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광주전남지부


2019 가을.16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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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대임금, 혁신의 열쇠가 될 수 있을까

노동조합 임금투쟁의 의의와 한계, 그리고 임금 격차

김태훈 | 사회진보연대 정책교육실장

1. 들어가며

 

이른바 ‘민주노총 위기론’은, 민주노총의 역사만큼 오래되었다. 민주노총은 1995년 출범 당시부터 출범 그 자체가 민주노조운동의 위기를 상징한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이후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다. 96~97년 총파업, IMF 위기, 민주노동당 창당과 분당, 산별노조 건설과 위기, 2008년 세계금융위기 등 주·객관적 정세의 변곡점에서 민주노총은 항상 ‘위기론’의 대상이었다.

 

박근혜 퇴진 촛불 투쟁 이후 100만 조합원 시대가 열린 지금은 어떤가. 반보수 투쟁을 통해 문재인 정부를 간접적으로 지지하면서, 문재인 정부의 개혁을 추동하려던 민주노총의 꿈은 일장의 춘몽으로 돌아갔다. 이미 2018년부터 소득주도성장론의 파산이 분명해졌고, 2018년 말 문재인 정부가 정책 방향의 선회를 공식화했음에도 민주노총의 정세 인식은 혼란스러웠다.

 

2019년의 절반이 지난 지금, 예상대로, 아니 예상보다 더 심각하게 경제성장의 둔화가 나타나고 있다. 노동존중 공약은 변질, 후퇴하였고 민주노총 간부들이 구속되기도 했다. 민주노총은 다시 노동법 개악 저지를 위한 “총파업·총력투쟁”에 나서고 있지만, 지도부는 혼란스럽고, 현장의 사기는 올라오지 않고 있다. 민주노총 지도부는 “촛불을 배신”했다거나, “적폐와 한패”였다는 식으로 문재인 정부를 비판하지만, 정작 문재인 정부의 개혁 방향과 제대로 분별 정립하지 못한 자신의 한계를 평가하고 있지는 않다. 물론 이것은 민주노총 지도부만의 책임은 아니고, 노동자 운동 전체의 역량 상태를 반영하는 것이다.

 

어디서부터 출발해야 할까. 문재인 정부에 대한 비판과 투쟁만으로는 부족하다. 문재인 정부의 소득주도성장, 노동 존중 공약을 이행하라는 요구에 머물 것이기 때문이다. 현재 노동조합의 상태가 신자유주의가 만든 모순의 결과이고, 불평등과 빈곤의 심화를 해결하기 위한 운동을 여전히 만들지 못했다는 반성이 필요하다.

 

민주노총이 정세에 유효한 세력으로서 주도권을 획득하려면, 누구나 말하지만 누구도 해결하고 있지 못하는 임금 격차 문제에 대응하는 것이 관건하다. 임금 격차 문제는 민주노총을 비판하는 핵심적인 약점이기도 하다. 자본은 현대자동차와 같은 재벌이나 공기업 노조의 파업이 있으면 “귀족노조의 밥그릇 지키기”라는 낙인을 씌운다. 정부 또한 노사정 대화를 압박하면서, 조직노동자가 미조직·비정규 노동자를 대표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지속해서 지적한다.

 

민주노총도 이러한 비판에 대응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면, 5월 29일에 민주노총은 ‹불평등, 격차해소 임투 산별교섭 사례 발표 및 기자간담회›를 개최했다. 그러나 5개 산별의 사례를 열거하는 것에 불과했고, “최고수준의 모범사례라는 측면보다는 여전히 많은 한계”를 안고 있다고 스스로 인정하고 있다. 협약의 결과가 실질적으로는 미미한 수준에 머물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산별 수준의 여러 노력에 비해, 총연맹 차원의 비전이 잘 부각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늘 제시하는 대정부 요구만 열거해서는 정부와 자본의 공세에 대한 의무방어 수준의 목적만 달성할 뿐이다.

 

신자유주의 탓이라는 비판에 머무르면 안 된다. 민주노총이 문재인과 다른 길을 걷기 위해서는 문재인이 하지 못하거나, 문재인이 은폐하고 있는 자본주의 모순을 비판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정세에 유효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사회적 영향력을 획득해야 한다. 당장 현실 가능하지 않더라도 격차해소를 위한 고민과 담대한 기획을 보여주어야 한다.

 

이 글은 마르크스의 임금이론의 관점에서 노동조합의 임금투쟁이 가지는 의의와 한계를 살펴보며, 임금 격차를 자본주의의 구조적 위기와 역사적으로 형성되어 온 노동조합 전략의 한계로 분석한다.

 

이 글은 또한 지난 《계간 사회진보연대》 여름호에 실린 박준형과 한지원의 노동자 운동에 대한 평가와 비판을 이론적으로 보충하는 것이기도 하다. 민주노총의 지난 10년 운동에 대한 평가와 최저임금 인상 투쟁에 대한 평가는 두 글을 참조하라.

 

 

2. 마르크스의 임금이론과 노동조합의 임금투쟁

 

임금: 노동력 가치의 화폐 형태

 

『자본』 1권(1867년)은 마르크스의 저작을 통틀어 임금이론을 가장 포괄적이고 명확하게 전개하고 있다. 1권에서 그는 절대적 잉여가치와 상대적 잉여가치의 결합을 설명하기 위해 시간급·성과급 같은 임금지급 방식과 노동자 간 경쟁을 분석한다. 그러나 3권에 쓸 예정이었던 노조의 경제적 역할에 대한 설명은 완결되지 못했다.

 

마르크스는 임금을 노동력 상품의 가격, 즉 노동력 가치의 화폐 형태로 정의한다. 이를 항등식으로 표현하면 W≡,mV(W: 임금, V: 노동력 가치, m: 노동의 화폐적 표현)이다. 노동력이라는 상품의 가치도 다른 상품들과 마찬가지로 그것의 생산(재생산)에 필요한 가치로 결정된다.

 

그런데 노동력의 생산 및 재생산에는 다른 상품들과 달리 ‘역사적·도덕적 요소’가 포함된다. 사실 역사적·도덕적 요소는 고전파에서 유래하는데, 고전파는 역사적 제도가 생계수단의 양을 결정한다고 주장한다(생계비설). 그러나 현실에서 역사적 제도는 생계수단의 양이 아니라 화폐로 주어지는 임금을 결정한다. 또한 노동력의 사용가치를 소비하는 조건, 즉 노동조건도 역사적 제도를 통해 결정된다. 이렇게 임금과 노동조건을 결정하는 역사적 제도의 핵심이 바로 노동조합이다.

 

생산과정을 통해 새롭게 생산된 가치의 일부분만이 노동자에게 임금으로 지불된다. 새롭게 생산된 가치에서 노동력 가치를 공제한 나머지, 부불노동의 가치가 바로 잉여가치다. 이것을 가격으로 전형하면 국민소득에서 임금을 공제한 나머지가 바로 이윤이다. 자본주의적 생산 관계 아래 자본가가 임금노동자에 의해 창출된 잉여가치를 영유하는 착취의 메커니즘이다. 자본주의 생산양식에 대한 마르크스의 분석에는 착취, 따라서 계급투쟁이라는 문제설정이 핵심이다.

 

잉여가치 생산과 궁핍화

 

마르크스는 『자본』 1권, 3~5편에서 가치증식과정에 대한 논리적 서술로서 절대적·상대적 잉여가치의 생산을 분석한다. 절대적 잉여가치의 생산은 노동시간 연장이나 고용을 늘려 이윤을 증가시키는 것이다. 예로 시간당 10대의 자동차를 생산하는 공장에서 8시간 근무에 2시간 잔업·특근을 더하거나, 8시간 근무하는 작업조를 8시간+8시간 2교대 작업조로 바꾸는 것이다. 이럴 경우 시간당 생산된 가치가 임금과 이윤으로 분배되는 비율은 변하지 않는다. 하지만 생산량이 증가해 이윤의 절대적 양이 증가한다. 상대적 잉여가치 생산은 기계를 도입해 노동시간이나 고용의 증가 없이 이윤을 증가시키는 것이다. 앞과 같은 자동차 공장 예를 들어보면, 조립라인에 로봇을 도입한 후 컨베이어 속도를 높여 시간당 생산을 10대에서 20대로 늘리는 것이다. 이럴 경우 시간당 임금은 증가하지 않지만, 시간당 이윤은 두 배로 증가한다. 시간당 생산되는 가치의 임금과 이윤으로의 분배율 자체가 변한다.

 

산업혁명 이후 잉여가치를 늘리는 기본적 방법은 상대적 잉여가치를 증가시키는 것이었다. 끊임없는 노동생산성 상승(또는 노동강도 강화)은 산업화 된 경제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다. 하지만 이런 상대적 잉여가치의 생산에는 치명적 결함도 있는데, 바로 자본이 투자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앞의 자동차공장 예로 보면 로봇이 그렇다. 로봇 도입 비용보다 노동생산성(시간당 생산량)이 더 증가하면 상관없는데, 그렇지 않은 경우 문제가 된다. 결과적으로 투자 자본 대비 이윤, 즉 이윤율이 감소할 수 있다.

 

자본가는 이런 이유로 절대적 잉여가치의 생산과 상대적 잉여가치의 생산을 항상 결합한다. 상대적 잉여가치의 생산은 끊임없이 투자와 기술혁신의 곤란이라는 한계에 부딪히기 때문이다. 자본가는 자동차 공장에 로봇을 도입하는 투자만 하는 것이 아니라, 잔업·특근을 늘리거나 2교대조(16시간 작업)를 3교대조(24시간 작업)로 바꾸는 식의 절대적 작업시간을 확대하거나, 공장 증설 같은 양적 확대를 도모한다.

 

상대적 잉여가치 생산만으로 경제성장은 불가능하다. 역사적으로는 경제성장이 되면서 임금과 이윤이 동시에 증가했다. 기계제 대공업에서 자본에 의한 노동의 실질적 포섭이 실현되면서 상대적 잉여가치 생산의 우위 하에 절대적 잉여가치 생산이 통일된 것이다. 또한 임금과 이윤이 비례적으로 증가했다. 즉 임금분배율이 단기적으로 증감하지만, 장기적 추세는 거의 일정하다는 것이 역사적으로 ‘정형화된 사실’이다. 한편 기계제 대공업은 공장에서의 기술적 분업을 통해 집단노동자가 형성되는 동시에, 그 내부에서 육체노동자와 지식노동자가 분할되는 것도 노동자의 분할과 임금 격차를 이해하는 데 필요하다.

 

잉여가치 생산에 노동자를 포섭하는 방법이 바로 시간급과 성과급이다. 시간급 체제에서 노동자는 노동시간의 연장에 자발적으로 동참해 임금 총량을 늘리려 한다. 성과급 체제에서 노동자는 스스로 노동강도를 높여 생산성 향상의 일부분에 대해 보상을 받으려 한다. 그런데 시간급을 늘리는 과정에서는 취업자와 실업자가 경쟁하게 되고, 성과급을 늘리는 과정에서는 취업자 간의 경쟁이 격화된다. 자동차 공장에서 고용(교대조)을 추가할 것인지, 잔업·특근을 늘릴 것인지를 두고 벌이는 갈등, 작업 속도를 두고 발생하는 동료 작업자 간의 갈등은 이런 경쟁이 무엇인지 잘 보여준다. 그리고 이런 경쟁은 결국 노동자를 저임금-장시간-고강도 노동이라는 악순환으로 이끈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이러한 악순환에 노동조합의 투쟁이 반작용한다.

 

궁핍화("increasing misery")는 빈곤화와 다른 의미이다. 절대적 빈곤은 생활 수준(‘실질임금’)의 하락이고, 상대적 빈곤은 임금분배율(상대적 임금)의 하락이다. 그런데 자본주의적 생산력의 발달은 절대적 생활 수준을 높였으며, 노동조합의 효과로 인해 임금분배율은 역사적으로 일정한 수준에 머물렀다. 물론 19세기 중반의 마르크스 저작들은 상대적 빈곤에 대한 강조가 있었다. 그래서 이후의 노동자 운동은 자본주의의 경향이 노동자를 최저 생계 수준으로 끌어내리는 것이라 이해하기도 했다. 그러나 엥겔스는 1891년 궁핍화를 극단적으로 단순화한 독일사민당의 강령(“프롤레타리아의 수와 궁핍이 지속적으로 증가한다”)에 명백히 반대했다. “노동자의 조직화와 그들의 지속적 저항은 궁핍화를 어느 정도 저지할 수 있다. 실제로 증가하는 것은 존재의 불안전이다. 이것이 중요하다.” 노동자들이 대면하는 가장 큰 재앙은 임금하락이 아니라 임금을 전혀 받지 못하게 될 위협이다. 궁핍화는 빈곤화가 아니라 불안전화(insecurity)로 봐야 한다.

 

자본축적의 보편적 법칙과 역사적 경향

 

화폐라는 특수한 상품의 분석에서 가치법칙이 도출되고, 노동력이라는 특수한 상품의 분석에서 잉여가치 법칙이 도출되듯이, 잉여가치 생산방법의 분석을 통해 자본의 유기적 구성이 상승하고 이윤율이 하락한다는 법칙이 도출된다. 또한 이윤율은 고정자본의 축적, 즉 자본성장률을 결정한다. 이윤율이 계속 하락하면, 자본성장률이 낮아지면서, 이윤도 감소하는 시점이 도래한다(절대적 과잉축적). 여기서 이윤분배율(1-임금분배율과 같다)은 변수가 아니라 일정한 상수, 즉 일정하다고 전제한다. 이것은 임금분배율을 높여서 이윤을 압박하는 노동조합의 경제투쟁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경제투쟁의 구조적 설명에 포함한 것이다. 노동조합의 경제투쟁에 의한 노동소득분배율 상승(이윤압박)은 이윤율에 영향을 준다. 그러나 그것은 경기 순환적 측면이 있다. 자본은 산업예비군을 통해 반작용하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적 축적의 보편적 법칙(자본축적론)으로부터 자본주의의 역사적 경향을 도출할 수 있다. 이윤율이 하락하는 불황기에서는 잉여가치의 생산이 아니라 잉여가치의 분배를 둘러싸고 자본간 경쟁이 심화된다. 자본은 이윤율의 하락을 고정자본의 증가(집중)를 통해 상쇄하며 이윤 증대를 시도한다(금융화). 자본의 인수·합병은 소유권의 이전을 통한 잉여가치 영유를 목표로 한다.

 

마르크스는 실업자의 형태를 구별한다. 유동적 실업자는 경기순환에 따라 발생하고 소멸한다. 취업자와 경쟁하는 실업자다. 예를 들면 정리해고된 정규직 노동자가 유동적 실업자다. 그런데 불황기 구조적 위기로 인해 구조조정과 정리해고는 상시적이게 되고, 유동적·순환적 실업자는 구조적 실업자로 전락한다. 구조적 실업자에는 농민·자영업자, 비정규직 노동자, 빈민이 있다. 순환적 실업자를 포함하는 집단노동자는 자본에 의해 포섭되는 반면, 구조적 실업자는 자본에 배제된다. 따라서 불황기에는 자본에 배제되는 구조적 실업자가 확대된다. 궁핍화는 불안전화(실업 위협)라는 의미뿐만 아니라 산업예비군의 증가라는 의미가 추가된다. 물론 이것 또한 빈곤만 아니라 노동자 내의 분할로 인한 “무지, 야만, 타락의 축적”이다. 각자도생하려는 악무한의 경쟁 속에서 보편적 가치를 추구하는 것을 포기하고, 공동체적 윤리를 파괴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고전파와 마르크스의 차이

 

임금이론이란 노동력의 가격인 임금이 다른 경제적인 양적 지표들과 어떤 관련이 있는 지 경제모형(모델)을 통해 설명하는 것이다. 스미스, 리카도 등 고전파 경제학자들은 외생적으로 주어진 실질임금에서 노동수요에 대응해 노동 공급이 팽창하거나 수축하는 것으로 보았다. 리카도는 실질임금이 생존 수준 이상으로 오르면 인구가 상승하고, 노동 공급이 증가하게 되고, 공급의 증가는 다시 실질임금이 생존 수준 이하로 떨어지게 만들어 인구가 하락한다고 보았다. 균형 생존 수준(실질임금)에서 균형인구가 형성된다고 설명한다. 이 이론의 근거는 맬서스의 인구법칙이다. 사망률과 출산율이 일치하는 실질임금 수준은 생존 수준으로 간주 할 수 있다.

 

마르크스는 맬서스의 인구법칙이 특정한 사회관계의 산물이라고 비판한다. 역사는 이것을 증명했다. 오늘날 임금이 상승하면 인구가 자동적으로 증가한다고 생각할만한 근거는 없다. 맬서스의 설명은 급속한 도시화와 생활 수준 하락이 나타났던 산업혁명 초기의 특징일 뿐이다. 1850~1960년대 이후 영국에서는 상품을 판매할 세계시장이 형성되고 생활 수준이 회복되면서 출산율과 인구성장률이 하락한다. 이후 다른 나라들에서도 경제성장과 함께 저출산 현상이 나타난다. 맬서스는 이러한 인구학적 변천을 설명하지 못한다.

 

마르크스는 또한 노동 공급이 인구에 비례한다는 가정도 반박한다. 노동 공급은 산업예비군의 변화로 상쇄되기 때문에, 인구에 비례해 변화하지 않는다. 맬서스의 절대 인구가 아니라 상대적 과잉인구가 중요하다. 하지만 마르크스는 일정한 임금수준(관습 임금)이 주어진다는 것은 동의했다. 그 이유는 실질임금이 상승하면 산업예비군으로부터 노동 공급을 증가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가사노동, 자급농업으로부터 산업 고용으로 이주하는 데 연관된 실질 투자 비용이 노동력 가치를 설정하고, 이것이 실질임금 수준을 결정하는 요소로 본 것이다. 이때 노동력 가치는 생물학적 최소라는 의미에서 생존 실질임금이 아니고, 상이한 경제에서 노동력을 재생산하는 비용에 영향을 주는 사회적이고 역사적인 요소를 반영하는 것이다.

 

임금철칙·임금기금설 비판

 

맬서스의 인구법칙(임금을 생계비 수준으로 붙잡는 경향)에 기반한 리카도의 임금이론은 생계비설이라 부를 수 있다. 생계비설에서 임금이 오르려면 성장은 유지하면서 인구 증가율은 억제해야 한다. 이러한 견해는 19세기 당시 사회주의에도 임금철칙설로 침투했다. 마르크스가 『가치, 가격, 이윤』에서 비판한 영국의 노조주의자 웨스턴뿐만 아니라, 프랑스 프루동과 독일의 라살 등도 이러한 임금철칙을 수용해서 노동조합의 임금투쟁은 효과가 없다고 주장했다.

 

임금철칙은 J.S. 밀의 임금기금설로 이어진다. 자본만이 노동자들에 대한 ‘임금의 선대(advance)'를 구성한다. 즉, 생산물을 완성해서 판매하기 전에 노동력을 구매하기 위해 사용되는 총액이 기존 자본의 재고량으로부터 정해진다. 단 하나의 생계비는 아니지만 자본과 인구의 비율에 따라 결정되는 가변적인 ’자연임금률‘이 존재한다. 그러나 이 이론도 노동자 가운데 일부가 임금인상을 쟁취하면 다른 노동자들에게 사용할 임금기금을 줄임으로써 다른 노동자들의 임금이 하락하거나 실업 상태가 되도록 만들 것이라 주장했다.

 

마르크스는 이러한 임금철칙, 임금기금설을 비판한다. 임금인상 투쟁이 생산, 생산성, 노동력의 가치, 화폐 가치의 변화 등 이전에 일어난 변화의 뒤를 좇아가는 것일 뿐이라는 점을 밝혀냈다. 실제로 노동자-자본가 간의 임금투쟁이라는 일종의 ‘관습’ 또는 노동조합이라고 하는 계급투쟁의 역사적 제도는 임금 결정에 큰 영향을 미친다. 앞서 보았듯이 노조의 경제투쟁으로 인해 임금률은 노동력 가치와 상응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서 노동생산성의 상승을 보상할 것을 요구하는 노조의 경제투쟁에 따라 노동생산성과 임금률이 비례적으로 상승하는 셈이다. 이러한 임금을 생산성 임금이라고 하는데 이는 집단노동자의 평균 생산성을 기준으로 하는 것으로, 신고전파가 개별 임금의 효용을 설명하는 한계생산성과 다르다.

 

노동조합이 없다면 임금은 노동력의 가치로부터 지체되고 괴리될 것이다. 노동조합의 의의는 여기에 있다. 동시에 경제투쟁의 최선의 결과는 현상 유지일 따름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마르크스는, 경제투쟁은 임금제도라는 원인이 아니라 그 결과에 대한 투쟁이기 때문에 노조가 자신의 조직된 힘을 노동자계급의 최종적 해방, 즉 임금제도의 궁극적 폐지를 위한 지렛대로 이용하지 않는다면 총체적으로 실패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여기서 ‘총체적 실패’는 단지 정치투쟁을 방기한 노동조합을 비판하는 수사는 아니다. 앞서 살펴보았듯 궁핍화, 즉 노동자 간 경쟁과 산업예비군의 증가라는 경향은 자본주의의 역사적 경향이다. 자본주의는 산업혁명처럼 스스로 반작용을 통해 축적체계를 재조직할 수도 있으나,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이윤율 하락으로 인해 종국적으로 경제성장도 한계에 달한다. 노동조합이 자본주의를 변혁하지 않는다면, 노동자는 다시 자본의 착취 굴레 속으로 들어가거나, 아니면 자본주의와 함께 공멸하는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노동자들의 투쟁의 진정한 결과는 [임금률의 인상이라는] 직접적 성과가 아니라 점차 확대되는 그들의 단결이다”라는 『공산주의자 선언』의 문구를 상기할 수 있다.

 

임금투쟁의 의의와 한계를 둘러싼 쟁점: 생활임금론 비판

 

마지막으로 민주노총의 오랜 구호인 ‘생활임금’을 비판적으로 성찰해 볼 필요가 있다. 노동조합은 임단협 투쟁 시기 ‘생활임금 쟁취’를 임금 인상을 요구하는 명분으로 채택한다. 여러 논자의 생활임금론을 정식화해보면 다음과 같다. 임금에 객관적 기준은 없으며, 노동권의 관점에서 임금 결정 기준은 노동자의 생활이다. 자본가는 경제학적으로 계산된 비용을 중심으로 판단하지만, 노동자는 수요-공급이라는 시장 논리에 종속될 필요가 없다. 따라서 노동자는 노동력 재생산을 위한 사회적 필요 부분을 재정의하고 확대함으로써 자본이 가져가는 부불노동의 몫을 가능한 한 줄일 수 있고, 줄여야 한다.

 

‘생활임금’을 노동조합 임금투쟁의 사기를 고취하기 위한 수사로 사용하는 것은 몰라도, 그것을 실제 임금이론으로 이해하는 것은 현실에 대한 객관적 인식을 거부하는 것이다. 또한 생활임금론을 노동조합이 상대적 임금(노동소득분배율)을 무제한 상승시킬 수 있고, 그것이 임금투쟁의 목적이라고 오해한다면, 앞서 독일사민당에 대한 엥겔스의 비판을 상기해보는 것으로 비판은 충분하다.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주창한 과학적 사회주의는 경제학 비판, 즉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이라는 과학에 근거하고 있다.

 

생활임금론을 개별 기업 차원에서 노동조합의 임금 극대화를 용인하는 근거로만 사용한다면, 노동조합은 경제투쟁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경제투쟁 자체가 마치 혁명적 의의가 있는 것처럼 스스로 착각하거나 타인을 기만하게 되기 때문이다. 또한 생활임금은 핵가족을 전제로 한 가족임금이라는 점에서 페미니즘적 비판도 가능하다.

 

 

3. 불평등에 관한 이론들과 마르크스적 비판

 

지금까지 마르크스 경제학의 관점에서 임금이 어떻게 결정되는지, 그리고 원칙적 관점과 정세적 관점에서 임금투쟁의 의의와 한계가 무엇인지 확인해보았다. 사회진보연대가 법정 최저임금의 급격한 인상은 자본의 반격으로 인해 한계적이었다고 주장하니, 이것을 일각에서는 임금기금설, 임금투쟁 무용론으로 해석하기도 했다. 임금 극대화 전략이 정세적으로 유효한 것인지 판단이 다르기 때문으로 보인다.

 

앞에서 살펴보았듯, 노동조합(의 경제투쟁)은 의의와 한계를 동시에 갖고 있다. 불황기 이윤율 하락이 지속하면서 이윤이 줄면 임금도 하방 압력을 받는다. 그렇지 않으면 자본은 고정자본 스톡 성장률이 둔화되고, 더 나아가 고정자본 스톡의 축적이 중단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본은 반작용하게 되고, 임금투쟁은 더욱더 힘겨워진다. 자본의 저항은 더 심하고, 투쟁의 성과는 줄어든다. 금융 세계화를 통해 자본은 국경을 넘어 자유로이 이동하고, 각국의 노동자들은 아래로 향한 경쟁에 내몰린다. 노동조합의 조직력이 약화되어온 지난 40~50년이 바로 그러한 불황기의 노동자 운동의 특징을 보여준다.

 

불황기일수록 절대적인 실질임금 증가가 어려우므로, 상대적 임금을 증가시키는 임금투쟁이 더 중요해진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앞서 살펴보았듯, 자본주의적 축적의 역사적 경향은 상대적 빈곤화가 아니라 노동의 ‘불안전화’와 산업예비군의 증가다. 불황기에 임금투쟁이 더욱더 한계적이라는 의미는 논리적으로는 임금률의 상승에 객관적인 한계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특히 앞서 한국의 임금 격차 현실을 살펴본 것처럼, 개별 기업 노조에서 임금 극대화 전략이 거시적 관점에서 노동소득분배율을 높일 것이라는 보증도 없다. 오히려 한국의 재벌체제는 비용을 하청에 전가하고, 원-하청 간 생산성 격차를 통해 임금 격차를 심화시킬 수 있다.

 

경제투쟁의 한계에 대한 논의는 노동조합 무용론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만큼 노동조합의 정치·사회운동의 의미가 중요하다는 결론으로 이어지게 된다. 사회변화의 주체로 노동자 운동이 나서려면 계급 내부의 치명적 불평등과 이로 인한 상호 갈등을 스스로 해결할 수 있어야 한다. 계급적 단결은 조직노동자의 양적 확대 문제가 아니라 노동자 운동의 지적, 도덕적 지도력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소득 불평등에 대한 부르주아적 설명과 이에 대한 마르크스적 비판을 검토해보자.

 

불평등은 순환한다?

 

1980년대 이후 서구 선진국의 불평등 증가는 주류 경제학의 ‘쿠즈네츠 가설’에 의문을 제기했다. 쿠즈네츠는 미국 국민소득 통계를 1869년까지 거슬러 올라가 집계하고, 국세청 자료를 바탕으로 소득분포에 관한 자료까지 구축했다. 이런 통계를 바탕으로 쿠즈네츠는 전미경제학회 회장 연설과 1955년 「경제성장과 소득불평등」이란 논문을 통해 역 U자 가설을 제시했다. 역 U자 가설이란, 경제발전 초기에는 불평등이 심화되지만 산업화 과정에서 생산성이 향상하면서 혜택이 확산되어 불평등이 점차 줄어든다는 것이다.

 

그러나 20세기 후반 선진국에서는 정반대의 현상이 나타났고, 피케티는 분석의 시계열을 앞뒤로 더욱 확장해 정반대의 주장을 한다. 20세기에 불평등이 개선된 것은 일시적이고, 그 이전인 18,19세기에는 불평등이 증가했고, 20세기 후반에도 다시 불평등이 증가하고 있다는 것이다. 경제성장은 일반적으로 불평등을 개선하는 것이 아니라 증가시키고, 불평등의 감소는 특수하고 드문 사건이라는 것이다.

 

밀라노비치는 분석범위를 시공간적으로 더욱 확장하여 이른바 ‘쿠즈네츠 순환(파동)’을 주장한다. 다시 불평등이 증가하는 것은 1차 쿠즈네츠 순환이 끝나고 새로운 기술변화와 세계화로 인해 2차 파동이 진행되기 때문인데, 다시 불평등이 감소하는 순환이 나타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또한 일국 내 불평등이 아닌 글로벌 불평등에 주목한다. 전 세계를 하나의 국가처럼 간주해, 전 세계 소득분포를 측정해 보는 것이다. 이 경우 1988년부터 글로벌 불평등이 증가를 멈추고 소폭 등락하며 일정한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이것은 산업혁명 이후 처음인데, 서구의 성장 둔화와 중국과 인도의 성장에 기인한다. 세계화 과정에서, 선진국 일국 차원에서는 소득 격차가 커졌으나, 후진국의 추격으로 세계적 차원의 불평등은 오히려 완화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피케티는 주류 신고전파 경제성장론에 근거해 21세기 후반 이러한 추격 성장이 끝나면 불평등이 더욱 심해질 것으로 예상하는 반면, 밀라노비치는 불평등을 완화하는 요인이 작용할 경우 2차 쿠츠네츠 순환, 즉 다시 불평등이 감소할 가능성도 열어둔다.

 

글로벌 불평등에 대한 통계는 미국과 유럽 노동자들 사이에서 세계화에 대한 불만과 극우·포퓰리즘에 대한 지지가 증가하는 배경을 추측할 수 있게 한다. 그러나 두 번째 쿠즈네츠 순환, 즉 불평등의 감소가 가능하다는 주장은 아무런 이론적 근거가 없다. 밀라노비치가 제시하는 불평등 감소요인들은 20세기 전반의 특징들이다. 밀라노비치는 불평등을 완화하는 악성 요인과 양성요인을 구분하는데, 성장이 되지 않는 경우 불평등 완화는 전쟁, 내전, 전염병과 같은 악성요인에 의해, 경제가 성장할 때는 정치를 통한 압력(사회주의, 노조), 교육의 확산, 사회적 보호, 기술변화 등 양성요인에 의해 불평등이 완화될 수 있다고 설명한다. 이러한 요인은 20세기 성장기 복지국가나 냉전이라는 특수한 역사적 사례에 대한 묘사일 뿐이다. 향후 어떤 요인이 어떻게 반복해서 나타날 것인지 전혀 이론적 설명을 하지 못한다. 게다가 피케티도 수용하고 있는 신고전파 경제성장론에 따르면 총요소생산성 증가 없이는 장기저성장 상태를 지속할 텐데, 이 경우 (밀라노비치에 따르면) 불평등은 전쟁, 전염병으로만 완화될 수 있다. 이를 도덕적으로 긍정할 수도 없다. 서로 다른 시기의 불평등의 증감은 각각 상이한 역사적 조건과 원인을 가지고 있는데 장기파동론은 이를 관측에만 의존해서 이론적 근거 없이 일반화하고 있다.

 

고학력자를 선호하는 기술진보 때문인가?

 

그렇다면 주류경제학은 1980년대 신자유주의 시기의 불평등 증가를 어떻게 설명할까. 주류 경제학에서 임금은 노동의 한계 생산성에서 균형가격이 형성되며, 수요-공급에 의해 가격이 변화한다. 따라서 노동이라는 상품이 이질적이고, 고학력자와 저학력자 간에 대체가 완전하지 않다고 가정한 뒤, 교육, 기술변화와 같은 노동 공급과 수요의 변화가 두 집단 간 상대적 임금에 미치는 영향을 설명한다.

 

임금 격차에 대한 가장 주류적인 설명은 노동수요 측면에서 기술변화다. 자동화, 컴퓨터화, IT기술의 발달은 전문기술직에 대한 수요를 늘리고, 이로 인해 필요 없어지는 직업의 수요를 줄이는 경향이 있다는 가설이다. 이를 정식화한 것이 Skill-biased technological change, 줄여서 SBTC론이다. 한국에서는 숙련 편향적 기술진보 혹은 고숙련 보완적 기술변화로 번역된다.

 

SBTC론에 따르면 기업이 생산과정에 도입하는 기술(technology)과 투입 노동력의 숙련도(skill)가 상호보완적이다. 따라서 기술 변화는 숙련된 노동자를 더 많이 필요로 하고(보완), 미숙련 노동자의 일을 줄인다(대체). 이것은 20세기적 현상이다. 19세기의 경우, 산업화는 봉건제 시대의 장인, 직공과 같은 숙련노동자에게 불리했다. 러다이트 운동이 이러한 배경에서 나타났다. 20세기 2차 산업혁명을 대표하는 자동차 산업도 초기에는 비슷한 특징을 띄었으나, 자동화가 심화되면서 오히려 대학을 졸업한 지식 노동자의 수요가 높아지고, 미숙련 노동자를 수요는 낮아졌다. 미국에서 지난 60년간 고학력 노동자들의 공급이 많이 증가했는데도 불구하고 숙련 프리미엄, 즉 교육투자 수익률(returns to education)은 증가했다.

 

특히 1970년대 이후 미국에서 이러한 현상이 더 심화되었다. 1970년대에 대졸자 공급이 높아졌는데, 이러한 공급 증가가 가격하락으로 이어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1980년대 들어 대졸자 임금 프리미엄이 가파르게 상승한 것이다. 아세모글루는 이에 대해 숙련 노동자 공급이 증가해서 숙련 편향 기술이 증가했다고 설명한다. 즉 숙련 노동자의 증가가 숙련 편향적 기술의 수요를 높이고, 가격을 높여서, 숙련 편향적 기술의 수익성을 높였고, 따라서 그러한 기술이 나타났다는 것이다. 여기에 세계화(무역을 통한 숙련 집약적 상품의 가격 상승), 생산조직의 변화(숙련노동자에 맞춘 일자리 설계와 고용), 노동시장제도와 사회규범(불평등 증가로 인해 고임금 노동자들이 노동조합과 재분배에 대한 선호도 감소)이 기술변화의 영향을 더욱 가중시켰다고 설명한다.

 

내부 노동시장의 변화 때문인가?

 

SBTC론이 노동시장에서 노동수요의 변화에 주목한다면, 오바마 정부 노동정책을 설계한 데이비드 와일의 균열일터론은 제도의 변화, 특히 산업조직의 변화에 주목한다. 20세기 미국 거대기업의 진화 과정을 거래비용경제학으로 설명한다. 거래 비용이란 부품·원자재 조달, 생산과 유통과정에 드는 모든 비용을 말한다. 20세기 초 미국의 거대 법인기업은 수직적 통합을 통해 거래 비용을 내부화하며 절약했다. 대표적 사례가 부품업체-완성차-판매·유통을 통합한 제너럴 모터스다. 그러나 20세기 후반에 나타난 균열일터는 거래 비용의 외부화를 통해 비용을 절감한다. 부가가치가 높은 업무 중심으로 사업을 재편하면서 비핵심 업무를 분리하는 것이다. 애플이 대표적이다. 설계, 디자인, 품질관리는 애플이 맡지만, 생산은 외주화된다. 균열일터론은 일터가 균열하는 원인을 자본시장의 요구와 기술혁신의 효과로 설명한다. 주주 이익의 극대화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GPS, 바코드와 같은 정보·통신기술의 발전으로 아웃소싱이 가능해졌다는 것이다.

 

대기업은 비슷한 위치의 직원들에게 일괄 보수를 지급해 수평적 평등 문제에 대처했었다. 또한 임금에 대한 만족 여부는 유사한 직무/위치(수평적 평등)뿐만 아니라 위아래와의 격차(수직적 평등)도 중요하다. 이 같은 문제는 까다롭고 복잡해서 노동조합과 단체교섭을 통해 해결한다. 이 과정에서 조직 내 모든 직급의 임금수준을 상대적으로 높이면 수직적, 수평적 형평성 문제를 한꺼번에 완화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개별 기업 내에서 작동하므로, 기업의 지불능력에 의존하게 되고 상대적으로 지불능력이 있는 대기업 임금 프리미엄이 발생한다.

 

대기업은 이러한 문제에 대응하기 위해 아웃소싱을 통해 회사 자체의 경계선을 변화시켜 임금을 차별화하게 된다. 적절한 균열 속에서 비용과 책임은 줄이는 한편, 품질과 기술적 요건, 브랜드 신망은 유지할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러나 임금, 보호, 혜택, 안정성의 기회를 낮추면 그 사회적 비용은 다른 누군가가 감수할 수밖에 없다.

 

자본주의4.0인가, 신자유주의의 위기인가

 

주류경제학은 임금을 생산요소 시장에서 노동의 수요와 공급으로 설명한다. 노동 수요곡선은 이윤 극대화를 추구하는 기업의 한계생산가치곡선이다. 임금의 차이는 개별 노동자의 한계 생산성 차이(인적 자본의 차이)다. 여기에 현실에서 나타나는 임금 격차를 설명하기 위해, 숙련 편향적 기술진보, 내부노동시장론 등으로 이를 보완한다. 제도학파가 주목받는 이유다. 주류경제학의 해법은 교육투자다. 고학력 노동자의 공급을 늘려서 가격(임금)을 낮추는 것이다. 또한 규범적 측면에서 국가 조세·재정정책을 통한 재분배와 균열일터에 적합한 노동보호 법제도의 보완 등을 추가할 수 있다.

 

이러한 설명은 자본주의에 대한 역사적 분석을 결여하고 있다. 숙련 편향적 기술진보론은 생산요소 간 대체탄력성을 전제한 생산함수(CES생산함수)에서 고정자본은 고정되어 있다고 가정하고, 숙련 노동(대졸자)과 미숙련노동(고졸자)은 상호 대체가 불완전하다는 가정에 기초한 모델이다. 이러한 생산함수는 고정자본을 소비하지 않고도 노동을 절약할 수 있는 중립적 기술진보를 가정하고 있다. 이러한 모형은 현실과 맞지 않으며, 자본주의의 역사적 경향으로 나타나는 (자본소비적)노동절약적 기술진보와 이윤율 하락, 이에 대한 역사적 반경향의 모순으로서 자본의 금융화와 상대적 과잉인구(산업예비군)의 형성을 분석하지 못한다. STBC론도 제도에 주목하지만, 정작 제도가 변한 원인을 제대로 설명하지는 못하는 것이다.

 

균열일터론도 마찬가지로 기업조직이 변모한 근본적 원인에 대한 분석이 결여되어 있다. 거래 비용의 내부화와 외부화는 개별기업 차원의 혁신 이전에, 총자본의 수익성 위기에서 발생한 것이다. 자본주의적 기술진보는 잉여가치 생산이라는 생산 관계의 모순에 의한 노동 절약적인 편향적 기술진보이다. 산업혁명 같은 역사적 예외를 제외하면 이러한 기술진보의 어려움은 점증한다. 자본집약도의 상승만큼 노동생산성이 상승하지 않으면 자본생산성(이윤율)이 감소한다. 20세기 법인기업의 특징인 생산 규모 확대와 수직계열화는 자본생산성이 상승할 때 지속적 자본투입을 통해 가능했다. 금융세계화는 자본의 새로운 축적체계가 아니라 이윤율이 하락하면서 성장기에 형성된 제도가 파괴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균열일터는 사실 사회의 균열이다. 신자유주의 노동 유연화는 단체교섭을 약화했고, 비정규직 등 산업예비군을 양산해 경쟁을 극대화한다. 따라서 균열일터론의 저자가 제시하는 ‘기업의 변화에 조응하는 노동보호 법제의 보완’은 해법이 아니다. 자본의 극심한 저항으로 실현 가능성이 작을 뿐 아니라, 자본주의의 지속성장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불평등을 해소하면 다시 성장한다는 식의 임금주도성장론(문재인 정부의 소득주도성장론은 이것의 변형이다), 주권국가는 얼마든지 화폐(국채)를 발행할 수 있다는 현대화폐이론이 진보진영의 담론이 되는 것은 이렇게 주류 이론들조차 과학적 정세인식, 다시 말해 자본주의의 구조적 위기에 대한 역사적 관점이 부재하기 때문이다.

 

한국의 임금 격차

 

한국의 소득불평등·임금 격차는 자본주의의 역사적 경향이라는 점에서 보편적 측면과 함께, 수출재벌 중심의 성장 과정과 기업별 노조라는 제도가 함께 작동해서 형성되는 특수한 측면이 복합되어 있다.

 

한국의 임금 불평등은 1970년대에 현재보다 심각했다. 그런데 1980년대부터 1994년까지 불평등이 완화되다가 이후 다시 불평등 증가했다. 임금 불평등의 감소는 연령-성-학력별 임금 격차의 감소에 의해 주도되었다. 그런데 1990년대 중반부터 시작된 현재의 불평등 증가는 기존의 단절이 다시 심화된 것이 아니다. 연령-성-학력별 상·하위 그룹 간 격차 수준은 크게 변화하지 않았다. (물론, 이것은 격차가 없다는 것이 아니라 더 심화되지 않았다는 것인데, 현재 격차 수준도 상당하다.) 1990년대 중반부터는 같은 연령, 같은 성, 같은 학력 그룹 내에서도 격차가 심화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다른 요소를 찾아보아야 하는데, 기업 규모별 평균임금의 양극화는 상당한 수준으로 진전되었음을 알 수 있다. 대규모 사업체의 임금 프리미엄에 대한 연구는 여러 실증연구에서 반복적으로 확인되고 있다. 재벌, 공기업과 같은 대기업의 일자리를 사회적으로 선호하는 이유, 대기업에 정규직으로 입사하기 위해 치열한 노동자 간 경쟁이 발생하는 이유를 설명해주고 있다.

 

한국의 고용체제(노동시장과 노사관계·제도 통칭)는 신자유주의적 성격(시장원리)과 분절적 성격을 모두 가지고 있다. 분절적 성격이란 앞서 균열일터론에서 살펴보았던 것처럼 내부노동시장이 형성되어 있다는 것이다. 시장적 성격이란, 제도적으로 보았을 때 노조조직률, 단체협약 적용률, 단체교섭의 집중/조율 정도가 낮고, 노동시장의 결과를 보면 미국과 비슷하게 임금 격차도 크고, 고용도 불안(근속기간이 짧음)한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임금·고용 격차의 성격이 미국과 다르다. 한국은 노조원 여부, 500인 이상 기업 여부에 따른 격차가 큰데, 미국은 파트타임이 낮은 시급을 받아서 고용 형태 격차가 크게 나오는 것이다. 기업 규모에 따라 분절적 노동시장이 형성되어 있는 것이다. 즉 기업내부노동시장이 존재하는 1차 노동시장과 그것이 부재한 2차 노동시장으로 구분해볼 수 있다.

 

1차 노동시장에서는 기업 내 규칙이 임금과 노동조건에 영향을 미친다. 기업 내 규칙은 노사 간 단체교섭을 통해 주로 형성되는데, 한국에서는 대기업을 중심으로 노동조합이 형성되면서 1차 노동시장이 공고화된다. 그러나 한국은 1차 노동시장에서도 신자유주의적 성격이 상당한데, 한국 대기업은 일본과 같은 장기고용 관행이 없고 기업은 강제감원을 구조조정의 주된 수단으로 사용하기 때문이다. 정리해고뿐만 아니라 명예퇴직, 권고사직 등을 활용하는데 주로 화이트칼라가 대상이다. 2차 노동시장보다는 그 정도가 현저히 적다고 할 수 있다. 2차 노동시장에서는 근로기준법이나 최저임금법 정도를 제외하고는 시장을 규제하는 제도가 없다. 높은 최저임금 미만 비율은 이 조차도 취약하다는 것을 알려준다.

 

그 외에도 한국 고용체계의 특징은 첫째, 기업 중심성이다. 기업내부노동시장은 미국, 일본도 공통적이다. 그러나 한국은 고립적, 분산적 성격이 더 강하다. 미국은 시장적 성격이 강하지만, 직무급과 외부직종 노동시장을 통해 비슷한 임금 구조를 가진다. 일본은 '춘투시세'라는 초기업적 조율이 있다. 둘째, 1차 노동시장이 협소하다. OECD 중에서 대규모 사업체에 고용된 노동자 비율이 가장 낮다. 마지막으로, 성별 분리는 무엇보다 직종(직업)분리로 나타난다. 여성은 저숙련, 저임금, 고용불안의 하층부 직업에 종사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한국의 고용체계는 경제 위기 이후 신자유주의화가 진전되었으나, 대기업을 중심으로 노조의 저항이 기업 내부시장, 즉 기업 내 규칙을 어느 정도 지킨 것도 사실이다. 한국의 경제구조, 즉 자본축적의 특징과 한국 노동운동의 역사가 이러한 고용체계에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다. 한국은 범용기술을 바탕으로 한 수출주도 산업화를 통해 추격 성장을 해왔고, 동아시아의 주변국, 특히 중국, 일본 등과 미국 시장을 둘러싸고 경쟁 관계에 있다. 중화학 공업화를 통해 한국의 산업화를 주도하게 된 재벌은 높은 고정자본 투자를 통해 노동조합의 임금상승 압박에 대응했다. 한국은 자동화 수준(로봇 비중)이 가장 높은 국가다. 그러나 효율성 성장 없이 자본투입만으로는 생산성 향상에 한계가 있다.

 

또한 한국의 고유한 특징으로서 재벌의 특징은 생산성보다는 총수 일가를 통한 경제 지배력을 더 중시한다. 적산불하와 원조경제로 형성되었고, 중화학 공업화 과정에서 정책금융과 정부 보증 해외차관에 기대어 성장한 재벌의 역사를 반영한다. 과잉·중복투자로 인한 수익성 위기를 겪으면서도, 순환출자나 피라미드식 지주회사를 통한 총수 일가의 전횡적 지배를 유지·강화하고, 위기 때마다 대마불사를 근거로 손실을 사회화한다. 특히 IMF 외환위기 이후 신자유주의적 재편 과정에서 재벌은 수직적 원하청 체계를 형성한다. 사내 하청을 활용하고, 중간재 납품업체들과 다층적 위계적 거래구조를 만들어 비용을 전가한다.

 

임금 격차와 노동조합

 

재벌·원하청 체계라는 이러한 초기업적 구조재편에 대응하려면, 노동조합 또한 노동조합 간 연대 혹은 외부 비조합원 노동자들, 시민들과의 공동대응이라는 연대 전략이 필요하다. 그러나 이것은 초기업적 교섭·쟁의 제도가 형성되어 있지 않고, 기업별 교섭 투쟁이 관습화된 한국에서는 어렵다. 기존의 제도와 관습을 뛰어넘으려는 장기적이고 집단적인 노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결국은 노사 갈등을 회피하면서도 구조조정을 추진하려는 자본과 구조조정으로 인한 내부구성원 피해를 최소화하려는 기업별 노조가 외부로의 비용 전가에 공통의 이해를 갖게 된다. 자본의 단기수익추구 경향과 기업별 노조의 단기실리주의가 상호작용하게 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노동조합과 임금 격차의 관계에 대해 살펴보자. 한국의 임금 격차는 복수의 개별자본과 복수의 기업별 노조의 상호작용을 통해 설명할 수 있다. 이것을 자본과 정부는 ‘정규직 과보호’, ‘노동귀족’ 식으로 노동조합을 탄압하고, 투쟁을 억압하는 것에 활용한다. 그러나 이러한 이데올로기 공세에 맞선다고, 임금 격차를 무시하거나, 노동조합과 관계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설득력이 없다. 노동조합이 ‘죄’는 없을 수 있으나, ‘영향’을 미친 것은 분명하다.

 

국가 비교 연구에 따르면, 북유럽·서유럽과 같이 노동조합 조직률이 높은 국가에서는 임금 격차도 적다. 단순하게 생각하면 임금 격차에 대한 노동조합 책임론을 반박할 수 있는 증거다. 그러나 인과관계와 상관관계는 다르다. 상관관계만 가지고 인과관계를 설명할 수 없다. 조직률이 높아서 임금 격차가 줄어들었는지, 임금 격차가 적어서 노동조합 조직률이 높아졌는지는 알 수 없는 것이다. 제3의 원인이 임금 격차도 줄이고, 동시에 노동조합 조직률도 높일 수도 있다.

 

또한 주의해야 할 것은 이러한 증거가 노동조합의 임금 극대화 전략을 정당화하는 근거가 될 수 없다는 점이다. 오히려 노조조직률이 높은 유럽의 역사를 살펴보면 노동조합이 임금 균등화 전략을 채택할 때 조직률이 높아졌었다. 또한 노동조합의 조직률뿐만 아니라 노동조합 교섭구조의 중앙화, 조정 정도가 높을수록 임금 불평등이 낮아진다. 따라서 조율되지 않는 한국의 기업별 교섭은 오히려 조직률의 상승을 상쇄하는 요인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임금 결정의 메커니즘은 단순하지 않으며 복잡한 현실을 복잡한 그대로 정확히 인식해야 한다.

 

 

4. 나가며: 사회운동노조와 연대임금

 

임금 격차, 불평등의 증가는 주류경제학에 의해 ‘정규직 과보호론’, ‘노동귀족론’의 근거로 활용되고 있다. 한국에서도 노동부, 노동연구원 등에서 이러한 방식으로 활용한다. 노사정 합의를 통한 노동 유연화(유연안전성)가 대안으로 추진된다. 북유럽의 신자유주의화 된 사민주의(사회투자전략)나 독일식 온정적·보수적 복지국가(사회적 시장경제)를 모델로 하고 있다. 그러나 그 결과는 2007~2009년 금융위기와 그에 후속한 유럽의 재정위기, 신흥국의 경제 불안정화였다. ‘경쟁력을 위한 코퍼러티즘’은 아래로 향하는 경쟁일 뿐이었다.

 

그러나 신자유주의 노동 유연화에 맞서는 한국 노동자 운동의 전략은 3저 호황이라는 예외적 성장기에 형성된 역사적 현실과 전략에 여전히 근거하고 있다. 전자는 기업별 노동조합이라는 현실이고, 후자는 생활임금 쟁취(임금 극대화) 전략이다. 이러한 전략이 금융위기 이후 한국 경제의 더욱 심화된 불황 속에서 유효성을 상실하고 있다는 문제의식은 현장에서부터 이미 확산하고 있다. 문제는 대안이다.

 

우선 대안에 앞서, 노동조합 임금 극대화 전략의 한계를 임금 격차의 현실과 자본의 역사동역학(구조와 역사, 작용과 반작용을 통한 역사적 자본주의에 대한 설명)을 전제로 한 마르크스 임금론을 통해 살펴보았다. 생활임금 쟁취론이 비록 노동조합에서 기존의 이데올로기를 파괴하는 해방적·교육적 효과는 있더라도, 불황기에는 한계적이며, 계속 거기에 몰두하면 총체적으로 실패하게 됨을 확인했다. 실제 마르크스가 말한 궁핍화 역시 절대적/상대적 빈곤화가 아니라는 사실도 확인했다.

 

현재 노동소득분배율(상대적 임금)이 역사적 추세에 비해 일정 하락한 것이 사실이라도, 이것을 높이는 것은 노동조합의 기본적 경제투쟁으로서 의의를 가지는 것일 뿐이다. 게다가 현재 한국 노동자의 10%인 조직노동자의 임금극대화 전략이, 더군다나 재벌-공공기관 노동자의 임금인상이 노동소득분배율을 상승시킨다는 보장도 없다. 설령 노동소득분배율이 상승하더라도 노동자 간 격차가 확대되고 분열·경쟁·갈등이 심화된다면 그것이 노동해방의 길일 순 없다.

 

혁신의 매개로서 연대임금

 

노동조합의 한계에 대한 비판이 곧 노동조합 무용론이라는 이분법에서 벗어나, 노동조합의 혁신을 위한 대안을 모색해야 한다. 생활임금론을 비판적으로 평가해 보았듯, 사회진보연대가 적극적으로 주장해 온 연대임금(특히 스웨덴이나 독일보다는 이탈리아 노총의 정액임금인상에 주목했었다)에 대해서도 자기비판이 필요해 보인다.

 

사회진보연대의 노동자 운동 혁신 논의는 크게 네 가지 층위의 혁신을 강조했었다. 첫째, 이념·학습 운동도 교육사업을 통한 노동조합의 이념적 재건과 활동가 양성이다. 둘째, 재벌통제·반재벌투쟁이라는 노동조합의 사회·정치운동이다. 셋째, 조직화 노선, 특히 노동조합의 일상사업 수준의 조직화가 아니라 경제 위기라는 정세인식에 입각해 이념의 재건을 동반하는 전략조직화를 모색했다. 마지막으로 총연맹을 초기업 교섭-투쟁의 건설 매개로 명실상부하게 강화하는 방안을 모색했다. 또한 최저임금 인상, 업종별 표준임금과 같은 연대임금, 재벌과 공공부문의 고용 창출을 요구하는 연대고용을 반재벌투쟁과 함께 초기업 교섭·투쟁을 위한 투쟁 의제로 제시해왔었다. 또한 이를 통해 노동자 운동의 새로운 세대를 만들어야 한다는 문제의식을 제출했다.

 

사회진보연대는 ‘임금 격차 문제를 해결하는 노동시장-노사관계 정책 요구’로 “여러 층위의 초기업 임금제도 강화, 업종별로는 노동표준 형성과 같은 방식으로 초기업 임금기준 쟁취 투쟁”(2017년 노동운동포럼), “(미조직)동일노동·동일임금, 시기집중 임단투”(2016 노동운동포럼) 등 여러가지 의제들을 제시했으나, 이를 실현할 경로가 부재했다. 결국 박근혜 퇴진 촛불과 문재인 정부라는 정세변화로 인해 ‘격차 축소를 위한 초기업적 노동조합운동’은 ‘최저임금 1만원 운동’으로 수렴되었다. 결국 2019년 현재의 현실은 역설적이게도 최저임금은 인상되었으나, 총연맹도 강화되지 못했고, 초기업적 연대 운동 질서도 없으며, 사회운동기관으로서 노동조합의 혁신도 무망한 상태로 보인다. 이번 가을호에 실린 한지원의 글에서 다시 확인 할 수 있지만, 전후 유럽의 호황기를 배경으로, 중앙-산별교섭이 제도화된 상황에서 가능했던 연대임금 정책을, 유례 없는 불황기를 맞은 현재 한국의 민주노총에 적용하려고 했던 것은 정세적으로 오판이었을 수 있다.

 

그러나 여전히 연대임금(연대고용)이라는 투쟁 의제를 우리가 주목해야 할 이유가 있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연대임금은 결국 임금 불평등이 심화되고, 노동시장에서 배제된 (반)실업자·산업예비군이 증가하고 있는 현 정세를 인식하기 위한 매개가 될 수 있다. 노동자 간 격차에 주목하는 것은 현 정세가 경제 위기의 모순 심화와 동시에 노동자 대중의 분할도 심화되고 있음을 인식하는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연대임금(연대고용)은 이념이 사라진, 몰정세적인 노동자 운동을 비판하기 위한 매개도 될 수 있다. 따라서 현재 연대임금(연대고용)은 구체적 정책대안을 아직 수립하지 못했지만, “임금투쟁의 한계가 더욱 커지는 현 정세에서 노동조합이 다양한 경로로 성·인종뿐만 아니라 기업·직종·업종을 넘어서는 연대지향적 운동구조를 모색하며 이념을 재건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문제의식, 이념의 재건 없이는 구체적 정책대안을 만들 수도 없고, 설령 만든다고 해도 투쟁을 통해 쟁취할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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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
태그
연대임금, 임금격차, 마르크스 임금이론, 사회운동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