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광주전남지부


사회운동

사회진보연대 계간지


2002.1-2.2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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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적 타켓으로서 소말리아

스티븐 주네 |
아프리카 동부의 국가인 소말리아는 미국이 주도하고 있는 국제적인 테러리즘에 대항하는 전쟁의 다음 목표로 매우 빈번하게 언급되고 있다. 소말리아는 실패한 국가이다 : 중앙정부의 통제가 미치는 곳은 수도 모가디슈 뿐, 나머지 영토는 북부의 분리주의 정부와 군벌들과 토벌들의 지도자들이 통치하고 있다. 미국은 이러한 중앙정부의 부재라는 소말리아의 상황이 알-카에다의 세포조직들의 네트워크에 유리한 상황을 조성하고 있다고 믿고 있다.
붕괴 직전의 국가인 소말리아를 공격한다면, 그러나 우리는 그전에 고려해야 하는 두가지 것이 있는데, 하나는, 어떻게 소말리아에 빈 라덴의 추종자들의 안식처가 될 가능성이 생겼던 것인가, 다른 하나는 만약 미국이 소말리아를 공격한다면, 그 결과는 어떠할 것인가?

냉전의 볼모 A Cold War Pawn

많은 아프리카 국가들이 그러하듯, 최근 몇 년간의 소말리아의 만성적인 불안정과 폭력적 분할들이 예정되어 있었던 것은 아니다. 1970년대 초반, 소말리아는 소련의 영향력 하에 있었는데, 소말리아는 홍해로 가는 입구에 가까이 위치한 전략적 요충지로서 북부해안(Berbera)에 해군기지를 건설할 수 있게 하였다. 이것은 소말리아의 역사적 경쟁자였던 (봉건영주에 의해 통치되던) 에디오피아에 대한 미국의 대규모 지원에 대한 독재자 시아드 바르(Siad Barre)의 대응의 결과물이었다. 1974년 에디오피아 좌익장교단에 의한 군사쿠데타로 에디오피아 왕정이 전복되고 곧이어 다음해 에디오피아는 맑스-레닌주의 국가로 선언되었다. 이 사건으로 인해 미국과 소련은 기존의 자신의 동맹국을 서로 맞바꾸게 된다 즉, 소련은 에디오피아를 지원하고, 미국은 소말리아의 바르 독재체제를 지원한다.
1977년, 소말리아는 동부 에디오피아의 오가덴(Ogaden) 지역을 소말리아로 합병하기 위해 공격을 단행하게 된다. 그러나 에디오피아는 소련의 대규모 지원과 2만여 명의 쿠바군대의 지원으로 그 공격을 방어할 수 있었다. 당시 카터 미대통령은 이 원거리 사막지역에서의 갈등이 소련과 데땅뜨의 종식과 새로운 냉전의 시작임을 선언하였다.
미국은 1970년대 후반부터 1991년 바르가 실권할 때까지 수십억 달러의 무기를 바르 정권에 지원하였는데, 이는 1970년대에 소련이 건설하였던 군사 편의시설을 이용하는 대가로 지원된 것이고, 이 기지들은 미국의 대중동 군사개입을 위해 사용되었다. 이러한 미국의 바르 독재정권 지원에 대해 많은 아프리카 전문가들과 인권단체들이 우려를 제기하였다.
결국 이러한 우려는 현실로 드러났는데, 15년 간의 미국(그리고 이탈리아)이 지원하던 동안, 바르 정권의 권위주의적 통치로 수천 명의 시민들이 학살되었다. 결국 영토의 3/4을 장악하고 있던 족벌 지도자들이 박해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하면서 1988년 전면적인 내전이 발생하였고, 정권의 억압은 점점 더 그 수위를 더해갔다. 바르 정권은 권력집중을 위해 그동안 소말리아를 유지해오던 전통적인 사회구조를 심각하게 약화시켰으며, 동족상잔의 혼란과 대량궁핍의 원인을 만들었다.
모든 잠재적 경쟁자들이 제거되고, 막상 1991년 1월 바르 독재 체제가 붕괴되자 그 공백은 채워지지 못하였다. 게다가 이러한 상황은 서양의 관심을 거의 끌지 못했는데, 세계의 관심은 모두 냉전의 종식과 걸프전쟁에 쏠려 있었기 때문이다. 미국이 페르시아만 국가들의 군사기지를 사용할 수 있게 되자 소말리아는 미국의 외교정책의 고려대상에서 제외되었다.
미국은 바르 정권을 유지시키기 위해 1년에 약 5천만 달러의 무기를 퍼부었지만, 소말리아 인민들을 먹여 살릴 수 있는 자급 자족적 경제를 건설하는데 도움이 되는 어떠한 원조도 주지 않았다. 게다가 IMF를 통한 구조조정 프로그램은 지역 농업경제를 심각하게 약화시켰다. 결국 중앙정부의 붕괴와 경쟁적 군벌들의 몰락의 결합은 효과적인 식량공급을 차단하게 되었고, 그 결과 30만 이상의 소말리아인들(대부분 어린이들)이 사망하였다.

왜곡되어 가는 인도주의적 작전 Humanitarian Mission Goes Awry

1992년 11월, 부시행정부는 3만 명의 미군 주로 해군과 특수부대원들 을 소말리아로 파병했는데, 이것은 무장게릴라들에 의해 인민들에게 전달되는 것이 차단되었던 구호물자 제공을 돕기 위한 인도주의적 작전으로 묘사되었다. 유엔 안보리 역시 다음달 이것을 인준하였다.
많은 소말리아 사람들과 몇몇 구호기구들은 미국의 이러한 역할을 환영하였다. 하지만 많은 이들이 이에 대한 강한 회의를 제기하였는데, 소말리아의 기근과 흉작은 이미 지난 여름에 최절정에 달했었으며 안보상황이 상당히 호전되고 있다는 것이다. 미군이 속속 도착함에 따라, 식량공급이 차단되던 혼란상황은 소규모의 지역으로 제한되었으며, 대부분의 지역은 상대적으로 평화롭게 운영되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식량이 도착하고 이에 빈번한 도적질에 의한 손실은 다른 아프리카 국가들 보다 매우 높았다. 몇몇 경우, 미군은 대부분의 식량을 그저 지역 시장과 자영농민들에게 "던져주었을" 뿐이다. 게다가 어떤 경우에도 소말리아 사람들은 이 핵심적인 기간의 결정들에 포함되지 않았다.
대부분의 소말리아 사람들은 미군을 이전 독재정권의 주요 지원국가들의 대표로서 인식하였다. 식민지배로부터 해방 된지 30년 만에 [또다시] 외세의 존재는 거대한 분노를 일으켰다. 이러한 분노를 확신시킨 사실은 바로 미국이 파견한 군대는 인도주의적 작전과 관련된 훈련을 거의 받지 않은 정예전투부대였다는 점에 있었다 (작가이자 저널리스트인 데이빗 할베스트롬은 이와 관련하여 미국의 한 국방부 직원의 말을 인용하였다; "우리는 소말리아에 특수전투부대를 보냈다. 우리는 이들을 통제할 수 없다. 그들은 싸움소(pit bull)처럼 혹독하게 훈련되었다. 아무도 그들을 통제할 수 없다.") 미군의 거리에서의 총격은 보통의 일이 되어갔고, 소말리아 사람들은 백인 미군이 흑인 지역주민을 총격하는 장면을 너무나 자주 목격하였다.
게다가, 미국의 역할에는 몇몇 군벌들의 무장해제하는 것으로 점차 확대되었는데, 이것은 종종 무력개입을 포함하는 것이었고, 결국 일반인들의 주거지역에서도 작전을 수행하였다. 이 작전은 많은 미군피해를 낳았고, 이것은 국내에서 최초의 광범한 지지에 반대하는 여론을 부추겼다. 미국의 납세자들이 낸 세금으로 바르 정권에 지원되었던 수천 정의 M-16형의 총이 이제는 미국이 보내는 구호물자를 차단하던 바르 정권의 라이벌 군사들이 사용하였고, 이제는 그 총구는 미군을 향하고 있었다. 미군들은 점차 다음과 같은 슬로건, "선량한 소말리아 사람들은 죽은 이들뿐이다[즉, 모든 소말리아 사람들이 게릴라와 같다]"를 반복하여 듣게 되었다. 미국이 저항군들을 과소평가 했다는 것은 점차 명확해져갔다.
1993년 5월, 미국은 자신이 실패한 작전을 UN에 이전하였다. 이것은 주도국가에 대한 공식적인 초청이 없는(왜냐하면 아무도 나서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UN의 최초의 개입이 되었다. 하지만 소말리아 사람들은 UN 역시 신뢰하지 않았는데, 당시 UN 사무총장이었단 부트로스 갈리(Boutros Ghali)가 바로 바르 독재정권을 지원하던 이집트의 당시 외무장관이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유엔이 기술적인 작전통제를 하고 있었음에도, 미군은 18명의 미해군과 수천 명의 소말리아 사람들이 사망한 모가디슈 전투 이 전투는 극화되어 픽션스릴러 <블랙 호크 다운>(Black Hawk Down)로 출판되었다[곧 한국에서 영화가 개봉] 를 포함하여 많은 공격적인 침략을 계속했다. 미국이 주도하는 유엔군은 이제 소말리아의 다양한 갈등의 요인들 중에서 하나가 되었다. 이러한 복잡한 상황으로부터 급속하게 후퇴하면서, 미국의 주요 임무 중에 하나는 이제 자신의 군대를 보호하는 것이 되었다. 미국의회의 좌우파 모두의 비판이 거세어지자, 클린턴 미대통령은 1994년 4월 모든 군대를 소말리아에서 철수시켰다. 그후 1년 뒤 유엔 역시 평화유지군을 철수시켰다. 미국의 소말리아에 대한 개입은 많은 이들에게 이제 엄청난 실패로 인식되게 되었다.

다가오는 (또 한번의) 실패 The Coming Debacle

대부분이 그러하듯, 소말리아 개입은 미국의 외교정책에서 선의의 자유주의적 국제주의의 경솔한 행위로 인식되고 있다. 그러나 미국의 입장에서 보면 소말리아 개입을 결정할 때 다른 요인이 있었을 것이다: 아마도 냉전 종식에도 불구하고 계속 증가하고 있던 군사비용을 합리화하기 위해서, 이라크와의 전쟁에서 미국의 과잉대응과 보스니아에서 무슬림들에 대한 대량학살에 대한 미국의 무대응 이 양자 때문에 이슬람세계를 중화시킬 필요에 의해서, 그리고/또는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이 혼란 상황에서 점차 부상할 가능성에 대한 선제공격으로서 개입이라는 점 등을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마지막 이유 때문이었다면, 그것은 분명 소말리아에서 자신의 구성원을 모을 수 있는 이슬람 급진주의 세력으로부터 역공을 허용하게 했을 것이다. 이것은 충분히 가능한 일인데, 이미 미국의 바르 정권에 대한 지원으로 미국에 대한 분노는 하늘을 찌르고 있으며, 이제는 게다가 미국의 소말리아에 대한 직접적인 개입이라는 점이 추가되었다.
어쨌든, 이러한 결정적인 몇 년 동안 광범한 지지를 받는 정부의 구성은 도외시되었다. 소말리아는 여전히 게릴라조직의 지도자들과 군벌들에 의해 분할되어 운영되고 있다 (하지만 양자간의 어떠한 심각한 전투나 분쟁도 일어나지 않았다). 부시행정부의 몇몇 참모들은 이러한 파벌들에 의해 분할된 국가 내에 알-카에다의 네트워크나 세포가 확립되어 있다고 믿고 있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그것은 미국이 이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제기한다. 다음과 같은 가능성이 있다. 즉, 미국이 고도로 정확한 정보에 기반을 둔 정밀조준폭격을 하여 1993-94년과 같은 대규모 도시민들의 죽음을 불러오지 않는 것, 아니면 인구가 고도로 밀집되어 있는 지역에 폭탄을 투하하여 엄청난 인민의 죽음을 감수하는 것, 이 두가지가 있다. 그러나 최근의 역사에 비추어보면, 둘다 지극히 의구스러울 뿐이다. 미국의 새로운 버전의 소말리아 개입은 결국 오직 미국이 그렇게 제거하고자 하는 이슬람 저항세력들을 또다시 분노케 할 뿐인 또 다른 실패만을 낳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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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 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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