 분쇄를 투쟁방침으로 제시했다. 1987년 당시, 백기완 후보를 중심으로 민중후보운동을 펼친 그룹 또한 민중후보가 후보단일화를 위한 유력한 방안이라 인식했고, 실제 후보단일화를 위한 정치협상을 촉구했다. (물론 민중후보운동 내에서 사퇴하지 않는 독자완주를 주장한 흐름도 있었다.) 그런 점에서 1987년 시점에서는 한민전의 입장이 ‘민중운동의 독자성’이나 ‘보수야당과의 차별성’을 강조하는 입장과 완전히 대별된다고 단정하기는 어려울 수도 있다.

하지만, 본질적인 문제는 1987년 대선뿐만 아니라 그 후로도 한민전은 한국운동의 구체적인 방침 문제에 지속적으로 ‘개입’하고자 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개입은 과연 한국운동이 처한 구체적 현실과 조건에 부합한 것인가, 아니면 북한의 대외정책에 남한 운동을 종속시키는 것인가? 이는 마치 코민테른(제3인터내셔널)이 각국 노동자운동의 발전에 기여한 것인지, 아니면 각국 노동자운동을 소련 외교정책의 도구화하려고 한 것인지를 둘러싼 쟁점과 유비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쟁점은 글의 앞에서 소개한 ‘자생적 사회주의’(박채호)와 ‘민주기지론’(나도경)의 쟁점이 다시 부활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이 역시 1980년대 NL· PD 논쟁의 한 축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다음 호에 계속> 
주제어
정치 평화 이론
태그
통일정책, 통일운동, 교차승인론, 남북공동성명,혁명론, 통일론, 7.4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