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광주전남지부


2021 봄. 17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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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정을 타락시키는 인민주의에 대한 준엄한 비판

윤소영 외, 『문재인 정부 비판』

김태훈 |
지난 2020년 12월 과천연구실의 공동작업인 『문재인 정부 비판』이 출간되었다. 이 책은 『한국사회성격 논쟁 세미나』에서 제시된 문재인 정부 비판을 개괄한 뒤, 문재인 정부 4년차 정세를 분석한다. 2020년 초 코로나19의 대유행부터 민주당의 총선 압승, ‘K방역·경제·평화’ 소동, 부동산 정책 실패와 검찰개혁 재론에 이르기까지 ‘민주정의 인민정으로의 타락’이라는 현실이 더욱 분명해지는데, 사회운동은 오히려 남한의 쇠망(decline and fall)의 길을 재촉했을 따름이었다고 평가한다. 이런 준엄한 비판이 사회운동에 주는 함의는 결코 가볍지 않을 것인데, 그 내용에 대해 숙고해볼 필요가 있겠다. 이 글은 그런 차원에서 『문재인 정부 비판』의 주요 논지를 정리해보는 것을 목표로 한다.
 

1. 인민정의 완성

 

문재인 정부에 대한 규정적 비판

문재인 정부의 실정이 분명해지며 사회운동은 물론이고 보수언론이나 일부 진보인사들도 문재인 정부와 386세대, 민주노총을 비판하고 있다. 그러나 과천연구실의 비판은 한국사회성격 논쟁의 대상과 주체로서 한국자본주의와 한국현대지식인에 대한 이론적·역사적 비판을 전제한다. 문재인 정부의 정책에 대한 정세적 비판 역시 이런 이론적·역사적 비판과 결합되어야 한다. 이른바 ‘촛불혁명’에 동참한 사회운동은 문재인 정부에 대한 나름의 비판을 제시하지만, 과학적 인식과 실행가능한 정책을 동반한 규정적 비판(determined critique)이 아니라 불리한 정세 속에서 일시적으로 정치적 책임을 모면해보려는 기회주의적 비판일 따름이었다.  
 

한국현대사에 대한 이론적·역사적 비판의 핵심은 1987년 이후 한국에서 문민화가 실패하면서 인민주의(populism)가 부상했다는 것이다. 인민주의는 자유주의, 공산주의, 심지어 보수주의에도 미달하는 반(反)정치적 정치이념이다. 이러한 사이비 정치이념이 표출된 결과로 반(反)엘리트주의, 원한의 정치, 반(反)의회주의, 정치의 미디어화 등의 현상이 나타난다.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인민주의는 민심 이반에 따른 정권교체로 일단락되나, 2007~2009년 금융위기 여파로 세계적으로 인민주의가 발호하는 정세가 조성된다. ‘브렉시트’와 트럼프의 당선이 상징적이다. 한국에서도 박근혜 정부가 출범한 이후 다시 인민주의가 부활해 이른바 ‘촛불혁명’과 문재인 정부의 출범으로 귀결된다. 이러한 정세 속에서 『한국사회성격 논쟁 세미나』는 정치체제(정체)로서 인민주의(populism)의 의미를 보완한다. 반(反)정치의 정치이념으로서 인민주의가 지향하는 정치체제는 ‘타락한 민주정’으로서 인민정(ochlocracy/mobocracy)이라 할 수 있다.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인민주의가 문재인 정부의 인민정으로 완성되었다는 것이 『한국사회성격 논쟁 세미나』의 결론이었다. 문재인 정부는 노무현 정부의 실패 원인을 엘리트와의 타협에 있었다고 판단한 듯, 인민주의를 더 철저하게 실천한다. 소득주도성장, 북한 비핵화, 검찰개혁, 코로나19 정책대응 등 모든 정책이 그런 인민주의의 산물이다.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인민주의가 신자유주의적 통치성의 일부라면, 문재인 정부의 인민정은 신자유주의를 포함한 일체의 자유주의와 무관한 더 순수한 형태의 인민주의다. 사태가 이렇게 극단화된 데에는 386세대와 민주노총의 작용이 있었다. 문재인 정부에 대한 비판은 386세대와 민주노총에 대한 비판과 결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4·15총선

『문재인 정부 비판』은 2020년 초 코로나19의 대유행부터 민주당의 총선 압승, ‘K방역·경제·평화’ 소동, 부동산 정책 실패와 검찰개혁 재론에 이르기까지 ‘민주정의 인민정으로의 타락’이라는 현실이 더욱 분명해졌음을 분석한다. 가장 먼저 주목하는 현상은 4·15총선에서 범여권의 압승이다.

4·15총선의 유일한 승자는 민주당도 아니고, ‘문프께 모든 권리를 양도해드린’ ‘깨시민’이었다. ‘하노이 노딜’과 ‘조국 사태’ 이후 40%대를 유지하던 대통령 지지율이 선거 시기 60%에 접근했는데, 이런 여론이 총선에 반영된 셈이다. 총선 결과를 ‘야당 심판론’을 지지한 민심으로 해석할 수는 없다. 오히려 선거제란 이성적 시비(是非, 옳고 그름)가 아닌 감정적 호오(好惡, 좋고 싫음)를 반영하는 한계가 있음을 숙고해보아야 한다. 자유주의자가 거세된 야당의 수권능력에 대한 회의도 작용했을 테지만, 보수주의자가 옹립한 황교안 대표에 대한 대중적 비호감이 더 큰 문제였기 때문이다. 

로마의 군주선출에서 유래한 선거제는 민주주의의 충분조건은 물론 필요조건도 아니다. ‘1인 1표’로 상징되는 평등투표는 자코뱅의 인민주의 내지 벤섬의 공리주의의 특징일 따름이다. 공리주의에서 자유주의로 전향한 존 스튜어트 밀은 재산이나 소득이 아니라 능력 내지 지식에 따른 차등투표를 지지했었다. 마르크스주의도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다만 능력이나 지식에 대한 평가에서 자유주의와 차이가 있을 뿐이다. 

통상적인 오해와 정반대로 마르크스는 사회주의를 능력주의의 완성으로 정의했다. 『고타강령 비판』에서 말한 ‘능력에 따른 노동, 욕구에 따른 분배’로 특징지어지는 공산주의에 도달하려면 ‘능력에 따른 노동, 노동에 따른 분배’로 특징지어지는 사회주의를 거쳐야 한다. 마르크스가 볼 때 자본주의에서 능력주의는 불완전한데, 혈연·지연·학연 같은 연고(緣故)의 제약으로 개인의 능력이 충분히 발현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반면 사회주의는 그런 제약에서 개인을 해방시켜 능력주의를 완성한다. 

4·15총선에서 민주당의 압승은 국내외 정세와 무관한 뜻밖의 결과였다. 소득주도성장과 북한 비핵화에 대한 몰인식이 코로나19의 대유행과 코로나19발 경제위기에 대한 몰인식으로 재생산되었기 때문이다. 국내외 정세에 무관심한 한국 사회의 ‘풍속과 세태’는 엥겔스가 ‘독일의 불행’을 초래한 중간계급과 그 결함으로 주목한 ‘사익만 아는 천민부르주아적 속물성(Spießbürgertum)’을 떠올리게 한다. 
 

4·15총선 이후 ‘K방역·경제·평화’ 소동 

‘K방역’ 프레임으로 총선에 압승한 문재인 대통령은 급기야 ‘K경제’, ‘K평화’ 프레임을 통해 ‘베이징 컨센서스’를 보충할 ‘서울 컨센서스’를 제시했다. 포스트코로나19 시대에 중국·한국이 미국·유럽·일본의 (신)자유주의를 대체할 새로운 글로벌 스탠더드를 제시한다는 구상(‘중국의 아픔이 한국의 아픔’)이었다. 문재인 정부가 이러한 친북·연중·비미·반일 구상을 실행할 능력이 있느냐도 문제지만, 무엇보다 ‘K정치’, 즉 인민주의의 문제가 있다. 

의학적·역학적 근거보다 ‘쇼통’에 치중하는 K정치는 K방역과 모순이다. 여름휴가 성수기를 앞두고 사회적 거리두기를 완화하고 소비캠페인을 벌이다가, 결국 이태원발 집단감염, 쿠팡발 집단감염으로 확산세가 커지자 ‘국민 탓’을 했다. 11월부터 발발한 3차 유행에서도 마찬가지였는데, 코로나19 재확산에 대비하기는커녕 의료계와의 대결을 자초했다. 민간이 아닌 국가 중심의 보건의료체계가 코로나19 대처에 유의미했다는 증거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공공보건의료를 명분으로 지방 공공의대 증설과 의사 수 확대를 추진한 것이다. 결국 3차 유행 이후 남한의 역학곡선은 대만이 아니라 미국과 유사한 궤도를 따르게 되었다. 문재인 정부가 백신 확보를 방기했다는 사실도 지적할 수 있다. K방역이 ‘감염병의 대유행은 백신과 치료약에 의해서만 최종적으로 해결될 수 있다’는 기본적 과학적 사실에 대한 맹목을 조장한 것으로 보인다.

K정치의 귀결인 K경제와 K평화는 문재인 대통령의 무지와 망상의 상징이다. 소득주도성장(K경제)은 현대경제학과 마르크스주의 ‘경제학 비판’이 공유하는 경제성장론을 부정하는 ‘경제학적 문맹 내지 사기’일 따름이었다. 2018년 들어 자영업자 소득이 감소하고 자영업 관련 일자리도 감소했으며, 문재인 정부가 삼성에 ‘투자 구걸’을 한 사건은 소득주소성장의 실패를 방증했다. K평화도 6·15공동선언 20주년을 전후해 실패가 분명해졌는데, 북한 김여정 당중앙은 문재인 대통령의 기념연설을 ‘철면피한 궤변’이자 ‘오그랑수’(표리부동한 속임수)라고 비난했고, 개성공단의 남북공동연락사무소를 폭파했다. 
 

‘K정치’의 본색

‘K방역·경제·평화’의 명백한 실패 속에서 ‘K정치’의 본색이 드러났다. 민주당은 김대중-노무현 정부 이래 법제사법위원장을 대개 야당인 소수당에 양보해온 관습을 부정했다. 법제사법위원회의 ‘법제’는 단원제 국회에서 다수당 내지 여당의 폭정/횡포를 견제하는 기능과 관련되고 ‘사법’은 법원·검찰의 ‘정치적 독립과 중립’을 감시하는 기능과 관련된다. 여당이 법사위를 장악하면 제왕적 대통령제가 강화될 수밖에 없다. 미국에서는 다수당이 상임위원장을 독식한다는 변명은 무지의 발로다. 미국은 양원제로 하원을 견제하는 상원이 있고, 법원·검찰의 독립과 중립을 보장하는 법원모독죄, 사법방해죄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제왕적 대통령제의 마지막 장애는 ‘사람에 충성하지 않는’ 법치주의자 윤석열 검찰총장이었다. 문재인 정부의 검찰개혁은 ‘조국사태’를 거치면서 윤석열 검찰총장에 대한 공격과 수사방해로 변질되었다. 추미애 법무부장관은 윤 총장에 대한 수사지휘를 강제해 자진사퇴를 유도했다. 추 장관의 수사지휘권 발동이 ‘위법 또는 부당’한 직권남용 내지 수사방해이고 윤 총장의 퇴진은 불가하다는 전국검사장 회의의 의견에도 불구하고, 윤석열 총장이 장고 끝에 추미애 장관의 수사지휘를 수용한 것은 『사기』에 나온 한신 장군의 고사 ‘숙시지(孰視之)’를 연상케 하는데, 굴욕을 감수하면서 자중자애한 것이다. 

한편 박원순 시장이 자살하면서 정권 재창출에 장애가 조성되었다. 2022년 지방선거에서 서울시장 출마를 희망했던 추미애 장관이나 여당의 경우, 2021년에 치러질 재보선 승리가 불투명해졌기 때문이다. 박원순 시장의 자살은 이른바 ‘윤미향 사태’와 마찬가지로 인민주의와 급진페미니즘은 ‘불행한 결합’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의 주사파적 민족해방론이나 참여연대의 공리주의적 코퍼러티즘은 여성권에 별로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급진주의적 페미니즘도 여성권을 위한 페미니즘은 아니라는 점에서, 자유주의적 페미니즘과 그것을 지양하려는 사회주의적 페미니즘에 미달하는 것이다. 


부동산 정책의 실패

윤미향 사태에 이어 박원순 시장의 자살을 계기로 대통령 지지율이 하락하다 급기야 7월에는 반대가 지지를 추월하는 ‘데드크로스’가 발생했다. 부동산 정책의 실패가 불신을 가속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한국은행과 통계청이 발표한 2019년 국민대차대조표에 따르면 이명박 정부에서 감소하여 박근혜 정부에서 안정을 유지했던 국민소득에 대한 토지자산 배율이 문재인 정부에서 또다시 급등했다. 게다가 토지자산의 수도권 집중도도 2018년부터 다시 상승하기 시작했다.

국민대차대조표는 노동자민족의 실태를 보여준다. 국부에서 부동산의 비중이 84.9%, 주택의 비중은 30.4%인 반면 고정자본(기계·설비)의 비중은 5.5%일 뿐이다. 투자은행 크레디트스위스의 전세계 국부에 대한 조사를 보면 2019년 한국의 1인당 국부는 미국의 40%, 일본의 70%, 대만의 80%에 해당하고, 금융자산의 비중은 미국이 74%, 일본이 61%, 대만이 66%인 반면 한국은 37%에 불과하다. 코로나19발 경제위기 와중에 코스피를 지지해온 이른바 ‘동학개미’는 저금리에 미혹된 깨시민일 따름이다. 

수십 차례의 부동산 대책에도 서울·경기를 중심으로 부동산 매매 가격은 상승세를 지속해, 정책 실패가 분명해졌다. 게다가 임대차법 개정의 결과로 전세대란이 발생했다. 동시에 청와대 비서진이 ‘직 대신 집’을 선택하는 사태까지 발생했다. 문제는 주택소유자를 소외시키고 임차인을 동원하려는 부동산 정책의 인민주의적 성격에 있다. 


바이든의 당선

불행 중 다행은 미국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퇴진했다는 사실이다. 투표결과를 보면 낙승이 아닌 신승이었다. 다만 애리조나와 조지아에서 승리는 민주당과 공화당의 연대, 즉 ‘정치를 초월하는 원칙’과 ‘정파를 초월하는 가치’에 공화당 지지자들이 호응한데 따른 것으로, 주목해 볼 수 있다. 

바이든 당선인은 승리연설에서 ‘상대를 적으로 취급하고’ ‘악마화하던 잔혹한(grim) 시대’를 종식시키자고 제안한다. 최우선 정책으로 국내에서는 코로나19의 통제와 국제적으로 글로벌 스탠더드의 재건을 약속한다. 한국과 관련해서는 범태평양파트너십(TPP)과 ‘CVID(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돌이킬 수 없는 비핵화)’를 부활시킬 것이라는 점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코로나19시대의 남한은 원조(aid)나 구제(relief)는커녕 경제안보(economic security), 달리 말해 경제적 현상의 유지조차 불가능해 보인다. 정지상태를 지나 쇠퇴상태, 즉 탈성장이 임박한 것 같다. 일본의 ‘잃어버린 30년’은 경제안보를 통한 정지상태의 유지로 해석할 수 있다.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 과정에서도 민족경제의 상대적 자율성을 확보했던 일본은 범태평양파트너십(TPP)과 아르셉(RCEP)사이에서 갈팡질팡하지 않았다. 나아가 민주당 등의 인민주의적 도전을 극복하고 자민당의 포괄정당제를 유지했다. 반면 노동자민족으로 전락한 남한에서는 인민주의가 주류화되었다. 


2. 남한 운동권의 쇠망

 
인민주의는 남한 운동권의 위기를 상징하기도 한다. 과천연구실은 2007~2009년 금융위기에 대한 대응으로 사회운동노조의 건설을 제안한 바 있다. 그러나 민주노총의 사회운동노조로의 개조가 난망한 상황에서 세계적 차원과 동시에 일국적 차원에서 인민주의가 발호했고, 남한 운동권은 이른바 ‘촛불혁명’과 문재인 정부에 대한 과학적 인식과 비판, 실행가능한 대안을 제시하지 못한 채 쇠망(decline and fall)의 길을 재촉했다. 
 

민주노총의 노동자주의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 브뤼노프는 신자유주의에 대한 사이비 대안으로서 코퍼러티즘을 ‘상황의 지대’(rent of situation, 위치에 의해 결정되는 지대)라는 개념으로 비판했다. 민주노총이 코퍼러티즘을 추구한 결과는 상황의 지대를 넘어 독점이윤을 공유하는 ‘지대공유제’(rent sharing)라고 할 수 있다. 생산성과 무관한 자동차 노조의 고임금은 노조라는 조직된 힘을 통해 총수 일가가 독식한 독점이윤의 분배에 참여한 결과인데, 이러한 ‘폭력과 지대의 교환’을 통해 형성된 것이 재벌과 재벌노조의 ‘지대공유제’라고 할 수 있다. 심지어 재벌노조뿐만 아니라 공공노조까지 고용세습을 도모한다는 논란이 있었는데, 그것은 코퍼러티즘적인 ‘상황의 지대’(역전가능하다는 의미)를 추구하는 것을 넘어서 ‘신분의 지대’(혈통을 통한 세습)를 추구하는 꼴이다. 

인민주의는 보편적 이익(공익) 대신 특수한 이익(사익)의 추구를 특징으로 한다. 코퍼러티즘이 자본가-노동자의 사익 간 ‘평화공존’을 모색한다면, 수적으로 소수파인 자본가의 사익에 수적으로 다수파인 노동자의 사익을 대립시키는 노동자주의는 인민주의의 변종일 뿐이다. 

민주노총의 노동자주의(workerism)적 편향은 문재인 정부의 소득주도성장의 이론적 결함을 인식하지 못하고 정치적 호기로 인식하도록 했다. ‘최저임금 1만원’ 정책은 마르크스가 말한 ‘상대적 과잉인구’ 중에서도 잠재적 실업자라고 할 수 있는 소상공인·자영업자와 갈등을 초래했다. 임금과 노동조건의 격차를 축소하는 연대임금과 연대고용을 통해 노동자간 경쟁을 지양하자는 제안은 수용되지 않았다. 하층노동자든 상층노동자든 임금분배율을 최대화하자는 민주노총의 투쟁은 노동자간 경쟁을 완화하는 데 성공적이지 못했다. 임금과 노동조건의 격차라는 ‘노동자 내부의 모순’을 노동자 전체의 고액임금화로 해결하려고 한 결과, 노동자와 자영업자·소상공인의 모순, 즉 ‘인민 내부의 모순’이 심화된 것이다.   

민주노총의 ‘제대로 된 정규직화’ 요구는 실행가능성의 문제가 있었다. 직무간·기관간·부문간 임금격차라는 3중의 난제가 있으나 실제 기관 내 임금격차만 쟁점이 된 것이다. 정당성 차원에서는 취업준비생들로부터 공정하지 않다는 비판에 직면했다. 민주노총은 공정성 논란에 효과적으로 대처하지 못했는데, 능력주의를 부정하는 인민주의의 확산과 관련이 있었다. 

한편, 2018년 5월 지엠 군산공장 폐쇄를 시작으로 지엠대우, 르노삼성, 쌍용자동차에 일련의 위기가 재발했다. 이 책은 위기와 구제금융의 악순환과 관련하여, 노동조합이 ‘매판적’ 성격을 가질 수 있다는 문제도 제기한다. 구제금융으로 소생, 연명하는 외국계 기업의 노조가 고액 연봉을 유지하기 위해 외국자본과 한편이 되어 문재인 정부를 겁박한 셈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악순환을 단절하기 위해서는 애초 외국인의 인수·합병을 허용한 것을 비판했어야 했다. 물론 산업구조의 문제가 있는데, 쌍용차나 지엠대우는 국제하청공장에 불과해 국유화를 해도 독자 생존이 어렵다. 따라서 청산이 불가피할 수도 있다. 정리해고에 반대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닌 것이다. 

요컨대, 소득주도성장의 이론적 결함과 실행불가능성에 대한 민주노총의 맹목은 문재인 정부에 대한 기회주의적 태도를 낳았다. 소득주도성장의 실패가 명백해지자 민주노총은 문재인 정부와 갈등을 빚었지만, 그러나 ‘사익의 최대화’를 추구한 민주노총의 노동자주의는 ‘사익의 평화공존’을 추구한 문성현 경제사회노동위원회 위원장의 코퍼러티즘에도 미달하는 것이었다.


통일운동·반미투쟁의 문제 

민주노총은 문재인 정부 2년차 남북·북미정상회담을 평화와 통일을 향한 결정적 전환점으로 인식했다. 이것은 소득주도성장의 폐기로 인한 실망에도 불구하고 문재인 정부를 전면 비판하지 못한 원인이 되었다. 이러한 친북 내지 민족공조 노선이 주류를 형성한 가운데, 남한 운동권은 북한사회주의의 타락과 핵무장, 남한 인민정과 북한 절대군주정의 연방제통일이라는 쟁점에 대해 적합한 비판과 대안을 제시하지 못했다. 북한 비핵화인가, 한반도 비핵화인가, 전세계 비핵화인가라는 공리공담만 있었을 뿐, 완전한 비핵화인가 불완전한 비핵화인가라는 핵심적 쟁점은 토론되지 않았다. 

민주노총은 북한의 불완전한 비핵화 정의를 충실히 따랐다. 핵실험장 폭파와 미사일시험장 폐쇄를 확고한 선(先)비핵화 의지로 평가했다. 또한 ‘백두혈통’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한 핵무장을 체제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한 선택이라고 부당 전제했다. 구좌파는 북한 핵무장을 비판하나 미·일 제국주의에 초점을 맞출 뿐이다. 그러나 중국의 군사전략(‘강군몽’) 특히 동중국해와 남중국해에서 군사도발에 대해서는 비판하지 않는다. 미국의 쇠퇴와 중국의 부상을 부당 전제하기도 하는데, 중국의 국가자본주의는 미국·일본의 민간자본주의에 비해 후진적이며, 중국의 경제전망도 낙관적이지 않다. 

‘하노이 노딜’ 이후 진보당(민중당) 등 민족해방파는 문재인 정부가 통일은커녕 남북 간 합의된 ‘평화조항’을 준수할 의지도 박약하다고 평가한다. 그러나 정부에 대한 비판 대신 반미·반일노선이 강화된다. 2019년 한·일 갈등 국면에서 친일적폐를 적대화하면서, 아베의 보통국가화를 군국주의 부활로 오판한다. 그러나 아베는 야스쿠니신사 참배를 자제하며 군국주의 부활 시도를 차단한 바 있고, 범태평양파트너십과 인도-태평양 전략을 추진하며 국제 자유주의 진영에서 오바마의 후계자를 자임했다. 따라서 일본의 재무장을 비판하기 전에, 남·북한이 일본처럼 전쟁을 위한 군사력을 포기해야 한다.

2020년 4·15총선 최대의 스캔들은 이른바 ‘윤미향 사태’였다. 민주당 비례대표의원으로 당선된 윤미향 의원이 정계진출이라는 사익을 위해 위안부를 이용했고, 회계부정을 저질렀다는 것이다. 그러나 정대협에 대한 비판을 이것으로 환원할 수만은 없다. 정대협 내부의 모순에 주목해보아야 한다. 와다 하루키 교수는 인터뷰에서 윤 의원이 2015년 한일위안부합의에 적극 관여해 배상금 지불을 요구하다가 일본이 그 반대급부로 소녀상 이전을 요구하자 갑자기 합의에 반대했다는 사실을 지적한 바 있다. 즉 배상금이 중요한 주사파적 민족해방론과 소녀상이 중요한 급진페미니즘의 모순이 윤미향과 정대협 내부에 존재한다. 

민주노총은 한일위안부합의 파기와 징용피해자 배상 문제에도 적극 관여했다. 그런데 민주노총 등의 통일운동·반일투쟁이 ‘진정한’ 친북노선과 상충한다는 사실을 지적할 수 있다. 김정일-고이즈미 회담에서 식민배상금/독립축하금과 위안부 문제 모두 1965년 한일국교정상화에 준해 합의되었다. 2015년 한일위안부합의에 대한 정대협의 거부는 북일국교정상화를 통해 경제위기를 탈출하려는 북한의 구상과 충돌한다. 일본공산당 출신 조총련 간부였던 장명수 씨는 재일교포는 북한의 외화조달을 위한 ‘인질’이었다고 폭로한 바 있는데, 문재인 정부에서는 남한 인민이 새로운 인질이 된 셈이라고 할 수 있다. 북한이 추구하는 대안은 결국 국교정상화에 따른 일본의 배상금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검찰개혁과 코로나19 대응

하노이 노딜로 시작된 문재인 정부 3년차의 귀결은 ‘조국 사태’였고 검찰개혁이라는 쟁점이 급부상한다. 그러나 노동자운동은 조국 사태와 검찰개혁에 침묵으로 일관했다. 노동자의 특수한 이익으로서 ‘사익’ 이외에 민족 전체의 보편적 이익으로서 ‘공익’에 무관심한 노동자주의의 방증이었다. 다만 노동자운동 좌파 일부가 관여했는데, 대개 부르주아 정치분파 또는 억압적 국가장치 내부의 갈등으로 환원했다. 이는 법치나 정의 개념에 대한 노동자운동 일반의 맹목을 방증한다. 마르크스주의자나 공산당원과 같은 ‘국사범’ 내지 ‘사상범’에게, 경찰사법과 검찰사법의 차이는 무의미하지 않다. 다이쇼민주주의 시기 검찰사법으로 이행을 상징한 치안유지법은 사상범을 처형하는 것이 아니라 전향을 유도하려고 했다. 또한 타인의 행복을 손상시키지 않는 부정적(negative, 소극적) 덕성으로서 정의 없는 사회는 없다. 법치도 마찬가지다. 

검찰개혁 논쟁은 노동자운동 외부에서 전개됐다. 인민주의·진보주의 성향의 민변·참여연대와 정의당은 정부·여당을 일관되게 지지했다. 이들은 조국 사태의 본질을 법치의 위반이 아닌 검찰의 반동으로 규정했다. 정의당은 여당의 2중대라는 비난에도 아랑곳하지 않으며 선거법개정과 검경수사권 조정 및 공수처 설치를 교환했다. 자유주의 성향의 경실련은 조국 장관 후보자의 자진사퇴를 주장하고, 추미애 장관의 검찰직제개편안을 비판하기도 했지만, 검경수사권 조정과 공수처 설치는 지지했다. 그러나 문재인 정부 검찰개혁은 ‘법학적 문맹 내지 사기’다. 

검찰개혁 논쟁에서 침묵으로 일관한 민주노총은 코로나19의 대유행과 4·15총선에서도 무기력했다. 특히 코로나19 경제위기 대응과 관련하여, 민주노총은 노동자의 보편적 이익을 대표하기는커녕 조직 내부 갈등조차 조정하지 못하는 무능력을 보였다. 집행부 반대파 또한 코퍼러티즘의 대안을 능동적으로 제출한 것이 아니라 반대와 거부로 일관했을 따름이다. 특히 집행부 선출과 운영에 관여하며 문재인 정부 대북정책에 협조한 민족해방파가 사회적 대화에 미온적이었던 이유는 불명확했다. 김명환 집행부의 친정부노선과 민족해방파 친북노선간의 갈등은 정치이념과 무관한 노동자주의의 발로였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이 책이 출간되는 시점에 새로 선출된 민주노총의 민족해방파 집행부도 이러한 경향을 반영한다고 볼 수 있겠다.
 

노선 정립에 실패한 정의당

4·15총선에서 ‘민주당의 비례전문 위성정당’ 지위를 고수하려했던 정의당의 선거전략은 완전히 실패했다. 선거 패배 후 심상정 대표는 당의 ‘정체성 후퇴’에 대해 자책하기도 했지만, 만일 여당의 비례위성정당이라는 ‘복병’을 만나지 않았다면 그 자책은 자화자찬으로 바뀌었을지 모른다.

총선 전후 정의당 내 좌파는 민주당과 구별되는 노선 정립 문제를 제기했다. 이들은 민주당을 ‘자유주의’라 주장하기도 했는데, 이는 자신을 진보주의로 위치시키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정의당의 진보주의는 여전히 모호하다. 영국에서 진보주의는 사민주의, 즉 19세기 고전적 자유주의가 현대화한 것으로서 케인즈주의를 의미했다. 반면 미국에서 진보주의는 인민주의가 현대적 자유주의로 대체되는 과정에서 과도적 역할을 수행했다. 남한의 진보주의도 마찬가지인데, 예를 들어 케인즈주의를 원용하는 경우에도 케인즈-새뮤얼슨의 케인즈주의가 아닌 칼레스키-로빈슨의 포스트케인즈주의와 친화성이 있다. 남한에서 진보주의가 자유주의에 미달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정의당은 진보의 내용을 확정하지 못하고 사민주의와 인민주의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다가 ‘민주당 2중대’로 전락했다. 

정의당은 코로나19 대응으로 100조 원 규모의 민생 직접지원 추진을 제안했다. 정부 재난지원금 10조 원의 다섯 배가 넘는 51조 원을 재난기본소득으로 책정하자는 것이었다. 경제안보에 집중하면서 경기부양에 신중했던 미국과 달리, 정의당은 단기부양을 주문한 것이다. 경제정책의 완화만으로 코로나19발 경제위기를 해결할 수 없다는 사실을 다시 떠올려보면, 경제학적 문맹을 고백하는 것일 따름이었다. 

부동산 정책에서도 정의당은 문제의 원인을 투기로 환원하며 소유권 제한에 초점을 맞추는 정부·여당의 인민주의적 정책과 차이가 없었다. 국부에서 부동산, 특히 주택의 비중이 높은 것은 ‘노동자민족’의 현실을 반영할 따름이고, 주택이 아니라 주식이 투기를 대표한다는 것은 경제학적 상식이다. 정의당은 또한 피케티를 원용해 ‘세습자본주의’ 타파를 기조로 설정하는데, 피케티의 해법은 부유세(상속세·재산세)를 통해 이윤율을 하락시키자는 밀이나 금리 생활자를 안락사 시키자는 케인즈와 동일한 것이다. 또한 피케티는 상속에 의한 개인적 불평등이 학력으로 정당화할 수 있는 기능적 불평등을 초월한다는 점에서 능력주의의 복원을 주장한다. 물론 피케티는 경제학적 개념을 혼동하고 국가코퍼러티즘적인 비경제적 메커니즘을 대안으로 제시한다는 문제가 있는데, 정의당은 피케티의 능력주의·자유주의가 아니라 국가코퍼러티즘적 대안을 선별적으로 수용할 따름이다. 

현실사회주의 붕괴 이후 공산주의 재건이나 마르크스주의 쇄신을 위한 노력을 동반하지 않는 진보주의는 일종의 알리바이에 불과하다. 경제학 비판과 자유주의 비판이 불가능한 ‘진보’는 존재 이유가 없다. 경제학과 자유주의에 대한 거부와 반대는 인민주의일 뿐인데, 이는 보수주의에게조차 미달할 수 있음을 유념해야 한다. 
 

3. 프랑스혁명과 자코뱅적 인민주의

 
남한 운동권의 쇠망(decline and fall)과 노동자운동의 ‘총체적 실패’라는 평가는 뼈아프지만, 그 원인을 자문해보아야 할 것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문재인 정부의 인민주의를 추동하는 386세대와 노동자주의의 결함은 능력주의를 부정하고, 법치(rule of law)를 부정하는 ‘경제학적/법학적 문맹 또는 사기’라고 할 수 있겠다. 이는 경제학적 계몽주의가 아니라 철학적/법학적 계몽주의라는 ‘프랑스 이데올로기’에서 비롯한다고 『한국사회성격 논쟁 세미나』에서 설명한 바 있다. 『문재인 정부 비판』은 프랑스 혁명사에 대한 비판적 인식을 통해 마르크스주의와 자코뱅적 인민주의의 쟁점을 분명히 한다. 또한 행동 규범이 없는 ‘불량배 지식인’인 386세대 운동권의 ‘혁명관’이 이런 ‘자코뱅적 인민주의’와 중국 문화혁명의 ‘아Q적 혁명관’에서 비롯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프랑스혁명

마르크스주의와 386운동권의 자코뱅적 인민주의를 분별하려면 프랑스혁명을 부르주아 혁명의 모델로 설정하고, 프랑스가 정치적 현대를 대표한다는 통설에 대한 비판이 필요하다. 부르주아 혁명의 모델로서 프랑스혁명이라는 통설은 마르크스에서 비롯되어, 러시아혁명과 중국혁명에서 광범위하게 수용되었다. 다만 선발자본주의와 구별되는 후발자본주의 내지 반식민지에서 부르주아 혁명의 특수성이라는 문제가 제기된다. 

레닌은 1905년 혁명을 ‘프롤레타리아와 농민의 혁명민주주의(RD)적 독재’라는 특수한 형태의 부르주아 혁명으로 인식했다. 그 모델은 프랑스혁명인데, 총파업과 무장봉기 → 임시혁명정부 수립 → 제헌의회(CA) 소집과 민주공화정 수립이라는 도식에 집착한 것이 증거다. 그러나 1917년 혁명에서 이 개념을 폐기한다. 새 혁명론은 특수한 형태의 사회주의 혁명으로서 프롤레타리아와 농민의 인민민주주의(PD)적 독재라고 부를 수 있다. 

혁명 이후 러시아사회성격 논쟁이 전개되며, 역사적 경향으로서 국가독점자본주의론(국독자경향론)이 나타난다. 국독자경향론과 인민민주주의론은 소련에서 스탈린주의로 중도반단된 대신, 중국사회성격논쟁에 계승된다. 반면 국독자경향론과 인민민주주의론을 수용하지 못한 일본은 부르주아 혁명을 주장하는 강좌파와 민주주의 혁명 없는 사회주의 혁명을 주장하는 노농파 사이 불모의 논쟁이 전개된다.
 
수정주의적 프랑스혁명론은 1989년 프랑스혁명 200주년을 전후로 전세계적으로 주목받는다. 1960년대 아날학파의 구성원이면서 마르크스주의자인 퓌레(furet)는 프랑스혁명 비판을 발전시켰다. 프랑스혁명에 대한 수정주의적 비판은 현대화, 즉 봉건제에서 자본주의로의 이행의 실패에 주목한 것이다. 영국과 비교할 때 프랑스는 산업자본주의와 부르주아 헌정질서가 안정적으로 착근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한국사회성격 논쟁 세미나』는 프랑스의 경제·정치·법·문화·문학적 후진성을 곳곳에서 해명했다.) 말년의 알튀세르도 수정주의적 프랑스혁명론을 지지했다. 퓌레가 ‘혁명 당시에 탄생한 전적으로 이데올로기적인 전통[자코뱅적 인민주의라는 ‘프랑스 이데올로기’]에 대해 반대한 것은 아주 정당하다‘고 했다. 
 

자코뱅적 인민주의

알튀세르의 제자인 발리바르도 마르크스와 로베스피에르의 혼동에 대해 지적했다. 로베스피에르는 부자가 아니라 인민의 개별이익(intérêt particulier)이 전체이익(intérêt générale)이라고 주장했는데, 루소의 전체의지(volonté générale, 일반의지)를 응용한 이런 주장은 경제학적 근거가 없는 인민주의다. 부르주아 소유권에 대한 마르크스의 대안은 ‘개인적 소유권으로서 자기 소유권’, 즉 노동권인 반면 로베스피에르의 대안은 생존권이었다. 또한 노동권은 개인의 능력 차이를 인정하는 능력주의(‘능력에 따른 노동과 노동에 따른 분배’)인 반면 생존권은 개인의 능력차이를 부정하는 평등주의(‘능력-노동과 무관한 분배’)다. 

발리바르는 전체의지와 전체이익을 위해 공포정치도 불사했던 자코뱅주의도 비판했다. 공포정치의 수단은 혁명재판과 기요틴에 의한 공개처형이다. 혁명재판의 법치는 자유주의적 법치(rule of law, ‘만인은 법 앞에서 평등하다’)가 아니라 인민주의적 법치(rule by law, ‘만 명만 법 앞에서 더 평등하다’)였다. 

스미스와 유가의 ‘경제적 계몽주의’에서 형벌은 범죄에 대한 배상, 즉 사적 원한에 대한 분노와 복수를 대신하는 공적 배상이었다. 반면 루소-로베스피에르의 ‘철학적 계몽주의’와 결합하는 베카리아-벤섬의 ‘사법적 계몽주의’에서 형벌은 범죄의 억지(抑止, deterrence)였다. 프랑스혁명에서 산악파가 공포정치를 자행한 근거가 이것이었다. 나아가 형벌은 사회를 방어하고 변혁하는 수단으로도 인식되었다. 이러한 공포정치는 나치는 물론 소련·중국·북한에서 자행되는 국가테러의 기원이다.

 발자크를 계승하는 리얼리즘 소설가 디킨즈가 비판한 것처럼, ‘늘 싸우기만 한’ 프랑스인은 민족으로서 ‘실패였다’. 군주정이 타락한 참주정과 민주정이 타락한 인민정의 악순환에 빠졌기 때문이다. 발리바르의 ‘인권의 정치’는 폭력 비판으로 발전했는데, 공포정치로서 가정苛政/혹정酷政(가혹하고 혹독한 정치)의 대안은 ‘시빌리티(civility)의 정치’, 즉 인애(仁愛)에 기반한 예치(禮治)라고 할 수 있다. 과천연구실이 추구해온 이데올로기 비판의 핵심이 바로 인권의 정치와 시빌리티의 정치였다. 
 

지옥도(地獄道)

문재인 정부 386세대는 문화혁명 당시 존숭받은 노신의 당동벌이(黨同伐異, 옳고 그름을 떠나서 같은 패거리는 돕고 다른 패거리는 친다)를 적폐청산의 원칙으로 삼는 듯하다. 중국 유맹(流氓, 불량배)의 역사를 보면 배공사당(背公死黨, 공익을 버리고 죽기로 사익을 지킨다)이 ‘불량배의 의리’였는데 ‘문단의 불량배(文氓)’라 불린 노신을 존숭하는 386세대도 기질적으로 행동 규범이 부재한 불량배다. 그러나 노신은 그만큼 독단적이고 무모하진 않았다. 폭군보다 폭민이 ‘더 폭력적’(更暴)이라 주장했고, 아Q가 지배자가 되는 상황을 경계했다. 

왕후이처럼 포스트식민주의적 하층민(subaltern) 개념으로 아Q를 정당화하려면, 아Q의 혁명관, “내가 갖고 싶은 재물은 모두 내 것이고, 내가 갖고 싶은 여자도 모두 내 것이다.”도 긍정해야 할 것이다. 촛불혁명의 기원이 일국사적으로는 동학농민전쟁이고 세계사적으로는 프랑스혁명이라는 엉터리 주장을 하는 문재인 정부와 386세대 운동권으로서는 구미가 당기는 혁명관일지도 모른다. 조선 망국 때 자결한 황현이 동학농민전쟁을 사이비지식인(동학도)과 난민(亂民)/폭민의 결합으로 규정했는데, 프랑스혁명도 자코뱅이라는 사이비지식인과 상퀼로트라는 폭민의 결합으로 규정할 수도 있을 것이다. 

명황조 말기에 「천하의 위기를 걱정하는 상소」 때문에 사직하고 낙향한 여곤은 ‘난리가 나기를 바라는 백성’(幸亂之民)으로 사교도, 모반가라는 사이비지식인과 빈민, 불량배라는 난민을 지적했다. 마르크스주의적 의미에서 혁명, 즉 해방과 변혁의 결합이자 폭력 비판이라 할 수 없는 홍위병의 반란은 우파의 난동과 마찬가지로 반혁명적이었다. ‘난리가 나기를 바라는 백성’의 특징은 행동 규범의 부재라고 할 수 있다. 

‘혁명적 폭력’이 지배한 문화혁명기 중국은 지옥도(地獄道)였다. 여섯 가지 세계(道, 풍속과 세태)를 구분하는 불교는 천신도·인간도와 지옥도 사이에 사익 추구로 인한 분노와 복수의 세계인 수라도(修羅道), 무지와 수욕(獸慾)의 세계인 축생도(畜生道), 시기와 질투의 세계인 아귀도(餓鬼道)를 설정한다. 수라도, 축생도, 아귀도가 혼재하는 남한사회의 미래는 바로 지옥도가 될지도 모른다고 『문재인 정부 비판』은 경고한다.

우리 민족이 경험한 지옥도는 무엇인가? 물론 70년 전의 한국전쟁이었다. 1951년 남한 자유민주정의 탈선을 개탄한 영국 『타임즈』의 사설의 한 대목(“쓰레기 더미에서 장미꽃이 피어나기를 바라는 것이 더 양식 있는 일일 것이다.”)을 책 서문에서 인용한 역사적·정세적 의미를 숙고해야 하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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