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광주전남지부


2020 여름. 17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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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유나 선배를 기억하며

이소형 | 노동위원장 
*지난 5월 17일 암 투병 중 유명을 달리하신 고(故) 송유나 동지는 1998년 사회진보연대 창립을 함께하였고, 2002년 사회진보연대 사무처장을 역임했다. 필자는 2002년 사회진보연대 사무처 활동을 시작하면서 당시 사무처장 송유나 동지와 함께했다. 2003년 이후 선배는 여러 사정으로 사회진보연대를 떠났다. 활동공간을 옮긴 후에는 공공부문 노동조합 운동의 조직, 정책연구를 위한 활동에 임했다. 국가기간산업 사유화 저지 공투본 활동과 에너지노동사회네트워크 정책연구실장을 했고, 공공운수노조 사회공공연구원 연구위원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2007년 후원회원으로 다시 가입했고 여러 활동을 통해서 사회진보연대 후배들과 인연을 이어왔다.  
 
부고를 듣기 일주일 전, 송유나 선배를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사회공공연구원에서 오랜 투병에 지친 유나 선배를 응원하는 자리를 마련해 많은 지인을 초대했다. 하지만 모임은 직전에 선배의 건강악화로 취소되고 말았다. 이때 사회진보연대는 응원에 힘을 보태기 위해 감사패를 준비했었다. 이 감사패를 전달하기 위해 따로 약속을 잡았다. 언니는 언제나 그렇듯 두 팔을 활짝 벌려 우리를 반겨주었다. 
 

1998년 사회진보연대를 창립한 멤버, 90학번 선배 송유나 언니. 현재 사무처 활동가 중에는 선배가 사회진보연대 활동을 했을 당시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있다. 근래의 술자리에서 우리는 유나 언니와 90학번 선배들, 대장정 학생연합, 1995년의 국가보안법 사건, 사회인연합과 지식인연대, 그리고 1990년대의 크고 작은 사건 이야기를 회상하곤 했다. 그러면서 그 모든 역사의 중심에 있던 송유나 선배가 후배들이 잘 모르는 이 과정을 기록으로 남겨줄 수 있다면 좋겠다고 의견을 모았다. 언니를 만났을 때 우리의 이런 뜻을 전했다. 언니는 재밌다고 웃으며 “서재에 쌓아둔 그 옛날 자료를 이미 정리해버렸는데, 미리 알았으면 좋았을 걸 그랬다”고 하셨다. 또 “그럼 이제부터라도 생각나는 대로 이야기를 해줄테니 녹취를 해서 너희가 잘 정리해 봐”라고 하셨다. 

그러다가 시작된 옛날 이야기. 언니는 학생운동 시절, 학생정치조직 선배들과 갔던 1993년 영종도 엠티를 떠올리며 그 시간이 참 즐거웠다고 말했다. 당시 엠티는 정파의 조직노선을 결정하는 자리였다고 하는데, 숨겨진 에피소드가 너무 재밌어 한참을 듣다가 아차 싶어 언니의 모습을 녹화하기 시작했다. 언니는 녹화를 못 한 앞의 이야기도 중요한 사건이니 잘 기억했다가 꼭 글로 써두라고 꼼꼼하게 일러두었다. (이 이야기는 다른 지면에서 소개하는 것이 더 적절할 듯하다.)

다음 이야기는 성신여대 근처 수박가게 앞에 있던 대장정 학생연합 사무실과 1995년 공안사건인 학생 사회주의 기간대오 조직사건의 전말. 

“내가 노동정세를 담당해서 당시에도 사람들을 많이 만났었지. 그 때 아르바이트도 2~3개를 하느라 저녁에는 또 사람들 만나느라 하루에도 동선이 일산에서 분당까지 엄청났는데 형사들이 나 따라다니기 힘들었대. 저 아이는 밥도 안 먹고 맨날 뻥튀기만 먹고 산다고..” 

민주노총과 학생조직의 관계를 엮어보려고 미행한 형사는 성신여대 앞 ‘성공세대’라는 단골 술집 앞에서 거의 매일 단팥빵을 먹으며 새벽 2~3시까지 언니가 나오기를 기다리느라 고단했다고 한다. 성공세대의 이모와 아저씨는 언니가 구속되었을 때 면회까지 왔고 그 곳에서 석방파티를 열기도 했다고 한다. 언니는 참 디테일하게도 그때의 이야기를 생생하게 기억하며 한 명 한 명 선배의 이름을 떠올렸다. 언니는 잠시 숨을 고르고 “오늘은 여기까지”라 하며 다음에 컨디션이 허락하면 또 불러 그 다음 시기의 이야기도 해주겠다고 하였다. 
 
1995년 국가보안법으로 구속, 석방된 이후, 유나 언니는 사회단체인 <민주와 진보를 위한 지식인연대>의 간사로 활동하며 학생운동의 이념적 지향을 사회운동으로 이어가려 했던 것 같다. 당시 또 다른 선배들은 1997년 대선을 맞아 민주노총과 전국연합, 진보정치연합, 정치연대 등이 결성한 국민승리21에 호응하며 <일하는 사람들의 대통령후보 권영길 청년지원단>을 조직했고, 그에 이어 1998년 사회인연합을 띄웠다. 지식인연대와 사회인연합 두 조직은 논의 끝에 통합하여 1998년 12월 사회진보연대를 창립했다. 당시 두 조직의 통합에는 정세인식이나 진보정당 운동에 대한 시각 등, 크고 작은 쟁점들이 있었다. 그런데도 큰 일을 해냈던 건 “선배 그룹이 단일한 틀로 집결해야 후배 세대도 사회운동 이전을 적극 고려할 수 있다”는 판단도 있었던 것 같다. 당시 민주노동당 활동을 하거나, 다른 분야 단체 활동을 하거나, 대학원에 진학했던 여러 선배들도 다양한 방식으로 사회진보연대 활동을 함께했는데, 그 선배들을 연결한 중심에는 송유나 선배가 있었다.  

언니가 다음 기회로 남겨둔 사회진보연대 창립 시점의 이야기는 갑작스러운 부고로 인해, 안타깝게도 더 이어지지 못했다. 늘 궁금했던 80년대 학생운동 내 정파운동과 사회진보연대 창립의 연관관계는 무엇인지, 어떤 이념과 운동을 계승하려고 했던 것인지, 이제 언니를 통해서 직접 들을 수는 없게 되었다. 
 
사회진보연대 이후, 그러니까 2003년 이후 언니의 삶은 장례식장을 찾은 많은 사람이 남긴 추모의 목소리를 통해 간접적으로나마 들을 수 있었다. 5월 18일 밤에 진행된 추모식에서 한 분은 선배의 열정적인 활동을 회상하면서 “송유나 동지는 본인의 강연에 참가한 노동자의 이름을 한 명씩 다 외워서 그다음에 만났을 때 그 이름을 꼼꼼히 호명했다”고 말하였다. 당위적인 교훈으로만 남을 수 있는 교육의 내용을 조합원이 조금이라도 더 기억하게 하고 싶어서였다. 선배는 현장에서 벌어지고 있는 여러 문제에 대해 현장 조합원보다 더욱 정확하고 세밀하게 상황을 알고 있었고 마치 함께 노동하고 있는 것처럼 그들의 심경을 헤아리려 노력했다고 한다. 짧은 생의 거의 모든 시간을 지역 곳곳에 있는 현장 노동자를 찾아가 조금 더 의미있는 정책으로 노동자가 단결, 연대할 수 있는 방법을 찾고자 했다고 한다. 삶과 운동의 과정에서 난관이 많았겠지만 언니는 늘 정직한 마음으로 노동자 대중의 곁에서 활동가로서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해내고자 끊임없이 노력했음을 알 수 있었다.     
 
시간을 더 되돌려 언니의 활동을 추적해보자. 유나 선배는 1998년부터 지식인연대의 틀을 통해 《연대와 전망》이라는 무크지를 발간했는데, 이는 당시 우리 운동이 신자유주의 정책개혁과 자본주의의 구조적 위기에 대해 정세 인식을 재정립하자는 취지를 담고 있었다. 이처럼 과학적 정세 인식의 필요성을 제기했던 젊은 활동가의 목소리는 1998년 사회진보연대 창립으로 이어졌다. 사회진보연대 창립선언문은 “우리는 언제나 노동자·민중과 함께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라고 했는데 이는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과학적 분석을 통해 대중운동에 함께하겠다는 의미일 것이다. 나는 당시 많은 문건을 직접 쓰고 논의했던 유나 선배가 노동자운동을 조직하며 일관된 견해와 마음을 유지했을 것이라 생각한다. 또한 그 힘은 바로 학생운동 때부터 지켜온 이념과 사상에 있다고 확신한다. 

1990년대가 시작되고 386 세대는 이념을 저버린 정치권력으로 돌변했는데, 우리 운동의 선배들도 그 흐름에서 예외는 아니었다고 한다. 언니는 옛날을 회고하면서 학생운동을 지도한 80년대 학번 선배들 중 많은 수가 90년대 초가 되니 운동을 떠나 제 갈 길을 갔다고 했다. 물론 자리를 지킨 든든한 선배도 적지 않지만. 선배들이 떠나간 자리에서 유나 언니를 포함해 많은 90년대 세대는 민주노총 출범 이후에도 노동자운동에 헌신했다. 하지만 노동자운동은 경제적 실리주의로 기울었고 이념적 지향과 멀어져갔다. 또한 권력을 지향했던 386 지식인은 노동자의 고통에 감정 이입을 하면서도, 자신의 삶은 신분상승과 권력을 지향해도 된다는 이율배반적 문화를 남겼다. 학생운동 경험을 정치권 진입의 스펙으로 삼고, 사회운동을 개인의 취향 정도로 남겨두거나, 심지어 사익을 추구하는 행위로 전락시킨 것이다. 90년대 운동권과 그 이후 후배 세대의 활동가들이 이러한 386 세대의 생활풍토를 극복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다. 사회진보연대 활동을 하고 있는 지금의 우리에게 늘 깊은 고민을 남기는 대목이다.  

송유나 선배는 사회진보연대 상근 활동을 시작했을 때 한 달 7만 원의 활동비를 받으며 여전히 아침, 저녁 아르바이트를 병행할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돌아보면 사회진보연대는 그런 선배 활동가의 힘으로 지금까지 걸어올 수 있었던 것 같다. 90학번의 송유나 선배가 창립한 사회진보연대에 이제는 90년생의 후배가 사무처 활동을 하고 있다. 우리 후배 세대는 언니가 노동자운동을 대할 때처럼 활동가로서 정직하고 부끄럽지 않게 우리의 할 일을 제대로 하며 살고 있는지 자문해본다.  

송유나 선배와 한 공간에서 함께 활동했던 시간은 짧았지만, 선배가 현실을 정확하게 비판할 수 있는 과학적인 인식과 노동자를 대하는 활동가의 윤리와 미덕, 이 두 가지를 묵묵히 지키며 살아왔던 것은 분명해 보였다.  

언니의 장례식장은 선배가 걸어왔던 역사 그대로, 30여 년 전 학생운동 시절부터 함께했던 많은 선배와 이제 막 단체 활동을 시작한 20대 후배까지 모두 다 만날 수 있는 자리였다. 이제는 서로 얼굴도 모르고 살아가는 우리지만 모두에게 언니가 남긴 당부가 무엇일지 생각해 봤다. 변혁을 꿈꾸고 운동을 실천하려면 개인적인 감정에 들뜬 열광이 아니라 현실에 대한 냉정하고 객관적인 성찰에서 출발해야 한다, 386 세대의 위선을 걷어내고 정직한 활동가의 삶의 방식을 택해야 한다, 이런 생각과 마음을 잊지 말고 각자의 자리를 잘 지키며 진중하게 현실의 작은 변화를 모색해야 한다, 이런 당부가 아닐까 한다. 
 
마지막으로 언니를 보고 돌아오는 길에 감사하다는 문자를 보냈다. 그때는 몹시 아픈 몸으로 우리를 반겨준 것에 대한 인사였는데, 송유나 선배가 청춘의 힘을 다해 우리의 운동을 지켜온 것에 대한 감사의 인사였어야 했다. 뒤늦게라도 후배들의 마음이 전달될 수 있기를 기도한다. 선배의 평안과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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