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광주전남지부


사회운동

사회진보연대 계간지


2002.3.2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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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주의 문헌(1) - 소련에서의 계급투쟁, 첫번째 시기 1917~1923 : 서문

Charles Bettelheim |
번역: 이 현 | 사회진보연대 회원


계급관계와 소유의 법적 형태
생산력발전의 우위
국가의 존재와 착취계급의 소멸

I. '생산력' 문제설정의 지배
(a) 볼셰비키 당내에서 경제주의에 대한 투쟁의 중단
(b) 경제주의의 사회적 토대
(d) 유럽 공산당 및 노동운동 내에서의 경제주의
(c) 5개년 계획의 수행 중 경제주의 테제들의 명백한 부활

II. 현존하는 소련에서의 사회적 관계 및 그것이 형성된 토대의 성격 규정의 필요성


* * *


어떠한 이유로 그리고 어떠한 경위로 이 책을 집필하게 되었는지를 독자들에게 설명하고, 지금까지의 나의 저작활동에 있어 본서가 차지하는 위치를 서술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가장 간단한 방법은 아마도 이 책이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처음에는 한정적인 계획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 어떻게 보다 야심에 찬 계획으로 바뀌게 되었는가를 소개하는 것이리라.
이 작업의 직접적인 출발점은 소비에트 군에 의한 체코슬로바키아 침입과 점령이었다. 맑스주의적 입장을 주장하는 이들은 이러한 정치적 행위에 대해 단지 '단죄'하거나 '유감스럽게' 생각하는 것만으로 충분할 수 없다. 즉 그러한 정치적 행위를 설명하지 않으면 안 된다. 유감이나 소망은 인민이 그들의 불행을 감내하는 데 도움을 줄 뿐으로 불행의 원인을 인식하고, 그 원인의 제거를 위해 또는 그 재발을 방지하기 위해 투쟁할 수 있도록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반면 노동자의 관점에 입각하여 그러한 행위들이 비난받아 마땅할 이유를 설명하는 것은, '유감스러운' 일들이 두 번 다시 발생하지 않도록 정치적 힘을 결집하도록 도움을 줄 수 있다.
체코슬로바키아 침입과 점령의 경우, 단지 '유감의 뜻'을 표명하는 것에 그칠 수 없다고 더욱 생각하게 된 것은, 현안이 되고 있는 이 문제가 이미 발생한 많은 점령에 의해 고통받고 있는 인민들의 운명 뿐 아니라 오늘날 소비에트 연방에 대해서 내려지고 있는 판단과도 관련된 것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폭력적 조치를 수행한 것이 다름 아닌 러시아의 군대 그리고 그 동맹군의 군대였기 때문이다.
이를 당연히 소비에트 연방의 문제로서 사고해야 함을 인식하게 된 것은, 이미 이 나라에 대해 40 여 년 간 연구해온 경험에 의한 것이며 또한 이 나라와 관련된 모든 사항들이 세계사적 중요성과 함의를 갖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러시아어를 공부하기 시작한 1934년이래, 나는 언제나 이렇게 생각해왔다.
1936년 소비에트 계획경제를 연구하기 위하여 소련을 방문했을 때에도, 1939년 이 주제에 대해서 책을 썼을 때에도, 1946년 계획경제의 이론적·실천적인 여러 문제를 다룬 한 권의 책을 출판했을 때에도, 1950년 소비에트 경제에 대한 또 한 권을 간행했을 때에도, 또한 그 이후 다시 소련을 몇 차례 방문하고, 계획경제와 사회주의 이행에 대해서 다른 책을 출판했을 때도 변함 없이 그렇게 생각해왔다.
1930년대 중반이래 소련에 대한 갖고 있던 관심은 기본적으로 이 나라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사회주의 건설의 최초의 경험과 동일시하는 것에 의해 규정되었다. 이러한 경험을 특징짓고 있던 곤란과 모순을 간과하였던 것은 아니었으나 (1936년의 '중대재판 great trials'의 시기 모스크바에 체류하면서, 매일 모스크바 시민들이 내던져진 혼란,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과 볼셰비키 당 및 인터내셔날의 옛 활동가들이 자신들의 견해를 밝히는 것에 대해 갖는 공포를 어떻게 몰랐을 수 있었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10월 혁명이 인류의 역사에 있어 새로운 시대를 열었을 뿐만 아니라 -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 소련의 경제적, 사회적 발전이 사회주의 건설을 위한 일종의 '모델'을 제출하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이러한 발전에 따른 곤란과 모순은 그 중대성에도 불구하고 무엇보다 러시아의 특수한 역사적 조건에 기인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이러한 곤란과 모순이 다른 나라에서 똑같이 반복될 이유는 없으며 또한 이 나라의 사회주의, 공산주의에의 전진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을 방해할 어떠한 이유도 없다고 생각하였다.
5개년 계획의 실시이래 공업부문에서 소련이 거둔 의문의 여지없는 경제적 성취, 히틀러에 대한 적군의 승리, 전후 신속한 경제재건, 소비에트 인민의 생활수준의 개선, 소련의 사회주의 중국에 대한 원조 등은, 초기 5개년 계획의 과정에서 형성된 사회적 불평등이 사라지기는커녕 오히려 증대되는 경향을 보이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앞에서 언급한 평가와 예측을 확정짓는 것으로서 여겨졌다.
소련공산당대회 제20차 대회 역시 - 분명 이 대회는 그 이전 시기 무차별적이고 대규모적으로 자행된 탄압행위의 발생에 이르게 한 곤란과 모순에 관하여 어떠한 분석도 제출할 수 없었으며, 그러한 분석을 (과거의 '부정적' 측면의 유일한 '책임자'로 간주된) 스탈린에 대한 개인적 비난으로 대체해 버렸음에도 - 소련이 경제발전의 일정한 단계에 도달하여, 이제 보다 위대한 사회주의적 민주주의에의 길로 진입하여, 노동 계급의 주도에 의한 광범위한 가능성을 열었다는 사실을 확증하는 것처럼 여겨졌다. 이 대회는 또한 소련공산당이 오류를 정정하는 것에 필수적인 자기비판의 능력을 보유하고 있거나 또는 오히려 마치 오류로부터 회복되어온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사태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소비에트 역사와 소비에트 사회의 모순적인 현실 상황은 최소한의 분석의 대상도 되지 못했다. 단죄되고 전화되어야 할 현실의 측면들은 소련의 내부모순과의 관련 속에서 해명되지 않았다. 오히려 그러한 측면들은 특정한 인격 personality (스탈린의 인격)의 행동에 의한 '일탈'로서 제시되었다. 이러한 사이비 설명이 소련공산당에 의해 받아들여졌다는 사실은 분석의 도구로서의 맑스주의를 당이 방기하였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이로써 당은, 단죄되어야 할 것으로 표현된 것들을 산출한 사회적 관계를 실질적으로 변화시키는데 도움이 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하였다. 이렇게 하여 이 의사설명 pseudo explanation 은 그 본래적 역할, 즉 경제·정치 권력을 소수자의 손에 집중시키는 계급관계를 강화하는 역할을 수행하였으며, 이에 따라 이러한 계급관계로부터 발생한 모순은 축소되기보다는 오히려 한층 심각해졌다.
이러한 사회적 모순의 심화가 낳은 수많은 결과들 중에서도 경제 운영의 조건이 한층 악화되는 상황이 발생하였다. 소련과 관계 깊은 나라들, 그 지도자가 소련과 유사한 정치노선을 채택한 나라에서도 사태는 동일하게 나타났다. 이에 대해 사회적 모순 그 자체에 착목하는 대신, 공장관리자의 권력을 증대시키고 자본주의적 형태와 자본주의적 기준의 경제관리를 널리 적용함으로서 경제체제를 보다 잘 기능하게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경제개혁'이 실시되었다.
소련 및 형제 국의 지도자들의 기대와는 반대로 이러한 여러 가지 개혁조치들은 이들이 직면하였던 곤란을 어느 것 하나 근본적으로 해결해 주지 못하였다. 분명 일정한 범위에서의 일시적인 성공이 이루어지기도 하였으나 지배적인 측면은 실패에 불과했다. 즉 외국기술 의존의 증대, 대외채무의 증가, 공업성장률의 현격한 저하, 공급곤란 등의 사태가 발생하였다. 노동자들의 그들의 상황에 대한 그리고 '경제개혁'에 대한 불만의 징후들이 증대하였다.
1970년 12월 폴란드 발틱 해 연안의 그다니스크 Gdansk, 그디니아 Gdynia, 시체친 Szczecin, 소포트 Sopot 등의 대도시의 노동자들이 물가인상과 생활수준 저하를 가져올 정부의 정책에 대항하여 파업에 돌입한 사건은 전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이러한 투쟁에 대해 억압적인 조치들이 취해지자, 폴란드 노동자들은 이에 저항하여 당 사무소와 정치경찰 건물을 점거하고 파업위원회를 조직하였으며 파업위원회는 노동자 민병대를 조직하였다. 치안부대가 한층 과격한 탄압을 자행하여 다수의 노동자들의 죽고 부상당하였으나, 노동자들은 파업을 지속하고 저항하여, 마침내 정부의 관료를 경질하고 노동자와 교섭을 강제하여 몇 가지 요구조건에 대한 양보를 받아내었다.
폴란드에서의 '사건'은 소비에트권 여러 나라들의 노동자계급과 정치권력간 관계에 있어 전환점이 되었다. 이 사건이 소련 노동자계급 내부에 깊은 영향을 미쳤으며 또한 소련 지도층 내부에 강한 공포를 안겨주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이 공포는 1971년의 5개년 계획의 수정 및 탄압의 강화로서 나타났다.
소련 자체에 있어서는 최근 수년간 탄압이 강화되는 경향이 점차 명료해지고 있으며 이는 새로운 경찰적 조치의 채용과 (계산 가능한 수로만) 약 200만에 달하는 수용소의 인구가 보여주는 바와 같다.
국내 모순의 심각화에 기반 하여 소비에트 국제정책은 이전 소비에트 대외정책의 사회주의적 측면을 구성한 요소를 점차 부정해 가는 특징을 보이게 되었다. 중국과 알바니아에 대한 원조를 중단하고, 1960년이래 - 이데올로기적 불일치라는 명목으로 - 체결되어 있던 협정을 일방적으로 파기하면서, 건설 중이던 공장의 필요물자 인도 중지, 기술자의 철수 등의 형태로 이 두 나라의 경제발전을 방해하고자 하는 의식적인 시도가 이어지고 있다. 이렇게 소련은 이 두 나라를 과거에 맺었던 경제관계를 이용하여 자신의 패권 밑에 종속시키기 위해 난폭하게 압력을 가하고자 하나 이는 성공하지 못하고 있다.
전반적으로 소련의 국제정책은 다른 나라와 맺은 긴밀한 경제관계를 이용하여 최대한의 경제적, 정치적 이익을 뽑아내려 하는 강대국의 정책적 양상으로 나아가고 있다. 이러한 제국주의적 유형의 정책의 결과 소련은 미국과 협력하는 동시에 대립하는 관계를 형성하게 되었다. 이 두 강대국은 어느 쪽도 세계의 패권을 목표로 하여 경쟁하고 있다. 이 두 나라는 여러 다른 나라 인민들의 희생을 통해 타협을 얻고자 한다. 이 두 나라는 역사상 존재하지 않았던 엄청난 군비확대경쟁을 하고 있으며, 미 제국주의는 베트남 인민에 대한 전쟁을 지속하고 있으면서도 '긴장완화'를 논하고 있다.
미국과 동일한 수준에 도달하기 위하여, 즉 세계의 패권을 놓고 미국과 경쟁하기 위해 소련은 미증유의 공격적 군사력을 건설하여 전 지구적 규모의 거대한 개입수단을 갖추는데 이르렀다. 미국의 군사력과 경쟁하는 영역에서는 심지어 미국을 압도하기 위하여 현재 소련은 미국의 7∼8%에 대비하여 GNP의 25-30%를 군사비에 지출하고 있다. 소련은 매년 중국 국경지대에 임전태세에 있는 사단의 수를 증대시키고 있으며 그 주력병력은 서유럽을 향해 배치되어 급속하게 증대되고 있다.
제국주의적 형태의 대외정책수단을 유지하기 위하여 소련 지도자들은 소련의 여러 민족, 인민들의 자국 경제발전 가능성을 가로막는 무거운 부담을 안겨주고 있다. 소련 지도자들은 미 제국주의와 끊임없이 충돌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미국으로부터의 재정적, 기술적 지원을 받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상의 과정(체코슬로바키아 점령은 그 한 계기이다)에 대한 평가는 무엇보다 소비에트 연방의 과거를 재검토하게 만들었다. 이 나라가 현재 나아가고 있는 방향이 단지 몇 명의 지도자들의 '개인적 책임'에 결정되어진 것이라고 볼 수는 없기 때문이다. 반면 이러한 지도자들이 권력의 지위에 오르게 된 것도, 그들이 지금까지 지적한 정책들을 실행할 가능성을 지니고 있었던 것도, 필연적으로 소련의 현재적인 지배적 사회관계의 성격-선행한 오랜 기간에 걸쳐 형성된 관계-으로부터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관계를 분석해야할 필요성이 존재한다.
나아가 이상의 경위로 기획된 분석은 중국과 쿠바의 경제적·정치적 변혁과 관련한 개인적인 경험으로부터도 많은 시사점을 얻었다. 특히 쿠바와 관련해서는 대단히 구체적인 실천적인 경험을 갖고 있는데, 이는 1960년부터 1966년에 걸쳐 쿠바 경제의 계획화가 제기하는 문제들에 대한 토론에 여러 차례 참가해왔기 때문이다. 이 경험을 통해 이미 이 시기부터 일련의 개념들, 즉 계획경제의 작성 조건, 사회주의 이행기에 있어 계획경제의 의미, 생산수단의 국가적 소유가 지배적인 역할을 하는 사회구성체에 있어 상품·화폐 관계의 존재가 갖는 함의에 대하여 전반적인 의문을 갖게 되었다.
이 책에서 제시하는 테제의 성격을 명확히 하기 위해서 또한 독자들이 그 테제를 나의 이전의 두 권의 책(이는 대체적으로 쿠바 문제에 대한 경험의 성과였다)과의 관계 속에서 비교하여 보다 제대로 위치 짓기 위해서도, 이전에 유지해온 개념들에 대한 나의 의문이 지닌 한계를 상기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1962년과 67년 사이에 집필한 논문들을 수록한 『사회주의 경제로의 이행 La Trabsition vers l` conomie socialiste』에서, 나는 소련과 마찬가지로 쿠바에서도 (단일한 경제계획이 실시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실상 상호 비교적 독립적인 방식으로 기능하며, 따라서 '경제적 주체'로서 작동하고 있는, 생산단위로서의 상품의 존재와 화폐 관계 사이의 관련성을 보이고자 했다.
이 분석에서 나는 상품과 화폐관계, 그리고 임금관계가 사람들의 의지와는 독립적으로 작동하는 (따라서 그것이 소멸하기 위해서는 '폐절되었다'고 선언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은) 현실적인 사회적 관계로서 존재함을 설명하는 것으로 나아가고자 했다. 따라서 이러한 분석 내에서 상품·화폐관계는 내재적인 사회적 관계의 표현으로 나타난다. 즉 그것은 이러한 사회적 관계의 효과이며 또한 이러한 사회적 관계를 재생산하기 위한 객관적인 필요조건인 것이다.
오늘날 돌아보면 1962년과 67년에 제기한 특수한 형태에 대한 분석은 충분한 것이 아니었다. 그 후 나는 중국에 있어 사회주의 건설의 제조건, 즉 문화혁명으로부터 찾아낼 수 있는 교훈에 대한 새로운 고찰을 통해서 당시의 분석의 용어를 심각하게 변경해야 한다는 생각에 이르게 되었다.
1962년부터 67년까지의 나의 저작에서 주요한 결점은, 그 글들에서 객관적인 요구조건에 의한 것이라고 간주되는 것들이 주로 생산력의 발전 수준과 관련된 것이었다는 점이다. 생산력의 성격이라는 개념도 당시의 문장 속에서 언급되어 있으나 그 개념의 명확한 의미가 전개되지는 못했다. 따라서 당시의 글에서는 사회적으로 통일되어진 정책(계획경제는 그러한 정책의 수단에 불과하다)의 주요한 장애물이 생산력의 발전수준이 아니라 오히려 지배적인 사회관계라는 점을, 즉 그러한 장애물이 자본주의적 분업의 재생산과 이데올로기적·정치적 제관계 속에 존재한다는 점을 그리고 이는 자본주의적 분업의 효과이며 또한 그러한 분업의 재생산의 사회적 조건을 구성한다는 점을 분명히 할 수 없었다. (이데올로기적·정치적 제관계는 개인과 기업을 집단적 이해보다 그들의 개별적인 이해에 우위성을 부여하는 '주체'로서 '기능'하게 함으로서 자본주의적 분업을 재생산하는 사회적 조건이 된다. 더구나 집단적 이해는 적대적인 계급이해관계의 소멸을 위한 조건을 창출하는 실질적으로 지향하는 정책의 요청과 규정되지 않는 한 일시적이거나 환상적인 것에 불과하다.)
따라서 『사회주의 경제로의 이행』이라는 제목 하에 수록된 글들에서 명확하게 표현되지 못한 것은 생산력의 발전은 그 자체로서는 결코 분업의 자본주의적 형태도 다른 부르주아적 사회관계도 소멸시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결국 당시 언급되지 않았던 것, 그것은 프롤레타리아 독재 하에서 발전하고 -대중의 과학적 실험과 이론적 분석을 통해 - 올바르게 지도되는 계급투쟁만이 자본주의적 경제관계를 소멸시키는 것이 가능하다는 점이며, 이는 자본주의적 분업 그리고 착취·억압관계의 재생산을 가능하게 하는 이데올로기적·정치적 관계를 동시에 공격하는 것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점이다.
1962년부터 67년 사이의 기간에 현재 제기하는 내용들을 명확히 정식화하지 못했던 것은 당시 유럽에 널리 퍼져있었고, 레닌이 "경제주의"라 불렀던 특수한 형태의 맑스주의의 개념들로부터 강한 영향을 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경제주의와의 단절을 성취하고, 맑스주의의 혁명적 내용에의 조우를 가능하게 한 것은 중국의 문화혁명으로부터 얻은 교훈이었다. 이 맑스주의의 혁명적 내용은 유럽 노동운동을 특징짓는 경제주의적 실천에 의해 오랫동안 은폐되어온 것이었다.
『경제계산과 소유의 제형태』- 이 논문 속에서 소비에트적 사회구성체 분석의 준비를 예고하고 있었다 - 에서 나는 이전의 문제설정, 즉 상품·화폐관계의 소멸과 사회주의적 계획경제의 전진을 무엇보다 먼저 생산력의 발전(이 또한 단선적으로 고찰된 발전)에 의존하는 경향에서 벗어나기 시작하였으나 아직 이를 사회관계의 혁명화 속에서 볼 수는 없었다.
생산력 문제설정의 거부가 함의하는 바, 즉 사회관계의 변화를 일면적으로 생산력 발전에 종속시키는 사고방식에 대한 거부라는 것을 보다 체계적으로 사고하기 시작한 것은, 앞서 말했다시피 최근 수년간의 일이며 부분적으로는 문화혁명과 그 의미에 대한 고찰을 통해서였다.
이상과 같은 상황 하에서 1968년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나는 사회주의의 문제들에 대해서 몇 편의 논문을 썼다. 또한 같은 기간동안 소련에 대한 새로운 분석을 기획하였으며 이는 국가자본주의와 오늘날 소련의 지배적인 계급관계와 계급실천의 성격을 보다 명확히 파악하려는 것이었다.
1969년 초, 나는 이러한 분석을 명확히 하기 위한 최초의 글을 완성하였다.(미발간) 이 분석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결론을 도출했다. 즉 오늘날 소련은 국가적 소유의 외피 속에서 다른 자본주의 국가에 존재하는 착취관계와 유사한 착취관계가 존재하며 다만 그 관계의 존재형태가 독자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러한 독자적인 형태는 국가자본주의이며, 우리는 엥겔스이래 이러한 국가자본주의가 단순히 자본주의를 극한까지 밀고 나간 형태에 불과함을 알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결론에도 불구하고 완성한 글을 비판적으로 재검토하면서 역사적인 배경이 결여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과거와의 관련에 대한 논의 없이 소련의 현재를 이해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오늘날의 지배적인 관계와 실천을 지적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그것들이 어떻게 지배적으로 되는데 이르렀는가 또한 설명하지 않으면 안 된다. 따라서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실현한 세계최초의 나라가 어떻게 하여, 어떠한 투쟁과 어떠한 모순을 통해, 강대국으로서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다른 나라에 군대를 개입시키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 제국주의적 정책을 실행하는 국가로 변화하게 되었는가를 문제삼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결국 소련이 경험한 이러한 변화에 대한 분석은 현재에 상황에 대한 분석과 동일한 중요성을 갖는다. 과거의 변화에 대한 분석은 교훈의 원천이며 따라서 이를 통해 다른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동일한 길을 걸어 고전적 형태의 자본주의와는 완전히 다른, 그러나 억압적이며 침략적인 자본주의의 특수한 형태로 변형되는 것을 방지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현재의 시기는 - 여러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 이러한 과제가 달성되는 것을 필요로 한다. 그것이 설사 불완전하다 하더라도 이러한 노력은 우리의 현재인 과거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으며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어떻게 그 반대물, 즉 부르주아 반혁명으로 전화되어 버릴 수 있는가를 파악할 수 있게 한다.
소비에트의 경험이 확증하는 것은, 가장 어려운 것은 구 지배 계급을 전복하는 것이 아니라, 우선, 오래된 사회관계를 파괴하는 것이며 - 이러한 사회관계 위에 결정적으로 전복하였다고 여겨지는 착취체제와 유사한 또 다른 착취체제가 재건되어 질 수 있기 때문에 - 다음으로, 새로운 사회관계 내부에 오랫동안 존재해온 낡은 요소를 기반으로 이전의 사회적 관계가 재편성되어지는 것을 막아내는 일이다.
따라서 우리 시대에 있어서는 승리한 최초의 사회주의 혁명이 어떻게 궁극적으로 오늘날의 소련의 현실로 귀착하게 되었는가를 이해하는 것이 긴요하다. 만약 이러한 이해가 없다면, 중국혁명의 성공으로부터의 적극적이며 귀중한 교훈에도 불구하고, 프롤레타리아 혁명으로서 여기저기서 일어나는 시도들이 종국에는 사회주의와는 전혀 다른 어떤 것으로 귀결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에서 1969년에 완성한 원고가 스스로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되었다. 이 때문에 그 원고를 정리하여 출판하기 전에 소련의 과거를 분석하는 작업을 완성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판단을 하게 되었다. 이 작업에 착수해본 뒤, 나는 이것이 이전의 작업만큼이나 복잡한 일이라는 점을 깨닫게 되었다. 먼저 이 역사적 시기는 대단히 오랜 기간일 뿐 아니라 엄청나게 풍부한 사건과 투쟁으로 가득해 있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이 시기의 분석을 위해서는 소련의 독자적인 역사를 넘어 그 특수성의 존재형태인 모순의 일반적인 운동을 파악해내지 않으면 안되었기 때문이다. 만약 이러한 독자성을 그 자체로 분리하여 보게되면 단순한 우발성 혹은 우연성으로 보여질 수 있으며 소련에서 발생한 사건들로부터 우리에게 필요한 교훈을 얻어내기 어렵게 한다.
소련 역사에 대한 지식이라는 측면에서 도달하고자 한 목표는 이 나라의 역사에 대한 다른 어떤 것보다 정확하고 충분한 인식을 확보하려는 것이었다. 즉 10월 혁명이래 소련에서의 계급투쟁을, 그것이 비록 소련의 동시대사에서는 특정한 형태로 드러난다 하더라도 충분히 보편적인 의미를 갖는 분석으로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따라 소비에트 사회구성체가 경과한 결정적인 시기를 분석하고 그 각 시점에서 존재한 또는 지배적이었던 사회관계의 성격을 규정하고자 했다. 또한 비록 너무나 자주 현실에서 발생한 변화와는 전혀 다른 변화를 지향한 투쟁이 전개되곤 하였지만, 이러한 사회관계를 변화시키는 사회세력의 성격을 파악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작업은 오늘의 소비에트의 현실에 대한 분석 - 그 현실이 형성된 조건에 대한 충분한 인식 없이는 부분적으로밖에 이해할 수 없는 상태로 머물고 말 분석 -을 제공하는 것을 궁극적인 목표로 하며 이 책은 이러한 작업의 결과로서 제시되는 첫 번째 권에 해당한다.
따라서 앞서 논의된 분석은 1962년과 67년의 사이에 시작된 정정 작업의 연장선상에 있다.
이 정정 작업 및 소비에트 연방의 현재와 과거에 대한 구체적인 분석작업을 통해서 경직되고 단순화된 맑스주의의 개념에서 벗어나 사적유물론 및 변증법적 유물론의 혁명적 내용을 재구축할 수 있었다.
이 제1권에서는 이 작업성과의 극히 일부분만이 제시되어 있지만, 이 서문에서 그 대략적인 개관을 소개하려 한다. 비록 아마 독자들은 크게 관심이 없을 개인적인 지적 편력의 내용일지 모르나 이는 그것을 훨씬 뛰어넘는 중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앞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스스로 해방되고자 노력한 '단순화된 맑스주의'는 단지 개인적인 상황은 아니었다. 그것은 제 3 인터내셔날의 유럽 각 지부가 점차 레닌주의로부터 이탈하고 (30년대 초 내가 사회주의 문제에 대해 연구하기 시작한 이래) 점차 유럽에 군림하는 맑스주의로 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단순화된 맑스주의는 그 내부에 - 맹아로서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그것을 향한 하나의 가능성으로서 - 현대 수정주의의, 즉 하나의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를 조건으로 하고 있었으며 이는 소련의 안팎에서 자본주의적 사회관계를 강화하고 있다.
소련에서 일어난 사태를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하기 위해서 이 책이 피해야 할 경직된 맑스주의의 모든 측면을 분석하고자 하는 것은 무익할 일이 될 것이다. (이 책을 읽어나가면서 그것의 주요한 측면을 인식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의 마지막 권에 수록될 결론의 의미와 이하에서 수행될 정정 작업의 의미를 보다 잘 이해하기 위하여 경직된 맑스주의의 명시적이거나 함축적인 테제들을 서술하는 것이 필요하리라 본다.
사적유물론과 변증법적 유물론의 그 본래적 혁명성을 회복하기 위해 반드시 정정되지 않으면 안될 경직된 맑스주의의 세 가지 테제가 존재한다 : (1) 계급관계의 기초 (2) 생산력의 역할 (3) 국가의 존속과 이 사멸을 위한 조건들. 이하에서는 이 세 테제와 그것이 객관적으로 수행한 이데올로기적·정치적 기능에 대하여 서술하고자 한다.

계급관계와 소유의 법적 형태

우리가 깨뜨려야 하는 첫 번째 테제는 소유의 법적 형태를 계급 관계와 기계적으로 동일시하는 테제이며, 이는 특히 사회주의로의 이행의 문제를 다루는 데 관건이 된다. 이 테제는 스탈린이 초안을 작성하여 1936년 11월 25일 7차 소비에트대회에 제출한 소련 헌법 초안에 관한 보고서에 상세히 설명되어 있다. 이 보고서에서 스탈린은 1924∼1936년 동안 러시아에서 나타난 소유 형태의 변형을 개괄했다. 스탈린은 이 기간 동안 생산 및 교환수단의 사적인 법적 소유가 실제적으로 폐절되었고, 다른 두 형태 - 산업, 운송, 상업, 은행 등에서 지배적인 국가 소유와 농업에서 지배적인 집단농장 소유 - 가 이를 대체하였다고 설명했다. 스탈린은 다음과 같이 결론을 맺었다. "산업 영역에서 자본가 계급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며, 농업 영역에서도 쿨락(부농) 계급은 존재하지 않으며, 상업 영역에서 상인과 폭리 획득 자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모든 착취계급은 오늘날 제거되었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이제 노동계급과 소농계급, 그리고 "착취계급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므로 인민에 봉사할 수밖에 없는" 인텔리겐차만 존재한다. 결론적으로 스탈린의 보고서는 계급들(즉 농민, 노동자, 인텔리겐차)간의 경제적 정치적 모순은 쇠퇴하며 희미해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 테제의 수용은 소련에서 명백하게 계속되고 있는 모순들을 분석하는 것을 가로막는다. 이 테제에 따르면 프롤레타리아가 어떤 부류의 부르주아에게 권력을 잃을 수 있다는 점을 이해할 수 없는데, 왜냐하면 자본주의적 사적 소유가 재구성되지 않는다면 부르주아는 존재할 수 없는 것처럼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 테제는 프롤레타리아에게 이제 계급투쟁은 과거의 일이라고 믿게 함으로써 프롤레타리아를 무력화한다.
소유의 법적 형태의 변화가 계급들의 존재조건을 소멸하게 하는데 충분하지 못하다는 점은 자연스럽게 드러났다. 계급의 존재 조건은 맑스와 레닌이 종종 강조했다시피 소유의 법적 형태에 뿌리를 두는 것이 아니라 생산관계 즉 영유(appropriation)의 사회적 과정의 형태에 뿌리를 둔다. 프롤레타리아 독재와 국가 소유 또는 집단적 소유 형태의 존재는 자본주의적 생산관계를 폐절하고, 적대적인 계급인 프롤레타리아와 부르주아를 소멸시키는데 충분하지 않다. 부르주아는 다른 형태로 존재할 수 있으며, 특히 국가 부르주아의 형태를 취할 수 있다.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역사적 역할은 소유형태를 변화시키는 것뿐만 아니라 영유의 사회적 과정을 전화하여,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으로부터 공산주의 생산양식으로의 이행을 보장하는 것이다. 이는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며 오히려 말 그대로 맑스와 레닌으로의 복귀이다. 맑스에게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계급적 차이 일반의 폐절에 도달하기 위한 이행의 필연적 통과 점이었다. 레닌은 종종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시대 동안 계급들은 여전히 존재하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라고 상기시켰으며, "모든 계급은 변화를 겪는다", 따라서 계급 관계 또한 변화하며 계급투쟁은 "다른 형태"로 지속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사회주의 혁명의 임무는 법적인 소유관계를 전화하는 것으로 제한할 수 없으며, 근본적인 것은 생산관계를 포함하여 사회적 관계 전반을 전화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레닌은 "혁명을 시작하는 것은 상대적으로 쉽지만, 혁명을 지속하여 완수하는 것은 더욱 어렵다"라고 자주 언급하였다. 따라서 사회주의로의 이행은 불가피하게 역사의 오랜 기간을 필요로 하며, 수년 내에 달성될 수 없다.
소련 사회의 변화와 소련에서의 (법적인 소유형태가 어떤 변화를 겪지 않더라도) 부르주아 독재의 재확립의 가능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단지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존재하며 국가소유 및 집단농장 소유가 지배적이기 때문에 착취계급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테제를 버려야 한다(그 테제에 따르면 프롤레타리아는 어떤 계급에 대하여 독재를 행사해야 하는가?). 그리고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곧 "계급투쟁이 새로운 형태로 지속되는 것"이라는 레닌의 개념으로 돌아가야만 한다.

생산력발전의 우위

맑스주의를 단순화한 두 번째 테제는 생산력 발전의 우위에 관한 것으로, 이는 1930년대 제3인터내셔널의 유럽 지역에서 밀어닥쳤다. 이 테제는 생산력의 발전을 "역사의 추진력"으로 등장시켰다. 일정 기간 동안, 이 테제의 수용은 소비에트 사회형성(social formation)의 모순을 "설명"할 수 있다는 환상을 품게 하였다. 이 설명에 따르면, 계급투쟁은 사멸하기 시작하였거나 심지어는 적대적 계급의 소멸과 함께 끝난 것으로 여겨졌다. 이 테제의 가장 일반적인 형태는 1938년 스탈린의 에세이 "변증법적 역사적 유물론"에 담겨있다. 스탈린은 다음과 같이 썼다. "먼저 사회의 생산력이 변화, 발전하면 그 다음에 이러한 변화에 의존하여 그리고 생산력에 부합하여 생산의 인간적 관계, 경제적 관계가 변화한다."
이 테제는 - 적대적 계급이 존재하는 사회인 한에서 - 계급투쟁의 역할을 부정하지는 않지만, 이차적 수준으로 격하한다. 계급투쟁은 생산력의 발전을 방해하는 생산관계를 분쇄하는데 핵심적으로 개입하며, 따라서 생산력 발전의 요구에 적합한 생산 관계를 낳는다. 실제로 위에서 언급한 문단에서 스탈린은 혁명적 과정과 독립적으로 새로운 생산관계가 등장할 수 있다는데 동의하였다. 그는 다음과 같이 썼다. "새로운 생산력의 등장과 이에 조응한 생산관계의 등장은 구 체계로부터 분리되어 나타나는 게 아니다. 이는 구 체계의 소멸 후에 등장하지만 그 내부에서 등장한다."
혹자는 맑스에게서 이와 유사한 문제 틀을 암시하는 문구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맑스의 전반적인 작업은 역사의 추진력이 계급투쟁이며, 계급이 존재하는 한 계급간의 투쟁에 의해 사회적 관계가 전화한다는 점을 보여준다. 또한 사회주의적 생산관계는 오직 계급투쟁을 통해서만 가능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이와 마찬가지로 레닌이 멘셰비키처럼 생산력의 발전을 주로 강조하는 개념을 따랐다면, 그는 "제국주의 사슬의 약한 고리" 이론을 정식화하지 못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개념에 따르면 생산력이 고도로 발전한 가장 산업화한 국가가 아니라면 혁명이 일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생산력 우위 테제는 역사유물론의 엄격한 개념을 가로막고 부정확한 정치적 정식을 받아들이게 한다. 예컨대 다음과 같은 스탈린의 정식이 그러하다. "만약 정책의 오류가 아니라면, 프롤레타리아 당은 강령을 작성할 때에나 실천적 활동에서나 반드시 생산력 발전의 법칙과 사회의 경제법칙을 일차적으로 따라야 한다." 이러한 생산력 개념을 역사유물론에 짜 맞추기 위해서 틀림없이 많은 곤란이 발생했지만, 이는 필연적인 결과였다.
앞서의 테제들간의 관계는 다음과 같은 스탈린의 저작에서 찾아볼 수 있다. "사회주의 체계 하에서 생산관계의 기초는 생산수단의 사회적 소유이다. 소련에서 더 이상 착취자와 피착취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소련에서 생산관계는 생산력의 상태와 완벽하게 일치한다." 이러한 정식화로부터 나타나는 난점 중의 하나는 (이 테제에 따르면 생산력과 생산관계가 완전히 일치한다) 경제적 기초의 두 요소들간의 모순의 가능성을 모두 제거한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1952년 스탈린은 노트킨(A. Ya. Notkin)을 비난하기 위해서 초기의 정식을 부분적으로 수정해야만 했다. 노트킨은 스탈린의 정식을 말 그대로 "완벽한 일치"로 해석했기 때문이다. 스탈린은 초기의 정식이 단지 다음과 같은 사실을 언급한 것이라고 말했다. 즉 "사회주의 사회는 뒤떨어진 생산관계를 생산력의 성격과 일치하도록 적절한 조치를 취할 수 있다. 사회주의 하에서는 저항을 조직할 수 있는 쇠퇴하는 계급[부르주아]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소련에서 착취계급 및 피착취 계급의 소멸과 생산력 발전의 우위라는 두 테제는 생산관계를 전화시키기 위한 조직적 행동을 봉쇄하는데 있어 이데올로기적이며 정치적으로 기여했다. 생산관계의 전화는 계급관계의 재생산의 기초인 영유 과정의 기존 형태를 파괴하고, 경영 기능과 실행 기능의 사회적 분업,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분리, 도시와 농촌의 차이 및 노동자와 농민의 차이 등을 배제함으로써 새로운 영유 과정을 건설하는 것이다 ― 즉 계급들의 존재의 객관적 기초를 파괴하는 것이다. 그러나 위의 테제들은 사회주의 덕분에 계급이 소멸되었고, 생산관계가 생산력에 완벽하게 일치하며, 모든 모순들이 곧 소멸할 수밖에 없다고 가정한 것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소련의 프롤레타리아가 해결해야 할 근본적인 문제는 생산력을 최대한 빨리 증대시키는 것뿐인 듯 여겨졌다. 즉 "사회주의의 물질적 기초"를 건설하면 이는 생산관계와 상부구조의 발전을 보장한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당시의 슬로건은 "기술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 "가장 발전된 자본주의 국가를 따라잡고 뛰어넘자"였다. 따라서 중국 공산당이 [흐루시초프의 가짜 공산주의와 세계사적 교훈]이라는 출판물에서 "스탈린은 사회주의 사회에서의 계급투쟁의 법칙을 잘못 이해함으로써 맑스-레닌주의의 변증법으로부터 벗어났다"고 말하면서 자신의 정당성을 주장한 것은 이해할만한 일이다.
실제로 계급투쟁의 법칙에 대한 잘못된 이해는 단지 스탈린에게만 해당되는 게 아니다. 다른 많은 문제와 마찬가지로(예컨대, 당 내부의 투쟁과 통일의 관계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의 문제), 스탈린은 볼셰비키 당의 지도층의 견해를 단지 체계적인 방식으로 표현했을 뿐이다. 스탈린의 역할은 소련 사회와 볼셰비키 당내에서 진행된 변화들을 반영하여, 그 방향성을 집중시키고 수행한 것이다. 이는 당이 점차 조류에 대항할 수 있는 능력 즉 이론과 실천을 혁명화할 능력을 상실하게 된 사실에 기인하였다. 설사 스탈린이 몇몇 순간에 당중앙위원회 및 정치 국의 우려와 의혹을 무시한 적이 있지만, 그 때에도 그는 엄격한 의미에서 "시류에 반대"하지 않았으며, 당의 지도층에서 우세한 개념으로부터 최종 결론을 추론했다. 스탈린의 이러한 의지는 끝까지 지속되었고, 이 때문에 스탈린이 명백하게 당의 "위"에 서있는 것처럼 보였고, "그의" 몇몇 생각이 명확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몇몇 경우를 제외하곤 스탈린의 생각은 고유한 것이 아니었으며, 그가 당 주류를 지지하였기 때문에 특별한 권위를 획득한 것이었다. 바로 이것이 소련 사회에서 계급투쟁 문제에 대한 이해를 두고 실제 벌어진 일이었다.
사실 스탈린과 같은 방식의 계급투쟁의 이해는 제3인터내셔널의 유럽 지역의 이데올로기적 정치적 사고를 지배하였고, 소련의 계급과 계급투쟁의 존재를 숨기는데 일조 했고, 따라서 소련의 중대한 곤란의 원인을 계급모순이 아닌 "다른 곳"에서 찾도록 고무했다. 생산력 우위에 관한 테제는 "다른 곳"이 어딘지 그 방향을 지시했다. 즉 생산력이 충분히 발전되어 있지 못하므로, 소련은 거대한 어려움에 직면하여 있고, 따라서 사회주의 건설을 위한 볼셰비키의 과거 강령으로부터 벗어나는 일련의 조치들을 취해야만 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조치는 임금 차별의 확대, 보너스 체계의 발전, 기술자에 대한 특혜의 증대, 기업 경영자의 개인적 권위의 강화 등이었다.
모든 세대와 나의 세대에게 두 테제는 일종의 "명백성"을 누렸고, 우리는 현실의 모순과 문제를 분석할 수 없게 만들었다. 모순과 문제가 무시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 "해결책"은 뒤로 미루어졌고, 생산력의 순조로운 발전에 따라 해결될 것이라고 여겨졌다. 그 테제들의 "명백성"을 올바르게 평가하기 위해서는(현대 수정주의와 트로츠키주의는 이 테제를 사실상 계속 유지하고 있다), 우리는 그 테제가 단지 스탈린 개인뿐만 아니라, 당대의 유럽 맑스주의 운동의 가장 혁명적인 분파들에 의해서도 표명되었다는 점을 상기해야 한다.
여기에서 두 테제에 관한 트로츠키의 발언을 언급하는 게 적절할 것이다. 트로츠키의 두 테제에 관한 태도는 스탈린에 가까웠지만, 결론은 매우 달랐다. 스탈린과 같이, 트로츠키 역시 두 테제를 수용했다. 그는 생산수단의 집단화 또는 국유화가 이루어진 후, "사적 소유"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므로 "소유계급은 사라졌다"고 말했다. 트로츠키는 "국가 소유"의 수립에 따라 어떤 관료도 그의 자손에게 물려줄 증서나 상품을 획득할 수 없으므로 소련에서 "소유 계급"은 사라졌다고 덧붙였다. 나아가 그는 "문명사회에 있어서 생산관계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법이다"라고 말한다. 이는 곧 생산관계가 상부구조에 속하며 생산과 재생산의 사회과정 속에서 확립되어진 관계에 조응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우리는 또한 트로츠키에게서 공산주의 강령은 반드시 "생산의 발전의 법칙들로부터 촉발된다"고 하는 스탈린의 정식의 희화화된 형태를 찾아볼 수 있다. 예컨대 그는 "맑스주의는 진보의 근본적 원천으로서 기술의 발전을 설정하며 생산력의 동학에 기초하여 공산주의 강령을 수립한다."라고 쓰고 있다.
이러한 유사성 때문에 스탈린과 트로츠키가 각각 도달한 결론의 격차는 한층 현저한 것으로 보인다. 스탈린에게 있어서 사회주의는 본질적으로 제1차 5개년 계획 직후 실현된 것으로 간주되었으나 이러한 결론은 트로츠키로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중요한 이유가 있다. 즉 트로츠키에 의하면 한편으로 '일국에서의 사회주의'란 문제가 될 수 없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 이 점에 매우 주목할 필요가 있는데 - 소련에서는 노동의 성취된 생산성(즉 노동의 생산력)이 지나치게 낮기 때문에 사회주의가 실현되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트로츠키는 동일한 법적 형태의 사회적 내용의 차이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은 인정하나, 이러한 편차가 별개의 생산관계에 기반한 것이 아니라 (따라서 이 주제와 관련한 그의 저작 속에서 생산관계 개념은 사실상 결여되어 있다) 단지 '노동의 생산성이 도달한 수준'에 기반한 것이라고 본다. 이에 따라 그는 "모든 사회조직의 '근원'은 생산력 안에 존재한다"고 단언하게 된다.
결국 현재 문제가 되는 논의의 관점에서 보면 트로츠키의 견해를 특징짓는 것은 생산력 발전의 우위성 테제를 그 극단까지 몰고 간 것이라 할 수 있으며 이는 특히 다음의 두 관점에서 그러하다.
첫째 생산력 수준에 대해 언급했던 내용으로부터, 트로츠키에게 있어서는 "부르주아적 분배기준"이라는 개념을 도입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이러한 기준은 낮은 생산력 수준 때문에 소련에 필요하게 되는 것이지만 그 존재는 사적 소유의 부활에 이르게 될 수도 있는 것이었다. 국가적 소유 내부에 있어서 부르주아 지배의 부활이라고 하는 관념은 이렇게 트로츠키에 있어 암묵적으로 거부되고 있으나 그가 이러한 거부를 정당화할 수 있는 어떤 논거를 제출하지는 못했다.
둘째 생산력 발전에 트로츠키가 부여한 역할은 매우 광범위한 범위에 해당하는 것으로 그것은 계급투쟁을 대체할만한 것이었다. 이 때문에 트로츠키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체제의 힘과 안정성은 최종적으로는 노동의 상대적 생산성에 의하여 결정된다. 자본주의에 대해 우월한 기술을 보유하는 사회주의 경제는, 말하자면 자동적으로 사회주의적 발전을 확실히 보증 받는 것이다…"

스탈린의 정식화와 함께 트로츠키의 내용에 대해 이처럼 길게 인용한 것은 - 그것으로부터 나온 서로 상이한 결론에도 불구하고 - (소련에 있어서 대립하는 계급의 소멸과 생산력 발전의 우위성에 대한) 두 가지 테제가 어느 정도까지 1930년대의 '유럽 마르크스주의'의 상투적 어구였는가 (이는 비교적 최근까지 계속되고 있다)를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이러한 상투적 내용을 수용하는 것 자체가 사회의 변화를 계급투쟁과 관련하여 분석하는 것을 막아온 것이다. 뒤에서 이러한 두 가지 테제가 매우 장기간에 걸쳐 그 특정한 이데올로기적, 정치적 역할을 해온 이유에 대한 견해를 서술하고자 한다. 그러나 이에 대해 다루기 전에 앞의 두 가지 테제와 연관되어 있는 세 번째 테제에 대해 논의해보기로 한다.

국가의 존재와 착취계급의 소멸

착취계급의 소멸이라는 테제를 수용함으로써 발생하는 곤란 중의 하나는 소비에트 국가의 존재와 관련된 것이다. 소비에트 국가는 비국가 즉 코뮌 - 엥겔스가 베벨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택한 정식화이며, 이후 레닌이 계승했다 - 으로 전화하는 이행 형태가 아니었다. 소비에트 국가는 점차 대중으로부터 분리되었고, 자신의 "비밀"을 보호하기 위한 경계심에 가득 찬 국가장치를 보유하고, 관료적인 방식으로 기능하며, 위계 적인 계층으로 구성되었다. 맑스주의의 관점에서 보자면, 소비에트 국가의 존재 형태와 국가장치의 성격은 심각한 문제를 만들어냈다. 왜냐하면, 역사적 유물론에 따르면 이러한 유형의 국가는 오직 계급적대의 기초 위에서만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국가장치의 강화는 계급적대의 심화의 징후인 반면, 국가장치의 소멸은 엄격한 의미에서의 (억압 기구로서의) 국가의 소멸과 대중의 자치 기관으로의 대체를 동반한다.
스탈린은 소련 공산당 8차 대회에서 이 문제에 관한 유명한 보고서를 제출했다. 스탈린은 연설을 통해 {반 뒤링}에서의 엥겔스의 정식을 상기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종속 상태에 묶여 있는 사회계급이 더 이상 없게 되자마자, 그리고 계급지배와 생산의 무정부 상태 속에서 충돌과 폭력을 수반하는 개인적 투쟁이 제거되자마자, 억압은 더 이상 잔존하지 않으며, 특수한 억압 권력으로서의 국가는 더 이상 필요하지 않게 된다."
이 문제를 풀기 위해 스탈린은 "국가에 관한 맑스주의 교리의 일반적 명제 중 일부는 불완전하게 세워졌고 부적합하다"고 선언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는 소련은 국가와 거대한 국가장치를 필요로 하며, 이는 내부의 사회적 관계 때문이 아니라 외부적 요인 즉 자본주의의 포위 때문이라고 주장함으로써, 맑스주의 명제의 부적합성을 보완해야한다고 제안했다. 따라서 스탈린은 다음과 같이 정식화했다.

"소련 내부의 군사적 억압 기능은 사라졌다. 억압 기능을 대체하여 국가는 인민 소유를 도적질하는 자들로부터 사회주의 소유를 보호할 기능을 획득했다. 외국의 공격으로부터 소련을 방어하는 기능도 완전히 남아 있으며, 결과적으로 적군과 해군 역시 완전히 존속하고 있다. 또한 형벌 기관과 정보 기구도 완전히 남아 있는데, 이는 외국 정보기관이 침투시킨 스파이, 암살자, 파괴자를 탐지하고 처벌하기 위해 필수적이다."

외부의 위험을 다루기 위해 국내의 억압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거대한 물리력을 요구하는 것으로부터 발생하는 이론적 문제와는 별도로, 대중조직이 "외국 정보기관이 소련에 침투시킨" 적대적 요소들을 탐지하기 위한 임무를 대처할 때, 그리고 원칙적으로 대중이 그러한 요소들과 전혀 협력하려 하지 않을 때, 국가 장치를 유지하기 위한 이 테제는 더욱 구체적인 난점에 부딪친다. (억압의 규모가 알려지자마자 이는 모든 차원에서 분명히 드러났다―"억압"이라는 점잖은 표현은 수백 만 명의 체포, 투옥, 추방을 의미하였다.)
만약 그것들이 단지 '잠입한' 스파이, 공공재산의 절도범과 횡령자, '유약함'과 '허영심', '무기력'으로부터 외국의 스파이망에 포섭된 사람들을 체포하기 위해서일 뿐이라면 그토록 광대한 강제적 억압기구들이 만들어진 이유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문제를 그렇게 다루는 한 이 질문에 답하는 것을 불가능하다. 반대로 이를 외국 스파이 조직의 활동이나 소비에트 시민의 무기력과 관련짓는 것이 아니라, 가차없고 맹목적인 계급투쟁과 연관하여 사고한다면 억압의 광범위함, 억압의 여러 형태와 그것들에 드러난 모순들을 보다 명확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트로츠키도 또한 계급억압의 소멸에 대한 테제를 받아들인 후, 국가장치의 존재를 설명하기 위해 스탈린과 동일한 문제에 부딪치게 된다. 이 문제에 대해 트로츠키가 제기한 해법은 지극히 경제적인 것이었다. 그는 앞에서 인용한 엥겔스의 정식을 다시 한번 인용하여 그 속에서 '개인적 투쟁의 존재'를 분리한다. 즉 이 투쟁이 소련에서 소멸되지 않고 있기 때문에 국가가 잔존하고 있는 것이며, 따라서 국가는 혁명 뒤에도 또한 존재할 수 있으며 "미국에 있어서조차 가장 발전한 자본주의의 기초 위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다음과 같은 기묘한 세부적인 사항도 덧붙이는 것이 좋을 것이다: 트로츠키는 "소비에트(즉 명확히 대중의 자기관리 기관이며 '비국가'인 - 저자)는 사회조직이 사회주의적이 되는 정도에 상응하여 소멸하여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비록 외재적인 위협과 소비에트 시민의 '무기력함'으로부터 소비에트 국가의 존재형태를 설명하는 것이 불만족스럽다할지라도 앞의 두 테제에 대한 수용은 이러한 세 번째 테제의 인정을 불가피하게 한다.
이렇게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검토해보면 앞에서 논의한 테제들을 수용한 사람들(최근까지, 최소한 유럽에서는, 10월 혁명이 인류의 역사에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는 점을 인정하는 압도적인 다수)이 놓여져 있던 상태, 즉 소비에트 사회에 대한 맑스주의적 분석이 거의 불가능한 상태가 어떠한 것이었는지 독자들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분석의 핵심은 계급관계와 계급투쟁의 효과를 간과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그것이 결정적으로 중요한 관계이고 투쟁이며 또한 계급 없는 사회, 즉 공산주의 사회가 건설될 때까지 지속될 것임을 일깨워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과거에 대한 분석은 여전히 다음의 질문에 대해 명확한 답을 하고 있지 못하다: 왜 경제주의적 문제설정 - 이는 앞서 논의한 테제들을 부분적으로 구성한다 -은 그렇게 오랜 기간동안 그리고 현재까지도 여전히 그 특정한 이데올로기적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가?

I. '생산력' 문제설정의 지배

이 문제에 답변하는 데 있어서 (경제주의적 문제설정의 하나의 측면인) 생산력의 문제설정은 1880∼1914년에 이르는 기간에 유럽노동운동 뿐만 아니라 러시아 혁명 역사의 이행된 형태 - 특히 1920년대 말로부터의 사회주의 건설의 최초의 시도 동안에 떼려야 뗄 수 없는 방식으로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었다는 점을 반드시 상기해야 한다. 당대의 이와 같은 사회주의 건설의 시도가 갖는 위상은, 이미 두 차례의 세계대전과 그보다 작은 규모의 수많은 전쟁들을 만들어낸, 그 시기 인간에 의한 인간의 착취의 완성된 체계로서 자본주의를 인식하게된 많은 이들에게는 그 시도와 관련된 ("생산력"이라는) 이론적 문제설정만으로도 크게 의미가 부여되는 것이었다.
이는 그러나 단지 반쪽 짜리 대답일 뿐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여전히 사회주의 건설의 첫 번째 시도와 생산력 문제설정의 핵심에 놓여있는 테제들 사이에 왜 이러한 역사적인 연관성이 형성되었는지 물을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 질문의 두 번째 측면에 답하기 위해 이 서문에서는 몇 가지 답변의 요소를 제시하고자 한다. 이 요소들은 그것이 소련의 사회구성에 대한 분석과 관련되어 필요한 한에서는 이 책과 후속 책에서 그 자체로 발전되어 다뤄지게 될 것이다.

(a) 볼셰비키 당 내에서의 경제주의에 대한 투쟁의 중단

답변의 첫 번째 요소는 볼셰비키당 자체의 이데올로기와 관련된 것이다. 볼셰비키당은 자신의 혁명활동과 레닌의 경제주의에 대한 이데올로기 투쟁을 통해 광범위한 변화를 경험했음에도 불구하고, 레닌의 이탈로 경제주의에 대한 투쟁이 단지 당내의 이데올로기 투쟁의 한 특징으로만 남게 되면서 자신의 모든 경제주의적 관념을 제거하지 못하고 있었다.
레닌에 의해 모든 사회적 변화의 해석을 경제 이론으로 환원하는 것을 추구하는 맑스주의의 한 개념으로, 단지 비판적으로 정식화된 경제주의라는 용어는 제고되어야 한다. 그러한 개념은 다양한 형태로 나타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체계화되지 않으면 그 비판은 단지 부차적인 역할을 하게되며 언제라도 단지 "경제주의에 대한 경향"이라고 말할 수 있는 가능성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경제주의는 역사발전의 원동력을 생산력으로 정의하며 그것의 가장 주요한 효과는 경제적 모순의 직접적이고 즉각적인 결과로서만 계급간의 정치적 투쟁을 상정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경제적 모순은 그 자체가 사회적 변화를 "발생시킬 수 있는 것"으로 간주되고, '"시기가 무르익으면" 혁명적 투쟁이 발생한다고 보게된다. 그러므로 노동자 계급은 혁명을 향해서 단지 자발적으로 나아가게 되는 것으로 나타나게 된다.(그러므로 당연히 프롤레타리아 당을 만드는 것은 필수적인 것이 아니게 된다) 이러한 문제설정은 프롤레타리아트보다 착취 받고 억압받는 계급의 사회주의를 향한 투쟁이 가능하다는 점을 부인하는 경향을 갖는다.
분석의 또 다른 수준에서, 경제주의는 생산의 물적 수단 자체를 생산력으로 규정하는 경향이 있으며, 따라서 이러한 관점에서는 생산력이 주요하게는 생산자들 자신으로 구성되는 것이라는 점을 부정하게 된다: 따라서 경제주의는 사회주의 건설의 주요한 역할을 노동자계급의 주도권에 두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생산수단과 기술적 지식의 축적에서 찾는다.
경제주의는 다양한 형태로 나타날 수 있으며 모순적인 형태로조차 나타날 수 있다. 계급투쟁의 국면에 따라 이는 좌익적 혹은 우익적으로 드러날 수도 있다.(사실 그것은 늘 양자의 성격을 모두 갖는다) 볼셰비키당 내에서 경제주의는 1918년과 1920∼25년의 반대파들(그 우익적 성향이 뚜렷했던 노동조합 반대파를 포함하여)에 의해 특정한 태도를 형성하였다.
볼셰비키당 내에서의 경제주의의 '좌익-우익적' 효과 중 전시 공산주의시기에 부하린, 트로츠키, 프레오브라진스키에 의해 취해진 입장이 반드시 언급될 필요가 있는데, 이들은 국가강제의 방식(노동의 군사화, 위로부터 부과되는 훈육, 농업생산물의 징발과 배급)을 일반화하는 방법에 의존하여 "공산주의로의 직접적 이행"을 구상하였으며, 이는 소비에트 국가를 "노동자 국가"로서 추상적으로 규정한 결과 "프롤레타리아의 자기훈육"이라는 표현으로서 정의된다.
경제주의의 이러한 형태는 경제의 집중화된 관리를 "공산주의"의 핵심적 요소로 본다. 이것의 우익적 경향은 노동자들을 억압적 장치에 종속시키려 하는 것으로 드러난다. 그러므로 이 정반대 입장에 선 좌익적 경향은 최소한 잠재적인 의미에서 노동자 계급의 통일과 다른 억압받는 계급과의 단결이 (경제적인 과정 속에서) 모든 노동자들의 이해의 집중을 통해 자발적으로 달성될 수 있다고 본다. 그러나 사실상 이 두 개념은 모두 이데올로기적, 정치적 계급투쟁의 결정적인 역할과 (이러한 투쟁을 승리로 이끌기 위한) 올바른 정치적 노선에 의해 지도되는 맑스-레닌주의 정당의 필수불가결함을 거부한다. 전자의 경우는 프롤레타리아트의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지도력을 국가의 강제로 대체하려 하고 후자의 경우는 이러한 지도력을 단순히 노동조합의 활동으로 대체해버린다.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이러한 두 맑스주의의 해석은, 전시공산주의가 종결될 즈음, 한 볼셰비키 세력이 "노조의 국가화"(statization of the trade unions)를 주장하도록 이끄는 한편 또 다른 이들의 "국가의 노조화"(trade unionization of the state)라는 주장이 나오게 하였다.
여기서 경제주의에 대해 이처럼 길게 논의하는 것이 필수적인 것은, 경제주의가 제 3 인터내셔날의 서유럽 부위(section)에서 점차 강력한 역할을 해왔기 때문일 뿐만 아니라 경제주의의 존재가 한 형태에서 또 다른 형태로, 지속적으로 노동운동이 새로운 문제로 직면하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맑스주의와 맑스주의자들이 '전적으로 그리고 최종적으로' 경제주의를 제거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환상이다. 경제주의는 사실상 맑스주의 내에서 부르주아 이데올로기가 취하는 형태이며 이러한 이데올로기는 계급들 그 자체가 소멸할 때만이 소멸할 수 있는 부르주아적 사회관계 안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경제주의에 대한 투쟁은 따라서 필연적으로 맑스주의 역사의 일부이며 이데올로기적 계급투쟁의 영역에서 취해진 중요한 형태이기조차 한 것이다. 맑스와 레닌은 그들의 저작에서 이러한 투쟁을 수행하였다.
레닌의 실천은 볼셰비키당이 경제주의의 가장 노골적인 형태로부터 단절하도록 한 것이었으나 경제주의적 경향은 볼셰비키당 내에서 매우 강하게 지속되었다. 이는 레닌이 종종 그의 입장을 설득하기 어려웠던 이유이기도 하다. 이는 또한 경제주의가 NEP가 수행되는 방식 속에 깊이 각인되어 있었고, 소련에서 집단화와 산업화의 개념이, 기술의 축적과 취급에 대해 가장 중요한 역할을 부여하는 (마치 그것이 계급들 '위에' 존재하는 것처럼) 것으로 이해되고 있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지금까지 언급된 것은 최초의 사회주의 건설의 시도와 경제주의간의 역사적 연관에 대해 아직 부분적으로만 해명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연관에 대해 보다 전면적인 인식을 확보하기 위해서 다음의 두 가지 내용이 검토될 필요가 있다: 첫째 경제주의의 사회적 토대, 둘째 5개년 계획 시기의 경제주의적 테제들의 명백한 부활.

(b) 경제주의의 사회적 토대

그 타당성에 대한 논쟁의 여지를 일단 접어두고, 경제주의는 그 자체로 맑스주의 내부의 계급투쟁의 산물이라는 점을 상기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 점을 망각하는 것은 관념이 그 자신의 행위에 의해 발전하고 사회적 모순과 독립적으로 역사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가정하는 관념론에 빠지는 것이다.
그 본래적인 형태에서 경제주의는 제 2 인터내셔날 시기의 독일 사회민주당에서 발생했다. 그 우익적 변종들은 독일국가기구와 결합된 독일 사민당의 강력한 정치적 기구 및 노동조합의 존재와 관련되어 있다. 이처럼 강력한 기구를 갖춘 지도부로서는 그들의 조직적인 활동의 점진적인 전개와 노동자들의 요구에 의한 압력이 자본주의를 전복할 수 있는 조건을 창출할 수 있다고 믿는 망상에 빠지는 것이 가능했다. 그들은 더욱더 이러한 망상에 집착했는데, 이를 통해 그들은 혁명적 활동에 존재하는 위험을 감당할 필요없이 독일노동운동 안에서 그들의 입지를 강화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노동운동의 정치적 활동 그리고 노동조합 기구와 독일제국주의가 일부 노동자계급의 생활수준 향상을 보장하는 것이 가능했던 한에서 그리고 이러한 방식으로 표면적으로는 몇 가지 맑스주의적 내용으로 가장한, 이후 전 독일노동운동에 현저한 영향을 발휘하게 된 부르주아 이데올로기가 등장하게 되었다. 역으로 합법적인 노동운동의 발전이 불가능했던 짜르 체제 하의 러시아에서 멘셰비키의 경제주의는, 철도노동자와 같이 특권화된 일부를 제외하고는 노동계급에게 아무런 반향을 일으키지 못했다.
볼셰비키 당의 경우, 노동조합지도자들이 많은 경우 우익적 경제주의의 신봉자였으며, 10월 혁명 이후 당내에서의 행정직과 경영, 계획, 재정 부문 관료직 당원 층의 증가는 새로운 형태의 경제주의의 성장을 가져왔다.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이러한 새로운 형태들은 계급투쟁 상황과 경제주의에 사회적 기초를 제공할 수 있는 그러한 노동자층의 특징에 따라 우익적 혹은 좌익적 외양을 갖게 되는 듯 하다.
이후 소련의 공산당에서 성장한 경제주의는, 노동운동이 1차 세계대전 이전의 독일노동운동의 경제주의와 유사한 형태를 발전시키는 것이 가능했던 국가들에서 건설된 공산주의 인터내셔날의 일부에서 호응을 얻게된다.

(c) 5개년 계획의 수행동안에 나타난 경제주의적 테제들의 명백한 부활

위에서 언급된 저작들 속에서 특별히 체계적인 방식으로 표현된 경제주의적 테제들의 명백한 부활은 두 가지 측면의 고려를 필요로 한다: 러시아 사회와 볼셰비키 당의 격심한 진화의 결과 그리고 스탈린이 상술한 이러한 테제들을 통해 획득된 새로운 권위와의 연관관계.
첫 번째 측면은 명백히 결정적인 것이다. 처음에는 사실상 단지 잠재적이기만 했던 개념들-생산력의 가른 가능한 발전을 통한 사회주의 건설로 규정되는-의 정착을 가능하게 한 것은 소비에트 러시아와 볼셰비키 당이 1917년 10월과 1929년 초 사이에 겪었던 많은 변화였으며 이는 특히 산업부문에서, 그리고 노농 동맹의 이용을 통해서조차 이루어졌다.
1920년대 말, 주도적이게 된 형태들 속에서 경제주의적 테제들은 다양한 반대입장의 경향들로부터 결코 근본적으로는 도전 받지 않았다. 반대입장들이 도전한 것은 단지 그것들이 근본적으로 도전하지 않았던 일반적 지침(경제주의)에 기반한 정치적 혹은 행정적 사항의 구체적 조치 또는 일련의 조치들뿐이었다. 산업화가 지나치게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고 본 부하린의 반대조차, 단지 그가 과도하다고 본 최초 산업화시도의 장기적으로 부정적인 경제적 결과에 대한 경고에 불과했다. 부하린의 주요 주장은 5개년 계획을 통해 목표로 하고 있는 동일한 산업화는 보다 소규모의 시도를 통해서만이 좀더 빠르게 성취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그가 1929년부터 시행된 집단화의 형태가 농촌에서 사회주의적 관계의 건설을 가능하게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점을 인정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러한 종류의 산업화가 과연 사회주의 건설의 필요에 충족되는 것인가 하는 점에 대해서는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다.
5개년 계획을 통해 정착하게 된 경제주의적 개념들이 그 시기 볼셰비키 당내에 깊숙이 자리잡고 있었던 경향들에 상응하는 것이었다는 점이 사실이라면, 문제의 경제주의적 테제들의 스탈린에 의한 명백한 정식화는 스탈린의 이러한 개입이 갖는 특별한 권위에 의해 똑같이 특별한 무게가 실리게 되었던 것 또한 분명한 사실이다. 여기서 "스탈린 문제(the question of Stalin)"라고 불려온 것의 한 측면이 부각된다.
이 문제를 제기하는 데 있어(이 문제는 1924년부터 1953년의 전시기의 분석과 관련한 이 책의 두 번째 권 전까지는 적절하게 검토될 수 없다), 무엇보다 명심해야 할 것은 레닌과 스탈린이 당내에서의 이데올로기 투쟁 문제에 있어 매우 다른 태도를 가졌다는 점이다.
레닌은 대개 이데올로기 투쟁을 항상 전면에 내세웠다. 그는 결코 '시류에 반대하는' 것에 주저하지 않았고, 그 결과 중앙위원회에서 종종 소수파가 되었다. 여기에 중요한 문제를 한가지 덧붙이자면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는 볼셰비키 당이 '레닌주의 당'이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오류인가를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다시 부분적으로 서술할 것이다.)
스탈린은 자신의 주도적인 역할을 다르게 보았다. 그가 전력을 다한 주요한 문제는 (특히 1934년까지) 무엇보다 대변인으로서 활동하면서 당내에 존재하는 주요한 경향들을 표명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당 개념들과 무연한 그의 "인격(personality)"을 당에 부과했다는 것을 이유로 스탈린 비판에 초점을 맞추는 논쟁적인 공격들은 그다지 근거가 없다. 그것들은 매우 다른 어떤 것, 즉 스탈린이 확고한 엄격함으로 그 자신 뿐 아니라 당원들의 대부분들에 의해 요구된 효과적인 조치들을 끈기 있게 추구했던 것과 관련된 것이며 여기에는 그러한 조치들에 반대했던 대부분도 포함된다.
더구나 당은 지속적으로 변화하고 있었다: 1929년에 당내에서 크게 작동하고 있던 사회적 힘은 1917년에 존재했었던 것과는 매우 달랐으며, 1934년과 1952년에는 또 달랐다. 이러한 변화들은 그 자체로 소비에트 사회의 변화와 깊이 관련된 것이었다.
그러나 바로 이 점이 두 번째로 고려되어야 할 사항인데, 그 자신이 당내에 존재하는 주요한 경향들의 대변인이 되면서, 스탈린은 이러한 경향들에 추가적인 무게를 싣게되었고, 그것들을 대단히 강화시켰다. 이는 1929년부터 확산된 경제주의적 개념의 경우 특히 그렇다.
자신이 지지한 테제들에 대해 스탈린이 부여한 추가적인 무게는 그 자신 권위의 결과였다. 이는 주로-사람들이 상상하기 좋아하듯이 - 스탈린이 볼셰비키 당 총서기였던 사실 때문만은 아니다. (이는 또한 그것이 사실일 때조차 결국 아무것도 해명하지 못하는 스탈린의 "인격"에 대한 일화들에 - 종종 그렇게 되듯이 - 호소하는 것이 아니라 설명되어야 할 문제이다) 그의 권위는 1930년대 초반부터는 거의 전 당적인 것이었으며, 스탈린의 특별한 이중적인 장점으로 여겨졌다: 소련에서 사회주의 건설의 구상을 포기하지 않아 왔다는 점 그리고 당이 보아왔듯이, 성공적인 결과를 가져온 정책들을 실행해왔다는 점.
레닌의 사후, 다른 볼셰비키 지도자들은 사적 자본주의로의 발전을 의미하게 될 NEP의 지속 또는 사회주의 건설의 주도적인 역할을 제출하지 않는 일정한 산업화 조치들에 동의할 준비가 되어 있었고, 스탈린은 레닌의 테제를 채택하여, 유럽과 세계의 다른 지역에서의 프롤레타리아 혁명에 의존하지 않고 소련에서의 사회주의 건설을 수행할 수 있다고 재확인하였다.
이러한 노선을 채택함으로서 그리고 그것으로부터의 논리적 귀결을 끌어내는 것에 목표를 둔 정책을 구성함으로서, 스탈린은 소비에트 노동계급에게 신뢰를 주고자 시도했다. 그는 단지 좋은 날을 기다리며 힘을 축적하기보다는 당에 목표를 제시했으며 이러한 방식으로 거대한 전환 과정의 시작에 공헌했다. 그것은 소련의 독립을 방어하기 위해 필요한 조건과 제국주의 진영의 분리의 증대를 창출하는 것이었으며, 이 결과 소련은 히틀러의 패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다. 산업화 정책은 10월 혁명의 횃불로서 계속 불타올랐으며 그들 투쟁의 승리의 결과로서 인민의 신뢰를 지탱했으며 따라서 객관적으로 중국혁명의 성공을 확신하게 하였다.
소련이 사회주의로 발전할 수 있다고 선언함으로서 스탈린은, 트로츠키의 주장과 대립하여 레닌 지위의 계승자로서 떠올랐으며, 그의 몇몇 저작들, 특히 마지막 저작은 이러한 가능성을 역설하는 것이었다. 이는 스탈린 권위의 한가지 원천이었으며 그가 제출한 테제들과 연관된 것이었다. 특히 2차 세계대전 직후, 스탈린이 누린 거대한 권위는 사실 그가 지지한 테제들뿐 아니라 소비에트 인민의 노력, 용기, 자기희생에 의한 것이었다. 소련의 산업이 건설되고 히틀러의 군대를 패퇴시킨 것은 바로 이러한 인민의 고통과 영웅적 행위에 의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 올바른 목표를 제시함으로서 이러한 노력과 투쟁을 이끈 것은 다름 아닌 스탈린이었다.
그러나 결정된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이어졌어야할 명확한 진로와, 취해졌어야할 구체적인 조치들의 측면에서 보면, 스탈린은 심각한 오류를 저질렀으며 그 시대에는 그것들의 정확한 성격이 즉시 드러나지는 않았다. 더구나 1920년대 말 소련과 볼셰비키 당의 상황에서 오류는 의심할 여지없이 역사적으로 불가피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오류들이 발생했고 그것들이 거대한 정치적 결과를 수반했다는 사실(특히 맹목적인 억압의 조치들이 사회주의 혁명의 실질적인 적은 살려두면서, 적뿐만 아니라 대중과 순수한 혁명세력까지 타격했다는 사실)은 세계 프롤레타리아에게 훌륭한 교훈을 제공하는 것이다. 이러한 것들이 마지막으로 보여주는 점은 자본주의에 대한 특정한 형태의 공격은 환상에 불과하며 오히려 정치 및 행정기구 내의 부르주아지들을 강화시키게 된다는 것이다. 레닌에 의해 언급된 - 매우 제한적이지만-전시공산주의의 경험과 비교되는 이 교훈들은 분명하다.
그러나 소련이 사적자본주의 및 생산의 전자본주의적 형태의 제거를 통해 몇 년 안에 거대한 규모의 변화를 달성했다는 사실은, 볼셰비키 당에 의해 제출되고 스탈린에 의해 구성된 테제들에 전례 없는 권위를 부여하는 것이다. 이는 소련 뿐 아니라 유럽 및 다른 지역의 혁명운동의 대다수가 가진 것으로 여겨지는 이러한 테제들의 '타당성'을 한층 강화시켜주고 있다.

(d) 유럽의 노동운동과 공산당 내에서의 경제주의

소련 외부의 또 다른 요인이 사회주의 건설에 있어 경제주의의 역할을 규명하는데 도움을 준다. 이 요인은 레닌이 볼셰비키 당내에서 투쟁해온 경제주의가 제 3 인터내셔날의 러시아 지역보다 유럽지역에 훨씬 널리 그리고 활발하게 보급된 상황이다. 유럽 - 보다 정확히는 서유럽, 특히 독일과 프랑스-에서 경제주의는, 주로 유럽의 자본주의가 제국주의 단계에 돌입하는 시기의 유럽의 사회민주당들과 대체로 동일한, 오랜 역사를 갖고 있다. 유럽의 대부분에서의 경제주의는 러시아에서처럼 투쟁되어진 적이 없기 때문에, 유럽의 혁명적 노동운동이 소련 공산당의 경제주의적 테제들을 아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다는 것은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오늘날 사회주의 건설에 있어 경제주의적 문제설정은 (최소한 1920년대 후반에 존재했던 형태들에 대해서는) 적어도 두 가지 이유에서 심각하게 동요되어 왔다. 중국에서 발생한 상황은 생산력발전의 낮은 수준이 사회적 관계의 사회주의적 전화에의 아무런 장애물이 될 수 없으며, 사회적 불평등을 악화시키면서 원시적 축적의 형태를 반드시 통과할 것을 요구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 등을 입증하였다.
중국의 예는 사회주의 사회의 물질적 기초를 무엇보다 먼저 건설하고, 이로써 보다 높게 발전된 생산력을 공고히 하도록 사회적 관계의 전화를 나중으로 미루는 것이 필연적(사실 이는 위험하기까지 하다)인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중국의 예는 상부구조의 사회주의적 전화는 반드시 생산력 발전을 동반하는 것이며 이러한 전환은 실질적인 사회주의적 경제발전의 조건이 된다는 점을 보여준다. 이는 또한 이러한 방식으로 전화가 성취될 때, 산업화는, 소련에서 발생했던 것과는 반대로, 노농동맹을 심각하게 위협한 조치였던 농민으로부터의 징발을 필요로 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사회주의 건설에 있어 경제주의적 문제설정이 동요한 두 번째 이유는 경제주의적 테제들이 그것의 '노골적인' 성격으로부터 유래되는 주장들로부터 제기한 논쟁들의 '사실들'이 실질적으로 소멸했기 때문이다.
소련이 경제적으로 취약하고, 단지 평범한 정도의 산업발전을 달성하는 한, 이러한 소련의 경제적 취약성은 경제주의적 관점에서 보면 소련이 획득한 정치적, 경제적 사회관계 안에서 맑스와 엥겔스, 레닌이 사회주의에 대해 언급한 내용들과 모순되는 것으로 여겨질 수 있다. 경제주의적 관점은, 소련이 경제적으로 취약해지지 않게 될 때 대중의 표현의 자유에 부과된 억압들이 끝날 것이며, 소득불평등이 사라질 것이며, 간부들과 기술자 등 소수만이 누리는 많은 특권이 소멸될 것이며 넓은 분야에 걸친 억압들이 사라지게 될 것이라고 보는 여지를 남겨둔다. 이는 소비에트 사회의 "부정적인" 특징들이 사회주의 건설의 "물질적 기초"를 건설하기 위해 치러야만 하는 '대가'라고 보고 있으며, 이러한 목표가 달성될 때, 혹은 이에 근접할 때, 현재의 "일시적인" 현상들은 자동적으로 사라지게 된다고 본다. 그러므로 "사실들"은 이러한 경제주의적 문제설정을 정당화하고, (집행체계의 모든 지위를 차지하고 그 지배를 확고히 하기 위한 기구들을 만들어낸) 국가부르주아지의 등장으로 표현되는 계급투쟁이라는 용어로 소비에트 현실을 분석하는 아무런 초점 없는 내용을 허용하는 것처럼 보인다.
오늘날 상황은 매우 다르다. 커다란 경제적 어려움 - 이는 반드시 설명되어야 한다 - 을 겪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래 전부터 소련은 세계에서 두 번째, 유럽에서는 가장 큰 산업국이며 과학과 기술의 많은 분야에서 선진적인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 더구나 소련은 무시할 수 없는 경제적 잠재력을 지닌 밀접하게 협력해온 유럽의 국가들과 국경을 맞대고 있다. 그리고 경제주의가 소련의 '퇴보에 의한 설명으로 주장하려고 했고 따라서 단지 일시적일 것이라고 주장했으며, 전혀 소멸되지 않고 있는 현상들은 아직 유지되어지고 있고 발전해왔다. 축적의 필요에 따라 일시적인 조건으로 부과되었던 특권들은 오늘날 소련은 '공산주의의 물질적 기초의 건설'이라는 주장 속에서 사회관계의 체계의 기본적인 요소로서 공식적으로 인정받고 있다. 소비에트 공산당으로서는 이러한 체계의 해체라는 목표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그들은 오히려 그것의 강화를 추구한다. 소비에트 노동자들이 생산수단의 이용과 생산물의 사용방식, 당과 당원들의 활동에 대해 집단적인 통제를 가할 수 있다는 사실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공장은 '그의' 노동자들과 명령의 관계를 갖는 관리자들에 의해 운영되며 이들은 오로지 그들의 상급자에 대해서만 책임을 진다. 농업기업 역시 같은 방식으로 실용적으로 운영된다. 직접생산자들은 그들 자신을 표현할 아무런 권리가 없으며, 오히려 그들은 국가와 당의 고위 관료들 사이에서 그들과는 독립적으로 내려진 결정과 '제안'에 의례적으로 찬성하기를 요구받을 때에만 자신들의 의사를 표현할 수 있을 뿐인 것이다.
소비에트 기업들의 경영을 지배하는 규율은 점차 '발전된' 자본주의 국가들의 내용을 모방하게 되었으며 많은 소비에트 관리자들은 미국과 일본의 비즈니스 스쿨에 경영을 배우러 갔다. 증대되는 사회주의적 관계로 여겨졌던 것들은 핵심적으로 자본주의적인 관계를 낳았으며, '경제계획'의 뒤에 숨겨진 것은 자본주의적 축적의 법칙, 따라서 어떻게 생산수단을 활용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이윤의 법칙이었다.
생산자들은 여전히 생산수단의 가격을 맞추기 위해 일하는 임노동자였고 국가부르주아지에 의해 관리되는 집합자본으로서 기능하였다. 이러한 부르주아지 형태는, 맑스의 자본가 계급에 대한 정의 사용해보면, 다른 자본가 계급과 마찬가지로 "자본의 하수인" (functionaries of capital) 부대였다. 권력을 가진 당은 노동자들에게 단지 이러한 사회적 관계의 막연한 복원만을 제시했다. 사실상 이는 "자본의 하수인"의 당이었으며, 국내적, 국제적 수준에서 그러한 방식으로 움직였다.
이러한 사실에 직면에서는 어느 누구라도 소련에서의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성과가 공고화-더 정확히는 확장-되기를 빌었던 희망을 버리게 될 것이다. 오늘날 소련이 어떠한 과정을 거쳐왔고(what the USSR has become) 어떤 방식으로 전화했는가(by way of transformation)를 명확하게 평가함으로서 왜 이러한 희망이 무너졌는가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것이 이 책의 두 가지 목표이며 이를 규명하기 위해서는 몇가지 원인들을 추적할 필요가 있다.

II. 현존하는 소련에서의 사회적 관계 및 그것이 형성된 토대의 성격 규정의 필요성

이 작업이 필요한 첫 번째 이유는 사실을 직시하기를 원치 않는 이들이 여전히 많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여전히 소련을 사회주의로 규정한다. 이는 노동자들의 계급투쟁에, 특히 선진국에서의 투쟁에 중대한 영향을 준다. 이러한 나라들의 노동자들의 눈에는, 가장 전투적이고 자본주의 폐절의 필요성을 절감하는 이들에게조차도 소비에트 노동자들의 대부분이 선망의 대상으로 비쳐지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그들은 소비에트의 예를 떠올리면서 자본주의의 대안으로서 제시되는 것이 정말로 대안은 아닐 것이라는 우려를 갖게된다. 따라서 서구 공산당의 지도자들은 소련을 여전히 "사회주의 조국"으로 주장하는 한편, 동시에 그들의 국가에서 그들이 제시하는 사회주의는 소련에서 존재하는 것과는 다른 것이 될 것이라고 노동자들에게 단언한다. 어떻게 그리고 왜 이러한 차이가 존재하는가에 대한 설명은 다소 피상적이며 - 기껏해야 예컨대 "프랑스 인은 러시아인이 아니다"라는 식의 근거 없이 주장되는 민족의 심리적 요인과 관련한 설명 - 어떠한 정치적 분석과도 관련이 없다. 그러므로 그들은 단지 이해하기를 원하는 이들만 납득시킬 뿐이다: 나머지는 소련=사회주의라는 등식에 의해 사회주의로부터 멀어진다.
왜 소련이 현재의 형태로 되어왔는가 하는 것을 이해하는 것 그리고 소비에트 역사에서 단순히 '러시아적'인 면과는 독립적인 설명을 찾아내는 것이 매우 중요한 두 번째 이유는 이러한 "왜"라는 질문이 소련을 사회주의로 규정하는 공산당들의 '공식 맑스주의', 곧 제 2 인터내셔날의 경제주의적 유산에 질곡되는 어떤 맑스주의(a Marxism)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사회주의를 위한 이데올로기 투쟁의 핵심적인 측면의 하나는 항상 경제주의 (그것의 우익적 형태건 좌익적 형태 건)에 대하여 투쟁해왔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왜 소련이 현재의 형태 - 특정한 유형의 자본주의 국가 - 로 되어왔는가를 분석할 때, 우리는 경제주의가 부르주아지 사회세력이 이러한 진화과정을 조장하도록 허용했다는 점을 명확히 인지해야 한다. 왜냐하면 이것이야말로 혁명가들과 이데올로기적으로 무장 해제된 소비에트 노동자들을 오도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소련이 경험해온 변화들과 이것들이 이루어져온 투쟁들에 대한 분석은 그 함의에 있어 대단히 시사적이다. 이러한 투쟁들 속에서 논쟁이 되어온 것은 정확히 선진국의 노동운동에서 여전히 널리 유포되어 있는 관념들이다. (이것의 역전된 형태는, 즉 다양한 형상의 좌익주의(leftism)는 또한 후진국들의 혁명운동에서 종종 나타나곤 한다) 따라서 소련의 경험으로부터 주어진 실례를 통해 가능한 구체적으로 그러한 관념들이 유도한 오류를 분석하는 것은 사회주의로부터 그러한 관념들을 제거하기 위해 투쟁하려는 이들에게 '부정적인' 교훈을 제공하지 않을 수 없다.
소련에서 발생해온 것, 그리고 발생하고 있는 것에 대한 분석은 수정주의 당들의 당원과 지지자들에게 특별한 중요성을 갖는다. 그러나 사실상 이러한 분석들은 소련의 과거를 이해하지 못하는 그들의 무능력에 의해 이데올로기적으로 "마비되어" 있으며 따라서 소련의 현재 또한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마비"에 대한 한가지 표현은 "개인숭배"에 대한 공허한 공식화에의 호소이거나 또는 '사회주의 조국'에의 충성을 계속 선언하면서 소련에 대해서는 다소간 거리를 두는 태도이다.
그러한 공식화와 태도는, 종국적으로는 개량주의와 수정주의적 실천에 문제를 제기하는 판단에 의해 비로소 명확해질 수 있는, 보기보다 깊은 이데올로기적 위기를 증명하는 것이다. 그러한 판단은 소련의 과거와 현재를 이해하려는 노력에 의해 강화될 필요가 있다. 그러한 시도 없이는 역사적 진실을 봉인하는 도식들에 갇힌 채 실패하고 말 것이다. 수정주의 지도자들은 그러한 사고를 두려워하며, 바로 이것이 소련의 구체적인 역사에 대한 비판적 사고의 표시가 있을 때마다 우리가 반소비에트주의(anti-Sovietism)의 상투적 어구들을 듣게되는 이유이다. 이러한 상투적 어구들의 유일한 목적은, 수정주의 당의 당원들과 지지자들이 치명적인 질문 - 즉 프롤레타리아와 인민의 투쟁이 의회 개혁주의와 어떠한 정치조직과도 독립적이라고 주장되는 노조의 투쟁, 자발성에의 숭배라는 세 가지 내용이 아닌 다른 어떤 것을 이끌어 내도록 하는 것 - 을 제기할 수 없도록 하는 것이다.
물론 소비에트 현실, 그 과거와 현재에 대한 분석은 이데올로기적 설명을 산출하는 데 유용한 유일한 요인이며 따라서 노동운동과, 특히 오늘날 세계 대부분에 널리 유포된 경직된 맑스주의를 그 구속된 영역으로부터 구출해내는데 공헌할 수 있다. 그러나 다행히도 다른 요인들이 역시 존재한다.
이러한 요인들 중 하나는 (거대한 국제통화위기로 시작되고 있는) 경제적인 지평 및 (이전에 자본주의에 의해 강요된 억압을 인내하는 것을 거부하는 선진국의 많은 사람들, 특히 노동 계급의 청년층과 학생, 여성들로부터 보여지는) 이데올로기와 (많은 후진국들에서의 민족적, 혁명적 투쟁의 등장으로 나타나는) 정치의 지평, 양 측면에서 자본주의 자체의 위기 악화이다.
인민들의 투쟁과 그것의 방향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또 다른 요인은 소련의 실패와는 달리 중국의 사회주의 건설이 보여주는 긍정적인 교훈이다. 어떻게 문제들이 해결되는가를 보여주는 거기서의 삶 - 순수한 맑스-레닌주의 당에 의해 지도되는 대중들의 투쟁을 의미하는-은 사회적 관계의 사회주의적 전화로서 나타난다. 따라서 맑스-레닌주의는 신선한 활력을 발견해왔고 오로지 사회적 실천을 통해서만 설명되어질 수 있는 일련의 문제들을 해명하였다. 그것에 의하여, 이미 보아왔듯이, 우리는 오늘날 소련이 경험한 전화의 본질을 명확히 이해할 수 있다.
보다 명확하게, 경제주의적 문제설정을 거부함으로서 우리는 소련에서 발생해온 일이 계급투쟁 과정의 결과임을, 즉 볼셰비키 당이 불완전하게 지배한, 더구나 대중적 힘을 결집시켜내지 못하고 매시기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지원할 수 있는 사회적 세력과 명백히 적대적이거나 단지 중립적인 태도를 취할 세력 사이의 분명한 구분을 판단해내지 못함으로서 시간이 지나면서 더욱 통제력이 약화되기조차 한 과정임을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러시아와 소련에서 진행된 계급투쟁 속에서 프롤레타리아트는 심각한 패배로 고통받았다: 그러나 프롤레타리아와 농민의 투쟁은 지속되고 있으며, 필연적으로-얼마간의 지연 후에 그리고 기복을 거치면서-소비에트 공화국의 노동인민들은 그들의 힘을 회복하고 사회주의 건설을 재개하는데 이르게 될 것이다.
― 197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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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국제 이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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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핵무기 한반도 전쟁위기 비핵화